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리 감정에 예민한 편은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얼굴과 행동에서 보이는 감정은 알아보고, 일부러 덮어서 감추는 감정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덮어두어도 잘 보일 정도로 새어나오는 게 있다고 하지만 그걸 눈치챌만큼 길게 얘기해본 마법사가 없었다. 그나마 연구를 위해 잠깐 만나는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자주 보게 되는 GM은 감정표현은 물론 생각까지도 자유롭게 말하는 마법사였으니 이 상황에 적합한 예시는 절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새로 쓴 마법서랍시고 각 종이 쪽마다 화초가 크게 그려진 책을 준 GM을 찾아가 얼음을 넣은 주제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차와 진짜 마법서를 받고 온 날이었다.


“전부터 좋아했어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상황에 그냥 모른 척 하며 마을 밖으로 나갈까, GM의 놀림을 받을 각오로 다시 들어갈까 고민에 빠졌다. 언제 왔는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행히 상대방들은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지금 자신들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빠른 걸음으로 이 자리를 벗어났다. GM의 집이 마을 출입구 길목에서 그리 멀지 않아 저들과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게 될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벗어났다.

이 마을 마법사들은 전부 GM에게 배우고 자라난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익숙한 편이라 누가 누구고 어떤 마법사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방금 본 두 마법사는 마을에서 유독 서로가 제일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고 고백한 쪽이 자주, 그리고 먼저 말을 걸거나 무언가를 챙기곤 했었다.

거기까지 기억을 더듬었을 때 바로 생각을 접었다. 어쩌다가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거라 생각이 이어졌던거지 크게 관심 가질 일도, 관심이 이어질 일도 아니었으니까.


열 두쪽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못보던 마법이론이 적혀있는 새로운 마법서가 맞았다. 찢어서 뗄 수도 없게 앞장은 이론식, 뒷장은 화초 그림으로 이루어진 종이들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거기에 한술 더떠 화초 그림에도 이론식들이 숨겨져 있었는데 찾다보니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걸 계속 읽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때에 바로 옆에 있는 창문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루룱!”

다리에 편지를 매고 있는 걸 보면 비둘기 우체부인데 소식지는 바로 어제 받았고, GM은 편지보단 직접 찾아오는 걸 택하는 마법사인데다가 GM을 통해 몇 번 만났었던 들개들은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다. 창문을 열어 다리에 매인 편지를 풀어도 날아가지 않는 걸 보면 답장이 필요한 편지인 것 같아 한 번쯤은 얼굴을 봤겠거니 했다. 편지 내용을 보기 전까진.


“답장은 없으니 가도 좋네.”

우체부들이 좋아하는 마른과자를 물려주고 편지는 잠시 뒤집어뒀다. 최근에 책을 낸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책을 감명 깊게 봤다에서부터 시작해 얹고자 하는 의견을 끝에 붙인 편지였다. 온갖 말과 글로 현혹해서 읽은 마법사나 마녀가 다음 책을 낼 때 은근슬쩍 자기 의견이 실리게 만든 후 공동 저자라고 우길 준비를 하는 강도였다. 글솜씨가 뛰어나 지팡이 대신 붓을 든 강도들이라고 해서 북도들이라고 책가게 마녀와 토론으로 만났던 이들이 주의삼아 해준 말들로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편지가 온 건 처음이었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편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귀찮아졌다.


“이 편지 때문에 찾아온 거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서성거리지 말고 그냥 오게. GM이 보냈나?”

“여기 처 찾아올 녀석들도 없는 주제에 괜히 경계마법이나 처 깔긴, 영감탱이가 신나게 처 웃던데 대체 무슨 편지길래 난리야?”GM에게 북도 편지를 알려준 정보제공자는 누군지 안 봐도 훤했다. 애초에 전서구가 비둘기 우체부 대표인 이상 비밀편지같은 건 없었다.


“북도가 내 본명을 알았다. 이 편지 냄새를 맡고 집에 같은 냄새가 나는 게 있는지 찾아봐주게.”

비둘기 우체부의 편한 점이자 단점은 받는 상대의 이름만 적으면 그 집으로 편지를 배달해준다는 거였다. 굳이 주소를 안 적어도 된다는 게 편한 점이었고 단점은 본명만 안다면 이렇게 쓸모없는 편지들도 온다는 거였다. 문제는 북도가 어떻게 내 본명을 알고 있느냐였다. 항상 책을 낼 땐 책내기용으로 다른 이름을 적어서 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어코 편지 처 보내는 북도도 징그러운데 책을 처 낸게 몇 권인데 이제야 그런 편지 처 받는 너도 참 징글맞아.”

굳이 그 말에 뭔가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껴 편지만 내미니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지 코웃음을 친다.


“일단 이 편지랑 같은 냄새가 처 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마 출판사쪽에서 이름을 돈 받고 처 팔아넘긴 것 같은데.”


“출판사쪽에도 본명을 알려준 적은 없네만.”

“...진짜 징글맞은 새끼들이야.”

이름을 알아내는 마법이라도 만들어낸건가 싶을 정도로 편지 외엔 흔적이 없는가 싶었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네 옆으로 한 발 움직여보게.”

“뭔데?”

대장들개가 옆으로 움직이니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눈에 보이는 풍경과 결계가 어그러지는 게 보였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네. 가서 GM에게 한동안 집에 없을 거라고 전하면 될걸세.”

“영감이 처 오는 건 못 막는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대장들개는 GM에게 돌아가고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와 간단하게 옷과 말린 과일들을 챙겼다. GM이 오면 일이 귀찮은 걸 넘어서 지금보다 더 복잡해질 게 눈에 훤했다. GM도 피하고 이사할 새로운 집도 찾을겸 결계마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마법사들을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어느 마법이나 그렇듯이 기존의 방식들을 짓누를 정도로 기발한 기술력과 수식이 아닌 이상 마법 설계자 본인의 판단력과 감각에 달려있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일에는 감각 좋은 장인들을 찾아가는 게 좋아보이지만 최근에 들려오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파란머리집 말이야? 들어는 봤는데 어딨는지는 글쎄...”

“저 어디 하얀잎나무산 아랫마을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노란가시나무숲에 숨겨져 있대.”

“각진나무 무덤 아니고?”


파란머리집은 최근에 꽤 유명하게 돌고 있는 이야기였다. 헛소문으로 취급하는 마법사들도 종종 있지만 이야기의 시작이 전문가들에게서부터 시작됐다면 마냥 헛소문이라고 덮어둘 순 없었다. 

