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날이 깜깜하군."

시각적 이외에 정신적으로 깜깜해지는건 처음이군.

물론 하얗다하더라도 안보이는건 매한가지라고 생각한 패치는 이곳에 발을 들인 후 치밀어오르는 울화와 두통에 대한 생소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감정에 한껏 속이 제법 뒤틀려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눈을 감으면 그것이 미래라고들 장난식으로 말하지만 눈을 떠도 다를 바가 없으니 그의 속이 답답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와 그의 일행에게서 모습이 겨우 보일 정도로 떨어져있는 당사자는 낯선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느끼기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는지 만면에 웃음을 띈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발길이 끊겼다고 생각되고 알려진 이곳에 발을 들인 바로 그 당사자인 용사는 정원지기인 패치가 보기엔 전혀 용사로서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원지기로서 본 것이기에 이곳의 주민들에 대한 의견과는 다를 수도 있었다.

"이곳은 정원지기가 오랫동안 떠나있던 곳이었으니 그 시간만큼 이곳의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이끌어온 곳입니다."

그런 패치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니면 그저 트집을 잡고 싶었는지 오래된 이야기라도 들려주듯 가벼우면서도 제 나름대로 무게감을 넣은 채 운을 떼는 노인을 패치는 아무런 생각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지기는 그곳에 살고있던 주민들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였지만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이곳엔 시간이 남기고 간 불필요하면서도 어찌보면 상처가 녹아있는, 남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몇몇의 주민들에게 새겨져 있었다. 그 오래된 시간중에 어디에서 새겨졌는지는 본인들조차 몰랐으며 설령 안다해도 외면해버리고 새겨진 바로 그 감정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눈 앞의 노인은 바로 그런 자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니 용사는 저희에게 맡기고 당신들이 좋아하는 낡은 글이나 찾으시길 바랍니다."

노인은 돌려서 말하는 것과 할 말중에 몇마디를 뺀 것에 대한 차이를 모르는지 제 나름대로 선심쓰듯 말하는 모습은 충분히 화를 불러일으킬만 했지만 패치는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일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눈 앞의 노인, 굿하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굿하트는 제 할 말만 하고는 패치가 입을 열을세라 용사를 보러간다는 핑계로 급하게 자리를 떴다. 패치 또한 붙잡을 생각따윈 없었고 애초에 주민이 정원지기에 그들의 일에 대해 행동제약을 걸만한 권한도 이유도 없었다. 굿하트의 말은 대부분 귀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가 텃세를 부린다는 것 쯤은 패치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그에겐 오랫동안 그들을 방치한 불특정 다수의 정원지기에 대한 주민의 불만을 들어줄 이유도 없었고 그 불만을 해소해줄 이유도 없었다. 현재 패치의 마음속엔 주민의 화풀이와 텃세에 대한 괘씸함과 불쾌함을 들일 장소가 없었다. 그의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혼란은 이름 그대로 그의 마음을 전부 어지럽히고 있었다.

"정원지기님!"

어느새 호칭을 정해버렸는지 기대감으로 가득 담긴 목소리가 상념이라는 늪에 젖어있던 그를 건져올렸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색은 그가 두르고 있는 정원지기의 로브처럼 밝은 녹색이었다. 잠깐의 시선을 맞추다가 이내 그의 시선은 또다시 흰 색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기엔 퍼블리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려놓은 흥분으로 인해 그것을 잡아채는 능력이 눌려 밀려나 있었다. 이미 자신이 동행을 허락했으니 퍼블리는 엄연히 그를 따라다닐 권리가 있었다.

"출발하지."

고대하던 간식거리를 입에 문 어린아이 마냥 해맑고 행복해보이는 웃음을 띄고 있던 퍼블리는 허둥지둥 잽싸게 패치의 뒤를 따랐다. 패치는 예상한 적 없는 그의 일행을 한 번 뒤돌아본 후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늪이 더 깊어졌다.

불과 몇분전에 일어났던 일을 오래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꺼내는 것처럼 회상 아닌 회상에 잠겨있던 패치는 다시 천진난만하게 지금의 정신없는 상황처럼 정신없이 휘날리는 파란 머리카락이 달린 용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까 자신에게 텃세를 부리던 굿하트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용사를 잡아세우며 이곳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은 마치 예절교육을 시키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예절교육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웃음을 짓는 손자의 모습 같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굿하트의 모습을 보면 그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됐다. 사람의 얼굴색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을까. 조곤조곤하게 어르는 어투와는 다르게 붉어진 얼굴과 비례해 난폭하게 용사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는 모습은 가까이서 보면 한 명의 비극이었고 멀리서 보면 다수의 희극이었다. 굿하트는 정원지기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또한 정원의 주민. 자신이 살고있는 정원의 구역이 늘어나는 것이 그와 이곳 주민들의 바람이었다. 그것은 정원지기 또한 마찬가지. 비록 악감정을 가졌어도 목적은 같으리라.

"용사님을 설득시킬 방법이라도 내보시오."

실제로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용사는 이미 굿하트의 인내에 대한 시험이라는 수준을 넘어섰다. 심호흡을 한 후 마음을 진정시켜보아도 이리저리 휘날리는 파란 머리카락 사이의 어린아이 마냥 해맑은 얼굴을 다시 마주하면 진정시킨 의미도 없이 오히려 배로 돌아와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미 많은 시간의 틈이 가로막고 있지만 굿하트는 이곳 나름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시절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언제나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는 영웅심리가 넘쳤고 구역을 넓혀가는 데에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것 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그들의 행방에 대해 궁금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정원의 주민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흔한 동화에서 나오는 영웅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어느순간 그들의 선행 아닌 선행은 당연하게 굳어져갔다. 마지막 용사가 이곳을 떠나고 다음 용사가 와서 아름다운 동화의 멋진 절정을 이루리라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러한 기대감을 시간이 질질 끌어 가늘어져 끊어지기까지 아슬아슬한 그 순간 다음 용사가 나타났다. 그 한순간을 기점으로 늘어졌던 기대감이 시간을 무시하고 다시 끌어모아 제 몸집을 키우더니 열정에 몸을 실어 불태웠다. 하지만 불태운건 열정 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친구들을 많이 만들거야!"

지금 저 말을 내뱉는 게 누구의 입인가. 분명 저의 말은 아닐테고 근처에는 아무도 없으니 남은 사람은 용사가 아닌가. 굿하트는 세월이라는 시간을 핑계삼아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넓다고 자신하는 마음으로 앞서 한 설명을 반복했다. 물론 용사가 친구를 만드는건 용사 개인의 자유이니 막을 이유는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곳의 정원 구역을 넓히는 것이라고 인식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기대감은 의미가 없었기에. 또 한 번 장황한 굿하트의 설명이 끝나자 검은 눈을 한 번 깜빡인 용사는 히잉 콧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굳이 넓혀야됑?"

그렇게 굿하트는 폭발했다.

