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되면서 사회자가 나타나 박수를 치며 시선집중 마법을 펼치는 것으로 대회가 시작됐다. 이번엔 작년보다 더 치열하고 빵들의 크기가 컸다. 빵으로 만든 집과 다리가 나왔으니 말은 다 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사람들은 과연 저 둘 중 누가 우승할까 예상하며 내기를 시작했지만 한창 불타오르고 있는 도중, 대회는 결국 작년처럼 비둘기들의 난입으로 엉망이 되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이런 비둘기들의 행패에 참가자들과 관객들은 우체부측에 항의를 넣으려고 했지만 우체부측 비둘기도 아닌데다가 야생 비둘기는 자기네들 관할이 아니라며 딱 잘라 거절하는 비둘기 대표 전서구는 그대로 날아올라 자리를 떴다. 물론 그 뒤로 이어진 야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근데 매년마다 드는 생각인데 저 비둘기 진짜 크다. 역시 대표라서 그런가?”
내 생각엔 많이 먹어서 저렇게 큰 게 아닌가 싶은데?”
대회 결과에 그다지 관심 없던 마녀들은 전서구가 어째서 저렇게 큰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항의와 추측들이 난무하는 관객석 한가운데 아니카가 입을 열었다.

개판이네.”

그렇게 개판이 되어버린 대회는 사회자가 애써 웃는 표정으로 마무리 지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떨림과 물기는 어찌할 수 없었다. 마녀들은 엉망이 된 대회를 뒤로하고 제각기 축제를 즐기러 가거나 둘째 날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퍼블리와 아니카는 남아서 축제를 즐기는 쪽이었고 얼마 안 가 각자 커다란 바구니에 빵을 한가득 안게 되어 난감하게 내려다보다가 곧이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가위바위보 결과 패배한 퍼블리는 아니카 몫의 빵 바구니까지 들고 기운 빠진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축제 내내 집 안에 있었던 마법사는 퍼블리가 돌아오자 읽던 책을 내려놓고 인사하려고 했지만 양손에 든 빵바구니를 발견하자마자 올라오려던 인사가 턱하고 막혀버려 잠깐 동안 아무 말 없이 퍼블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곧이어 정신 차린 마법사가 빵바구니를 퍼블리의 손에서 가져와 손을 뻗자 하얀 빛이 잠깐 반짝이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 의아해하던 퍼블리가 다가와 물어본다.

뭐 한 거예요?”
보존마법을 걸어놨다.”

이 정도 양이면 다 먹기도 전에 썩을 게 분명하다며 덧붙이는 말에 퍼블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빵바구니를 부엌에 있는 식탁 위에 옮겨놓았다. 아마 한 달 동안 삼시세끼 둘이서 꼬박꼬박 먹어야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한동안 없어지지 않을 빵들을 애써 외면하며 대회에서 비둘기들이 난동을 부린 사건에 대해 얘기했다.

우체부측에 대표 비둘기 덩치가 엄청 크더라고요! 저 그렇게 큰 비둘기는 처음 봤어요.”
혹시 그 비둘기 이름이 전서구?”
! 어떻게 아셨어요?”
어째선지 마법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퍼블리를 향한 건 아니었지만 바로 앞에서 본 퍼블리는 보기 힘든 표정에 놀라면서 당황했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나 했더니만...”

..?”
“GM 기억나나?”
얼마 전에 찾아가볼 생각까지 했던 이름이 나오자 속으로 뜨끔한 퍼블리는 입으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들어 올려 눈에서부터 쓸어내리던 마법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GM 전용의 연락용 비둘기인줄 알았더니...”

“...?”
뭔가 엄청난 말을 들은 퍼블리는 그저 멍하니 반문하기 바빴고 그런 반응에도 마법사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 끝에 말을 먼저 꺼내 깨뜨린 건 마법사였다.

혹시 어딘가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전서구를 타고 가면 될 거다.”
...타고..? ...비둘기를요?”
마녀와 마법사들의 발길이 닿은 곳이 있는 한 전서구가 모르는 곳은 없을 테니.”

그 말에 퍼블리는 그 덩치 큰 비둘기가 자신을 태운 채 날아다니는 걸 상상했다. 날아다니는 건 비행마법을 쓸 줄 아는 마녀들 중에서 균형 감각이 좋거나 오랜 연습 끝에 터득한 마녀들이나 심심할 때 해보는 걸로 인식이 되어있다. 직접 몸에다가 비행마법을 거는 건 위험하니 신발이나 나무판자에다가 마법을 거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단순히 마법을 건 것만 아니라 날아다닐 때 그 위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날아다니는 건 이러한 비행마법 및 균형을 잡는 것에 대한 적절한 시험과 평가를 거쳐야만 허가가 내려왔다. 그런데 비둘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건 상상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물론 사람을 태울 정도로 큰 비둘기는 전서구 외엔 없었고 나머지는 전부 사람 손보다 조금 더 큰 비둘기들이니 탄다고는 생각도 못하는 게 분명했으니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GM할아버지 전용 비둘긴 줄 알았다고요?”
그 분이 연락하는 수단 대부분이 전서구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는 거니까.”
대부분이라는 말은 다른 소수의 방법들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생각지도 못하게 GM과 연락할 방법과 날아다니는 방법을 얻게 됐으니 퍼블리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환하게 웃었다. 마법사는 그저 전서구를 타고 날 수 있다는 게 기쁠 일이었나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렇게 기분 좋은 축제 첫 날의 저녁은 당연하게도 빵이었다.

 

“GM할아버지랑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바로 다음날인 축제 둘째 날 퍼블리는 아니카와 만나자마자 흥분하며 어제 얻은 정보를 말했다. 아니카는 자초지종을 들으며 여전히 웃는 얼굴이지만 내심 놀란 어조로 말을 꺼낸다.

“GM할아버지 범상치 않으신 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비둘기 우체부 대표가 전용 비둘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연락 수단으로 쓰다니.”

알고 보니 원래 전용 비둘기였는데 GM이 비둘기 우체부를 설립하고 대표로 전서구를 앉힌 게 아니냐는 추측을 꺼내자 퍼블리는 설마라고 말했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에 땀을 삐질 흘렸다.

근데 너희 엄마와도 면식이 있는 것 같은 그러면 굳이 GM할아버지한테 묻는 게 아니라 바로 전서구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얼굴로 감탄한 퍼블리가 지금 당장이라도 전서구한테 달려가려는 걸 아니카가 잡아 세웠다. 적어도 축제 끝나고 찾아가자는 의견과 당장 가자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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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열리는 축제는 왕국에서 열리는 축제 중에 가장 성대한 축제지만 열리는 기간은 사흘이라 많이 짧다고들 외치고는 하지만 이런 축제를 길게 이어갈 자신은 없었는지 몇 년 전부턴 축제기간을 늘리자는 외침이 줄어들었다. 각 거리에서 열리는 축제가 아닌 왕국의 주도 하에 왕국 전체 거리의 모든 번화가와 상가들이 한꺼번에 축제를 여는 거니 사흘 내에 전부 즐기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축제의 첫째 날은 빵집이 가장 바쁘다. 첫째 날은 추억이라고 불리며 온갖 빵을 만들고 먹는 날이었다. 본인이 직접 만들어 먹는 마녀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빵 만들기 달인들이 실력발휘를 하는 날이었고 당연하게도 그 빵들을 먹어보고 싶어 하는 마녀들이 줄을 서니 얼마 안 가 동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우리 근육이. 올해는 안 물어보네?”
?”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대회가 열릴 차례라 미리 와서 자리를 잡은 둘은 주머니에 담아놓은 빵을 하나씩 꺼내먹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 왜 작년까지만 해도 당연한 질문 같은 거 하고 그랬잖아.”