지붕이 파란색이기 때문인지 집주인이 파란머리라서 그렇게 불리는지 아직 모르지만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그 집주인은 전문가들이 입에 담다가 흘릴 정도로 새로운 기술력이나 수식을 만든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전문가들에게 최근에 정리한 분해마법 수식을 던져놓음으로써 소문의 진실 여부도 확인할겸 마법사가 많은 마을의 쉼터를 찾아갔다.


“당신도 파란머리집에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믿는 건가요?”

“요정의 장난처럼 여기저기 나타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보물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소문이라는 게 원래 과장되고 헛된 이야기가 붙기 마련이죠. 원래는 당신 말대로 요정의 장난만 떠돌고 있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아주 귀한 보물이 있다는 얘기까지 붙어서 돌아다니고 있어요. 미래를 보는 수정구가 있다나 뭐라나. 워낙에 허무맹랑해서 믿는 마법사라고 해봐야 동화가 진짜라고 믿는 애들밖에 없지요.”


그리 말한 쉼터의 주인은 안쪽에서 칭얼대는 아기 울음소리에 급하게 들어갔다. 지금까지 돌아다녀본 마을 마법사들과 쉼터의 주인들의 얘기를 들어본 결과 가장 많이 언급된 장소는 바다꽃밭, 하얀잎나무산, 각진나무 무덤 이 세군데다. 바다꽃밭은 이름처럼 바닷가에 있었고 하얀잎나무산은 마녀왕국보다 더 동쪽에 있는 산, 각진나무 무덤은 북쪽에 있는 검은산 근처에 있는 장소였다. 서로 연관도 없고 서로의 거리도 보통 먼 거리가 아닌데 이 셋이 제일 많이 언급된 걸 보면 일부러 의도한 게 분명했다.


“길게 돌아다닐 생각은 없는데.”

지도를 두 번 정도 훑어보고 나서 가볼 장소를 정했다. 바다꽃은 바닷물이 없으면 피어날 수 없었고 바닷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데에 숲이 있었다.


신기루다, 요정의 장난이다. 이렇게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도는 내용은 비둘기 우체부도 찾아갈 수 없다는 것과 한 번 그 집을 찾아가는데 성공한 마법사와 마녀들이 다시는 그 집으로 가지 않았다는 거였다. 일단 소문은 진짜라고 확인받았지만 가장 확실한 건 그 집을 찾는 거였다. 

가봤다는 이들중에 당연히 전문가들도 있었지만 어째선지 소문은 긍정하면서 장소는 물론, 그곳에서 벌어진 자세한 일은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웬만하면 가지 말라고 만류까지 했다. 이유를 묻자 곤란한 건지 두려운 건지 애매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로 가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는 그들에게 더 정보를 얻기 포기한 후 제일 처음 고른 바닷가 근처 숲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거기, 잠깐만요!”


“음?”

“숲에 들어가시려고요?”

“그렇습니다만.”

약초를 캐고 나왔는지 바구니를 든 마법사 하나가 나타났다. 내 대답을 듣고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숲을 가리키고는


“지금은 바다꽃들이 씨앗을 뿌리는 시기라 보기 힘들어요. 덕분에 안개도 껴서 길을 잃으실 거예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바다꽃을 보러 온 게 아니니 괜찮습니다.”

바다꽃을 보러 왔다고도 안 했는데 친절히 설명해주는 마법사를 뒤로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바다꽃이 어떻게 씨앗을 뿌리는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댄 핑계겠지만 이미 예전에 바다꽃이 어떻게 씨앗을 뿌리는지 본적이 있었기 때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뒤에서 당황하며 뭐라 외치는 게 들리지만 뒤돌아볼 생각은 없었다. 처음 오자마자 찾다니 운이 좋았다.


“...그 세 군데나 언급된 이유가 있었군.”

길이 나 있지 않은 숲 안쪽으로 조금 깊숙이 들어가니 파란지붕으로 된 집이 나타났다. 거울같이 투명한 바다꽃이 먼저 시야를 빼앗고 하얀잎나무와 각진나무가 마법진을 대신하고 있었다. 각진나무가 수식을, 하얀잎이 그림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에 조금 감탄했다. 이런식으로 응용하는 건 장인들 사이에서도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흐려지고 손을 뻗으니 잡히는 거 하나 없이 완전히 사라진다. 신기루나 요정의 장난이라고 불릴만 했다.

찾아가봤다는 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하기도 꺼려하는 걸 보면 분명 어떤식으로든 안에 들어가서 말하기도 꺼릴만한 일을 당한 게 확실한데 어떻게 들어갔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마법에 대해 파악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니 뭘 할 수도 없었다. 일단 바로 찾은 거에 만족하고 물러나려는 순간 사라졌던 집이 다시 나타났다.


“음?”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고 멀어지면 다시 나타나는 형식이라고 하기엔 사라진 이후로 한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손을 뻗어보니 사라지지 않는다. 집주인이 들어오는 걸 허락해서 다시 나타난 건지 아니면 마침 결계가 풀릴 정도로 마력이 다 한 건지 애매했기에 확실하게 확인하고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문을 다섯 번 두드렸을 때 문이 열렸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와요.”

목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일단 확실하게 허락을 받았으니 집으로 들어섰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이었다. 이렇게 책이 가득한 집은 책을 팔기 위한 서점이나 연구 때문에 관련서적을 모으는 집 외에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가운데에 놓여있는 작은 탁자와 의자 하나였다. 앉으라는 건지 살짝 빼어져 있는 의자에 앉자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용건.”


한 번. 급격한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꾹 누르며 용건을 꺼냈다.


“당신이 연구한 결계마법에 대해 의논하고자 왔습니다.”


“똑같네. 일단 뭐 사족 붙이지 않은 건 훌륭해요. 근데 똑같아.”

두 번. 무슨 말을 할지 잠시 기다려봤다.


“가끔, 아니 매일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괜히 책 냈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마법사뿐만 아니라 마녀도 찾아오기 시작했어, 그것도 왕궁 마녀가. 대체 누가 내 책을 마녀왕국까지 보냈는지 참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고 지금 그 연구를 계속해가느라 바쁜데 의논하자고 하면서 핵심정보만 쏙 빼가려는 녀석들이 많아. 근데 그나마 그런 녀석들은 점잖은 편이었어요. 어떤 녀석들은 내 연구와 정보만 쏙 빼갈려고 집을 날리기 위해서 마법을 날려댔어. 내가 이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집에 그대로 있는데 대놓고 강도짓을 하려고 했지요.”


