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신탁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절대 믿을 수 없을 녀석의 말을 신탁이라고 해서 믿을 수 있었을까? 신탁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신관이 아닌 마법사 마저 알고 있고 마법사도 아닌 일반인 마저 그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게 신탁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신탁이 아니었다. 신탁을 말한 주체를 경계했으면 더 경계했어야했는데 신탁이랍시고 덥석 믿다니.
녀석에게 신탁이 중요할지 납치했다가 놓친 마법사가 더 중요할지 누가 알겠는가? 녀석만이 알 것이다.
신탁의 뒷면, 혹은 신탁 그 자체를 의심하고 파헤치기로 한 패치는 가장 먼저 용사에 관해서 짚어보기로 했다. 마키나 또한 전적으로 믿을만한 대상은 아니었지만 지원 요청서는 진짜였다. 일단 뭐든간에 기회가 왔으니 써봐야 알 수 있는 거였다.
“각자 탑을 구경하러 갔으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하네. 넉넉잡아 6시간 이상은 걸릴텐데 상관 없나?”
“그보다 더 여유 있으니까 상관 없어.”
요정에 대해서 그리 상세히 아는 바가 없는 패치는 마키나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굳이 알아야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종교가 공동의 적이 되기 전엔 서로 사이가 나빴고 지금도 서로 견제하는 사이였다. 대화가 끊긴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넌 요정에 관심 없나봐?”
마법사치곤 의외라는 어투에 패치는 무슨 의민가 싶어 눈썹만 끝을 올려세웠다.
“듣자하니 마법의 근본이 요정이라는 얘기가 자자하던데?”
“도시쪽에선 그런 이론이 유행인가?”
“넌 부정측이구나?”
부정이고 뭐고 패치는 그런 얘기 자체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굉장히 해괴한 얘기로 다가왔다. 상식 밖의 존재가 요정인데 상식 내에 존재하는 마법의 근본이라는 건 패치 입장에선 납득하기 힘든 얘기였다.
그러다 문득 패치는 한 가지 불리한 점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은 얼굴을 아주 잘 드러냈고 상대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리 표정관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해도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건 인식하지 못했다. 어투와 행동만으로 상대의 기분을 파악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일행들이 올 때까지 패치는 최대한 말을 삼가기로 했다. 상대방의 반응을 끌어내는데 최적화 된 사람이 둘이나 있었으니.
“아직 계셨슴까? 잠깐 바람이라도 쐬십쇼~”
생각하기 무섭게 그 둘 중 하나가 돌아왔다. 패치는 아주 조금의 고민 끝에 책에 더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상대에게 웬만하면 감정같은 정보를 내보이지 않으려 한다더라도 제 사감을 완전히 배제할 생각은 없었다.
“옆에 분은 들어오기 전에 잠깐 본 분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치트는 마키나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몸을 전부 둘러싸는 로브를 입은 터라 사제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무난하게 말을 받았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유형의 마법사를 상대하려다가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그 일행이 반응을 끌어내기엔 더 쉬워보이고 또 반가웠는지 나오는 어투가 조금 편안해보였다.
“몇 시쯤 됐으려나?”
신나게 관광을 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둘은 시계를 찾기 위해 주위를 돌아봤다. 탑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른들이었지만 나잇대는 잘 찾아보면 다양하게 있었다. 보호자의 손을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아이들과 창가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노인들. 여기에서 퍼블리와 헵토미노 일행은 이제 막 성인이 될 법한 사람이 동생을 데리고 탑을 방문한 것처럼 보였다.
“더 구경하고 돌아갈까?”
퍼블리의 물음에 헵토미노는 조금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못 본 데가 더 남았기 때문이었다. 손을 잡고 잘 따라오는 헵토미노를 보던 퍼블리는 아까부터 든 생각에 조심스럽게 또다른 질문을 꺼냈다.
“혹시 사람 많은 게 익숙하니?”
“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게 익숙해보여서.”
그러다 문득 나무들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을 테니 당연한 건가 싶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말하려던 순간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아빠가 다른 사람들한테 저를 맡겼었거든요.”
“어? 사람들?”
헵토미노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퍼블리는 약간의 혼란이 왔다. 보통 아이를 맡길 때는 대부분 한 명에서 부부일 경우 두 명 아닌가? 두 명이니 다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던가? 아니 두 명이 아닌 건 확실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게 익숙하다고 했으니 말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를 맡긴 셈이었다.
“할머니랑 살기 전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절 돌봐줬어요. 매일 함께 놀았고요. 할아버지도 한 분 계셨어요. 그 할아버지가 저를 데려갔었거든요.”
다른 한 손으로 안고 있던 바둑이가 꿈질대자 헵토미노는 고쳐안으며 바둑이도 그 때 만나 키웠다고 했다.
“바둑이 키워도 되냐고 물었을 때 허락받을 게 뭐 있냐며 했었어요. 진짜 많이 웃는 할아버지였어요. 다른 사람들도 엄청 많이 웃고 늘 춤추고 노래하고...되게 특이했어요.”
헵토미노의 얘기를 들으며 그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고 있던 퍼블리는 안 그래도 사람이 많아 소란스러운데 그보다 더 한 소란이 들려오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문자님!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우웅~? 왜 곤란해~?”
“책장 위엔 대체 어떻게 올라간 거예요!?”
소란의 정체는 용사였다. 퍼블리는 얼른 달려가 용사를 끌어내려 직원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치만 올라가는 게 있었는 걸~?”
“그건 책을 윗칸에도 꽂아넣으려고 있었던 거예요! 책장 위로 올라가면 안 돼요!”
옆에서 바둑이를 끌어안으며 보고 있던 헵토미노가 문득 말했다.
“그 사람들 이 형이랑 되게 비슷했어요.”
물론 이 형이 더 한 것 같다며 뒤에 덧붙여지는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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