용사의 특이한 성향은 멀리서도 보았고 앞에서 지친 기색으로 축 늘어진 굿하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았다. 이내 자신에게 와서 닦달아닌 닦달을 해대는 굿하트를 힐끗 본 패치는 저 멀리서 뛰어다니는 용사를 주시했다. 사실상 현재상황에 용사가 온다고 해서 이곳 주민들의 바람이자 정원지기의 표면 목표인 구역 즉 땅 넓히기가 이루어질리는 없었다. 앞은 다른 정원지기들과 주민들의 구역, 뒤는 '저주받은 검은 땅'. 제아무리 많은 권한을 쥐고있다는 정원지기여도 그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었다. 없는 땅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없는 그로선 없는 땅을 찾으러가지 않는 용사의 생각에 좋아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애매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원지기의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었지 순전히 그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였다. 애초에 정원지기의 진짜 목표이자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는 땅 넓히기가 아니었다. 땅 넓히기는 그저 진짜 목표를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패치가 생각에 잠기자 묘한 침묵의 상황이 발생했다. 이 순간만큼 퍼블리는 자신이 제 3자의 입장인게 감사한 만큼 원망스러운 점이 없잖아 있었다. 직접적으로 굿하트의 분노와 패치의 침묵인지 무시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을 받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제 3자였기에 직접적인 발언권은 없었다. 괜히 잘못나섰다가 굿하트의 분노의 화살이 자신에게도 꽂힐 수 있었고 경솔한 발언으로 인해 패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다. 묘한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녹색의 눈을 굴리던 퍼블리가 인내심이 다한 굿하트가 소리지를 태세로 입을 열자 당황하여 제지하려는 그 순간

"이곳의 주민과 정원지기는 용사에게 맞춰 인도할 뿐."

누구에게는 길고 누구에게는 짧았을 침묵의 끝에서 패치가 한마디를 내놓았다. 비록 다른 문제 때문에 생각의 대부분을 잡아먹는다 할지라도 그는 지금은 자신이 정원지기라는 걸 인식했다.

"그런 용사의 수준에 맞춰서 가면 될걸세."

가령 보물찾기라던지.

할말을 끝낸 패치는 바로 그 즉시 자리를 떴다. 이쯤하면 어둔한 자라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가 땅을 보물로 비유했다고 알아들은 굿하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지 않은 감정으로 바라보는 정원지기라지만 해결책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찝찝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패치를 흘끗 본 굿하트는 다시 용사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떴고 멍하니 지켜보던 퍼블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패치의 뒤를 좇았다. 뒤에서 다급하게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패치는 또다시 상념에 빠졌다. 그로선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언가를 계속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에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까워지고 있는 발소리에 그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퍼블리를 돌아보았다. 우연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진실인지를 판별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가지의 가설 중에 우연을 제외한 것이 맞다면 그에게 있어서 퍼블리는 가장 경계해야하는 대상이다.(여기서 치트는 자연스럽게 예외로 넘어갔다.) 타인에게 정을 붙이지 않는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정도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이제까지 생각해왔지만 어째서인지 퍼블리는 그렇게 대하기 힘들었다. 어느새 그의 곁까지 따라온 퍼블리를 바라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그러자 녹색 눈이 마주해온다. 한순간 말을 멈춘  패치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 나를 따라오려는 거지?"

패치는 자기가 꺼내놓고도 참 늦게 꺼낸다고 생각했다. 질문을 받은 퍼블리는 눈을 깜빡이고 한껏 광을 내더니 꿈을 꾸는 아이처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원지기가 제 꿈입니다!"

마주하던 푸른 눈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 덕에 빛을 내고있는 녹색 눈은 어둡게 가라앉은 푸른 눈을 볼 수 없었다.

정이란건 붙여선 안 돼.

2.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를 겁니다!"

"미안해. 너의 마음은 받아줄 수가 없어!"

어린 녀석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뭘 하는 거지?

마을 어딘가에서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을 용사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건만 공터에서 웬 어린아이 두명이 누가봐도 연인 혹은 아직 이루어지기 직전인 한 쌍의 남녀가 하는 말을 하고있다. 소꿉놀이라고 치기엔 그들의 표정이 온갖 정성과 힘을 들여 그리다시피 쓴 글씨처럼 진지했을 뿐더러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 다른 아이를 붙잡는 모습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이겠거니 했어도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느껴져 발걸음을 멈추고 짜게 식은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패치의 시선을 받은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르륵 웃으며 패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한 아이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깜빡였다.

"정원지기 아찌. 몰라요?"

"뭘?"

"이거 되게 유명한 연극에서 나오는 건데!"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질문을 건넨 아이는 물론 다른 아이도 까르륵 웃는다. 유명한 연극이 어디 한 둘인가. 거기다가 저런 고백 대사는 널리고 널린터라 굳이 콕 집어서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는 연극은 동화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이 대부분일테니 범위는 줄일 수 있었지만 패치는 굳이 알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이들은 다시 저들끼리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소꿉놀이에 들어갔다. 그 또한 관심을 끊고는 다시 제 갈길로 바삐 발을 돌렸다. 그렇게 아이들은 그의 모습이 손가락 두마디의 모습 정도로 작아져 보일 때까지 어쩌면 그가 사라지고 난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갈 놀이를 즐겼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는 기록자. 나는 당신을 기록할 거예요."

안타깝게도 멀어져가는 그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 정원지기님! 찾았어요!"

가끔 GM의 집에 얼굴을 잠깐 비추는 패치보다는 이곳의 지리를 더 잘 아는 퍼블리가 도움을 자처하며 발에 속도를 가한채 먼저 자리를 떠난 것도 잠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던 패치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까지도 찾아낸 퍼블리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 없이 안내를 청했다. 그런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퍼블리는 기쁘다는 모습을 숨기지 않으며 앞장섰다. 그리고 그는 앞서가는 퍼블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은 그는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고민거리였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는 심정. 그 마음은 다름 아닌 퍼블리를 향하고 있었다.

"피유~!"

그들이 도착한 곳엔 용사가 등에 달려있던 망토를 온 몸에 두르며 머리만 내놓고 작은 숨을 규칙적으로 내뱉었다. 행여나 그 규칙적인 숨이 깨질까봐 먼발치에서 용사를 유심히 살펴보던 패치는 용사의 손에 쥐어져있는 낯선 몽둥이에 의구심을 품는 한편 누군가가 용사를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자리잡은건 다름아닌 두마리의 들개였다.

"이게 뭐다냐?"

"정체불명."

용사를 앞발로 꾹꾹 눌러보고 주위를 돌며 이리저리 살펴보던 들개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 온 또다른 낯선 냄새와 더불어 본인들을 향해있는 낯선 시선에 덩달아 고개를 돌리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패치와 퍼블리의 시선을 마주쳤다. 패치는 그들 또한 이곳의 주민이라 판단하고 간단하게 눈인사로 끝내고 마저 용사에 대해 판단하려고 했지만

"퍼블리! 오랜만이다냐! 오옹~? 그 옆엔 정원지기 아니다냐?!"

"반갑!"

그들의 소란에 용사가 눈을 뜨는 것과 패치가 몸을 숨기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덩달아 놀란 퍼블리 마저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숨겼다. 이윽고 들개들의 방정맞은 사과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숨을 고르느라 그것을 들을 틈은 없었다. 잠시 진정을 되찾은 퍼블리는 숨을 고르고 있는 패치를 보며 문득 든 의문에 행여나 용사에게 들킬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정원지기들은 용사 앞에선 모습을 감춰야하는 거예요?"

어찌보면 뜬금없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물어볼 법한 질문에 잠시동안 눈을 마주하던 패치는 곧바로 돌리면서 그가 두르고 있는 정원지기들이 입는 녹색 로브의 후드를 꾹 눌러쓰며 행여나 다시 눈이 마주칠까 눈까지 감으며 대답했다.

"앞에서 명성으로 주목받는 건 정원사로 만족하고 정원사가 남긴 것을 대신하여 누리고 있는 정원지기들은 그 대신 정원사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숨어서 정원을 지켜나가겠다는 의미네. 어찌보면 이것은 최소한의 양심을 나타낸 것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일세.

