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는 수정구 말고도 옷과 작은 책, 씨앗이 들어있는 봉투, 뭔지 모를 게 들어있는 유리병들이 있었다. 우선 유리병들만 꺼내 살펴보니 물 같은 게 아닌, 색이 있는 연기가 구름처럼 흐르고 있었다. 온갖 색이 섞여있어 더 설명하기 난해한 이 연기의 정체를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지만 정체는 비록 나중이지만 간단하게 알게 됐다. 같이 들어있던 작은 책에 적혀있었다.

 

가만히 있었어도 몇몇은 죽었겠네.”

 

마력 추출. 여러 어려운 말이 적혀있고 풀과 나무, 꽃 등 자연물을 상대로 한다고 했지만 내용을 보면 그냥 제 눈만 가린 꼴이었다. 함부로 처리하기도 힘들어서 창고에 넣어두고 더 자라 책의 내용을 이해하게 됐을 때 덩달아 그 때 사건의 범죄자의 정체와 수법을 알게 됐다. 짐 가방 주인이었던 그 마녀였다.

이유는 몰랐었고 얼마 전에야 알게 됐지만 목적은 단순하고 당연하게 마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자연물에서 나오는 한 줌 정도의 마력이 아닌, 마녀나 마법사 하나는 될 정도로 많은 마력이 한 번에 필요했고 그 결과물이 유리병 속의 내용물이었다. 저 병 하나하나에 들어있던 연기는 바로 그 사건에서 죽은 마녀들과 마법사의 마력이었다. 원래 눈에 안 보이는 마력이 저 정도로 압축해놓으니 결국 보이게 된 결과였다.

유리병을 창고로 넣은 이후엔 크게 별 일은 없었다. 마을 마법사들과 마녀들은 의외로 서로에게 별 말이 없었고 가보니 마녀들이 이미 떠난 상태였다. 다만 마을 마법사들은 그 날 이후로 경계심이 심해져 여행 온 마녀는 물론, 다른 마을에서 온 마법사가 올 때에 분위기가 미묘하게 가라앉고 세운 날을 감췄다.

소식지에선 범죄자를 잡지 못했지만 더 이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 이후로는 다시 전처럼 생활상식과 소소한 자연 이야기만 올라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대로 자라지 않을 줄 알았던 내 키는 생각지도 못하게 쑥쑥 컸다. 맞는 옷들이 없어 곤란해진 때에 이제 내 키가 많이 큰 걸 보고 기특하다는 듯이 웃던 마을 마법사들은 자신들 혹은 다 자란 자식들의 예전 옷들을 꺼내 내게 안겨줬다. 어떤 어른들은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도 갑작스레 커진 내가 어색했는지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자급자족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키가 큰 이후론 마을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 모아놓을 수 있게 됐다. 마녀가 가지고 있던 돈이 꽤 많았어도 언젠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마을에서 사는 게 어떠니? 매번 이렇게 왔다 갔다 하기 번거롭잖아.”

 

지금 사는 데가 일터랑 더 가까워서 옮길 생각이 없다고 하시네요.”

 

벌써부터 돈 벌 생각을 하다니 기특하기도 하지, 자 이거 먹어라. 한창 클 때 많이 먹어둬야 하는 거야.”

 

나무 다듬이 마법사는 내가 종종 세던 마당 닭 중 하나를 잡아 구워 내게 건넸다. 이렇게나 호의를 보이는 그들에게 웃어주며 아직 그대로 있는 책가게로 눈을 돌렸다. 작은 마을엔 책도 귀하고 하물며 이런 책가게가 있는 건 꽤 운이 좋고 신기한 일이었다. 이 책가게도 책을 판매하기보단 책을 빌려주면서 돈을 받는 식으로 유지해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 책가게는 철거하거나 책을 뿌리기엔 가치가 마을 내에서 높았고 가치와는 별개로 책을 많이 읽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아 이대로 두고 일종의 도서관처럼 쓰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에 난 괜히 무겁게 책들을 들고 왔다는 감상 외엔 든 게 없었다.

