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네.”
밤하늘은 다시 비구름으로 돌아왔고 바다꽃은 줄기만 남아있었다.
“돌아가지.”
좋아한다는 감정에도 어떤식으로 좋아하느냐, 그 감정의 깊이가 얼마나 깊고 얕으냐 같은 구분이 있다. 그 이후로 용사를 살펴본 결과 용사의 감정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관심과 나가질 못했으니 외부의 상식을 배움으로서 발생하는 동경 및 마법이론에 관해 대화가 통하는 상대. 그리고 이 모든 게 합쳐지니 한창 어릴 때 겪을 법한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뭉쳐졌다.
이를 어린시절의 첫사랑이라고들 하지만 상대가 사라지면 식어버리는 그런 좋아함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지만 일단 식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식어버리는 걸 전제로 생각했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감정이 어린 용사 본인은 감정만큼 어리지 않았고 머리가 좋았다. 그러니 저 대부분에 속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보니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각을 한다면 그 감정이 어떤식으로 변화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감정의 변화는 온전히 용사의 몫이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용사가 감정을 자각하든, 그 감정이 변화하든 결국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일이 끝나면 돌아갈 거고 편지를 주고받는 식의 교류를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정해놓은 선을 더 짙게 그어놨다.
선을 짙게 그었다고 해서 용사가 넘으려고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무자각에다가 무의식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선을 넘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에 나는 쉬는시간이 되면 바로 자리를 뜨는 행동을 추가했다. 용사는 나를 졸졸 쫓아오다가 어차피 내가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한다는 걸 깨닫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런 내 추가된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건 당사자인 용사가 아니라 갈색머리 마법사였다.
“왜 이젠 거리까지 둬요?”
“원래 뒀네만.”
“정정할게요. 왜 멀어지려고 해요?”
“선을 더 확실히 보여야할 필요성을 느꼈네.”
갈색머리 마법사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아무리 왜 그러냐고 말을 해도 애초에 내가 그은 선 자체부터 시작한 상황이었다. 뭐라 더 얘기를 하기엔 그 선부터 언급을 해야하니 물러난 듯 싶었다.
“이제 알아챘구만?”
“처음부터 저렇게 될 줄 알았습니까?”
“내가 키워본 애들만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딱보면 보이지!”
GM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지켜보고 있겠다는 의미가 강했다. 내 행동이 썩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GM도 그걸 아니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깔끔한 건 좋지만 칼 같은 건 때론 아프지.”
제재를 가하지 않는 대신 이렇게 경고를 꺼낸다. 경고 내용이 틀릴 게 없었지만 나는 지금 행동을 바꿀 생각이 없었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얼음 연못에도 햇빛이 내리는 법이야.”
그 말을 끝으로 GM은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말뜻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 말 그대로인 내용에 자연스럽게 눈이 가늘어졌다. 설령 내가 그어놓은 선 안으로 용사를 들인다해도 그게 내 감정이 용사와 같아진다는 건 아니었다. 용사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선을 그은 게 아니라 원래 그은 선을 더 짙게 그었을 뿐이다. 어째서 GM이 다른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을 남겼을까 의아했다.
“안 좋은 얘기라도 나눴어?”
“아니.”
“표정이 심각해.”
“생각할 게 있으니 이후로는 대답하지 않겠네.”
용사는 바로 입을 다물며 계속 나를 바라봤다. 안경으로도 가려진 그 시선이 진실을 깨달은 후엔 참 부담스럽게 느껴져 눈을 감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고 애초에 누군가에게 이런식의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될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가정도 해본 적 없는 이 상황은 참 당황스러우면서도 떠날 시간이 빠르게 왔으면 했다.
감정이라는 게 한순간에 사라지고 땅 위에 그린 그림을 문지르는 것처럼 바로 없애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이대로 용사가 자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원한다.
머리 좋은 용사라면 금방 알아챌지도 모르지만 감정을 처음 겪는 용사라면 이대로 흘러갈 것이다. 감정을 처음 겪는 용사가 우세하길 원한다.
“...드디어 완성했군.”
이번에 온 비 때문에 무너지는 영역이 넓어질 게 분명해 모두가 최대한의 속도를 낸 결과였다. 급하게 마무리가 되어서 어디 오류가 날 부분이 있나 검사 및 시험차 마력을 불어넣으니 다행히 마법진은 멀쩡하게 작동했다. 다만 마력을 기존에 계산한 것보다 더 불어넣어야했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선 내였다.
“모두 필요한 짐들을 챙기고 한 가운데로 모이세요!”
