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후! 팔 빠지는 줄 알았네~”

괜찮아?”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아니카를 반기는 건 팔에서부터 시작된 근육통이었다. 하루 종일 들고 다닌 것도 모자라 비록 나눴다고는 하지만 바구니를 꽤 채울 정도의 빵들을 집까지 들고 오느라 평소보다 팔을 많이 쓰는 바람에 팔 근육이 무리를 했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 아니카의 팔을 주물러주기까지 하는 퍼블리는 굉장히 쌩쌩해 보였다. 매일 근육이라며 놀리듯이 불렀지만 정말 제 친구는 온 몸이 근육인 게 아닌가 싶어 묘한 눈으로 바라보니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 챘는지 퍼블리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어머 우리 근육이 눈치가 정말 많~이 늘었네?”
눈치고 뭐고 간에 방금 전처럼 매일 근육이라고 부르면서.”

투덜거리던 퍼블리는 그렇게 말하곤 근육통이 난 팔을 주물러주는 걸 멈추고 부엌으로 갔다. 아니카는 다시 그대로 누우면서 방문을 넘는 퍼블리를 향해 외쳤다.

얼음 동동 띄워서!”
눈을 감은 아니카의 귀에 곧이어 물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꽤 길어지는 소리에 퍼블리가 얼음을 가득 담아오려나 싶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길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물소리는 진즉에 끊겼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이번엔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깜짝 놀란 아니카가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니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물건들이 흔들리는 걸 보게 됐다. 으악!하고 부엌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둔탁한 소리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퍼블리가 넘어지고 컵이 깨진 듯 했다. 아니카는 저러다가 다치겠구나 싶어 얼른 일어나 가보고 싶었지만 흔들림이 꽤나 심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애써 다칠 각오를 무릅쓰고 일어났건만 제대로 다 일어서기도 전에 흔들림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이틈에 아니카는 재빨리 부엌으로 뛰어갔다.

퍼블리! 괜찮아? 안 찔렸어?”
난 멀쩡해!”

퍼블리는 다친 데가 없어보였지만 바닥은 멀쩡하지 않았다. 컵이 깨져있는 건 당연했고 물통도 함께 쏟아졌는지 바닥이 온통 물바다였다. 크게 흔들린 거에 비해선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들이 퍼블리가 들고 있던 컵과 물통뿐이었고 그 외의 물건들은 전부 멀쩡했다. 아니카는 안도와 심란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고 깨진 파편들을 줍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물을 닦기 위해 햇빛 드는 창가에다 널어놓은 빨래들로 다가가 걸레를 집어들고 부엌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창밖을 보기 전까진.

..아니카!! 하늘이 깨졌어!!”
으음? 또 깨졌어? 왕궁 쪽에서도 한 번 깨지니 관리하기 힘들었나보네? 아님 축제라서 놀다가 방심했나? 조만간 또 수리하겠네~”

아니 그게 깨진 게 저번처럼 깨진 게 아니고 하늘이 완전히 부서질 기세야! 하늘이 온통 쩍쩍 금이 갔다고!”

퍼블리의 호들갑에 얼추 다 주운 파편들을 쓰레기통에 넣은 아니카는 곧바로 퍼블리 옆으로 가서 창밖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이런 미친.”
퍼블리는 호들갑을 떤 게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고 사실만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지금 하늘의 상태는 꽤나 심각했다. 용케 구멍은 안 뚫렸지만 쩍쩍 갈라진 금이 온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의 매끈한 부분이란 거의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겨우 남아있었다. 저것들이 완전히 깨져서 구멍이 뚫리면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푸른색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이 아슬아슬했다. 저 상황을 목격한 건 둘 뿐만이 아니었는지 집 안에 있었던 마녀들이 밖으로 나와 직접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고 있었다.

뭔 일이야?!”
미친! 하늘이 깨졌어!!”

종말이야? 종말인 거야?!”

안 돼애애애애!!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게 많다고오오오!!!”
상대적으로 더 날뛰는 마녀들이 많아서 그런지 퍼블리와 아니카는 금방 진정했다. 우선 집에 그대로 있을 건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자세히 살펴볼지 고민하다가 가위바위보로 퍼블리가 이기면 밖으로 나가고 아니카가 이기면 그대로 집에 있기로 결정했다. 이긴 건 퍼블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어.”

복잡한 건 물론이고 오늘은 원래 축제 둘째 날이었다. 첫날보다 더 돌아다니는 마녀들이 많고 행사가 다양한 날이었는데 이런 사태가 벌어지니 온 거리가 혼란스러운 건 당연했으니 길거리가 복잡한 걸 넘어서 단체적인 난동수준인 건 예상한 바였다. 결국 둘은 마녀들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지만 그런 곳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둘이 있었던 집 안 외에는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늘은 아까와 다를 게 없었고 마녀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계속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알아볼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결국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순간 시간이 멈춘 듯이 모든 마녀들이 그대로 굳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귀로 들린 게 아닌 머릿속에서 울렸고 혹시 자신한테만 들렸나 싶어 힐끔거리며 옆에 있는 마녀를 보는 마녀들부터 너도 들었냐며 같은 일행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는 마녀들까지 조금씩 나타나고 움직이며 곧이어 다시 소란이 일어났다. 이로써 한 마녀만이 아닌, 적어도 밖으로 나온 모든 마녀들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목소리 전달 마법을 한 마녀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목소리를 들은 마녀들은 모두 놀라워하거나 감탄했다.

[아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사실 오랜만에 써보거든요. 혹시 들리나요?]

그 말에 마녀들은 마법을 쓴 당사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어찌해야하나 눈만 굴리고 있거나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계속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확인하던 목소리는 난감한지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들려요!”
그러다가 한 마녀가 소리쳤고 그 마녀를 시작으로 하나둘 씩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마녀들이 소리치게 됐고 열 번쯤 반복했을까 드디어 닿았는지 이번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머금은 어린 마녀의 목소리에 몇몇 마녀들은 미소를 지었지만 다른 마녀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게 단순한 마법이라도 이렇게 다수에게 거는 건 어른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목소리의 주인이 궁금증을 풀어주듯 바로 말을 전달한다.

[그럼 이제 제 소개를 할게요. 제 이름은 메르시, 이 왕국의 공주입니다!]

Posted by 메멤
,

때마침 마녀들이 퍼블리 앞을 지나가면서 시야를 가린 덕에 그대로 잘못 본 거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녀들 사이 틈을 비집고 다가가보니 메르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똑바로 퍼블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 바로 다가선 퍼블리는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메르시를 보고 있었을 뿐이고 메르시는 그저 웃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쪽은 태평하고 한쪽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시선교환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니카는 결국 가까이 다가와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우리 근육이 새로운 친구 있었구나? 그래서 누구야? 얼른 새 친구 소개시켜줘.”
하지만 질문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카에게 공주에 대해 얘기는 했었지만 그 공주가 어떻게 생겼느냐 공주의 이름이 무엇이냐 세세하게 말하진 않았었다. 지금 아니카가 공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자기들보다 더 어리고 계속 잠들어있어서 더 자라지 않은 어린 마녀라는 거 외엔 없었다. 그렇다고 길 한복판에서 공주라고 속삭이면 되지 않을까 해도 당사자인 메르시가 섣불리 다른 마녀에게 제 정체를 밝혀도 된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어쩌다 알게 됐다고 얼버무리기엔 어쩐지 미안했고 눈치 빠른 아니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퍼블리보다 메르시가 한 발 더 빨랐다.

저는 메르시예요. 저번에 퍼블리 언니가 저를 도와준 적이 있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왔어요.”
아니카는 그렇구나 하고 얌전히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여기 다른 마녀가 있었다면 둘이 얘기 나누라고 물러난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퍼블리는 깨달았다. 돌아보자 바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아니카와 짧은 시선교환을 나눴다.

눈치 챘구나.

눈치 챘어.