책을 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마 책을 만들기로한 서점과 다른 전문가들이 왕궁 마녀들과 거래를 해서 책을 공식적으로 내지 않고 이곳으로 찾아와 압박을 가한 모양이다. 

아직 남아있는 결계마법의 흔적을 보며 확실히 정교하고 장인도 쉽게 손 댈 수 없는 결계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계를 살펴보고 있던 중에 목주변이 작게 요동치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빛이 칼날처럼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결계마법에서 파생된 공격마법인 듯 싶었다. 이걸로 세 번이었다.


“할 말이 더 남았나요? 아니면 돌아갈래?”

“일단 나도 더 예의를 차려줄 필요는 없겠군. 어차피 그쪽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일세.”


굉장하고 훌륭한 결계였다. 실제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손도 못 댈 정도였지만 직접 보게 되니 파훼법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위협하는 빛을 전부 없애고 일어나 문이 있는 뒤로 돌아갔다.


“잠깐.”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나가는 문을 열었다.


“기다리라니까!”

저 마법을 완전히 파악하기엔 연구기록과 세운 수식들을 자세히 봐야겠지만 구조를 얼핏보니 명백한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단점은 바로 마법을 유지할 마력이 마법사 하나의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많이 드는 구조였다는 점이었다. 훌륭하고 효과적인 마법이지만 효율적이진 않은 마법이었다.

노랗게 물들고 있는 하늘과 어둑해진 길을 더듬고 이사갈 집을 어디로 해야할지 고민하면서 걸으니 숲을 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만난 바다꽃 씨앗 얘기를 했던 마법사는 아직 떠나지 않았던 건지 나오자마자 마주쳤다. 멀쩡하게 걸어나오는 내 모습이 그리 신기한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인다.


“근처에 마을이 있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하하 웃으며 마침 저도 돌아가던 참이라고 말한 후 앞장을 서기 시작한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들어서면서 쉼터까지 안내해준 그 마법사는 안으로 들어와 바로 옆에 앉으면서 궁금함을 참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멀쩡하셔요?”

“바로 사라지더군요. 혹시 멀쩡하지 못한 마법사들이 많았습니까?”

“마법사뿐이겠어요? 마녀들도 엄청 탈진해서 겨우겨우 기어나오던데요!”

사실대로 말했다간 일이 더 귀찮아질 게 눈에 훤했다. 들어갔다 나왔는데 멀쩡하게 나왔다면 실패한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대체 어떻게 한 거냐며 한동안 저 집주인 대신 나를 귀찮게 할 게 분명했다. 옆에 앉은 마법사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집도 원래는 결계가 없었는데 저번에 다른 데서 온 마법사들이 한꺼번에 온 적이 있었어요. 그 이후부터 결계가 생겨났고 소문이 이상하게 퍼져서 결계 통과하는 걸 도전하러 온 마법사들이 많아졌어요. 거기다가 마녀들도 오기 시작했는데 하나같이 탈진해서 기어나오거나 어디 한 군데 크게 다쳐서 나왔어요.”


“일단 전 들어가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가까이에 마을이 있는데 어째서 숲에 집을 지었는지 궁금하군요.”

“제가 이 마을로 이사오기 전부터 있었으니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멀쩡히 나오셔서 다행이에요.”


그 뒤로 조금 더 말하는가 싶더니 창문 밖이 어두워진 걸 보고 이만 가봐야겠다며 쉼터를 떠났다. 이제 알만한 건 다 알았지만 결국 원점이었다. 애초에 쉽게 풀릴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급적이면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싶진 않았다. 이사를 간다해도 일시적이고 언젠가 또 뒤를 밟는 북도가 나타날지도 몰랐다.

해가 땅 아래로 사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꽤 걸린데다가 아까 마법을 파훼하느라 쓴 마력이 꽤 있어서 바로 방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의외라면 의외인 상황을 맞이했다.


“여기 있었군.”

난데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봤던 목소리를 지닌 마법사가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만 들어보고 얼굴 한 번 안 봤던 마법사가 들어왔다. 분명 문은 잠궈뒀고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손에 열쇠가 쥐여져있는 걸 보면 쉼터 주인이 예비 열쇠를 준 모양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무례함은 숨과 마찬가지인가? 아주 자연스럽게 무례한 짓들을 저지르는군.”


“해가 이미 저물어버렸고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게 더 무례한 거라 생각해서 아침에서야 뒤따라 왔다. 어떻게 내 마법을 부쉈지?”

“내가 지적하는 무례함은 지금 이렇게 마법사가 뻔히 머무는 방문을 문도 두드리지 않고 열어버린 것과 어제 얼굴은 물론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목에 공격마법을 들이댄 것일세. 그리고 마법은 파훼법이 훤히 보이길래 부쉈네만.”


“워낙 시달리는 일이 많았고 지금은 굉장히 급해서 이렇게 다짜고짜 들어왔다. 정말 급한 일이니 찾아왔다 아니 찾아왔어.”


어제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 마법사의 말투는 정말 오락가락했다. 어제는 존댓말과 반말이 섞였지만 그동안 쌓인 게 많구나 싶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오늘은 존댓말 없이 어딘가 권위적인데다가 난데없는 친근감까지 덧붙이려 하는 말투였다. 거기다 뻔뻔하기까지한 이 두서없는 마법사는 잠깐이지만 내 정신을 빼놓는데에 성공했다.


“세상의 멸망에 대해 알고 있...어?”


두서없는 마법사의 난데없는 말은 내 정신을 다시 돌려놓기도 했다. 눌려있던 짜증과 함께 마력을 손에 담아 튕겼다. 마력에 떠밀려 흔들리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문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다시 회수하면서 문을 닫고 마법으로 단단히 잠갔다. 

제대로 풀리지 않은 짜증이 가라앉은 건 나갈 준비를 전부 다 마쳤을 때였다. 그제야 머릿속이 조금 정리가 되면서 아까 전 들이닥쳤던 마법사의 인상착의가 떠올랐다. 지붕이 파란색이어서 파란머리집인가 싶었더니 집주인의 머리색도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를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또 보게 됐다.


“드디어 나왔군요.”

내 표정은 굳이 거울을 안 봐도 좋지 않을 게 훤했다. 게다가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존댓말로 바뀌어있는 데다가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상한 말들만 한 것과 어제의 무례함에 사과드릴게요. 그러니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말투 외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군. 그리고 난 그다지 어울리고 싶지 않네만.”


