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원지기의 일은 직업이름 그대로 정원을 지키는 것이다. 남몰래 정원을 가꾸고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을 인도하고 정원을 넘보는 자들을 경계하는 정원지기의 역할은 그 누구보다 중요하다. 무엇보다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을 인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 모두를 인도해야하는건 아니다. 그들 중 우리가 인도해야할 자들을 선별하는데 우리는 그들을 용사 혹은 모험가라고 한다.

-'정원지기가 되기위해 꼭 필독해야하는 서적!'중에서 발췌-

 

"절대 허락할 수 없으니 돌아가게."

그들은 정원의 잡초만큼이나 끈질겼다. 아무리 밟아도 뿌리채 뽑아도 언제 이곳을 벗어난 적이 있었냐는 듯 비웃듯이 그곳에 자리를 잡는 잡초들처럼. 다만 그들은 비웃을 수 없는 위치였다. 오히려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뿌리채 뽑아버릴지도 모르는 그에게 매달려야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을지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알고 있을만한 상황이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십니까? 저희들을 가엽게 여겨주십시오."

그렇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목적의 억지다. 하지만 그런 억지를 듣고 있는 그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래왔듯이 냉정하고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그런 그의 눈을 바라 본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체념의 기색이 올라오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로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간다면 그대로 없어지기는 커녕 전부를 잠식할 것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오늘을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다음으로 날이 밝을 날 또다시 올것이다. 지겹도록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판으로 찍어낸 듯이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며 그에게 존재할지 모를 동정심을 유발한 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 방법이 먹혀들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으로. 이런 그들의 생각을 알고있는 자들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무슨 근거로?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오늘을 끝내기로 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는 투로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가는 그들을 담고있던 아니 담고 있었을지가 의문일 눈의 시선은 금세 방향을 바꿨다. 상대가 무너질때까지 몰아붙이며 한 발 물러나 숨을 고르며 상대가 지칠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끝없을 게임판. 그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동 모든 것으로 그 말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 끝없을 판은 그들 스스로 끝을 맺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무의식이 넓혀가고 있는 지금껏 외면하고 있는 감정의 자리로 인해. 그 감정 이전에 애초에 게임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체념이라는 감정이 자리잡기 전에 오롯이 존재하던 끝 모를 자만이 만든 그저 허무한 허상일 뿐 그에게 있어선 그저 낭비되는 시간이었다. 그 낭비되는 시간이 되돌아오는 것은 얼마남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간을 붙잡혔던 그는 제 할일을 하기위해 발을 움직였다.

"아이고~또 시달리신겁니까?"

이거야 원 유능한 사람도 피곤합니다?

언제왔는지 능글맞은 웃음소리로 어느새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사내의 모습에 영원한 모습을 새긴 화석마냥 변함없던 그의 얼굴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깨 뿐만 아니라 그의 왼쪽 목덜미를 쓰다듬는 무례한 손을 그는 매섭게 쳐냈다. 과장스럽게 뒤로 물러난 사내는 내쳐진 손을 쓸어내리며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내보였다.

"동정심 없다고 오해받는 까칠한 선배님을 걱정하는 후배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다니 정말 슬프지 말입니다?"

"슬픈 얼굴이 다 죽었군."

애초에 나에겐 동정심 따윈 존재하지 않다만?

모든 행동을 과장스럽게 그리고 요란스럽게 하는 사내는 꼭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광대같이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다. 사내의 손길이 닿은 목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데도 흔적을 없앨 것처럼 문지르던 그는 더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담아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끈질기게 앞을 막아서는 사내가 아니었다면. 그저 빤히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거슬렸는지 그의 얼굴에 완연하게 드러난 표정이 만족스러웠는지 사내는 휘파람을 불며 그의 목을 쓰다듬었던 손을 주름이 잡혀있는 미간으로 뻗었지만 사내보다 그가 한 발 빨랐다. 거리를 벌린 그는 싸늘한 눈으로 사내를 흘깃 보고는 자리를 떴다. 이런 둘의 모습을 멀리서 구경하던 다른 정원지기들은 늘상 있는 일이었는지 고개를 돌려 제 할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그 자리에 남은 사내에게 동정 섞인 혹은 비웃음을 담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그 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는 참견 많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패치 선배님 원래 까칠하시잖냐? 상처받지 말고 그냥 친해지는건 포기해."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 하지만 그 속엔 사내에 대한 미련함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비웃음의 근거가 무지에 대한 허상일지는 이야기의 당사자들 뿐만이 알 것이다.


