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돌릴 새도 없이 눈이 아플 정도로 주위가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급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뻗어보려고 했지만 어딘가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퍼블리의 팔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눈꺼풀 너머로도 화려하게 온 사방을 꿰뚫는 무지개 너머 지금 상황과는 달리 점점 흐려지고 있을 마법사를 떠올린 퍼블리가 외쳤다.

아빩!! 어붋?!”

현실과 무지개는 냉정하게 퍼블리를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무지개가 터뜨린 빛 때문에 아직 시야가 되돌아오지 않은 퍼블리는 더듬거리면서 땅을 짚었다. 흙과 함께 풀이나 잎사귀 같은 것들이 퍼블리의 손가락 사이를 쓸어대며 삐져나왔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쯤 되면 다시 돌아올 법한 시야가 여전히 하얀색만 비추고 있으니 의아해하다가 잠깐 가만히 있었다. 알고 보니 시야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지금 퍼블리가 있는 곳은 익히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약새풀...”
한여름의 햇빛마저도 막아주는 익숙한 냉기들이 이제 알았냐며 투정부리듯 뒤늦게 다가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퍼블리가 장소를 파악하자마자 냉기가 느껴지는 걸 알아챈 퍼블리는 자신이 다시 꿈을 꾸고 있나 고민했다.

퍼블리는 다시 천천히 기억을 더듬고 상황파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아빠를 만나고 같이 도망치다가 맞으면 단순히 아야하고 울상 지을 정도가 아닌 마법들이 난무하는 그 광경에서 아난타 선생님과 치트를 발견했고 알고 보니 아빠는 선생님이었고 선생님이 아빠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퍼블리는 천천히 제 손을 피고 내려다봤다. 무지개 구슬이 완전히 깨져 일어날 때 쥔 흙과 뜯긴 약새풀이랑 섞여있었다.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 모든 게 일렁이며 색이 뿌옇게 흩어졌다.

답답해.”
흐느낌 없이 눈물만 툭툭 떨어뜨리던 퍼블리는 한마디 툭 뱉었다. 눈물 외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왠지 비가 내리는 게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우습게도 퍼블리의 눈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내리는 건 햇빛이었다.

답답하고 힘들어요 아빠.”

이쯤에서 퍼블리의 머릿속에 몰려오는 생각들은 그 때 아난타의 모습으로 자신을 봤을 때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이었을까. 머릿속이 고장난 녹음 인형처럼 같은 문장만 뱅뱅 돌면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퍼블리는 지금 답답했다. 힘들고 답답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멍하니 무지개 구슬 조각을 들고 있던 퍼블리는 손을 뒤집어 털었다. 무지개가 없어지니 얼음꽃무늬가 보였다. 아빠처럼, 마법사처럼, 약새풀처럼 차가워 보이는 얼음꽃무늬가. 얼마간 그걸 계속해서 보고 있던 퍼블리는 엎드렸다.

꿈처럼 저 뒤에 있는 나무들 사이로 가면 호수가 나올까 아니면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뜨면 꿈이었으니 깰까 궁금해 하며 퍼블리는 여전히 눈물이 나오고 있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떨겅! 속이 빈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란 퍼블리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려고 했지만 품속이 방금과는 달리 묘하게 가벼워 바로 내려다봤다. 품속 주머니에 넣어뒀던 피리가 떨어져있었다.

찾다가 지치면 마지막으로 피리를 불어요. 어쩌면 모든 비밀이 담겨있을지 모르거든요.”

마지막으로 만났던 메르시의 말이 맴돌았다. 손 때 묻은 피리는 얼른 주워서 나를 불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줍는 손길에 더 이상 망설임이 담겨있지 않았다. 퍼블리는 마지막 기력을 짜서 속에 잔뜩 쌓인 설움과 속상함을 담아 피리를 불었다. 피리 소리가 뒷마당 밖으로 나갈 일은 없었다.

 

보이냐? 저게 바다다!”
하루종일 사라진 퍼블리 생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아니카는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바다의 광경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퍼블리의 묘사를 듣기 전에도 영상구로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나 거대하고 압도적인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런 아니카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서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저 넓은 바다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퍼블리의 무모함을 다시 떠올리고는 구시렁거리기 바빴다.

그나마 배에서 건져서 망정이었지 대체 뭔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가끔가다가 보면 그 머리통 한 번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야, 누가 그 마법사에 그 자식 아니랄까봐 무슨 일 닥치면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도 배웠어!! 덕분에 내 눈이 튀어나오다 못해 이리저리 통통 튈 정도로 배 찾아다녔는데 아무리 배가 커도 그렇지 이 넓은 바다 한복판에서
, 혹시 저거?”
그래! 저거...?”
바다 한가운데에 있을 일이 많은 배가 웬일로 땅 가까이 있었다. 물론 신성지대와는 꽤 떨어져 있지만 해안선을 쭉 따라가다 보면 결국 발견하게 될 위치였다. 용케 발견 안 됐다며 호들갑 떨던 전서구는 구시렁거리던 것도 잊고 배가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그쪽에서도 전서구와 아니카를 발견했는지 가까이 가니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어~ 뭐 두고 갔어? 다시 돌아오다니.”
두고 간 거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날갯짓을 천천히 줄여가던 전서구가 불평을 담아 외치고는 배의 난간에 내려앉았다. 아니카가 고개를 들고 몸을 쭉 빼서 흑기사단을 살펴보려고 모습을 보이자 새로운 친구가 왔다며 외치기 시작했다. 분명 듣긴 들었지만 직접 그들의 상태를 보게 된 아니카가 놀라서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무해한 얼굴로 반가워하는 그들에 바로 긴장을 풀었다. 아직까진 딴 데 보다가 다시 돌아볼 때 또 놀랄 것 같지만 그들의 태도나 표정을 보면 금방 익숙해질 법한 느낌에 묘한 눈으로 보고 있던 아니카는 전서구의 등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퍼블리 친구 아니카랍니다~ 여기로 오신 공주님을 다시 뵈러왔어요~”
? 퍼블리?”
메르시한테 우리 얘기 해줬던 저번의 그 친구!”
그 친구 친구래!”
메르시 보러왔대!”
그들은 웃으면서 퍼블리를 반기기 시작했고 몇몇은 공주님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메르시를 부르러 달려갔다. 배에서 계속 생활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찼지만 그만큼 꽤 요란스러웠는지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온 마법사는 흑기사였다.

무슨 일이야?”
그 뒤에 브레이니와 메르시도 함께였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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