그 말에 퍼블리는 눈을 깜빡이고 아니카는 한숨 비슷한 숨을 내쉬며 웃었다. 둘은 그 자리에서 머릿속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은데 웨 빵인그까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빵이 너를 먼저 먹어치울 것 같은데?”
입 안 가득 빵을 밀어 넣은 퍼블리는 먹으면서 의문을 가졌다. 축제 첫 날인 추억은 현 왕국의 왕이나 공주의 추억을 토대로 여는 날이었다. 아니카는 그런 퍼블리의 의문에 근처에 있던 사과주스를 건네주면서 제 생각을 꺼낸다.

공주님의 추억이 빵이니까.”

흐아! 그러니까 왜 공주님의 추억인지 궁금하다고.”

공주님한테 빵에 대한 추억이 많나보지.”

내 말은 왜 왕의 추억이 아니라 공주님의 추억인지가 궁금한 거야.”

당연한 걸 묻네. 왕은 공주님이 성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고 공주님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서 여전히 공주님이잖아.”

그 대답 또한 영 납득할 수 없었는지 퍼블리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아니카는 호호 웃으며 퍼블리를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둘은 빵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만든 빵을 다른 마녀들과 교환하거나 나눠주면서 축제를 즐겼다. 여전히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빠져있던 퍼블리는 아니카를 따라다니다가 결국엔 깊이 생각하는 걸 묻어두고는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저거 봐봐! 빵으로 만든 옷이래!”

매년 볼 때마다 저런 마녀 꼭 있더라.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걸까?”

초콜릿으로 옷을 만드는 마녀도 있던데 뭘.”
이어 빵으로 만든 목걸이나 팔찌 같은 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니카는 어쩐지 지루하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을 울리는 불꽃놀이가 터지는 시간은 아직 멀었고 지금 돌아다녀봤자 빵을 만들거나 나눠주거나 받는 것 밖에 할 게 없었다. 불꽃놀이가 시작된 후엔 본격적으로 대회가 열린다. 각 거리의 빵집 주인들과 빵 전문가라고 외치는 마녀들이 우승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결하는 건 볼만했기 때문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렸다. 퍼블리는 사과주스를 홀짝이며 아니카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는가 싶더니 다시 아니카를 힐끔 쳐다보는 걸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물론 눈치 좋은 아니카는 이런 퍼블리의 시선을 모를 리가 없었다.

우리 근육이 왜 우승 빵을 노리는 비둘기 우체부처럼 날 힐끔거려?”

그에 퍼블리는 뚱한 얼굴로 아니카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상해서.”
빵으로 묘기 부리는 저 전문가들이? 아님 내가?”

전부.”
뚱한 표정으로 대답한 퍼블리는 완전히 아니카에게서 시선을 떼고 마침 비둘기가 빵 목걸이를 낚아채는 현장을 눈에 담았다.

어디가 이상한데?”
전부. 사실 빵 축제 자체는 이상하지 않아. 어차피 현재 왕은 없고 공주님만 있는 그런 상황이니까. 공주님이 왕이 되는 거 외엔 그다지 바뀌지 않으니까 축제 첫째 날 자체는 이상할 게 없어.”
그럼 우리 근육이는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아니카.”

퍼블리는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다시 아니카를 똑바로 쳐다본다.

너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
그 많고 많은 말들 중에 무슨 말?”
그에 퍼블리는 입을 열었고 시간이 마치 멈춘 것처럼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뭐라 입을 움직이는 퍼블리였지만 이상하리만치 집중이 되지 않아 한 번 눈을 깜빡이던 아니카는 위에서 들려오는 터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머나 벌써 불꽃놀이 시작이야?”

그 때 다시 본 퍼블리의 얼굴은 슬픔과 더불어 무언지 모를 거에 대한 공포로 얼룩져있었다.

 

그 때 네 얼굴을 네가 못 봐서 그래. 나 아직도 기억나.”

아아 그거? 해결됐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까먹었어.”
그런 표정까지 지어놓고선...그 때 내가 무슨 미련 남아서 떠돌아다니는 시체가 됐나 싶었잖아.”

그에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마저 얘기를 이어갔다.

보통 성인이 되는 나이는 20살이지?”

보통이 아니라 당연한 거지.”
밸러니 숲 정화 때가 60년 전이지?”
정확히는 64년 전이야.”

뭐 한 50년까지는 청춘인 나이라고 하지만 거기서 10년 정도 더 가도 젊은 축에 속하려나? 어린 건 확실히 아니고.”
그건 평균 기준이라서 뭐라 말하기 애매하네. 요즘엔 80까지도 젊대.”

잠시 쉬어가던 퍼블리는 마저 얘기를 덧붙였다.

그래. 그리고 현재 공주님이 그 정화 때 참가한 쪽이고.”

우리 마녀들 측은 공주님이 직접 군대를 이루고 선발에 나서서 간 거니까. 그래서 지금 공주님을 많이 지지하고 있잖아. 그런데 얘기가 딴 데로 새는 것 같은데 누가 네 작년까지 끝없던 질문을 해결해준 거니?”
그에 퍼블리가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난타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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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바로 방금 전까지 얘기하던 저주였다. 퍼블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에 대해 묻고 싶었다. 아빠는 흑기사단이었고 숲에 들어갔으며 저주를 받았냐고, 그리고 그 저주는 지금도 아빠를 괴롭히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슬픔, 조급함, 아닐 거라는 미약한 기대와 절박함이 목 끝까지 쌓인 퍼블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마법사에게로 달려간 퍼블리는 주변의 시선들은 물론 뒤에 있을 아난타도 잊고 입을 열려던 순간

..!?”

갑작스레 무언가가 머리 위로 푹 내려와 시야를 가렸다. 당황한 퍼블 리가 허둥거리며 잡고 올리자 분명 바로 앞에 있었던 마법사는 어느새 교문 밖으로 유유히 나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알 수 없는 상황에 얼떨떨하게 서있던 퍼블리 뒤로 아난타가 다가와 말한다.

모자네요?”

...?”
퍼블리 학생한테 모자를 씌워주고 바로 가버리셨는데...제 모자를 빌려드릴까 싶었는데 다행이네요.”

그 말에 퍼블리는 잡고 있던 걸 잡아 내렸다. 분명 집에 두고 온 모자였다.

저 분은 퍼블리 학생의 어머니신가요?”
네에...”

그제야 퍼블리는 주위를 돌아봤다. 짐을 나르던 학생들은 퍼블리와 마법사에게 시선을 주다가 금방 다시 돌리거나 밖으로 다시 나간 마법사를 제법 오래 보고 있다가 모습이 안 보일 때쯤 곁의 친구와 함께 뭐라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마 여름인데도 한겨울 마냥 온 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옷을 입었는데 망토까지 걸치고 있었으니 그에 대해 뭐라 얘기하고 있을 게 뻔했다. 고개를 돌려 이번엔 아난타를 바라보자 의아해졌다. 딱히 별일 없는 듯이 물어보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아난타는 식은땀을 흘린 채 이미 사라지고 없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쫓기라도 하듯 마법사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당황, 놀람 등 기타 알기 힘든 여러 가지 감정들이 녹아들어있던 얼굴이 자신을 부르는 퍼블리를 향하자 담은 감정은....

“...혹시 퍼블리 학생 어머님께선 왕궁 마녀신가요?”
? 아뇨! 전혀요!”

이 모자에 이미 방어마법이 새겨져 있네요. 원래 우리가 축복으로 내릴 방어마법보다 더 강하고 고차원적인 걸요? 이 정도 마법실력이면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훨씬 뛰어넘었어요.”

퍼블리는 그에 뭐라 말해야할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아난타는 그저 감탄하고 싶었던 건지 더 물어보지 않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며 인사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에 퍼블리는 모자를 끌어안은 채 아난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있다가 근처에 있던 평평한 돌 위에 털썩 앉았다. 모자를 만지작거리다 쓴 퍼블리는 그냥 흘러듣는 것처럼 아무런 반응 없이 듣는 마법사가 실은 제 말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는데 기쁜 마음이 들었다. 바로 이 모자가 그 증거가 아닌가. 아마 어제 저녁에 했을 말을 기억하는 게 틀림없었다. 다만 기쁨보다 더 많은 심란함이 짓누르는 터라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아난타가 말한 저주라는 게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금 사라진 아난타에 대해 다시 생각했을 때 이번엔 의아함이 불쑥 튀어나왔다. 분명 아까 퍼블리가 부를 때 돌아보며 담은 감정은 분명

“..뭔가 도서실에서 책 못 빌리게 됐을 때보다 훨씬 더 미안해보이던 표정이었는데?”

