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전서구가 어떻게 찾냐면서 툴툴대긴 했어도 편지를 전달하러 온 이유는 퍼블리의 발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지대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 게 바로 전서구였고 전서구는 그 길을 따라 퍼블리를 찾으러 온 거였다. 다만 어디 길을 밟는지 안다고 해도 받는 자가 움직이는 데 그에 맞춰 찾아야하는 수고를 들이는 건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 퍼블리는 전서구에게 신성지대로 데려다달라고 했지만 전서구는 편지를 배달하는 작은 비둘기들이라면 모를까, 비둘기 우체부 대표라는 입장 때문에 다짜고짜 아무런 연락 없이 신성지대 땅을 밟는 건 예의가 아닌데다가 마녀왕국 측에 아무 말도 않고 신성지대로 가게 되면 꽤나 일이 복잡해진다고 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 둘의정치때문이었고 퍼블리는 실감은 못하지만 막연히 알고 있었기에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타협한 끝에 신성지대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걸로 마무리 됐다. 나름대로 안전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길을 가르쳐준 전서구가 바랐던 방향은 어른이 되기 전까진 왕국에서 나가는 걸 포기하거나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해 나가는 거였지만

아이고 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 보게!!”
어느 날 편지를 들고 찾아온 아니카에게 정황을 듣고 처음으로 퍼블리에게 편지배달을 하게 된 전서구가 알려준 길을 따라 가는 퍼블리를 찾아낸 후 부리로 머리를 마구 쪼아대며 외친 말이었다.

그 때 전서구가 예상치 못한 건 마법사가 은둔하다시피 지낸 덕에 일어난, 협소하다 못해 아예 없다시피 한 왕국내의 인맥과 퍼블리의 행동력 및 체력이었다.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학교까지 다니고 있던 어린 마녀가 혼자 나갈리 없다는 건 왕국내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물론 몇몇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보호자인 어른들과 법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왕국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나고 일주일 후 왕국 마녀에 의해 보호자의 동의나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왕국을 나갈 수 없는 마법에 걸리게 된다. 당연하게도 왕국 내에서 태어나지 않은 퍼블리는 그 마법이 걸려있지 않았고 퍼블리가 사라졌다고 외치고 다닐 보호자도 없었다. 더군다나 유일하게 퍼블리의 행방에 의문을 품을 학교는 모든 수업이 끝나있어서 방학상태였고 이렇게 전서구가 또 편지를 배달하게 된 지금에서야 다시 수업들이 시작됐다. 본인이 알려준 길이지만 꽤 시간이 걸리는 터라 왕국 내에서만 지내던 어린 마녀는 가던 도중 지칠 법도 했지만 퍼블리의 체력은 마법사는 물론 주위의 선생이나 학생들이 인정할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비록 겨울이 끝나고 봄의 시작도 지나 한창 꽃가루가 눈과 코를 간지럽힐 때가 됐지만 퍼블리는 그 긴 여행에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기운 넘쳐 보인다면서 신기해하던 전서구의 증언도 있었다. 어리둥절한 전서구의 얼굴을 떠올리던 퍼블리는 조금 웃고는 계속 발을 움직였다. 그림자가 조금 더 길어졌을 즈음에 쉬어갈 마을을 발견했다. 어렸을 땐 몰랐지만 마법사들이 사는 마을은 마녀왕국과 많이 다른 점이 있었다. 마을에 들어선 퍼블리는 하루 묵을 쉼터를 찾아 들어갔다.

하루랑 손질이요. 남은 건 신성지대 돈으로 주세요.”