다시 메르시를 본 퍼블리는 무릎을 살짝 굽혀 메르시와 눈을 마주했다. 메르시는 바로 퍼블리에게 다가가 새어나가 누군가가 들을까 바로 손을 모아 작게 속삭였다.

찾다가 지치면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어요. 어쩌면 모든 비밀이 담겨있을지 모르거든요.”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메르시는 바로 뒤돌아 마녀들 사이로 사라졌다. 무릎을 다시 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보고 있던 퍼블리의 정신을 되돌린 건 어깨를 툭툭 두드린 아니카였다.

그래서 뭐래?”
피리가 비밀상자 열쇠래.”
다시금 몰려오는 마녀들의 물결에 퍼블리와 아니카는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 빵을 만든 마녀들이 바구니채로 나눠주는 빵들을 받아들었다. 빵을 하나 꺼내 먹던 아니카는 저기 마녀들이 빵을 받고 있네라는 어투로 말을 꺼낸다.

공주님이 큰 그림 그리고 있었던 걸로 다시 잠들었나 아님 탈출했나 궁금했던 건 해결됐네.”

물론 그 큰 그림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퍼블리는 대답 대신 빵에 입을 넣었다. 아니카도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퍼블리가 다섯 번째 내밀어지는 빵바구니를 거절할 때쯤 머리 위에서 크게 푸드덕 날갯짓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아까 하늘에서 봤던 전서구가 이번엔 반대편으로 빠르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퍼블리는 새삼 저렇게 바쁜 비둘기를 붙잡아서 태워달라고 했구나 싶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편지길래 축제 때에도 저렇게 바쁠까?”
축제라서 더 바쁜 거 아닐까?”

축제는 작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기묘한 묘기를 선보이는 마녀들과 날아드는 비둘기들. 저 한구석에선 색깔열매를 이용해서 구운 빵들이 눈길을 끌고 있었는데 저마다 화려한 색을 자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무지개 빵이었다. 화사하고 화려해서 그 길을 지나가던 많은 마녀들이 무지개 빵을 집어 들었지만 퍼블리는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다.

자꾸 얘기 꺼내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그래서 왜 추억이 빵인지 혹시 이유 알아냈어?”
때마침 빵을 넘기던 퍼블리는 그대로 사레가 들릴 뻔 했다. 함께 빵파티를 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한 흑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장소가 장미정원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아니카가 주는 사과주스로 겨우겨우 진정한 퍼블리는 그대로 말해줬다.

근데 오히려 반대일 것 같은데?”
반대?”

원래 집 앞마당이었는데 가져오는 장미들 둘 데가 없어서 장미정원이 거기까지 넓어진 거 아냐?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장미를 모았다고 선언한 게 50년이 안 지났어.”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공주는 물론이고 다른 얘기들도 꺼내지 않았다. 여전히 바쁘게 날아다니는 전서구가 그림자로 제 존재감을 여러 번 드러냈지만 둘은 그 때마다 올려다보고 동시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대회에 가까이 다가가 구경하기로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그랬듯이

비둘기판이네.”
깃털 떨어진다~!”

대회용으로 나온 빵들에 날아드는 비둘기무리와 그런 비둘기들을 손을 흔들어대며 내쫓는 만든 마녀들, 그리고 역시나 하면서 웃음 반 진부함 반에 뒤를 도는 관객들. 진행자는 이제 포기했는지 비둘기들도 이렇게 날뛰는 빵들이라며 빵의 위험성이라는 농담을 꺼내고 있었다.

그런 광경들을 옥수수 튀긴 것 대신 빵을 씹으며 구경하고 있던 퍼블리와 아니카는 폭신하고 매끈한 감촉이 아닌 까끌까끌한 감촉에 손을 바라봤다. 어느새 바구니는 텅 비어있었다.

더 받으러 갈까?”
아니카는 여전히 바구니째 나눠주는 마녀들을 가리키며 물었고 퍼블리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견과류나 옥수수가 박혀있는 빵들을 받아온 아니카는 마실 것도 찾으러 가자며 앞장섰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마녀들이 많아서 그런지 술을 내놓는 곳은 없었고 음료수는 꽤나 다양했다.

새삼 생각했는데 그 많은 추억 중에 빵파티가 뽑힌 건 역시 첫째 날은 잔뜩 먹어서 남은 축제를 버티라는 거 아닐까?”
가장 설득력 높네.”
그렇게 해가 지기 전까지 둘은 돌아다니면서 먹고 구경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해가 지고 어둑해질 때 둘은 남은 빵을 나눠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퍼블리는 오늘 축제가 재밌었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Posted by 메멤
,

아니카의 말에 퍼블리는 순간 숨을 멈췄다.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기도 하고 이렇게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귀를 통해 직접 듣는 것도 새삼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런 짓을 한 마녀들이 잘못한 거지 그 결과로 태어난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아니카는 여전히 달고 다니는 웃음을 내리지 않는 걸 보면 퍼블리와는 반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데에 확신을 가까이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퍼블리가 의아해 하며 물어보니

장미정원을 만들 때 왕국의 모든 마녀들이 장미를 모으는데 동참했거든. 그 때 우리 엄마도 당연히 참여했었고 장미 찾아다니느라 눈알 빠지고 허리 휘는 줄 알았다며 그 때 생각만 하면 아득해진다고 엄청 뭐라 그러시더라.”
요컨대 장미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면 반대와 비난은 꾸준히 받아도 밀어붙였을 거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장미를 모은다는 얘기도 나중으로 미뤄져서 지금의 장미정원이 없었을 거라고 덧붙이자 퍼블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장미는 이제 정원에서만 피어나니까 장미를 만들 이유는 더 이상 없기도 하지.”
그러니까 몸 편한 게 짱이라고?”
그렇지.”
이제 금방금방 이해하는 게 기특하다며 쓰다듬는 손길에 퍼블리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아니카를 바라봤지만 손은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퍼블리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그 때 종이에 써져있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자연발생하는 장미를 전부 모으는 건 어렵기 때문에 장미를 만들어 장미정원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일단 그런 종이가 있었던 걸 보면 연구는 진행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결국엔 자연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알아내고 대신해서 장미가 피어날 환경을 준비하기로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 지금의 장미정원이다.

그럼 왜 그 계획이 적힌 종이가 공주 즉 메르시의 책상 서랍 안에 있었던 걸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쓰다듬던 손으로 손가락을 딱딱 튕기는 아니카를 바라보던 퍼블리가 문득 말했다.

나 예전보다 생각을 엄청 많이 하게 됐어.”
그래.”
근데 이상하게 더 이상 안 나가는 경우가 많아.”
그건 아직 네가 몰라서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퍼블리는 조금 울고 싶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 모르는 걸 알고 싶어서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는 중인데 그것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한다니.

일단 네 머릿속에서 굉장한 음모론이 펼쳐지고 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일단 확실한 건...”
아니카는 이젠 좀 진짜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뭘 해도 비밀은 사라진 마법사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퍼블리의 출생의 비밀부터 약새풀까지. 무언가 감춰져있던 비밀이 터지면 모든 진실은 마법사가 감추고 있었고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바로 제 자식인 퍼블리한테까지. 자식의 친구이자 좀 멀게 따지자면 생판 남인 아니카까지도 이쯤 되면 궁금해 미칠 지경에 도달했다.

너희 아빠는 진짜 세상의 모든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근육이 진짜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네, 마음고생 많았어~ 근데 지금도 마음고생을 하고 앞으로도 고생길 훤한 걸 보면 내가 다 마음이 아파~”
그렇게 말하곤 아예 팔을 어깨에 두르며 끌어안을 듯 했던 아니카는 이내 덥다고 하며 바로 떨어졌다. 그런 아니카 덕분에 작게 웃음이 터진 퍼블리는 밀려드는 생각들을 덮어뒀다.

