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라니까!”
용사도 그 뒤를 따라 문을 열었지만 이미 패치는 저 멀리 머리만 보일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기억이 끝났다.
“...방금 용사 맞아요?”
“맞아.”
“이 기억은 둘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죠?”
“그렇겠지.”
퍼블리는 어쩌다가 용사의 행동과 성격이 그렇게 변했는지 궁금해졌다. 저 정도면 바뀐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른 마법사인 거나 다름없었지만 일단 모습은 누가 봐도 용사였기 때문에 변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가보니 기억들이 또 나타났지만 그 기억 속에 나타났던 용사들은 전부 해맑았다. 이상하게 까칠하고 무례했던 안경 쓴 용사는 그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퍼블리는 점점 더 커지는 괴리감에 비례해 궁금증을 키웠고 마법사는 모자 때문에 보고 있는지 아니면 눈을 감거나 딴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기억들만 보고 아빠를 못 찾으면 어떡하죠?”
“기억들은 그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란다. 기억들이 점점 빠르게 나타나고 있지? 기억 하나가 날뛰기 시작하면 주위에 있던 다른 기억들도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해. 그리고 날뛴 기억들은 전부 다 보여주면 한군데로 모이고 뭉쳐.”
이번에 나타난 건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고 있는 패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사라졌다.
“강한 기억들은 서로 멀지 않지, 가장 인상적인 기억들과 최근의 기억들. 특히 최근의 기억들이 제일 가깝단다. 그래서 그런 기억들은 차례대로 나타날 거야. 그리고 그 가까이에 네 아버지가 있을 거고 뭉친 기억들은 그곳으로 향할 거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아까 말했다시피 난 이 숲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아. 그리고 숲만큼 잘 아는 건 바로 네 아버지란다. 거기에다 네 아버지만큼, 아니 그보다 더 너를 잘 알기도 하지.”
그들의 앞으로 잠시 책장에 기대어 쪽잠을 자고 있는 마법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빠랑 많이 친하셨나요?”
“아니.”
단호한 대답을 들은 퍼블리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껏 감정 없던 목소리가 이번 대답에서 굉장히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 둘은 또 아무 말 없이 걸으며 나타나는 기억들을 바라봤다. 히익히익 웃어대는 GM과 이번엔 폭발했는지 GM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패치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상하게 기억들은 하나같이 하루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어떤 건 극단적으로 짧았다. 마치 마구잡이로 찢은 것처럼.
“너는 무엇이 두려운 거니?”
“네?”
“넌 항상 네 아버지가 너와의 관계를 그 검은 머리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끝내 버릴까봐 두려워했잖니. 네 아버지는 선을 넘은 자는 절대 다시 들이지 않으니까 혹여나 선을 넘은 질문일까 말하지 않고 꽁꽁 싸매는 데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늘 생각하면서 섣불리 궁금한 것도 묻지 못했고. 지금 이렇게 너에게 말할 수 있으니까 말하지만 가장 쓸모없는 걱정이었단다. 네 아버지는 절대 너를 버리지도 못하고 다른 자들에게 완전히 맡길 수도 없어. 그래서 마녀로 변장해서 왕국으로 갔던 거고 검은 머리는 그 과정에서 완전히 제 선으로 들어온 자도 아닌 애매한 자였으니 과감하게 밀어낸 거였지. 우습게도 나중에 그렇게 돌아오는 것도 모자라 완전히 선을 넘어버릴 줄은 나도 네 아버지도 예상 못했지만.”
어쩐지 비웃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누구를 비웃는지 퍼블리는 감을 못 잡았다. 제 아빠를 비웃는 걸까 아니면 치트?
“그 성격에 너를 평생 싸고 돌 리는 없겠지만 최대한 모든 위험과 변수가 너에게 닿기도 전에 차단하려고 했어, 적어도 네가 힘을 쓸 수 있는 어른이 되어서 스스로 위험을 없앨 수 있을 때까지 너를 키울 생각이었지. 나는 늘 생각하고 느꼈단다, 네 아버지라는 존재가 참 신기하다고. 정말 질릴 정도로 신기해. 어쩜 그럴 수 있을까.”
마법사는 아까와는 확연히 다르게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지자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이번에 나온 감정은 굉장히 많은 게 섞여있었지만 순수한 감탄이 눈에 띄었다.
“너와 용사의 시작을 붙든 감정과 이유는 비슷하겠지만 결과는 달라졌단다. 모순되게도 용사는 모든 걸 잃어서야 네 아버지가 곁에 있게 됐지만 네 아버지는 용사에게 정을 붙였을지언정 사랑하진 않았으니.”
그러다가 마법사는 다시 차분해졌다. 방금까지 내보이던 감정들이 전부 허상이라는 듯이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답답해 보였나요?”
“답답하다기 보단 무얼 두려워하는지 궁금했단다.”
“이건 두려움이라기 보단 불안한 거예요. 아빠한테 아무것도 묻지 못할 때 마냥 불안하고 그 불안한 게 두려움으로 변했었나 봐요. 그리고 아까는 아빠랑 친한 사이인줄 알고 이것저것 아빠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사실 사이가 굉장히 나쁜데 괜히 물어봤구나 싶어서 불안했던 거예요.”
“불안해할 필요 없단다. 사이가 좋진 않지만 말하는 거에 대해선 기분 나쁘지 않으니.”
그렇게 말한 마법사는 조금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내쉬었다. 마치 한숨을 쉬는 것처럼.
“또 말하는 거지만 네 아버지는 정말 신기하단다. 어떤 때에는 충동적이지만 말 그대로 충동은 충동일 뿐 이성 자체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어, 제 심장에 꽂힌 가시도 필요하다면 바로 뽑아서 휘두를 자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건 무의식이야, 위력도 엄청나서 이성이 무의식을 옭아맨 건지 무의식이 이성을 이룬 건지 궁금할 정도란다. 무의식에 잠겨있으면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음이 있어. 아마 그게 지금의 모든 관계의 시작과 현재를 이었을 거야. GM과 하늘의 현자가 예외였을 테지.”
기억이 다시 나타났을 때쯤 마법사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너의 이름과 내가 느끼는 것들이 그 무의식의 증거란다.”
'장편 > 마녀를 키우는 마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녀를 키우는 마법사 chapter 4 -identity.23- (0) | 2018.02.21 |
---|---|
마녀를 키우는 마법사 chapter 4 -identity.22- (0) | 2018.02.20 |
마녀를 키우는 마법사 chapter 4 -identity.20- (0) | 2018.02.18 |
마녀를 키우는 마법사 chapter 4 -identity.19- (0) | 2018.02.17 |
마녀를 키우는 마법사 chapter 4 -identity.18- (0) | 2018.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