정작 무안하다싶을 정도로 냉대를 받은 당사자는 주위의 시선과 방금 달아놓은 유리창처럼 그 너머가 훤히 보이는 주위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까보다 훨씬 더 즐거워보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즐겁게 만들고 있을까, 그것또한 당사자만이 알 뿐. 하지만 당사자는 타인에겐 말하지 않는다.

"아아 이거 미운털이 아주 단단히 잡혔나보네요?"

다만 당사자끼리 알고있을 뿐.

2.

그와 사내 즉 패치와 치트의 만남은 제3자의 눈으로 봤을땐 철천지 원수나 다름 없었다. 아니 일방적인 원수사이라고 봐야했다. 패치가 일방적으로 치트를 적대하고 싫어하는 기색을 숨김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설령 치트가 근처에 없다고 해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여지없이 불쾌감을 내비추기 일쑤였다. 한 번은 용기있는 정원지기 동료가 궁금증을 풀기위해 과거에 그와 치트에 대한 악연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

"아니. 나는 그녀석을 그 날 처음 봤네만."

패치가 말하는 그 날은 치트가 정원지기로 들어 온 날이다. 사실 정원지기는 적은 편은 아니지만 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새로운 정원지기는 기존에 있던 정원지기의 추천을 받아 후보라는 기회를 잡거나 기존에 있던 정원지기가 은퇴할 때 자신의 자리의 공백을 대신해서 내세우는 후임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추천이나 후임 외에 드물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들어오는 정원지기가 간혹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바로 패치였는데 그렇게 스스로 들어 온 정원지기에게는 특권이 하나 존재했다. 어제 패치를 찾아왔던 사람들도 패치의 특권 때문에 매달리다시피 했고 패치는 매일 거절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 패치 다음으로 스스로 들어 온 정원지기가 다름아닌 치트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는 주목 받게 되었고 패치 또한 같은 이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정원지기들이 새로운 정원지기를 보기위해 모인 그 날 명백히 떨어져있는 거리에도 그 둘을 한데 엮어서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명백한 적대를 목격했다.

이유없이 싫어한다는 것과는 한눈에 봐도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날 처음 본 사람에게 그런 적대감을 드러내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이런 적대를 받는 상대인 치트는 억울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는 그런 패치의 반응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에 그들은 대상을 바꿔서 치트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던 대답이 나올 일은 없었다.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의 대답은 오히려 그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인 애매모호한 대답이다. 이러한 치트의 대답보다는 단호하게 말한 패치의 대답이 그나마 더 나은 대답이라고 생각한 후 그들은 곧이어 의문을 접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그들의 일이 아니니까.


[모든 것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채로 길을 잃은 아이가 되어버렸어
정원사야 정원사야 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인 하얀 정원사야
너를 따르는 빛무리 처럼
너를 따르는 빛무리와 함께
그들을 바로 잡아주렴
검게 변해버린 것들을 너의 손으로 하얗게 물들이렴
정원을 지키는 하얀 정원사야
모든 것을 바로잡아주는 하얀 정원사야
너의 하얀 빛무리들을 우리에게 보내주렴
너의 손길을 우리에게 보내주렴
하얀 정원사야]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몸을 실은 노래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정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저 노래를 모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 정원의 주민이 아니다라고 단정지을 만큼 유명하면서 누구에게나 전해져오는 노래다. 노래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인공이자 제목인 '하얀 정원사'라는 노래는 다름아닌 '정원지기의 기원'이라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대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남아있는 전설 중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초장을 해석하고 변형하며 동요 수준으로 문장을 늘리고 노래로 전해진 덕에 전설은 묻혀지지 않았다.

정작 제대로 된 전설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평론가들은 현존하는 시조 중 가장 아름다운 시조라고 칭했고 수많은 해석가들은 그들보다 많은 해석을 내놓았으며 음유시인들은 다양한 노래로 편곡하여 연주를 했다. 평론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어와 해석가들이 가장 유력하게 믿고있는 해석과 음유시인들이 가장 공을 들인 음률이 만나 현재의 '하얀 정원사'가 만들어졌다.

"선배님도 저 노래 좋아하십니까?"

언제 따라온건지 또다시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는 치트를 보고 늘 그러했듯이 패치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간혹 이상하게도 자잘한 부분에 집요한 기질을 발휘하는 치트 때문에 패치의 기분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부담스러운 그의 눈을 피해 천진난만한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 본 패치는 다른 의미로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낯간지러운 노래군."