“급한 일이라 그럽니다. 제 결계마법에 대한 모든 이론식과 마법진 설계도를 드릴테니 어떻게 부순 건지 말해요.”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지만 얼핏 구조만 봐도 엄청난 마력이 들어가는 게 눈에 훤하더군. 조금이라도 마력을 밀어넣어 그 흐름을 어긋나게 하니 부숴질 수밖에 없었지. 어차피 마력량이 부족해 못 쓰는 마법이라 관심 없으니 됐네.”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는 의미로 자리를 떴다. 다행히 뒤따라오진 않는지 발소리도 불러세우는 목소리도 없었다. 쉼터의 주인에게 열쇠를 돌려주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이구 엄청 쏟아지네. 지금 나가시려고요?”


그렇다고 하니 쉼터의 주인이 시기가 비올 시기라 당분간 비가 계속 쏟아졌다가 그쳤다를 반복할 거라고 한다. 땅이 마를 새도 없이 계속 질퍽거려 이동하기 불편할 거라는 충고와 함께 말하길


“비가 마지막으로 내릴 때 바다꽃들이 씨앗을 뿌릴 거예요. 그거 보고 가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째서 다른 마법사에게 제 방 열쇠를 준겁니까?”


“용사님이랑 아는 사이 아니였어요?”


그 마법사의 이름이 용사인 듯 싶었다. 아니라고 하니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한 후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듣는 도중 든 생각은 이 마을 마법사들은 전부 난데없으면서 용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걸 즐기는 건가였다.

쉼터의 주인이 말해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용사는 적어도 이 마을에 있어서 제일 특별하면서 축복받은 마법사라는 얘기였다. 자세한 업적은 말할 수 없다고 딱 잘라냈지만 이미 결계 마법에서부터 그 능력이 짐작이 가니 저 눈에서 보이는 존경, 동경, 기대들이 납득은 됐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용사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에요. 다른 마을 마법사분들도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자세히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까?”

“오래전부터 지켜져온 약속이에요. 저뿐만이 아니라 이 마을 마법사들이 모두 약속한 거예요.”


바로 저 맹목적인 태도였다. 애초에 이유를 말하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예전에 본 신이라는 걸 믿는 마법사들을 보는 기분이 들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실체가 없는 걸 믿었지만 용사는 실제로 존재하는 마법사였다. 모든 마을 마법사들의 맹목적인 태도가 쉼터의 주인과 같다면 이 마을에 머무르는 건 고려를 해봐야할 것 같았다. 다른 마을 마법사들도 그들처럼 알아줬으면 한다는 말을 봤을 때 강요할 가능성도 배재할 순 없었다.

하루정도 더 머물고 만약 자신들처럼 용사를 대하라거나 그와 비슷한 말이나 행동을 보인다면 그 즉시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비에 젖는 걸 하루종일 막아내는 건 힘들겠지만 불편한 마을에 있는 건 사양이었다.


“아직 안 갔네.”


하지만 다시 눈앞에 나타난 이 마법사, 용사를 보고 지금 당장 떠나야할까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의미로 이렇게 단기간 내에 같이 있기 싫어진 마법사는 GM 이후로 처음이었다. 고민이 끝난 건 갑자기 용사가 종이뭉치를 꺼내 내게 건넸을 때였다.


“뭔가?”


“아까 말하지 않았어? 이론식이랑 마법진 설계도야.”


“그건 봐도 아네만. 자네도 아까 듣지 않았나? 관심 없다고.”


“없는 것보단 낫잖아?”

“때론 없어서 편한 게 있네.”

결국 포기한 건지 돌아오는 말이 없다. 더 할말이 없는 나는 다시 짐을 챙겨들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미안해.”

날아오는 사과가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의도인지 훤해 뒤돌지 않고 그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지금 비가 안 왔다면 진즉에 떠났을 텐데 이번 운은 찾는 데를 한 번에 찾아낸 걸로 끝인 듯 싶었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비는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 내내 내릴테고 그 사이에 그치는 것도 잠깐이었다.

태도변화가 이상하고 더 이상 상대하기 싫은 마법사와 그를 맹목적으로 떠받치는 이 마을에 굳이 남아있어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 이유들 때문에 저 쏟아지는 비를 막고 지금도 질척거릴 땅을 밟으며 무리하게 떠나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후자가 더 귀찮았다.

그의 태도를 봤을 때 포기하고 물러날 것 같진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내 호의를 끌어내고 싶어하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해가 가장 높이 뜰 시간인데도 짙은 비구름에 하늘이 어두웠다. 마찬가지로 짙은 땅을 보며 부디 이곳에 있는 동안 저 비와 땅보다 귀찮아지지 않기를 바랐다.


챙겨온 책을 읽으면서 어제를 보내고 쉼터 한 구석에 있는 책장에서 혹시 본 적 없는 책이 있을까 살펴보는 걸로 오늘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의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파란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의 효력은 오늘까지였던 건지 바로 다음날 다 읽은 책들을 다시 갖다놓기 위해 모두 챙겨들고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상황이 펼쳐졌다.


“...지금 상황에서 조금 뜬금없지만 궁금하니 바로 물어보겠네. 대체 그 안경은 무슨 의미인가?”


“안경을 쓰면 머리가 더 잘 돌아가거든, 생각도 많아지고. 그리고 다시 사과하러 왔어. 미안해.”

일단 의미 모를 안경에 대해선 궁금함이 풀렸다. 하지만


“혹시 주위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하나라도 오지 않았나?”

미안하다면서 밖으로 못 나오게 비키지도 않고 서 있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나가게 비키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돌아오는 말이 있었다.


“사실 그동안 제대로 사과를 해본 적이 없었다.”


덩달아 안경까지 벗고서 그렇게 말한다. 안경을 벗으니 말투가 또 변했다. 이건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과는 별개가 아닌가.


“그래서 어떻게 해야 사과를 받아줄 수 있나 싶어서 직접 물어보러 왔다.”


“...할말이 많으면 오히려 뭘 먼저 해야할지 고민이 들어 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걸 이렇게 느끼는군. 그 전에 묻겠네, 왜 굳이 사과를 받아들였으면 하는 거지? 내가 자네의 사과를 받든 안 받든 나는 이 마을 마법사가 아니니 상관없지 않나?”


그러자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더니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줄 정도로 용서를 구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 말에 그의 첫인상이 조금 무너졌다. 한순간이지만 머리가 멍해진 건 사실이었고 확인 반 진심 반으로 말을 꺼내봤다.


“내가 자네의 사과를 받는 건 자네가 더 이상 이렇게 날 찾아오지 않을 때일세.”