일단 학교를 졸업하면 아빠를 꼭 찾으러 나갈 거니까 이번 축제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 없이 너랑 즐길게. 요즘 너무 나 혼자 생각이랑 고민만 하고 있었으니까 많이 미안했어.”

나는 우리 근육이가 성장한 것 같아서 기뻤는데? 근데 우리 축제 생각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날 퍼블리와 아니카는 아니카의 어머니에게 강화마법을 부탁하러 갈까 아님 약새풀을 캐서 옷에 넣고 다닐까 해가 질 때까지 함께 고민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천천히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던 축제는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작년 축제 때 보존마법을 걸어놓은 빵은 우스갯소리로 내년 축제 때까지 남아있을 양이라고 말했었지만 이번 여름 때까지 한 바구니는 더 남아서 진짜가 되어버릴 뻔했다. 왕국 밖으로 나갈 때 조금 챙겨간 거 외엔 전부 다 그대로 두고 왔었던 데다 생각보다 오래 집을 비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마법사의 보존 마법이었다.

어쩐지 아깝네~ 진짜 1년 찍는 건가 궁금했는데.”
이번 여름에 같이 살게 된 아니카 덕분에 빵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빨라졌고 축제 첫째 날 3주 전에 바구니의 안쪽 끝을 보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천천히 먹어서 1년 채워볼 걸 그랬나?”

그러면 난 첫째 날을 안 즐겼을 거야...”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말하지만 퍼블리는 알고 있었다. 말 속에 아쉬움이 담겨있고 아쉬움 속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걸. 가늘게 뜬 퍼블리의 눈을 마주하는 아니카의 웃음은 매우 당당했다.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기는 자는 당당한 자였다.

축제 첫째 날은 언제나 그랬듯이 갓 구운 빵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마녀들 손에 잔뜩 들려있는 건 물론이고 빵으로 예술을 펼치는 자들도 걷다보면 계속 보일 정도였다.

저기 익숙한 비둘기네.”
마녀 하나는 거뜬히 태울 정도로 커다란 비둘기. 끝끝내 태우길 거부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퍼블리를 태우고 왕국으로 돌아왔던 전서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반가움에 손을 흔들며 전서구를 불렀지만 듣지 못했는지 빠르게 날아가는 모습에 머쓱해진 퍼블리는 손을 도로 내렸다.

작년에는 축제를 즐기더니 올해는 축제 때에도 바쁜가봐?”

그러게...”
손가락 하나로 가려질 만큼 멀리 날아간 전서구를 보던 퍼블리는 지나가던 마녀가 자신과 어깨를 부딪히는 걸 보고 길을 막고 있었구나 싶어 아니카와 함께 옆으로 비켜나려고 고개를 다시 돌리다가 길 건너편의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튀어나온 갈색 앞머리가 인상적인 어린 마녀.

메르시?”

Posted by 메멤
,

아니카. 장미를 만든다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아니카는 이상한 걸 들었다는 얼굴로 퍼블리를 쳐다봤다.
어떻게 생각하고 뭐고를 떠나 그건 불가능한 거 아냐? 장미들은 자연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고 그나마 피어날 환경을 만든 게 바로 그 유명한 장미정원이잖아.”
그러니까 만약에 만들 수 있다면?”

퍼블 리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챘는지 아니카는 눈을 마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려는 건지 신중한 표정을 한 채 느릿하게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같은 반 학생들의 얘기소리가 한층 더 소란스러웠을 즈음에 입을 열었다.

, 너희들 성적표 다 받았지? 망한 애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울고불고 하지 말고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은 축제나 준비하고 있어라.”

공교롭게도 그 순간 저 말과 함께 들어온 선생에 의해 대답은 나오지도 못했다. 아니카는 다음에 얘기하자며 몸을 앞으로 돌렸고 다음 쉬는 시간에는 선생의 수업을 빙자한 축제 얘기 때문에 까먹었는지 나온 말은 축제의 식물부에 관한 얘기였다.

얘네는 어째 해가 갈수록 기술이 늘어?”
이쯤 되면 왕국 기관에서 기술 연구하는 마녀들이 학생으로 위장한 거 아닐까?”
작년에 꽤나 여러모로 큰 파급을 가져다 준 식물부였다. 물론 가져다 준 당사자들에게 있어선 직접 가서 말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학생들은 내심 식물부 애들이 빨리 홍보를 하러 왔으면 하는 마음에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운 소리지만 식물부 정말 인기 많네.”

인기야 늘 많았지.”
축제는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매일 새로운 걸 맞이하는 듯 한결같이 떠들썩한 반응이었다. 벌써부터 땅따먹기 신경전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학년이 올라가며 선도부에서 나온 아니카는 이제 제가 정리할 일 아니라고 숲 너머 모래바람 구경하듯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보고 있던 퍼블리는 말려야할까 말아야할까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런 일들을 이미 예상했는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능숙하게 사태를 해결하는 선도부의 모습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올해 축제는 왠지 별로 기대가 안 돼.”
그 전부터도 넌 축제 자체는 별로 기대 안했었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들어올 때마다 성적 얘기를 하는 선생들을 몇 번 주목하고 나니 어느새 모든 수업이 끝나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학교를 나가기 전에 점심시간 때보다 햇빛이 더 환하게 내리쬐는 운동장을 보니 새삼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라고 생각한 퍼블리와 아니카는 그늘이 있는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운동장 끄트머리에 짙은 흙 위로 나무들이 일렬로 심어져 있었지만 그쪽으로 가면 운동장을 빙 돌아서 가야했다. 그렇게 운동장 한가운데와 나무그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하던 둘은 그냥 평소대로 한가운데를 쭉 가로지르기로 했다. 아무리 그늘이 있는 곳이라고 해도 빙 돌아가는 건 역시 귀찮은 일이었다.

“...날씨가 정말 재앙인데?”
문제는 아직 시작이라는 거.”
하하 정말 살기 싫어지는 걸?”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학생들 몇몇은 결국 그늘이 있는 데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벌써 더위를 먹었는지 점점 헛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학생 무리들 사이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중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햇빛 아래 더위에서 떠들다간 금세 지쳐버릴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도중 드디어 집이 눈에 들어오자 둘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집에 가까이 가자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냉기가 둘을 반겼다.

으아, ! 으아, 사랑!”

저 하늘의 유리벽이 여기 더위를 가두는 게 틀림없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둘은 몰아치는 시원함에 무릎을 꿇었다. 냉기마법을 건 옷들이 다 소용이 없었다. 지금 둘에겐 시원함 그 자체인 집이 최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날씨가 이렇게 더운 건 이상해...이건 왕국이 망할 징조야.”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니카였지만 어차피 들을 마녀는 옆에 있는 퍼블리 밖에 없으니 거침없었다. 평소라면 난감한 표정을 짓거나 말렸을 퍼블리는 듣는 둥 마는 둥 바닥에 드러누워 시원함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 이성을 빨리 되찾았는지 일어나서 방에 가방을 던져두던 아니카는 손을 씻은 후 부엌으로 가 익숙하게 얼음을 동동 띄운 물통을 꺼내 컵 두 개를 담갔다가 건져올렸다. 그리곤 아직까지 현관문 바로 앞바닥에 엎어져있는 퍼블리에게 컵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얼른 일어나서 손 씻어.”
그 전에 나 물 좀...”
씻은 다음에 줄 거야.”
그 말에 퍼블리는 냉큼 일어나 가방을 두고 손을 씻으러 갔다. 그 김에 세수도 했는지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얼굴과 머리카락을 넘기며 나오던 퍼블리는 아니카가 건네는 컵을 받아들었다.

강화마법 할 줄 알아?”
할 줄 알았으면 오는 중에 진작 했을 거야.”

그럼 너희 어머니한테 부탁하러 가야겠다.”