분명 그가 하는 말의 뜻은 알지만 무엇을 가리키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던 퍼블리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일 수 밖에 없었고 그대로 넘기기엔 무언가 찜찜했기에 그의 말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기 위해서 재차 묻고자 했지만 갑자기 그들의 위로 올라오는 그림자에 시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고있던 패치 또한 느꼈는지 후드 자락을 잡고있던 손을 놓고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그림자를 만들어낸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 앞에 있는건 앞서 봤던 두마리의 들개보다 훨씬 큰 덩치를 지닌 검은색의 들개였다. 검은 들개또한 시선을 느끼고 눈을 굴려 그의 아래에 있는 패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쪽이 그렇게 처 유명한 정원지기렸다?"

"자네가 저 들개들의 대장인가."

앞서 말했듯이 모든 주민들이 정원지기에게 우호적이진 않았다. 그들의 눈엔 오랫동안 이곳을 떠난 정원지기가 달갑지 않았고 권력과 지휘권을 쥔 채 뒤에 숨어서 나몰라라 상태로 그들의 등을 떠미는 걸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눈은 어느정도는 정확했지만 다른 면으로는 헛다리를 짚었다. 흔히 변명거리로 혹은 흔한 사실인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다라는 점이 패치에게 작용됐다. 오히려 패치는 등 떠미는 정원지기의 등을 붙잡고 앞으로 끌고 갈 사람이었다. 다만 그 사실을 그 앞의 검은 들개가 알 수 있을진 미지수였다. 그렇게 미묘한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익숙한 상황에 퍼블리가 검은 들개를 설득하려는 순간

뻐억-!!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가 들어도 명백히 딱딱한 무언가에 누군가가 맞은 소리였고 그것을 증명하듯 잽싸게 돌아간 그들의 시선 끝엔 피투성이로 쓰러져있는 작은 들개와 마찬가지로 피가 묻은 나무 막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얼어붙었고 그대로 굳어버린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깨버린건 다름아닌 방금 사태의 장본인이었다. 용사는 태연한 얼굴로 나무 막대를 집어들더니 곧이어 제 얼굴높이까지 들어올리곤

"이렇게 앙!하고 물어야징~"

또다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무슨 속셈이지?"

용사를 물어뜯어 죽이겠다고 뛰쳐나가려는걸 퍼블리와 함께 달려있는 네 발 중 두 발을 부여잡으면서 제지해보았고 그마저도 실패 해 어떻게든 용사를 엄호하기 위해서 돌까지 주워들었건만 노란 눈에서 번쩍이던 살기 가득한 붉은 잔상은 사라지고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목소리가 매우 잠잠해진 채 다시 처음처럼 그리고 용사를 해코지하려는 악당으로 보듯이 자신을 경계하는 투로 질문하는 들개의 모습에 패치는 어이가 없는 한편 저 검은 들개의 마음을 손바닥 뒤집 듯 바꿔놓은 용사의 친화력에 감탄 비슷한 평가를 내놓았다. 이렇게 생각에 잠긴다고 해서 저 질문이 도로 들어가는건 아니었기에, 어차피 말해야 할 사실이긴 했지만 그는 들개들이 그나마 용사에 한해서 정말로 우호적인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한 발 멈췄다.

"정원지기는 용사를 무사히 인도해야한다. 애초에 무슨 속셈이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하군."

"이상하다라...그건 내가 처 할말이다. 어차피 이곳 사람들 모두가 처 알고있는 사실 아닌가? 그런데 왜 시치미를 처 떼고 있는 거지?"

시선을 돌리니 아까 피투성이로 싸우던 들개 두마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용사가 던져대는 나무 막대를 쫓아가면서 함께 놀고있었다. 그런 둘에 비해 확실히 대장이라는 역할의 값을 빛내고 있는 검은 들개에게로 다시 시선을 마주하고는 이번엔 직설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자네들이 정원지기에게는 우호적이진 않겠지만 적어도 용사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흥! 의심이 처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정원지기로군."

퍼블리는 둘의 대화에 행여나 싸움이라도 일어날까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계속해서 가라앉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더불어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앞으로 나섰다.

"진정해요 형! 정원지기님은 용사를 인도하기 위해서..."

"용사를 어디로 처 인도한다는 거지?"

"그야 새로운 땅을 찾아서..."

거기까지 말하던 퍼블리는 곧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정원지기가 용사를 인도하는 이유는 용사가 새로운 땅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곳이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이유는 다름아닌 그 새로운 땅이 있을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정원 구역을 침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법행위에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남은 곳이라곤 '저주받은 검은 땅'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그대로 저주받은 땅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고 접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용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러니까 발뺌할 생각말고 얼른 처 말하지 그래 잘나신 요정양반?"

"요정이라니..."

"뒤에서 몰래 도움의 손길을 처 주는게 요정이 아니면 대체 뭐지?"

평생 들어본 적 없고 들어볼일 없다는 생각조차 든 적 없는 호칭에 패치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따지기엔 미묘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호칭에 잠시간 말을 꺼내는걸 멈췄지만 이내 호칭따위엔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 말을 마저 받아갔다.

"요컨데 용사는 믿되 정원지기는 믿지 못하겠다?"

침묵은 긍정이라고들 하고 침묵과 더불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들개의 표정을 본다면 긍정이 맞다는 확인사살까지 들었다. 물론 검은 들개 하나의 의견이지만 엄연히 들개들의 대장이었기에 나머지 들개들의 의사또한 검은 들개에게 반영된다는 전제하에 그들이 용사에게 우호적이라고 판단한 패치는 주민들에겐 비밀이었지만 언젠가는 밝히게 될 진실이자 목적을 말하기 위해 한가지 더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정원지기의 목적에 대해서 잘 아는가?"

"네녀석들 목적이야 땅을 처 넓히는 것이겠지만 그거말고 처 숨기는게 또하나 있다는건 이미 애저녁에 처 눈치챈지 오래다."

"눈치는 있군."

"이곳에 오랫동안 처 살면서 없는게 이상한 거다."

한마디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검은 들개를 보고 패치는 판단을 끝냈다. 이러한 감정 소모적인 대치상황은 의미가 없다는걸 알고있던 패치는 꺼낼 시간까지 늘릴 정도로 무게를 잡고있는 패를 꺼내놓았다.

"보물찾기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군."

3.

"저기..."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또 한 번의 데자뷰를 느낀 패치는 아직도 의구심 가득한 녹색 눈과 마주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째서 정원지기들은 그들이 찾는 것을 감춰온 거예요?"

"질문의 의도가 뭔가?"

"의도같은 건 없어요! 다만 어째서 함께 찾으려고 하지 않았느냐가 궁금한 거예요! 함께 찾는 게 훨씬 빠를텐데...물론 그나마 지금이라도 밝혀서 함께 찾을 순 있지만, 처음부터 말했다면!"

"자네가 한가지 오해하는 게 있군."

퍼블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챈 패치는 퍼블리의 말을 정정해주고자 말 허리를 잘랐다. 퍼블리는 오해라는 말에 자신이 내뱉은 말 중에 무언가 실수라도 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았지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전에 패치의 말이 앞섰다.

"지금이라도 밝혀진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감추어져 오고있네만."

"네?"

"쉽게 말해 밝힌 것은 내 독단이라는 말일세."