뭐에 대해 미안한 표정이었을까. 순간 도서번호가 스쳐지나갔지만 고개를 저었다. 일단 뭐든 간에 마법사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너희 엄마가 오셨다고?”

.”

모자 가져다주러?”
“....”

너희 엄마가?”
아니카는 눈을 크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계속해서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그도 그럴게 왕국 내에서 마법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퍼블리를 제외하면 아니카 밖에 없었다.

학교가 멀다고 할 순 없는데 번화가를 지나칠 수밖에 없잖아! 물론 장 보러 갈 때 근처 작은 상가는 가보겠지만 이렇게 마녀가 많이 돌아다니는 번화가를 지나쳤다고?”
아무리 마녀왕국의 옷을 입는다 해도 마녀는 마녀고 마법사는 마법사라는 게 대번 티가 난다. 그런데 마법사는 15년 동안 들키지 않고 살아왔다. 그만큼 들키지 않는데 심혈을 기울었다는 건데 그 결과가 바로 저렇게 꽁꽁 싸맨 모습이다. 누구라도 저렇게 체형이 가려질 정도로 입고 목을 가리다 못해 입까지 가리고 모자까지 쓰면서 눈만 제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싸매면 그 알맹이가 마녀인지 마법사인지 아니면 마법인형인지도 알 수 없을 거다. 그리고 그 다음은 되도록 마녀들이 돌아다니는 곳에 가지 않는 거였다. 퍼블리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입학서를 작성하러 갔을 때와 입학식 때, 단 두 번만 학교에 왔었다. 마녀가 많은 번화가를 지나고 마녀가 많은 학교에.

“...대체 무슨 일이람?”
아니카는 드물게 늘 달고 살다시피 하던 웃음마저 지운 채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면에 퍼블리는 마법사가 그렇게 제 안전에 신경을 쓴다는 걸 깨닫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머리 위에 쓴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실제로 번화가를 지나다가 퍼블리 위로 망치가 떨어졌었는데 모자가 푹 꺼지거나 쓸린 흔적은커녕 오히려 망치가 깨졌다는 웃지 못 할 일화가 탄생했다. 그 때 아니카가 질린 목소리로 대체 학교에서 우리 모자에 무슨 마법을 건 거냐고 했을 때 마법사의 이야기가 나오게 됐고 아니카는 헤어지는 갈림길에 도착할 때까지 심각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퍼블리는 분명 마법사에게 물어보려는 마음이 그득했지만 막상 문을 앞에 두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저번에 예전에 구해했던 마법사와의 사이를 끝냈다고 했던 그 날 퍼블리는 문득 무서워졌다. 이제까지 말하지 않은 데에 이유가 있고 계속해서 물어본다면...거기까지 생각한 퍼블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엄마. 얼마 안 있으면 축제인데 같이 돌아다니지 않을래요?”
저녁을 먹을 때 용기를 내보려 했으나 나온 말은 저것뿐이었고 그 이상은 없었다. 그렇게 진전 없이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연달아 지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축제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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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은 순식간이었고 그에 비해 많아봐야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시험시간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수많은 학생들이 우울해지는데 매우 충분해지는 시간이었다. 아니카는 시험시간이 끝나자마자 교탁 위로 날아가는 시험지들을 보고 있다가 옆에서 엎어져 있는 퍼블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애들은 몇 번 문제를 못 썼다거나 아는 걸 까먹었으니 좀 더 집중해서 공부할 걸이라는 후회를 하고 있는데 우리 근육이는 무슨 후회를 하고 있니?”

“...그냥 엄마한테 가르쳐달라고 할 걸...”
코앞에서 날아가는 비행신을 잡아볼 엄두가 안 났어도 신어보고 싶은 게 마녀 심리지~”

 

물론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쪽지시험 아닌 쪽지시험을 시작으로 다른 과목들의 시험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쪽지시험 이후의 후회와는 별개로 힘든 건 정말 힘든 거였는지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결국 한계에 부딪혀 자진해서 교과서를 들고 마법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남은 2주간의 시험기간이 끝나고 눈앞에 들이닥친 시험을 끝낸 학생들은 그대로 환호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번화가를 돌아다니던 마녀들과 가판대에 물건을 올리던 상점 주인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다니는 학생들에 깜짝 놀랐지만 곧이어 시험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제 할 일들을 하러 바삐 움직였다.

이젠 왕국의 모든 마녀들이 바쁠 시기였다. 시험기간이라 주춤했던 학생들도 다시 전처럼 눈에 불을 키우고는 손과 발을 바쁘게 움직이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주, 정확히는 닷새 후가 축제 시작의 날이다. 1년에 한 번 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여름 중의 사흘. 가장 성대한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다. 왕국의 모든 마녀들이 축제 준비에 열을 내고 있었고 학생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동아리에 들어간 학생들이 가장 바빴는데 동아리에 들어가지 않은 학생들은 바쁜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소매를 걷고 나섰다. 동아리가 아닌 애들이 도와준다고 해봐야 필요한 준비물이나 책상들을 옮기는 게 다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다른 동아리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이른바 땅따먹기라는 게 있다. 각 동아리들이 축제 행사 때 쓸 수 있는 땅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지만 동아리 인원수가 많다면 자리는 턱도 없이 부족했고 그로인해 인원수로 밀어붙이는 상황이 나타나자 인원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동아리들은 제 친구들을 불러 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당연하게도 통제를 맡는 선도부 또한 바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게 바로 아니카가 지금 퍼블리의 곁에 없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혼자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도서실은 미안하게 됐어요오..”

..아니 괜찮아요! 축제 끝나고 가면 되니까...”

현재 학교 내의 유일한 마법사이자 선생인 아난타, 그렇게 한창 축제준비로 바쁜 와중에 할 일과 같이 있을 친구가 없는 둘이 만났다.

그런데 왜 여기서 이론만 가르치고 계시는 거예요? 실전 전투마법 교관으로 가면 딱 좋으실 것 같은데...”

아하하..그건 의도치 않은 거예요. 저주 때문에 걸리는 게 좀 많아요.”

저주요?”

난감하다는 얼굴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던 아난타는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돌아다니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둘에게 직접 다가오는 학생들은 없었고 짐을 나르느라 바빠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고 느껴졌다. 마치 주변의 소리가 시간을 빼앗긴 것처럼.

이건 극비 사항인데 특별히 퍼블리 학생한테만 말해줄게요.”

..극비면 더더욱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높으신 분들 엿 좀 먹어보라는 것도 있고 퍼블리 학생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

그 말에 당황해하는 퍼블리였지만 아난타 또한 얼굴에 철판을 어느 정도 깔아놓은 유형이었는지 마치 오늘 날씨는 햇빛이 쨍쨍하네라는 어투로 태연하게 얘기를 꺼낸다.

정화 때 숲에 들어간 자들은 목표인 정화는 성공했지만 숲의 주인인 밸러니의 저주를 받았어요.”

목소리가 또렷하게 귀에 들어오고 퍼블리는 자연스럽게 듣는 데에 집중했다.

저의 저주는 자세하게 말하기엔 곤란해요. 저주가 괜히 저주가 아니니 그 저주의 내용을 상세하게 입에 담으면 들은 사람은 간접적으로 그 저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거의 그 때부터 깨어날 때까지 계속 잠들어있던 거나 다름없던 그런 저주지요. 물론 그 저주는 개인마다 달랐고 다른 분들은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 자세히는 몰라요. 그 날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아난타는 어쩐지 반가운 기색이 담겼지만 그보다 더한 슬픔을 담은 목소리로 말을 다시 이어갔다.

