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답잖게 말을 빙빙 돌릴 속셈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걸세.”

천천히 고개를 든 대사제는 이번엔 웃고 있지 않았다. 크게 뜬 눈 가운데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있어 조금 섬뜩하게 느껴질 법했지만 패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번엔 얼음 가시 두 개가 찻잔을 들고 있지 않은 손 위로 떠올랐다. 그에 대사제는 크게 뜬 두 눈을 다시 곱게 휘어접었다.

그런 위험한 거 날리면 못 씁니다.”

내 앞에 있는 납치범만 할까.”

까칠한 반응에도 웃음을 짓는 대사제는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훑었다. 옆 탁자는 비어있고 계산대를 보고 있던 사람도 돈 계산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부정할 자격이 있는 하늘.”

굴리던 눈을 감은 대사제는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천천히 이어간다.

요정처럼 순수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은 인간.”

천천히 나오는 신탁에 패치도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는다.

모든 것을 뒤집고 기다리는 그림자.”

노란빛과 파란빛이 마주쳤을 때 패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믿음과 확신으로 본질을 덮은 숲.”

순간 패치는 이 세상에 대사제와 단 둘만 남은 느낌이 들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 넷에서 비롯된 이들은 각자 용사, 사제, 마법사, 지도제작자의 역할을 부여받고 세계의 정상화와 함께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무엇인지 깨닫기 위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신전에서 내려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발표되지 않았을 신탁이 어느 이름 모를 작은 마을, 작은 식당, 창가 자리의 작은 탁자 자리에 앉은, 키가 큰 대사제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신탁을 전부 듣고 눈을 반쯤 감으며 내용을 곱씹던 패치는 곧이어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래서 거기 신탁에 있는 마법사가 난가?”

역시 눈치가 빠르심다~”

사제는 너고?”

오우! 그것까지 바로 맞추시다니, 놀라워요~”

패치는 그 자리에서 비속어만 안 꺼냈지 듣는 사람이 울고 나갈 법한 350자의 험한 말들을 뱉었다. 물론 듣는 상대가 상대다보니 우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그렇게 질색하면 저 정말 상처받슴다!”

왜 자네가 대사제가 됐는지 이제야 알겠네. 거기는 이미 자네만큼 제정신이 아닌 녀석들 천지였어!”

험한 말들을 뱉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패치는 남은 차를 단숨에 넘겼다. 식은 차로 속을 진정시키기엔 들끓는 짜증과 분노는 너무 거대했다. 빈 찻잔을 내려놓은 패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가 돈 계산을 하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벌써 여행할 생각이 가득하심까? 역시 행동력은 빨라요~”

안 꺼져!?”

독실한 신자는 신의 말씀을 따라야함다~”

난 신 따위 안 믿는 마법사니 따를 생각 없네!!”

졸졸 따라오는 대사제는 웃는 낯으로 패치의 속을 긁어댔다. 예전처럼 신전 안이었다면 모를까 차마 마을 안에서 마법을 난사해대며 깽판을 칠 순 없는 패치는 빠른 걸음으로 마을 출입구에 다다랐다.

그럼 다른 동료들을 찾으러 갈까요?”

마을을 나서면서 대사제가 그리 물었지만 날아오는 건 얼음 가시 수십 개였다. 이럴 줄 알았는지 대사제는 뒤로 한 발 물러나 마을 안으로 들어갔고 마을 안에다 마법을 냅다 난사하는 꼴이 될 걸 아는 패치는 바로 멈췄다.

한 발짝이라도 나오면 바로 자네 머리로 날아갈 줄 알게.”

에이~ 그런 말을 들으면 누가 나갑니까~”

패치는 대사제를 노려보면서 행동을 살폈다. 저대로 마을에 묶어두고 최대한 멀리 도망칠 생각이었다.

신의 말씀을 따른다 해도 실제로는 저처럼, 아니면 저보다 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도 신탁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아십니까?”

대사제의 경우에는 신탁의 내용이 패치와 함께 여행한다는 내용이기에 별 말이 없는 경우였지만 그 말대로 높은 자리를 원했기에 본심을 숨긴 이들도 신탁에 목을 매고 있었다. 멀리 볼 것 없이 맨 처음 찾아왔던 홀리가 그랬다.

신탁이란 건 반드시 이루어질 내용이라 그렇습니다.”

믿음 없는 확신이라며 따지기 전에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패치가 뒤를 돌아보니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마을로 들어오려던 사람이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길을 막은 셈이 된 건가 싶어 비키려던 패치는 어딘가 낯이 익는 얼굴에 상대를 빤히 쳐다봤다.

! 역시 옛날에 술집에서 봤던 마법사님이네요!”

그러자 패치의 머릿속에서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꽤 오래전, 술에 취해 신전에 납치당했던 때보다 더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당시에 무언가 속상한 일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고 주량이 약한 패치는 당연히 만취상태가 됐다. 취한 상태의 기억은 없었지만 다음 날 다른 이의 입을 통해 그 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됐다.

늦은 밤, 잠들기 위해선 미리 잡아놓은 방으로 가야했지만 앞에 손가락이 몇 개 있는지 구분 못할 정도로 취한 사람이 제 발로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히 뒷정리를 해야 하는 주인 대신 만취한 취객을 선뜻 업어서 방까지 데려다 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밑천을 마련하려고 식당 딸린 이 여관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마을 내에서 사람들이 착하고 순박하다며 입을 모아 말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랬구나 내지 다행이다로 끝났을 얘기였다.

우부욻!”

안 그래도 취한 상태인데 업혀서 흔들렸기 때문이었을까, 술 많이 마신 손님이 있을 때 화장실에서 들릴 법한 소리가 업히자마자 패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시 내려놓기엔 이미 늦었으며 뒤집힌 속이 더 빨랐다.

뿌웨에에에엙!!”

그 날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적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패치 대신에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말해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사건의 피해자가 바로

, 안녕하세요.”

얼굴 낯익고 패치를 기억하는 이 사람이었다.

잠깐 당황한 패치는 숨을 조금 가다듬고 인사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둘 사이로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이렇게 딱 만나네요, 기다리고 있었슴다~”

, ?”

갑자기 반가워하며 다가오는 대사제에 상대는 당연히 당황했고 패치 또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는 사인가?”

아뇨, 처음 보는 사이임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에 대사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과장되게 움직여 정중한 손짓으로 당황하는 상대를 가리켰다.

이 분 또한 신탁의 주인공이자 우리의 동료입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패치의 표정이 굳어졌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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