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있니?”
다시 아까처럼 시야가 어두워지고 마치 공부하는데 모르는 문제 있느냐는 듯이 여상하게 들려오는 말에 퍼블리는 입을 떡 벌렸다.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넘어서 지금까지 엄청난 일들을 봐왔는데요?!”
나도 처음엔 놀랐지만 몇 십, 몇 백, 몇 천 번을 돌려보다 보니 이젠 감흥도 없단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아니, ,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퍼블리는 화들짝 놀라며 외치다가 입을 꾹 다물고 나오는 말들을 막아 굴렸다. 밸러니는 기다려줄 생각인지 다시 물어본 이후론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퍼블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보고 감아도 떠도 다르지 않은 눈앞을 보며 천천히 말을 꺼낸다.

사실...지금 엄청 혼란스러워서 뭐부터 물어봐야할지 모르겠지만...마지막에 잘못 본 거 아니죠? ...물웅덩이요.”

제대로 봤단다.”
...뒤를 마저 보여주시지 않은 이유는요?”
그 순간은 깨어난 지 얼마 안 돼 정신이 없어서 그랬었지 제대로 내 상태를 알게 된 그 다음부터는 내 기억이 아니라고 판정되더구나.”

판정이라는 말에 미묘한 얼굴로 허공을 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고개를 숙인 퍼블리는 이번엔 직설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아빠인가요?”

아니.”
아빠 몸을 차지한 건가요?”
지금은.”

퍼블리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한숨처럼 내쉬었다.

저를 기억하고 아니카도, 선생님도, 마녀 왕국도 기억하는 건 물론이고 어...그리고...”

단순히 기억이 모여 대답만 하는 아빠가 아닌, 숨기기 바쁘면서도 먼저 말도 걸었던 적이 있고 함께 축제를 즐기고 저랑 계속 같이 살았던 제 아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었단다.”

맞아요! 그러니까 일일이 묻기엔 어떻게 물어봐야할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당신은 단순히 기억이 모여 대답만 하는 밸러니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밸러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밸러니의 입매가 실소를 내뱉듯이 그리고 있는 느낌이 들자 퍼블리는 잠깐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나는 대답만 하는 밸러니가 아니지. 그런데 왜 네 아버지 되는 이 마법사는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기억들과 같은 양만큼 모였어도 왜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반응할까 궁금하단다. 몸이 있는 것과 없는 게 이렇게 큰 차이가 있나? 아니면 기억이 양이 몸에 남아있는 쪽에 더 많아서?”

웃음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그 둘을 전부 포함해 다른 여러 가지 감정들도 녹아들어가 있는지 모를 말을 하며 밸러니는 천천히 이야기들을 꺼낸다.

 

최후의 발악으로 아마 몸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 같지만 결국 실패하고 빼앗으려고 했던 몸 대신 기억들을 뜯어내어 그 뜯어낸 자리만큼 제 기억들이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게 쓰러진 용사와 뒤에 있는 컨티뉴가 아닌 바로 앞에 있었던 패치였다는 이야기.

뜯어지고 내팽개쳐진 기억들이 이 숲으로 흩어졌다는 이야기.

주인과 이어져있던 숲은 주인을 잃고 숲에 있던 모든 것들과 함께 그대로 환영처럼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

기억들이 자리 잡을 때 마력도 덩달아 흘러들어와 밸러니였던 기억들이 의식이자 마력이 되어 마력을 전부 잃은 패치가 살아있게 됐단 이야기.

그걸 깨닫고 마력이자 자신을 움직여 패치의 몸을 장악하려고 했다던 이야기.

그러자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고 오히려 자신의 마력을 이용하여 약새풀을 만들고 뜯어 먹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패치의 이야기.

잠시만요?! 약새풀을 직접 뜯어 먹었다고요?!”

내가 말하지 않았니? 네 아버지는 어디다 던져놔도 정말 잘 살 거라고. 병에 걸려도 그 병을 죽일 자고 목에 바로 칼이 들어와도 그 칼에 목 한 번 베여주고 칼을 들이민 자를 없앤 후에 태연하게 목을 치료할 마법사라는 걸 내 모든 기억을 걸고 장담한다고 했잖니? 게다가 정말 위험했어, 그냥 내 몸이었다면 그다지 위험할 게 없었지만 네 아버지는 내 몸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약새풀에 바로 영향을 받았거든.”

약새풀을 먹으면 체내의 마력이 빠르게 얼어서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린다는 선생의 말과 뒷마당의 그 많은 약새풀들이 퍼블리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밸러니는 퍼블리의 머릿속이 어지럽든 말든 계속 이야기들을 꺼낸다.

 

비록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자신의 마력으로 만들었으니 완전히 얼지 않고 막아내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

온전치 않은 기억에 혼란스러워 하던 패치의 이야기.

