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하얗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까맸다. 피곤했는지 바로 꿈을 꿨지만 꽤나 생생한 게 깊이 잠들지는 못한 것 같았다. 퍼블리는 까만 바닥을 발로 조심스럽게 두들기다가 딱딱하게 닿는 느낌에 안심하고 바로 걷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한 발짝 내딛으니 바로 바닥이 부서지고 무너졌다.

퍼블리는 떨어지면서 비명을 지르기보단 멍하니 제가 있었던 위를 쳐다봤다. 하얀 도화지 위에 검은 잉크가 날카롭게 흩뿌려지는 광경이었다. 위를 보느라 아래를 못 봤는데 다행히 밑에서 푹신한 무언가가 퍼블리를 받아줬다. 다만 꽤나 둥글어서 퍼블리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그대로 굴렀다. 그러자 눈앞에서 파란 천들이 아른거리고 푹신한 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멍하니 누워있자 무언가가 뺨을 간질였다. 이번엔 뭔가 싶어 퍼블리는 바로 일어났다.

여긴 어디야?”
바닥을 짚자 느껴지는 건 녹색 가득한 풀과 까끌한 흙이었다. 옷에 묻은 흙과 풀을 털어내며 주위를 둘러본 퍼블리의 눈에 들어온 건 빽빽하게 올라있는 나무들이었다. 다시 위를 올려다보니 검고 하얀 건 없고 맑고 파란 하늘만 있었다. 구름도 한 점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무지개가 나타났다. 보통 무지개와는 달리 어느 한군데 생기더니 어딘가를 향해 쭉 길어지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길어지는 쪽으로 무지개를 따라가려고 했다. 발을 내딛으니 이번엔 둥근 무언가가 퍼블리의 발목을 잡았다. 넘어진 퍼블리는 땅을 더듬어 자신을 넘어뜨린 물건을 잡았다. 피리였다.

아까 떨어질 때 떨어뜨렸나보네.”
그렇게 말한 퍼블리는 다리와 손을 살펴봤다. 신기하게도 까진 데는 없었다. 피리를 손에 쥔 퍼블리는 무지개가 길어지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다가 무지개가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졌는데 퍼블리는 당황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보니 하얀색이 가득했다. 조금 더 고개를 들어보더니 하얀 밭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았다. 왕국에 있는 집 뒷마당이었다. 앞으로 가봤자 나오는 건 집이었다. 퍼블리는 집으로 돌아갈까 아님 여기를 더 돌아다녀볼까 고민하다가 뒤를 돌아 더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집에 가봤자 여전히 아빠는 없고 아니카도 없을 테니까.

마땅히 길도 없어서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지나던 퍼블리는 어쩐지 점점 앞을 보기 힘들어진 것 같아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맨 처음 바닥만큼은 아니었지만 하늘이 까맸다. 어느새 밤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바로 옆의 나무에 기대려고 했던 퍼블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처음 봤을 땐 까맣고 커다란 구멍인가 싶어서 다가가보니 나뭇잎이 그 위로 떨어지자 잔잔하게 물결이 일어났다. 밤하늘을 비춘 호수였다.

퍼블리는 호수에 다가가 쭈그려 앉아 손을 뻗어 물을 떴다. 꽤나 맑았고 시원했다. 물을 털어내고 호수를 바라보니 저 멀리 호수 위로 까만 밤하늘 맑고 다른 색이 아른거렸다. 장미보다 더 환한 붉은색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호수 건너편에 누군가가 있었고 퍼블리는 벌떡 일어났다.

아빠!”

마법사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퍼블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퍼블리는 앞에 호수가 있는 것도 잊고 뛰어가다가 미끄러져 호수에 빠졌다. 재빨리 올라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계속 가라앉았다. 밤하늘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퍼블리는 아빠를 외쳤다. 아른거리는 거에 마법사는 없었다.

계속해서 가라앉던 퍼블리는 계속해서 아빠를 부르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숨이 자유롭게 쉬어졌다. 그와 동시에 발에 무언가가 닿았다. 맨 처음 봤던 까만 바닥이었다. 다른 점이라곤 하늘은 하얗지 않고 아른거리는 밤하늘이었다.

친구야, 친구야 나랑 같이 가자.”

여기 퍼블리말고도 누가 있었는지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퍼블리가 바로 뒤돌았다. 누군가가 바닥을 토닥이며 말하고 있었다.

친구는 언제 나오는 거야?”
어두워서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퍼블리는 살금살금 그 자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우웅~ 메르시가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었는데...”
메르시라는 말에 퍼블리는 그대로 멈췄다. 그와 동시에 쭈그려 앉은 채로 바닥만 보고 있던 그가 일어나 퍼블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퍼블리 셔.”
어두운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환하게 보이는 눈과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온통 녹색으로 가득차고 환해졌다. 그리고 곧바로 사그라졌다.

퍼블리는 꿈에서 깼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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