듣기에 따라서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 대답이었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유치한 노래라는 뜻이 담겨있을 수도 있고 나머지 하나는

"작사가가 선배님이셨습니까?"

다른 내용으로 되돌아온 질문에 그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내려놓았던 적대감을 다시 끓어올려 냉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 냉한 눈 속에 한심함을 담고 있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저 노래가 한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사람들로 인해 모습을 갖추었다는 건 세 살배기 꼬맹이도 아는 것을 자네는 모르는 건가?"

더군다나 저 노래는 나보다 태어난 해가 한참 전에 지났거늘.

패치는 다시 평소처럼 그가 떨어져나가길 바라며 그를 밀어냈고 대답을 들은 그는 다행히 바람대로 패치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들러붙기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처음에는 이성을 잃고 갖은 욕과 함께 주먹까지 휘두르기 일쑤였던 패치가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어깨를 내어주다가 밀어내기로 끝내는 것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밀려난 그는 제 입에서 떠나고 그대로 되돌아온 적도 없는 질문에 멋대로 대답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노래입니다."

가늘게 뜬 푸른 눈이 자신에게 와닿는 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드는지 검은색과 노란색이 함께 어우러진 달밤같은 눈을 검은 밤하늘에게 자신의 일부를 맡긴 초승달처럼 곱게 접으며 한껏 미소를 띄었다. 사람의 눈과 손을 유혹하는 정원의 꽃처럼 아찔한 미소였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눈앞에 있는 상대에겐 바람에 불어들어와 눈을 따갑게 만드는 흙보다 더한 눈 테러였다. 같은 땅을 딛고 있는 발의 방향을 바꾸고 재촉한다. 늘 그러했듯이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뜬다. 또다시 평소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그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입가의 호선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다시 돌아온 그들의 정적에 요란스러우면서도 잔잔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그 빈자리를 메운다. 자리가 부족했던 건지 이내 노랫소리는 그의 귓속까지 넘봤고 무형의 불청객이 거슬렸는지 감았던 눈을 다시 뜬 그는 아이들을 힐끗 보고는 제 일터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단 말입니다."

어느새 웃음은 사라져버렸다.

3.

어느 특정한 부분을 경계로 세상은 두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곳은 온통 검은 세상, 다른 한 곳은 온통 하얀 세상. 그 두가지 색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세상. 그 둘을 구분하게 해주는 끝이 없는 일직선의 경계 위에 유일하게 색을 가진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부터라는 말이 무색하게 흐르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단이 마련되어있지 않은 무채색의 세상은 색을 가진 존재가 들어와 있어도 꿋꿋하게 본래의 존재를 과시하듯 변하는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색을 가진 이 또한 시간이 흐는다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을 작정인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계속해서 서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채로 무채색의 경계와 끝을 찾는 싸움을 하듯 그의 시선 또한 어느 두 곳에도 두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춰서서 적막과 함께 시간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어느 곳도 아닌 곳에 서 있구나."

그와 동시에 시간을 받아들였는지 눈을 감는다.

"너는 나를 기억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는 다시 눈을 뜬다.

"너와 나는 만나지도 않았고 이제 만날 수도 없는데..."

안타까움을 담은 목소리는 말을 남기고 떠나가버렸다. 이윽고 경계에 머물러 있던 발은 하얀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어느 곳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붉은 빛은 잠시 검은 세상을 등졌다.

 

꿈을 안 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꿈을 꾸기 마련이다. 다만 기억하지 못 할 뿐. 늘 잠에서 깨어나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 마냥 사라지는 꿈이 불만스러웠는지 바로 그 잠에서 깬 패치는 찜찜한 기분에 꿈과 함께 날아간 졸음을 붙잡을 생각이 없는지 그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벗어나 옆에 딸린 창문 너머로 눈을 돌렸다. 아직 해가 뜰 준비도 안 된 한밤중이다. 마침 보름인지 제 모습을 자랑하듯 동그랗게 떠있는 노란달이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마냥 어두운 밤하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저렇게 떠있는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그에게 있어선 진절머리 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달갑지 않은 밤하늘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피로감과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마음 한구석에서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어리석은 의문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왜 하필 그녀석과 닮은 거지?

"...정말 피로가 쌓일대로 쌓였나보군."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이 그러한 의문이 떠오른 것이 못마땅했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위로 누워 눈을 감은 채 다시 잠들기를 재촉했다. 분명 그는 노란달을 자랑하듯 내보이는 밤하늘 같은 녀석을 싫어한다. 녀석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의 기억에는 처음 만난 날이 새로운 후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이게된 그 날이 분명하다. 그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정원지기가 되기 전의 자신과 만나기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분명히 존재했고 자신또한 의식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유를 모를 뿐.