어쩌면 퍼블리 학생이 말한 패치라는 마법사도 우리의 예상처럼 그 때 숲에 들어간 마법사였다면 저주는 지금도 계속 괴롭히고 있을 거예요.”

그 말에 퍼블리는 냉기가 그대로 심장을 얼려 쿵! 바닥에 떨어뜨리는 느낌을 받았다. 최대한 진정하며 숨을 고르는 동시에 소리들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학교 내의 길목을 채우는 풀벌레 우는 소리와 그보다 더 큰 학생들의 목소리들이 주위의 고요함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퍼블리 학생. 오늘 왜 모자를 안 쓰고 온 건가요?”

방금 전까지 아무 말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화 주제를 돌리는 아난타에 퍼블리는 바로 그 말을 붙잡아 대답했다.

모자요? ..일단 교복 세트지만 모자는 역시 걸리적거리고 모자는 자유라고 들어서...”

아뇨아뇨! 이따가 점심시간 때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안전의 축복을 걸 건데 모자랑 교복에 방어 마법을 걸어줄 예정이에요. 축제 때문에 급하게 짓는 임시 건물들이 많아 머리 위로 떨어지면 큰일이니까요.”

그에 퍼블리는 깜빡했는지 눈을 깜빡이며 짧게 아 하며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더듬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모자를 쓰고 오는 애들이 많았다는 게 떠오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머리에 방어 마법을 걸 순 없나요?”

“...머리를 보호해야하니 모자를 단단하게 하고 충격 흡수하게 만드는 원리예요. 머리에 걸어봤자 의미가 없답니다.”

그 말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퍼블리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 여름에도 꽁꽁 싸맨 옷차림만큼 먼저 눈에 들어온 모자 아래 붉은 머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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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튀어나간 말을 수습하려고 횡설수설하며 아무런 말이나 꺼내기 시작한 퍼블리였지만 오히려 더 말이 꼬여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퍼블리가 처음 꺼낸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마법사는 정신없는 퍼블리의 모습에 진정시키고자 대답했다.

끝냈어.”

?”

간신히 제정신을 붙잡은 퍼블리가 시선을 바로잡으며 반문했지만 마법사의 시선은 멀어보이는 곳에 있었다.

그 집을 떠난 그 날. 내가 끝냈지.”

그런 마법사의 얼굴엔 바로 그 날 느꼈던 냉기가 조용하면서도 간절하게 주위로 손을 뻗고 있었다.

 

거 웃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애매한 걸?”
애매하기 이전에 왜 웃어야할지가 들어가는 거야?”

웃고 싶은 부분은 너의 상상속의 말들과 실제로 나온 말이고 말아야할 부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지?”

그에 퍼블리는 뚱한 얼굴로 아니카에게서 조금 떨어져 걷기 시작했지만 곧이어 어깨동무하며 붙어오는 아니카에 의미는 없어졌다. 그렇게 놀리고 툴툴대는 반응이 반복되면서 교실까지 가는 시간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다만 그런 소소한 장난과 투덜거림이 곧이어 절망으로 바뀌는 건 꽤나 순식간이었다.

다음 주에 쪽지시험 볼 거다. 이제까지 배운 부분에서 낼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대체 어떻게 부담을 갖지 말라는 거냐는 절규들이 꽤나 직설적이게 선생에게 날아들었지만 전혀 타격을 줄 순 없었다. 사실상 다음 주부터 시험기간이긴 했지만 선생의 말은 자기의 정식시험은 바로 그 다음 주 쪽지시험으로 때우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졸지에 이 과목은 시험기간이 일주일로 줄어든 파격적인 과목이 되었지만 다른 말로는 학생들의 정신을 부수는 파괴적인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폭탄을 던진 선생은 특별히 자습이라며 유유히 앞문을 열고 나갔다. 다른 반에도 이 폭탄을 던지러 갔던 건지 야유와 절규와 비명소리들이 벽과 복도를 타고와 현재 다른 반의 상황을 충실히 알리고 있었다. 여파가 남은 반의 학생들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책상에 얼굴을 묻거나 실소를 흘리거나 욕을 내뱉기 바빴는데 퍼블리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첫 번째 무리에 속했다고 볼 수 있었다.

어떡해...하나도 모르는데...”

일주일의 유예가 남았잖니, 똑같거나 비슷한 애들이 많다는 거에 위안을 가져.”

“...빈말로라도 지금부터 하면 괜찮다는 말은 안 해주는 거야?”
빈말이라도 해주기엔 현실이 너무 굳건해서 말이지.”

한동안 학생들의 상태는 계속 됐다. 수업종이 칠 때마다 들어오는 선생들은 그런 모습들에 혀를 끌끌 차거나 안타까워하는 말투로 수업을 나가고 시험범위와 날짜를 공지했다. 그에 당연하게도 학생들은 더더욱 우울한 기색을 뿌리고 다녔다. 이러한 분위기가 회복된 건 점심시간 때였다.

늘 드는 생각인데 입에 뭘 물리면 어린애건 학생이건 어른이건 다 기분이 그나마 올라가나봐.”

그나마 시간이 흐른 덕도 있지 않을까? 기분이 안 좋거나 우울할 때 바로 입에 뭘 넣으면 체할 것 같은데.”

볶은 버섯을 입에 넣으며 말한 퍼블리는 다시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일주일 정도 앞으로 들이닥친 쪽지시험이라는 시험은 제 아무리 긍정적인 마녀라고 해도 부담스러울 거다.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일주일 안에 혈액특성이론을 내 머리에 전부 들어가게 하는 건 무리일 거야.”

전부는? 그럼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말인데 왜 그래?”
“...너무 빡세...”

요컨대 싫다는 말이었다. 잠시 상상의 시간을 가져보던 아니카는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주 어렸을 때 잠깐 보고 퍼블리한테 간간히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파악했는지 아니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퍼블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점심시간이 끝난 이후에도 시험범위와 날짜 공지는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 더 들은 후에야 오늘 하루 학교를 끝내는 종이 울려 퍼지고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깜빡했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됐어?”

? 뭐가?”
어제 너희 아빠가 대답한 이후로 어떻게 됐냐고.”

해가 하늘 꼭대기에 서서 많은 땅과 공기를 달궈놓았는지 걷는데 조금 땀이 흐를 정도로 더웠다. 아니카는 요즘들어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마법을 쓰지 않고 땅에 떨어지지 않게 계속해서 공중에 띄워 차는 기술을 시도해보고 있었다. 아니카의 질문에 반문하면서 돌멩이를 보고 있던 퍼블리는 눈을 깜빡이며 어제의 기억으로 눈앞을 채웠다.

마법사는 그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주앉아 차려놓은 저녁을 먹었고 빈 그릇들을 물통으로 가져가 설거지를 하고 늘 그랬듯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달이 가장 높은 곳으로 뛰어 올라가기 전에 방 안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이자 오늘 아침엔 어제 있었던 대화가 없었던 것 마냥 일어났냐는 인사를 하고 아침을 먹은 후 자신은 늘 그랬듯이 학교를 가야했기에 가방을 들어 문고리를 잡았고 잘 갔다오라는 무뚝뚝한 인사를 받은 후 문을 나섰다. 그게 끝이었다.

그러니까 별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갔다 이 말이네?”

. 그래서 나도 사실은 꿈이었나 싶었어.”

다섯 번째, 이번엔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돌멩이가 다시 차기엔 너무 멀리 날아가버렸다. 다시 땅으로 돌아간 돌멩이를 뒤로하고 둘은 멈춰있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갈림길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니카는 근육이 응원가라도 만들어야겠다며 퍼블리를 놀렸고 퍼블리는 그런 아니카에게 못됐다며 질린 얼굴을 했다. 갈림길에서 멈춰 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둘의 머리 위로 날아가던 비둘기우체부가 특유의 울음을 다섯 번 정도 냈을 때쯤에야 둘은 무언가의 망설임을 꾹 누른 채 서로에게 인사했다.