타인의 일상을 얘기하듯 가볍다라고드 느낄 수 있을 법한 하지만 어느정도 진중한 어투로 얘기하는 패치였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말은 있는 그대로여도 진중하다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무거웠다. 그 무게를 받아들이기엔 버거웠는지 아니면 자신이 받아들였지만 가늠할 수 없는 무게에 들어 온 순간부터 느껴지지 않는다는 착각이 든 건지 분명하게도 패치의 말을 들었을 퍼블리는 아무런 반응도 못한 채 멍하니 패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꺼풀이 두어번 녹색 눈동자를 쓸어간 후에야 자신에게 들어 온, 제 발 앞에 떨어진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조심스럽고 천천히 자각한 퍼블리는 이내 펄쩍 뛰려는 자신의 발을 간신히 땅에 붙이고는 억눌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그렇다면 정..원지기님은 규칙을 위...반했다는 말인가..요?"

목소리와 더불어 떨리는 녹색 눈동자가 대답을 요구했고 그에 패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큰 비밀을 꺼낸 입과 동일한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굳게 닫혀있는 입은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답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고작 시선을 조금 바꿨을 뿐인데 굳은 입을 대신해 마주하게 된 푸른 눈에는 명백한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그 눈에서 그리고 누군가가 말하고 흔히들 듣게 되는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에서 퍼블리는 대답을 얻었다. 힘이 쭉 빠지는 기분과 함께 대답을 받는 것과 동시에 만들어진 질문이 나지막하게 튀어나왔다.

"어째서 규칙까지 위반하면서 저희를 돕는 건가요?"

앞서 나온 질문과 달리 이번에 받게 된 질문에 패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퍼블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설령 안다고 해도 숨겨야 할 이유도 모를 그런 솔직한 사람이었고 그러한 사람이었기에 솔직한 마음 그대로 말 속에 담겨 패치에게 닿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퍼블리를 보며 패치는 우선적으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예전부터 주민들을 이용해왔지만 암묵적으로 주민들은 그 사실을 애써 사회의 흐름이라는 현실 뿐만 아니라 마음 깊숙히 보이지 않게 묻어두고 그 위에 자신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왔건만 그 뿌리 깊숙한 곳까지 파헤쳐버리는 확인사살이자 진실을 자신이 보란듯이 내던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배신감도 느낄 법 한데도 따져오는 말 대신 걱정을 담은 것에 패치가 의외라는 생각이 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자네들을 위해 규칙을 위반한 게 아닐세."

"네?"

"어차피 모든 정원으로 밝혀질 진실, 이제까지 입을 다문 것은 그들의 입장에선 시간끌기였을 뿐이고 이제는 적극적인 주민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몰린 터라 그 시간끌기마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지."

나는 그저 제일 먼저 무너뜨렸을 뿐.

하지만 그건 누구를 위해서?

안타깝게도 그 대답을 들은 자는 눈 앞의 퍼블리가 아니었다.

 

"보~물~찾~기이이이이~?"

눈빛을 반짝이는게 여간 범상치 않다. 굿하트는 그나마 흥미를 보이는 용사의 모습에 안도했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에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곳으로 발을 들일 용사를 제일 처음으로 안내하는 역할에 자부심을 갖고 그 세월에 합당하게 웃는 낯을 유지하던 굿하트는 최대한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렇게 자신을 긍정적으로 되새기고 한껏 자애로운 표정으로 무장한 굿하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용사를 예쁜 손주보듯이 부드럽게 대할 마음으로 용사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럼 친구들도 데꼬 가야징!"

"허허 벌써 친구들을 만들었구나?"

대단하다는 칭찬까지 덧붙이며 용사를 추켜세우면서 친구들이 누군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곧이어 누구든 간에 같이 따라가서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거란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대로 모든 것이 동화책 속 이야기 마냥 술술 풀려나가는 기분에 살짝 눈을 감으며 웃고 있던 굿하트는 친구가 왔다는 용사의 말에 감았던 눈을 뜨고 용사의 친구가 된 자랑스러운 주민들을 바라봤다.

"물어왔다냐!"

"귀환!"

그렇게 굿하트는 또다시 폭발했다.

정원지기들은 모든 것의 개방을 목적으로 용사와 모험가들을 지지하며 그만큼 늘어난 주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정원을 넓힌다고들 하지만 어찌보면 구역을 나누는 일에서부터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배려한답시고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붙여놓는다고 해도 그들은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소한 행동으로 인해 이해관계는 틀어질 수 있었고 설령 모든 걸 눈 감아줄 정도로 끈끈한 사이라고 해도 그들의 후손까지 완전하게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이라는 것은 옅어져서 희미해질 정도로 모든 것을 늘이는 재주가 있었다.

"대체 왜 하필 그녀석들인 거냐!"

저 멀리서 들리는 노성에 고개를 돌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난장판을 본다면 누구든 그 앞전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시뻘건 얼굴에더 목에 핏대를 세운 채로 윤 세상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굿하트와 그러한 상대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 용사. 그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를 정신 사납게 맴돌고 있는 들개 두마리의 모습을 본다면 보는 사람이 현기증을 느끼며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난장판이 따로 없군."

냉정한 정원지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봐, 요정."

패치는 아직도 할말이 남았냐는 듯한 얼굴로 검은 들개를 돌아봤다. 무엇이 그리 불만인건지 계속해서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보면 패치 또한 그다지 좋은 기분이 들진 않았다. 잔뜩 찌푸린 얼굴 사이로 번뜩이는 노란 눈에는 깊은 불신이 담겨있었고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그는 무언가 머리를 살짝 치고 가는 듯한 느낌에 눈썹을 찌푸렸으나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검은 들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은 들개는 순간적으로 찌푸려진 그의 눈썹을 놓치지 않고 봤으나 그 부분에 대해선 상대 또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판단을 세우고는 이내 상대가 기다리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아직 네 놈에게 신뢰를 처 하지 않는다."

"그건 이미 알고있는 사항이다만?"

생판모르는 남이 보아도 알만한 태도를 보이고선 굳이 말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확인사살까지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 뒤에 붙을 말이 아직 남았겠지만 검은 들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 멀어지기 위해 외면하는 굿하트 보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검은 들개의 영리함에 용사를 도와줄 조력자로는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첫인상 평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첫인상은 좋게 보여라.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상대방이 호의를 지닌 채 다가온다면 그는 경계하면서 밀어낼 위인이었다. 의도가 어찌됐건 그는 나머지 말을 뭉개버린 상황을 만들었지만 그정도에 뭉개져버릴 만큼 검은 들개는 말을 아끼는 편이 아니었다.

"목표라곤 쥐뿔도 처 보이지 않는 곳에 그나마 목표를 처 내놓았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이제까지 그걸 처 숨겨왔다는 거겠지."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정원지기에 대해 회의감을 가진, 조금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이었고 카드의 뒷면을 보기위해 뒤집듯이 금방 보여지는 패였다. 배신감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말로 불평하고 쏘아붙일 뿐 남은 길이 그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매달린다. 하지만 눈앞의 검은 들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찾는 목적을 처 말해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처 막을 것이다.

검은 들개가 원하는 건 부흥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단순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선 엉켜버린 실타래보다 복잡하게 엉켜있으면서 뭉쳐있는 긍지가 더욱 중요했다.

"자네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눈치 빠른 요정녀석이 처 할 말이 고작 그거냐? 일부러 시치미 처 떼도 소용없다. 네 놈들 뒤가 구리다는 걸 모르는 녀석은 처 어리버리한 꼬맹이들 밖에 없어."