그 또한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피해다닌답시고 곧장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 민가까지 오기도 했으나 오히려 그것 또한 일정한 패턴이 되어버렸는지 귀신같이 알아채고서는 자신의 눈 앞에서 떡하니 나타난다. 그 이전에 그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지 그것 또한 알 수 없었다. 좋은 목적이 아니란것만 어렴풋이 눈치챘을 뿐.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패치는 또다시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더이상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았건만 오히려 기다렸다는듯 물밀듯이 밀려오는 잡념, 그것도 피하고 싶은 주체가 장악하고 있다는건 여간 불쾌한게 아니었다. 결국 잠을 재촉하는 것은 포기하고 다시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름대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분명 내일 일할때 상당히 피곤할게 뻔하다. 답답한 마음에 눈가를 쓸어내리던 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침대 바로 옆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잡념이 드디어 떠나갔지만 눈 앞이 선명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어지러운 느낌에 그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채로 길을 잃은 아이가 되어버렸어"

본인의 입으로 낯간지럽다고 했던,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노래의 첫부분이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원사야 정원사야 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인 하얀 정원사야..."

하지만 얼마 가지않아 끊어져버렸다.

한 번의 호흡이 지나가고 감았던 눈을 뜨기위해 천천히 들려지고 있는 눈꺼풀 아래로 푸른색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창문 너머로 향한다.

"이것만큼은 같은 의견이군."

나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그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누구이고 무엇일까?

4.

전날 밤의 그의 우려와는 달리 밤새 잠을 설친 것 치곤 그는 다행히도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버틸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을 뿐이다.

"요건 몰랐지!"

그는 바로 눈 앞의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고 아래에 놓여있는 판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 그가 관리하는 정원 구역은 정원지기들에게도,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다른 곳에 비해 넓은 것도 아니었고 선별된 용사와 모험가들이 이곳에 발을 들이기엔 물자지원이 부족한데다 발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곳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저주받은 검은 땅'과 가장 인접했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이미 다른 정원지기들의 활약으로 다른 정원의 땅이 되어버렸고 땅을 넓힐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곳이 다름아닌 '저주받은 검은 땅'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치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이곳의 정원지기를 자처할 때 다른 정원지기들은 그를 만류하는 한편 골칫덩이를 자진해서 맡는 그를 비웃으면서 후련함을 느꼈다. 공백을 원치않는 정원지기의 법칙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자리였기에. 그는 모든 악조건을 무시했고 그 악조건으로 인해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인해 후회라는게 만들어졌다.

"...여기까지 하죠."

"아 왜애~ 이제 재밌어지려는데!"

안내수칙과 실제상황을 겪는 건 명백히 다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을 글로 적어놓으니 주의할 법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엔 예외라는 게 존재했고 그것이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름아닌 그 예외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눈 앞에서 껄껄 웃고 있는 상대를 보니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고 설령 쌓인 피로가 없다해도 만들어질 판이었다. 정원지기가 없는 이곳은 진작에 다른 정원에 흡수되어야 했지만 오랫동안 살아 온 주민들의 거센 반대와 그들에 대한 나름의 배려로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그 유예기간이 끝나가던 찰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영역을 지킬 운명이었는지 가장 필요한 정원지기의 존재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에잉~ 빡빡하긴!"

그가 물러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재차 권유하던 상대도 결국 포기했지만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가의 미소는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대 덕분에 그는 평생 느끼지 않을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눈 앞의 상대는 오랜시간 동안 정원지기가 없었던 이곳을 이끌어가고 유지했던 사람인데다 다른 그 누구보다 많은 걸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고 찾아다니는 정보를 쥐고 있거나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떠날 수가 없었다.

"자네 '하얀 정원사'라는 노래 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노래입니다만."

사실 그는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원하던 정보를 물어보았다. 질질 끄는 성격도 아닌데다 시간의 여유를 느끼는 취미도 없으니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껄껄 웃음을 짓는 상대와 함께 고스톱이라는 카드 게임을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는 처음 이후론 다시 정보를 묻는 것은 신중하게 고려하고 다시 질문을 꺼냈지만 상대방의 특유의 웃음과 입담에 그저 울화가 치밀어오를 뿐.

