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사방이 하얄 정도로 눈이 가득 쌓였다. 왕국에선 길이 미끄러울까봐 소금과 흙을 뿌려두거나 가끔 심각할 땐 선생들이 미끄럼방지 마법과 눈을 금방 녹이는 열 마법을 썼었다. 하지만 여기엔 그런 선생들은 당연히 없었고 식량과 함께 소금도 챙겨 왔지만 눈을 녹이기엔 부족했고 흙은 파서 따로 놓기 전에 이미 지금도 잔뜩 내리는 눈으로 덮여 모습을 감춘지 오래였다. 임시로 지은 집 지붕은 땅처럼 눈이 가득 쌓여있었지만 생각보다 튼튼해서 꽤 버티고 있었다. 아마 겨울동안은 버틸 것 같았다. 만약 봄에도 눈이 내린다면 그 때엔 무너질 게 뻔했다. 튼튼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로 지은 거에 비해선 튼튼한 거였으니.

멀리서 봤을 때 웬 눈덩이가 날아오나 싶었어요~”
호호 웃는 소리와 함께 거침없는 말이 전서구에게 날아왔지만 이제 전서구도 익숙한지 아니면 추웠는지 부리도 꾹 닫은 채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임시로 만든 집은 꽤 작아 전서구가 들어가면 마녀 하나 누울 정도의 공간만 남았다.

그래서 숲은 아직도 신기루 상태고?”
, 아직도 그러네요. 그래도 저번보단 더 선명해졌어요. 바다 쪽은요?”
땅은 진즉에 밟은지 오랜데 이상하게 발을 땅에 오래 붙여놓질 않아.”
이제는 겨울이 되어버렸지만 아니카는 축제가 한창 시작됐을 둘째 날, 퍼블리와 난데없이 헤어진 그 여름날에 멈춰있었다. 메르시를 찾아가 피리에 대해들은 아니카는 왜 그런 저주 가득한 위험한 데로 퍼블리를 보낼 생각을 했냐고 따져 묻는 대신 그 위치가 어딘지 부터 물었다. 듣자마자 갑판에 드러누운 전서구에게 달려가 어서 가자고 재촉한 후 바로 이곳으로 온 게 시작이었다. 전서구는 그 날의 일을 후에 말하길 그냥 웃는 얼굴도 어딘가 무서웠는데 그렇게 정색한 표정으로 재촉을 하니 순간 겨울이 된 줄 알고 오한이 들었고 지금도 상상하면 날개가 오들오들 떨린다고 했다. 그렇게 긴장한 건 패치가 용사에게 언성을 높이며 숲에 가는 걸 말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처음 숲이 있어야할 곳으로 왔을 땐 숲은커녕 나무도 안 보이는 허허벌판이라 전서구가 정말 여기가 맞냐 계속 물었었다. 그 때 아니카의 표정은 재촉할 때처럼 굳어있었지만 그나마 전서구 등에 타고 있는 터라 못 봐서 그렇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였지 만약 얼굴을 봤으면 얌전히 날갯짓을 했을 터였다. 아니카는 허허벌판을 내려다보면서 여기로 오기 전에 아직 배에 있을 때 벌떡 일어난 전서구의 등 위로 올라타는 순간 들려온 메르시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퍼블리는 무사할 거예요, 저주는 퍼블리에게 통할 수 없어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머리 좋은 아니카는 그 말을 단순히 안심시키기 위해 던진 말로 덮어 누르지 않고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눈으로 보게 됐다.

그보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나무는 물론이고 풀이나 조금 있던 허허벌판 위로 저렇게 숲이 생기다니.”

그 여름날에 왔던 허허벌판과 지금 창문 너머로 눈으로는 보이는데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숲이 같은 장소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직접 본 아니카와 전서구도 놀라워서 숲을 계속 눈에 담고 있었다. 그렇다고 숲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처음엔 허공에 웬 나뭇잎 하나가 둥둥 떠 있었는데 다음날 다시 보니 나뭇잎 여러 장 붙은 나뭇가지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 다시 보니 나무 하나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 다시 보니 나무 열 그루가 나타났고 또 다음날들을 반복하니 어느새 숲이 나타났다.

