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하늘 꼭대기에 닿아있는 유명한 천재들도 그렇고 그들의 말을 따라 적는 매스컴들도 전부 발전속도가 예전에 비해 빠르다 뭐다하지만 저희같은 일반인은 그다지 실감나지도 않고 굳이 실감을 받고 싶지도 않지 않슴까? 뭐...저는 다른 의미로 실감을 받고 있지만..."

과자 씹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늘 그랬듯이 그들이 만나서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었다. 그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말을 꺼내고 다른 한쪽에선 마저 대답해주기는 커녕 과연 듣는 게 맞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집중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빨간 과자를 제 입에 넣으며 상대의 침묵이 어색할 법도 한데 태연하게도 말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아직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다른 한명은 20대 후반에서 자리잡고 있는 어른으로 보였는데 그는 턱을 괸 채로 고개까지 돌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르고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을까,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뜬 채로 괴고 있던 손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전히 지루한...네?"

어느새 돌아선 고개는 똑바로 앞을 향하고 있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들은 또다시 마주한다.

 

그의 일생은 어찌보면 상당히 단순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뻗어나가고 있는 현재의 끝자락은 앞서 살아 온 3년 전의 일생의 단순함을 가볍게 짓밟을 정도였다. 25살 이제 막 본격적인 사회생활에 발을 들였을 그는 동시에 새롭고 낯선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가족은 만약 그가 3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떠밀고 평생 혼자 살아가리라 결심할 정도의 후회였고, 젊은 날의 치기였다. 물론 혼자가 아니게 된 지금은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다른 의미로 고민하겠지만.

"빠빠!"

"그래 퍼블리."

어느새 다가와 짧은 팔과 조그마한 손으로 다 들어가지도 않는 큰 다리를 그 작은 품에 안고 있는 아이가 말갛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본다. 누가 그랬던가 깨어있는 아이는 악마라고. 그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절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짧은 다리로 자신의 보폭에 맞추기 위해 열심히 작은 발을 놀리는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끔씩 멈춰설 때마다 저의 다리를 안아오는 작은 술래는 그에게 마지막 남은 보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보물은 살아숨쉬는 자신의 후회가 그에게 버리다시피 떠맡고 간 흔적이었다. 그가 집을 비울 때마다 옆집의 친절한 이웃 노부부는 손주 뻘 되는 아이를 달래느라 진을 빼면서도 매번 아이를 맡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울상을 짓는 아이의 얼굴이 눈에 밟히지만 그는 아이와 함께 살아갈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와 아이에게 있어서 눈물을 달지 않은 채 마음껏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휴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날이었다.

그리고 현재 휴일이 된 그의 심기는 매우 언짢았다.

"그렇게 대놓고 싫은 티 팍팍 내시면 정말 상처입니다?"

"싫은 티가 보인다면 물러나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나?"

"간신히 책과 글자들에 벗어난 고등학생에게 다시 끔찍한 공부의 산에 파묻히라는 소립니까? 너무 끔찍한 소리라는 생각 안 듬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휴일에 불청객이 난입했다.

얼마 전에 노부부와 마찬가지로 옆집 이웃이 된 고등학생은 제 입으로 말하길 자취하기 위해서 왔다고는 하지만 혼자 살아가기엔 방이 두 개 딸린 아파트는 넓어보였다. 게다가 우연히도 이웃 학생이 다니는 학교는 그가 졸업했던 고등학교였고 이웃 학생이 들어가고자하는 대학 또한 그가 졸업했던 대학이었다. 이웃 학생은 선배에게 조언을 듣겠다는 명목하에 그를 찾아왔고 그의 소중한 휴일마저 침범했다. 하지만 조언은 커녕 제 이야기만 꺼내놓으며 저를 붙잡기 일쑤였다. 조언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는 이미 저 맨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나마 눈치를 주는 걸로 끝내던 그의 인내심은 핑계를 담고 있는 맨바닥을 드러냈다.

"이것 참...제가 왜 당신을 붙잡아두고 있는지 아직도 기억이 안납니까? 우리의 첫만남의 맹세가 덧없어지는 건 슬픕니다만?"

"언제부터 단순한 조언이 첫만남의 맹세니 뭐니라는 거창한 말이 되어버린 거지?"

"....정말 기억이 안나시는 겁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파고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건지 여전히 짜증섞인 눈빛을 내고 있었다. 노란 빛이 어딘가 어두운 색을 띄며 예사롭지 않게 번뜩이다가 갑작스럽게 눈꺼풀을 내리며 제 모습을 감췄다. 다음 순간, 그의 시야가 순식간에 방 안의 천장을 쓸어갔다. 그와 함께 묵직한 무게가 그를 짓누른다.

"무슨..!"

그가 이웃 학생을 만났을 때 처음 눈에 들어 온 것은 날티나게 세워진 머리스타일도, 한쪽만 까맣게 물들어 있는 눈도 아닌 저를 훌쩍 넘어선 그의 키였다. 물론 자신이 그다지 큰 편에 속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몇살이나 어린 이웃 학생은 평균을 넘어선지 오래였다. 만약에 힘도 세다면 여기저기 운동부에서 눈독들이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들어맞는 것은 현재 상황에선 전혀 달갑지 않으리라.

"당신이 죽은 그 날 이후로부터 남겨진 저의 삶은 삶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웠습니다."

저게 뭔소린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큰 사고도 없었고 크게 앓아본 적도 없었던데다 당연하게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그에게 죽었다는 말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말이었지만 흉흉한 노란 빛과 거친 숨을 담고 있는 목소리는 절대 가벼운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당신이 죽고나서 당신이었던 껍데기가 불타는 날 당신의 뒤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 빌어먹을 마녀가 건 저주 때문에 저는 심장이 뚫린 채로 그 역겨운 세계에서 최후가 될 때까지 산송장이 되어서 살아갔습니다. 고문이라면 정말이지 효과적인 고문이었죠."

덧붙여진 말은 대부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이후로도 학생 아니 무언가 소중한 벽을 부숴내리는 듯한 침입자는 암울한 목소리로 말을 더한다.

"최후가 된 후로 드디어 그 역겨운 세계에서 벗어나고 당신의 흔적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발견한 제 마음은 절대로 이 세계의 그리고 멸망해버린 전 세계의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어요. 나는 드디어 구원받았던 겁니다."

그런데....

어깨를 내리누르던 한 손이 그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어챈다.

"저 없는 사이에 감히 제 허락없이 어떤 오물이랑 함부로 몸을 굴린답니까?"

그와 동시에 다른 손이 그의 옷 속을 파고들며 그의 맨 살을 더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행동에 그는 경악섞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그 오물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보물이랍시고 싸고 돌며 지금까지 키워왔던 겁니까? 당신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천박한 오물이 버린 쓰레기가 그렇게 소중한겁니까?"

"감히 누구더러 쓰레기라는...!!"

"당신 흔적도 없는 아기가 버려질까봐 망설이지도 않고 받아들였을 당신의 상냥함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정말이지 슬프네요. 하지만 아이에게 해를 가하진 않을겁니다. 오히려 아이도 동생이 생기면 기뻐할 것 같습니다?"

저게 대체 무슨 헛소리일까 싶었던 그의 귀에 지금 상황에서 들려와선 안 되는 낭랑한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운다.

"빠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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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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