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픈 말이 뭔가?”

 

잠깐.”

 

용사는 다시 안경을 꺼내 썼다. 다시 쓸 거면 왜 벗어놨는지 모르겠다.

 

역시 얘기를 하려면 차분히 해야할 것 같아서. 어디까지 했지?”

 

아직 시작도 안 했네.”

 

말투와 행동은 굉장히 차분했지만 머릿속은 반대로 꽤 복잡한 상태인지 시작도 안한 대화 순서를 묻고 있는 것도 모자라 오늘도 그 때처럼 비가 온다길래 땅은 물론 하늘에 물 한 방울 없다고 정정해줬다.

 

그래,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말은...나는 너에게 배운 게 많아. 스승과 제자처럼 함께 책상에 앉아서 책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난 너에게 배운 게 많으면서 맞지.”

 

자네 말대로 스승과 제자 관계는 아니지만 맞네.”

 

그만큼 너는 아는 게 많고 내가 만나본 마법사들 중에서 제일 똑똑해.”

 

한숨처럼 숨을 내쉰 용사가 살짝 입꼬리를 씰룩였다.

 

나는 널 좋아해.”

 

고백이라기보단 확인하고자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똑똑한 넌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게 맞았다.

 

넌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네.”

 

그러니까 왜?”

 

말한다면 무엇이 달라지나? 나는 결국 마법진을 완성시켜 마을 마법사들의 이주를 완료하면 떠날 것이고 자넨 이 숲을 떠나지 않을텐데.”

 

결국 똑똑한 용사가 이겼다. 이대로 묻힌 채 사라지길 바랐건만 감정이 어리다고 해도 용사는 어른이었다. 자각하더라도 내가 떠난 후이길 기대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나는 책을 들어 품 속에 넣어놨던 변형 마법진 종이를 가리면서 꺼냈다.

 

떠난 이후엔? 연락하고 지낼 수 있잖아.”

 

애초에 내가 자네를 찾은 이유는 소식지 외의 우편물을 걸러내기 위해서였네.”

 

심심하지 않아?”

 

심심하다기 보단 외롭다는 표현이 올바른 걸세. 말상대가 있으면 좋지만 난 책이 더 좋네.”

 

왜 그렇게까지 관계를 끊어내려는 거지? 내가 널 좋아해서?”

 

그 말에 반사적으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자네의 감정에 상관없이 난 애초에 선을 그어놨고 자네의 감정은 그저 원래있던 그 선 위에 더 짙게 그어 보인 것뿐일세. 내 행동에 자네의 감정을 섞어 있지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게.”

 

내 대답이 어떻게 닿았을진 모르겠지만 용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쪽 입술을 깨물고 있어 일그러진 저 입매 뒤에 무슨 말들이 쌓였을지는 예상이 가지 않았지만 감정들은 어느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감정이 뭉쳐져서 단순해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그게 터져나올 때는 뭉친만큼 복잡하게 엉켜서 쉬이 풀지 못했다.

거부에 대한 억울함, 울분, 서러움, 분노 적어도 이 중에 하나는 있으리라.

 

그럼 이만 가보겠네.”

 

들어올 때 열어뒀던 문이 내 말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닫혔다.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기에 나는 꺼낸 종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긴급 순간이동을 시도했고 반은 성공했다. 설정해논 이동장소는 밖에 있는 마법진 근처였는데 이동하고 앞을 보니 나무들이 잔뜩 보이는 걸 보면 아직 숲이었다.

제대로 이동이 안 된 이유를 살펴보고자 돌을 두 개 주워 하나는 그냥 위로 던지고 다른 하나는 이동마법을 써보았다. 위로 던진 돌은 꽤 높이 올라가는 반면 이동마법으로 올려본 돌은 어느 부분에서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중간에 나타나 떨어지고 있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력이 남아도니 이런 정신나간 짓을 잘도 하는군.”

 

용사가 숲 전체에 방해결계를 쳐놨다. 그쪽도 마찬가지로 내 행동을 예상했던 건 그렇다 치더라도 보통 마법사 하나의 마력으론 집 하나도 겨우 될까말까인데 이렇게나 대규모에다가 틈도 거의 없다시피한 결계마법을 혼자서 하다니 그렇게나 고이고 쌓인 마력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렇게 마력이 많은 그에게도 한계가 있는 건지 물리적인 방해는 없었다. 쫓아와서 다시 잡기 전에 이대로 숲을 나간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 내가 아직 숲에 있다는 것 그 자체였다.

