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나타난 기억은 다른 기억들보다 좀 더 길었다. 그래도 내용은 앞에 나왔던 용사를 돌보던 기억들과 다를 게 없었다. 기억을 보는 건 의외로 지루하지도 지치지도 않았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기만 했던 기억들도 있어서 용사가 나오는 기억은 보는 마녀와 마법사가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나무 위로 올라가 한낮에 별 뿌리기 마법을 써대는 용사를 막는 패치로 여덟 번째 뒷수습 기억을 봤을 때쯤 퍼블리는 문득 든 생각에 마법사에게 물었다.

날뛴 기억들이 뭉친다고 했었는데 그럼 아빠의 모든 기억들을 봐야하는 거예요?”
큰 기억들은 작은 기억들을 끌어들여. 아마 지금 이렇게 네가 깨우면서 뭉쳐지게 된 기억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기억들을 끌어 모으고 있을 거란다.”

기억 속의 GM은 지금처럼 한결같이 유쾌하면서 짓궂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패치가 곁에 있을 때는 용사를 돌보는 걸 히익히익 웃으면서 놀려댔지만 막상 패치가 용사가 친 사고를 수습하러 갔을 땐 웃지 않았다. 수염에 입이 다 가려져 있다 보니 웃지 않을 때는 무표정을 짓는 건지 아니면 입꼬리를 아래로 내린 건지 영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표정 아래에 좋은 의미들이 담겨있는 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까 아빠는 저를 절대 버리지도 못하고 다른 자들에게 완전히 맡길 수도 없다고 하셨죠?”
그래.”
무슨 의미예요?”

그 전에 말해주자면 난 모든 걸 대답할 수 있지만 곤란하다고 느끼고 있는 걸 대답하기 피한단다. 그러니 빙빙 돌려 말할 거란다.”

충분히 솔직하셔요.”
GM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남은 건 지쳐서 잠든 용사와 마찬가지로 지쳐서 나무에 기댄 패치였다. 그걸 끝으로 기억은 또 사라졌다.

무슨 의미냐고 한다면 말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단다. 너를 절대 버리지 못하고 다른 자들에게 완전히 맡길 수 없어. 맡긴다고 해도 잠깐 맡는 거라면 GM이 유일했지 그 외엔 스스로가 용납을 못해.”

이번에 나타난 기억엔 새로운 마법사가 나타났다. 하늘색의 망토와 같은 색의 뭔지 모를 몽글몽글한 걸 머리에 쓰고 눈도 얼굴도 전부 다 가린 마법사였다. 얘기를 나누느라 기억이 나타나도 마법사만 보고 있던 퍼블리가 바로 고개를 돌릴 정도로 옷차림이 여러 의미로 강렬한 마법사였다.

그 방식도 나쁘진 않지만 마법진이 가동할 때 많은 열기가 나올 것 같군요. 이런 건 어떤가요?”
대단하십니다.”
패치는 새로 나타난 그 마법사에게 존경과 감탄이 가득 담긴 눈과 대답을 보냈다. 퍼블리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라 꽁꽁 싸맨 그 마법사를 뚫어져라 봤다. 애초에 제 아빠가 누군가에게 쉬이 존경을 표할 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퍼블리의 첫인상에 누군진 모르겠지만 엄청나고 범상치 않을 마법사로 강하게 박혔다.

생각보다 빠르네.”
빠르다뇨?”
저 자가 등장한 게 생각보다 빠르다고 했단다. 우선 누군지부터 알려주자면 꽤 유명한 마법사야. 하늘의 현자라고 알고 있니?”
모를 리가 있겠나. 가장 유명한 마법사인데.

퍼블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청나고 범상치 않은 마법사인 건 맞았다. 그런데 정체가 너무 엄청난 마법사였다. 모습이 담긴 영상구는 남겨져 있지 않아 과연 어떻게 생긴 분일까 궁금해 한 적은 다른 마녀들처럼 한 번쯤은 있었지만 예상은 물론이고 상상이 든 적도 없는 모습이었다. 한편으론 저렇게 꽁꽁 싸매서 영상구가 남겨지지 않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가 하늘의 현자라고 불리던 컨티뉴라니 전혀 예상도 못한 퍼블리는 패치와 컨티뉴를 번갈아봤다. 마법진을 보며 무언가 더 얘기를 나누더니 컨티뉴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거듭 제안하지만 저와 함께 제가 말한 끝 너머를 보러가지 않을래요?”
아니요. 거듭 거절하지만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패치는 존경과는 별개로 단호하게 무엇인지 모를 제안을 거절했다. 퍼블리는 어떤 의미론 구별이 뚜렷한 제 아빠가 새삼스럽게 대단하고 신기해 보였다. 아마 다른 자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컨티뉴는 그렇습니까 하고 더 말을 꺼내지 않았고 패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니 이번엔 맨손으로 땅을 파고 있는 용사가 있었다. 비가 그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땅이었는지 보기만 해도 굉장히 질척거리는 흙들이 용사 손에 묻는 건 물론이고 옷에도 잔뜩 묻어서 빨래를 해도 저게 가실까 걱정될 정도였다. 게다가 땅을 판 것도 꽤 오래 팠는지 용사의 푸른 머리카락이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로 용사는 제가 판 구덩이 안에서 계속 흙을 파내려가고 있었다. 패치는 그런 용사에게 다가가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뭘 찾나?”
뚜더쥐!”
패치는 한숨과 함께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두더지는 바쁜 일이 생겨서 저 멀리 가버렸다고 말한 후 용사를 끄집어 올렸다. 용사는 아쉬운지 이잉 소리를 냈고 패치는 흙이 잔뜩 묻은 용사의 모습에 또다시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언제 나왔는지 모를 컨티뉴는 워낙 꽁꽁 싸맨 터라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걸 보면 웃음을 참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흙투성이가 되부렀네!!”
그리고 언제 어디서 왔는지 모를 GM이 용사를 보며 실컷 웃고 있었다. 패치는 용사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 용사를 욕실에 넣었다. 웬만한 어린아이보다 더 천진난만한 용사는 그나마 혼자 씻을 순 있었는지 따라 들어가진 않았고 패치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떨어진 축축한 흙과 그 흙들이 가득한 용사의 옷을 번갈아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생각에 빠졌다. 퍼블리는 그 모습을 보다가 툭 말했다.

아빠가 가끔 청소마법과 세탁마법을 써요. 물론 이미 있는 마법이긴 한데 기껏해야 먼지를 없애고 얼룩을 지우는 정도예요. 근데 아빠가 쓰는 마법은 손으로 한 것보다 더 깔끔하게 청소되고 세탁도 돼요.”

물걸레를 가져온 패치는 바닥을 닦기 시작했지만 그 바닥은 얼마 안 가 다 씻은 용사가 끌어안고 나온 제 흙 묻은 옷 중, 미처 길이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망토 끝자락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흙을 묻히는 바람에 의미가 없어졌다.

그 마법들의 위력이 그렇게 강했던 이유가 지금 이 기억 때문이겠죠?”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과 다를 게 없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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