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엇?! ..잠깐 저기...!”

뚝뚝 눈물을 흘리던 아이가 책을 꽉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있어 시야가 흐릴 텐데도 퍼블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온다.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어떻게 이 책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제 이름은 퍼블리고요...그 책은 브레이니씨가 공주님한테 전해달라고 해서 받은 책이에요.”

우선 나온 건 이름이었다. 솔직히 이름 외에 뭐라 더 말하는가. 여기 들어온 방법과 사정을 설명하기에는 지금 이 대치 상황에서 말하기엔 길었고 그나마 말할 수 있는 게 책에 관한 거였다. 물론 이정도까지만 말한 데에는 그만큼의 확신이 있었기에 충분한 내용이기도 했다. 브레이니라는 이름에 다시 눈물을 터뜨리며 책을 꼭 끌어안는 모습이 안타까움과 동시 씁쓸했기에 퍼블리는 아이가 충분히 눈물을 흘릴 수 있게 기다렸다. 다섯 번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아이는 다시 눈물을 닦고 제 감정을 가다듬었다. 금방 울음을 그치는 모습이 익숙해보여서 안타까움이 다시 쌓이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더 울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제 이름은 메르시예요. 이 책을 전달받을 공주가 바로 저예요.”

사실 퍼블리도 이미 어렴풋이 확신은 하고 있었다. 다만 바로 그 비밀에 둘러싸인 공주가 이렇게나 어리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당연하게도 저주였지만 저주에 걸리기 이전에 저렇게 어린 나이에 정화 전쟁을 하러 갔었단 말이기도 했다. 물론 저주가 어려지는 저주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로부터 지난 시간과 이 집에 들어갔다가 나온 왕궁 마녀들의 얘기들을 생각해보면 어려지는 저주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주가 한 종류라고 딱 정해져 있다고는 들어본 적 없었지만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어른거린 아니카의 모습에 무엇이 이상한지 제대로 다가왔다.

“...오빠..!...흑기사단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잠깐의 침묵을 가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퍼블리는 다시 눈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에 이 왕국의 공주를 두고 딴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제법 여유를 되 찾았나보다라며 멋쩍은 마음을 눌렀지만 바로 그 질문 내용에 또 말이 턱 하고 막혔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서로의 소식도 몰라 애타는 건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해주는 건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썩어가는 몸으로 배 위에서, 바다에서 갇혀 살다시피 한다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는 퍼블리를 빤히 바라보던 공주는 최대한 감정을 눌렀지만 너무 누른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모를 가라앉은 목소리를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흑기사단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고 빛이 온 숲을 감쌌던 마지막 날에 한 번 정신을 잃었었고 제가 정신을 차렸던 건 그로부터 하루가 지났을 때였어요. 그리고 눈을 뜬 제가 제일 처음 눈에 담았던 건 썩어가는 흑기사단의 몸이었어요. 나는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제 손이 닿았던 것보다 그들이 저를 여기로 이동시키는 게 더 빨랐어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는 듯 했지만 떨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여기로 도착했을 때 저는 잠들기 전에 당신이 열은 저 서랍을 잠갔고 바로 잠들었어요.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 속을 흔드는 느낌에 깨어났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 나갈 때까지 자는 척을 했고 그 다음에 당신이 왔어요.”

그대로 굳은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퍼블리와 한 번 눈을 다시 마주하고 작은 한숨을 내쉰 공주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굳은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고 있던 퍼블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사실 흑기사단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때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부터 얘기해야했다. 거기에다가 퍼블리가 지금까지 보고 살아온 현재의 마녀왕국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했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왕궁 내의 사정은 퍼블리 본인도 모르는 게 당연했으니 그나마 왕궁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축제뿐이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퍼블리였지만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다. 퍼블리의 이야기를 듣던 공주는 그들이 바다에 갇히다시피 했다는 대목에서 얼굴이 굳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적은 책을 만들었다는 브레이니와 바다를 구경시켜주던 흑기사의 얘기를 꺼내자 그리움과 안타까움, 슬픔과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한차례 더 울었다. 그런 공주를 바라보고 있던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편하게 말하세요 공주님.”

..공주님 말고...메르시라고...! 불러주세요.”

. 메르시님.”

자신도 존댓말을 그만둘 테니 존칭과 존댓말 빼달라는 말에 퍼블리는 얌전히 메르시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무리 궁금하다고 해도 슬픈 사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듣는 건 많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메르시의 등을 토닥이며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던 퍼블리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공주, 그러니까 메르시에게 걸려있던 저주는 바로 잠에 빠지는 저주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잠을 자는 저주가 아닌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성장도 다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은 채 계속 잠들어있는 저주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그런 저주. 몸만 살아있지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했다. 실제로 메르시는 그렇게 잠들어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제대로 역사책에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으로 인해 메르시는 지금까지 공주로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퍼블리가 등을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다시 생각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주, 시간, 공주.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갔다. 축제, 공주, 시간, 저주, 아니카, 흑기사단, 신성지대, 잠드는 저주, 몸이 썩어가는 저주. 그리고

저기...메르시. 저주로 인해 잠들었다고 했었지? 들어보니까 저주는 다 다른 것 같고.”

“....”

꽤 진정됐는지 아직은 흐느끼긴 하지만 떨어지는 눈물이 아까보다는 확실히 줄어있었다.

혹시 저주는 다른 마녀나 마법사들한테 영향을 끼쳐?”

..! 저주인 이상...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건 당연한 거야....그래서 입으로도 담지 않아.”

그 말은 아난타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저주에 관해서는 꺼리는 게 당연했고 아무도 공주가 저주에 걸렸다는 얘기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이상한 점은 많았다. 저주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말 그대로 주위다. , 말로 전하는 게 아닌 이상 저주의 범위는 더 이상 넓어지지 않았고 아무도 공주가, 메르시가 저주에 걸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왕국의 모든 마녀들은 메르시가 그 긴 시간동안 계속 공주였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걸까?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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