그 말에 용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나를 잠깐동안 쳐다보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쯤 나 또한 방을 나와 읽은 책들을 고쳐들고 책장이 있는 데로 갔다. 책들을 제자리에 전부 꽂은 후 천천히 더 읽을 책들을 찾아 더듬었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책장 모서리의 흠집난 부분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이렇게 첫인상이 빠르게 무너지는 건 꽤 오랜만에 느꼈다.

말투도 그렇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행동 자체가 왔다갔다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걸 빼고서 생각해도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느닷없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었고 뭔지를 모르겠다는 게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책장 앞에 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걸 느끼고 돌아보니 다른 것들보다 확연히 두꺼워보이는 책을 내게 내미는 쉼터의 주인이 있었다. 읽을 책이 없어 망설이는 걸로 보였던 건가 싶었는데


“용사님께서 전해주라고 하셨거든요. 이 책 찾고 있던 거 맞죠?”


아무래도 용사라는 마법사는 정말 말 그대로 날 찾아오지 않을 생각인 듯 싶었다. 그러니까 본인은 오지 않고 이렇게 다른 마법사를 통해 소통을 하겠다는 거였다. 이 얄팍한 말장난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지만 쉼터의 주인은 바빴던 건지 책을 넘기며 뛰다시피 어디론가 뛰어갔고 책을 꽂기엔 책들 사이 군데군데 빈 공간이 많았지만 책 자체가 두꺼워서 끼울 수 없었다. 애초에 끼워놔도 나중에 정리하러 올 쉼터의 주인이 다시 책을 갖다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나중에 쉼터의 주인을 통해서 다시 돌려주거나 안 받으면 숲에다가 던져둘 생각으로 저 멀리 놔둔 뒤에 책장에서 꺼낸 책들을 펼쳤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놔둔 그 책을 다시 가져와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 책장에서 가져온 책들은 예전에 만들어진 거라 표지만 바뀌고 내용이 같은, 이미 읽었던 책들과 읽다보니 점점 흥미가 사라지는 책들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책장에 책들이 얼마 없어서 지금 가져온 것들이 안 읽었던 책들이라 새로운 걸 가져온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 읽기로 했다. 선택지가 별로 없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지가 처음보는 색조합과 그림인 책인 걸로 보아 적게 뽑거나 마을 서점에서 많이 팔지 않는 책인가 했는데 내용을 보니 왜곡 현상이 일어난 장소를 관찰하는 개인 일지였다. 출판을 생각한 건지 꽤나 다듬은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종이를 세 번 정도 넘겼을 때 쯤 감상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책을 열심히 읽어서 그런지 마지막 쪽을 넘기고 딱딱한 표지가 다시 만져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뻐근한 목을 뒤로 살짝 젖히니 빗물이 잔뜩 흘러내리고 있는 창문이 보였다. 그런데 빗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비가 그쳤군.”


창문을 열자 그 위로 고여있던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걸 제외하면 내리는 건 없었다. 잠깐 멈춘 건지 하늘은 여전히 구름으로 어두웠고 땅 위엔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묘할 정도로 적절한 때에 비가 그쳤다.

제대로 확인할 것도 있었으니 방금 다 읽은 책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땅은 당연하게도 질척거렸지만 비가 안 내리고 있으니 그나마 괜찮았다. 마을을 나와 숲으로 들어가니 군데군데 튀어나온 나무뿌리들에 물기가 가득해 미끄러웠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집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직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책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이 있었고 그 가운데 작은 탁자가 놓여있었다. 다른 점이라곤 탁자 너머에 집주인이 앉아있다는 거였다.


“안녕?”

안경을 쓴 채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마침 여기 책들이 많이 있고 마침 밖에 비도 와.”

뒤를 돌아보니 열린 문 너머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는 물론이고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 없었는데 잠깐 그치기 전보다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보니 집주인이 어두운 밤중에 불 없이 길이 보이게 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선 말하길

“이걸로 용서해주면 안될까나?”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들고 있던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대로 그 집에서 나왔다. 찾아오지 말랬더니 수작이나 부리고 있었다. 방수막을 만들어 비를 막아내면서 쉼터에 도착했고 즉시 짐을 싸 떠날 준비를 마쳤다. 준비만 마쳤다.


“...비가 원래 이렇게 많이 내립니까?”


“그렇진 않지만 몇 번 이렇게 많이 내리는 때가 있었어요.”


자칫하면 창문은 깨지고 지붕은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센 비였다. 쉼터의 주인도 걱정이 됐는지 지붕 먼저 확인하러 갔다. 저 정도면 방수막이 다음 마을까지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보통 하루 길면 이틀에 적당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빗줄기는 사흘 째 되는 날에도 여전히 굵고 많이 내렸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한 일은 쉼터의 주인이 전해주는 책을 읽는 거였다. 이쯤되니 자주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쉼터의 주인도 내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 건지 책을 건네줄 때 먼저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대부분이 책 주인의 이야기였다.

이 마을 마법사들이 곤란에 빠지거나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질 때마다 도와줬다는 내용이었는데 듣다보니 무용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곤란과 문제가 외부 혹은 소환마법으로 나타난 위험 생물이었고 전부 싸워서 승리하고 내쫓았다는 식으로 끝났으니.


“어쩐지 일관적이고 끝이 없군요.”


“하하 그럴 수밖에 없지만요.”

그렇게 말하던 쉼터의 주인은 실수로 말한 건지 깜짝 놀라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묘한 말에 가득 깔린 의심에서 의아함이 올라왔지만 곧바로 신경을 껐다. 사실 일부러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기도 했다. 듣고 싶지 않다며 잘라내기엔 쉼터의 주인은 통상적인 의미로 친절했고 비가 내리는 시기가 끝날 때까지 이 쉼터에서 시간을 보내야하니 당연한 얘기지만 괜히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저번에도 물었지만 정말 용사님이랑 아는 사이 아니세요?”

“아닙니다.”


미심쩍다는 눈빛이 책과 나를 향해 번갈아가며 날아오지만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났고 또 건네진 책을 받아 방으로 돌아가 읽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니 드디어 빗줄기가 눈에 띄게 얇아졌다. 즉시 준비해논 짐들을 메고 책을 챙겨든 후 밖으로 나와 다시 그 집으로 향했다. 이유가 어찌됐든 전해주는 책들을 전부 읽었으니 그 책값으로 무슨 말을 할지 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비가 왜 많이 내리나 했더니...”


숲으로 들어오니 저 멀리 비를 부르는 달팽이 무리가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가 숲이라고 해도 바닷가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고 바다꽃이 피기 위해 어딘가로 바닷물이 흘러들어올 텐데 어떻게 비달팽이가 여기 있을 수 있지?


“...!...젠...!!...아...!”

