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썼어.”

?”
저번에 네 얘기로 글 쓴다고 했잖아?”

언제였는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니카가 퍼블리에게 그동안 퍼블리가 겪었던 일들을 글로 써도 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노렸던 건지 그 때는 마침 아침이었고 퍼블리는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에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으며 아니카는 허락을 받자마자 평소처럼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으니 퍼블리가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내용은 완전히 똑같이 하진 않았고 조금 다르게 썼어.”

어쩐지 내 얘기가 글로 써지니 좀 민망하네...”
아니카가 건네는 종이뭉치를 조심스럽게 받아든 퍼블리는 빨개진 목을 가리듯이 고개를 푹 숙여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동화네?”
왠지 그냥 수필이나 소설보다는 동화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동화로 써봤어.”

동화다보니 어린아이들도 읽을 수 있게 간결한 문장과 간단한 단어로 쓰려고 애를 쓴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더 번지지 않게 조심스레 종이를 넘기던 퍼블리는 마지막으로 써져있는 문장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들어 아니카를 마주봤다. 아니카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솔직하게 말해봐.”

별로는 아닌데 예상이랑 달라서 말이야. 보통 동화들은 항상 마지막에 모두 행복해졌다는 식으로 써지는데 이건 그...”
동화에서 벌어진 일들이 전부 해결은 됐지만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다라고 하기 보단 강조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어.”

당연하지. 지금까지도 모두가 행복하진 않잖아.”
그 말에 퍼블리는 더 말하지 않고 꺼내놓은 얼음을 집어 입 안에 굴렸다. 얼음에서 맛이 날 리가 없는데 혀뿌리에서 쓴맛이 도는 느낌에 퍼블리는 눈을 찌푸리며 작게 웃었다.

 

가장 이상적이고 상상하기 쉬운 미래라면 셋이서 전서구를 타고 왕국으로 날아가는 거였다. 물론 전서구는 전혀 이상적이지 않다고 극렬하게 날뛰었겠지만. 여기서 아니카와 전서구가 예상치 못한 게 있었으니 바로 저주 때문에 잠들어버려서 그대로 숲에 남아있었던 선발대들이 있다는 거였다.

흑기사단과 아난타처럼 잠드는 저주가 아닌 다른 저주에 걸려 숲이 사라지기 전에 빠져나온 이들도 있었지만 잠드는 저주가 월등히 더 많았다는 거였다. 숲에서 나온 메르시마저도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잠들어있었으니.

뭐야?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
곳곳에서 자다 일어난 듯한 가라앉은 목소리와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패치는 주위를 한 번 슥 둘러보다가 옷에 붙은 풀을 털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퍼블리와 아니카, 전서구가 그런 패치를 따라가려고 하다가 언제부터 이 근처에 누워있었는지 일어나고 있는 마녀들과 마법사들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려서 따라갈 때를 놓쳤지만 다행히 패치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패치는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어떤 마법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덕분에 멀리서 그 마법사를 본 퍼블리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일어났나?”
, 너는?”
커다란 덩치에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 콧수염과 팔 근육이 인상 깊은 마법사. 흩어진 기억들을 봤을 때 아난타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말했던 그 마법사였다.

잠꾸러기들을 깨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그 말에 그 마법사는 고개를 푹 숙였고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전서구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눈에 담아 굴리고 있었다. 이 난데없는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당연한 거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
저주에 걸려서 잠든 선발대들이 깨어나는 상황.”
간결한 질문과 간결한 대답이 오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전서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촉새처럼 빠르고 정신없이 말을 쏟아낼 부리가 딱 벌어진 채로 멈춰있었다. 그에 아니카가 끝을 내듯 쐐기를 박았다.

지금 있는 역사책들 전부 태워지겠네?”
아니카가 가벼운 어투로 말하긴 했지만 역사책이 불태워지는 건 당연한 얘기이자 약과였고 왕국 자체가 지금까지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돌아온 선발대들과 공적을 가로챈 후발대, 공주가 잠들어있던 걸 비밀로 했던 왕궁 마녀들과 살아 돌아왔지만 저주 때문에 겨우겨우 살아왔지만 저주가 풀린 덕에 다시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된 몇몇 이들과 왜곡된 역사책을 보며 살아왔던 이들. 난리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신성지대도 한창 불타고 있었는데 의외로 신성측을 공격하고 있는 건 흑기사단과 메르시가 아니었다.

아이고! 날개 아프다!”

소식 전하는 비둘기들이 가장 바쁘구나.”
바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요것아! 내 깃털 좀 봐, 튼튼해서 풍차처럼 날개 돌려도 한두 개 떨어질까 하던 깃털이 민들레 홀씨마냥 바람만 불어도 숭숭 빠지고 있는 거 봐!”