"그렇다면 이 노래의 바탕이 된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내용은 알고?"

"노래에 비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으니 잘 모릅니다."

사실 그는 모르진 않았다. 정원지기가 되면 당연하게도 알게되는 게 다름아닌 '정원지기의 기원'일텐데 아무리 훼손되었다지만 유일하게 일부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를 모른다는건 정원지기로서 정원지기의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실제로도 그는 정원지기의 역사에는 관심 없었다. 모른다고 대답한 이유 또한 그러한 마음과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라는 뜻이 담겨있었고 상대방이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는 온전히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달랐다. 상대 아니 GM은 여전히 웃는 낯을 고수하며 그 뜻을 못 알아챘는지 혹은 무시하려는지 그의 대답은 별개라는 듯 짧은 시를 읊었다.

"그의 손길은 하얀 빛무리
그저 감싸 안으며
이리저리 튀어나가며 방황하는 그들을
멈춰세운다
움직이지 않는 검은 바위도
그의 손길을 따라 그들의 곁으로..."

GM이 읊는 시는 다름아닌 '하얀 정원사'의 바탕이 된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초장이었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아름답다고 입을 모아 외치지만 그가 보기엔 여느 평범한 시와 다름 없었다. 그는 GM이 갑작스럽게 시를 읊는 것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걸 알았지만 그가 원하는 정보가 아니었고 그 시를 주체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낌새를 느꼈는지 그가 자리를 떠나는 것 보다 GM의 말이 더 빨랐다.

"시 자체보단 시를 해석한 걸 바탕으로 노래가 만들어졌지."

해석은 나도 모르지만 말야!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마냥 해맑아 보이지만 그 해맑음 덕분에 울화와 후회를 느껴본 그로선 달갑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 시가 발견된 것도 바로 이곳이야."

'정원지기의 기원'이라는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이었고 그 전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도 그 전설이 진짜인 것 처럼 아주 오래된 기록 또한 남아있었다. 빛 바랜 종이와 여기저기 망가져 있는 글이 새겨진 비석. 정원지기의 또다른 일은 그것들을 찾거나 찾은 후 훼손된 것이 있다면 그것들을 모아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그 시 또한 온전히 존재한 게 아닌 정원지기들의 작업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그 전설 자체가 정원지기들과 밀접하지만 정원지기들이 그렇게까지 전설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상당히 오랫동안 정원지기를 맡아 온 자들만이 아는 진실.

정원지기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정원을 넓히는 게 아니었다.

"자네가 찾는 곳은 정원지기들의 오랜 숙원을 풀기 위해선가?"

GM의 말에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GM이 하려는 말은 그가 맨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원하던 대답일 수도 있었다. 그는 GM을 바라보며 원하는 대답을 듣기위해 그의 대답을 내놓았다.

"저를 위해서입니다."

뻔뻔하다고 생각할 법한 말이지만 그의 단호한 목소리와 표정을 보면 뻔뻔하다라는 말보단 당당하다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GM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보다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는 번지르르한 말보단 좋네!"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아니! 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난 모르거덩!

그는 또다시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울화에 표정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고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던지 GM은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이곳으로 온 게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서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주먹이 곧장 앞으로 뻗어나가는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이렇게 또다시 평소처럼 시간이 지나갈게 분명한 상황에 그는 다시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문을 열고 GM의 집을 나서기 전 뒤에서 아직까지도 웃음기가 섞인 GM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가들 뒷꽁무니 보단 진짜를 찾으라구!"

그리고 문이 닫혔다.

5.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어린아이였을 때 유일하게 제자리에 앉아있던 어른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잡고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리 또한 찾아서 이끌어주기까지 했다.
흰 색 일색인 그는 그의 하얀 손길을 내밀어 질서를 만들었고 자리를 찾은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라 흰 빛무리가 됐다.
그리고 그는 하얀 신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동화 '하얀 신'의 첫부분-


"영광입니다!"

GM의 집에서 나온 패치는 얼마 안 가 발목을 붙잡히게 됐다. 물론 상대는 그럴 의도가 없었을테지만 패치는 갑작스럽게 닥쳐 온 상황에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 난데없이 자신의 앞을 막으면서 흡사 신도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데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평소의 패치라면 눈 앞의 상대에게 예의상 인사를 건네며 그대로 지나쳤겠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던 패치가 물었다.

"자네는 혹시 예찬(禮讚)인가?"

"네?"

