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끌어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보니 얼굴은 굳이 안 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조금 이따가 그 방으로 올래?”

 

울고 흐느끼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가라앉은 말만 남기며 마녀는 물러났다. 사태가 일단락이 되었으니 마녀들은 범죄자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마을 근처를 조사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말한 후 둘로 일행들을 나눴다. 하나는 마을 밖으로 다른 하나는 쉼터로 돌아갔다. 쉼터로 돌아간 이들은 일종의 대기조였다. 나와 대화를 나눈 마녀는 대기조였다.

쉼터로 들어가 둘러보니 다행히 마녀들은 각자의 방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 가장 끝 구석진 방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내가 엿들었든 그 창문의 방이었다. 문이 열리고 눈물 자국이 사라진 마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어오렴.”

 

실례하겠습니다!”

 

역시 혼자만의 비밀이었는지 방 안엔 마녀 외엔 아무도 없었다. 다른 마녀들이 들으면 곤란할 테니 일부러 갇혔던 이 방으로 나를 불러낸 게 분명했다.

 

저 창문너머로 들었던 거니?”

 

.”

 

어디까지?”

 

이번엔 내가 아니라는 것만.”

 

누군가와 대화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들은 건 그것뿐이었다.

 

왜 그랬니?”

 

이건 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경계하는 건 물론이고 어쩌면 내 입을 막기 위해 나를 죽이는 상황까지 상상했었는데 지금 반응은 사고를 치거나 무례한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달래고 타이르려는 어른의 반응이었다. 황당함에 순간 바로 대답이 안 나왔다. 솔직하게 말해달라며 채근하는 말에 머릿속을 정리하고 무난한 반응을 던져봤다.

 

어른들이 책가게랑 쉼터를 못 가게 해서 몰래 와봤는데 꽁꽁 닫힌 창문이 있어서요.”

 

위험하니까 다음부턴 그러면 안 돼.”

 

그 반응에 나 또한 깨달은 게 있었다. 마녀에게 있어서 나는 경계대상은 물론, 죽이면서까지 입을 막을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냥 어린아이였다. 제대로 엿들은 게 없는 버릇 나쁜 어린아이였다. 그걸 깨닫자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저를 기르는 보호자와 닮으셨어요.”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그만큼 앞의 마녀는 나를 기르던 마녀와 닮았다. 얼굴조차 닮지 않은데다 내 목을 조르고 소리치면서 물건을 던져대지도 않았고 오히려 최대한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데도 닮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너희 아빠도 그런 걸 보면 걱정을 많이 끼쳤었나 보구나. 그러면 안 되지.”

 

상대가 어려서 위협거리조차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나도 닮았다. 거기에서 차이점을 짚자면 나를 기른 마녀는 위협이 안 돼서 마음껏 폭력을 가했고 내 앞에 있는 마녀는 위협이 안 돼서 이렇게 타일렀다.

 

그리고 기른다고 하는 게 아니라 키운다고 하는 거야. 의미는 같지만 기른다고 하는 건 보통 가축한테 쓰는 거니 느낌이 좀 그러니 이젠 주의하렴.”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내가 아직 어른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그들이 너무 웃기기만 했다. 키가 커진 만큼 아래를 못 보게 되는 걸까 아니면 고개를 숙여볼 생각을 못하는 걸까. 경계할 가치조차 들지 않는 어린애가 책가게의 주인을 죽이고 저를 궁지로 몰아붙였다가 건져준 걸 저 마녀는 영원히 모를 거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너무나도 웃긴 동시에 즐거웠다.

한순간에 지루함이 가시고 기분이 좋아졌다. 환하게 웃어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한결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사실 준비해놓고 아까 던져본 말로 포기한 게 있었다. 하지만 마녀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을 놓아버려 매우 유용하게 됐다.

 

친절하고 좋은 어른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얇고 긴 끈을 달아놓은 작고 동그란 가죽 공이었다. 흔들면 찰랑찰랑 안쪽에서 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난다. 가죽에는 꽃잎 물을 들여 색도 향도 꽃이었다. 마녀는 그 공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으면서 받아 목에 걸었다.

 

예쁜 선물 고맙구나.”

 

마녀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곤 작별인사를 하며 나왔다. 시간을 보아하니 이제 마녀들끼리 교대를 할 때가 됐다. 내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금까지 대화했던 마녀를 포함해 남아있던 마녀들이 밖으로 나갔다.

집에 있었던 책들은 마녀왕국에 있을 법한 책들이 꽤 많아 무작정 외우기만 했지 이해는 안 된 마법들이 많았고 그만큼 굉장한 마법들이 많았다. 구성을 이해하면 훨씬 더 편하고 마법 자체도 변형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좀 더 자라고 머리도 더 돌아갔을 때 기본부터 다시 익혀 구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니 말이다.

다만 이 땐 말 그대로 전부 다 외웠다. 종이에 적힌 그대로 다른 데에다 똑같이 옮겨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외웠고 마법자체는 마법진 혹은 주문식에 마력만 불어넣으면 발동이 되는 거였다. 그 마법들의 마법진과 주문식을 전부 다 외운 나는 그 모든 마법들을 쓸 수 있었고 주문식보다는 마법진이 더 잘 맞았다. 마침 내가 본 책에는 원격으로 마법을 일으키는 마법진이 있었고 당연히 그 마법 또한 외웠다.