그 말에 패치는 순간적으로 자신과 마주쳤던 녹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퍼블리도 꼬맹이 축에 드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요컨대 목적도 모르고 용사를 도와 함께 찾아내게 됐는데 그다지 좋은 용도로 쓰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긍지에 먹칠을 한다는 뜻이었고 목적을 밝히지 않으면 도움은 커녕 방해를 할 것이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물론 목적을 밝힌다하더라도 그들의 긍지에 안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이라고 불리는 하얀 정원사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자네는 코웃음을 치겠지."

그만큼 의미없는 질문을 꺼낼 정도로 그가 내놓을 대답과 연관이 컸다.

"지금 '정원지기의 기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초장밖에 남지 않은 시밖에 없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지기가 정원을 통제하는 당위성은 하얀 정원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남기고 간 기록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덕에 버티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 또한 한계가 있을 뿐더러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럴 수록 그들은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무슨 수단이라도 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계속되는 정원."

하얀 정원사가 바로 존재했던 시절의 기록.

"그곳에 모든 것이 잠들어있다."

Posted by 메멤
,

1.

정원지기의 일은 직업이름 그대로 정원을 지키는 것이다. 남몰래 정원을 가꾸고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을 인도하고 정원을 넘보는 자들을 경계하는 정원지기의 역할은 그 누구보다 중요하다. 무엇보다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을 인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 모두를 인도해야하는건 아니다. 그들 중 우리가 인도해야할 자들을 선별하는데 우리는 그들을 용사 혹은 모험가라고 한다.

-'정원지기가 되기위해 꼭 필독해야하는 서적!'중에서 발췌-

 

"절대 허락할 수 없으니 돌아가게."

그들은 정원의 잡초만큼이나 끈질겼다. 아무리 밟아도 뿌리채 뽑아도 언제 이곳을 벗어난 적이 있었냐는 듯 비웃듯이 그곳에 자리를 잡는 잡초들처럼. 다만 그들은 비웃을 수 없는 위치였다. 오히려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뿌리채 뽑아버릴지도 모르는 그에게 매달려야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을지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알고 있을만한 상황이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십니까? 저희들을 가엽게 여겨주십시오."

그렇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목적의 억지다. 하지만 그런 억지를 듣고 있는 그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래왔듯이 냉정하고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그런 그의 눈을 바라 본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체념의 기색이 올라오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로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간다면 그대로 없어지기는 커녕 전부를 잠식할 것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오늘을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다음으로 날이 밝을 날 또다시 올것이다. 지겹도록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판으로 찍어낸 듯이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며 그에게 존재할지 모를 동정심을 유발한 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 방법이 먹혀들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으로. 이런 그들의 생각을 알고있는 자들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무슨 근거로?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오늘을 끝내기로 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는 투로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가는 그들을 담고있던 아니 담고 있었을지가 의문일 눈의 시선은 금세 방향을 바꿨다. 상대가 무너질때까지 몰아붙이며 한 발 물러나 숨을 고르며 상대가 지칠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끝없을 게임판. 그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동 모든 것으로 그 말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 끝없을 판은 그들 스스로 끝을 맺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무의식이 넓혀가고 있는 지금껏 외면하고 있는 감정의 자리로 인해. 그 감정 이전에 애초에 게임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체념이라는 감정이 자리잡기 전에 오롯이 존재하던 끝 모를 자만이 만든 그저 허무한 허상일 뿐 그에게 있어선 그저 낭비되는 시간이었다. 그 낭비되는 시간이 되돌아오는 것은 얼마남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간을 붙잡혔던 그는 제 할일을 하기위해 발을 움직였다.

"아이고~또 시달리신겁니까?"

이거야 원 유능한 사람도 피곤합니다?

언제왔는지 능글맞은 웃음소리로 어느새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사내의 모습에 영원한 모습을 새긴 화석마냥 변함없던 그의 얼굴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깨 뿐만 아니라 그의 왼쪽 목덜미를 쓰다듬는 무례한 손을 그는 매섭게 쳐냈다. 과장스럽게 뒤로 물러난 사내는 내쳐진 손을 쓸어내리며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내보였다.

"동정심 없다고 오해받는 까칠한 선배님을 걱정하는 후배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다니 정말 슬프지 말입니다?"

"슬픈 얼굴이 다 죽었군."

애초에 나에겐 동정심 따윈 존재하지 않다만?

모든 행동을 과장스럽게 그리고 요란스럽게 하는 사내는 꼭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광대같이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다. 사내의 손길이 닿은 목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데도 흔적을 없앨 것처럼 문지르던 그는 더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담아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끈질기게 앞을 막아서는 사내가 아니었다면. 그저 빤히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거슬렸는지 그의 얼굴에 완연하게 드러난 표정이 만족스러웠는지 사내는 휘파람을 불며 그의 목을 쓰다듬었던 손을 주름이 잡혀있는 미간으로 뻗었지만 사내보다 그가 한 발 빨랐다. 거리를 벌린 그는 싸늘한 눈으로 사내를 흘깃 보고는 자리를 떴다. 이런 둘의 모습을 멀리서 구경하던 다른 정원지기들은 늘상 있는 일이었는지 고개를 돌려 제 할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그 자리에 남은 사내에게 동정 섞인 혹은 비웃음을 담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그 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는 참견 많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패치 선배님 원래 까칠하시잖냐? 상처받지 말고 그냥 친해지는건 포기해."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 하지만 그 속엔 사내에 대한 미련함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비웃음의 근거가 무지에 대한 허상일지는 이야기의 당사자들 뿐만이 알 것이다.


정작 무안하다싶을 정도로 냉대를 받은 당사자는 주위의 시선과 방금 달아놓은 유리창처럼 그 너머가 훤히 보이는 주위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까보다 훨씬 더 즐거워보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즐겁게 만들고 있을까, 그것또한 당사자만이 알 뿐. 하지만 당사자는 타인에겐 말하지 않는다.

"아아 이거 미운털이 아주 단단히 잡혔나보네요?"

다만 당사자끼리 알고있을 뿐.

2.

그와 사내 즉 패치와 치트의 만남은 제3자의 눈으로 봤을땐 철천지 원수나 다름 없었다. 아니 일방적인 원수사이라고 봐야했다. 패치가 일방적으로 치트를 적대하고 싫어하는 기색을 숨김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설령 치트가 근처에 없다고 해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여지없이 불쾌감을 내비추기 일쑤였다. 한 번은 용기있는 정원지기 동료가 궁금증을 풀기위해 과거에 그와 치트에 대한 악연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

"아니. 나는 그녀석을 그 날 처음 봤네만."

패치가 말하는 그 날은 치트가 정원지기로 들어 온 날이다. 사실 정원지기는 적은 편은 아니지만 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새로운 정원지기는 기존에 있던 정원지기의 추천을 받아 후보라는 기회를 잡거나 기존에 있던 정원지기가 은퇴할 때 자신의 자리의 공백을 대신해서 내세우는 후임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추천이나 후임 외에 드물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들어오는 정원지기가 간혹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바로 패치였는데 그렇게 스스로 들어 온 정원지기에게는 특권이 하나 존재했다. 어제 패치를 찾아왔던 사람들도 패치의 특권 때문에 매달리다시피 했고 패치는 매일 거절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 패치 다음으로 스스로 들어 온 정원지기가 다름아닌 치트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는 주목 받게 되었고 패치 또한 같은 이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정원지기들이 새로운 정원지기를 보기위해 모인 그 날 명백히 떨어져있는 거리에도 그 둘을 한데 엮어서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명백한 적대를 목격했다.

