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어린 마녀가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뭉개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걸 다른 누군가에게 건넸다. 받아든 자는 마법사였는데 쥐고선 신기하다는 투로 뭐라 크게 말했지만 역시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밝으면서도 꽤 높게 올라가는 말투로 보아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이서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모든 게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장소가 바뀌어있었다. 모든 게 굉장히 어지럽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동시에 날아다니는 것과 땅으로 떨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거기에 누군가가 달려드는 모습과 쓰러지고 일어나지 않는 자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서있었던 자들은 분명 둘이었는데 어느새 하나가 됐다. 그러더니 모든 게 땅 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호수가 보였다. 그리고

친구가 태어났어!”

눈을 뜬 퍼블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려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 몸이 욱신거리고 있었고 어떻게 된 건지 손에 쥐고 있던 판은 부스러져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누워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후들거리는 팔로 땅을 짚자 물기를 머금은 흙들이 손가락 사이로 뭉쳐 들어왔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는 아마 정신을 잃었을 때 땅에 크게 부딪혔을 거라 짐작하고는 넘어가려고 했지만 도통 통증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몸을 일으켰을 때 무언가 한 번 맡아본 적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강렬한 향들이 또다시 머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려 코를 막고 흐릿한 눈을 몇 번 비비며 눈앞이 다시 또렷해질 때까지 기다리자 천천히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살랑이며 시선을 쓸어간 붉은색에 정신이 번쩍 든 퍼블리가 아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여긴...?”
점점 또렷하게 들어오는 광경에 거의 눈 아래를 부여잡다시피 한 손이 천천히 내려가고 가려져 있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분명 흑기사가 쓴 대로 썼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떨어졌다. 왕궁에서 사는 공주고 왕궁이 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흑기사단과 함께 정할 때 집이라고 정해놨으니 범상치 않은 데라고는 생각했지만 범상치 않은 걸 뛰어넘어서 너무나 의외의 장소이자 어쩌면 평생 볼일이 없을지도 모를 장소였다. 눈을 깜빡여도 환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책으로 딱 하나만 그려져 있는 설명문을 봤을 뿐인데다 직접 본 건 색도 다른데다 온전한 형태로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환상으로 이 광경을 상상하긴 힘들었다. 순간 모든 색을 빼앗고 차지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선을 차지하는 붉은 물결

장미정원에서 빵파티를 했어요?!”

와하하 웃는 흑기사의 모습이 잠깐 흐리게 보였다가 사라지는 환상을 본 퍼블리는 다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장미정원을 집으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빵파티를 하는 공주와 흑기사단의 범상치 않은 걸 넘어서 기함할 행위들은 이미 퍼블리의 이해 범위를 떠난지 오래였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겨우 진정시키고 천천히 널려있는 장미들 쪽으로 다가갔다. 대부분의 장미가 아직 완전히 피어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꽃봉오리가 다른 꽃들보다 비교도 안 되게 컸다. 그나마 작은 게 공 크기였는데 완전히 피어나면 얼마나 커질까 신기하게 바라본 퍼블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장미향에 뒤로 물러나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희미하게 보이는 얇은 선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서 보고 있다가 고개를 뒤로 더 젖히고 눈을 크게 뜨자

......?!”
하늘이 깨져있었다.

말 그대로 깨져있다고 할 수 있었는데 퍼블리가 발견한 얇은 선은 하나가 아니었고 전체적으로 보니 깨진 유리처럼 하늘에 금이 잔뜩 그어져 있었다. 금이 간 크기가 꽤나 컸는데 고개를 뒤로 젖히는 것도 모자라 아예 뒤로 돌아 볼 정도여서 일어났을 때 바로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봤으면 큰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었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법 결계인가? 근데 이렇게 크고 투명한 마법 결계는 전혀 본 적이 없는데?”
손을 들어 더듬어 보면서 살펴보고 싶어도 너무 높았다. 정말 하늘에 유리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높고 넓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퍼블리는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장미에 가까이가 그 뒤로 몸을 숨겼다.

아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왜 결계가 깨지냐고?!”
조사해본 결과로는 알 수 없는 마력이 여기로 날아들어 결계랑 부딪히는 바람에 깨졌다는데?”

아니 그건 나도 들었는데 대체 왜 결계가 깨지냐고? 애초에 이 결계가 깨지는 건 말이 안 돼! 현존하는 모든 마력들 중에서 이 결계를 깨뜨릴 수 있는 마력은 없어! 이거랑 같은 거 아닌 이상 없다고! 그럼 같은 마력인데 왜 알 수 없는 마력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장미들 사이의 틈으로 왕궁 마녀를 상징하는 옷을 입은 자들이 하늘의 금을 한 번 서로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며 시끄럽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로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다. 애초에 깨어날까?”
야 저 구멍 났을 때 여기 정원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땅 전체가 흔들렸거든? 그렇게 쉽게 깨어날까라면서 넘어갈 게 아니거든?”
그럼 윗분들이 이 결계 만들 때 진작 깨어났겠지. 이 결계 이루는 마력 자체가 저주로 인해 파생된 건데 이용할 때 바로 저주에 영향이 갔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결계에 대해 얘기하던 그들은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었는데 혹시 그들 뒤에 또 누가 있을까 가만히 살펴보던 퍼블리는 그 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자 발소리도 죽인 채 몰래 그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간간이 장미 뒤로 몸을 숨기며 그들의 대화도 듣던 퍼블리는 저주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더욱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들이 도착한 곳은 웬 굴뚝 딸린 집이었는데 장미와 덤불로만 이루어진 이 정원에서 매우 이질적이었다. 따로 잠금장치도 없는지 바로 문고리를 돌려 들어가던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는데 들어가기 전과는 다른 게 내내 무언가 걱정을 하던 마녀가 안심한 표정으로 나왔다는 점이었다.

거 봐.”
아 그래도 혹시나 싶은 거 있잖아.”
일단 우리가 지금 걱정해야할 건 그 마력이 무엇인지 알아보는데 투자할 우리들의 시간이야.”
그렇게 그들이 그 집에서 떠나고 목소리도 희미해져서 들려오지 않을 쯤 장미 뒤에서 나온 퍼블리는 그 집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열었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