가는 도중이 많이 괴롭겠지.”
냉기마법 강화에 대해 말하던 둘은 순식간에 컵을 다 비우고 부엌으로 가서 다시 물을 떠서 마셨다. 이제 제법 많이 여유를 되찾은 둘은 의자를 당겨 끌은 후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았다. 얼음을 와드득 씹어 먹던 아니카는 새가 하늘을 날아간다는 걸 말하는 어투로 먼저 말을 꺼낸다.

그래서 넌 만들어진 장미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
어쩐지 확신이 담겨있는 표정과 유리병의 파란 장미꽃잎을 떠올린 아니카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네가 확신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입 안에 남은 얼음조각들을 마저 씹어 넘긴 아니카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퍼블리와 눈을 마주했다.

만들려고 하는 자는 물론이고 그런 걸 생각한 자들도 비난을 피할 순 없겠지. 만들기 위해선 멀쩡히 있는 장미를 파헤쳐야 할 테니까.”

Posted by 메멤
,

축제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직 머리가 어지러운지 다시 누운 마법사는 고개만 돌려 아직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여기 있는 모든 걸 부수고 밖으로 나갈까 싶었지만 힘이 쭉 빠진 몸이 바로 붙잡는다. 이곳에 갇힌 이후론 이젠 있었나 싶을 충동이 잠들었다 깨어나는 새에 점점 더 올라와 마법사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중간에 정신이라도 잃었나 싶었지만 들어오는 햇빛은 아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왔나?”

저를 경계하긴 하지만 듣는 욕은 역시 괴롭죠.”

대답을 듣고 마법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부탁한 입장에서 할 말 치곤 이상하지만 괜찮으신가요?”
자네 말대로 이상한 말이군. 나쁘지 않은 부탁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가야할 곳이 괜찮지 않은 곳이니까요.”

다시 눈을 떠서 바라보니 굳어있는 순박한 얼굴이 바로 들어왔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어차피 다시 가봤어야 했던 곳이네.”
“...당신은 참...대단하네요.”
감탄과 걱정 등 여러 가지 감정이 가득 섞인 말을 들었을 때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진짜 대단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끝냈겠지.”

터무니없는 자책 아닌 자책에 아난타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 때문에 찾아온 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쓸 여유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겹치네요.”
그럼 하루 당기지. 그리고...”
마법사가 오른손을 쥔 채 내밀자 아난타는 두 손을 모아 폈다. 마법사가 손을 놓자 둥글고 매끄러운 감촉이 굴러다닌다.

퍼블리에게 전해주게.”
놓았던 손이 물러가니 무지개 구슬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다양한 일들을 겪고 생각이 넓어지거나 강해지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학교의 시험은 그저 공부가 답이었다. 아무리 퍼블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다양한 일들을 겪고 이겨내서 돌아와도 그건 학교 시험을 대비해 공부를 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나빴던 성적 위로 빠진 수업에다 심란했던 마음까지 더하니 역대 최악의 결과가 퍼블리 앞으로 도착했다.

그래 우리 근육이~ 지금 어떤 심정이니?”
“...지금 내 손의 성적표가 대신 나타내주고 있어.”
마녀의 심정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잖니?”
하지만 성적표는 가능하지.”
내용은 슬프지만 가볍게 얘기하니 조금은 무거움을 덜은 퍼블리는 울면서 자유와 축제를 외치는 같은 반 학생들을 구경했다.

이제 축제가 진짜 얼마 안 남았네...”
그러게.”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그러게.”
그렇게 말하니 겨울과 봄에 있었던 일들이 실은 다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시끄럽고 재잘대는 커다란 비둘기를 만난 것도, 신성지대 감옥에 갇혔었던 것도, 몸이 썩어가지만 유쾌했던 흑기사단을 만난 것도, 장미정원의 작은 집에서 잠들어있던 공주 메르시를 만난 것도 전부 다 꿈이 아니었을까. 1년도 안 지난 일들이 1년이 다 되어가는 일보다 더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익숙해지기 싫었는데 익숙해졌나봐.”
그럴 땐 성적표를 봐.”
확실히 성적표에 적혀있는 결과는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어쩐지 다른 이유로 슬퍼진 퍼블리는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이번엔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공주님은 어찌하실까~?”

어찌하다니? ?”
이번 축제 말야. 하늘 깨진 그 날에 네 얘기 들어보니 공주님은 계속 잠들어 있었고 나는 물론 여기 왕국 살던 마녀들 머리가 좀 이상했다는 것도 일단 나랑 너는 다 알게 됐어. 그러면 이거 그동안 공주님 자고 있었을 왕국 안쪽 상황이 너무 뻔하지 않니?”
그래도 메르...공주님 편이 있을...”

퍼블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니카는 박수를 쳐서 순서를 가로챘다.

공주님이 잠든 게 단순히 1, 2년이 지난 게 아니야.”
자신들은 물론 여기 젊은 선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잠들었을 공주. 굳이 꽁꽁 싸맨 안쪽상황을 파헤쳐보지 않아도 아직까지 땅을 밟지 못한 채 배 위에서 잠든 공주를 생각하는 흑기사단이 모든 걸 보여주고 있었다

솔직히 나같으면 깨어난 후에 적절한 순간 노려서 왕국 밖으로 뛰쳐나갔을 거야.”

금 갔던 하늘은 하루가 지날수록 지우개로 검은 선들을 조금씩 지우듯이 사라지고 결국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깨끗해졌다. 그걸 발견한 아니카와 퍼블리는 같은 반 학생들을 붙잡고 몇십 년 째 어른도 왕도 되지 않는 공주에 대해 물어봤지만 그들은 이상한 점을 눈치 못 채고 축제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역시 빨리 주변에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랬다면 왕궁 마녀들이 우리 얼굴 보러 왔겠지.”

결국 지금 알 수 있는 건 언제 하늘에 박혀있었는지 모를 투명한 결계랑 모순투성이 이야기와 잠들어 있던 공주가 관계되어있다는 거였고 결계가 다시 돌아간 걸 보면 최소한 공주는 깨어난 후에 왕국 밖을 떠나지 않았거나

공주님 너 가자마자 다시 잠들었을지도 몰라.”

“...나 무슨 숨겨진 힘 같은 거 있는 걸까?”
숨겨진 출생의 비밀은 확실히 있잖니?”
파란 장미 꽃잎. 거기에서 태어난 퍼블리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안아들어 키웠을 마법사. 결국엔 원점이었다.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마법사에 아니카도 조금 질린 기색을 느꼈다. 눈에 띌 건 다 갖추고 있는 자인데 정작 뿌린 건 끝이 안 보이는 비밀이다.

자신의 장미를 떠올리던 퍼블리는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깨어난 메르시와 대화하기 전에 서랍에서 꺼냈던 종이뭉치.

“...장미 개발 계획.”

뭉치고 엉킨 실타래를 통째로 쥔 느낌이 들었다.

Posted by 메멤
,

재미없는 진실공방은 이쯤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해야하지 않겠슴까? 우리 패치는 저랑 뭘 하고 싶나요?”
거기서 자네를 빼거나 내가 자네의 목을 직접 꺾고 싶네만.”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너무하다는 둥 자기는 진심으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는데 그렇게 살벌한 말만 하니 슬프다는 둥 마법사에게 닿을 리 없는 말들만 실컷 늘어놓던 치트는 이젠 짜증스런 표정으로도 자신을 봐주지 않는 마법사의 모습에 외면하면 슬프다는 말도 덧붙이곤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우는 소리를 내며 징징대면서도 손가락 틈 사이로 특유의 날카로운 노란빛을 굴리며 마법사의 얼굴은 물론 옷과 손끝,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발목까지도 꿰뚫을 듯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자네 눈알 굴러다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네. 그렇게 눈이 한자리에 계속 붙어있는 게 불편했으면 진즉에 말하지 그랬나?”

평생 한자리에서 우리 패치 볼 수 있게 계속 여기 있어주시겠슴까?”
난 이미 예전에 답을 줬고 자네 고백은 실패했네.”