퍼블리는 정원지기 지망생이었다. 정원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가꾸고 지키고 넓혀가는 그들에 대해 어린아이라면 한 번쯤은 담았을 동경을 퍼블리 또한 담았고 담겨져있는 채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상으로 이루어진 동경에 비해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이라는걸 증명하는게 즐거웠는지 이상을 가로막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상이 막히고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멀어지자 그로인해 자리잡고 있던 동경이 사그라드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개중에는 아직까지 동경이 자리잡고 있는 턱에 막연한 이상을 두고 현실과 끝이 보이지 않는, 불합리한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퍼블리는 후자였다. 정원지기가 되려면 능력 좋은 정원지기의 눈에 들어 그 자리를 넘겨받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고 퍼블리가 사는 구역엔 눈에 들기는 커녕 눈에 보이는 정원지기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만큼 막연하다 못해 존재했었나 싶을 가능성이 가망없는 희망고문처럼 드리워진 곳에 바로 그 정원지기가 발을 들였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정원지기가 된 자가.

"저...혹시 말씀하시는 예찬이 제가 알고 있는 그...."

"...아무것도 아니네. 초면에 실례했군."

아니 실례는 오히려 이쪽이 했는데...

패치가 말한 단어의 뜻과 퍼블리가 알아들은 단어의 뜻은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지칭하는 바가 다를 뿐. 더이상의 대화가 이어나가는걸 원치 않았는지 패치는 그 자리를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오~아직 안 갔넹?"

빨리 갈 걸 그랬군.

언제 나왔는지 그들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곳에서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GM의 모습에 패치는 자연스럽게 미간 사이의 주름을 늘렸다. 매번 휘둘리는 통에 경계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방심하는 자신의 모습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 틈새를 노려 자신의 속을 뒤집는 GM의 모습에 머리를 짚는다. 과연 이번엔 무슨 일인가 싶어 GM을 바라보는 한 편 어느 타이밍에 자리를 떠야하나 고심하는 동안 바로 그 GM에게서 경계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 나왔지만 그 내용은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자네, 드디어 할 일이 생겼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용사가 왔다구~!"

정원너머에서 오는 자들이 용사 혹은 모험가로 선택되는 기준은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우연찮게 정원에 당도해 길을 잃고 돌아갈 곳도 정착할 곳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 몇가지 테스트를 거쳐 뽑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원 어느 곳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다.

"우웅?"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는 바로 후자였다.


"드디어 재밌는 일이 벌어지려나 봅니다?"

노란 빛을 품고있는 눈이 곱게 휘어진다. 사람들은 작은 동물들이나 곤충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작 관찰대상이 되면 불쾌함을 느낀다. 물론 그것은 마땅히 불쾌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주변을 경계하게 된다. 그것은 관찰자가 자신의 존재를 들켰을 때 해당하는 사항이었으므로 주도면밀한 관찰자는 아직까진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여유로운 관찰자는 들키지 않으려고 먼발치에서 흔적을 지우는 한 편 관찰대상이 재빨리 흔적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줬으면하는 상반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존재가 발각된 후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는 오직 관찰자와 관찰대상에게 달렸다.

"당신 곁은 언제나 즐거워 보이네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즐겁지만.

스스로를 관찰자라고 생각하는 치트는 관찰대상인 패치가 있는 구역을 주시한지 꽤 오래되었다.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라해도 흔적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저 의심하거나 의심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시선이 닿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무언가 약간의 재미가 필요하다.

"그 때 말했지만 저는 인형극을 좋아합니다."

물론 기억하시진 못하겠지만.

누군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항상 그곳에 있었던 무대. 그 위에서 누구의 명령도 요청도 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빛날 것이고 눈에 띌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완벽한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무대가 무너져내리고 당신은 인형이 되겠죠."

그 모든 것이 진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이고 그는 그 거짓된 것을 이끌며 완벽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미 그의 손을 거친다는 시점에서부터 그것이 거짓이건 간에 그것은 완벽해질 것이다.

그리고 완벽은 하나의 진실로 무너져내린다.

모든 인형극의 시나리오는 관찰자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관찰자는 그런 시나리오를 자신했고 확신했다. 그리고 관찰자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즐기는 관중의 역할 또한 쥐고 있었다. 진실은 바꿀 수 없었고 족쇄 또한 미리 걸어놓은지 오래였다.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입가를 쓸어가면서 미소를 더듬었다. 곧이어 시작될 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극을 기대하는 어린아이 마냥 눈을 빛낸다. 한차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잔잔하게 내뱉는 것이 태풍이 오기 전의 조용한 날씨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당신을 죽이면서까지 무대를 이끌어 나가는군요."