이유없이 싫어한다는 것과는 한눈에 봐도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날 처음 본 사람에게 그런 적대감을 드러내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이런 적대를 받는 상대인 치트는 억울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는 그런 패치의 반응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에 그들은 대상을 바꿔서 치트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던 대답이 나올 일은 없었다.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의 대답은 오히려 그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인 애매모호한 대답이다. 이러한 치트의 대답보다는 단호하게 말한 패치의 대답이 그나마 더 나은 대답이라고 생각한 후 그들은 곧이어 의문을 접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그들의 일이 아니니까.


[모든 것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채로 길을 잃은 아이가 되어버렸어
정원사야 정원사야 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인 하얀 정원사야
너를 따르는 빛무리 처럼
너를 따르는 빛무리와 함께
그들을 바로 잡아주렴
검게 변해버린 것들을 너의 손으로 하얗게 물들이렴
정원을 지키는 하얀 정원사야
모든 것을 바로잡아주는 하얀 정원사야
너의 하얀 빛무리들을 우리에게 보내주렴
너의 손길을 우리에게 보내주렴
하얀 정원사야]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몸을 실은 노래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정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저 노래를 모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 정원의 주민이 아니다라고 단정지을 만큼 유명하면서 누구에게나 전해져오는 노래다. 노래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인공이자 제목인 '하얀 정원사'라는 노래는 다름아닌 '정원지기의 기원'이라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대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남아있는 전설 중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초장을 해석하고 변형하며 동요 수준으로 문장을 늘리고 노래로 전해진 덕에 전설은 묻혀지지 않았다.

정작 제대로 된 전설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평론가들은 현존하는 시조 중 가장 아름다운 시조라고 칭했고 수많은 해석가들은 그들보다 많은 해석을 내놓았으며 음유시인들은 다양한 노래로 편곡하여 연주를 했다. 평론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어와 해석가들이 가장 유력하게 믿고있는 해석과 음유시인들이 가장 공을 들인 음률이 만나 현재의 '하얀 정원사'가 만들어졌다.

"선배님도 저 노래 좋아하십니까?"

언제 따라온건지 또다시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는 치트를 보고 늘 그러했듯이 패치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간혹 이상하게도 자잘한 부분에 집요한 기질을 발휘하는 치트 때문에 패치의 기분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부담스러운 그의 눈을 피해 천진난만한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 본 패치는 다른 의미로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낯간지러운 노래군."

듣기에 따라서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 대답이었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유치한 노래라는 뜻이 담겨있을 수도 있고 나머지 하나는

"작사가가 선배님이셨습니까?"

다른 내용으로 되돌아온 질문에 그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내려놓았던 적대감을 다시 끓어올려 냉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 냉한 눈 속에 한심함을 담고 있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저 노래가 한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사람들로 인해 모습을 갖추었다는 건 세 살배기 꼬맹이도 아는 것을 자네는 모르는 건가?"

더군다나 저 노래는 나보다 태어난 해가 한참 전에 지났거늘.

패치는 다시 평소처럼 그가 떨어져나가길 바라며 그를 밀어냈고 대답을 들은 그는 다행히 바람대로 패치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들러붙기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처음에는 이성을 잃고 갖은 욕과 함께 주먹까지 휘두르기 일쑤였던 패치가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어깨를 내어주다가 밀어내기로 끝내는 것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밀려난 그는 제 입에서 떠나고 그대로 되돌아온 적도 없는 질문에 멋대로 대답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노래입니다."

가늘게 뜬 푸른 눈이 자신에게 와닿는 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드는지 검은색과 노란색이 함께 어우러진 달밤같은 눈을 검은 밤하늘에게 자신의 일부를 맡긴 초승달처럼 곱게 접으며 한껏 미소를 띄었다. 사람의 눈과 손을 유혹하는 정원의 꽃처럼 아찔한 미소였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눈앞에 있는 상대에겐 바람에 불어들어와 눈을 따갑게 만드는 흙보다 더한 눈 테러였다. 같은 땅을 딛고 있는 발의 방향을 바꾸고 재촉한다. 늘 그러했듯이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뜬다. 또다시 평소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그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입가의 호선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다시 돌아온 그들의 정적에 요란스러우면서도 잔잔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그 빈자리를 메운다. 자리가 부족했던 건지 이내 노랫소리는 그의 귓속까지 넘봤고 무형의 불청객이 거슬렸는지 감았던 눈을 다시 뜬 그는 아이들을 힐끗 보고는 제 일터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단 말입니다."

어느새 웃음은 사라져버렸다.

3.

어느 특정한 부분을 경계로 세상은 두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곳은 온통 검은 세상, 다른 한 곳은 온통 하얀 세상. 그 두가지 색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세상. 그 둘을 구분하게 해주는 끝이 없는 일직선의 경계 위에 유일하게 색을 가진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부터라는 말이 무색하게 흐르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단이 마련되어있지 않은 무채색의 세상은 색을 가진 존재가 들어와 있어도 꿋꿋하게 본래의 존재를 과시하듯 변하는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색을 가진 이 또한 시간이 흐는다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을 작정인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계속해서 서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채로 무채색의 경계와 끝을 찾는 싸움을 하듯 그의 시선 또한 어느 두 곳에도 두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춰서서 적막과 함께 시간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어느 곳도 아닌 곳에 서 있구나."

그와 동시에 시간을 받아들였는지 눈을 감는다.

"너는 나를 기억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는 다시 눈을 뜬다.

"너와 나는 만나지도 않았고 이제 만날 수도 없는데..."

안타까움을 담은 목소리는 말을 남기고 떠나가버렸다. 이윽고 경계에 머물러 있던 발은 하얀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어느 곳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붉은 빛은 잠시 검은 세상을 등졌다.

 

꿈을 안 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꿈을 꾸기 마련이다. 다만 기억하지 못 할 뿐. 늘 잠에서 깨어나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 마냥 사라지는 꿈이 불만스러웠는지 바로 그 잠에서 깬 패치는 찜찜한 기분에 꿈과 함께 날아간 졸음을 붙잡을 생각이 없는지 그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벗어나 옆에 딸린 창문 너머로 눈을 돌렸다. 아직 해가 뜰 준비도 안 된 한밤중이다. 마침 보름인지 제 모습을 자랑하듯 동그랗게 떠있는 노란달이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마냥 어두운 밤하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저렇게 떠있는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그에게 있어선 진절머리 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달갑지 않은 밤하늘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피로감과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마음 한구석에서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어리석은 의문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왜 하필 그녀석과 닮은 거지?

"...정말 피로가 쌓일대로 쌓였나보군."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이 그러한 의문이 떠오른 것이 못마땅했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위로 누워 눈을 감은 채 다시 잠들기를 재촉했다. 분명 그는 노란달을 자랑하듯 내보이는 밤하늘 같은 녀석을 싫어한다. 녀석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의 기억에는 처음 만난 날이 새로운 후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이게된 그 날이 분명하다. 그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정원지기가 되기 전의 자신과 만나기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분명히 존재했고 자신또한 의식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유를 모를 뿐.

그 또한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피해다닌답시고 곧장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 민가까지 오기도 했으나 오히려 그것 또한 일정한 패턴이 되어버렸는지 귀신같이 알아채고서는 자신의 눈 앞에서 떡하니 나타난다. 그 이전에 그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지 그것 또한 알 수 없었다. 좋은 목적이 아니란것만 어렴풋이 눈치챘을 뿐.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패치는 또다시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더이상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았건만 오히려 기다렸다는듯 물밀듯이 밀려오는 잡념, 그것도 피하고 싶은 주체가 장악하고 있다는건 여간 불쾌한게 아니었다. 결국 잠을 재촉하는 것은 포기하고 다시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름대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분명 내일 일할때 상당히 피곤할게 뻔하다. 답답한 마음에 눈가를 쓸어내리던 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침대 바로 옆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잡념이 드디어 떠나갔지만 눈 앞이 선명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어지러운 느낌에 그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채로 길을 잃은 아이가 되어버렸어"

본인의 입으로 낯간지럽다고 했던,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노래의 첫부분이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원사야 정원사야 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인 하얀 정원사야..."