고백이란 건 아직 마음이 있는 한, 한 두 번으로 끝날 게 아니잖슴까?”

문제는 마음이 한쪽에만 있다는 거고 그럴 경우엔 한 번으로 끝내야 둘 다 서로 아플 일이 없을 텐데 자네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붙들어서 둘 다 아픈 결과를 초래하는군.”

그 말에 치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십쇼, 제 고백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거고 저는 그저 제 방식대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저는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하얀 구름과 선명한 무지개를 걸어놓은 하늘, 따뜻하게 내려오는 햇살, 그 모든 걸 그림처럼 담고 있는 창문, 그 앞에 햇살을 받으며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마법사와 햇살처럼 해사하게 웃은 채 서있는 또 다른 마법사.

달달하고 포근한 연애 소설의 일부같은 이 상황을, 이 순간을 치트는 정말 완벽하다고 느꼈고 패치는 정말 역겹다고 느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고 다음에 일어난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기...패치? 안 그래도 많이 힘들 텐데 진정하시고 의자 좀 내려놓으십쇼. 던지면 우리 패치 체력손해는 물론 다친 제가 한동안 못 올 테니 눈 호강 손실 아님까?”
내 체력손해도 아쉽지만 현재 여기서 들만하고 자네에게 제법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의자밖에 없는 게 더 아쉬울 뿐이고 자네 얼굴을 안 본다면 이만한 이득은 없다고 생각하네만.”
치트는 저번처럼 손을 들어 슥 그어봤지만 마법사는 이제 제법 내성이라도 생겼는지 잠시 휘청거리다가 다시 미간사이를 찌푸린 채 의자를 질질 끌고 오기 시작했다. 한 번 더 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쾅쾅 두드려댔다.

야 이 사시새끼야!! 너 또 X발 일 내팽겨 치고 여기서 그놈의 사랑타령 하고 있지!? 내가 살다살다 일을 성실하게 할 줄은 몰랐다, 이 시X X같은 상사 잡아오는 일을!!”

굉장히 억울한 소리였다. 치트가 마법사 앞에서 우스갯소리로 일도 내버려두고 왔다고는 하지만 사실 다 끝내놓고 오는 길이었다. 다만 다시 밀려오는 일이 끝도 없었을 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대치상황을 어찌해야하나 싶었지만 역시 억지로 버텼는지 팔을 부들부들 떨며 의자를 내려놓고 기대는 마법사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다가간다.

이런 당신의 체질 덕분에 당신을 여기 붙잡아 둘 수 있지만 한 편으론 불안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당신은 이 집을 나갈 수 없고 설령 나간다 해도 이 집에 공급되는 약새풀들은 근처에 잔뜩 만들어뒀지만 결계마법을 쳐놔서 눈으로 찾을 순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 말에 마법사는 픽 비웃으며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내 마법실력을 알고서 그 말을 꺼낸다면...그냥 답을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지. 자네가 두려운 건...”
뒷말은 꺼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치트가 두려운 건 이대로 마법사가 이 나갈 수 없는 집 밖으로 나간 채 약새풀도 찾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비웃음과 함께 감상한 마법사는 결국 그대로 쓰러졌고 의자와 바닥에 부딪히기 전에 마법사를 안아들은 치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으며 조금 거칠게 침실 방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마법사를 침대에 눕혔다.

도발하는 건 좋았지만 우리 패치는 그럴 생각이 없잖슴까?”

어느새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오고선 잠들어 있는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빗듯이 쓸어보던 치트는 몇 가닥 쥐더니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춘다. 그리고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걸 놓고 이번엔 뺨을 쓰다듬더니 다른 손으론 품에서 통신수정구를 꺼내고 톡톡 두드렸다.

모드양~ 들립니까?”
무슨 일입니까?”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통화를 하나요? 모드양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랬답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시킬 일이 있슴다~”

어쩌면 딱딱하기로는 눈앞의 잠든 마법사보다 더 딱딱한 그의 부하는 묵묵히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년도 안 남았기도 했고 원래는 성인 될 때까지 기다려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 패치가 못 만난 새에 홀랑 멀리 떠나는 방랑벽이 생겼나봄다~ 그러니 데려올 날짜를 조금 땡길까~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줬지요.”
언제입니까.”
지금 바로!...라면 너무 급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이쪽으로 오게 돼서 정신없을 지도 모르니 조금 여유로우면서도 빠른 날을 생각해보니 이제 얼마 안 있음 축제잖슴까? 앞으로는 마녀왕국에서 지내지 못할 테니 마지막 축제를 즐기라는 의미에서 축제 마지막 날로 생각했는데 모드양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축제 마지막 날에 데려오겠습니다.”
~! 모드양이랑은 의견충돌이 없어서 정~말 편해요.”

나중에 또 목소리 듣고 싶으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신수정구를 다시 톡톡 두드린 치트는 아쉬운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며 일어난 후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 여전히 쿵쿵 두드려지고 있는 현관문으로 비척비척 움직였다. 집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차가운 공기들은 방 안에 누워있는 마법사를 향해가고 있었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욕설들이 잠깐 흘러들어왔지만 문 닫는 소리와 함께 희미해지고 곧이어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눈을 뜬 마법사는 말없이 천장을 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다가 차가운 공기가 옅어졌을 즈음에 복잡한 감정을 듬뿍 담은 한숨을 쉬며 왼쪽 손을 들어 올리곤 손목에 걸린 아무장식 없는 밋밋한 팔찌를 천장대신 바라봤다.

Posted by 메멤
,

벌써 축제가 다가오고 있지? 하지만 그 전에 너희 앞엔 시험이 남아있다는 걸 잊지 않길 바란다. 그런고로 시험범위를 말해주마.”
학생들의 절규와 야유가 한차례 쏟아져 나왔다. 그 모든 것들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선생은 책을 피고 꿋꿋하게 시험범위를 짚어주고 자습이라고 외치며 유유히 앞문을 열고 나갔다. 시험기간과 범위와 함께 자습이 달려오자 학생들은 그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책을 펼치기 바빴다.

퍼블리에게 닿은 건 시험보다는 축제였지만 즐거운 기분으로 다가온 건 아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험이라는 말에 다른 학생들처럼 소리 없이 울면서 책을 펼치거나 최후의 방법으로 마법사를 찾아갔거나 했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냉기마법 하나 더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얼어 죽지 않을까?”
야 더워 죽거나 얼어 죽기 전에 진짜 교실에 눈 한 번 내려볼래?”
더위와 시험은 이성을 빼앗기에 충분했는지 눈 내리자는 한마디에 슬금슬금 일어나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학생무리가 있었다. 구경하던 다른 학생들은 설마 진짜 눈을 내리기야 하겠냐며 얌전히 있었지만 설마가 마녀를 잡았다.

야 이 또라이들아!!”

이 모든 것은 더위와 축제를 가로막는 시험에 의해 시작되었다! 우리를 막을 자, 더위와 시험을 지배해봐라!”
그렇게 또다시 한 바탕 난리가 났고 이번엔 말리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상황이 웃겼는지 그들의 말에 감명을 받았는지 이긴 마녀가 동료라고 응원 아닌 응원을 하며 여전히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니카는 응원도 뭣도 안 하고 하나의 희극을 보는 기분으로 구경하고 있었고 퍼블리는 말리는 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써대는 마법 덕분에 흩날리고 쌓이는 눈을 멍하니 보면서 왼쪽 손목을 쓰다듬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위로 흩날리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밖에선 잠깐 비가 쏟아지는 듯 하더니 금세 그치고 햇빛 아래에 무지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 전 왔었던 폭우가 끝난 후에도 보이지 않았던 무지개는 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무지개가 사라질 때까지 볼 생각이었는지 의자를 창가로 가져와 창문 너머로 향한 고개를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예 손으로 덮어버린다.

무지개가 참 예쁘게도 떴네요~”
나가.”

