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퍼블리는 아 하고 눈을 깜빡였다. 하도 많은 일이 있어서 그만 까먹어버리고 말았다. 편지를 보고 나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확인해봐야겠다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많은 일이 있었다지만 다시 왕국으로 돌아왔는데도 계속 잊고 있었던 게 조금 머쓱한지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까먹고 있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 난리를 겪었는데 뒷마당 생각할 시간이 있었겠어?”
이 말은 뒤에 붙여진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날 보러 오는 것도 까먹었는데 뒷마당 쯤이야란 말이 없었다면 평범한 위로의 말이 되었을 거다. 물론 아니카는 보러 오지 않았던 거에 서운한 게 아닌 그동안 못 놀렸으니 실컷 놀리려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말하는 거였다. 퍼블리 특유의 놀리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과 나중에 가서 부루퉁해지는 얼굴이 은근히 재밌었다. 그런 아니카의 생각을 어렴풋이 눈치 챈 퍼블리는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봤다고 너무 놀려대는 거 아니야?”
“한동안 못 봤으니까 기회다 싶어 놀려대는 거지. 그럼 다른 내용으로 다양하게 놀려줄까?”
“됐어...어차피 당하는 건 나잖아.”
제 못된 친구를 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제는 제가 앞장 서는 모습에 아니카가 웃음을 흘렸다. 퍼블리는 오랜만에 만나도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는 모습에 말의 내용과 조금 피곤한 몸이 아니었다면 그동안의 여행은 꿈이고 계속 왕국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여행 중에 겪었던 일들이 실감 나지 않고 멀게 느껴진 것이리라.
“그런데 아까 듣기로는 바다에 빠지고 나서 구출됐을 때 흑기사단의 배에서 하룻밤 지냈다면서? 그 마법사들은 어땠어?”
썩어가는 얼굴로도 순박하게 웃고 썩어가는 몸으로도 신나게 놀던 마법사들. 그들에게서 충격이라는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들이 그렇게 몸이 저주받아 썩어갈 때 충격을 받았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은 전혀 그런 낌새도 없었다. 게다가 바다에 갇혀있는 데도 우울해하지도 않았고 비관적이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신기하면서도 감탄스럽고 경이로우며 동경이 들 마법사들이었다.
“엄청 유쾌하신 분들이었어. 그리고...”
더듬거리는 말로 자신에게 책을 건네던 브레이니가 어른거리고는 곧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품속에 넣어놓은 책을 꾹 누르자 같이 있던 둥근 유리병의 감촉도 함께 느껴졌다. 움찔 손을 떤 퍼블리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마저 붙였다.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많은 걸 들려줬던 분들이야.”
가만히 퍼블리의 말을 듣던 아니카는 꽤나 복잡해 보이는 퍼블리의 표정에 마찬가지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제 아빠에 관해서는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설익은 과일마냥 위태로워 보이는 제 친구는 알다가도 모를 데에 속해있었다. 나름대로 위로하고 무언가 힘을 보태주고 싶었지만 제가 알고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본인은 애초에 매달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저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이는 친구 앞에서 함부로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아니카가 깊은 공감을 느끼고 있었거나 아예 이해하길 완전히 포기해버렸다면 왕국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붙잡았을지도 몰랐다. 이래저래 어중간하게 서서 들어주거나 옆에 서있는 거 외엔 방법을 모르겠는 본인에 대한 답답함이 이 복잡함 속에 꽤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 복잡함을 담으며 살펴보고 있던 둘은 뺨을 한 번 느리게 쓰다듬기 시작하는 냉기에 다시 시선을 눈앞으로 돌렸다.
“와...순간 누군가 겨울을 흉내 내려고 냉기를 뿜어대는 마법을 넓게 걸어놨나 싶었는데...이렇게 냉기가 심했어?”
“아니. 너 오기 전까지는 내가 계속 왔었으니까 확실히 차이가 느껴져. 이렇게 냉기가 심한 건 처음이야.”
“확실히 네가 편지에 썼던 것처럼 겨울에 느끼는 그런 느낌이 아닌데...”
어쩐지 꽤 익숙한 느낌에 의아해하던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언제나 열었었던 문고리를 돌려보자 늘 냈던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당연하게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해?”
“아니 그냥...”
혹시나 싶은 마음을 확실히 눌러준 허전함과 실망을 안으며 다시 문을 닫은 퍼블리는 재촉하는 아니카를 따라 집의 뒤쪽으로 갔다.
“여기서 냉기가 나오고 있어. 왜 이렇게 심해졌담?”
“진짜 바위가 없어졌네?”
분명 바위로 막혀 있었던 곳이 바위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고 집과 다른 돌무더기와 나무 사이가 휑하게 뚫려있었다. 퍼블리는 처음 보는 빈공간이 신기해 다가가 손을 뻗었다. 냉기 때문에 오돌토돌 올라오는 팔을 문지르며 가까이 다가가본 아니카는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다르지 않게 저를 밀어내는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 안에 냉기를 내뿜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고 바위가 사라지고 냉기가 점점 더 많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걸 보면 이곳을 숨기고 막던 결계마법이 약해진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들어가지 못하는 걸 보면 보통 마법이 아니었다. 이런 불편한 상황에 아니카가 불만을 꾹꾹 눌러 담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너희 아빠 능력 좋으신 건 아주 잘 알겠는데 너무 능력이 좋으셔서 탈이야. 이거 뭐 어떻게도 할 수 없는...퍼블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옆에 있던 퍼블리가 사라졌다.