하지만 얼마 가지않아 끊어져버렸다.

한 번의 호흡이 지나가고 감았던 눈을 뜨기위해 천천히 들려지고 있는 눈꺼풀 아래로 푸른색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창문 너머로 향한다.

"이것만큼은 같은 의견이군."

나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그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누구이고 무엇일까?

4.

전날 밤의 그의 우려와는 달리 밤새 잠을 설친 것 치곤 그는 다행히도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버틸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을 뿐이다.

"요건 몰랐지!"

그는 바로 눈 앞의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고 아래에 놓여있는 판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 그가 관리하는 정원 구역은 정원지기들에게도,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다른 곳에 비해 넓은 것도 아니었고 선별된 용사와 모험가들이 이곳에 발을 들이기엔 물자지원이 부족한데다 발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곳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저주받은 검은 땅'과 가장 인접했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이미 다른 정원지기들의 활약으로 다른 정원의 땅이 되어버렸고 땅을 넓힐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곳이 다름아닌 '저주받은 검은 땅'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치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이곳의 정원지기를 자처할 때 다른 정원지기들은 그를 만류하는 한편 골칫덩이를 자진해서 맡는 그를 비웃으면서 후련함을 느꼈다. 공백을 원치않는 정원지기의 법칙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자리였기에. 그는 모든 악조건을 무시했고 그 악조건으로 인해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인해 후회라는게 만들어졌다.

"...여기까지 하죠."

"아 왜애~ 이제 재밌어지려는데!"

안내수칙과 실제상황을 겪는 건 명백히 다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을 글로 적어놓으니 주의할 법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엔 예외라는 게 존재했고 그것이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름아닌 그 예외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눈 앞에서 껄껄 웃고 있는 상대를 보니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고 설령 쌓인 피로가 없다해도 만들어질 판이었다. 정원지기가 없는 이곳은 진작에 다른 정원에 흡수되어야 했지만 오랫동안 살아 온 주민들의 거센 반대와 그들에 대한 나름의 배려로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그 유예기간이 끝나가던 찰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영역을 지킬 운명이었는지 가장 필요한 정원지기의 존재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에잉~ 빡빡하긴!"

그가 물러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재차 권유하던 상대도 결국 포기했지만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가의 미소는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대 덕분에 그는 평생 느끼지 않을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눈 앞의 상대는 오랜시간 동안 정원지기가 없었던 이곳을 이끌어가고 유지했던 사람인데다 다른 그 누구보다 많은 걸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고 찾아다니는 정보를 쥐고 있거나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떠날 수가 없었다.

"자네 '하얀 정원사'라는 노래 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노래입니다만."

사실 그는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원하던 정보를 물어보았다. 질질 끄는 성격도 아닌데다 시간의 여유를 느끼는 취미도 없으니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껄껄 웃음을 짓는 상대와 함께 고스톱이라는 카드 게임을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는 처음 이후론 다시 정보를 묻는 것은 신중하게 고려하고 다시 질문을 꺼냈지만 상대방의 특유의 웃음과 입담에 그저 울화가 치밀어오를 뿐.

"그렇다면 이 노래의 바탕이 된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내용은 알고?"

"노래에 비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으니 잘 모릅니다."

사실 그는 모르진 않았다. 정원지기가 되면 당연하게도 알게되는 게 다름아닌 '정원지기의 기원'일텐데 아무리 훼손되었다지만 유일하게 일부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를 모른다는건 정원지기로서 정원지기의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실제로도 그는 정원지기의 역사에는 관심 없었다. 모른다고 대답한 이유 또한 그러한 마음과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라는 뜻이 담겨있었고 상대방이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는 온전히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달랐다. 상대 아니 GM은 여전히 웃는 낯을 고수하며 그 뜻을 못 알아챘는지 혹은 무시하려는지 그의 대답은 별개라는 듯 짧은 시를 읊었다.

"그의 손길은 하얀 빛무리
그저 감싸 안으며
이리저리 튀어나가며 방황하는 그들을
멈춰세운다
움직이지 않는 검은 바위도
그의 손길을 따라 그들의 곁으로..."

GM이 읊는 시는 다름아닌 '하얀 정원사'의 바탕이 된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초장이었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아름답다고 입을 모아 외치지만 그가 보기엔 여느 평범한 시와 다름 없었다. 그는 GM이 갑작스럽게 시를 읊는 것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걸 알았지만 그가 원하는 정보가 아니었고 그 시를 주체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낌새를 느꼈는지 그가 자리를 떠나는 것 보다 GM의 말이 더 빨랐다.

"시 자체보단 시를 해석한 걸 바탕으로 노래가 만들어졌지."

해석은 나도 모르지만 말야!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마냥 해맑아 보이지만 그 해맑음 덕분에 울화와 후회를 느껴본 그로선 달갑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 시가 발견된 것도 바로 이곳이야."

'정원지기의 기원'이라는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이었고 그 전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도 그 전설이 진짜인 것 처럼 아주 오래된 기록 또한 남아있었다. 빛 바랜 종이와 여기저기 망가져 있는 글이 새겨진 비석. 정원지기의 또다른 일은 그것들을 찾거나 찾은 후 훼손된 것이 있다면 그것들을 모아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그 시 또한 온전히 존재한 게 아닌 정원지기들의 작업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그 전설 자체가 정원지기들과 밀접하지만 정원지기들이 그렇게까지 전설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상당히 오랫동안 정원지기를 맡아 온 자들만이 아는 진실.

정원지기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정원을 넓히는 게 아니었다.

"자네가 찾는 곳은 정원지기들의 오랜 숙원을 풀기 위해선가?"

GM의 말에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GM이 하려는 말은 그가 맨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원하던 대답일 수도 있었다. 그는 GM을 바라보며 원하는 대답을 듣기위해 그의 대답을 내놓았다.

"저를 위해서입니다."

뻔뻔하다고 생각할 법한 말이지만 그의 단호한 목소리와 표정을 보면 뻔뻔하다라는 말보단 당당하다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GM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보다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는 번지르르한 말보단 좋네!"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아니! 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난 모르거덩!

그는 또다시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울화에 표정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고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던지 GM은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이곳으로 온 게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서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주먹이 곧장 앞으로 뻗어나가는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이렇게 또다시 평소처럼 시간이 지나갈게 분명한 상황에 그는 다시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문을 열고 GM의 집을 나서기 전 뒤에서 아직까지도 웃음기가 섞인 GM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가들 뒷꽁무니 보단 진짜를 찾으라구!"

그리고 문이 닫혔다.

5.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어린아이였을 때 유일하게 제자리에 앉아있던 어른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잡고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리 또한 찾아서 이끌어주기까지 했다.
흰 색 일색인 그는 그의 하얀 손길을 내밀어 질서를 만들었고 자리를 찾은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라 흰 빛무리가 됐다.
그리고 그는 하얀 신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동화 '하얀 신'의 첫부분-


"영광입니다!"