전서구가 앓는 소리를 내며 찾아온 적이 있었다. 퍼블리는 어색하게 하하 웃고 패치는 한숨을 쉬며 얼음을 넣은 물통을 가져왔고 전서구는 물통을 낚아채서 급하게 들이켰던 적이 있었다.

그 벌판, 아 이젠 숲인가? 아무튼 거기로 당신네들 찾으러 가기 전부터 묘한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진짜 홀랑 떠날 줄은 몰랐죠.”

그 뒤로 저주가 제대로 풀렸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둥 아무리 그래도 좀 더 있다가 저주가 확실히 풀렸을 때 떠나야하지 않았겠느냐는 둥 걱정 섞인 말들을 툴툴 내뱉던 전서구는 창문을 툭툭 두드리면서 구구 울어대는 비둘기를 보고 핼쑥한 얼굴로 마저 일하러 나갔다. 퍼블리는 창문에 붙어 전서구가 저 멀리 날아가는 걸 지켜보다가 다시 탁자로 돌아와 앉았다.

한참 용사와 컨티뉴를 찾았지만 결국 나타나지 않아 찾는 걸 포기하고 전서구를 타고 막 깨어난 선발대들보다 먼저 왕국에 왔을 때 패치가 제일 먼저 한 건 뒷마당의 약새풀밭을 전부 태우는 거였다. 전서구는 그 때 부리를 쩍 벌리며 아까워했고 아니카는 여름에 시원했는데 아쉽다며 호호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건 바로 왕국을 나가는 거였다.

엄청 어렸을 때라 기억이 잘 안 날 줄 알았는데 GM할아버지네 마을 가는 길은 바로 기억났어요!”

그리고 돌아온 곳은 왕국으로 오기 전에 살았던 숲이었다. 집을 태운 잔해는 진즉에 사라졌지만 집이 있던 곳은 풀이 자라지 않아 곧바로 그 위에 다시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고 난 후 아니카가 종종 놀러오고 있었는데 예전엔 골목만 조금 지나면 됐는데 이젠 놀러오기 굉장히 멀어졌다는 작은 불만 외엔 크게 아무 말이 없었다. 가끔가다 패치가 자리를 비울 때 나중에 독립하면 같이 살지 않겠냐는 말을 넌지시 꺼내고 퍼블리는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렇게 벌써 2년이 흘렀다.

오늘은 왜 용사님과 같이 다니게 됐는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이번까지 합치면 열 번째다.”
그래도 또 들을래요.”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퍼블리는 패치의 과거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게 하루 일과가 됐다. 숲에 흩어진 기억들은 퍼블리 덕분에 다시 뭉쳐졌지만 안에 아직 밸러니가 있기 때문에 돌아올 수 없었는지 아니면 다시 돌아왔지만 너무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패치는 기억하지 못했다. 퍼블리는 이제 패치가 알고 있는 과거뿐만 아니라 특별히 무언가를 계속 먹을 정도로 좋아해본 적 없다는 미지근한 입맛과 포옹보다는 악수가, 연애서적보다는 추리 서적을, 추리서적보다는 마법서적을 더 좋아한다는 책 취향과 그 외 패치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 사소한 취향들을 알게 됐다.

잠깐 물 갖고 올게요!”
왕국에서 살았을 때보다 확연히 밝아지고 쉽게 다가오는 퍼블리에 패치는 가장 먼저 미안함을 느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나온 건 사과였고 퍼블리는 사과보단 아빠의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싶다는 말을 했다. 퍼블리가 듣고 싶다고 했던 것들 중에 두 번 이상 듣지 않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둘이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는 게 있었으니 바로 치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처음에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얘기할 때 외엔 둘은 치트에 대한 걸 완전히 묻어뒀다.

내일 새로 물을 떠와야할 것 같아요.”
이제 여름이라 그런지 금방 마르나보군.”
그러고 보니 올해 축제는 진행할까요? 작년에는 워낙 정신없어서 축제도 생략됐던데.”
아마 안할 거다. 이제는 축제의 의미가 없어졌을 테니.”
패치는 그렇게 말하며 물을 한 모금 넘기고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패치를 통해 용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퍼블리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 이야기를 자주 듣는 이유는 한순간에 달라진 용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해가 되면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제 아빠가 더 이상 거기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느낌이 가장 컸다.

이야기를 다 듣고 생각에 빠져있는 퍼블리를 힐끗 보다가 눈을 감은 패치는 꽤 복잡한 심정이 담겨있는 한숨을 쉬더니 바로 입을 연다.

숲에 나온 이후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었고 지금에서야 겨우 결심이 든 게 있지.”

한창 생각에 빠져있던 퍼블리는 패치의 말에 다시 눈을 또렷이 떴다.

