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앞길은 잘 보이겠군.”
그렇게 말했지만 원래부터 지쳐있었는데 광범위한 마법까지 쓰니 꽤 피곤했는지 바로 움직이지 않고 약새풀 가득한 땅 위로 털썩 주저앉는 패치였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이번 기억도 흐려지면서 사라졌다. 곧바로 다시 나타난 기억에선 패치가 검은 형체들을 따돌리며 공격마법을 날려대고 있었다. 굉장히 긴박한 상황이 갑작스레 등장하자 퍼블리는 깜짝 놀라 손을 뻗었고 비록 기억 속이지만 바로 제 뺨을 스쳐지나가는 공격들에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그 뒤로도 기억은 사라졌다가 곧바로 나타나는 걸 반복했는데 그 주기가 굉장히 짧아졌다. 어쩔 땐 눈을 한 번 깜빡했는데 기억이 이미 바뀌어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기억이 조금 더 긴 게 나타났는데

키는 바로 뒤에 있는 나무의 밑에서 세 번째 나뭇가지가 자란 높이고 콧수염과 팔근육이 눈에 띄는 자네 일행의 마법사가 전해달라더군.”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과정이 담긴 기억은 없고 바로 나타난 아난타가 웃지 않는 얼굴로 패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두 잠들어버렸고 어서 이 숲에서 도망치라고. 그 말을 끝으로 잠들어버렸네.”
어디였나요?”
원래라면 여기에서 남서 방향의 파란바람 나무들이 있는 곳인데 이상하게 남겨놓은 마법의 위치가 수시로 바뀌더군.”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난타는 바로 몸을 돌려 패치가 말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패치는 팔짱을 낀 채 보고 있다가 딱 한마디만 꺼냈다.

가는 건가?”
가야죠.”
바로 대답한 아난타는 고개를 돌려 패치를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어서 깨우러 가야죠.”
퍼블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의 아난타는 전혀 다른 데에 속해있었으니 결국 제 동료들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지금도 찾기 위해서 거기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은 퍼블리는 저 멀리 멀어져가는 아난타를 한 번 보고 아예 눈을 감은 패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억은 또 흐려지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퍼블리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피곤하니?”
.”
얼마 안 남았단다. 하지만 조금 쉬는 것도 좋겠지.”
얼마 안 남았다고요?”

퍼블리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계속 보겠다고 했지만

안 돼. 쉬렴.”
얼마 안 남았다면서요! 그럼 어서 전부 보고
네 지금 얼굴을 비춰줄 호수가 근처에 없는 게 아쉽구나.”
퍼블리의 말까지 자른 모습을 보일 정도로 지금의 마법사는 무척 단호했다. 하지만 쉰다고 해서 딱히 어디 누워서 자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기억이 나타나지 않을 뿐 퍼블리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고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퍼블리는 그대로 자리에 앉은 후 무릎을 모아 안듯이 팔을 다리에 두른 채 마법사를 올려다봤다. 마법사는 계속 서 있었기만 했고 퍼블리를 따라 앉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역시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고개를 조금 숙인 게 퍼블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고 퍼블리도 마법사를 올려다봤다.

안 앉아도 괜찮아요?”
괜찮단다.”
어쩐지 계속 보고 있는 것도 민망해서 이마를 무릎에 댄 퍼블리는 갑작스레 몰려오는 묘하고 찜찜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분명 이상할 게 없는데 이상한 느낌이 드니 괜히 신경 쓰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여기 온 이후로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긴 했지만 그 때마다 닥치는 기분은 달랐다. 이 이상한 느낌은 지금 당장 찾아온 거니 방금 했던 얘기 중에 무언가 이상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느껴졌다. 물은 멀쩡히 흐르고 있는데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퍼블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방금 전 했던 대화들이 전부 이상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니 뭐라 섣불리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뭔가 대화라도 하면 이상한 게 뭔지 다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마법사를 올려다보려던 순간 저 뒤에 있는 나무들 사이에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완전히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언뜻 보인 파란색에 퍼블리가 당장이라도 따라갈 기색으로 벌떡 일어나자 마법사가 퍼블리를 보며 말했다.

다 쉬었니?”
. ?”
그럼 마저 보자꾸나.”
이젠 쉰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할 지경인 마법사가 반사적으로 대답한 퍼블리의 말을 듣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다시 기억이 나타났다. 그리고 화려하고 위협적인 마법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오른쪽!”
패치는 원거리 마법을 날려대며 외쳤고 그에 언제 합류했는지 모를 흑기사가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불나비와 가시들을 쳐냈다. 합류한 건 흑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브레이니를 포함한 흑기사단이 앞장서서 그림자 괴물과 소음파리를 몰아내고 그 뒤에 메르시가 실시간으로 치유마법을 쓰면서 버티고 있었다. 동료를 찾으러 갔던 아난타도 원거리 마법을 날리며 폭탄꽃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 외에 잘 모르는 마법사와 마녀들도 있는 걸 보면 안개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던 선발대들 중 그나마 멀쩡한 이들이 다시 만나 뭉친 모양이었다.

뚫었습니다!”
모두 이쪽으로!”
길이 뚫렸다는 외침이 들려오자마자 모두 그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소환생물 무리들을 무찌르고 견제하며 도망치는 모습은 정말 아슬아슬해 보이면서도 신기하게 한 명의 낙오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얼음장벽을 만들어내 뒤를 막으니 쫓아오던 괴물 무리는 얼음장벽에 부딪히고 그 뒤에 있던 소환생물들은 뒤따라오다가 앞서 부딪힌 소환생물들과 함께 땅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오도록 뛴 이들은 누구 하나가 다리가 풀려 넘어질 때쯤 멈춰 섰다.

...모두 무사....후우욱!”

다른 이들이 무사한지 물어보려던 메르시는 숨이 차면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입을 막았다. 모두 빠져나오는데 성공은 했지만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아예 기절했는지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질 않았다. 조금 숨을 고른 이들은 언제 소환생물이 쫓아올지 몰라 초조한 눈으로 아직 숨을 몰아쉬는 이들과 쓰러진 이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체력이 좋아 괜찮아 보이는 흑기사단은 메르시를 포함해 힘들어하는 이들의 등을 쓸어주며 다독여줬지만 결국 몇몇 이들은 눈물을 터뜨리거나 신경질적으로 몸을 틀었고 울먹이며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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