덕분에 마을에 올 때 돈벌이 외에 목적이 생겼다. 당연하게도 책가게의 책들을 읽는 거였고 사실상 내 지루함을 없애주는 공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책 읽는 아이가 그렇게 좋은지 찾아와 과자를 주지 못해 안달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렸으니 그렇게 평화롭게 지냈구나 싶었다.

 

이제 얼마 안 있음 딸기철이네.”

 

그러고 보니 한 몇 년 전 이맘 때 쯤에 웬 정신 나간 마법사 하나 찾아오지 않았었나?”

 

애 앞에서 말 곱게 써라. 그리고 정신 나간 게 아니라 아파 보이는 거였어.”

 

아니 상처는 없었는데 얼굴은 초췌하고 이상한 말만 하던 마법사가 정신 나간 마법사 아니면 뭔데?”

 

그러, 니까, , , 곱게, , 라고!”

 

끊어지는 단어 사이사이의 등짝 때리는 소리 박자가 귀에 잘 들어왔지만 듣고 싶은 건 이상한 마법사에 대한 거였다. 그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니 바로 얘기가 술술 나왔다.

 

어느 날 다짜고짜 나타나서 내 팔 붙잡고 흰 색 장미를 들고 간 마녀를 못 봤냐고 묻더라. 장미는 빨간색이라고 제대로 알려줬는데 막 화를 내더니 갑자기 이 집, 저 집 뛰어 들어가 부수고 난리 부려서 나무 다듬이랑 호박집, 늘풀이 이 셋이 그 놈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내쫓았지.”

 

흰 색 장미요?”

 

우리가 아무리 장미 본 적 없다 해도 장미가 빨간색이란 건 다 아는데 뻔히 그런 말한 거 보면 아직 회수 중인 야생 장미가 있었나 싶었지. 아마 그거 노린 녀석 같았는데...아무리 생각해도 그 때 제대로 붙잡아 놓고 마녀 왕국에다가 알려야 했던 거 아냐?”

 

그 셋이 겨우 달라붙어 내쫓은 녀석을 어떻게 붙잡아 두려고?”

 

장미와 호수에 대해선 기본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당연히 장미가 빨갛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뭔가 이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그냥 장미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하얀 장미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면 말 그대로 하얀 장미가 존재했거나.

 

완전히 쫓아낸 거예요?”

 

아니. 한 일주일에 한 번은 찾아와서 깽판을 부리다가 어느 순간 뜸하게 오더니 지금 아예 안 오고 있어.”

 

마지막으로 온 게 치트 네가 여기 맨 처음 온 때로부터 1년 전? 아마 그 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해.”

 

이 마을에 이렇게 얼굴을 익히게 된지 4년은 넘었다. 그 수상한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온 게 적어도 5년 전이라는 거였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자 또 올까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히려 내 입장에선 또 왔으면 좋겠다 싶었으니 정말 의미 없는 위로였다.

내가 이 마을에 처음 발을 들인 날로부터 대략 1년 전, 뭔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그러다 별 의미 없이 고개를 올려 천장을 보다가 퍼뜩 깨달았다.

그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이 마을을 찾아오고 사라진 해는 나를 키우던 마녀가 자살한 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흥미만 잔뜩 돋았지 당장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른들이 설명하는 인상착의를 토대로 어디 있는지 모를 그 마법사를 찾으러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책을 읽는 걸로 지루함을 없애보려고 했지만 얼마 안 가 한계가 왔다. 그래서 저번에 비해 작은 사건을 한 번 일으켜봤다.

 

저게 뭐야?!”

 

세상에...어떤 미친놈이야!!”

 

나무 다듬이 마법사의 닭들을 전부 마을 입구 바로 옆에 있는 담에다가 매달아 놔봤다. 피투성이의 닭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았고 정작 해놓은 나도 그리 유쾌하진 않았으나 마을 마법사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누군가의 손을 타지 않는 이상 닭들이 스스로 피투성이가 되어 매달릴 일은 없었으니 이들이 누굴 의심하고 내가 저지른 걸 어떻게 알아낼지 궁금했다.

