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직 머리가 어지러운지 다시 누운 마법사는 고개만 돌려 아직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여기 있는 모든 걸 부수고 밖으로 나갈까 싶었지만 힘이 쭉 빠진 몸이 바로 붙잡는다. 이곳에 갇힌 이후론 이젠 있었나 싶을 충동이 잠들었다 깨어나는 새에 점점 더 올라와 마법사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중간에 정신이라도 잃었나 싶었지만 들어오는 햇빛은 아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왔나?”

저를 경계하긴 하지만 듣는 욕은 역시 괴롭죠.”

대답을 듣고 마법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부탁한 입장에서 할 말 치곤 이상하지만 괜찮으신가요?”
자네 말대로 이상한 말이군. 나쁘지 않은 부탁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가야할 곳이 괜찮지 않은 곳이니까요.”

다시 눈을 떠서 바라보니 굳어있는 순박한 얼굴이 바로 들어왔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어차피 다시 가봤어야 했던 곳이네.”
“...당신은 참...대단하네요.”
감탄과 걱정 등 여러 가지 감정이 가득 섞인 말을 들었을 때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진짜 대단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끝냈겠지.”

터무니없는 자책 아닌 자책에 아난타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 때문에 찾아온 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쓸 여유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겹치네요.”
그럼 하루 당기지. 그리고...”
마법사가 오른손을 쥔 채 내밀자 아난타는 두 손을 모아 폈다. 마법사가 손을 놓자 둥글고 매끄러운 감촉이 굴러다닌다.

퍼블리에게 전해주게.”
놓았던 손이 물러가니 무지개 구슬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다양한 일들을 겪고 생각이 넓어지거나 강해지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학교의 시험은 그저 공부가 답이었다. 아무리 퍼블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다양한 일들을 겪고 이겨내서 돌아와도 그건 학교 시험을 대비해 공부를 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나빴던 성적 위로 빠진 수업에다 심란했던 마음까지 더하니 역대 최악의 결과가 퍼블리 앞으로 도착했다.

그래 우리 근육이~ 지금 어떤 심정이니?”
“...지금 내 손의 성적표가 대신 나타내주고 있어.”
마녀의 심정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잖니?”
하지만 성적표는 가능하지.”
내용은 슬프지만 가볍게 얘기하니 조금은 무거움을 덜은 퍼블리는 울면서 자유와 축제를 외치는 같은 반 학생들을 구경했다.

이제 축제가 진짜 얼마 안 남았네...”
그러게.”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그러게.”
그렇게 말하니 겨울과 봄에 있었던 일들이 실은 다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시끄럽고 재잘대는 커다란 비둘기를 만난 것도, 신성지대 감옥에 갇혔었던 것도, 몸이 썩어가지만 유쾌했던 흑기사단을 만난 것도, 장미정원의 작은 집에서 잠들어있던 공주 메르시를 만난 것도 전부 다 꿈이 아니었을까. 1년도 안 지난 일들이 1년이 다 되어가는 일보다 더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익숙해지기 싫었는데 익숙해졌나봐.”
그럴 땐 성적표를 봐.”
확실히 성적표에 적혀있는 결과는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어쩐지 다른 이유로 슬퍼진 퍼블리는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이번엔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공주님은 어찌하실까~?”

어찌하다니? ?”
이번 축제 말야. 하늘 깨진 그 날에 네 얘기 들어보니 공주님은 계속 잠들어 있었고 나는 물론 여기 왕국 살던 마녀들 머리가 좀 이상했다는 것도 일단 나랑 너는 다 알게 됐어. 그러면 이거 그동안 공주님 자고 있었을 왕국 안쪽 상황이 너무 뻔하지 않니?”
그래도 메르...공주님 편이 있을...”

퍼블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니카는 박수를 쳐서 순서를 가로챘다.

공주님이 잠든 게 단순히 1, 2년이 지난 게 아니야.”
자신들은 물론 여기 젊은 선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잠들었을 공주. 굳이 꽁꽁 싸맨 안쪽상황을 파헤쳐보지 않아도 아직까지 땅을 밟지 못한 채 배 위에서 잠든 공주를 생각하는 흑기사단이 모든 걸 보여주고 있었다

솔직히 나같으면 깨어난 후에 적절한 순간 노려서 왕국 밖으로 뛰쳐나갔을 거야.”

금 갔던 하늘은 하루가 지날수록 지우개로 검은 선들을 조금씩 지우듯이 사라지고 결국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깨끗해졌다. 그걸 발견한 아니카와 퍼블리는 같은 반 학생들을 붙잡고 몇십 년 째 어른도 왕도 되지 않는 공주에 대해 물어봤지만 그들은 이상한 점을 눈치 못 채고 축제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역시 빨리 주변에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랬다면 왕궁 마녀들이 우리 얼굴 보러 왔겠지.”

결국 지금 알 수 있는 건 언제 하늘에 박혀있었는지 모를 투명한 결계랑 모순투성이 이야기와 잠들어 있던 공주가 관계되어있다는 거였고 결계가 다시 돌아간 걸 보면 최소한 공주는 깨어난 후에 왕국 밖을 떠나지 않았거나

공주님 너 가자마자 다시 잠들었을지도 몰라.”

“...나 무슨 숨겨진 힘 같은 거 있는 걸까?”
숨겨진 출생의 비밀은 확실히 있잖니?”
파란 장미 꽃잎. 거기에서 태어난 퍼블리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안아들어 키웠을 마법사. 결국엔 원점이었다.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마법사에 아니카도 조금 질린 기색을 느꼈다. 눈에 띌 건 다 갖추고 있는 자인데 정작 뿌린 건 끝이 안 보이는 비밀이다.

자신의 장미를 떠올리던 퍼블리는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깨어난 메르시와 대화하기 전에 서랍에서 꺼냈던 종이뭉치.

“...장미 개발 계획.”

뭉치고 엉킨 실타래를 통째로 쥔 느낌이 들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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