빗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진 않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날뛰고 있었다. 마침 만나야했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자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군.”


이 숲의 나무보다 조금 작고 저기 선 마법사의 두 배만큼 큰 비달팽이가 있었다. 거대화 마법으로 커진 물건들은 자주 봤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커 마법사는 물론이고 생물에게 쓰는 경우가 없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만만치 않군! 허나 나 또한 물러나진 않을 거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말을 직접 들으니 놀랍게도 저 용사라는 마법사에 대해 감이 잡혔다. 정직하고 자기가 옳다 싶은 전사. 일단 이건 안경을 끼지 않았을 때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납득가는 부분들이 꽤 많았다. 진짜로 그런 성격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지만 쉼터의 주인 같은 반응을 생각해보면 그런 성격이 형성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게 먼저일진 모르겠지만 일단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성격과 반응이 만들어지게 영향을 주고 있는 건 확실해보였다.

커다란 비달팽이는 거대화 마법만 걸려있는 게 아닌지 지금 본 것만해도 8개는 될 법한 공격마법들을 맞았는데 휘청거리기만 할 뿐 굉장히 멀쩡해보였다. 그러자 공격하던 그는 마법 뿐만 아니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긴 칼을 들고 휘두르기까지 했는데 그 순간 비달팽이가 크게 더듬이를 휘둘렀다.


“...다 젖을 뻔 했군.”

비가 폭포처럼 단숨에 쏟아져내렸다. 일단 나는 방수막이 아슬아슬하게 버텨줘서 젖진 않았지만 방수막은 물론 얇은 비막이도 안 걸친 채 공격만 하고 있던 저 마법사는 당연하게도 그 비를 몽땅 맞아 쓰러졌다. 책을 돌려줘야하는 입장이고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으니 저 비달팽이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지만 마법이 잘 듣지 않는 걸 보니 무슨 마법을 걸어도 마력 낭비일 게 훤해 실을 붙여놓기만 했다. 기절한 건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그를 업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으으...”


그가 일어난 건 도착한 후 업느라 젖은 망토를 벗고 있을 때였다. 주위가 파악이 안 된 건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에 난 짧게 대답했다.


“책값.”


“괴물...괴물은 어떻게 됐지?”


“자네가 말하는 괴물이 그 커다란 비달팽이라면 멀쩡하게 저 숲에서 돌아다니고 있네만.”


다급한 얼굴로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적이더니 뜬금없이 손에 안경이 나타났다. 그걸 쓰고 조금 진정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던 그는 한숨을 쉬듯 숨을 내쉰 후에야 말을 꺼냈다.


“여전히 내가 못마땅할테고 뜬금없겠지만 미안해. 도와줘.”

“본인도 뜬금없다는 걸 아주 잘 아는 것 같아서 더 말은 안 하겠네. 그 비달팽이 때문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껄끄러움과 불쾌감, 짜증을 전부 덮어두고 상황을 정리해봤다. 내리는 걸 넘어서 폭포 아래에 잠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비달팽이 무리, 커다란 비달팽이.


“해결할 때까지 이 집 책을 읽겠네.”


“책뿐만 아니라 여기서 지내는 게 어때?”


“그건 됐네.”


상황이 감정을 누르고 호기심이 감정을 지웠다.

우선 이게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듣자하니 특징을 가지게 된 마력이 고이는 특성을 띄어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요약을 하자면 이 숲은 마력이 고이기 쉬운 구조를 띄고 있고 장미 씨앗만큼은 아니지만 특징을 가진 마력이 그렇게 고이고 뭉쳐져서 형태를 띄게 되었는데 그걸 먹은 게 바로 아까 본 커다란 비달팽이다 이거군.”


“이해가 빠르네.”


“이해 못할 부분이 없잖나.”


“마을 마법사들은 못 알아들어서 말이야.”


특정분야의 전문용어들을 써대는데 그쪽에 발 들여본 적 없는 일반 마법사가 퍽이나 알아듣겠군.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담아 누르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하나.


“일단 비달팽이가 그 마력을 토해내게 해야겠군.”


“왜 굳이? 쓰러뜨리면 되잖아.”


쓰러뜨린다의 뜻은 상대를 서 있는 상태에서 누운 상태로 만든다는 뜻과 아니면 죽여서 없앤다는 뜻 이 두가지가 있다. 그리고 저 말은 아무리 되씹어봐도 후자의 뜻 같았다. 기절하기 전에 그 커다란 비달팽이에게 각종 공격마법과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를 긴 칼을 휘둘러 댄 걸 보면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문득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무용담.


“쉼터의 주인에게 자네의 무용담을 들은 적이 있지. 혹시 상대한 녀석들 전부 이 숲에서 고인 마력을 먹은 건가?”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너 진짜 머리 좋구나.”


아무래도 상대를 보는 기준이 저기 있는 마을, 그러니까 일반 마법사들인 듯 싶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기준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비달팽이도 그렇고 외부에서 온 녀석들이 많을 텐데 어떻게 왔는지 조사도 안 하고 그냥 다 죽인 건가?”

“고이고 뭉친 마력에 홀려서 오는 거야. 조사라고 할 것도 없지.”


“소환생물은?”

“마을 마법사들이 시험삼아 하다가 나타난 거.”


“협조성이 최악인 걸 넘어서 앞일을 생각도 안 하는군.”


“협조?”

“숲이 바로 옆에 있으니 자네만의 문제가 아닐텐데 같이 해결하기는커녕 마력에 홀릴 생물들을 그것도 꼭 필요한 게 아니라 시험삼아 소환하다니”


정정한다. 당연한 기준이 아니었다.


“너도 마찬가지지만 이 마을도 답이 없군.”

답이 없다는 말에 충격받았는지 입매를 굳히던 대화상대는 뜻모를 한숨을 내쉬더니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용사다. 너는?”


“패치.”


이렇게 나는 이번 사태의 도움과 책값으로 용사와 거래를 했다.

일단 확실한 걸 우선시 했기 때문에 어째서 쓰러뜨리는 방식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세히 생각은 안 해봤어.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거든. 물론 겨우 이런 이유로 네가 납득을 안 할 것 같으니까 일단 내가 알아낸 것들을 말할게.”

특성을 지닌 마력은 한 번 생명체를 거쳤으니 생명체가 죽으면 본래 지니고 있던 마력과 함께 자연으로 흩어진다는 거였다. 확실하고 깔끔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아직 의문점은 많이 남았다.


“혹시 생물들의 탐지 능력이 마법사보다 뛰어난가?”