마을 자체를 옮기는 거지만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가장 안전한 마법진 가운데로 마을 마법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미리 짐을 준비한 마법사들은 빠른 시간내에 모두 모였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당신은 제가 본 마법사들 중에서 제일 냉정하고 매정해요.”
갈색머리 마법사가 용사의 감정을 눈치챈 건지 가운데로 가기 전에 나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담 내 행동 이유도 눈치챘다는 거였다.
“짐 챙기고 가운데로 가게.”
그렇지만 난 이에 대해 그와 얘기를 해야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상대는 아니었나보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선 긋고 밀어내고 떠나려고요?”
“그럼 내가 용사에게 가서 자넨 날 좋아하네라고 말해야하나?”
“적어도 밀어내는 이유는 말했어야죠.”
“그게 그거 아닌가. 그리고 이유를 말하면? 그 다음엔 내가 같은 감정이 될 일은 절대 없을테니 헛짓 그만하고 당장 접으라고 할까, 아님 같은 감정이 될 순 없지만 친분을 쌓는 건 괜찮다는 겉치레를 해야하나?”
화를 담아 쏘아보던 얼굴이 바로 아연해졌다. 과하게 말하긴 했지만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서 상대가 납득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오히려 감정을 이해해달라는 말만 돌아올 게 훤했고 애초에 난 부드럽게 말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 상황이 굉장히 피곤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한 몫했다.
“...정도 안 쌓여요? 아니 아예 없어요?”
귀찮은 걸 제외하면 대화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연락을 주고 받을 생각은 없지만 어쩌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인사를 하고 나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눌 정도라고 생각했다.
“없네.”
감정이 섞여드는 건 매우 피곤했다. 결국 인사도 나누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가는 걸로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를 붙잡는 손이 또 있었다.
“용사님이 책을 두고 가셨어요.”
그동안 매일 책을 들고오다시피 했던 용사가 쉼터에 책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평소같았으면 내가 일하는 걸 구경하러 왔을 용사가 다시 가져갔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어째선지 마법진이 완성된 오늘, 용사는 공중부양 마법만 유지시키기만 하고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법진에서 떠날 수 없는 마을 마법사인 쉼터의 주인은 용사를 찾아갈 수 없었다.
“전해주겠습니다.”
상황을 납득하고 책을 받아들었다. 쉼터의 주인도 가운데로 가는 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모두 위치로!”
각자의 위치로 가서 선 후 마력을 흘려넣자 마법진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공기의 흐름이 한순간에 마법진의 가운데로 집중됐다. 저 안쪽에서 불안함과 신기함이 섞인 웅성거림이 얼핏 들렸지만 곧바로 사라졌다. 흩뿌려놓은 고운 가루들이 바람에 따라 흘러사라지듯 기척들과 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두 다 사라진 후 일제히 손을 모아 박수를 한 번 치는 걸로 이주가 완료됐다.
“어으! 드디어 끝났네!”
“요 마법진은 우짤거예요? 다 뿌수고 가야하나?”
“냅둬도 땅이랑 같이 무너질테니까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
용도를 다 한 마법진의 처분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한 가운데 나는 GM을 찾았다. 용사에게 책을 돌려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얘기했다.
“고백받으러 가는 건감?”
“...방금 책을 돌려주러 간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런데 왜 그렇게 비장햌!”
이대로 붙잡혀서 놀림받으면 끝이 없겠단 생각에 바로 갔다오겠다 말한 후 숲으로 들어갔다. 여러번 왔다갔다했던 숲이지만 이번엔 용사가 잔상현상을 보여주기 위해 데려왔을 때를 빼곤 들어온 적이 없었다. 상황도 두 번째로 숲에 발을 딛을 때와 비슷했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지금은 비가 내리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빠르게 용사의 집에 도착한 나는 다섯 번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손에 든 책을 다시 제대로 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
용사의 수작은 이걸로 두 번째였다. 같은 방법으로 두 번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용사는 그림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너는 책 읽는 걸 좋아하지. 내가 아는 건 그것밖에 없고.”
빽빽하게 꽂힌 책들 중 딱 하나 비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용사는 그 옆에 서서 빈 부분을 손가락으로 딱딱 두드렸다.
“너에 대해 알고 싶다. 하지만 넌 기회 자체를 주지 않지.”
일부러 책을 두고 가서 나를 오게 만든 용사는 상대적으로 자주 쓰지 않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말투를 쓰고 있었다. 그 때와 다른 점이 하나 더 추가됐다.
“나와 얘기 좀 해보지 않겠어?”
지금 나를 오게 만든 용사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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