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깐만요! 그럼 하얀 장미도 만들어진 거예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기억만 계속 이어졌다. 퍼블리가 다시 한 번 물어봤지만 기억만 보고 있으라는 건지 또 대답은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진 기억은 두 마녀가 사라진 이후 계속 무기력하게 오두막에서 지내고 간혹 밖으로 나갈 땐 하얀 장미를 보러가거나 숲을 돌아다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퍼블리는 오두막에서 지내는 기억을 보고 있을 때 왜 동화에서든 역사에서든 밸러니를 마녀로 썼는지 알아차렸다. 꼭 마녀가 사는 집 같았다. 마녀들이 자주 쓰는 주문위주 마법책들이 온 집 안에 가득했다. 그 외에 눈에 띄는 건 별로 없었고 여느 가정집의 살림살이들만 가득했다.

혼자가 된 이후로 딱히 변화 없는 일상 기억들 다음으로 나온 기억부터 퍼블리가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뭐야, 어디 갔지?”
여느 때처럼 숲을 돌아다니고 왔는데 분명 늘 탁자 위에다 뒀던 수첩이 사라져있었다. 당황하며 탁자를 더듬던 밸러니는 갑자기 찾는 걸 멈추고 다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방구석에 놓인 서랍장의 두 번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매일 청소를 한 덕에 서랍은 먼지 하나 없었지만 그동안 열어보지 않았는지 잘 열리지 않고 삐걱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결국 좀 더 힘을 줘 세게 잡아당기니 열리긴 했지만 안에 있던 물건들이 전부 쏟아졌다. 가위나 붙이기용 종이 같은 서랍에 넣어놓을 만한 잡다한 물건들 사이에 하얀 봉투가 하나 있었고 찾고 있는 게 그 봉투였는지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봉투에는 내 수첩이 사라졌을 때라고 적혀있었다. 밸러니는 봉투를 뜯어 안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내가 남긴 수첩이 사라졌구나.

넌 늘 탁자 위에 올려두고 읽었을 테니 모를 리가 없겠지.

지금 네가 짐작하고 있는 대로 난 또 꿈을 통해 미래를 봤어. 내가 너한테 수첩을 준 걸 보면 로메루는 결국 떠났고 나도 어디론가 갔겠지.

얼마나 미래일진 모르겠지만 수첩이 엄청 낡아있던 걸 보면 굉장히 먼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희들은 고집 세니 어떻게든 살아있을 거고 나는 아마 흙으로 돌아갔을 거야.

두 가지 미래를 봤어.

첫 번째는 내가 수첩에다 시로 써놓긴 했지만 그것만 보면 알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자세히 말하기엔 제한이 걸려, 꿈이 허락하지 않아.

일단 경고하는데 첫 번째 미래로 가게 된다면 넌 어떻게든 비참해지고 죽어갈 거야. 너보다 고집 센 걸 넘어서 질릴 정도로 무서운 마법사를 봐버렸거든.

사실 두 번째 미래는 내 희망사항이라 꾸게 된 바람 같은 거라 두 번째 미래가 됐으면 좋겠어. 네가 지금 숲을 떠나서 로메루를 만나는 거야.

시작은 똑같아.

내 수첩이 사라지고 우리가 만들어낸 게 사라졌어.

정신이 없겠지. 하지만 난 내 친구가 미쳐가는 게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 부탁할게.

이제 떠날 시간이야.

 

그 뒤로 편지가 어떻게 됐는지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언가 뽑힌 흔적만 남은 흙더미 앞이었기 때문에 퍼블리도, 밸러니도 알 수 없었다. 미친 듯이 흙을 파내는 손길이 있었고 거기에 있어야 할 하얀 장미는 없었다.

이성이 전부 날아갔는데도 감정에 영향을 받아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쓰는 건지 손이 빛나고 있었다. 그 마법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보는 게 처음인 퍼블리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얀 장미씨앗처럼 손이 하얗고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걸 보면 그 하얀 장미를 만들어낸 마법이 분명했다. 그런데 손 주변에서 자라난 건 하얀 장미가 아니었다.

, , 이게 나와!!”
빛처럼 은은하게 빛나진 않지만 하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퍼블리는 저게 뭔지 아주 잘 알았고 지겹도록 보아온 거였다. 바로 약새풀이었다. 약새풀들을 보며 뭐라 외치는 밸러니의 속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우선 가장 먼저 크게 느껴지는 건 몸 어딘가가 찢어지고 그 사이가 따끔하게 느껴지는 아픔이었다. 물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물속에 빠진 것처럼 숨 쉴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고 그 다음엔 무언가가 제 머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비록 간접적으로 느끼고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끼는 퍼블리 마저도 기겁하며 순간적으로 숨을 멈출 만큼 강렬한 감정들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로 기억이 사라지면서 고통 가득한 감정들도 사라져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니라 사라지는 것처럼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퍼블리가 집중해서 빠르게 넘어가는 기억들 일부를 봤을 때 보이는 건 불안한 감정과는 다르게 예쁘게 빛나는 하얀 빛과 빛이 반짝이는 만큼 계속 자라나 순식간에 눈밭처럼 가득해진 약새풀들이었다.

당신이 이 숲의 주인입니까?”
그러다가 어느 기억에서 넘어가는 빠르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간단하지만 모험을 하는 이들처럼 단단하게 준비를 한 옷차림의 마녀와 마법사가 있었다. 퍼블리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메르시와 닮은 둘의 얼굴에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는 지금의 마녀왕국의 왕 에키테입니다. 숲에서 흘러나오는 저주를 확인하고 제 반려와 함께 이곳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왕은 밸러니에게 격식을 가득 담은 말을 건네고 있었다. 물론 밸러니는 상대가 얼마나 격식을 차리고 있는지,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 중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멍했다. 밸러니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둘은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던 순간 밸러니가 입을 열었다.

도둑들이 내 보물들을 훔쳐갔지.”
목소리는 속처럼 텅 비어있었다.

내 보물들을 찾아와. 그럼 난 내 보물들과 너희들이 저주라고 부르는 내 마법과 함께 깨끗하게 사라질게. 그렇지 않으면 모든 땅 위에 저주를 걸 거란다.”
왕과 왕후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밸러니는 그 둘에게 손을 뻗어 마법을 걸었다. 둘의 이마에 하얀 장미 무늬가 새겨졌다가 사라졌다.

너희들이 임의로 보이게 할 수도 있고 너희들이 죽는다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나있을 거야.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지우지 않는 이상 절대 지워지지 않아. 생각이 있는 도둑들이라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하지만 그들은 생각이 있고 없고를 떠나 밸러니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 뒤는 패치의 기억에서도 본 내용이라 어떻게 될지 퍼블리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밸러니는 저주라고 불린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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