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쓰러져있던 용사였는데 언제 일어나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못 봤다. 여전히 눈이 아플 만큼 불길이 모든 시야를 다 빼앗고 있었지만 간간히 흔들리는 파란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잉~ 불이 안 꺼져!”
무슨...!!.....!!”
멀리서 패치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보다 가까이 있는 용사의 말이 더 또렷하고 빨리 다가오는 건 당연했다. 그보다 더 빨리 다가온 건 난데없는 물벼락이었다. 용사가 물로 불을 끄려고 한 것 같았지만 당연하게도 단순히 물 뿌린다고 해서 꺼질 불이 아니었다.

마니 뜨거워?”
“...뭐하는 거니?”
불 꺼!”

용사가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길이 약간 옅어졌다.
?”

뜨겁자낭!”
그걸 물은 게 아니야.”
아까보단 조금 가까이에서 패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아직 용사처럼 가깝지 않으니 드문드문 들려왔지만 용사를 말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웅?”
왜 날 구하려고 하는 건지 묻는 거란다.”
용사가 이 상황에 난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격했던 밸러니의 감정이 잔잔했다. 아까의 물벼락이 끈 건 불이 아니라 밸러니의 감정이었던 것처럼.

 

그야 칭구니까 구하징!”
친구?”
!”
용사에게 담담하게 묻고 있는 동안 저 멀리서 컨티뉴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밸러니를 찌를 때까지만 해도 지친 기색은 가득해도 평정을 유지하듯 담담했던 목소리가 지금은 꽤나 다급했다.

?”

순간 불길이 옅어지고 해맑게 웃는 용사의 얼굴이 반짝이듯 선명하게 스쳐지나갔다.
꿈에서 봤으니까!”
동시에 퍼블리는 몰려오는 감정에 잠시 숨을 멈췄다. 마치 바다에 빠진 그 때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그래, 꿈에서 봤구나.”
그렇게 말한 밸러니는 용사에게 손을 뻗었고 고개를 기울이던 용사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지금 밸러니는 아마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너랑 같은 능력을 가진 친구가 있었어.”
밸러니를 휘감고 있던 불길은 아까보다 훨씬 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타서 사라지는 빛이 아까보다 더 늘어 눈이 부실만큼 반짝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일 법한데 이상하게 용사는 불길보다 또렷이 보였다. 쓰러진 용사는 피를 흘리며 위태롭게 숨을 쉬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복부에 무언가 길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조준을 잘못했네, 많이 아프겠구나. 일단 마저 말하자면 그 애는 꿈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자세히 들을 생각은 없었어. 그러니 너에게도 말해주마.”
다시 한 번 용사에게 손을 뻗은 밸러니가 그 어느 때보다 건조하게 말을 꺼낸다.

꿈은 꿈일 뿐이야.”
피가 튀고 눈앞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잡은 시야에서 보이는 용사는 처음 새겨진 상처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눈을 가리는 건 분명 새빨간 피였다. 아니 피 말고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계속 말했잖나!”

서 있는 것도 꽤나 힘겨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패치가 누구를 향해 외친 건지 헷갈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패치의 손엔 늘 용사가 들고 다니던 나무 막대가 있었는데 끝부분에 피가 묻어있었다. 밸러니는 천천히 손을 들에 제 이마를 만져봤다. 눈을 가린 새빨간 피가 손에 묻어 있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도 같이 뒤를 따르겠군.”
뒤에서 들려오는 컨티뉴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크게 뒤틀렸다.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면서 완전히 쓰러질 뻔했지만 후들거리며 땅을 짚는 손과 팔에 억지로 힘을 주며 버티고 있었다.

안 돼....”
안된다니, 많은 이들이 당신 때문에 잠들었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됐어. 그들로는 부족했나? 나또한 그들처럼, 당신 앞의 두 마법사처럼, 그리고 당신처럼 영원히 눈을 감게 됐지.”

그 말 아래에 담긴 감정들이 무엇일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얼마나 깊고 얼마나 무거울지 감히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닿지 않고 말만 닿았다.

영원히 눈을 감는다고?”
그 어느 때보다 밸러니의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숨을 죽이며 모든 걸 보고 느끼고 있던 퍼블리는 불길한 예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명 지금까지 충격적인 장면을 꾸준히 봐왔고 놀라면서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달랐다.

아니, 그럴 순 없어...”

감정에 맞지 않게 애절하게 나오는 목소리는 퍼블리의 불안감을 더더욱 키웠고 싸한 느낌이 목소리가 나온 목을 틀어쥐듯 자극하며 긴장을 더 높였다. 땅을 짚고 있던 손이 긁듯이 오므리며 흙과 풀을 쥐다가 천천히 펴지며 쥐고 있던 걸 전부 놓았다.

난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말한 밸러니는 바로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달려들었다. 곧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너무 당황하고 놀란 퍼블리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은은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빛나는 종이 같으면서도 빛이 종이 모양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가장자리를 보니 거칠게 찢긴 흔적이 보였다. 이런 빛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니 꽤 많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마치 하나의 큰 종이를 찢어서 여기저기 뿌려놓은 듯 했다. 그렇게 빛들이 서로 멀리 떨어졌을 때 쯤, 다시 시야는 어두워졌고 그 상태가 꽤 오래 이어졌다.

젠장, 뭐가 어떻게...!”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가물가물하다가 점점 선명하게 다시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고 난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분명 마력을 전부 희생했는데...”
목소리의 주인은 패치였다. 퍼블리는 안도했고 밸러니는 당황했다. 그리고 퍼블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했는데 패치의 목소리만 들려오고 움직이는 시야에 패치가 없었다. 보이는 건 휑한 벌판뿐이었다.

용사는 어디 있고 여긴 대체 어디지? 그리고...”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패치도 마찬가지였는지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천히 기억나는 상황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듯 움직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비가 왔는지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눈에 들어왔지만 시야의 주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퍼블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잠깐 스쳐 지나가버렸지만 똑똑히 봤다.

물웅덩이에서 비친 건 패치뿐이었고 눈이 마주쳤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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