“으...추운데...안 추워 아니..카...?”
뻗었던 팔을 거두며 팔을 문지른 퍼블리가 제 친구를 부르며 돌아봤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앞을 보고 뒤 돌아도 아니카는 없었다. 당황스러워하며 뒤로 물러나려던 퍼블리의 발을 멈춰 세운 건 다름 아닌 주위의 모든 걸 얼려버릴 듯 이 공간에 가득 자리 잡고 있는 냉기였다. 상당히 익숙한 느낌을 풍기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냉기는 정말 이대로 다시 나갈 거냐는 생각을 건져 올렸다. 천천히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퍼블리는 아니카가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마치 밀어내려고 하는듯한 공간. 아니카는 밀어냈고 자기는 들여보낸 이 알 수 없는 공간. 마치 기회를 이대로 놓을 거냐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한차례 크게 숨을 들이쉰 퍼블리는 살짝 안쪽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굳게 결심했던 시간에 비해 목적지는 멀지 않았는지 열걸음도 채 걷지 않았는데 빽빽하게 있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눈에 들어온 건
“...어?”
온통 하얀색이다.
눈이 쌓인 것처럼 온통 하얀 게 발아래 땅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쩐지 눈이 부시는 것 같아 눈을 꾹 감고 문지르다가 두 번 깜빡였을 때 쯤 눈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태는 매우 익숙했다. 멍하니 바라보던 퍼블리는 순간 스쳐지나가는 기억에 잠시 숨을 멈췄다. 소란스러웠다가 앞문으로 들어오는 마녀에 조용해진 교실, 칠판 앞에 서고 나서 뭐라 말하다가 손을 들어 한 번 쓸어가듯 움직이자 반짝이던 금빛 가루, 그리고 반짝임이 끝나자 나타났던 새하얀
“이게 바로 약새풀이다. 진짜는 너무 귀해서 가져올 순 없고 이렇게나마 환영영상 마법으로 담아 와서 보는 게 최선이다. 나중에 재료 쪽으로 가는 애들은 진절머리 나게 듣고 보게 될 풀이지만. 이 풀은 밸러니의 숲에서만 자라고 채집할 수 있는 풀이고 재배가 불가능한 풀이지.”
수업하는 무덤덤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귀하다는 게 지금 제 발아래 땅을 전부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재배가 불가능하다던 그 풀이 지금 제 발아래, 제가 살고 있던 집 뒷마당에서 자라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게 지금 제 눈앞에서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게..그...어...”
뭐라 할 말을 잃은 퍼블리가 그대로 주저앉아 새하얀 풀에 손을 뻗어 꺾어보고 바로 앞으로 가져온다. 분명 환영영상 마법으로 봤던 그 풀이다. 그대로 얼어버린 사고 앞으로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
“...아빠가 그렇게 집 밖으로 안 나가는데도 딱히 돈 걱정이 없었구나...”
이런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저도 웃긴지 어이없다는 듯 허허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리던 퍼블리는 그대로 손을 들어 머리를 헤집었다. 재배가 불가능하고 정화 이후로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풀. 태우면 냉기를 내뿜는 특이한 특성을 가진 풀. 그런 풀이 지금 이렇게 널려있었다. 저 베일 너머에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는 듯 했던 마법사의 과거가 새하얗게 뒤덮여졌다. 무언가 진실을 알게 되는 듯 싶었는데 또 다른 알 수 없는 게 튀어나왔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게!
“...아빠. 대체 뭐예요...”
마법사가 숨기는 건 굉장히 많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바로 사는 곳 뒤조차도 몰랐다. 그만큼 마법사는 철저하게 숨기고 철저하게 비밀을 가뒀다. 살랑 흔들리며 태우지도 않았는데 한꺼번에 모여 있으니 냉기를 가득 뿜어대는 약새풀이 다시 한 번 시선을 어지럽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궁금했지만 자세히 물어보고 파고들면 버려질지도 모른다며, 두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며 내심 불안하고 호기심만 가득했던 그 때로.
머리를 거칠게 헤집던 손이 멈췄다.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는 눈꺼풀이 내려와 한 번 꾹 감고 살살 올라가니 안정을 되찾고 멈췄다. 지금은 분명 떠났는데도 잔잔한 파도소리가 제 귓가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새하얀 것들 사이에 떨어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책을 들어 올린 퍼블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할 자는 없었다. 바람이 불자 살랑 흔들리는 새하얀 밭이 냉기를 다시 한 번 뿜으며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다시 눈을 감으며 앉아있던 퍼블리가 그대로 일어나며 눈을 떴다. 무언가의 결심이 환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마 반쯤은 충동 또한 자리 잡고 있었을 터였다. 그대로 주머니에서 꺼낸 판 위에 그림같이 생긴 글을 지우고 그 때 봤었던 걸 그려 넣었다. 그리고 마력을 불어넣자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수 앞에서 머뭇거리던 아이는 반은 진심, 반은 충동을 담아 호수에다가 쥐고 있던 돌멩이를 있는 힘껏 던졌다. 그러자 첨벙 돌멩이가 저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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