저 앞을 봐요.
하얀 세상을 달리고 있는 아이가 있어요.
하얀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해요.
아이는 이 하얀 세상이 마음에 드나봐요.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아이를 하얗게 보는 거죠?

 

 

"워매 저게 뭐시당가!?"

호들갑 속에서도 익살스러움은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것인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릴 사람이 있을 법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러한 웃음의 여유를 주고 싶어하는 것 같진 않아보였다. 제 옆에서 열심히 커다란 날개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호들갑을 떠는 전서구와 그와는 달리 아무런 말 없이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는 퍼블리를 보면 극과 극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지만 얼이 빠져있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창 밖의 풍경은 이제까지 그들이 봐왔던 것이 아닌데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입은 열고 있지만 하나의 입에선 나오는 말이 없었고 하나의 부리에선 그다지 도움되지 않는 호들갑만 쏟아질 뿐. 그런 그들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묵묵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열심히 움직이던 녹색 빛이 진정이 되었는지 움직임을 멈추지만 어둡게 가라앉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아보였다.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기색이 만연한 눈으로 퍼블리는 자신들을 데려온 사람을 바라본다.

"우선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우리도 지나가다 발견한 것 뿐이니까."

우리라는 말에 가라앉은 눈이 살짝 크게 떠지더니 그제야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시선이 눈에 들어왔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 위의 두건을 두어번 쓸어내린다. 그 옆에선 진정이 되었는지 아니면 호들갑을 떨다가 지친건지 숨을 몰아쉬며 날개를 늘어뜨린 전서구가 제 일행처럼 크고 동그란 눈을 데룩 굴리며 시선들을 의식한다. 물론 저들을 도와줬다고는 하나 어떤 사람인지 모를, 게다가 한명이 아닌 다수의 시선을 받은 그들은 마음 한편으론 작은 경계심을 세우기 시작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호기심이 우선이었다. 바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두운 방안에서 각각의 빛을 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그들은 조심스레 탁자위에 자리잡은 등불을 들어올린다.

"어..언데드?"

칙칙한 색의 피부를 지니면서 그중의 몇몇 신체일부가 없는 그들은 영락없는 언데드였다. 다만 언데드들을 봤다는 사람들의 말과 제 기억에 언데드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상상과는 다르게 순한 눈을 굴리며 등불을 들어올린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은 들려온 말과 떠오른 상상 속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얼빠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실례였음을 깨닫고는 잽싸게 등불을 내린다. 그와 동시에 방금전까지 제 눈에 담아뒀던 칙칙한 색에 둘러싸인 순한 눈이 코 앞으로 와있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뒤로 물러나는 반응에도 상관없이 덧니가 듬성듬성 박혀있는 입이 보기 좋은 둥근 선을 그린다. 그런 입과 마찬가지로 둥그런 순한 눈이 함께 자리잡으니 누가 그들을 나쁘게 볼 수 있겠는가.

"인간 보는거 오랜만이네!"

"오랜만! 오랜만!"

목소리를 모아 함께 외치는 그들은 동화를 듣는 어린아이들처럼 해맑았다. 머리속에 자리잡던 언데드에 대한 편견이 제 모습을 감추는 건 생각보다 오래지나지 않았다. 자잘하게 남은 경계의 잔해는 따뜻하고 작은 바람만 다시 한 번 불어온다면 그대로 날아가버려 돌아오지 않으리라.

"심하게 경계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바깥에 우리 인식이 많이 흐릿해졌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자 다른 언데드들과는 달리 무거워보이는 갑주를 입고있는 덩치가 제법 큰 언데드였다.

"아, 그게...언데드들이 모습을 감춘지 오래됐다고 들었는데..."

"모습을 감췄다기엔 애매하지만...검은 전쟁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거야?"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질문에 퍼블리는 그제야 의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 전쟁은 그들의 구역에서 한 때 가장 유명했던 사건이었다. 다만 꽤나 오래 전의 사건이기도 했고 지금은 한창 이곳으로 들어온 정원지기에 대한 소문이 가장 큰 사건이나 다름없었기에 오래 된 사건은 자연스럽게 묻혀져버렸다. 더군다나 자신은 그 사건에서 살았던, 그리고 기억하는 세대가 아니었기에 그저 어른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듣고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물론 바닷가로 쓸려온 조개가 그 위로 다가오는 모래들에 묻힌다해도 그것을 눈에 담은 사람들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간혹가다 나이먹은 어른들이 다시 한 번 실감 못할 그 이야기를 꺼내놓기에 완전히 묻히진 않았다. 언데드들이 모습을 감춘 것 또한 그 사건 때문이리라.

