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마법사는 토끼보다 오래 버텼고 토끼보다 더 시험해보는 종류가 다양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너무 즐거워서 그랬는지 마법사는 기대에 못 미칠 만큼 일찍 죽었다. 옷 주머니엔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모를 마법물품과 앞뒤 내용이 없어 맥락 파악하기 난해한 정보를 담은 종이가 몇 장 나왔다.

 

손해는 아니지만 뭔가 아쉬운데...”

 

얻은 건 분명히 있지만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다. 새로운 걸 얻어서 한창 흥미로울 쯤에 계속 멈추는 현상은 별로 유쾌하진 않았다. 어쨌든 이것들 또한 창고와 서랍 안쪽에 넣어놓았다. 넣는 도중에 이젠 자리가 부족했는지 무언가 밀려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녀의 옷장 깊숙이 있던 낡고 작은 상자였다.

서랍도 다 찼고 옷장에 다시 넣어놓기엔 받아온 옷들을 넣어놔서 넣기가 마땅치 않았다. 나중에 가능하다면 창고도 늘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자를 책상 한 구석 끄트머리에다 올려놨다. 정리를 끝낸 후 마무리로 토끼 시체 대신 남은 풀을 태워 없앰으로써 다시 반복되는 일상이 돌아왔다.

 

변함과 사건 없는 삶이란 이렇게 마법사를 재미없고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제 내게는 귀찮은 일이란 건 없었고 아픈 것보다 지루한 게 더욱 끔찍했다. 마녀가 나를 키울 동안엔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으니 인식을 못했던 거였다.

 

진짜 많이 컸네~”

 

얼마 안 있음 치트도 어른이지?”

 

그런데 치트 아빠는 한 번도 못 봤네.”

 

바쁘다고 하잖아? 바다에서 일한다면 이 마을에 올 일이 없지.”

 

그들의 말대로 나는 이제 어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내 키는 굉장히 많이 커져 이젠 마을 내에서 올려다 볼 어른이 없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날카롭던 마을의 분위기 또한 풀어졌고 내가 벌인 일들은 가끔가다 어른들이 술을 마실 때 얘깃거리로 나오곤 했다. 나를 의심하며 경계하던 이들은 여전히 거리를 뒀지만 예전만큼 날을 세우지 않았다.

 

화환을 만들어야겠지?”

 

치트야 꽃이 좋니 나뭇잎이 좋니?”

 

둘 다 써서 만드는 게 어때?”

 

어른이 되면 꽃이나 나뭇잎으로, 둘 다 없는 겨울엔 얇은 나뭇가지들을 엮어서 환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는 풍습이 남아있는 마을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마을이 그런 마을인 줄은 몰랐다. 내 의견을 묻겠다며 원하는 꽃과 나뭇잎이 있으면 말해달라는 어른들에게 딸기꽃이라고 말하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농담인 거 아시죠? 그러니까 안 만들어도 괜찮아요.”

 

에이 무슨 소리야? 만드는 게 어렵지도 않은 걸.”

 

게다가 여긴 다 늙은이들 밖에 없어서 이런 거 챙기고 만들 일이 거의 없었단 말이야. 다들 만드는 거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늙은이에서 난 빼라, 난 아직 젊다.”

 

어른이 된다 해도 지금 상태론 달라질 게 없었고 이 반복에서 벗어날 방법이 되는 것도 아니니 별 감흥이 없었다. 신난 어른들은 화환 말고도 준비할 다른 것들에 대해 떠들고 얼마 안 있으면 어른이 될 나는 무료한 눈으로 책만 봤다. 이제 이 책가게의 책도 전부 봤다.

 

어른 되는 날까지 며칠 안 남아서 그동안은 오래 못 본 아빠랑 같이 지낼까 해요.”

 

어이구 그건 당연한 거지!”

 

그 때 네 아빠도 모시고 와! 전부터 궁금했어!”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하며 마을로 나왔다. 더 있었다간 표정 관리를 못할 게 분명해 발을 빨리 움직였다. 재미없는 데에 억지로 있는 건 너무 고역이었다.

 

지루함은 참 끔찍해요.”

 

호응 없는 불평을 뱉으며 주변의 모든 걸 눈에 담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는 언젠가 지루함을 못 이겨 결국 스스로 목을 매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아프지 않게 죽는 방법을 찾으면 그동안 지루함이 없지 않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집으로 돌아와 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는 그대로 아무것도 안 했다. 밥도 먹지 않고 뒤척이지도 않은 채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시간이 흘러 창문 너머 햇빛이 사라지고 어두워지는 것도, 다시 해가 떠서 밝아지는 것도 쭉 지켜봤다. 그러면서 배 또한 고파졌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져서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계속 같은 자세로 누워있으니 등을 비롯해 자잘한 부분이 뻐근해졌다가 마찬가지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전부 무감각해졌는데도 지루함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지루함은 죽음보다 더 독하겠지.

