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퍼블리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패치를 발견한 용사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고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들개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쪼그려 앉아있던 용사가 벌떡 일어나 패치에게 다가갔다.

새로운 친구야!”
용사가 패치에게 손을 내밀고 패치가 그 위의 무언가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기억이 갑자기 멈추더니 흐려지고 일그러지기 시작하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퍼블리가 방금 전까지 용사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기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분명 이 기억 전까지는 기억들이 끝에 다다를 무렵엔 안개처럼 훅 사라졌었는데 이 기억은 이상하게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갑자기 끊긴 모양새였다.

..갑자기 왜 사라진 거예요?”
퍼블리의 심장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고 어서 그 기억의 뒷부분을 마저 봐야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기억은 어딘가 익숙했으면서도 보는 건 처음 보는 게 분명했는데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퍼블리의 심장을 꽉 쥐고 놔주질 않았다. 이상하게 안개는 일렁이며 퍼블리의 시야를 더 방해했고 물기까지 머금어 앞을 더 보기 힘들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런 퍼블리의 어깨를 잡아 손수건을 건넸다. 눈물이 툭툭 떨어짐과 동시에 퍼블리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가 일렁거리는 걸 반복했다.

저 왜 울고 있어요?”
그건 네가 알 거란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진정이 됐는지 퍼블리의 눈물은 바로 멈췄다. 애초에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울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몰랐으니 금방 그칠 수 있었다. 퍼블리의 심장을 쥐고 있던 이상한 느낌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건 심장 옆에 한구석을 차지한 의아함뿐이었다.

예상은 가지만 확실한지는 모르겠단다.”

...예상하신 걸 말해주시면 안될까요?”
확실하지 않은 걸 섣불리 말해봤자 네가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그렇단다. 어차피 네 아버지를 찾는다면 다 해결될 일이야.”

퍼블리는 그 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게 제 아빠한테 달려있다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했던 제 생각과 다를 게 없었다. 이제까지 아빠가 비밀을 다 드러내지 않았고 이젠 아빠한테 물어볼 거라고 먼저 말 해온 건 퍼블리 본인이 아니었나. 이렇게 기억을 보는 건 아니라며 아빠한테 물어보겠다고 한 건 퍼블리였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퍼블리는 다음 기억을 찾으러 앞으로 걸어가기 전에 마법사한테 물었다.

저기, 아빠랑 안 친하다고 했었는데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정말 표현하기 어려웠는지 마법사는 생각보다 오래 고민했다. 퍼블리는 괜히 물은 건가 걱정이 들기 시작했고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마법사가 대답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너무 많고 복잡해서 곤란하니 어떤 사이냐고 말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 이걸로 대답할 게, 서로 증오하는 사이란다.”
벌집 쑤신 줄 알았더니 지뢰를 밟은 격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퍼블리가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을 때 마법사가 태연하게 마저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증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네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건 그리 기분 나쁘진 않단다. 애초에 네 아버지도 똑같이 나를 증오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니 엄청 걱정되는데요?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입술을 꾹 깨물며 막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기억들이 나타나 이 어색한 상황을 흘려보냈으면 싶었지만 이상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어색함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싶었는데 열 걸음을 걷고 스무 걸음을 걷고 거기에 더 열 걸음을 걸었는데도 기억은 나타나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퍼블리의 어깨는 이미 풀린지 오래였다.

생각보다 빠르다고는 했지만...이건 너무 빠른데?”
마법사는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고 퍼블리는 뭐가 빠른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기억이 나타나는 주기라면 아까 빨라지긴 했지만 지금은 아무리 걸어도 기억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가 빠른 거예요?”
기억이 모이는 게.”
갑자기 온 세상을 쓸어가는 거대한 무언가에 퍼블리는 반사적으로 제 팔을 쓸었다. 오돌토돌 소름이 일어났다. 만약 주변의 모든 공기가 말을 할 수 있고 술렁거리며 달려간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다시 뒤를 돌아본 퍼블리는 깜짝 놀랐다. 안개가 조금 걷히고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들이 잔뜩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제 주위 전부 안개가 나무에 살짝 걸쳐있는 것처럼 연해졌다. 드디어 숲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혼자갈 수 있겠니?”
?”
같이 가자고 한다면 갈 수 있지만 나는 이제 더 가고 싶지 않단다.”

애매했다. 못 가는 건 아니고 가고 싶지 않다는 거지만 굳이 가고 싶지 않은 마법사를 끌고 가기엔 마법사가 처음 만난 사이치곤, 곤란한 어린 마녀를 도와준다는 것치곤 필요 이상으로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래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기억들이 단순히 책의 이야기를 읽듯이 간단하게 보는 게 아닌 실제 시간과 같이 기억들이 흐르고 있는데다 보게 된 기억들도 자잘하게 많았으니 마법사랑 같이 있었던 시간은 다시 돌아보면 놀랄 정도로 꽤 길었다.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정말...고마웠어요. 또 만날 수 있나요?”
네가 만나길 원한다면.”

아직 떠나기를 머뭇거리던 퍼블리는 결심했는지 마법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모자를 푹 눌러쓴 마법사의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퍼블리는 모자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고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몸을 크게 숙였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건넨 퍼블리에 마법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하늘을 예쁘게 머금은 것 같은 동그란 머리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었지만 움찔 손이 떨리며 바로 내려갔다. 얼굴이 땅을 향한 채 눈을 꾹 감고 있느라 그걸 모르는 퍼블리는 천천히 일어나 마법사를 한 번 더 보고 다시 한 번, 그리고 이번엔 살짝 고개만 숙이며 뒤돌아 안개 걷힌 숲으로 나아갔다.

퍼블리는 다시 혼자가 됐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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