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인가...?”
그렇게 말하는 상대 마법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안색도 새파란데다 식은땀으로 잔뜩 젖어있었다.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걸 보니 척 봐도 굉장히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상대 마법사는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다가와 패치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네가 진짜라면!! 아난타님을 만나면 꼭 전해주...!”
그 말을 끝으로 기억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퍼블리가 당황해서 뭐라 말하기도 전에 기억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나타난 기억은 바로 뒤에 이어진 기억이 아니었다. 지금 나타난 기억 속의 패치는 또 혼자서 걷고 있었고 사방을 둘러싼 안개가 조금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왜 갑자기 끊어지고 다른 기억이 나타난 거예요?”
원래 나타나는 모든 기억이 이랬단다.”
아니 그렇긴 하지만...”
기억은 계속 흐려지면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마치 천천히 깜빡거리는 것 같았는데 보고 있던 퍼블리는 어쩐지 더욱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퍼블리의 불안함은 어떤 의미론 적중이 되었다. 안개가 흐려지면서 발밑만 겨우 보이던 주위가 조금 멀리 떨어진 땅까지 보일 수 있게 됐다. 물론 땅이라고 해봤자 약새풀이 빽빽하게 자라있는데다 안개 덕분에 흐리게 보여 눈밭처럼 보였는데 그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다른 색 점들을 찍은 것처럼 하얀 약새풀밭 사이에 있으니 얼핏 봐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보게 된 퍼블리는 소름이 돋아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죽은 거예요?”
아니.”
안개가 끼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고 움직이던 선발대였다. 물론 전부 다 있는 건 아니지만 꽤 많은 마녀들과 마법사들이 약새풀밭 위에 누워있었다. 어디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고요하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은 장소가 장소다보니 소름이 돋을 만 했다.

왜 모두들 누워있나 마법사에게 물어보려던 퍼블리는 안개가 끼기 전 저주막이 소란이 벌어진 원인이자 저주에 걸려 쓰러진 마녀를 떠올렸다.

모두 저주에 걸린 거군요.”
언제 깨어날지 모를 정도로 계속 잠들어있는 저주. 굳이 멀리 볼 것 없이 그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공주인 채로 잠들어있는 메르시를 떠올리면 간단했다. 패치는 잠들어있는 그들을 애써 보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심리적인 부담은 컸는지 안색이 아까보다 나쁜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나무가 나타났다. 하지만 패치는 거기에 기대지 않고 계속 걸어갔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에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또 기억이 사라졌는데 이번엔 다음 기억이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괜찮니?”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게 티가 났지만 마법사는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퍼블리는 지금 기억이 나타나지 않는 걸 기회삼아 쉬는 겸 지금까지 본 기억들을 천천히 떠올려봤다. 물론 다 기억해내는 건 무리기 때문에 가장 인상 깊은 기억들 먼저 더듬어봤다. 사실 본 기억이 많은 만큼 인상 깊었던 것도 꽤 많아 골라내는 것도 꽤 걸렸다.

제가 흩어진 기억을 전부 본 건 아니죠?”
그래.”

당연하게도 한 마법사의 일생이 담긴 기억이 적을 순 없었다. 그걸 깨닫자 퍼블리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저번에 마법사가 말했다시피 날뛰는 기억들이 한 곳으로 뭉치니 전부 볼 필요가 없다는 건 퍼블리도 알고 있었지만 역시 기억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숲에서의 기억이 끝난다면 그 이후의 기억도 봐야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든 거였다. 퍼블리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 건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며 이리저리 방법을 생각하던 순간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왜 아빠의 기억이 흩어진 거지?

그리고 뒤를 이어 의문이 또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왜 이제야 이런 의문을 떠올린 거지?

너무 이상해요.”

뭐가 말이니?”
전부 다 라고 말하기 전에 퍼블리는 말을 골랐다. 이렇게 뭉뚱그려 말하면 달라지는 게 없었다.

“...여기 저주받은 곳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제 상태도 이상해요. 어떻게 이렇게 오래 버티고 어떻게 이렇게 마냥 기억만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려면 처음부터 들거나 아니면 더 일찍 들었을 텐데 이제야 드는 것도 이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퍼블리는 녹색 눈을 또렷하게 빛내며 마법사를 마주봤다.

제 기억은 멀쩡한데 아빠의 기억이 왜 흩어졌던 건가요?”
퍼블리도 그의 아빠도 보내준 대상이 다르긴 하지만 이동 마법으로 이 숲에 왔다. 굳이 차이를 더 따지자면 먼저 온 자도 이곳에 이미 와본 적이 있는 것도 아빠 쪽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이렇게 기억이 흩어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을까?

쿨럭!”
기억이 다시 나타난 건지 뒤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지만 퍼블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가득해보였다. 이렇게 마냥 기억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퍼블리가 생각해도 끝이 안 보였다. 이 기억이 대체 언제 끝날까.

안 봐도 괜찮겠니?”
대답해주세요.”

네 아버지가 피투성이인 걸?”
깜짝 놀란 퍼블리가 재빨리 돌아보니 피는커녕 빨간색은 패치의 머리카락과 눈썹 외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았다고 뭐라 외치며 다시 마법사를 보기엔 피 묻은 것만 없지 패치의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보였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걸 보니 탈진한 것 같았다. 퍼블리가 불안함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패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숨도 몰아쉬고 있는데 눈빛만은 기운 넘치다 못해 살벌했다.

...어떤 미친 숲이...그림자 괴물이랑 불나비를...후우!”
처음 듣는 패치의 험한 말에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지만 그림자 괴물과 불나비라는 말에 퍼블리는 납득했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마법소환 생물체였는데 이름 그대로 그림자로 된 괴물과 불로 된 나비였다. 아마 시달리다 못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으리라.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이를 뿌득 갈던 패치는 손을 들어 그 위에 또 빛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둥글지 않고 울룩불룩 제멋대로 모양이 계속 바뀌는 빛이었다.

손님 맞을 땐 낯짝을 까야지.”
그 빛을 꽉 쥐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폭발하듯 빛이 터졌다. 눈부심에 눈을 감은 퍼블리가 눈꺼풀 너머로 빛이 더 느껴지지 않을 때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안개가 깨끗하게 걷혀있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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