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 급하네, 일터에서 아주 잘 내치게 될 성격이야 안 그래?”

당신은 그래서 내쳐졌나보군 그래.”

정곡을 찔렸는지 상대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져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목적이 더 급했는지 곧이어 진정하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그래, 내가 초면에 참 무례했지? 그런데 그거 알아? 너도 곧 내꼴 날 걸?”

그림자가 져 앞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패치는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림자였다.

눈치가 꽤 빨라보이는데 살인마가 누군지는 눈치챘지? 하지만 살인마가 숨긴 비밀이 뭔진 모르고.”

숨길 비밀이야 뻔하지.”

뻔하지 않은 비밀이니까 내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거 아니겠어?”

길게 말하는 사람만큼 속이 빈 사람도 없다는 걸 모르나?”

사람? 사람이라고?”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한 발 뻗어 다가왔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반응하는군.”

...하하....그래 사람...사람이지? 사람이었지?”

실성한 듯이 웃으며 하는 말에 패치는 애초에 상대하지 말아야했던 걸까 싶어 미묘한 표정으로 더 멀어졌다. 상대는 그 모습에 오히려 더 반응이 묘해졌다.

같은 신세끼린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이제보니...”

잘 보이진 않아도 쭉 훑어보는 시선을 느낀 패치는 한 번 노려봐준 후 바로 뒤돌았다.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간만의 외부인이라고 생각해서 반가웠는데 같은 처지라니. 자기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빨간머리 애송아, 너도 외부인을 발견하면 살인마를 죽여달라고 애원하거나 나처럼 비비꽈서 말을 듣게 만들어야할 걸? 안 그러면 이렇게 너덜너덜한 상태로 영원히 여길 떠돌테니까!”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얘기를 하는 상대에 패치는 어이가 없었지만 말을 섞을 생각도 없었으니 계속해서 멀어졌다. 그림자가 져서 애초에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너덜너덜하다고 한 들 감흥조차 들지 않았다. 스무 걸음 더 걸어간 패치의 뒤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서 있었던 자리에 CGA라고 적힌 이름패만 떨어져 있었다.

패치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죽었다느니 살인마를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라느니 같은 무례하고 중구난방인 말 자체가 불쾌하게 다가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지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고 패치는 고민했지만 미리 가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무덤으로 돌아갔다.

 

헥소미노는 떨떠름한 얼굴로 사제의 증표와 치트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증표가 위조 증표인지 구분할 능력은 없었지만 둘러싼 로브 아래에 확실히 사제들 그것도 높은 직위의 사제가 입을 법한 옷을 입었고 자수 또한 꽤나 정교하게 놓여있어 모방한 가짜옷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제를 밖에서 보는 건 또 처음이네.”

세간의 인식처럼 사제는 신전에 박혀서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나오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지 헥소미노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진 않았지만 적대감은 많이 내리눌렀다.

옷도 보니까 짬도 높은 것 같은데 굳이 봉사를...여기 온 이유가 나무들이 저 꼴 나서 봉사차 온 거야?”

밖으로 나오는 사제는 딱 하나였다. 봉사를 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제. 특별한 일이 바로 그거였다. 치트는 제 목소리가 돌아온 걸 느끼고 조금 기침을 한 후 편안한 얼굴을 했다.

아이고 드디어 목소리가 나오네요~ 짧은 금언이 걸려있어서 진즉 말하지 못했네요. 맞습니다, 봉사차 왔지요. 비록 해결이 어렵더라도 어려운 곳을 찾아오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여기가 어려워 보여?”

나무들이 무덤이라고 불리고 이제 관광객도 안 오는데 어렵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기엔 외부인이 봐도 좀 그렇잖슴까?”

당사자가 괜찮으니까 부디 신경 꺼달라고 온 세상에 전해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아내분과 여유롭게 지내는데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가 보군요? 걱정마십쇼, 저희도 명분이 필요한 거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명분만 생길 정도로 잠깐 머물다 갈검다. 그리고 돌아가서 부부는 좌절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며 오붓하게 지낸다고 소문을 내면 관심도 완전히 사그라들겠죠?”

헥소미노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온 말이 만족스러웠는지 더 이상 뭐라하진 않았다.

들쑤시지 말고 적당히 우리 눈에 안 보이게 박혀 있다가 얼른 가라.”

네네~”

치트는 그리 말하며 왔던 방향 그대로 되돌아갔다. 팔짱끼며 노려보던 헥소미노는 한동안 자리에서 떠나지 않다가 그림자가 한뼘 더 길어질 때 쯤에서야 움직였다.

 

사실 그 이는 우드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늘 제 앞에서 하기 싫다, 힘들다, 그만두고 싶다 이렇게 외치고 다녔죠.”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나봐요.”

태어나자마자 한 일이 가문의 일을 이어받기 위해 훈련하는 거였어서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가 없었다네요. 그래서 뭘 하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저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 거 있죠?”

근처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은 두 사람은 신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모두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누는 게 오랜만이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터놓고 있었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목적에 대한 이야기나 넓게 쳐도 여행에 관련된 얘기만 나눠왔던 퍼블리는 오랜만에 자잘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고 그동안 남편 외의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어 외로웠던 신시어의 심정이 얼마나 편안해졌을지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어보였다.

마을은 멀지, 집안일은 많지, 애도 봐야하지 얼마나 바빴는지 쉬는 날이 드물었어요. 언제 하루는 더 이상 못 참아서 가출을 했었는데 그 이가 얼마나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며 저를 찾아다니던지...”

? 아이도 있으셔요?”

! 헵토미노라고 아주 귀여운 아들이에요.”

사실 거의 자기 혼자서 돌보다시피 했는데 가출한 이후론 남편도 같이 공동육아를 하게 됐다며 덕분에 한 숨 돌릴 시간이 났다고 하는 말에 퍼블리가 이렇게 물었다.

...아들이 몇 살이에요?”

아직 기어다닐 시기도 안 됐어요.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걸 보면 아기는 정말 금방 크는 걸 느껴요.”

그 대답에 퍼블리의 표정이 굳었다. 기억을 더듬어봐도 집 안에 아기가 살고 있다는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주 청소한다하더라도 아기가 있다는 가정하에 너무 깔끔했던 바닥과 얼룩은 물론이고 흠집도 없는 식탁, 의자는 어른이 앉을만한 의자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얼핏 떠오르던 시야 한 귀퉁이의 빨래더미엔 어른 옷밖에 없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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