지도가 없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숲은 그야말로 용사의 마당 그 자체였다. 바다꽃밭만 제외하고 갑자기 나타난 회오리 바람이 숲의 모든 장소를 쓸어대기 시작하자 반사적으로 상쇄를 위한 공격마법을 날렸다. 이로 인해 내 위치가 노출되었고 이동마법 특유의 일그러짐이 느껴지자마자 나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겨 숨을 참은 채 대기했다.

 

일그러진 흔적이 두 개밖에 없는 걸 보면 근처에 있구나.”

 

다시 바람이 불었지만 방금 전의 회오리 바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바람 그 자체였지만 나무들이 뽑혀져 나가는 걸 보면 위력은 그냥 바람 수준이 아니었다. 헛웃음이 자연스럽게 터져나왔는데 바람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나무만 날렸지 그 뒤에 숨어있던 나에겐 타격이 없었던 점과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된 용사가 꺼낸 말이 한 몫했다.

 

아직 얘기는 안 끝났어.”

 

얘기가 끝나기 전에 자네는 아직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정리부터 해야할 것 같네만.”

 

정리하는 동안에 너는 떠나겠지.”

 

맞는 말이었다. 지금 나는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나는 널 좋아해. 그래서 너와 연락이라도 하고 싶어.”

 

알고 있네. 그리고 자네는 얘기가 아닌 그저 감정호소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게.”

 

좋아하기 때문에 나를 붙잡고 있고 그 감정 때문에 내가 그은 선을 넘고 싶어한다. 애초에 얘기를 통한 설득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받아들여주길 원하는 게 감정 그 자체인데 감정호소 외엔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너는 나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거야?”

 

각별한 감정은 없네.”

 

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 다른 마법사들보다 자주 옆에 있고 같이 책도 읽고 얘기도 나눴는데 왜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오늘 떠난 마을 마법사들은 나보다 더 자네와 오래 알고 지낸데다가 자네를 존경했고 지금도 그렇지. 그들의 존경을 받은 자네는 그들에게 같은 감정이 들던가?”

 

난 적어도 밀어내진 않았어!”

 

바람이 멈추는 걸 느꼈고 나는 한 마디만 했다.

 

그렇지만 별 감정은 없었겠지.”

 

눈을 감아 빛폭발을 일으킨 후 쓰러진 나무의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용사의 뒤쪽으로 이동시켰다. 먹먹해진 귀를 빛과 폭음 때문에 시야와 청각이 막힌 용사는 나뭇가지를 향해 마법들을 날려댔다. 마력을 먹거나 소환된 생물들과는 수도 없이 싸워왔겠지만 반대로 마법사들과 싸움은 물론이고 대련 한 번 해본 적은 없을 것 같다는 예상 하에 벌인 일이었다.

용사의 행동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예상이 들어맞았고 나는 즉시 뒤돌아 달렸다. 숲이 용사의 마당이라지만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는 내가 더 능숙했다. 용사는 주로 생물들을 붙잡거나 쓰러뜨리기 위해 주로 범위가 큰 마법을 사용하는 듯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이라 통하는 거였다.

범위가 큰 마법은 결계 분야를 제외하면 크기만큼 빈틈이 많았고 웬만한 교란이나 정교한 가짜수식으로 보완하지 않았다면 단순한 몸풀기 대련에서도 쓰이지 않는다.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단순히 특징을 지닌 마력을 삼킨 생물들만 상대해서 빈틈은 물론이고 가짜수식으로 범위 마법들을 보완했을 리가 없는 용사가 나를 잡기 위해 숲 전체를 뒤덮는 추적 및 통행 방해 마법을 써서 길을 막아도 간단한 방해 마법 하나만 쓰면 쉽게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되면 나가는 길만 찾으면 내가 이기는 상황이었다.

 

“..!....!!...!”

 

내용은 잘 안들리지만 뭐라 외치는 소리 자체가 들리는 걸 보면 거리를 안심할 정도로 벌리진 않은 것 같았다. 흙바닥에 찍힌 내 발자국을 복제해 곳곳에 퍼뜨리고 풀을 헤집고 지나간 흔적 또한 여러군데 남겨놨다. 이 가짜 흔적들이 용사의 발을 잡아주길 바라면서 꾸준히 짓눌러대는 범위 마법들을 없앴다.

조금 많이 뛰었다 싶었을 때 용사는 전략을 바꿨는지 계속 써대던 범위 마법을 그만두고 무차별 마법폭격을 시작했다. 마을 마법사들이 계속 근처 마을에 지냈다면 무너지는 나무들과 휩쓸려 날아가는 꽃과 풀들을 보고 굉장히 아까워하며 용사에게 그러지 말라고 당장 달려왔을테지만 이미 그들은 떠나버렸다. 마법진의 처분 때문에 남아있을 마법사들을 기대하기엔 마을 마법사들의 용사에 관한 무용담을 실컷 얘기했으니 힘들었고 GM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짜 뒷일은 전혀 생각도 안 하는군!”