“특성을 지닌데다 뭉쳤다해도 결국엔 자연적인 마력이니까 민감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못 찾아.”


“숲 안이라면 뭉친 마력이 나타나는 장소는 무작위인가?”


“응.”


운이 좋아서 먼저 발견하는 게 아닌 이상 쓰러뜨리는 게 당시 상황을 보자면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숲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영원히 반복하게 될 일이기도 해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비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구조를 바꾸겠다고 숲 자체를 뒤집어 엎는다면 모를까. 하지만 거기까진 내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럼 그 비달팽이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눠봐야겠군. 마법이 안 통했지만 마법을 잔뜩 날려댄 걸 보면 그 비달팽이 이전의 생물들은 마법이 통했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용사는 뭔가 기분이 좋은 듯이 웃으면서 아까보다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마력이 뭉치게 된 원인인 특성 그 자체 때문인데 그 마력을 먹게 된 생물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많으면 세 가지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 비달팽이가 가지게 된 특성은 거대화와 마법저항이었다.


“그래서 그 칼을 꺼낸 거였군. 아쉽게도 비달팽이가 더 빨랐지만.”


“단순한 칼이 아니라 용검이다.”


“일단 나는 모르는 게 당연하니 더 설명할 생각은 말게 이 대화의 목표가 흐려질...안경은 또 언제 벗었나?”


“방금.”


당당하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이 저번에 마주했을 때와 조금 달랐다. 처음엔 무언가에 대해 놀라거나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면 이번엔 나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하는 눈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에게 원하는 거나 듣고 싶은 게 있고 그걸 이미 방으로 다짜고짜 처들어온다던지, 책을 보내는 행동으로 많이 보여줬었다.

다시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고 저렇게 대놓고 탐색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저 아래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상대를 파악하려고 탐색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도 적당선을 지키는 편이었다. 저건 손만 안 움직였지 마법사를 풀처럼 뽑으면서 이리저리 헤집는 태도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만나 얘기하지.”


“왜 여기서 머물지 않고 나가려는 거지? 여기서 지내면서 괴물을 상대하는 게 더 편할텐데.”

“다른 모든 게 불편하니까.”


비구름 때문에 어둑한 숲이 해가 지기 시작하니 깜깜해졌다. 뒤에서 길도 안 보이고 비도 와서 위험하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지내야겠네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나왔다. 동그란 빛을 만들어내 띄우니 앞이 환해져 길이 보였다. 발 아래에서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다가 멀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여유를 주지 않고 길을 따라 숲을 나왔다.

쉼터의 주인은 잠시 어디 나갔다 온 줄 안 건지 왜 짐가방을 메고 있냐 물었다. 아무 말 않고 그 옆에 꽂아놨던 열쇠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의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는 걸 들으면서 여전히 난데없는 하루를 끝냈다.


일이 빨리 끝났으면 싶었지만 물길은 원하는대로 흐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세 가지인 것 같은데.”


이 숲은 그리 넓지 않았다. 숲이 넓다고 해도 그 정도 크기의 비달팽이라면 당연히 멀리서도 눈에 띌 텐데 등껍질은 물론 더듬이도 보이지 않았다. 발견한 거라곤 커다란 덩치에 짓눌린듯한 식물들의 흔적과 어제 얼핏 봤던 정상 크기의 비달팽이 무리였다. 


“투명화라고 하기엔 흔적에서 만져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네만. 숲 밖으로 나가버린 게 아닌가?”


“아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력을 먹은 생물들은 적어도 한 달동안 이 숲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아. 확실히 이 숲에 있어.”


용사는 확실히 외부활동을 사렸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이 숲을 이렇게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마을 마법사들의 입을 막지 않았던 건 내가 느낀 대로 그다지 현실성이 없어보이는 무용담처럼 말해서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음?”


“이것들은 왜 가져온 거야?”


용사가 가리킨 건 열 마리의 비달팽이 무리였다.


“원래라면 비달팽이는 바닷가가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없네 그러니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커다란 녀석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데려왔네만.”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비달팽이가 그리 신기한지 쉽게 눈을 떼지 못하길래 손을 바로 앞으로 가져가 똑똑 책상을 두드렸다.


“집중하게. 아무리 신기해도 일단 녀석을 잡아야하는 게 우선이잖나.”


“...잠깐 생각중이었어.”


안경을 고쳐쓰며 비달팽이들에게 눈을 뗀 용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 종이를 가져와 펼치고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는 얼마 안 가 숲의 지도가 되어있었다.


“일단 찾아내는 게 우선이야. 집은 여기 한 가운데고 결계마법이 작동하는 건 집 주위로 열 걸음.”


“딱 하얀잎나무와 각진나무가 심어진 데까지군. 일단 나는 마을에서부터 찾아봤으니 여기쯤엔 없었네.”


“여기 있는 새에 왔을지도 몰라.”


그렇게 한가운데에 있는 집을 기준으로 선을 그어 반으로 나눈 숲의 영역중 윗부분은 내가 가보기로 했다. 출발 시간은 내가 책을 세권을 읽은 후로 정했고 용사는 그동안 방에 들어가 있겠다면서 다 읽으면 부르라고 했다. 옆에 앉아서 어제처럼 헤집듯이 탐색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꿍꿍이가 있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권을 다 읽을 때까지 용사는 나오지 않았고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넣은 후 방문을 두드리니 다 읽었냐며 나왔다.


“읽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네?”

“일부러 빨리 읽었네만. 녀석을 빨리 찾아야하지 않나.”


안경 알이 두꺼워 눈은 안 보이지만 입매가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일그러지나 싶더니 지도를 내민다.


“난 길을 잘 알지만 넌 모를테니까.”


“고맙네.”


감사인사를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용사를 뒤로 하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감정과 상황을 별개로 봐야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 꺼낸 감사인사였고 불편한 건 맞기 때문에 먼저 뜬 자리였다.

안 그래도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인데 비달팽이 때문에 잠깐이라도 그치는 때가 없었다. 신발에 미리 방수 및 미끄럼방지 처리를 했지만 오래가진 못해 빠른 걸음으로 숲을 돌아다녔다. 지나간 흔적을 따라가니 어딘가에서 갑자기 끊기거나 전혀 다른 곳에서 다시 발견되기를 두어번 반복했을 때쯤 지도에 표시된 영역을 다 돌았다. 비와 나무 때문에 시야가 제한 되는 걸 감안하더라도 없는 건 확실했다. 더 찾는 걸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니 먼저 온 건지 용사가 집 앞에 서 있었다.


“찾았나?”

“아니. 흔적만 뚝뚝 끊겨있었다.”