"그래, 정원지기가 왔다고 했지? 확실히 케케묵은 옛날 얘기들보다는 가까운 얘기가 더 큰 법이니까."

"에이, 형님! 케케묵기는 커녕 몇십년밖에 안 된, 완전 시퍼런 얘기구만!"

"그건 우리한테나 그렇지 짜식들아!"

투박하지만 그들간의 정이 잔뜩 담겨있는 말들이 오가는걸 본다면 그들은 도저히 검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평범한 정원의 주민이 아닌가. 어른들의 이야기는 전부가 믿을게 못 되지만 상당한 분노가 담겨있으면서도 어딘가 슬픈 구석이 하나씩 담겨있던, 그들에 한해선 너무나도 진짜같은 이야기를 떠올리면 차츰 혼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과연 이야기로 이루어진 멀리 느껴지는 진실성이 담긴 어른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기억을 믿어야 할까, 제 눈으로 새겨지는 그들의 모습으로 인한 기억을 믿어야 할까. 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소란은 얼마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가 이어지고 오랜만에 발을 들인 정원지기의 이야기가 묻혀지겠군."

분위기가 가라앉는건 순식간이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용히 입을 다무는 모습은 약간의 공포와 날아가버린 경계를 돌아오게 하는데 탁월했다. 그 둘을 쥐고 있는 긴장은 일어난 채로 쉽사리 몸을 비켜주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적막까지 끌어 주변을 짓누른다. 숨소리조차 쉬이 들려주지 않으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그들 사이로 그들이 아직까진 흐르는 시간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제 몸을 흔드는 등불 속의 작은 촛불은 꺼질 줄 모르고 계속해서 빛을 낸다. 그리고 누군가가 적막을 마저 잡아 끌어내린다.

"저 바깥의 믿을 수 없는 상황이 검은 전쟁의 원흉이다."

담담하게 무거운 분위기를 끌어내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슬퍼보인다.

 

 

"우와아앙!"

"그렇게 신기하세요?"

"온통 까매!"

창문에 딱 붙어서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제법 큰 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다. 즐거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그의 시선을 같이하며 창 밖 너머로 눈을 돌린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조금 어두워진 낯빛은 어린아이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등불은 아이보단 그에게 가까이 있었기에 아이의 표정은 등불조차 비출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창 밖 너머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터라 아이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그 누구도 볼 수 없던 표정을 순식간에 지워버린 아이는 조심스럽게 등불을 들어올리며 그에게 다가간다.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엔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로 인해 우연히 만났지만 집으로 데려온 건 분명 자신의 선택이었고 해코지를 당한다 해도 현재 상황에선 그 누구도 도와주러 올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절대로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거라는 걸 믿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종종 이곳으로 내려온 손님. 매번 자신의 나이 많은 친구들과 어느날 갑자기 떠나버린 부모님이 이야기해주곤 했던 손님.

"용사님."

부름에 응답하듯 머리가 한 쪽으로 기울며 달려있는 푸른 머리카락들을 흔든다. 부름에 대한 작은 의문을 표하는 그를 바라보며 아이가 말한다.

"저 밖의 상황이 무섭지 않나요?"

다가오는 물음에 녹색 빛이 두어번 깜빡거린다. 여전히 두려움은 담겨있지 않았다.

"아깐 온통 하얀 데에 갔다왔어!"

"하얀 데요?"

저 바깥같은 곳이 더 있단 말인가. 이번엔 하얀색으로.

하지만 아이는 단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곳이다. 물론 지금 또한 처음 겪어보고 있다. 만약 날이 지나고 또다시 제게로 나타난다면 전혀 반갑지 않으리라. 아이는 또다시 어두운 낯빛을 꺼낸다. 이번에는 등불이 그 표정을 비추고 그는 그 표정을 보게 된다. 아이의 표정에 그는 또다시 의문을 꺼내려고 했지만 아이가 말을 꺼내는 것이 먼저였다.