세상의 끝 너머로 가볼까 한다.”
언젠가 전서구가 전해줬던 소식 때문일까, 아니면 숲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용사와 컨티뉴 때문일까. 퍼블리는 놀라긴 했지만 곧이어 담담해졌다.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진정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용사님과 현자님을 찾기 위해서요?”

아니.”
단호하게 부정한 패치가 잔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대답한다.

끝을 맺지 않고 잠드는 걸 선택한 불법침입자의 끝을 제대로 매듭 지어주기 위해.”

퍼블리가 그 때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놀란 건 당연했고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자리 잡은 감정은 신기하게도 기쁨이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몰라도 그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는지 패치는 안심한 얼굴로 편안하게 힘을 빼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었다. 그리고 퍼블리는

퍼블리?”

?”
우리 근육이, 감상은 안 들고 딴생각이 들었구나~?”

아니카의 말에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동화를 보니 옛기억이 떠올랐다고 해도 딴생각을 한 건 맞았으니.

그래서 무슨 생각했어?”

예전에 내가 고생했던 생각.”
패치는 그 말을 꺼낸 날 바로 떠난 건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준비해뒀는지 짐을 고르고 챙기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사는 거창하지 않았다. 마치 평소처럼 식량을 사러 근처 마을에 갔다 올 때 하는 인사처럼 가볍고 자연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다시 돌아올 것처럼 둘은 큰 걱정 없이 인사했고 큰 동요 없이 몸을 돌렸다. 퍼블리는 예전만큼 슬프지 않았고 예전만큼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감나지 않아서 차분하다고 하기엔 굉장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예전만큼 막막하진 않았다.

아니카.”
?”
매번 드는 생각인데.”
슬프진 않은데 허전해서 그 허전한 만큼 눈물이 채울 뻔한 날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짐까지 챙겨서 온 아니카는 이제 같이 살겠다며 허전함을 조금씩 없애줬고 눈물이 나올 일도 이유도 없었다.

고마워.”

남은 허전함은 가끔가다 가지고 있던 튼튼한 유리병을 굴려 바람처럼 움직이는 파란꽃잎들을 지켜보거나 어렸을 때 가지 못했던 호수를 구경하러 가는 걸로 채워 넣었다. 그래도 가장 많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허전함을 없애는 건 바로 아니카였다.

그래. 그래서 감상은?”
여전히 힘들었고 글이랑 현실은 다르구나 싶어.”
당연한 얘기야. 아직 다 완성된 건 아니고 좀 더 다듬어야할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까 마저 쓰러갈게.”
늦었으니까 나랑 더 얘기하고 자고난 후에 쓰는 건 어때?”
원래 늦은 시간에 더 집중이 잘 되는 법이야.”
아니카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뭉치를 다시 가져갔고 퍼블리는 시계를 힐끗 보다가 입을 열었다.

“GM할아버지는 어디 갔을까?”


다시 숲이었지만 벌판이었을 때도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바다 너머도, 산 너머도, 발을 딛을 수 있는 들판 너머에도. 넘어갔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는지, 않았는지 갔다 와서 그 너머에 뭐가 있다고 말해준 이들이 없었다.

그래도 가보고 싶으니까 가는 녀석들은 많지.”

높디높은 검은 산, 그 너머를 본 여행자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산이 제 위로 올라가는 걸 허락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찌 보면 밸러니의 숲보다 더 까다로운 녀석이지. 컨티뉴는 생각을 단순하게 해서 산에게 직접 물어봤다는 거야. 그랬더니 뭐 놀랍다면 놀랍고 당연한 대답이 돌아온 거지.”

올라타는 건 간지럽고 거슬리고 아프기 때문이다냐!”
민감 피부!”
영감이 하도 처 말해서 외울 지경이야.”
퉁명스럽게 말한 검은 들개가 검은 산을 힐끗 돌아본다.

얼마나 처 대단한 제자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정말 다른 의미로 대단하군, 컨티뉴도 제자 녀석도 누가 서로 스승, 제자 아니랄까봐 얼굴 한 번 처 보기 힘들 줄이야.”
그게 매력이지!”

히익히익 웃는 GM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검은 들개는 바람을 타고 오는 냄새에 눈을 떴다.

이미 철이 다 처 지나고 여기엔 없는 건데 웬...”
달콤새콤한 냄새가 난다냐!”

딸기향!”

결국 온 모양이구만?”

그 말에 GM은 무언가 알고 있는지 옷에 묻은 흙과 풀을 탁탁 털어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어느 순간 갑자기 흔적도 없을 만큼 깔끔하게 사라졌나 싶었던 녀석들이 있는데 한 2년 전에 한창 난리 났을 때 겨우 꼬리가 보여서 꼬리 잡고 쪼매 흔들어주니 엄청 골이 났나봐?”

