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패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패치일세. 떠돌아다니는 마법사라 들어보지 못했네.”

엄청난 유명인이었잖아? 유명인 앞에서 이름 자랑한 셈이네.”

그렇게 말하며 마키나는 더 이상 그에 관해선 말하지 않았다. 패치가 마법사라는 걸 단박에 알아보고 기계 옷을 입은 입장인데 마법사들이 자기 이름을 잘 알 거라고 확신하는 걸 보면 경쟁 쪽으로 유명한 기계공인 듯 싶었다.

이건 1비트 정보를 저장하는 회로 이름이야. 세 가지의 뜻이 있는데 뒤에 3이 붙은 걸 보면 세 번째 뜻을 의미하는 거지.”

FLIP FLOP이라는 단어의 뜻 중 첫 번째는 이미 설명했고 두 번째는 어떤 종류의 샌들, 이 힌트가 의미하는 세 번째는 태도같은 게 표변하다는 의미였다.

바이트가 하나의 문자를 표현하는 단위고 이건 비트로 환산했을 때 8비트야. 암호는 네 자리니까 숫자 네 자리 아님 문자 네 자리일 거고 단어는 두 개, 뒤는 3. 그러니 23이고 이걸 뒤집으면 32. 물론 여기서 나타내는 건 태도를 표변하다지만 뒤집다도 비슷하니 그렇다 치고.”

풀이만 설명하고 자세한 이유는 생략하는 모습에 패치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계공들의 심심풀이 문제 중 하나였지만 심심풀이치곤 너무 꼬고 중구난방인 문제였다. 속에서부터 상당히 논리적인 불만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패치는 굳이 이 상황에 상세히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럼 답은 바로 이거지.”

‘OVER’

답이 맞았는지 삐링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울렸다. 마키나가 옆으로 비켜섰고 패치는 쪽지에다 하얀 들판의 요정에 관련된 내용을 적던 도중 귀퉁이 부분에 무언가 입력되어있는 걸 발견했다.

진실, 애도, 그림자

짧막한 세 단어 옆엔 새하얀 국화 그림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파란 눈이 살짝 가라앉았고 손은 열심히 움직여 정보를 입력했다.

혹시 요정 탐색자야?”

그리 묻는 이유는?”

요정에 대한 정보를 적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지나가다가 부탁을 받았지.”

마키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얼굴에도 쓴 기계판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아 요정과 관련된 일에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패치는 부러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를 취했다. 사실 반쯤은 시큰둥했다.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와줘서 고맙네. 자잘한 일에 대한 자잘한 보답이라해도 도운 건 도운 거니 감사인사를 해야지.”

그에 상대의 어깨가 뻣뻣해진다. 그런 논리라면 마키나 또한 감사인사를 건네야했다. 더듬거리며 그렇게 따지면 나도 고맙다고 인사해야하는 거 아니냐며 감사인사 아닌 감사인사가 나왔다. 이런 부분에 꼬집혔다고 느껴서 뜨끔한 건지 아니면 마법사가 싫은 편이어서 말대신 보답으로 빚을 지운 건데 결국엔 감사인사를 꺼내야해서 뻣뻣해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라, 당신 사실 요정이랑 연관이 많지?”

패치 입장에선 처음 듣는 소리였다. 요정이 쓰는 요술이 마법이랑 유사해서 학문적인 비교로는 연관이 있지만 요정 자체와는 그리 연관이 없었다. 패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상대는 확신하는 어투였다.

그럴 리가 없어, 기계가 얼마나 정확한데! 사실 이정도면 당신 자체가 요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행동과 성격을 보면 요정이랑 완전히 딴판이라 당신이 요정이 아닌 건 알겠어.”

만약 여기에 퍼블리가 있었다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게 분명했다. 일단 접근한 목적을 본격적으로 꺼내려는 것 같아 패치는 뭐라 더 말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애초에 자잘한, 그리 보답이라는 걸 받기에도 뭐한 일에 이렇게까지 따라와 보답했다면 그건 처음부터 뒤를 따라밟았다는 얘기였다.

난 요정 사냥꾼이야.”

처음듣는 직업이었다. 애초에 요정이 사냥 대상이었나? 의문이 들었지만 패치는 잠깐 들었던 묘사를 생각해봤을 때 세상은 넓고 그만큼 여러 좋지 않은 목적을 가진 이들 또한 존재한다는 걸 떠올렸다. 멀리 볼 것 없이 지금 같이 다니는 일행 중에 마법사 하나를 납치해 신전 개인침실에다가 눕혀둔 대사제가 있지 않은가.

요정이 한 번 붙으면 얼마나 곤란한 줄 알아? 악령들은 악의가 가득해서 방향성을 예측할 수 있지만 요정은 악의가 없어서 더 힘들어.”

마키나는 패치 근처에 요정이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새였다. 접근한 목적을 알게 된 패치는 완전히 관심을 껐다. 그리고 마키나는 직감했다. 이 마법사는 보통이 아니라고. 자기가 최강이라고 외치던 불망아지 마법사를 본 적이 있지만 그보다 더 한 마법사는 처음 봤다.

요정에 관해선 이번에 부탁받은 일과 정보를 얻게 된 일을 제외하면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네. 자네가 요정 사냥꾼이고 요정 탐지기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내 뒤를 밟는 기계공을 섣불리 믿을만큼 순진한 마법사로 보였나? 정식으로 입증할만한 걸 가져온다면 나 또한 정식으로 대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앞서 말했듯이 그게 다니 서로 의미없는 시간낭비하지 않길 바라네.”

짜증을 불러일으킬 요소가 가득한데 틀린 건 하나 없는 말이었다. 논리 없이 날뛰던 불망아지는 마주 날뛰어서 패면 되는데 논리와 합리 없인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이 마법사는 실력행사를 하면 오히려 경계만 더 심해질 유형이었다.

“...지원 요청서가 있어.”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한 채로 내미는 건 하얀 들판 인근 마을의 지원을 요청하는 요청서였다. 패치가 방금 정보를 입력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다른 건 좀 더 상세하다는 거였고 그 외엔 현재 마을의 상황만 적혀있었다.

당신이 적어놓은 내용과 같아. 원래는 사냥꾼 외엔 보여줘선 안 되지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겠지?”

알겠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내용처럼 하얀 들판에 요정이 나타났다는 정보와 그걸 적어달라고 했던 여행자들 뿐일세. 그 여행자들도 지나가다가 마주친 거였고 그 이후론...”

말 끝을 흐린 패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5년 전, 자신을 납치한 치트가 찾아왔고 퍼블리를 만났으며 환각의 숲에서 용사를 찾았었다.

평범한 인간이 환각의 숲에서 멀쩡히 살 수 있었을까?

짐작가는 게 있나봐?”

“...요정 사냥꾼은 어떤 요정이든 마주치는 즉시 사냥하나?”

그런 녀석들도 있지만 적어도 난 아니야.”

내 일행들 중에 짐작가는 사람이 한 명 있네. 사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같이 기다려도 상관 없네.”

많고 많은 인간들 중에서 어째서 자신들을 짚어 신탁이 내려졌을까. 신탁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낀 패치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