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제 말 들리나요?”

아까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던 걸 기억한 퍼블리가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감정을 완전히 느끼는 게 아니어도 지금 밸러니가 진심이라는 건 퍼블리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기억이라 이미 일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고 그 결과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퍼블리 입장에서 궁금한 건 있었다.

왜 직접 나오지 않았던 거예요?”
숲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기엔 모글리제라고 추정되는 회색머리 마녀의 편지 내용이 걸렸다. 떠날 시간이라고 하는 걸 보면 밸러니는 충분히 숲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퍼블리의 질문을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 하는 건지 계속 대답이 없었다.

그 와중에 기억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빛을 뿌리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게, 그리고 단숨에 약새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약새풀이 자라는 지역이 넓어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한발만 내딛으면 바로 숲 밖인 곳에서 그렇게 빛을 뿌리는데 약새풀들이 바깥까지 안자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숲 곳곳을 돌아다니며 빛을 뿌리기 시작했고 손을 한 번 휘젓자 퍼블리가 처음 보는 마법진들이 곳곳에 나타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선 밸러니는 다시 어디론가 발을 움직였는데 약새풀이 어느 곳보다 가득 자라있는 곳에 도착하더니 멈추고는 직접 약새풀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뜯어서 한구석에 던져진 약새풀들은 뭉친 만큼 냉기를 내뿜었는데 뒷마당에서 느낀 것보다 더 한 냉기에 퍼블리는 당연히 깜짝 놀랐다.

손님맞이는 다 끝났네.”
밸러니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약새풀들이 잔뜩 있을 땐 몰랐는데 뽑아낸 약새풀들에 가려진 파낸 흙구덩이를 보고 여기가 숲의 어디인지 퍼블리도 알게 됐다. 하얀 장미가 있었던 곳이다.

밸러니는 아까처럼 손을 한 번 휘저으며 마법진을 나타나게 하고 하얀 장미가 있었을 흙구덩이 옆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언제 생겼는지 모를 커다란 얼음덩어리들과 그림자 괴물과 불나비와 기타 소환 생물들이 마법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 물량을 본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 마법진에도 저렇게 많이 나왔는데 곳곳에 새겨놨을 마법진들을 다 합하면 얼마나 많겠는가. 패치가 험한 말을 했던 건 당연했다.

우리의 마법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마법을 만들어낸 자가 있나?”
이 숲은 밸러니의 숲이라고 불리고 있었고 실제로도 밸러니가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숲에 들어온 침입자들이 어디 있고 얼마나 있는지 느낄 수 있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선발대들에게 감탄하던 밸러니는 다시 한 번 빛을 뿌리고 잠시 기다리더니 박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설마 용사가 발견했던 빛이...”

이렇게 뒤에 숨겨져 있을 진실들을 알게 된 퍼블리는 어쩐지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엄청나고 충격적인 비밀들을 알게 됐다 싶으면 뒤에 더 한 비밀들이 퍼블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이 기억의 끝은 단순히 제 아빠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이 비록 심각한 저주들을 받았지만 밸러니를 무찌르고 숲을 정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같은 결말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무도 알지 못 한 엄청난 비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이런 퍼블리의 불안한 속내와는 달리 기억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안개가 낀 사이 소환 생물들이 안개를 방패삼아 아직 움직이고 있는 선발대들을 기습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패치의 활약으로 안개가 걷혔지만 예상하던 바였는지 아니면 결국엔 다 죽을 거라고 확신을 하는 건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밸러니도 예상치 못한 마법사가 있었으니.

우와아아앙~!!”
여기까지 오는데 소환 생물을 한 번도 안 마주친 건지 멀쩡한 행색의 용사가 햇빛에 반짝이는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밸러니는 당황과 더불어 심각한 상황일텐데도 해맑은 용사의 얼굴에 황당함까지 더해 느끼며 저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
용사는 밸러니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나무 그늘 때문에 잘 안 보였는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
마치 아는 마법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는 용사의 모습에 밸러니는 이번엔 아예 말을 잃었다. 밸러니가 어떤 심정인지 알 리가 없는 용사는 얼음이 엄청 크고 하얀 풀들이 많아서 신기하다는 감상을 꺼내고 있었다. 그에 밸러니는 탐색하려는 것도 그만두고 물어봤다.

넌 대체 왜 여기에 온 거니?”
새 친구 기다리러!”
용사는 거침없이 대답했고 밸러니는 용사가 다른 이들처럼 저주라고 불리는 걸 조사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대답하면서 가까이 다가온 용사는 밸러니의 얼굴을 제대로 봤는지 무언가 아는 기색으로 소리쳤다.

내 칭구의 새 친구구나!”

네 친구의 새 친구?”
! ~ 잤을 때 봤어! 우리 이렇게 만났고 안녕! 했어!!”
용사의 말에 밸러니의 감정이 묘하게 변했다. 용사를 만났어도 당황과 황당을 잠깐 느낀 거 외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는데 마치 물에 가라앉은 것처럼 답답하고 귀가 먹먹한 느낌이었다.

나두 친해지고 싶어서 빤짝빤짝 따라왔어!”
용사는 뒤를 볼 수 없으니 모르지만 용사를 마주보고 있던 밸러니는 용사 뒤쪽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용사와는 달리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상황도 익숙한 상황이지만 빨간 머리카락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패치였다.

넌 정말 순수하면서도 어리구나.”

다가오는 패치를 힐끗 본 밸러니가 불쑥 말했다.

하지만 그게 여기 있어야할 이유는 될 수 없지. 친구가 되는 건 더더욱 그렇고.”

퍼블리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지금 밸러니의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는 걸 느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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