집에 도착한 퍼블리는 습관적으로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려다가 아무도 없는 걸 깨닫고 그대로 멈췄다. 하지만 곧이어 어디엔가 다녀왔는지 흙이 묻은 손을 털며 들어온 마법사에게 다시 인사했다. 그에 짧게 인사를 받고 대답을 한 마법사는 손을 씻으러 갔고 퍼블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가방을 내려놓은 퍼블리는 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시험공부라는 명분이 한동안 맴돌던 것들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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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는 마녀왕국의 장미 정원에만 있고 장미를 볼 수 있는 건 아기를 키울 자격을 갖추게 된 마녀가 왕궁 마녀에게 요청해서 좌표 추적도 할 수 없는 공간이동 마법으로 장미 정원에 갈 수 있으니...”

그렇게 말한 아니카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가 천천히 눈을 뜨곤 퍼블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밸러니 숲의 정화 때 참가한 마법사측의 네 팀. 그 중에서 이 마녀왕국의 공주님과 교류했던 흑기사단.”

퍼블리는 아니카를 보고 있지 않았다.

너희 아빠는 흑기사단원이었고 공주님에게 장미 씨앗을 받아 네가 태어났다까지 생각했고 네가 생각한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구나?”

퍼블리는 발끝으로 땅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꼭 장미나 호수에서만 아기가 나오는 건 아니야.”

그 말에 땅을 두드리는 제 발을 보고 있던 퍼블리가 고개를 들었다.

장미 씨앗의 근원과 푸른 달을 비추는 호수의 근원은 각각 마녀와 마법사들의 마력이라고 했어. 우리가 마법을 쓸 때마다 마력들은 당연히 빠져나가고 그만큼 다시 돌아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린 늙어가고 쓴 마력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잡아끄는 힘이 점점 줄어들어 끝에는 자연에 모든 마력들을 맡기고 잠든다고 했어. 물론 표현은 이렇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늙어 죽는 거지. 그리고 늙어 죽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양하게 죽어. 독초를 먹고 죽거나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죽거나 마법 실험이 실패해서 죽거나.”

차례차례 죽는 예시를 들며 그에 맞춰 손가락을 펼치던 아니카는 곧이어 다섯 손가락 전부 쫙 폈다.

어쨌든 죽은 자들의 마력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 바람이랑 흙에 뒤섞이고 구름에 담겨 흘러가다가 비가 내리면서 같이 내려가고 땅으로 스며들거나 공기 중에 떠돌아다녀.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자연이랑 다를 바 없어졌지만 기본적으로 마력은 뭉치는데 강해. 선생님들이 말하기를 특히 마녀의 마력은 뭉치려는 특성이 마법사들보다 더 강하다고 가르쳐줬으니 과거 마녀들의 마력이었던 게 뭉치면?”

펼친 손가락을 모두 접어 주먹을 쥐어본다.

바로 장미 씨앗이 되는 거지.”

열심히 경청하는 퍼블리를 보며 아니카는 더 짙게 웃었다.

우리 근육이 역시 이런 거 배울 때 자거나 딴생각했구나~? 알고 있으면 말하는 중간이나 내 말 끝나고 바로 알고 있다고 말했을 게 정상인데~”

..들었지만 잘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그래그래~ 어쨌든 장미 씨앗이 일반적으로 마녀가 태어나는 기준이지. 그래서 왕궁에서 장미 정원을 만든 거야. 장미 정원이 뭉치는 성질이 강한 자연 마력들이 쉽게 뭉칠 수 있게 설계된 환경이라나 뭐라나. 일단 근본적으로 아기들이 태어나는 근원은 바로 마력이다 이 말이지. 장미 씨앗 말고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야. 하나는 마녀와 마녀의 결혼. 이 경우엔 무조건 마녀가 태어나. 다른 하나는 마녀와 마법사의 결혼.”

결혼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퍼블리는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그런 퍼블리를 보던 아니카는 어쩌다가 놀러나온 시간이 수업시간이 되어버렸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저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혼이라는 건 연애를 넘어서 평생을 함께하는 거야. 연인에서 가족이 되는 거지. 예전에 너희 아빠한테도 구애하던 마법사 있다고 나한테 말했었잖아.”

구애라는 말에 검고 노란빛이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며 스쳐지나갔다.

하는 마녀들이 드물어서 모르는 마녀들이 대부분이야. 어차피 아기가 생겼으면 하면 왕궁 마녀에게 장미 정원으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하면 되니까. 장미가 아닌 자기들만의 마력으로 아기를 태어나게 하려면 결혼 절차가 필요해. 그렇게 결혼하고 나서 요람에다가 풀이나 꽃 같은 자연물들을 담고 둘의 마력을 하루 동안 쏟아낼 수 있을 만큼 쏟아내는걸 10달 동안 반복하면 그 다음날 요람 속에 누워있는 건 넣어놓은 자연물들이 아닌 아기가 누워있다고 해. 그게 바로 결혼한 마녀 둘이 아기를 태어나게 하는 방법이지. 마법사들끼리는 모르겠고 마녀와 마법사가 결혼했을 땐 둘 중 한명의 방식을 택한다고 해. 다만 태어날 아기는 하루 동안 쏟아내는 마력이 더 많은 쪽의 아기가 태어나. 마녀가 더 많으면 마녀가, 마법사가 더 많으면 마법사가.”

열심히 경청하던 퍼블리는 의아했는지 바로 물어본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그에 아니카는 별말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다.

그야 내가 결혼해서 태어난 마녀니까.”

 

해가 서쪽하늘을 태우면서 내려갈 때쯤에야 집 앞에 도착한 퍼블리는 이 문을 열고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이 일어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늦게 들어온 거야 중간에 친구랑 놀다 왔다고 하면 되는 거였지만 온통 아니카가 해준 이야기들로 가득 찬 머리 때문에 무슨 말이 튀어나갈지 자신도 모를 상태였다. 퍼블리는 이리저리 튀어다니는 말들을 정리하고 가다듬기 시작했다. 고심하던 끝에 드디어 단어와 문장의 순서를 갖춘 말들은 여전히 중구난방이었지만 어느 정도 진정한 퍼블리는 다시 생각과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진정하고 나서 첫 번째로 불쑥 튀어나온 말은 이러했다.

제 진짜 엄마는 어딨어요?’

그리고 좌절했다. 저게 말이야 흙이야라며 저리 치워내기 바빴다. 문을 열자마자 저 말을 마법사에게 한다면 어쩐지 발길 하나 오지 않는 이곳에 마녀들이 옥수수 알갱이들을 씹으며 구경하러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그 외에도 정화 때 아난타 선생님을 봤었는지와 공주님에게 무엇을 주고 장미 씨앗을 받았느냐라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정되긴 글렀다며 그대로 문 앞에서 주저앉은 퍼블리는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지만 밀려오는 배고픔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일어섰다. 심호흡을 하며 문고리에 올린 손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눈을 질끈 감으며 문고리를 돌리자 낡은 문이 끼익 우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시계를 보고 있던 마법사는 문소리에 고개를 돌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들어오는 퍼블리를 봤고 평소보다 더 굳어있는 것 같은 마법사의 표정을 마주하며 한순간 시간이 멈춘 느낌을 받았다. 입을 달싹이던 퍼블리는 문이 다시 끼익 울면서 닫히자 퍼득 정신을 차리고 마법사를 부른다.

아빠.”

자신을 부르는 말에 마법사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예전에 아빠한테 구애하던 그 아저씨와는 어떻게 됐어요?”

퍼블리는 그 순간 다시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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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로메루와 밸러니를 쓴 사람이구나...게다가 둘의 친우였다니 대단한 분인데?”

이 시와 글만 남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해. 시가 적힌 종이에 그려져 있는 무늬가 바로 우리가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이라고 부르는 그 장식무늬야.”

퍼블리는 집에 있는 옷장 안에 잔뜩 있을 옷들 위의 무늬들을 떠올렸다.