정말 너무하심다! 깨어있는 날도 별로 없으신데 매번 찾아올 때마다 그렇게 매정하게 굴고! 예전에는 같이 밥도 먹고 같이 한 침대에서도 잤었는...”
마법사가 여기에 갇힌 후로 제대로 알게 된 건 말은 한 번으로도 족하다는 거였고 잘못 듣지 않는 이상 다시 말해 줄 필요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는 거였다. 아무 말 없이 의자를 잡자 멀찍이 물러나는 모습에 던지지는 않았다. 계속 갇혀 지내고 대부분을 잠든 채로 있었으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체력과 근육이 꽤 떨어진 상태였다. 괜히 여기서 힘쓰기 싫었으니 위협은 이 정도로만 하고 다시 의자에 앉으니 다시 슬금슬금 다가오는 모습에 다시 한 번 위협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섯 걸음 정도 남겨놓고 더 이상 다가오지 않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닿을 수 없다니...뭔가 아련한 사랑 소설의 주인공들이 된 것 같지 않슴까?”
헛소리는 그쯤하고 여기 온 이유나 말하게.”
아아 우리 패치도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그리고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 패치가 여기 있으니까 제가 올 수밖에 없잖슴까?”

얼굴 봤으면 꺼지게.”
매정함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 자체도 굉장히 힘을 쓰는 일이었으니 계속해서 화를 내니 생각보다 금방 지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더군다나 체력도 꽤 떨어져 요즘 무기력함을 많이 느끼고 있는 마법사는 혹시 녀석이 이걸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을 쓰기 피곤해졌다. 아마 지금도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그리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올라왔지만 힘을 쓰면 더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금방 올라와 기운을 빼버리는 바람에 이러다가 나중에는 일어나 있는 것도 피곤해질까봐 조금 걱정이 든 마법사는 여전히 왼쪽 손목을 덮고 있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줬다.

너무 절 싫어하시는 거 아님까?”
이 상황에 대체 누가 자넬 싫어하지 않을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군. 있다면 한 번 데려와보게, 자네처럼 말이고 예의상식이 안 통하는 녀석인지 알아보고 싶으니까 말일세.”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 패치 외엔 그럴 마법사도 마녀도 없으니 안심하십쇼.”

마법사는 다시 의자를 던지고 싶은 충동과 함께 등받이에서 일어났지만 분노의 기세를 느꼈는지 한걸음 물러나는 모습에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자네 마음은 평생 일방적이겠군. 이제 내가 자네를 좋아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일세.”
그렇게 쏘아댄 후 또 징징거릴까 눈을 감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의외로 아무런 말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다시 눈을 뜨고 쳐다보니 거의 달고 살다시피 하던 얄미운 웃음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당신이 떠난 이유는 제가 고백했기 때문입니까?”
아니.”
별달리 동요 없는 모습을 보니 자신 때문에 떠난 게 아니란 걸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떠나면서 뒷마당까지 함께 태웠으니 뒷마당의 진실을 알고 있던 치트도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걸 차가운 잿더미 앞에서 깨닫고 대답을 듣기 위해 호수로 달려갔었다.

그럼 제가 계속 당신을 기다렸으면 당신은 다시 저를 만나러 올 생각이 있었습니까?”

마법사는 이번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질문을 꺼낸 본인도 그다지 대답을 바라고 질문한 건 아니었다. 앞서 치트가 말한 사랑 소설의 주인공처럼 지나간 일에 만약을 가정해보는 미련 많은 자의 흉내라도 내려는가 싶었지만 이번 연기는 영 아니라고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마법사는 말없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몇 번이고 생각해봐도 대답은 같았다.

그럼 자네는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나를 이렇게 가둬놓진 않았을 텐가?”

치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둘 다 대답은 같았다.

Posted by 메멤
,

짐을 잠깐 맡아두겠습니까?”
그 말에 퍼블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등에 메고 있던 짐을 넘겼다. 어차피 제일 중요한 장미꽃잎은 제 품에 있다. 짐을 받아든 기사단장은 물품을 관리하는 마법사에게 넘기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따라오십쇼.”

기사들이 입고 있던 갑옷처럼 흰 건물 안의 마법사들은 전부 흰 바탕천에 금색 자수와 장식들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종종 열려있는 문틈 사이론 일제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마법사들이 모여있었다. 신과 신앙에 대해서 얼핏 들어본 적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인 퍼블리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둘러볼 뿐이었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기사단장이 잠깐 몸을 틀어 시선을 줬다.

혹시 신앙에 관심 있습니까?”
말로는 들어봤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저희가 하는 건 그저 신을 믿고 신의 말씀을 따라 행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신의 말씀이요?”
대사제님께서 신이 내려주시는 말씀을 받고 저희에게 내려주시는 겁니다. 지금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대사제님뿐이죠.”

신은 어디 계시는데요?”
신은 언제나 저희 곁에 있습니다.”
철저한 논리주의 마법사한테서 자라온 퍼블리에게 신이란 존재는 크게 와닿지도, 자세히 들어본 적도 없는 존재였다. 이는 마법사가 딱히 신과 신앙에 대해 가르칠 필요성을 못 느낀데 생긴 일이었다. 지금 퍼블리는 신을 그저 신성 측의 마법사중 한명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기사단장의 말에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굴을 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래도 신을 믿는 분은 아니신가보군요.”

...아니..그러니까...신이라는 분은 어떻게 늘, 그것도 모든 마법사들의 곁에 있다는 건지...”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니 늘 저희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저희의 믿음을 바탕으로 곁에 계십니다.”
퍼블리는 그쯤에서 더 묻는 걸 포기했다. 애초에 신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둘은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마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문틈 너머로 들려오는 찬송가와 기도문을 읊는 소리를 들으며 완전히 낯선 세상에 떨어진 느낌을 받으며 뒤를 따라가자 곧이어 도착한 곳은 지금까지 봤던 나무로 된 문들과는 달리 돌로 이루어진 새하얀 문 앞이었다.

이곳이 바로 대사제님께서 기도를 올리시는 방이자 신의 말씀을 내리고 곤경에 처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방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문을 세 번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나왔다. 문을 열자 군데군데 이가 빠져있는 원탁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너머에 수염이 풍성하고 꽤 긴 지팡이와 다른 사제들의 옷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옷을 입고 있는 마법사가 앉아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전 이곳 신성의 대사제 홀리라고 해요. 미숙하게나마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죠.”

그가 바로 대사제이며 신성의 대표자였다. 생각보다 온화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 또한 위엄이 있다기보단 가만히 뒤에서 머무르며 이야기를 듣고 전달한다는 느낌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 퍼블리였다.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는 부드러운 권유가 다가왔고 조심스레 앉은 퍼블리는 원탁에 시선을 두다가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들어 대사제에게로 돌렸다.

대사제님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입니다.”

프라이드가 직접 데려오신 분이라니...뭔가 일반 사제들과 기사들로도 해결이 힘든 일을 겪고 계신 분이군요.”

그저 마법사 선생님을 찾으러 온 게 뭔가 굉장히 해결 불가능한 힘든 일이 된 거에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은 퍼블리는 그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지만 기사단장이 한 발 더 빨랐다.

저희 쪽에서 아난타라는 분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아난타라...”

지팡이를 툭툭 땅에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대사제는 퍼블리와 눈을 맞추며 묻기 시작한다.

이름이 아난타가 확실한가요?”
.”

흐음...하지만 그런 이름의 마법사는 없는데...”
검은 머리에 크고 동그란 안경을 쓰신 분이세요.”

딱딱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우선 저희 신성에 그런 분은 없어요. 아난타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있지만 그 분은 다른 소속이거든요.”
다른 소속이라면...?”
전장과 분노 소속이죠.”
분명 그 아난타가 맞다. 하지만 신성에 속하진 않았다고 한다. 점점 혼란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차분히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혼란은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을 꼬아놓기 시작했다.