 

그렇게 꺼진 의욕을 따라 숨 또한 꺼뜨리길 며칠,

 

?”

 

한 순간 빛이 번쩍였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며칠간은 해지는 시기는 물론 뜰 시기도 감 잡을 시기였다. 해가 뜨려면 한참 남았고 방금 그 빛은 창문 밖에서 번쩍인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집 안에 빛을 내는 거라곤 장작도 안 넣은 난로와 초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누워만 있었던 터라 금방 일어나기도 쉽지 않아 고개만 옆으로 돌리니 책상 한구석에 뭔가가 빛나고 있었다.

 

콜록!”

 

다시 한 번 헛웃음이라도 흘리려고 했지만 지금 목 상태에 두 번은 힘들었는지 바로 기침이 올라왔다. 그러자 고통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몰려올라와 온 몸을 괴롭혔다.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일어서는 동시에 몸이 휘청 흔들려 넘어졌다. 침대와 겨우 두 걸음 거리의 책상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기다시피해서 책상에 도착한 나는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 올려 뻗었다. 손 끝에 상자가 가볍게 닿았다. 그러자 잠겨서 열리지 않았던 상자가 열리고 빛이 터져 나왔다. 그 후 나타난 건

 

당신이 비밀이 많다는 건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빛은 마력이었는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고 똑바로 설 수 있었다.

 

궁금해서 찾아보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숨길 건 제대로 숨기고 없애놔서 알기도 힘들었죠.”

 

밧줄도 없는데 마녀는 공중에 떠있었다. 잔뜩 울상을 지으면서 나를 내려다본 상태로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예전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게 뭐냐고 물었겠지만 제대로 말도 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부턴 묻지도 않았던 것도 기억나네요. 자기연민과 죄책감 가득한 당신은 아마 제가 물으면 또 때릴까 안 물었다고 생각했겠죠? 안타깝게도 틀렸습니다~”

 

나는 마을 어른들에게 곧잘 지어주던 웃음을 지으며 말해줬다.

 

뭘 묻기엔 당신은 제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대답할 능력이 없으니까요.”

 

살아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환영인지 모를 마녀는 내 말에 대답대신 다른 걸 내놓았다. 내 머리에 손을 얹은 흰 빛은 기억이 되어 들어왔다.

 

대여섯 명의 마녀들이 보였다. 그 중 둘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나는 목매달아 죽은 후 상자에 있던 마녀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죽인 마녀였다. 목까지 맬 정도로 죽음을 바랐던 마녀는 뭔가에 겁에 질려 울고 있었고 다른 마녀들은 짜증난다는 얼굴로 돌아보거나 아예 무시했다. 그나마 그 마녀를 위로하는 건 역시 내가 죽인 마녀였다.

 

기억이 바뀌고 이번엔 울고 있던 마녀만 나타났다. 이번에도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상황이 아까와는 달랐다. 도망치고 있었다. 주위엔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건물들과 특이한 형태의 옷을 입은 마녀들이 있었다. 그에 나는 저기가 어쩌면 그 마녀왕국이 아닐까 싶었다.

울고 있는 마녀는 손에 피를 흘리면서 무언가를 쥔 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손에 있는 걸 자세히 보니 가시 가득한 녹색 줄기가 흔들렸다.

 

다음으로 나온 기억은 어떻게든 마녀왕국을 빠져나왔는지 주위 풍경이 익숙했다. 나무 사이를 빠르게 달리고 풀과 꽃들을 밟으며 마녀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밤이라 어두워서 그런지 마녀는 앞도 제대로 못 보고 나무에 부딪히고 엉킨 풀에 걸려 넘어지길 반복했지만 계속 일어나 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고 마녀는 순간 앞을 못 보고 구르듯이 넘어졌다. 동시에 첨벙 물소리가 들렸다. 마녀가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호수가 있었다. 호수는 푸른 달과 처음 보는 검은 꽃을 담고 있었다. 모양을 자세히 보니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책에서 써진 대로 줄기에는 가시가 가득하며 천을 덧댄 것처럼 민들레 홀씨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풍성한 꽃. 장미였다.

하지만 저 장미는 일반적인 장미가 아니었다. 아기가 태어날 만큼 크지도 않고 한 손에 줄기를 쥘 정도로 작았으며 꽃잎 색이 빨간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밤하늘보다 더 검은색을 처음 봤다.

 

마녀는 피투성이 손으로 기어가 호수위에 떠 있는 검은 장미로 손을 뻗었다. 맑았던 호수가 피로 물들었고 푸른 달이 빨갛게 지워졌다. 장미에 손이 거의 닿는 순간

 

우으아

 

검은 장미는 사라지고 마녀의 손 끝엔 아기가 있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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