"어른들이 그러는데 옛날에 제 친구들이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한가지 못 된 짓을 했대요."

그리고 어른들이 말하는 못 된 짓은 바로 저거예요.

아이의 시선과 함께 그는 다시 창 밖 너머를 바라본다. 그 많던 풀도 나무도 하다못해 작은 벌레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바깥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이 까맣다.

사람도 집도 달빛도 없이.

 

 

"인간들은 우리들의 짓이라고 몰아세웠지."

자신조차 비추지 않는 저 검은 공간을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도 실종되는 인간도 몇몇 있었고."

호기심은 크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데에 대한 두려움보다 클까?

"우리들은 뭉쳐다니는 데다가 그리 멀리 가지 않아서 사라지는 일은 없었어."

호기심의 대가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뿌려놓고는 유유히 제 할일을 계속한다.

"의심 받기는 딱이었지."

두려움은 다른 것들도 불러오곤 했다.

"그...리..고....쫓...겨..났...다....."

두려움으로 인해 나타난 의심과 분노의 화살은 사정없이 그들을 찔러대기 바빴다.

"우리는 물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까 물 천지인 바다는 우리를 가둬두기엔 제격이었겠지."

그리고 그들은 애써 상처를 감춘다.

"우리가 바다로 쫓겨났어도 밤은 돌아오지 않았어."

두려움은 애써 그 자리를 벗어난다.

"신성 녀석들이 끈질기게 우리를 몰아세우더라."

남아있는 두려움은 화살을 더 세게 누른다.

"그렇게 밤은 몇 달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너희들의 손은 어디로 향해있니?

방 안은 고요하다. 하나의 사건에서 나온 두가지의 이야기는 이리저리 엇갈려져 있었다. 하나의 이야기는 믿고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몰아세울 순 없다. 왜냐하면 진실을 아는 자들은 듣는 자가 아닌 이야기를 하는 자들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이야기를 전부 믿지 않기엔 엇갈린 두 이야기가 너무나도 굳게 머릿속에 자리잡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검은 전쟁의 원인이 다시 나타났다. 자신들은 더이상 어른들이 말해주는 머나먼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경험자가 되어버렸다.

"해가 지면 사람들은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보다시피 저 밖을 돌아다닐 만용을 부릴 자들은 얼마 없었고 그마저도 사라졌어. 행여나 들어오지 못 한 가족들이 있을까봐 찾아다닐 수 있게 늘 등불을 지니고 다녔었지."

하지만 그 등불을 지닌 사람들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돌아오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만 돌아오지 못 한 사람들도 많았어. 어쨌건 긴 싸움 끝에 우리는 바다로 물러났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그럼 왜 정원지기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

"그 정원지기 마저도 저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원지기는 패치가 오기 전까지 마지막 정원지기였다.

"고귀한 정원지기가 사라졌으니 신성녀석들은 사고사로 위장했어. 더이상 땅을 넓힐 수 없는 구역인데다 저런 사람 잡아먹는 밤이 찾아온다는 걸 알면 이곳은 완전히 내쳐지게 되겠지. 농사야 짓고 살 수 있는데다 여긴 넓으니까 먹고 사는덴 지장이 없지만 정원지기를 등에 업은 신성녀석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게 전부 다 무너지는 상황이니 비밀로 부쳤다. 애초에 넓힐 땅이라곤 다른 구역들이 다 잡아먹고 둘러싼 상태니 정원지기가 여기로 올 리는 없었지만."

그런 그들의 간절함이 제법 하늘 높이 올랐는지 정원지기가 나타난데다 용사까지 발을 들였다. 아마 살판이 났겠지.

"시간도 꽤 흘렀고 사람들도 점점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아직까지 남아있으니 말은 돌긴 돌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희들 반응을 보니 제법 잠잠해졌겠네."

하지만 이젠 다시 떠오르겠군.

"잠깐."

불쑥 부리에서 튀어나온 한마디에 그자리의 모든 시선이 말을 꺼내놓은 전서구에게로 향한다.

"그럼 그 정원지기님은 어떻게 알고 계신거야?"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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