정화된 순백의 날 이후 저주로 가득 찬 숲은 모습을 감췄고 숲이 있던 장소에는 아직 저주가 남아있으니 위험하다며 다녀온 마녀와 마법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책으로밖에 숲을 알 수 없는 어린 마녀들에게는 숲이 있는 장소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나마 알고 있던 그 때 당시 어른들은 애들보다 저주 무서운 줄 모르고 약새풀 찾으러 갔다가 허탕치고 왔다. 전서구와 비둘기들은 제 목숨이 귀한 줄 당연히 알고 있으니 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십년간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던 숲이었다. 그런데 그런 숲이 이제야 갑자기 나타난다는 건 무언가 다시 숲의 모습을 드러내게 할 요소가 있었다는 거고 아니카는 그게 뭔지 눈치 챘다. 바로 피리 불고 숲으로 들어간 퍼블리임이 틀림없었다.

저 신기루 안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저렇게 드러나는 모습이 넓어지고 있을까.”
아니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숲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전서구는 난로 옆에 제 날개를 가까이 대며 지난 몇 달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봤다. 누가 그 붉은 머리 마법사의 아이 아니랄까봐 퍼블리는 무모하게 돌격하기 바빴고 누가 그 무모한 아이의 친구 아니랄까봐 아니카는 좋은 머리를 굴려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기 바빴다. 전서구는 그 여름날, 허허벌판으로 내려올 때 설마 아니카가 무턱대고 숲을 찾으려고 땅을 파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다행히 아니카는 그러지 않았고 땅 한 번 밟은 후 다시 전서구의 등 위로 올라타 왕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전서구는 기쁨을 느끼기 전에 의외와 의아함을 먼저 느끼고 눈을 굴려 제 위에 타고 있는 아니카를 보려고 했지만 아니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부터 시작이었다.

내가 무슨 개인 이동수단이여?!”
소식을 전하고 보여주는 비둘기 우체부 대표지요~”
아니카는 학교가 끝날 때마다 매일 그 허허벌판으로 태워다주고 바로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냐고 했다. 요컨대 일단 자신의 수업일수는 채워야한다는 거였다. 제 현실도 챙기고 원하는 일도 챙기는 바였다.

따지자면 나도 할 일이 있다고!! 내 원래 직업은 비둘기 우체부인데 직업도 아닌 공짜 이동수단 한 게 대체 몇 번인...”

물론 아니카는 머리가 좋았다. 공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아니카가 전서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고 전서구는 흥분해서 치뜬 눈과 벌린 부리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이이이이이이이이거....”
이제 값 치르면 되죠?”
아니카가 내민 건 약새풀이었다. 일단 저주를 먹은 풀이라고 불리지만 지금의 마녀와 마법사의 인식은 그래도 그 가치는 매우 뛰어난데다 귀하기까지 해서 굉장히 비싼 풀이었다. 그건 비둘기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밸러니의 숲이 사라진 이후론 이제 한자리에 고정되어 자라지도 않고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서 자라는 풀이었다. 줄기 하나만 발견해도 주먹만 한 금보다 더 귀하게 대접받는 바로 그 풀이었다.

전서구는 아까 전엔 흥분해서 외쳤던 거고 지금도 충분히 흥분한 상태지만 그래도 이렇게 귀한 풀을 그것도 아직 어린 마녀에게서 받아낸다는 건 좀 미안하지 않은가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만 그보다 더 빨리 두 날개가 사뿐히 날듯이 모여 그 귀한 풀을 고이 받쳤다. 물론 그 풀은 퍼블리네 집 뒷마당에서 하나 뜯어온 거였고 당연하게도 아니카의 손해는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전서구는 겨울 방학이 오기 전까지 아니카를 극진히 모시다시피 하며 점점 숲이 드러나고 있는 벌판과 왕국을 왕복했다.

그리고 겨울이 됐을 때 아니카는 더 이상 왔다갔다 하지 않고 왕국 밖으로 여행 나가는 마녀들이 자주 쓰는 휴대용 임시 집을 사서 아예 숲 옆에 눌러앉았다. 그 후 아니카는 전서구가 없는 동안 벌판을 가득 메운 숲을 살펴보기 위해 다가가 봤지만 손을 뻗으면 나무의 꺼끌하고 딱딱한 감촉은 손에 닿지 않았고 오히려 나무가 안개처럼 흐려지기 바빴다. 손을 떼니 나무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마침 날아오고 있던 전서구가 저주 받으려고 작정했냐며 잔소리하기 시작했지만 지금 숲의 상태는 신기루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아냈다. 전서구는 아니카가 여기 눌러앉은 이후로 식량과 생필품과 바다 소식을 가져오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데에 쓰이는 돈은 퍼블리네 뒷마당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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