 

“...일단 진정하지.”

 

어떻게 진정해? 심지어 네 닭들이야!”

 

그래 저 꼴 난 닭들이 내 닭들이니 놀라고 화내는 건 내 몫이야. 그러니까 그만 화내고 진정해.”

 

나무 다듬이가 화난 걸 참으면서도 씁쓸한 표정으로 매달린 닭들을 보고 있었다. 옆에서 성질 급한 마법사 하나가 누가 저랬는지 짐작 가냐고 닦달하듯이 물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닭들부터 내려놓기 시작했다. 다른 마법사들도 도우면서 닭들을 아깝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주 계획적인 미친놈이야. 달걀까지 깨놨어.”

 

마을 마법사들의 분노가 한 차례 더 불타올랐지만 그들은 누가 그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고 단서도 못 찾았다. 며칠간은 열심히 찾거나 새로 닭을 들여와 닭장 앞을 직접 지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람 마법만 해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 죽은 닭들은 웬 미친놈한테 발목 한 번 잡힌 거라고 치부하며 얘깃거리로 쓰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에 나는 당연히 실망했다.

 

강도를 좀 올려볼까?”

 

저번에 마녀들이 찾아왔을 때처럼 근처 숲을 불태웠다. 닭들로 했으니 그렇게 안이했나 싶어 이번엔 과일 따러 간 마법사가 있을 때 일부러 태워봤다. 그제야 이런 일을 저지른 녀석을 잡아다가 찢어죽이겠다며 일어서는 꼴을 보니 우스우면서도 한심했다. 혹시 이대로 또 가라앉나 싶어 조금씩 자극을 해주니 점점 타올라서 내 발자국을 찾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녔다.

 

“...난 말이야. 솔직히 치트가 의심스러워.”

 

야 뭔 소리야? 왜 멀쩡한 애를 의심해?”

 

생각해보면 치트가 온 이후로 일이 벌어졌잖아? 그 마녀 감싸준 것도 치트였고.”

 

드디어 답을 맞힌 마법사가 나왔지만 외부에 가까운 자에 대한 방어적인 배척이 토대라 또 실망감이 가득 차올랐다. 이 짓을 두 번 더 하고 나서야 그만뒀다. 애초에 이런 평화로운 곳에 박혀 살아온 마법사들에게 합리적인 의심과 추리력을 기대하는 건 겨울에 봄꽃을 기르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잠잠해진 이후에도 마을 마법사들 중 몇몇은 은근하게 혹은 대놓고 나를 꺼려했고 그런 분위기를 본 나무 다듬이 마법사가 결국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애를 그렇게 보는 건 스스로도 창피하다고 생각 못하나?”

 

하지만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잖아! 우리가 쟤를 의심하기 시작하니까 바로 이런 일들이 사라졌잖아!”

 

게다가 네 닭들을 자주 보던 것도 치트였어!”

 

말은 바로 해야지. 치트를 의심하자마자 사라진 것처럼 말하지 마, 너희가 의심한 후에도 이런 일들이 몇 번 일어났잖아?”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의심하는 이들은 나에게 와서 대놓고 뭐라 하기엔 심증인데다가 증거가 없으니 나를 피하고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다른 이들을 대신해 미안해하며 나에게 더 다가와 갖은 칭찬과 간식을 주기 시작했다.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그래도 뭔가 더 해볼까 하던 순간 흥미로운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 안녕? 혼자 사니?”

 

두드려질 일이 없는 문이었는데 똑똑 소리가 울리자 바로 밖으로 나가보니 본 적은 없었지만 뭔가 모습이 익숙한 마법사가 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는 바다에 나가서 일해요.”

 

정말?”

 

. 그러니까 아빠 보러온 거면...”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보호자가 정말 마법사니?”

 

그 말에 나는 그 마법사를 빤히 쳐다봤다. 왜 익숙했는지 깨달았다. 본적은 없어도 저 인상은 잘 들어둬서 생생하게 기억했다. 상세하게 설명해준 그 어른들에게 짧게 감사를 속삭였다.

