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2015.08.05
침대에 누운 채 쪽지에 적힌 도서번호를 쓸어보던 퍼블리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접어 가방 안에 넣어놓은 후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덮었다. 씻고 나서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애써 심란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웃으면서 학교 일화나 그밖에 집으로 오다가 발견한 재밌는 모양의 구름도 얘기했고 마법사는 별 말 없이 들어주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하루를 마쳤다. 잠이 안 오기 전까진.
“으..진짜 불편해...”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 뒤척이는 움직임이 부산스럽기만 했다. 운동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러다가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아빠까지 깨면. 그대로 퍼블리는 생각을 그만두고 이번엔 꼭 잠들길 바라며 눈을 꽉 감았다.
“왜 다 죽어가는 모기 몰골이야?”
“모기라니...왜 하필 모기야?”
“한 대만 쳐도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니까.”
그렇게 퍼블리는 밤을 샜다. 제 몰골이 말이 아닌 건 거울에서도 확인했고 아침에 마주친 마법사가 흠칫 놀라며 보태줬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같이 등교하는 친구가 직접 말로 하니 타격은 만만치 않았다.
“보니까 밤새 모기가 피 빨아먹는 걸로도 모자랐는지 너까지 그렇게 만든 거니?”
흘끗 집에서부터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엄마 속이는 느낌이라 좀 죄책감이 들어서.”
“속이다니? 도서번호를 말하는 거면 그냥 얘기 안 한 거 아니니?”
“몰래 뒤를 캐는 거나 다름없잖아. 아무 말 안하는 건 속이는 거나 다름없는 느낌이야.”
아니카는 그렇게 따지자면 넌 지금까지 계속 속아온 거나 다름없는 거라 말하려던 걸 삼키고 최대한 순화해서 말했다.
“먼저 얘기 안하니 앞으로도 굳이 얘기 안 하셔도 되게 우리가 배려의 차원으로 직접 알아보는 거라 생각하면 되잖니.”
아니카의 위로 아닌 위로에 퍼블리는 거의 반쯤 정신을 놓은 얼굴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퍼블리는 오전 수업 내내 책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카는 자기 책으로 슬쩍 가려주거나
“거기 자는 녀석 깨워라!”
어쩔 수 없이 깨워주기도 했다. 등을 흔들어주니 비척비척 고개를 들며 잠에서 깨려고 허리를 반듯이 세워보기도 하지만 얼마 안 가 고개는 책과 붙어있고 싶었는지 아래로 꾸벅꾸벅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카는 그런 퍼블리의 모습에 모이를 쪼는 닭이 생각났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거나 퍼블리의 이마와 진한 만남을 나누는 책 모서리에다가 쓰진 않았다. 그렇게 졸고 잠들고 깨우고의 반복 끝에 오전수업이 모두 끝나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실과 복도에 울리자 쉬는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란이 일어났다.
“시와 글 선생님이 한 말이 떠오르네. 쉬는시간이 되면 우리는 속삭이 바람을 짓누르는 태풍이고 점심시간이 되면 태풍과 함께 농작물에 들이닥치는 거센 비라고 비유했던 말.”
“아, 점심시간이네. 책...책 찾으러 가자.”
“그 전에 우리도 농작물에 들이닥치는 비가 되러 가야지? 안 그러면 오후에 네 상태는 다 죽어가는 모기보다 더 심해질걸?”
먹을 기분이 아니라는 말은 무시당한 채 그대로 끌려가던 퍼블리는 멍한 얼굴로 복도에 널려있는 창문을 쳐다봤다. 원래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상태를 판단하려 했지만 날씨가 맑아서인지 눈에 바로 들어오는 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살짝 눈을 찌푸리자 순간적으로 어두워지고 하늘이 내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어둡고, 검고, 반가우면서도 왠지 얄미운...그리고 파란색 뭔가가 내려오며 무언가를 감싸고...그런데 그 무언가가 뭐였을까. 파란 것만 있었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예뻤는데. 알록달록하고 그리고..그리고....
“서서 눈 뜬 채로 자는 거야? 정신차려, 우리 근육이.”
아프지 않게 볼을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검은색과 파란색을 누비고 있던 초점이 현실로 돌아왔다.
“어..노란색도 있었나?”
“꿈 얘기하는 거면 난 모르겠고 여기서 노란색은 내 머리카락 밖에 없으니까 얼른 꿈 깨.”
“으응, 미안.”
아니카가 두드릴 때보다 더 세게 자신의 뺨을 짝짝치며 잠을 깨운 퍼블리는 앞서 가는 아니카를 따라 수정구에 손을 대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빈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나타나는 식판엔 영양을 고려한 음식들이 제법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었다.
“오늘은 괜찮네.”
“그런데도 꼭 나가서 먹으려고 하는 애들이 있단 말야, 저기 담 넘어가는 애들처럼.”
둘이 앉은 자리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바로 창문이 있는 자리였다. 아니카의 말과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니 힘겹게 담을 넘고 있는 마녀들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채로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감수하며 담을 뛰어넘으려는 그들은 당연하게도 학생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젓가락을 입에 물던 퍼블리는 밥을 넘긴 후에 감상평을 남겼다.
“애쓴다.”
“애쓰네.”
“저거 잡는 선도부는 어디갔어?”
“저 담벼락에다가 마법 무효화와 반사 마법을 걸어놨으니 선도부는 필요 없겠지?”
“하지만 쟤네들 마법 안 쓰고 순수하게 몸만으로 넘고 있는데?”
“미끄럽게 만드는 마법이나 알람 마법도 건의해봐야겠네.”
교칙 위반의 현장을 목격한 학생과 선도부는 저들이 담을 넘는데 성공할지에 대한 내기를 하기도 하고 본인들이 담을 넘으면 얼마나 걸릴까 시간 계산을 하며 태연하게 배를 채우고 구경했다. 그렇게 구경하는 동안 어느새 식판은 비워졌고 둘은 창문 너머의 성공한 자들과 낙오자들을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끄럽게 만드는 마법 말고도 넘어가려고 붙으면 냄새가 배는 마법도 건의 해볼까?”
“...못됐어, 진짜.”
늘 달고 다니다시피 하는 웃는 얼굴로 짓궂은 말을 하는 아니카에 퍼블리는 질린 얼굴로 한 발짝 멀리 떨어졌다. 담 넘어볼 거냐는 물음에 생각해본적도 없다며 대꾸한 퍼블리는 졸음이 제법 가셨는지 얼굴색도 좋아졌고 걸음도 안정한 상태가 됐다.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도착한 도서실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이 둘을 반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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