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치트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즐기는 걸 넘어서 좋아할 정도였다. 상대방도 머리가 좋아서 제가 깔아놓은 함정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걸 반겼고 상대의 반격을 즐거워하며 다시 머리를 굴려 함정들을 깔아놓거나 직접 나서는 일도 했다. 누가 본다면 변태를 보는 눈으로 바라보겠지만 치트는 지루함을 느끼는 것보다 자신이 위험해질 상황을 즐기는 걸 더 좋아했다. 빠져나갈 길은 언제나 만들어두고 두 팔 벌려 환영할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가 판을 완전히 벗어난다면 그건 얘기가 달랐다.
“하..하하...”
치트에게 있어서 가장 최악의 기억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그 날이었다. 집이 있었던 곳엔 재밖에 남지 않았고 뒷마당마저 태워버려 분명 불로 태운 곳인데도 냉기가 감돌던 그 때. 이제는 최악의 기억이 둘이 되었다. 치트의 눈앞에 그 날이 그대로 재현되어있었다.
“똑같네요.”
그대로 몸을 숙여 완전히 까맣게 타버린 나뭇조각을 쥐었다. 까만 가죽장갑과 하나가 된 것처럼 까맸다.
“정말 똑같아.”
여긴 뒷마당을 만들어놓진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찾아냈는지 약새풀들을 심어놓은 데가 전부 타서 냉기가 잔뜩 감돌고 있었다.
“흔적도 하나 안 남기고 태운 게 정말 똑같네요.”
그 때와 다른 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이곳엔 호수가 없었고 호수를 향해 뛰어가는 치트가 없었다. 함정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건 정말 보는 것도 다른 입을 통해 듣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판을 완전히 벗어나는 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치트는 곧바로 주머니에서 통신구를 꺼내들었다.
“모드양.”
곧이어 무뚝뚝하게 네. 하고 응답이 왔다. 머리가 어지러운데 신기하게도 나오는 말은 굉장히 차분했다.
“누가 나오든 잡아놓으세요.”
연락을 끊은 치트는 천천히 일어났다. 약새풀이 풍기는 냉기는 정말 지독했고 머리까지 다 굳어놓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만 그렇지 머릿속 안은 엉킨 선들이 굉장히 뜨겁게 날뛰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어떤 티끌도 용납하지 않을 셈이었다.
“아....”
퍼블리는 멍하니 누워있었다. 이번에 멍한 이유는 아까 멍하니 누워있던 거와 꽤나 다르고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들고 있던 피리를 이마로 딱딱 두드리던 퍼블리는 다시 누웠다.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이마를 문지르던 퍼블리는 모드가 대답했던 걸 곱씹었다. 그 눈 아플 정도로 쨍한 주황머리 마법사가 아난타라고 했다. 아난타라고. 아난타.
“그럴 리가 없어.”
퍼블리는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동글동글하고 커다란 안경을 쓰던 마법사 선생. 굉장히 순한 분위기로 부드럽게 수업을 하셨던 선생. 검고 짧은 곱슬머리를 동그랗게 묶어올리고 동글동글한 눈 위에 동글동글한 안경을 낀 얼굴 위에 안경을 빼고 쨍한 머리색과 흉흉하게 빛나던 눈을 빨간색으로 덧칠했다. 참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데 놀라울 정도로 다른 마법사로 보였다.
“미친.”
욕을 거의 써본 적 없어서 깨끗한 입이라고 옆에서 아니카가 늘 떠들고 다니는 바로 그 입에서 욕을 뒤집어쓴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똑같이 생겼지만 이렇게 생각해봐도 정말 같은 마법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딴판이었다, 분위기가. 분위기만으로도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가 있나 싶었지만 흉흉하던 눈빛과 찌푸리던 인상이 바로 따라붙었다. 퍼블리는 생각 끝에 결국 수긍했다.
“그러니까...선생님은 원래 신성 측 마법사가 아니라고 거기서도 말했었으니까 여기 속해있는 분이시라는 건데...”
퍼블리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는 걸로 생각을 채우고 있었는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꼬이는 기분이었다. 지금 뭔가가 상당히 복잡했다. 모드가 왕궁 마녀였고 여기 소속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 아난타가 신성 측 마법사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모드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게 훤했다. 궁금한 게 한가닥 풀리면 그 가닥을 타고 엄청난 뭉텅이들이 딸려왔다. 왜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일을 벌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왕국과 신성 어느 한쪽이라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곤란한 수준을 넘어설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물어보면 대답해주실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과 담담하게 대답하는 모드의 상상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대답 이전에 지금 불러도 되겠냐 아니면 얼른 불러서 물어보자라는 의견이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퍼블리가 오랫동안 눈뜬 채로 정신을 놓은 건지 아니면 모드가 다시 일을 하러 방에서 나간 걸지 몰라 벌어지는 일이었다. 요컨대 아까와 같았다. 괜히 바쁜 마녀 불러다가 질문하는 거 아니냐.
어쩔까 고민하던 퍼블리는 조심스레 모드를 불렀다.
“모드씨?”
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바빴구나 고개를 끄덕인 퍼블리는 이대로 계속 묻기만 하면 좀 미안하긴 하구나 싶어 정신을 차리자는 의미로 피리를 빈손에다가 탁탁 두드려봤다. 손바닥이 살짝 화끈하며 얼얼해졌다. 손을 몇 번 털던 퍼블리는 피리를 제 품 속의 주머니에다가 넣었다. 안쪽의 유리병에 닿았는지 딱하고 맑은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퍼블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 위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고맙다고 인사하러 가야지.”
같이 찾겠다는 치트의 말이 고마웠지만 계속 여기서 신세를 질 순 없는 노릇이라며 퍼블리는 짐 가방을 들었다. 아무래도 메르시를 찾아가며 제 걱정을 하고 있을 아니카와 전서구가 걱정됐고 여기서 마냥 아빠를 찾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이제 그만 가보겠다고 말하는 김에 이번에 궁금한 건 모드가 아닌 치트에게 직접 묻기로 결심했다.
문을 열던 도중 퍼블리는 아직 남았지만 더 먹을 마음이 안 들어 남겨놨던 음식 그릇이 떠올랐다. 나가는 김에 그것도 역시 들고 나오기 위해 다시 몸을 돌리려고 했었다. 문에서 퍽!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으악!?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부딪히는 소리에 기겁하며 뛰쳐나오려던 퍼블리는 곧 밀쳐지는 손길에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퍼블리 혼자 들어온 게 아니었다. 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퍼블리는 순간 심장이 크게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과 그걸 고쳐 쓰는 손보다 더 빨리 눈에 들어온 건 넘실거리는 붉은색.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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