제가 사랑하는 완벽 답습니다. 제 아무리 추악한 진실이라해도 당신의 완벽과는 별개가 되어버리겠죠.

"그러니 나는 당신을 살리겠습니다."

당신이 죽여버린 족쇄달린 인형으로.

6.

"거기서 뭐하니?"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질문에 대답했다.

"그저 서있습니다."

"정말?"

어느새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또다시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긴 온통 하얗구나."

"당신이 만든 곳이니까요."

"나는 하얗게 만든 적이 없는걸?"

"그들에겐 하얗게 보였던겁니다."

"너도?"

이번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어간다.

"그들은 나를 하얗게 보는구나."

"....그것 또한 그들이 그들을 위해서 거짓으로 보고 있는겁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니?"

그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제 그만 놓아주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에 그는 약간 화가났는지 눈을 치뜨고는 따지듯이 말했다.

"저도 이젠 어른입니다. 당신 없이는 못 살아가는 그런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그리울 뿐.

지금까지 흘러간 시간보다 더 길수도 있는, 어쩌면 영원으로 미뤄질 기약없는 재회에도 그는 그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다음엔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많이 늑장을 부리는게 좋겠구나."

작별인사를 하듯 바로 그의 옆에 있었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을 느낀 그는 목소리를 따라 눈을 돌렸다.

처음부터 그의 곁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들어 잠이 자주 깨는군."

그나마 그에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곧있으면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는지 거뭇거뭇하던 하늘 끝자락에서 어스름한 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밤이 찾아오면 그의 머리카락처럼 붉게 사라지던 태양이 아침이 오면 흰 빛을 뿌리며 다시 떠오르는 것에 묘한 느낌과 사소한 신비감에 잠시동안 멍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에겐 하늘 감상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바로 눈 앞에 닥쳐있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용사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수도 있었고 쓸데없는 기대감을 갖게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정원지기들이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그들이 다름아닌 정원을 넓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아니라 정원의 주민과 정원지기들 또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모험보다는 안전을 추구하는 이들이였기에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정원을 넓히는데 동참하는 이들은 혼자서 개척한다기 보단 용사와 모험가들의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낯선 곳으로 들어와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이루어진 용사와 모험가들에 비해 이곳의 사람들은 인도해야 할 그들을 이루고 있는 감정이 상당히 절제되어 있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자신들 즉 정원의 주민들을 위한 마음가짐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책임전가였다. 기대를 떠맡기고 실패하거나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받지 않는 책임전가. 하지만 그러한 사색에 잠기기도 전에 또다시 당황스러운 만남이 이어졌다.

"자네는 어제.."

"퍼블리 셔라고 합니다!"

분명 어제 마주쳤지만 갑작스러운 GM의 등장과 중대한 소식에 제대로 된 작별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흐지부지 헤어진 상대였다. 이제는 이름까지 알았으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이전에 그는 눈 앞의 상대, 퍼블리가 본인의 이름을 대기 전에도 이미 알고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있었다. 그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퍼블리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태도는 평소에 마주쳤던 사람들을 대한 태도와 확연히 다른데다가 섣부르게 건넨 질문으로 인해 남들 모르게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분명 퍼블리는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절대 그 질문의 의미는 가볍지 않으리라. 그는 내심 눈 앞의 퍼블리가 어제의 질문을 잊어버린 상태이길 바랬다.

"그런데 어제 그 질문은..."

"...그건 잊어주게."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 현실로 와닿는 일은 별로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뱉을 뻔한 한숨을 삼키고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방향을 돌려 이 축복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정원에 그와 같은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랬다.

"왔어?"

그들에게서 몇발자국 떨어져있는 곳에 언제왔는지 모를 GM이 하얀 이를 드러낸 웃는 낯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상황에 그는 결국 한숨을 뱉었다. 그들, 정확히는 패치를 향해 다가온 GM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갖구가!"

특유의 웃음과 함께 건네받은 것은 칼집이 꽂혀있는 작은 단검이었다. 용사 혹은 모험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의 뒤를 밟으며 도움을 주고 새로운 길로 그들을 인도하는 정원지기였기에 그들이 위험할 때 덩달아 위험해질 수 있지만 그는 단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뒤를 밟는 정원지기답게 몰래 용사의 곁에 두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저기..."