그렇게 말한 퍼블리는 오는 길에 잡은 토끼와 두툼한 천들을 건넸다. 쉼터의 주인은 힐끗 보더니 열쇠 하나와 꽤나 정교한 세공을 한 흰 동전 두 개와 금칠을 한 동전 다섯 개를 꺼내 건넸다. 받아든 퍼블리는 열쇠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새겨져있는 방문을 찾아 열쇠를 꽂아 돌리고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눈에 보이는 침대 위로 몸을 던진 퍼블리는 신성지대의 화폐들을 손에 올려놓고 살펴봤다. 다른 손으론 가지고 있던 마녀왕국 화폐들을 꺼내 서로 비교해봤다. 마녀왕국의 화폐엔 누구나 다 아는 장미 모양으로 세공이 되어있었고 신성지대 화폐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작대기 두 개를 교차해서 놓은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이 사는 마을은 신성지대와 달리 대부분 소규모인 터라 거래는 주로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화폐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맨 처음 들리게 된 마을에서 퍼블리가 어찌해야할지 몰라 쩔쩔매자 가만히 보고 있던 마을의 대표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마녀왕국과 가까운 마을들은 마녀왕국 화폐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아서 마녀왕국 화폐로 거래가 가능하지만 신성지대와 가까운 마을들은 신성지대 화폐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다고 했고 그 중간에 있는 마을들은 대부분 물물교환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마을엔 여행 나온 마녀들이 마녀왕국 화폐를 많이 쓰고 개서 짐 속에 넣기 쉬운 천들로 바꾼다고 설명해줬다. 작은 마을에선 은근히 천을 만들기가 번거롭고 힘든 덕에 물물교환 할 때 가장 반기는 물건이라고 덧붙이는 말에 퍼블리는 가지고 있던 돈 일부를 제외하고 천으로 바꿨다. 그렇게 여행하면서 천의 가치가 더 높아 곤란할 땐 다른 물건들을 더 받거나 중간에 잡아온 동물이나 먹을 수 있는 열매, 풀들을 건네 육포나 건조과일로 손질해주거나 요리하는 값으로 때우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신성지대니 가지고 있던 천들을 전부 신성지대 화폐로 바꿨다. 화폐들을 전부 주머니에 넣은 퍼블리는 목에 걸려있는 줄을 잡아 당겨 올리고는 그에 옷 속에서 딸려 나온 줄에 달린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 든 파란장미꽃잎이 잡아당기는 손길에 맞춰 흔들렸다. 유리병엔 매우 강한 보호마법이 걸려있었다. 맨 처음 유리병에 묶어 놓은 줄이 끊어져버려 돌 위로 떨어질 때 깨진 건 유리병이 아니라 돌이었으니 그 효과는 자연스럽게 입증해버렸고 또다시 보게 된 마법사의 엄청난 마법에 할 말을 잃었다. 더 튼튼한 줄을 사서 유리병을 줄에 묶은 이후 퍼블리는 유리병을 이름 그대로인 유리병처럼 대하진 않았다. 깨질까봐 조심조심 다니던 걸 그만둔 이후론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한동안 유리병을 살살 흔들어 그에 맞춰 흔들리는 장미꽃잎을 지켜보던 퍼블리가 유리병을 꼭 쥐고 제 품으로 끌어안은 후 눈을 감았다. 마법사와 결혼한 마녀는 없었고 마법사는 아빠인 동시에 엄마이기도 하면서 하나뿐인 보호자였다. 사실 퍼블리는 마법사가 사라지고 사흘이 지났을 때 그동안 제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지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마법사에게 무언가 묻기 전부터 상상해오던 이 두려움의 정체는 마법사가 저를 두고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일이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를 이 두려움의 원인을 알게 된 건 마법사에게 옛날에 마법사에게 구애하던 자에 대해 떠올렸을 때였다.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진 않았지만 행동은 흐리지만 얼굴에 비해 세세하게 기억날 정도로 마법사에게 달라붙었던 자. 막연한 얄미움이 기억으로도 느껴졌었지만 되짚어서 생각해보면 곁에 있던 저도 기억에 남을 만큼 열심히 들이댔던 자였다는 거였고 그만큼 끈질기게 마법사에게 달라붙어 인연을 이룬 대단한 자였다. 하지만

끝냈어.”
그 집을 떠난 그 날. 내가 끝냈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퍼블리는 눈을 뜨며 쥐고 있던 유리병을 다시 제 옷 안으로 집어넣고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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