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시 안개 속을 걷기 시작한 퍼블리는 발소리도 잘 안 들려올 정도로 조용히 따라오는 마법사를 몇 번 돌아봤다. 일단 처음 만났을 때와 기억을 보고 난 후에 얘기했을 때는 정신이 없던 상태였으니 급한 마음에 물어보기 바빴지만 이렇게 같이 걷고 천천히 생각하니 마법사와 퍼블리는 처음 본 사이였다. 다짜고짜 이것저것 물어봐서 많이 당황스러울 텐데도 마법사는 처음 본 사이치곤 굉장히 차분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비록 내용이 난해하긴 해도 대답도 해주고 이렇게 선뜻 동행 요청도 받아주니 생각하면 할수록 굉장히 좋은 분이구나 싶었다.

저기, 고맙습니다. 먼저 감사인사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고맙다니?”

친절하신 분 같아서요.”
마법사는 한차례 아무 말도 꺼내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구나.”
정말요?”
정말.”

단호한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저는 친절하시고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앞만 보면서 대답하던 마법사가 퍼블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넌 정말 한결같으면서도 변하고 변하면서도 한결같구나.”
?”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안개가 걷혔다. 기억이 나타났다. 이번에 나타난 패치는 어린 패치보다 좀 더 컸지만 어른처럼 보이진 않았다. 딱 퍼블리 나잇대 모습이었다. 패치는 책을 읽으면서도 무언가를 종이에 쓰기 바빴다. 자세히 살펴보니 쓰는 종이의 글씨체와 읽는 책의 글씨체가 같았다. 얼핏 살펴봐도 패치가 쓴 거구나 싶을 정도로 정갈한 달필이었다.

한창 무언가를 쓰다가 새로운 종이를 꺼내오더니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마력을 불어넣고 마법진이 빛났을 때 아까 무언가 쓰던 종이를 올려놓으니 마법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위에 올려놓은 종이의 글이 그대로 복사 되었다. 그 뒤로는 또다시 무언가를 쓰고 복사하고를 반복하다가 기억이 그대로 끝나버렸다.

아빠는 진짜 열심히 살았군요.”
그래 보이니?”
누가 봐도 그런 걸요.”
그 뒤로 나타난 기억들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어른이 된 패치였지만 용사가 곁에 없었던 패치가 나타나기도 했고 용사와 함께 있으면서 용사의 뒷수습을 하는 패치도 나타났다. 어른이 안 된 패치도 많이 나왔지만 그 때의 패치는 거의 종이만 붙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GM이 나타나 패치를 놀리면서도 나름대로의 조언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장난이었다. 그럴 때마다 패치는 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며 GM의 장난을 넘겼다. 용사는 한결같이 순수한 얼굴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속이 타는 패치가 보였지만 묵묵히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곤란한 일들을 다 쳐냈다.

아빠는 왜 용사라는 분을 챙기는 걸까요?”

모든 이유는 다 기억에 있어.”

기억만으론 짐작을 못하겠어요. 뭔가 이유가 있으신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뭔지 감도 잘 안 오고요. 일단 가만히 두면 확실히 큰일이 날 것 같지만 아빠 성격에 저렇게 다 챙기고 뒤를 봐주기 보단 가르쳤을 것 같은데...”

네 아버지의 성격이라...내가 보기엔 성격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너를 키운 것도 그렇고.”
저를 키운 것도 그렇다니요?”
마법사는 입을 다물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뒤에서 계속 물어봤지만 다음 기억이 나타날 때까지 그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기억이 나타나도 퍼블리는 이번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어봤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멈췄다. 마법사가 입을 다물고 앞장 선 후 세 번째로 발견한 기억 때문에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계십니까?”

패치는 누군가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섯 번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는데 열어준 자는 없었다. 패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문은 집주인이 마법으로 열어야 열리는 방식 같았다. 패치가 안으로 들어가니 사실 온 데가 집이 아니고 도서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벽마다 책장이 붙어있었고 그 안엔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방 한가운데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패치는 바로 그 의자에 앉았다.

용건.”
집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생생하고 가깝게 들렸다. 말도 아니고 단어 하나만 툭 던져나왔는데도 패치는 별로 불쾌한 표정도 짓지 않고 말 그대로 용건을 말했다.

당신이 연구한 결계마법에 대해 의논하고자 왔습니다.”
똑같네. 일단 뭐 사족 붙이지 않는 건 훌륭해요. 근데 똑같아.”

반말과 존댓말이 섞인 말투가 방 안을 떠돌고 있었다. 패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가끔, 아니 매일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괜히 책 냈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녀도 찾아오기 시작했어, 그것도 왕궁 마녀가. 대체 누가 내 책을 마녀왕국까지 보냈는지 참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고 지금 그 연구를 계속해가느라 바쁜데 의논하자고 하면서 핵심정보만 쏙 빼가려는 녀석들이 많아. 근데 그나마 그런 녀석들은 점잖은 편이었어요. 어떤 녀석들은 내 연구와 정보만 쏙 빼갈려고 집을 날리기 위해서 마법을 날려댔어. 내가 이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집에 그대로 있는데 대놓고 강도짓을 하려고 했지요.”
목소리는 차분한데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 아래엔 칼날이 가득했고 언제 찌르려고 달려들지 몰라서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패치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가 닿은 부분이 안개처럼 흐려지자 바로 손을 거뒀다. 그와 동시에 패치의 목에 진짜 칼날처럼 날카로운 빛이 목에 닿을 듯 말 듯 번쩍이면서 나타났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할 말이 더 남았나요? 아니면 돌아갈래?”
일단 나도 더 예의를 차려줄 필요는 없겠군. 어차피 그쪽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일세.”
패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빛이 전부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패치는 그대로 들어왔던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방 안쪽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잠깐.”
퍼블리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며 패치를 불러 세우려는 집주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워낙 차분하고 또렷해서 처음엔 누군지도 몰랐는데 지금껏 기억에서 봐왔던 자였다. 커다랗고 뿌연 안경이 환하게 반짝이던 녹색 빛을 가렸지만 척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용사였다. 용사는 한 번 더 잠깐 기다리라며 나가려는 패치에게 손을 뻗었지만 패치는 무시하면서 문을 열고 나갔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