제가 아는 아난타 분도 검은 머리지만 안경은 쓴 적이 없어요. 전체적으로 인상이 동글동글했던 분인데...”

칠판 앞과 교탁 뒤에서 수업의 일환으로 옛날의 제 얘기를 꺼내는 아난타가 떠오른다. 동그란 안경 너머의 눈도 동그랬던 동글동글한 마법사이자 격투가라고 소개했던 선생. 전장과 분노 소속이었다가 정화의 날 이후 함께했던 팀원들을 찾기 위해 신성지대로 들어갔다는 말. 문득 다가온 이상한 느낌에 더 질문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퍼블리가 그대로 멈췄다. 그와 동시에 어제 쉼터에서 만난 기사의 말이 아침에 꿈에서 깨자마자 들이닥치던 햇빛처럼 생각의 밑에서 튀어올라온다.

우리? 당연히 신성 소속이지. 그보다 우리를 신성지대라고 부르다니 마녀들만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더니 먼 마을에서도 그렇게 부르는구나? 우리 단체 이름은 신성이고 이 도시는 신성이 다스리는 땅이라서 신성지대라고 이름이 붙여진 거야.”

그걸로 이미 답은 나와있었다. 공손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이 벌벌 떨고 있다가 옷자락을 긁어모으듯이 꽉 쥐기 시작했다.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다가 사라진다. 그 뒤로 곤란하다는 표정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는 얼굴이 어른거리다가 사라진다.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이 가만히 아래만 보고 있던 퍼블리가 고개를 들어 다급하게 입을 연다.

저 그럼 혹시 마녀왕국에...!”

똑똑똑 문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에 가위로 소리를 자르듯이 고요함이 내려앉자 문 밖에서 목소리가 문을 두드린 이유를 말한다.

마녀왕국에서 이번 학술 교류에 대해 요청하는 마녀가 왔습니다.”

Posted by 메멤
,

프라이드라는 기사단장을 찾아가기엔 이미 해가 져버려서 시간이 애매해졌다. 지금 퍼블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밥을 먹거나 제 방으로 돌아가서 창밖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퍼블리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완전히 쉬고 있을 때 할 만한 건 왕국에서 샀던 책을 읽거나 마을구경 뿐이었다. 전에는 운동이라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방 안에서 운동하다가 균형을 잃어 실수로 벽을 부술 뻔 한 이후론 운동은 최대한 밖에서 하는 편이었다. 그나마 날이 밝을 땐 할 수 있던 마을구경도 날이 어두워지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마녀, 비록 지나온 곳에선 마법사로 보고 있지만 성인이 채 안되어 보이는 건 어른들 눈에도 보였기 때문에 쉼터의 주인들이 꽤 말린 적이 많았다. 마을 마법사들도 어두워지면 되도록 돌아다니지 않는 주의였다. 하지만 이곳은 해가 졌어도 돌아다니는 마법사가 꽤 되는 게 마녀왕국이랑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창문 너머로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의 모습을 눈에 담던 퍼블리는 그 사이의 기사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커튼을 내렸다. 조금 이르지만 빨리 날이 밝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침대에 누운 퍼블리는 그대로 눈을 감고 집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제가 들어오면 고개를 돌려 인사를 받아주고 건네는 마법사를 상상하며 잠들었다.

 

누군가가 저를 들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서 여럿이 있었는지 외치는 소리가 꽤나 소란스러웠다. 따뜻하게 저를 꼭 쥔 누군가는 친구라며 그들에게 자랑했다. 그에 더 시끄러워졌고 소리로만 그들을 인식하던 저는 한숨소리와 함께 매우 익숙한 목소리를 듣게 됐다.

또 사고 쳤나보군.”
그 익숙한 목소리에 그리움이 가득 차오르며 목소리의 주인을 보려고 했지만 자신에겐 볼 수 있고 눈물을 흘릴 눈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점점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저를 쥐고 있던 자가 자랑스레 손을 내밀어 저를 보여주며 친구라고 외치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점점 주변의 모든 게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마저도.

...!”

그에 급한 나머지 부르려고 했지만 빛이 모든 걸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눈은 창문 틈새로 들어오고 있던 햇빛이 지나가는 길 아래에 놓여있었다. 뜨던 눈을 다시 감고 햇빛을 피해 일어난 퍼블리는 멍한 얼굴로 앉아서 눈을 깜빡였다. 보통 꿈이란 건 무언가 그림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깨어날 땐 그 잔재가 남아서 꿈 내용이 어땠는지 더듬을 수 있는데 방금 꾼 꿈은 아무런 모습도 나오지 않고 그저 처음 듣는 목소리와 소란스러운 외침들, 그리고...

분명 아빠 목소리였는데?”
틀림없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느낌이 분명 마법사라고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퍼블리가 기억하기로는 마법사가 그렇게 많은 자들 곁에 있었던 적은 없었고 저를 곁에 둔 적은 더더욱 없었다. 아니 곁에 있었기 보단 누군가의 손에 들려있는 기분이었기에 꿈을 떠올릴수록 혼란에 빠지던 퍼블리는 꿈에 대해 떠올리던 걸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프라이드라는 자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모든 건 마법사를 찾아 그에게 묻는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용사라는 자를 찾아 물어볼 생각이었다.

짐을 챙겨들고 쉼터를 나온 퍼블리는 순찰을 도는 기사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마까지 감싸는 투구는 그나마 잘 보이는 게 눈이었는데 살펴보다가 주황색 눈인 기사를 발견하자 어제 쉼터에서 만났던 기사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살짝 웃음이 터지다가 눈이 마주치고 머쓱하게 고개를 숙여 자리를 피하는 일도 있었다. 계속 지켜보다가 기사들의 체격이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씩 차이는 있었기에 어쩌면 봤을지도 모르는데 놓친 게 아닌가 싶어 지나가는 기사들을 붙잡아 그들의 단장이 어딨는지에 대해 묻자 모른다는 말과 해가 지금보다 더 낮게 떠있을 때쯤에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 쪽에서 봤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다니다보니 해는 어느새 가장 높게 오를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갔다가 슬슬 내려오기 시작했다. 더워서 땀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할 때 쯤 그토록 찾아다니던 자를 발견했다.

확실히...크다.”
다른 기사들은 물론 여느 마법사들과도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꽤나 큰 덩치를 자랑하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퍼블리는 재빨리 뛰어가서 그를 붙잡았다. 툭툭 저의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돌아보는 얼굴은 다른 기사들보다 투구에 더 가려져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바깥에서 오신 여행자분이로군요. 무슨 일입니까?”
, ...그 신성 측의 마법사분을 찾고 있는 중이었어요. 순찰 돌던 기사분들한테 여쭤봤는데 단장님이신 분이 알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기사단장에 대해 가르쳐준 기사들의 바람과 정보를 받은 퍼블리의 양해 덕분의 그들의 쉼터에서의 농땡이는 순찰로 변했다.

그렇습니까? 찾는 분 이름이...”
아난타예요.”

이름을 말했지만 이상하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름을 들은 그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퍼블리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퍼블리가 조금 당황하며 제대로 못 들었나싶어 다시 한 번 말해야하나 고민하던 순간

“...일단 기사들 중에서도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 사제들 중에서도 아난타라는 이름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이름이 정말 아난타 맞습니까?”

“..., 맞아요.”
당황함에 한 박자 늦게 대답한 퍼블리는 재빨리 눈앞의 기사단장의 반응을 살폈다. 이대로 그런 마법사는 없다고 딱 잡아떼며 떠나면 곤란해지는 건 퍼블리였다. 다행히 퍼블리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사제님께서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대사제님이요...?”
왕국의 공주님처럼 이곳 신성의 대표자이신분입니다.”

원래 이렇게 각각의 대표자를 만나는 게 간단한 거였나. 퍼블리의 얼굴에 그런 의문이 그대로 떠올랐는지 기사단장이 뒤에 말을 덧붙였다.