장미무늬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장식무늬인 모글리제의 산들바람. 하지만 대부분 모글리제라고 부르기에 산들바람에 대해 말한다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마녀나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마법사라면 의아하다는 기색이 만연하다. 비오는 날의 호수처럼 차오르는 상념들을 담아 책에 적힌 글자들을 쓸어보자 손을 많이 안 탄 종이 특유의 빳빳함이 현실과 상념을 눈앞에서 섞기 시작했다. 그러다 툭툭 건드리는 느낌에 흐려져 가던 현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 ?”

쉬는시간이야. 아직도 졸렸으면 그냥 엎드려서 자면 되지 왜 눈뜬 채로 자고 있었어?”

, 그냥 멍하니 있었던 거야.”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아니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펜을 집어들었다.

책의 오른쪽 윗모서리에서부터 아래로 사각이며 내려오는 상념의 첫 시작은 숲이었다. 이어 펜이 선을 그리며 내려가고 쓰는 건 마법사였다. 그 둘에서 멈춰 톡톡 점을 찍어대던 펜은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꽤나 빠르게 움직이는데 이윽고 드러난 단어는 마을이었다. 꽤나 흥분했는지 마을이라는 단어에다가 계속해서 동그라미를 치던 퍼블리는 아니카가 교실로 들어오자 굉장히 빠르게 아니카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퍼블리의 행동에 아니카는 당황한 목소리로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

쉬는시간 얼마 안 남았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퍼블리에게는 그 종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깨달음을 대신해주는 것만 같았다. 곧이어 앞문으로 선생이 들어오자 여전히 잡고 있는 아니카의 손을 끌어 자리로 돌아가고는 다시 펜을 들고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맨 처음 만나고 늘 같이 놀았던 그 마을! 혹시 어디였는지 기억 나?’

당연히 기억나지. 마지막으로 갔던 게 아마 1년 정도?’

그럼 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가자! GM할아버지알지? 그 할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근데 문제는 그 할아버지 어딘가로 여행 갔는데?’

그 대답에 쩡하니 굳은 퍼블리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움직였다.

어디로?’

나도 몰라. 엄청 긴 여행이 될 거라는데? 못 돌아올지도 모른대.’

그 말에 눈에 띄게 좌절한 퍼블리는 그대로 책에 얼굴을 묻었다. 곧이어 자는 녀석 깨우라는 선생의 외침이 있었지만 아니카는 그저 퍼블리의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누군가의 안타까운 사정과는 별개로 수업은 야속하게도 계속 됐다.

 

“GM할아버지라면 알고 계실 것 같았는데...”

같은 게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면 다 알고 있을 걸. 근데 그 할아버지 은근 다 알려주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안 알려주는 거도 있는 그런 느낌이어서 물어봐도 많이는 얘기 안 해줄 것 같은데?”

특히 너희 아빠 얘기라면 더더욱.

뒷말을 삼킨 아니카는 울적해진 퍼블리에 맞춰 느리게 걸었다. 늘 그렇듯 나오는 갈림길에 인사하려던 퍼블리는 곧이어 나온 아니카의 인사 아닌 다른 말에 그대로 멈췄다.

오랜만에 놀러갈래?”

어디로?”

어디든.”

그렇게 대답한 아니카는 퍼블리의 손을 잡으며 번화가로 발을 옮겼고 퍼블리 또한 아무 말 없이 아니카가 가는대로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랜만에 나온 번화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축제 준비로 한참 복잡한 때였다. 운동기구를 판매하는 가판을 바라보는 퍼블리와 딱히 집중해서 보는 것 없이 퍼블리를 따라 구경하던 아니카는 그렇게 30분 동안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번화가 골목을 돌기 전에 발길이 조금 뜸해졌을 때 나오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잠시 돌아다니는 걸 멈춘 둘은 잠시간 아무런 말이 없다가 충분히 쓰다듬을 받은 고양이가 떠났을 때 다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일단 너희 집 비밀상자가 열쇠는 물론 자물쇠랑 여는 데도 없는데다가 너무 꽉 다물고 아무것도 너한테 알려주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 솔직히 무용담이나 학창시절의 교육제도 같은 건 말하지 않을까 싶은데 너무 돌같이 있으니 네가 뭐라도 알고 싶어하는 건 이해해. 그런데 넌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걸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단 말이지.”

“...사실 그것들도 좀 궁금하고 들어보고 싶은데 네 말대로 그런 것들보다 알고 싶은 게 있어.”

퍼블리는 쭈그려 않던 다리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고양이도 마녀들도 지나다니지 않고 들려오는 거라곤 벌레가 찌르릉 울어대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니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아빠는 마법사야.”

발끝을 세워 땅에 툭툭 두드리면서 덧붙인다.

나는 마녀고.”
아니카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도 호응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예전에 아빠보고 싶다고 울었을 때 GM할아버지가 나한테 가르쳐줬어. 마녀는 장미꽃에서 태어나고 마법사는 호수에서 태어난다고. 호수는 옮길 수 없고 설령 옮기려고 물길을 틀어버리면 물이 오염돼서 나중에 호수에서 태어날 아기한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지. 하지만 장미꽃은 호수에 비해 옮기긴 쉬웠다고 했어. 물론 세심한 주의와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했고 난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 그냥 그 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할아버지가 재밌고 신기한 얘기를 하는구나 싶었지. 나는 그 때 내가 아빠처럼 마법사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마녀래.

잠시 숨을 돌리며 말을 멈추다가도 바로 이어간다.

여기 와서 할아버지가 얘기해주신 것보다 더 자세하게 배웠는데 야생 장미꽃들은 이 왕국 어딘가에 있을 장미정원으로 옮겼대. 하나도, 남김없이. 게다가 그 정원의 위치는 왕궁의 마녀들만 알고 있어.”

그런데 아빠는 대체 어떻게, 어디서 나를, 장미를 찾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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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어제 지진 때문에, 아 지진 아니랬나? 아무튼 안쪽의 책장이 무너졌거든. 그거 하나만 무너져서 그쪽만 통제하면 됐지만 도미노처럼...”

도미노라는 말에 이해가 갔는지 아쉬운 눈빛으로 도서실 너머를 보던 퍼블리였지만 도서실에 붙여져 있는 공사기간은 영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이번엔 아니카가 말했다.

책들도 축제를 즐기나봐?”

실질적 공사는 축제 시작 1주 전에 끝나는데 그동안 들어올 책도 있고 이번에 도서실을 빌리겠다는 데가 있어서 도서실은 축제가 끝날 때까지 안 열기로 했어.”

그렇게 둘은 어쩔 수 없이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책을 추천한 것도 학교 흔들어서 도서실 공사상태로 만들어 놓은 것도 그 선생님이잖아? 귀한 거 쥐여 주는 줄 알았는데 분칠한 잡초 주는 약초꾼 아닐까?”

..아니카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인데...도서실이 공사를 하게 됐을 줄은 모르셨을 거야.”

헛걸음을 한 게 조금 짜증이 났는지 아니카의 웃는 얼굴엔 어딘가 서늘한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도서실은 구석진데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식당과 정 반대방향의 탑 맨 꼭대기 층에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아까 물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옆구리가 쑤시는지 냉기는 더더욱 짙어지고 싸늘해졌다. 그런 아니카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기 바빴던 퍼블리는 아쉬운 눈으로 방금 전까지 꼭대기 층에 있었던 탑을 흘낏 돌아보곤 했다.

그렇게 둘은 각각 다른 마음으로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보다 이제 정말 축제가 얼마 안 남았네.”

이번 연구 대회는 얼마나 개판일까?”

개판이라니...”

작년을 벌써 까먹은 거야? 난 마녀가 극한에 몰렸을 경우 그렇게 미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는데. 마법사들도 그러려나?”

“...마법사들도 똑같이 마법 쓰고 연구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똑같지 않을까...”

