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지금 매우 의미없는 시간 위에서 걷고 있는 겁니다."
하얀 공간 위에 두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사람이 누워있는 다른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 검은 가죽으로 감싸여져 있는 손으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당신은 당신을 죽이면서까지 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겁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뺨을 쓰다듬던 손이 눈을 향한다. 얇은 눈꺼풀 너머에 있을 눈동자를 직시하듯이 눈을 떼지 않는다. 이윽고 내뱉는 숨은 소리가 작았지만 탄식 섞인 한숨이다.
"애초에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군요."
우리는 이미 죽었으니까.
"이것 참. 선배님은 언제나 판을 키우는군요."
곤란하다는 말투에 비해 입가의 미소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둥글게 선을 두른 눈매가 고립된 구역을 향하면서 그곳을 기억하려는지 담아두고 있었다. 믄득 올려다 본 하늘은 이제 눈을 감고 잠이라는 휴식을 취할 시간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아름다운 붉은 빛을 내며 점차 검게 변해갔다. 그러한 광경에 묘한 희열과 기대감을 품던 치트가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칼로 글을 새기듯이 날카로우면서도 깊게 되뇌인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목표라는 모든 것은 신중해야했고 그만큼 길게도 시간을 늘어뜨리기도 했다. 누군가가 바라보면 너무나도 짧다고, 혹은 너무나도 길다고 할 수 있는 목표지점은 누구나가 아닌 본인에게 있어선 당연하게도 멀리있었다.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달리기 끝에 도착했을 그곳에서 반기는 것은 기대에 따른 환희, 모든 기대를 짓밟는 배신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려오는 과정 자체에서도 환희를 느꼈다. 그렇다면 그 끝에 있을 환희는 얼마나 거대할까.
"이제 마중 나갈 시간이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보라색을 담은 머리카락이 한순간 흔들렸다가 사라졌다. 이제 기다리는 시간이 막을 내리고 무대를 이끌어갈 시간이 도래했다.
"선배님이 잊으셨으니 다시 한 번 말하겠슴다."
물론 지금 제 앞에 없으셔서 듣진 못하시겠지만.
"저는 게임보단 인형극을 더 좋아함다."
각본은 이미 짜여져 있었고 대사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결말 또한 정해져 있었고 무대가 절정으로 오르는 순간 관객들의 시선이 전부 흥분을 담고 무대를 바라볼 것이며 인형이 그러한 시선을 받아들이지 못해 행여나 무대 밖으로 뛰쳐나갈까봐 족쇄까지 달아둔지 오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인형은 완벽한 인형이 되어 무대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그러한 모습 또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 위한 춤사위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당연한 일과가 되어버린 상상으로 그는 인내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조바심 또한 지니게 되었다. 표면적으론 상반된 감정이지만 그 두가지의 감정은 각자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점점 커지는 그런 종류였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서로가 서로의 자극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희로 바뀔 기대감의 양분. 그는 그것들을 머금고는 사람좋은 얼굴로 발을 내딛었다. 문득 어딘가 슬퍼보이는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가볍게 쓸어갔다. 잠시 멈춰선 그는 이내 흘러지나가는 바람 처럼 흘려보냈다.
석양이 사라지면서 검게 물들기 시작하는 곳을 향해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나?"
높은 톤의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상냥해 보이지만 어딘가 날카롭게 찔릴 것 같은 미소를 띄운 여자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눈을 빛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건 밤이 되어버린 하늘 뿐이었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 발견이라도 했는지 흥미롭게 주시한다. 침대로 향했어야 할 발은 아직까지 탁자 아래의 마룻바닥에 멈춰있었고 침대 위로 누웠어야 할 몸은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이불을 끌어당겼어야 할 두 손은 하나는 얼굴을 받치고 다른 하나는 검지손가락을 내민 채 탁자 위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마치 손님을 기다리는 집주인의 모습이었지만 이 시간에 찾아 올 손님은 없었다. 밝은 노란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사물을 비출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이윽고 다시 나타난 눈동자는 커다란 흥미를 담고 있었다.
"재밌는 손님이 올 것 같네?"
이윽고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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