비 때문인지 안경을 벗고 있는 용사가 각진나무 밑동을 발로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용사가 돌아다닌 영역에도 흔적이 뚝뚝 끊겨있었고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확실한 건 세 번째 특성은 투명화가 아니라는 걸세.”


“곳곳에 흔적이 끊겼다가 다시 나타나는 걸 보면 순간이동 같은데...”


그렇다면 일이 귀찮아도 보통 귀찮아진 게 아니었다. 마법저항에다가 순간이동이라니 정말 끔찍한 조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아예 이 마을에 눌러 살게 될지도 몰랐다. 만약 일주일 내로 녀석을 잡지 못한다면 며칠 내내 비에 쫄딱 젖은 채로 걷는다 해도 떠날 생각이었다.


“곳곳에 함정을 설치해야겠군.”

“숲이 훼손되는 건 곤란해.”


“그정도로 강한 함정을 설치할 생각은 없네만.”

그 뒤로 그래도 안 된다, 그럼 이대로 흔적만 졸졸 쫓아다닐 거냐 실랑이한 끝에 나무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 충격파를 일으켜 신호를 보내는 함정을 설치하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충격파가 비달팽이의 움직임을 잡을 지도 몰랐다.


“단, 바다꽃들이 있는 데는 안 돼.”


“그건 당연하지만 그 전에 그 비달팽이가 바다꽃밭에 가지 않길 바라야하지 않나.”


그렇게 우리가 해야할 일에 일정시간마다는 물론 그 외 시간이 날 때마다 바다꽃밭을 살펴보러 가는 일도 추가됐다. 곳곳에 충격파 함정을 만드는데 반나절이 걸리고 곳곳에 설치하는데 하루가 걸렸다. 늦은 밤에 돌아오는 나를 쉼터의 주인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물어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포기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숲을 한바퀴 돌고 바다꽃밭으로 올 때 이상한 점을 느꼈다. 짓눌린 풀들은 다시 원래대로 일어나 제 모습으로 돌아가고 동시에 녀석의 흔적이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여기까진 자연스러웠다.


“왔구나.”


“흔적이 더 늘어나지 않는 거, 자네도 눈치챘나.”


“그래.”


“순간이동도 아닌 것 같네만.”


아무리 순간이동이어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흔적이 발견되기는커녕 원래 있던 흔적도 지금 사라지고 있는 중이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애먹이는 녀석은 참 오랜만이다 싶은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무언가 요란하게 부숴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무언가 날아오는 게 있었다. 반사적으로 잡아채니 익숙한 질감이 느껴졌다.


“...책?”


분명 용사의 집에 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이게 왜 날아온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책들이 비와 함께 내리고 있었다. 이 책들이 있어야할 용사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거기 있는 건


“...거대화가 아니라 크기조절이었군.”


용사는 바로 뛰어갔고 나는 그대로 흩어진 책들을 찾으러 자리를 떴다. 책들이 함정 위로 떨어졌는지 마력이 담긴 충격파가 곳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열심히 작동하는 함정들 덕분에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었다.

책을 열 권쯤 찾아냈을 때 저 멀리 나무보다 높게 솟은 더듬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나 싶더니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어쩐지 그동안 헛짓거리를 한 것 같아 허탈한 느낌이 들었지만 젖은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책들을 보니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책들은 하나하나 훼손방지 마법이 있는 건지 구겨진 부분도 없이 멀쩡했다. 그렇게 제법 모았다고 생각했을 때 쯤 바다꽃밭으로 가니 흙투성이가 된 용사가 먼저 와 있었다.


“잡았나?”


“응.”


“날아간 책들은 일단 보이고 함정에 떨어진 대로 주워왔네만.”

“나머지는 집 근처에 있어.”


커다란 비달팽이도 쓰러뜨렸으니 이제 가도 되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바다꽃들의 꽃잎이 일제히 하얗게 변하며 오므려졌다.


“원래는 날이 좀 더 지나야 하는데 그동안 비가 쉬지도 않고 내려서 시기가 앞당겨졌군.”


“그러고보니 비가 그쳤네.”


비가 그친 걸 깨닫고 바다꽃들을 지켜봤다. 오므려진 바다꽃잎들은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자 터지듯이 펼쳐지면서 바람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듯 바람 속에서 흔들리던 하얀 꽃잎들은 다시 투명해지면서 물처럼 일렁이기 시작했고 때마침 햇빛이 내려와 꽃잎들에 반짝임을 더했다.


“예전에도 봤지만 정말 장관일세.”


아주 어린날 책으로만 봤던 바다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짧은 여행을 하던 길이었다. 방수막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지겹도록 내린 비에 전부 젖은데다가 마을은 보이지 않아 한창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고 피곤함은 비를 맞은 만큼 쌓여있었던 상태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지겨운 비가 그칠 때쯤 저 멀리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마녀들도 뭉쳐있는 걸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갔었다.

왜 거기 뭉쳐있었는지 의아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쉼터가 있는 마을이 급했고 가장 가까워진 마법사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하던 순간 지금처럼 바다꽃이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아름다워 한순간 모든 생각이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마을 마법사들은 아쉽겠군 그래, 이 시기를 기다려왔을 텐데.”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서 의아했다. 반짝이는 바람에서 눈을 떼고 용사를 돌아보니 눈이 마주쳤다. 아니 눈이 마주친 건지 애매했다. 용사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굉장히 멍해보였다. 어쩐지 목 언저리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어 순간적으로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계속 책을 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용사에게 다가갔다.


“정신차리게. 아직 뒷수습할 게 많네.”


그 커다란 비달팽이를 물리적인 공격으로만 때려잡아야 했으니 지친 건 당연할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멍하니 서서 쉬기엔 뒷수습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가령 무너진 집 복구라던지.


“책들도 이게 전부가 맞는지 확인해야하네.”


용사는 그제야 정신차린 듯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커다랬던 녀석이 섞인 비달팽이 무리를 집으로 데려온 건 나였으니 이 뒷수습에 동참해야하는 건 당연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거래는 끝났으니 여기 계속 남는 건 사양이었다.


“오늘 안으로 마무리한다.”


책은 물론이고 손톱만한 지붕과 벽 파편을 전부 주워와 용사의 집을 원상태로 복구해놨지만 결국 지쳐서 쓰러지다시피 잠들어버려 오늘을 보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사의 집에서 자게된 나는 해가 뜨자마자 바로 나와 이 마을과 숲을 떠났다. 그동안 비를 잔뜩 내렸던 비달팽이 때문인지 다행스럽게도 가는 동안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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