벌판을 돌아다니며 숲을 찾아내려고 했던 패치의 이야기.

결국 몇 십 년이 지난 후에야 포기하고 어느 호수 근처에 오두막과 약새풀 밭을 만든 패치 이야기.

그 뒤로 꾸준한 몸 장악과 꾸준한 약새풀 섭취 이야기.

어쩌다가 패치를 찾게 된 GM의 이야기.

그리고

어느 날 호수로 갔더니 파란 장미가 호수 바로 옆에 피어있더구나.”

분명 뜯어져서 없는 기억인데 퍼블리 셔룰 기억한 패치.

용사가 말한 새 친구이자 태어나서 패치의 아이가 된 마녀 퍼블리.

패치의 눈으로 그 모든 일을 본 마법사.

너는 참 사랑스러웠단다.”
몸 주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은 삼켰다. 마법사는 직접 말을 건네지 못했지만 마법사는 퍼블리를 안아들고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항상 지켜봐왔다.

내가 함께 하고 싶었지만 네가 찾고 바라는 건 확고했지. 그게 참 아쉬우면서도 올곧아서 기뻤단다.”
이렇게 빙빙 돌고 도는 끝에,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어려워하고 다가서지 못한 끝에도 퍼블리는 올곧게 손을 뻗고 발을 움직여 찾아 나섰다. 애초에 선택이라는 건 없었다.

모글리제의 말을 들었어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날도 많았지만 한 가지 모글리제가 틀린 걸 알았지. 나는 비참하지 않았단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퍼블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보이는 건 짙은 녹색 풀이었고 천천히 일어나보니 높고 큰 나무들이 보였다.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고 어떻게 되실 건가요?”
이제 못 잔 잠을 다 잘 거란다.”

언제까지요?”
영원히.”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던 퍼블리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고요함만이 남아있기를 심장박동이 다섯 번, 퍼블리는 행여나 무언가 밟을까 싶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걷기를 스무 걸음. 조심스레 손을 뻗어 챙이 넓은 모자를 들어올린다.

다녀왔습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그 날, 집에서 건네지 못했던 인사를 건네고

늦어서 미안하다.”

함께 살아온 지난 날, 다가가지 못한 모든 것에 미안한 사과가 돌아왔다.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아요.”

손을 뻗자 팔찌에 달린 돌조각 장식의 얼음꽃무늬가 예쁘게 흔들렸다. 그 손을 맞잡은 손은 여전히 냉기가 감돌았지만 힘이 있었다. 당기는 힘에 천천히 일어나며 눈을 뜬 패치는 햇빛 아래 하늘처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여름처럼 울창한 숲을 가장 먼저 보았다. 패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설마 지금 여름인가?”
...제가 이 숲 들어올 땐 겨울이었어요!”
“...지금 날씨는 전혀 겨울이 아닌 것 같다만.”
, 그래도 그렇게 덥지 않은 걸 보면 봄 같아요!”

패치는 더 붙이지 않고 딱 하나만 물었다.

학교는?”
여름도 아닌데 잔뜩 땀을 흘리기 시작한 퍼블리는 하하 웃으며 조심스레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패치는 놔주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던 순간

저기 있네!!!”
~블리~!!”
하늘에서 요란스런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둘은 비어있는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빛 때문에 그림자처럼 까맣게 보이지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이 흔들리면서 햇빛을 가려줬고 동시에 그림자가 내려왔다.

아이고~! 날개 깃털 죄다 빠지도록 날아왔는데 여길 안방처럼 편히 앉아들 있는 양반들 봐!!”

우리 근육이~ 참 대단하네, 이 위험한 숲 올 생각을 다 하고~?”

그래도 뭐 찾긴 찾았구나? 하며 어쩐지 섬뜩하면서도 안도가 가득한 눈빛과 웃음에 퍼블리는 마주 웃었다.

그러는 너희들도 여기 들어왔으면서.”
웜머?!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이 위험 가득한 숲에 특급편지보다 더 빨리 날아와서 여기저기 찾느라 튀어나온 내 눈알들이 안 보고 얄미운 말이나 꺼내고 있네!?”

이야아악 화를 내며 혼자 날아가버리려는 산들바람처럼 잽싸게 일어나 전서구를 말리는 퍼블리와 아무 말 없이 뜻 모를 눈으로 패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니카, 아직 잡고 있는 손에 덩달아 일어나서 이 셋을 모두 지켜보다가 잠시 눈을 감는 패치. 이들이 숲을 빠져나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하나는 얼음

 

하나는 냉기

 

둘이 되는 봄으로

 

손을 맞잡아

 

여름을 부르는 숲 위에

 

모든 걸 지켜보는 햇빛 아래에

 

숲을 밟는 둘의 발은

 

어느새 산들바람이 되어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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