 

비록 우연이긴 하지만 바람을 탄 바위가 바로 앞에 내던져지는 걸 보고 불안감을 느꼈다. 저 공격에 맞는 게 불안한 게 아니라 마력이 고일 정도로 특수한 이 숲이 이렇게나 뒤집어지면 그 뒤에 어떻게 될지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이렇게 뒷일 생각 안 하고 날뛰는 걸 보아하니 이대로 숲 밖으로 빠져나가도 용사가 나를 따라 밖으로 따라오진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졌다.

 

팔 다리 하나 날아가도 원망 말게!”

이건 날뛰고 있는 용사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하는 소리였다. 아무리 경험없어도 마력을 저렇게 때려붓는 상대와 맞붙으면 긁힌 상처나 멍드는 걸로 끝날 수가 없다. 날아오는 마법들과 휩쓸린 바위파편들을 역으로 되돌리는 걸로 시작해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되돌린 공격에 맞았는지 막았는지 날아오던 공격이 끊긴 것도 점시, 나무 사이로 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져왔고 방수막과 충격완화 마법을 두른 후 물살에 몸을 맡겼다. 꽤나 빠른 세기로 흘러온 터라 순식간에서 서 있던 자리에서 멀어졌지만 그 자리 바로 위 나무보다 높은 공중에 환상마법으로 내 모습을 만들어냈다. 용사가 마법을 멈추고 환상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용사에게 전격 마법을 날리고 흙들을 흩뿌려 모습을 가렸다.

 

별 감정은 없었겠다고?! 그래서 너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거겠지, 내가 그들에게처럼 너도 나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제법 가까워진 터라 목을 긁듯이 외쳐대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파란 가시들이 소환되어 내가 있는 곳 주변을 내리찍었다. 그 틈을 타 다시 한 번 전격 마법을 날린 후 땅에 꽂힌 가시를 발판 삼아 뛰어올라 먼저 날린 전격을 없애느라 뒤돌아 있는 용사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분명 체중을 실어 내리찍은 건데 용사는 기침도 안 터뜨리고 그대로 뒤돌아 내 팔을 잡았다.

 

그런데 그게 왜 내가 납득할 이유가 되지?”

 

안경을 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지금 용사의 표정에 평정은 없었다. 워낙 두꺼워서 눈은 물론이고 눈동자 색도 안 보이던 안경 너머로 초록불이 생생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안에서 불을 피우다못해 넘쳐흐르는 감정은 분노를 가장 앞세우고 서러움, 울분, 억울함을 한데 뭉친 것처럼 커다랗고 그 정도가 일관됐다.

용사의 감정이 가득 담긴 표정에 시선이 빼앗기는 동안 갑자기 주위의 풍경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용사가 나를 붙잡고 순간 이동을 했고 도착 장소는 바로 아까 탈출한 용사의 집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 그렇구나 그동안 즐거웠어 네 말대로 다신 보지 말자하고 그냥 보내줄줄 알았어? 주위 관계를 얄팍하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용사가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용사가 나를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원래부터 선을 그어놨고 뭐고를 떠나서 눈치챘으면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 다물고 덮어두려고 했다는 게 정말 짜증나, 말해봤자 무엇하냐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울지 넌 절대 모를 거야!! 너는 네가 떠난 이후로도 내가 널 좋아하는 걸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을 거고 난...!”

 

끌려가는 걸 이용해서 체중을 실어 용사와 부딪혔다. 휘청거리며 잡고 있던 힘이 약해지는 순간 바로 다시 뿌리쳐서 뒤로 물러났다. 원망 가득한 말과 함께 다시 제대로 선 용사는 나를 노려본 채 현재 몸 안에 있는 마력을 전부 손안에 때려붓듯이 모으며 악에 받쳐 외쳤다.

 

이 숲에 갇혀 죽어가면서 절대 오지 않는 널 영원히 기다렸겠지!!!”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용사의 손 안에 하나로 뭉쳐졌다. 다급하게 구속 마법을 펼쳐 용사를 묶어뒀지만 용사의 저항이 굉장히 거셌다. 구속끈을 잡아당겨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힘을 준 게 원인이었는지 팔 힘이 한순간 풀려버렸고 용사는 자신이 저항하던 힘 때문에 뒤로 넘어졌다. 하필이면 책장이 있는 곳이었고 머리를 부딪힌 용사는 손에 쥐고 있던 마력의 제어를 놓쳐버렸다. 사방으로 터져나간 마력들이 주위를 뒤흔들었고 책장들이 무너져 그대로 용사 위로 쓰러졌다. 그 광경에 나는 끈을 잡고 있는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