GM으로 인해 잠시간 시선에서 벗어난 퍼블리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단검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다시 퍼블리에게로 돌아왔다. 퍼블리는 어제처럼 흐린 끝을 맺고 싶지 않았다. 아니 끝을 맺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오래전에 담았던, 오래전부터 담아두고 있던 현실을 마주함으로써 가라앉았지만 끝이 안보이는 밑바닥을 열심히 차내며 거부해오던 동경이 눈 앞에 다가온 이상에 가까운 이상으로 인해 그동안의 줄다리기에 대한 보상처럼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에 따라오는 일말의 기대감은 더이상의 인내가 지루했는지 녹색의 눈동자와 간절한 목소리에 몸을 실어 그에게로 다가섰다.

"저도 따라갈 수 있게 해주세요!"

물론 그것은 어림없는 소리였다. 만약 이곳에 다른 정원지기들이 있었다면 혀차는 소리와 안타까움과 비웃음이 섞인 우려를 가장한 눈빛들이 일제히 방금 호기롭게 요청을 한 사람에게로 쏟아졌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거절하기 위해 시선을 마주쳤으나 입안에서 맴돌던 다름아닌 그 거절이 쏜살같이 속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갔다. 고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에서 그는 알고 싶지않은 상대의 마음을 깨달았다.

저 눈은 거절하더라도 몰래 뒤따라올 눈이다.

그 깨달음은 의도치 않게 그의 상상을 자극했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의 뒤를 신중에 신중을 가해 밟는 정원지기와 마찬가지로 발을 들인 바로 그 정원지기의 뒤를 밟는 이곳의 주민.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상황인가. 그리고 상상은 두통으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제 할일을 했을터다.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의 뒤를 밟는다면 그 또한 나름의 배려로 모른체 할테지만 저 고집스러운 주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럴 리 없을테지만 어쩐지 늙어가는 기분에 몸의 힘이 빠졌다.

"좋다."

"거절하셔도 따라갈..예?"

거절을 각오하고 선전포고를 하려던 퍼블리는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분명한 허락이었는데도 퍼블리의 머릿속에 제대로 잡기까지는 선전포고의 각오를 되새긴 만큼 길게 이어졌다. 이윽고 드디어 자리를 잡았는지 퍼블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니 이미 뛰면서 눈을 빛냈다. 잠시 진정이 됐는지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퍼블리를 보며 패치는 퍼블리가 쓴 두건사이로 삐져나온 푸른색이 도는 흰 머리카락을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쪽은 행복해보이고 한쪽은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미묘한 상황을 지켜보던 GM은 또다시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것을 패치에게 넘겼다. 그것은 다름아닌 빛바랜 종이였다. 사람의 손길을 탄지 꽤 오래된 것 같은 종이를 펼쳐본 패치는 그 위에 적혀있는 글을 읽어내려갔다.

정원을 거닐고 있는 무리
그 앞의 인연
옛 땅으로
악연으로 변해버린 인연
인연과의 단절
용이 날아오른다.

"이건 뭡니까?"

"옛날에 늬들 몰래 발견해서 꿍쳐둔 시!"

GM이 가리키는 다수는 다름아닌 정원지기를 뜻했다. 그 말을 들어본다면 지금 이 종이에 적힌 시는 어쩌면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만큼 중요한 '정원지기의 기원'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급격하게 밀려오는 두통과 울화가 한꺼번에 치밀었지만 한 편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안도감을 느꼈다. 어울리지 않을 상반된 감정들의 다툼에서 승리자는 안도감이었고 곧이어 진정된 그는 시라고 하기엔 이렇다한 설명이나 비유 없이 핵심만 나타내고 가장 끝의 개연성 없이 이어지는 부분에 의아함이 들었다. 이건 시라기보단

"무언가를 메모 한 것 같군."

하지만 시라고 확신한 데엔 이유가 있을 터. 그는 GM을 바라보며 빠진 부분에 대해 물었다.

"제목은 무엇입니까?"

"그건..."

그에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변한 GM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 분위기에 동조해 그들의 옆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던 퍼블리마저 긴장을 하며 다음 이어질 GM의 말에 집중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기이한 분위기에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패치는 또다시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다시 움직이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시곗바늘 마냥 GM의 입이 열렸다.

"비밀이지롱!"

거의 무의식적으로 패치의 손이 GM의 멱살을 잡았고 맥이 탁 풀린 퍼블리가 실망했다는 기색을 내뱉기 전에 기겁한 채로 패치를 붙잡았다. 온 사방으로 널리 퍼지는 GM의 웃음소리는 그러한 소란을 더욱 보탰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