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에서 깬 이후 멍하니 눈만 뜨고 있던 퍼블리는 천천히 일어났다. 손이 살짝 저렸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피리를 쥐고 있던 손이었다. 자는 내내 꽉 쥐었는지 손을 펴보니 빨간 자국들이 길게 남아있었다. 퍼블리는 자신이 얼마나 잤는지 궁금했지만 곤란해졌다.

창문 없는 방 안은 밝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았다. 잠을 자는데 빛에 예민하지 않다면 바로 잠들 수 있고 책등에 써진 책제목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문제는 지금 밖에 햇빛이 떠있는지 아님 져버렸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시계도 없어서 더 곤란했다.

퍼블리는 또 밖으로 나가볼까하다가 아까처럼 또 길을 잃으면 어떡하나 싶어 고민했다. 마법사가 말해주고 아까 했던 대로 모드를 부를까 싶었지만 가봐야 한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게 엄청난 비밀들을 모으는 걸 보면 하는 일이 굉장히 바쁘고 힘들 텐데 괜히 부르는 게 아닌가 싶어 부르기가 망설여졌다. 일어났던 퍼블리는 결국 다시 침대 위로 앉았다.

그보다 대체 무슨 꿈이야?”
무지개가 나오는 꿈을 꾸면 그 날 운이 좋거나 간절한 만남이 생긴다는 말을 들어봤는데 꿈이 정말 난데없었다. 무지개는 무난했지만 바닥이 무너지고 호수에 빠지는 건 꿈이어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특히 호수에 빠질 땐 바로 앞에 마법사를 두고 빠져버렸으니 더 안 좋았다.

퍼블리는 천천히 꿈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얀 공간과 까만 바닥은 전혀 모르겠으니 무지개를 따라갔던 부분부터 생각해봤다. 퍼블리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목 위로 손을 올렸다가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둥근 감촉에 움찔 놀라 손을 거뒀다. 작년 축제 이후로 계속 서랍 안에 넣어놓다가 이번에 집을 나오면서 차기 시작한 팔찌였다. 돌조각 장식에 새겨진 얼음꽃무늬가 처음 얻었을 때처럼 새하얗게 눈길을 끌었다. 그 얼음꽃무늬와 뒷마당의 냉기 뿌리던 약새풀이 묘하게 겹쳐보였다.

다시 숲으로 돌아가고 호수에 빠지고...”
호수 밑바닥이 제일 의문이었다. 처음 듣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익숙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주 들은 적 없는 목소리였다. 퍼블리는 모습도 모르고 목소리도 익숙하지 않은 그 자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퍼블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퍼블리의 이름을 불렀다. 더군다나 메르시도 알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
누군지 전혀 몰라 답답한 마음에 기지개를 켜며 다시 일어나던 퍼블리는 그대로 굳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침대 바로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퍼블리를 보고 있던 자가 있었다. 아까 헤어졌던 마법사였다.

멋대로 들어온 건 미안한데 문을 다섯 번 두드려도 반응이 없길래 일단 들어왔다.”

심드렁하게 대답한 마법사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퍼블리에게 내밀었다. 그 위엔 빵과 우유, 고기와 야채들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다.

좀 늦긴 했지만 저녁이다. 여기 갑자기 끌려온 이후론 아무것도 안 먹었을 거 아냐.”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머리 위로 쭉 뻗었던 팔을 쟁반을 그릇을 받아들며 내린 퍼블리가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지개 켰던 게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누워서 중얼거리는 걸 누군가가 본다면, 그것도 처음 보는 자가 본다면 누구라도 어색해질 거라고 생각한 퍼블리는 우유부터 마셨다.

보라머리한테 어느 걸 어디까지 들었냐?”
?”
다행히 마시던 우유를 다 넘긴 터라 사레가 들리진 않았지만 병을 들고 있던 손이 흠칫 놀라 우유를 조금 흘렸다. 그걸 보고 있던 마법사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퍼블리는 병을 내려놓고 손을 닦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니까, 하얀 장미? 그리고 그...탐험대들이 발견했다고...”
퍼블리는 본인도 모르게 마법사 앞에서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네가 들어도 그거 단순히 옆자리 친구한테 너만 알고 있어 하면서 귓속말로 해주는 비밀 수준이 아닌 거 알고 있지?”
퍼블리는 속으로 뜨끔했다. 비밀이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들었을 때 아니카가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지? 그 보라머리는 정말 묻는 것만 답한다고. 그 탐험대가 가서 훔쳐온 건 하얀 장미뿐만이 아니야.”
하얀 장미로도 충격적인데 뭘 더 훔쳐온 걸까. 퍼블리는 아연한 얼굴로 마법사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이라는 시 알아? 그 시가 적혀있는 수첩을 훔쳐왔어. 수첩 주인은 당연히 모글리제였지. 그 수첩 안에 로메루와 밸러니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있었어.”

셋이 아주 징글맞게 붙어 다녔는지 엄청 세세하게 써져있다고 말하며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마법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옛날 얘기 꺼내주듯 말을 이어갔다.

걔네들이 수첩이랑 하얀 장미 들고 나온 후로 자기네 탐험대 이름을 지었는데 모글리제라고 지었어. 도둑질한 수첩 주인 이름을 무슨 생각으로 붙인 건지 난 모르겠다. 그 수첩처럼 세상에 숨겨져 있는 엄청난 비밀들을 다 얻어놓기 위해서라면 진짜 웃긴데 말이야.”

빈정거리는 말과 함께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사악해보이기도 하는 그 비웃음이 마법사에겐 굉장히 잘 맞았다.

그렇게 잘~가다가 어쩌다 자기네들끼리 분열이 났는지 수첩 중에서 그 시가 적힌 부분이랑 그 외 다른 부분이 찢어져서 사라졌고 하얀 장미도 사라졌고 마법사 몇은 어디론가 잠적타고 마녀 몇도 잠적타는가 싶더니 왕궁 마녀가 되어있었더라. 걔네들이 엄청난 엿을 먹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주 대단해. 하얀 장미랑 그 찢은 종이들 가지고 가서 장미는 색깔 다양하게 만들어보려고 하고 종이는 모글리제라는 친구 까발리고 시도 까발리고~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이라는 요상한 무늬 만들어서 옷에 찍어가지고 팔고~ 남은 녀석들은 당연히 우왕좌왕해댔지. 근데 일단 어디 갈 데도 없으니까 대책 없이 계속 뭉쳐있었고.”
비웃는 걸 멈춘 마법사가 천장을 향하던 고개를 내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표정으로 퍼블리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녀석들 비밀들도 다 알고 있고 마력도 마법실력도 엄청난 녀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나타나서 녀석들을 휘어잡고 대장자리에 앉았지. 그게 썩은 배추야.”
그렇게 긴 얘기를 끝낸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해라.”

마지막으로 툭 내뱉은 마법사는 문을 열고 나갔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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