올해 애들은 얼마나 쥐어짜일려나~?”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말이 나오고 있었지만 딱히 틀린 말이 아니기에 말을 막는 자는 없었다. 아니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부터 퀭한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나타났다. 조심스레 비켜서주면서 그들을 돌아보는 다른 학생들의 눈빛엔 연민과 동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리 중에서 대표로 보이는 학생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수정구를 벽에 붙여놓자 곧이어 자신들의 연구 마법물품을 광고하는 글과 그림이 떴다. 내용은 이렇다.

 

동정은 당일 관객참가로 주세요.

 

돌멩이가 직접 날아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솔직한 광고네.”

사실 표를 찍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나마 참아서 저 정도로 한 게 아닐까 싶어.”

참신하거나 쓸모 있겠다 싶어야 표를 찍든 말든 하지.”

보니까 식물부 애들이네.”

작년엔 뭐였지? 반딧불이꽃이었나?”

올해는 뭘 발표하려나...”

광고를 보려고 모여든 학생들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보고 바로 흩어져 교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퍼블리와 아니카 또한 종이 울리기 전에 교실로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종이 치자 들어오는 건 아난타였다. 아니카의 검은 눈이 교탁을 향하는 아난타를 빤히 쳐다봤다. 그에 식은 땀을 흘리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옆자리에 앉은 퍼블리였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도서실의 책장이 무너져버렸다고 들었어요. 우선 미안하다고 해야겠네요. 어제 학교가 흔들린 건 제 탓이기도 하거든요.”

아니카의 시선을 느꼈는지 미안한 어투로 말을 꺼냈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온 몇몇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책과 공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고를 친 저도 도와야 해서 오늘은 자습이에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교실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학생분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자습시간 동안 모글리제의 시를 읽어보는 게 숙제예요.”

그 말을 끝으로 발을 재촉하며 문을 나섰고 문 닫히는 소리가 조금 지나고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희미해지자 교실은 환호성인지 괴성인지 구분이 힘든 소리로 뒤덮여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교실의 반장이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다른 반은 수업중이라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모글리제의 시?”

산들바람으로 유명하신 분 있잖아. 산들바람 가득한 그 시.”

그 말에 이해했는지 퍼블리는 책을 펼쳐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넘기는 걸 멈추고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하나는 얼음

하나는 냉기

둘이 되는 봄으로

손을 맞잡아

여름을 부르는 숲 위에

모든 걸 지켜보는 햇빛 아래에

숲을 밟는 둘의 발은

어느새 산들바람이 되어

 

그 시는 어른들은 물론 어린 마녀들도 다 알고 외울 정도로 유명하고 대중적인 시였다. 특히 장미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장식인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은 지금쯤 어디 나가있을지 아님 집에 있을지 모를 퍼블리의 보호자의 옷에 늘 달려있었다. 왜 이걸 읽으라고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책의 귀퉁이 부분에 써진 작은 글로 해결됐다.

 

모글리제-로메루와 밸러니의 최초 저자이자 그 둘의 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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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2015.08.05

침대에 누운 채 쪽지에 적힌 도서번호를 쓸어보던 퍼블리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접어 가방 안에 넣어놓은 후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덮었다. 씻고 나서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애써 심란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웃으면서 학교 일화나 그밖에 집으로 오다가 발견한 재밌는 모양의 구름도 얘기했고 마법사는 별 말 없이 들어주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하루를 마쳤다. 잠이 안 오기 전까진.

“으..진짜 불편해...”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 뒤척이는 움직임이 부산스럽기만 했다. 운동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러다가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아빠까지 깨면. 그대로 퍼블리는 생각을 그만두고 이번엔 꼭 잠들길 바라며 눈을 꽉 감았다.

“왜 다 죽어가는 모기 몰골이야?”

“모기라니...왜 하필 모기야?”

“한 대만 쳐도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니까.”

그렇게 퍼블리는 밤을 샜다. 제 몰골이 말이 아닌 건 거울에서도 확인했고 아침에 마주친 마법사가 흠칫 놀라며 보태줬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같이 등교하는 친구가 직접 말로 하니 타격은 만만치 않았다.

“보니까 밤새 모기가 피 빨아먹는 걸로도 모자랐는지 너까지 그렇게 만든 거니?”

흘끗 집에서부터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엄마 속이는 느낌이라 좀 죄책감이 들어서.”

“속이다니? 도서번호를 말하는 거면 그냥 얘기 안 한 거 아니니?”

“몰래 뒤를 캐는 거나 다름없잖아. 아무 말 안하는 건 속이는 거나 다름없는 느낌이야.”

아니카는 그렇게 따지자면 넌 지금까지 계속 속아온 거나 다름없는 거라 말하려던 걸 삼키고 최대한 순화해서 말했다.

“먼저 얘기 안하니 앞으로도 굳이 얘기 안 하셔도 되게 우리가 배려의 차원으로 직접 알아보는 거라 생각하면 되잖니.”

아니카의 위로 아닌 위로에 퍼블리는 거의 반쯤 정신을 놓은 얼굴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퍼블리는 오전 수업 내내 책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카는 자기 책으로 슬쩍 가려주거나

“거기 자는 녀석 깨워라!”

어쩔 수 없이 깨워주기도 했다. 등을 흔들어주니 비척비척 고개를 들며 잠에서 깨려고 허리를 반듯이 세워보기도 하지만 얼마 안 가 고개는 책과 붙어있고 싶었는지 아래로 꾸벅꾸벅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카는 그런 퍼블리의 모습에 모이를 쪼는 닭이 생각났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거나 퍼블리의 이마와 진한 만남을 나누는 책 모서리에다가 쓰진 않았다. 그렇게 졸고 잠들고 깨우고의 반복 끝에 오전수업이 모두 끝나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실과 복도에 울리자 쉬는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란이 일어났다.

“시와 글 선생님이 한 말이 떠오르네. 쉬는시간이 되면 우리는 속삭이 바람을 짓누르는 태풍이고 점심시간이 되면 태풍과 함께 농작물에 들이닥치는 거센 비라고 비유했던 말.”

“아, 점심시간이네. 책...책 찾으러 가자.”

“그 전에 우리도 농작물에 들이닥치는 비가 되러 가야지? 안 그러면 오후에 네 상태는 다 죽어가는 모기보다 더 심해질걸?”

먹을 기분이 아니라는 말은 무시당한 채 그대로 끌려가던 퍼블리는 멍한 얼굴로 복도에 널려있는 창문을 쳐다봤다. 원래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상태를 판단하려 했지만 날씨가 맑아서인지 눈에 바로 들어오는 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살짝 눈을 찌푸리자 순간적으로 어두워지고 하늘이 내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어둡고, 검고, 반가우면서도 왠지 얄미운...그리고 파란색 뭔가가 내려오며 무언가를 감싸고...그런데 그 무언가가 뭐였을까. 파란 것만 있었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예뻤는데. 알록달록하고 그리고..그리고....

“서서 눈 뜬 채로 자는 거야? 정신차려, 우리 근육이.”

아프지 않게 볼을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검은색과 파란색을 누비고 있던 초점이 현실로 돌아왔다.

“어..노란색도 있었나?”

“꿈 얘기하는 거면 난 모르겠고 여기서 노란색은 내 머리카락 밖에 없으니까 얼른 꿈 깨.”

“으응, 미안.”

아니카가 두드릴 때보다 더 세게 자신의 뺨을 짝짝치며 잠을 깨운 퍼블리는 앞서 가는 아니카를 따라 수정구에 손을 대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빈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나타나는 식판엔 영양을 고려한 음식들이 제법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었다.

“오늘은 괜찮네.”

“그런데도 꼭 나가서 먹으려고 하는 애들이 있단 말야, 저기 담 넘어가는 애들처럼.”

둘이 앉은 자리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바로 창문이 있는 자리였다. 아니카의 말과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니 힘겹게 담을 넘고 있는 마녀들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채로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감수하며 담을 뛰어넘으려는 그들은 당연하게도 학생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젓가락을 입에 물던 퍼블리는 밥을 넘긴 후에 감상평을 남겼다.

“애쓴다.”

“애쓰네.”

“저거 잡는 선도부는 어디갔어?”