일어나는 GM을 따라 누워있거나 엎드려있던 들개들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처럼 익살스런 웃음을 지은 GM이 어둠속의 노란 안광과 마주한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지?”

 

퍼블리가 잠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GM의 이야기를 꺼내며 조금 더 떠들려고 했다가 바로 간파당하고 신나게 여행하고 있을 거라는 대답에 하하 웃으며 들어가는 아니카에게 손을 흔들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침대에 누운 거였다. 마땅히 할 게 없고 시간도 애매해 일찍 누운 거였지만 졸리지 않아 조금 뒤척이다가 잠들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퍼블리는 바로 잠에 빠졌었다.

“...일찍 잠들어서 일찍 깼다기엔 너무 이른데?”
이제 막 한밤중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퍼블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유 없이 퍼뜩 잠에서 깼는데 평소 같으면 잠결이라 바로 다시 잠들었겠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잠들기 전보다 훨씬 더 또렷했다. 몇 번 침대에서 뒤척이던 퍼블리는 결국 몸을 일으켰고 아니카가 아직 안자고 계속 글을 쓰고 있지 있을까하는 기대를 가지다가 다시 시계를 보고 생각을 접었다. 그러다가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웬 파란빛이...”
창문 바로 아래에 놓인 탁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혹시 파란 무언가가 창문에 붙었나 싶어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살펴본 퍼블리는 하늘에서 평소와 다른 달을 발견했다.

푸른 달이구나.”
달이 푸르게 빛나는 때는 달이 가장 높게 떠 있을 어느 날이었고 그 때쯤에 퍼블리는 항상 자고 있어서 푸른 달을 직접 본 적은 드물었다. 여느 때처럼 노란 빛이 아닌 푸른 달은 굉장히 신비롭게 느껴져서 퍼블리는 다시 침대로 가지 않고 탁자에 걸터앉아 달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시계 바늘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순간 퍼블리는 반쯤 충동적으로 서랍을 열어 얇은 천을 꺼내 두르고는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방을 나오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 집을 나왔다. 여름이어도 아직 초여름이라 한밤중은 입고 있는 잠옷으로 돌아다니기엔 조금 서늘했다. 가볍게 어깨를 두른 천을 꼭 쥐고 발을 재촉하듯 빠른 걸음으로 퍼블리가 도착한 곳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 호수였다.

...”
용사가 장미씨앗을 심고 퍼블리가 태어난 푸른 장미가 피어났다는 땅과 그 옆의 호수. 밤하늘을 담고 있는 맑은 호수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만약 풀과 나무가 없었다면 하늘만 존재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깨끗한 거울 같았다. 감탄을 흘린 퍼블리는 그대로 서 있던 자리에 앉아 호수를 바라봤다.

내가 태어났던 날도 이렇게 푸른 달이 뜨는 날이라고 말해줬었지. 그래서 오늘 이렇게 깬 건가?”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한 혼잣말이자 물음이었는데 어디선가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퍼블리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니카?”

나가는 소리를 듣고 깨서 아니카가 따라 나온 게 아닐까 싶어 조심스레 이름을 불러보지만 아니카의 노란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아무리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숲이라고 해도 아예 안 온다는 건 안일한 생각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퍼블리는 천천히 패치에게 배운 방어마법과 원거리 공격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퍼블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분명 눈을 떼기 전까지 밤하늘 외엔 아무것도 담지 않은 호수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호수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푸른 달 위에 있는 무언가가 조그맣게 꼬물거리고 바람도 불지 않는데 천천히 퍼블리가 있는 곳으로 물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던 퍼블리는 가까이 오는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라 두르고 있던 천을 풀어 손에 들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허벅지까지만 잠길 깊이쯤에 건질 수 있게 됐는데 건진 즉시 퍼블리는 천으로 물을 닦으며 감싸 안아들었다.
, 아기?”
퍼블리가 건진 건 다름 아닌 아기였는데 마법사가 호수에서 태어난다는 걸 퍼블리도 알고 있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이 만남이 퍼블리는 마냥 당황스러웠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작은 머리에 맞게 작고 적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호수에 비친 달보다 훨씬 더 짙은 파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얌전히 퍼블리의 품에 안겨있던 아기가 천천히 눈을 떴다.

.”
아기의 눈을 본 퍼블리의 외마디 감탄이 모든 걸 담고 나타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처럼 환하고 맑은 녹색 빛을 퍼블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도 퍼블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어리지도, 품에 안길 정도로 작지도 않았지만 퍼블리는 이미 본 적이 있었다. 한숨 같은 웃음을 지어본 퍼블리는 까르륵 웃는 아기를 쓰다듬으며

만나서 반가워요, 용사님.”

모든 것은 운명 같은 우연이길 바라.

 

 

 

 

 

 

 

 

 

 

 

end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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