 

일단 들어오실래요?”

 

어느 날 마을에 갑자기 나타나 흰 장미에 대해 묻고 행패를 부려서 쫓겨났다는 미친놈이자 나를 키우던 마녀가 자살한 해에 사라졌다던 마법사.

 

집에 하나뿐인 의자를 양보하고 물을 한 잔 떠와 놓아줬다. 나는 그 사이에 탁자를 두고 의자 높이만큼 쌓아놓은 책 위에 걸터앉았다.

 

고맙구나.”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까지 들어오는 마법사는 드문데 무슨 일이세요?”

 

마녀를 하나 찾고 있다.”

 

제 보호자에 대해 물은 것과 같나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올려다봤어야 했겠지만 단숨에 커진 키 덕분에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 얼굴에서 어린 티는 아직 가시지 않았던 건지 그렇다며 혹시 보호자를 불러주지 않겠냐고 했다.

 

제 보호자는 없어요.”

 

얘야, 농담은 그만하고

 

농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예요. 제 보호자는 없어요.”

 

그렇게 대답해주고 이젠 밧줄도 없는 천장에 시선을 돌리니 그제야 내 말뜻을 알아챈 건지 표정이 꽤 복잡해졌다. 뭔가 짜증과 분노, 허망함은 알겠는데 하나는 많이 본 표정이 아니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는 내가 가져다 준 물을 들이키고는 말을 이어 뱉었다.

 

“...그래 결국 배신자도 끝은 다 똑같아, 다 죄책감 아니면 저주에 짓눌려 죽는 거지.”

 

죄책감이랑 저주요?”

 

이번에도 모른 척 하지마라. 그 마녀 아래서 자랐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죄책감은 학대를 저지른 것 말고도 뭔가 더 있어보였지만 저주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거였다. 내 반응이 꽤나 솔직하게 다가왔는지 마법사는 도리어 저가 의아하다는 눈빛이 됐다.

 

아무 말 안 해줬어? 그럴 리가 없는데? 죄책감은 물론이고 자기 연민도 강한 녀석이라 그동안 키운 너한테 자기 사정 떠벌리면서 일방적으로 이해해달라며 강요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했다고?”

 

마녀와 아는 사이가 맞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녀는 뭔가를 실수로라도 말할까 숨기기 바빴고 말로는 미안하다 했지만 행동은 저 설명대로였다. 실제로도 내가 말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뜻 모를 위로만 가르쳤으니.

 

진짜 애 하나 주워가지고 자기위로 속죄라도 하려한 건가? 무슨 생각으로 널 주워서 키운 건지 알고 있니?”

 

항상 목 조르고 동화책만 읽어줘서 잘 모르겠네요.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 마녀는 왜 찾으러 온 거고 저주는 뭡니까?”

 

혼란에 빠져 뭐라 더 중얼거리던 마법사는 내 말에 정신 차리고 나를 빤히 보더니 미묘한 웃음을 짓고는

 

혼자 사니까 힘들지 않아? 나랑 같이 안 갈래?”

 

그다지 힘들진 않네요. 그보다 저주가 뭔지 말해주시겠어요?”

 

나랑 같이 가면 말해줄게.”

 

뭐가 그리 급한지 웃는 얼굴에 초조함을 가득 담고 대답했다. 저렇게 다짜고짜 말한다면 내가 아니어도 수상쩍어하면서 안 가겠다는 생각을 저 뒤로 밀어 넣고 내 얼굴을 빤히 보는 그를 마주 봐줬다.

 

게다가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힘들지 않니? ?”

 

고민하는 걸로 보였어요?”

 

?”

 

제가 먹었을 때에 비해서 두 배는 넣었는데 역시 어른이라서 그런가? 멀쩡하네요?”

 

...”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쓰러지는 마법사와 그 여파로 깨지는 물잔이 참 아까웠다. 그래도 유용한 상대와 흥미로운 정보를 얻었으니 기분 좋게 파편들을 치웠다.

 

토끼들은 금방 죽던데 당신은 마법사니 좀 버티겠죠?”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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