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들이 일제히 빙글빙글 돈다. 음악에 맞춰 넓은 홀을 검은 머리들이 한쌍의 짝을 이루면서 빙글빙글 돈다. 검은 손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누군지도 모를 다른 손에게로 넘겨주고 받는다. 일사분란하게 바닥을 내리찍는 발들은 기묘하게도 서로를 밟지 않으면서 박자를 만들어낸다. 박자를 그려내는 발을 따라 손들이 춤을 그려낸다. 검은 사람들이 일제히 빙글빙글 돈다.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르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춤을 춘다. 흔들리는 커튼 너머의 세상 또한 검다. 달조차도 띄우지 않는 세상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이들을 태운 목마처럼 빙글빙글 돈다. 누구하나 멈추는 기색없이 돌고 돈다. 그 누구도 받치지 않는 그림자들이 일어나 돌고 돈다. 그림자 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
누군가가 꺼낸 한마디의 말에 움직이는 석판같던 그림자들이 모두 멈춘다. 말을 꺼낸 자의 머리카락도, 손도, 옷도 검다. 다만 그의 피부는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처럼 선명하게 빛난다. 높게 올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의 피부와 함께 크고 작은 노란 빛이 어두운 주위를 발판 삼아 높게 빛난다.
"손님이 오셨군요."
노란 빛이 향하는 곳, 그림자들 사이로 보이는 색은 눈에 띌 정도로 밝았다. 한쪽으로 쏠린 붉은 색과 그 아래의 몸을 하얀 천이 빈틈 없이 둘러싼 채로 어두운 주위를 있는 힘껏 밀어낸다. 검은 색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그 모습은 그림자들 사이에선 매우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들은 손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어느순간 아무런 움직임 없던 그림자들이 손님의 주위에서 멀어진다. 그들의 행동의 끝엔 그들에게 명령하는 명령자가 존재한다. 그림자들이 물러나자 그들을 그저 눈짓하나로 물리는 명령자가 저의 자리에서 내려와 무거울 법한 발걸음을 사뿐히 옮긴다. 제법 멀리 떨어져있었는데도 몇걸음 움직이니 마주하는 거리는 한발자국 남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곳의 격식은 명령자에게 달려있다. 곧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이곳의 격식이다. 그들의 주위에서 물러난 그림자들처럼 아무런 움직임 없던 손님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뗀다.
"돌려받으러 왔다네."
대답을 받은 자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다. 그 흔한 긍정도 더욱 흔한 거절도 꺼내지 않는다. 높게 자리잡은 노란 빛이 반쯤 제 모습을 감추더니 고개를 돌리며 완전히 제 모습을 감춘다. 발걸음을 옮기는 속도는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는 그를 뒤따라 손님 또한 아무런 무게 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검은 색을 치장하듯이 몸에 두른 그는 이곳의 절대자. 검은 색을 밀어내기 위해 보호하듯이 흰 색을 두른 손님은 빼앗긴 관리자. 그림자 왕국의 왕과 잊혀진 숲의 주인은 유유히 넓은 홀을 떠난다.
그들을 받쳐주는 그림자는 그들의 발밑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제 정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방금 전에 빠져나온 홀보다 넓은 곳이었다. 다만 정원이라기엔 이상하리만치 자리잡은 식물들이 없었다. 심지어 식물 아래에 있을 흙조차도 없다.
그곳에 존재하는 건 진짜인지 의심될 검은 나무 한 그루만이 유일했다.
"돌려받으러 왔다고 했습니까?"
그 나무를 향해 걸어가는 왕의 표정은 여전히 볼 수 없었다. 멈춰있는 관리자를 뒤로 한 채 나무에 다가간 왕은 그 위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린다. 그것을 끌어안은 채 관리자를 향해 뒤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황홀해보인다. 행여나 끌어안은걸 놓칠까 더욱이 힘주어 꽉 안는 모습에 관리자의 얼굴에 변화가 생긴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아름답지 않습니까?
왕의 품에 안겨있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맨 몸을 전부 드러내고 있었다. 고운 눈썹을 찌푸린 관리자가 시선을 아래로 하니 가뜩이나 불쾌해보이던 심경이 더더욱 악화된다. 하얀 다리 사이의 붉은 점과 커다란 손자국이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지 쏘아보는 푸른 빛에서 얼핏 붉은 불이 일렁인다. 그런 관리자의 노기를 읽었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왕에게로 따가운 시선이 쏘아진다. 그 속에 담긴 불길보다도, 저 하얀 다리에 새겨진 붉은 것들 보다도 더욱 짙은 색의 가닥들이 왕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목을 쓸어내린다.
왕의 품에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안겨있는 저것은 관리자 본인이다.
"돌려받으러 왔다는 건 이렇게 제 품에 안겨있는 당신입니까, 아님 바로 제 뒤에 단단히 자리잡은 저입니까?"
생전에 자신을 기억해주던 사람에게 잊혀진 자들은 모두 잊혀진 숲의 나무로 자라게 된다. 하지만 왕은 당연한 순리를 거부했다.
"그림자 주제에 건방지군."
뿐만 아니라 관리자의 시체를 들고 이곳으로 도망쳤다.
노기를 품은 채 짓씹듯이 내뱉는 말이 그에겐 유명한 광대들의 말장난보다 즐거운지 웃음은 아까보다 커진다.
"그러는 당신 또한 그림자면서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얄궂게도 관리자는 그림자로 눈을 떴다. 그리고 몇 번이나 지금같은 상황을 반복한다. 몇 번이고 죽여도 시원찮을 왕은 관리자의 눈 앞에서 관리자를 희롱하고 자랑스럽게 내보인다.
"그 넓은 숲에 저 하나 없다고 무너지는 일은 없을텐데 말입니다. 그렇담 당신을 돌려달라는 겁니까? 물론 돌려줄 순 있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 손에넣은 당신인데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당신의 몸을 돌려받는다고 해서 당신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슴까? 뭐 이곳에서 그런 상식은 통하지 않을테니 다시 살아날 수도 있겠군요. 아아! 그렇담 저는 더더욱 돌려줄 수 없습니다! 돌려주는 순간 당신의 심장은 뛸테고 이 차가운 입은 뜨거운 숨을 뱉어내고는 이렇게 저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눈을 뜰 테니까요."
감고있는 눈꺼풀을 슬쩍 들어올리며 초점 없이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탄식하는 왕의 모습은 이야기책 속의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처럼 애절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정작 그 말을 꺼내는 입은 사랑이 오랜 전쟁 끝의 승리자의 미소보다도 짙은 광기를 지니고 있다.
"정 이 몸을 돌려받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존재합니다. 당신은 그림자, 저또한 그림자인데다가 이곳은 그림자들의 왕국."
숨을 쉬지 않는 관리자에게 짧게 입맞춤을 한 왕은 노란 빛을 들어올리며 망부석처럼 서있는 관리자에게 제안한다.
"살아있었던 당신을 숲으로 돌려주고 당신은 이곳에 남는 겁니다."
왕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밝은 빛이 내려온다. 그림자들이 잠들 시간이 돌아왔다.
"얄궂게도 당신은 왕인 저에게 해를 가할 수 없고 왕인 저는 당신이 있는 숲으로 갈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왔네요."
왕은 다시 품 속에 안고 있던 것을 검은 나무 위로 올린다. 행여나 가지에 쓸려 상처라도 생길까 옮기는 손길이 매우 조심스럽다.
방금 전까지 두사람이 온전히 존재하던 지금 이곳엔 왕 홀로 온전히 존재한다.
"다음에 또 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