같은 마법사로서 공평하게 대화할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다만 그 많은 분들을 일일이 만날 순 없으니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들을 듣고 기사들과 사제들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하고 아니면 대사제님께 말씀 드리는 게 절차입니다. 저는 웬만한 기사들과 사제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다니고 있지만 제가 모른다면 알고계실 분은 대사제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퍼블리는 얼떨결에 길 안내를 시작하는 기사단장을 따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바로 눈에 들어온 그 흰 건물로 들어가게 됐다.

Posted by 메멤
,

마지막 마을에서 나오자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풀이나 나무는커녕 녹색이라곤 가시를 달고 있는 신기한 식물만 가지고 있는 모래땅이 퍼블리를 반겨줬다. 퍼블리는 이곳이 말과 영상구로만 보던 사막이라는 걸 알고는 신기한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봤다. 종종 눈에 보이는 가시가 달린 식물 이름은 선인장이었고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도 자라는 식물이란 걸 기억해낸 퍼블리는 나중에 아니카한테 편지가 오면 선인장을 실물로 봤다며 답장으로 자랑할 생각으로 선인장의 모습을 세세하게 눈에 담았다. 지도를 보며 걷던 도중 먹이를 찾고 있던 중인지 모래색 털의 여우와 꽤 크다고 할 수 있는 구렁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제각기 할 일을 하러 자리를 떴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질 때 노숙을 준비하던 퍼블리는 햇빛이 쨍쨍하던 밝을 때와는 다르게 어두울 땐 생각보다 춥다는 생각에 조금 굳었지만 생각보다 밤과 추위는 무사히 지나갔다. 그렇게 또 걷고 또 걷는 걸 반복하다가 어제보다 더 더워진 것 같은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자 마침 다른 선인장들보다 유독 키가 큰 선인장이 그림자를 길게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늘로 가서 물을 꺼내 마시던 퍼블리는 제 목과 어깨를 덮는 머리카락이 더 덥게 느껴지게 만드는 건가 싶었다. 머리끈을 꺼내 묶어보자 한결 시원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머리카락 길이 자체가 꽤 길었던 터라 목에 머리카락이 닿는 건 여전했다. 그렇다고 머리카락을 자르자니 자를만한 물건도 없었고 거울도 없는데다 스스로 잘라본 적도 없으니 엉망이 될 게 눈에 뻔했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짐을 살펴보자 가장 아래쪽에 다 팔았다고 생각한 천 하나가 나왔다. 꺼내서 펼쳐보니 팔기에도 애매한 크기였다. 천을 보고 있다가 머리위에 올려놓고 머리카락들을 모아 뭉치며 올려놨던 천으로 감싼 후 끝자락으로 묶은 후 혹시라도 삐져나온 데가 있나 싶어 더듬어 보던 퍼블리는 그냥 묶었을 때보다 더 시원해진 목덜미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편한데?”
당분간 이렇게 다닐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가 묻은 데를 툭툭 털고는 발걸음을 옮기자 해가 가장 높은 데 떴다가 다시 땅과 가까워질 때 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태까지 들렀던 마을들과는 다르게 높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동전에 새겨진 것과 같은 모양의 금색 조형물을 우뚝 세운 커다란 흰 건물이었다.

거기 앞에 잠깐 비켜줘!”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비켜서자 꽤나 많은 물건들을 담은 수레가 지나갔다. 길에 서서 대화를 나누던 마법사들도 수레가 가까이 오자 비켜서서 다시 대화를 나누거나 바로 옆에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사는 마법사들은 마을에 살던 마법사들과 옷이 조금 달랐다. 좀 더 장식과 무늬가 많다고 할 수 있었다. 살고 있는 데가 클수록 좀 더 화려해진다는 마법사의 말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단서를 쥐고 있는 자가 이곳에 있으니 다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터였다. 묘하게 솟아오르는 기대감이 쓸쓸함을 누르고 벅차게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은 쉼터에 들어간 후 바로 가라앉았는데

어떻게 만나지...?”
지나가는 마법사들을 붙잡고 아난타를 아냐고 묻는 건 상당히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아난타는 신성지대측에서 대표로 교류를 위해서 온 마법사였다. 그러니 신성지대 단체를 찾아가면 되겠지만 큰 단체를 이루는 자들을 찾아가는 건 힘들었다. 하물며 제가 살고 있던 곳의 왕국 마녀도 무작정 찾아간다고 볼 수 있는 마녀가 아니었다. 전서구가 들었으면 자기는 왜 그렇게 무작정 찾아왔냐 물었겠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데다가 아난타를 어떻게 만나는지에 신경을 쓰는 터라 전서구에 대해 떠올릴 생각도 들지 않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건 의외의 부분에서 해결됐다.

우리? 당연히 신성 소속이지. 그보다 우리를 신성지대라고 부르다니 마녀들만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더니 먼 마을에서도 그렇게 부르는구나? 우리 단체 이름은 신성이고 이 도시는 신성이 다스리는 땅이라서 신성지대라고 이름이 붙여진 거야.”

마녀들은 앞에 왕궁이라고 붙이니까 우리도 뒤에 붙인 줄 알아서 우리 단체를 신성지대라고 부른다고 하더라.”
방에서 나오자 똑같은 갑옷과 투구를 쓴 마법사들이 잠시 쉬러 들어온 건지 의자에 앉아서 떠들고 있었다. 퍼블리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혹시 신성지대 마법사분들이냐고 묻자 그에 나온 대답이다. 이들도 퍼블리를 마법사로 보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 혹시 아난타라는 분을 아시나요?”
글쎄? 처음 듣는 이름인데? 너 아냐?”
나도 몰라. 애초에 우리 조 애들 이름 외우기도 바쁜데 어떻게 다 아냐? 다른 조에 소속된 녀석 같은데.”
새끼...같은 조 애들 이름 외우기 바쁘다는 녀석이 다른 조에 있는 짝사랑 이름이랑 걔 연인들 이름이나 달달 외우다 못해 적어놓고 다니면서.”
그거랑은 상관없지! 애초에 그 얘기가 왜 여기서 나와?!”

뭔가 한 마법사의 지극히 사적인 비밀을 듣게 된 퍼블리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야기에 끼어들어야하나 아니면 이대로 비밀을 묻어둔 채 물러나야하나 고민했지만 둘의 투닥거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일단 그 아나? 아나타? 아무튼 그런 이름은 이 녀석의 원수 수첩에 없는 것 같다 새파란 풀아.”

거 아직 어린 애 앞에서 왜 그런 얘기를 왜 꺼내?!”
나중에 이 녀석 원수 수첩에 안 적히게 조심하려면 우리랑 같은 옷을 입은 녀석 중에서 눈이 주황색인 녀석 옆에 안 있으면 된다.”
!!!”
다시 투닥거림이 시작됐다. 어색하게 하하 웃은 퍼블리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지만 곧바로 나온 말에 바로 멈췄다.

그러고 보니 단장님이라면 알지 않을까?”
아무리 단장님이라도......이름 다 외울 것 같긴 한데...그래도 단장님 만나는 건 좀...”
단장님이요?”
기대감에 가득 찬 퍼블리의 눈에 둘이 얼굴을 마주하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말 꺼냈다는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서 묻어나왔다.

...일단 우린 마을 치안을 유지하는 기사단이니 당연히 단장님이 있지. 근데...”
단장님이 좀 빡빡하셔. 긍지도 높은 분이라서 본인한테도 빡센 분이시지. 그나마 순찰 돌고 계실 때 말 걸면 괜찮을 거야.”

이름은 프라이드인데, 찾다보면 확실히 눈에 띌 거야. 덩치가 우리 같은 일반 기사들과는 확연히 다를 정도로 크거든.”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그들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만나면 우리 여기 쉼터에서 만난 건 비밀이다?”

아마 그들이 걱정한 건 순찰 중 농땡이에 대한 벌인 것 같았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