마녀에게 준 가죽 공 안쪽엔 원격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누가 어린애가 원격 마법진을 새겨 넣을 거라 생각하겠는가. 거기에 더해 마녀는 나와 대화하느라 목에 걸어둔 걸 잊었고 그대로 교대 탐색하러 밖으로 나갔다. 탐색이어서 뿔뿔이 흩어져도 기본적으론 두 명이서 함께 다니는 듯 했지만 그래봤자 소수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다시 나무 다듬이 마법사의 마당으로 돌아와 거기 있는 닭들을 열 번 정도 셌고 이정도면 됐겠지 싶어 어제도 썼던 작은 불을 일으키는 마법을 썼다. 원격 마법 또한 발동 됐다. 덧붙여서 밝히자면 그 가죽 공 안에 든 건 기름이었다.

 

 

 

아니 어제도 그렇고 누가 이렇게 불을 지르는 거야?!”

살해범이 날뛴다더니 여긴 방화범이 날뛰고 있네!”

 

불이 붙자마자 나무로 넘어졌던 건지 저 멀리서 연기와 함께 주황빛이 아직 새파란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마을 마법사들이 기겁을 하며 어제 물마법을 가장 잘 다뤘던 마법사를 앞세워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 틈에 나는 바로 책가게로 달려갔다. 어제처럼 그림자에 숨어 뒷문 쪽으로 가보니 불을 끈 후에 시신만 수습하고 전부 내버려둔 건지 문이 그대로 열려있었다. 겨우 의심 가는 마녀를 잡아뒀다고 이렇게 허술하게 뒤처리도 안 하다니 내 입장에선 참 고마웠다.

그을음이 가득한 바닥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른들이 다시 돌아와서 내가 여기 들어온 걸 발견해도 딱히 걱정은 안 됐다. 호기심 때문에 들어왔다고 울먹이며 시무룩해하면 잔소리 몇 마디 외엔 의심조차 안 할 테니 걱정이 들래야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애로 있는 건 이런 면에서 참 편하구나 싶었다.

 

.”

 

그을음이 안쪽까지 번져있었지만 책들은 전부 멀쩡했다. 대신 물에 젖어 구겨진 책들이 꽤 있었다. 흥미 안 가는 책들이 대부분이라 정말 이거 밖에 없나 싶어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겹쳐진 책장이 보여 밀어보았다. 그러자 안에 가려져 있던 새로운 책들이 나타났다. 역시 귀한 건 한 번 정도는 다른 걸로 덮는구나 생각하며 물 젖은 흔적도 없이 귀하게 보관된 그 책들의 제목들을 쓸어보았다.

대부분이 유용한 생활상식 보단 더 전문적이고 귀한 마법이론 책들이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흥미로운 책들 네다섯 권 챙겨들은 나는 밖으로 나와 다시 그림자 아래로 숨어들어가 마을 분위기를 살폈다. 바깥으로 전부 나갔는지 매우 조용했다. 혹시 누구 하나라도 아직 집에 있을까 싶어 마을 한 가운데로 나가진 않았다. 바깥은 숲에 번진 불 때문에 소란스럽지만 마을은 조용하다. 이 대비되는 고요가 참 마음에 들어 아주 예전에 동화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흥얼거렸다.

 

요정들은 작지만 욕심이 커 짚담에 큰 구멍을 만들어 아이들도 따라 구멍으로 드나들고

 

마을을 벗어나 불이 꺼져 탄 자국이 가득한 숲으로 발을 들였다. 저 멀리서 아직까지 불을 끄고 있는지 소란스러움이 가득했지만 상관없었다.

 

요정의 뒤를 따른 아이들은 온갖 신비로운 환상들을 보게 되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소리들은 옅어지고 탄내가 짙어졌다. 그림자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까맣고 조용해 검은 글자 가득한 책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신이 나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저 앞에 나무가 아닌 뭔가가 있었다.

 

길을 잃었답니다.”

 

가장 먼저 보인 발이 주위의 나무처럼 까맸다.

 

하지만 전 밖에서 살아서 길을 잃지 않아요.”

 

검은 발이 점점 바스러지더니 탄 자국이 가득한 짐 가방을 제외하면 모든 게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재들이 전부 사라지고 남은 건 처음보고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였다.

 

거기에다가 전 오늘 운이 너무 좋네요.”

 

단 둘이 방에서 얘기할 때 얼핏 본 그 짐 가방을 들어올렸다. 그을음이 묻었지 가방 자체가 탄 게 아니었다. 안쪽에서 뭔가 시끄럽게 웅웅거렸다.

 

[무슨 일...!! 이거 왜....!!!]

 

두 손으로 꺼내 들어야할 정도로 커다란 수정구에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고장이 났는지 안쪽이 희뿌옇고 소리가 끊겼다. 쓸모없겠구나 싶어 꽃 있는 데로 던져줬다. 쨍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조용해졌다. 수정구를 꺼내니 자리가 넉넉하게 비어져 그 안에 들고 있던 책을 넣고 맸다.

 

재미없네.”

 

오늘은 운이 너무 좋은 날이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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