“저 담벼락에다가 마법 무효화와 반사 마법을 걸어놨으니 선도부는 필요 없겠지?”

“하지만 쟤네들 마법 안 쓰고 순수하게 몸만으로 넘고 있는데?”

“미끄럽게 만드는 마법이나 알람 마법도 건의해봐야겠네.”

교칙 위반의 현장을 목격한 학생과 선도부는 저들이 담을 넘는데 성공할지에 대한 내기를 하기도 하고 본인들이 담을 넘으면 얼마나 걸릴까 시간 계산을 하며 태연하게 배를 채우고 구경했다. 그렇게 구경하는 동안 어느새 식판은 비워졌고 둘은 창문 너머의 성공한 자들과 낙오자들을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끄럽게 만드는 마법 말고도 넘어가려고 붙으면 냄새가 배는 마법도 건의 해볼까?”

“...못됐어, 진짜.”

늘 달고 다니다시피 하는 웃는 얼굴로 짓궂은 말을 하는 아니카에 퍼블리는 질린 얼굴로 한 발짝 멀리 떨어졌다. 담 넘어볼 거냐는 물음에 생각해본적도 없다며 대꾸한 퍼블리는 졸음이 제법 가셨는지 얼굴색도 좋아졌고 걸음도 안정한 상태가 됐다.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도착한 도서실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이 둘을 반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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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얘기해주지도 못하고 가버려서 미안해요.”

“아..아니에요. 수업 때문에 바쁘신데 붙잡아서 죄송했어요.”

아니카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화의 시작은 사과 주고 받기였다. 아니카는 친절함이 모이면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그만큼 모였구나 싶다는 말을 삼킨 채 퍼블리 앞의 아난타를 바라봤다.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쉬는시간 때의 퍼블리의 질문도 들었고 방금 전까지 나눈 대화도 들었다면 자신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게 분명하다. 하물며 선생이란 위치를 넘어서 정화라는 이름의 전쟁까지 치룬 마법사인데 말이다.

“이런, 이번엔 제가 붙잡아두고 있네요. 아까 놀라게 하고 다치게 할 뻔했으니 그에 대한 미안함이에요.”

그렇게 말하던 아난타는 들고 있던 걸 건네줬다. 얼떨결에 받아든 퍼블리는 놀라면서 다시 돌려주려고 했지만 어느새 아난타는 다섯 걸음 멀어져 있었다.

“놀란 데에 진정하고 차분하게 하는데 좋은 차예요. 집중력도 높여주니 친구랑 같이 마시세요~”

그렇게 덧붙인 아난타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다시 돌려주기 위해 달리려던 퍼블리를 붙잡은 아니카는 퍼블리가 쥐고 있는 방금 받은 찻잎 통의 뚜껑을 잡아 열었다. 당황하는 퍼블리가 말릴 새도 없이 손을 넣고는 무언가를 꺼냈고 찻잎 통을 멀리 두려던 퍼블리도 그대로 멈춰 아니카의 손에 든 걸 바라봤다. 네모 모양으로 두 번 접힌 쪽지였는데 펼쳐보니 낱글자와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어머~”

“이게 뭐야?”

“도서번호.”

눈치가 빠른 걸 넘어서 길잡이 역할까지 한다는 말을 덧붙인 아니카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아난타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다가 퍼블리에게 말했다.

“일단 도서실을 찾아가봐야겠네.”

“도서실?”

“이렇게 친절하게 길까지 가르쳐 줬는데 안 가면 섭하겠지~ 내일 점심시간에 도서실 가서 이 책 찾아보자.”

쪽지를 다시 곱게 접어 돌려주는 아니카를 보고 의아하다는 투로 말을 꺼낸다.

“무슨 책이길래 이렇게 쪽지를 숨겨서 주는 걸까?”

“우리가 숨기니까 그쪽도 숨기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 거겠지. 일단 우리한테 필요할 책일 거야. 아니면 오지랖 좀 더 부려서 추천하고 싶은 책을 적어서 넣어놓은 거겠지. 이를테면 왜 다칠 뻔하고 놀랐는지 모를 퍼블리의 심장을 진정시키는 방법이라던가?”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에 퍼블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점심시간에 나 혼자 교실로 돌아갈 때 앞에서 벽이 무너졌었는데 그게 아난타 선생님이 부순 거래.”

“보기랑은 다르게 꽤 과격하시네~?”

“아무래도 정화 때 직접 숲으로 들어가셨던 분들 중 한 분이니까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 본인 말로도 격투가라고 했고.”

찻잎 통의 뚜껑을 다시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던 둘은 갈림길까지 가는 동안 아난타와 책, 찻잎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이내 방향이 갈라지고 대화 또한 자연스럽게 갈라져 끝마치고는 그대로 풀리지 않은 채 각자의 머릿속에 빙빙 돌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서기 전에 퍼블리는 잠시 집주변을 둘러봤다. 언제나 그렇듯이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돌길, 섣불리 발을 들이기 힘든데다가 흙이 많은 터라 구태여 이곳에 발을 들이는 마녀는 없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느 다른 집들과 이 울퉁불퉁한 땅 위에 덩그러니 세워져있었지만 다른 집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여기에 집이 있는 건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큰 길을 지나다니는 마녀들은 다 지나치면서 한 번쯤은 돌처럼 봤을 게 뻔했다. 하지만 정작 이 집을 찾아오는 건 편지를 물고 오는 비둘기들 뿐. 퍼블리는 새삼 제 보호자가 세심하고 철저하단 생각을 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다녀왔습니다.”

집 안에서도 늘 온 몸을 싸매다시피 입는 마법사는 겨울이라면 모를까 겨울이 지난지 한참이고 봄도 열기에 물러나며 함께했던 꽃들을 거두고 간지 오래인데도 늘 저렇게 입는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엄청난 무더위가 쏟아져 찾아올 텐데도 마법사는 저 혼자 겨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시원한 바람이 통한다는 천을 입어도 안에 더 받쳐 입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더군다나 저 천들은 바람이 잘 통하는 천도 아니었다. 어린 날 호기심에 제 아빠이자 엄마랑 똑같이 옷을 입어보고 싶다며 몰래 옷장에서 꺼낸 윗도리를 그 작은 몸에 싸매다시피 입고 햇빛이 쨍하니 내리쬐는 여름하늘 아래로 나가자마자 쓰러진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제 거의 매년마다 묻는 것 같은데 안 더우세요?”

“거의 매년마다 같은 대답을 하는 것 같은데 안 더우니 멍하니 서서 회상에 잠기는 건 그만하고 들어와라.”

퍼블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씻으러 가려다가 아직까지도 들고 있던 찻잎 통을 발견하곤 새로운 대화 주제를 찾았는지 다시 말을 꺼냈다.

“아난타 선생님이 이거 주셨어요.”

그리고는 점심시간에 있었던 벽이 날아간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 때 어쩌면 다칠 수도 있었던 상황이라 그에 대한 미안함이 담긴 선물이라는 얘기에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듣고 있던 패치는 찻잎 통에 시선을 주다가 수업시간으로 이어지는 얘기에 집중했다.

“어제 아..엄마가 가르쳐주신 대로 마법사측 팀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본인이 전장과 분노에 속했던 마법사이자 격투가라고 했어요.”

“겸손하군. 단순히 속했던 것뿐만 아니라 그 팀을 이끌던 대표자였다.”

퍼블리는 벽 날릴 때부터 범상치 않았더니 역시 엄청난 마법사였다는 감탄을 간신히 삼켰다.

“저주 때문에 한동안 잠든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었는데 지금 신성지대로 들어간 이유가 자신과 함께했던 팀원 분들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마법사는 별 대답이나 호응 없이 그저 눈을 감았다. 뭐라도 반응이 나올까 기대했던 퍼블리는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가지 않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사과 외에 따로 얘기한 건 없었나?”

“네, 없었어요.”

그렇게 대답하고 방문을 닫은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 위로 손을 올리며 그 안에 쪽지가 든 부분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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