GM의 집에서 나온 패치는 얼마 안 가 발목을 붙잡히게 됐다. 물론 상대는 그럴 의도가 없었을테지만 패치는 갑작스럽게 닥쳐 온 상황에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 난데없이 자신의 앞을 막으면서 흡사 신도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데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평소의 패치라면 눈 앞의 상대에게 예의상 인사를 건네며 그대로 지나쳤겠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던 패치가 물었다.

"자네는 혹시 예찬(禮讚)인가?"

"네?"

퍼블리는 정원지기 지망생이었다. 정원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가꾸고 지키고 넓혀가는 그들에 대해 어린아이라면 한 번쯤은 담았을 동경을 퍼블리 또한 담았고 담겨져있는 채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상으로 이루어진 동경에 비해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이라는걸 증명하는게 즐거웠는지 이상을 가로막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상이 막히고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멀어지자 그로인해 자리잡고 있던 동경이 사그라드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개중에는 아직까지 동경이 자리잡고 있는 턱에 막연한 이상을 두고 현실과 끝이 보이지 않는, 불합리한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퍼블리는 후자였다. 정원지기가 되려면 능력 좋은 정원지기의 눈에 들어 그 자리를 넘겨받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고 퍼블리가 사는 구역엔 눈에 들기는 커녕 눈에 보이는 정원지기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만큼 막연하다 못해 존재했었나 싶을 가능성이 가망없는 희망고문처럼 드리워진 곳에 바로 그 정원지기가 발을 들였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정원지기가 된 자가.

"저...혹시 말씀하시는 예찬이 제가 알고 있는 그...."

"...아무것도 아니네. 초면에 실례했군."

아니 실례는 오히려 이쪽이 했는데...

패치가 말한 단어의 뜻과 퍼블리가 알아들은 단어의 뜻은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지칭하는 바가 다를 뿐. 더이상의 대화가 이어나가는걸 원치 않았는지 패치는 그 자리를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오~아직 안 갔넹?"

빨리 갈 걸 그랬군.

언제 나왔는지 그들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곳에서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GM의 모습에 패치는 자연스럽게 미간 사이의 주름을 늘렸다. 매번 휘둘리는 통에 경계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방심하는 자신의 모습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 틈새를 노려 자신의 속을 뒤집는 GM의 모습에 머리를 짚는다. 과연 이번엔 무슨 일인가 싶어 GM을 바라보는 한 편 어느 타이밍에 자리를 떠야하나 고심하는 동안 바로 그 GM에게서 경계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 나왔지만 그 내용은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자네, 드디어 할 일이 생겼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용사가 왔다구~!"

정원너머에서 오는 자들이 용사 혹은 모험가로 선택되는 기준은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우연찮게 정원에 당도해 길을 잃고 돌아갈 곳도 정착할 곳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 몇가지 테스트를 거쳐 뽑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원 어느 곳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다.

"우웅?"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는 바로 후자였다.


"드디어 재밌는 일이 벌어지려나 봅니다?"

노란 빛을 품고있는 눈이 곱게 휘어진다. 사람들은 작은 동물들이나 곤충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작 관찰대상이 되면 불쾌함을 느낀다. 물론 그것은 마땅히 불쾌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주변을 경계하게 된다. 그것은 관찰자가 자신의 존재를 들켰을 때 해당하는 사항이었으므로 주도면밀한 관찰자는 아직까진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여유로운 관찰자는 들키지 않으려고 먼발치에서 흔적을 지우는 한 편 관찰대상이 재빨리 흔적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줬으면하는 상반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존재가 발각된 후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는 오직 관찰자와 관찰대상에게 달렸다.

"당신 곁은 언제나 즐거워 보이네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즐겁지만.

스스로를 관찰자라고 생각하는 치트는 관찰대상인 패치가 있는 구역을 주시한지 꽤 오래되었다.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라해도 흔적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저 의심하거나 의심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시선이 닿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무언가 약간의 재미가 필요하다.

"그 때 말했지만 저는 인형극을 좋아합니다."

물론 기억하시진 못하겠지만.

누군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항상 그곳에 있었던 무대. 그 위에서 누구의 명령도 요청도 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빛날 것이고 눈에 띌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완벽한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무대가 무너져내리고 당신은 인형이 되겠죠."

그 모든 것이 진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이고 그는 그 거짓된 것을 이끌며 완벽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미 그의 손을 거친다는 시점에서부터 그것이 거짓이건 간에 그것은 완벽해질 것이다.

그리고 완벽은 하나의 진실로 무너져내린다.

모든 인형극의 시나리오는 관찰자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관찰자는 그런 시나리오를 자신했고 확신했다. 그리고 관찰자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즐기는 관중의 역할 또한 쥐고 있었다. 진실은 바꿀 수 없었고 족쇄 또한 미리 걸어놓은지 오래였다.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입가를 쓸어가면서 미소를 더듬었다. 곧이어 시작될 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극을 기대하는 어린아이 마냥 눈을 빛낸다. 한차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잔잔하게 내뱉는 것이 태풍이 오기 전의 조용한 날씨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당신을 죽이면서까지 무대를 이끌어 나가는군요."

제가 사랑하는 완벽 답습니다. 제 아무리 추악한 진실이라해도 당신의 완벽과는 별개가 되어버리겠죠.

"그러니 나는 당신을 살리겠습니다."

당신이 죽여버린 족쇄달린 인형으로.

6.

"거기서 뭐하니?"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질문에 대답했다.

"그저 서있습니다."

"정말?"

어느새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또다시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긴 온통 하얗구나."

"당신이 만든 곳이니까요."

"나는 하얗게 만든 적이 없는걸?"

"그들에겐 하얗게 보였던겁니다."

"너도?"

이번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어간다.

"그들은 나를 하얗게 보는구나."

"....그것 또한 그들이 그들을 위해서 거짓으로 보고 있는겁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니?"

그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제 그만 놓아주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에 그는 약간 화가났는지 눈을 치뜨고는 따지듯이 말했다.

"저도 이젠 어른입니다. 당신 없이는 못 살아가는 그런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그리울 뿐.

지금까지 흘러간 시간보다 더 길수도 있는, 어쩌면 영원으로 미뤄질 기약없는 재회에도 그는 그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다음엔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많이 늑장을 부리는게 좋겠구나."

작별인사를 하듯 바로 그의 옆에 있었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을 느낀 그는 목소리를 따라 눈을 돌렸다.

처음부터 그의 곁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들어 잠이 자주 깨는군."

그나마 그에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곧있으면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는지 거뭇거뭇하던 하늘 끝자락에서 어스름한 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밤이 찾아오면 그의 머리카락처럼 붉게 사라지던 태양이 아침이 오면 흰 빛을 뿌리며 다시 떠오르는 것에 묘한 느낌과 사소한 신비감에 잠시동안 멍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에겐 하늘 감상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바로 눈 앞에 닥쳐있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용사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수도 있었고 쓸데없는 기대감을 갖게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정원지기들이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그들이 다름아닌 정원을 넓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아니라 정원의 주민과 정원지기들 또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모험보다는 안전을 추구하는 이들이였기에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정원을 넓히는데 동참하는 이들은 혼자서 개척한다기 보단 용사와 모험가들의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낯선 곳으로 들어와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이루어진 용사와 모험가들에 비해 이곳의 사람들은 인도해야 할 그들을 이루고 있는 감정이 상당히 절제되어 있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자신들 즉 정원의 주민들을 위한 마음가짐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책임전가였다. 기대를 떠맡기고 실패하거나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받지 않는 책임전가. 하지만 그러한 사색에 잠기기도 전에 또다시 당황스러운 만남이 이어졌다.

"자네는 어제.."

"퍼블리 셔라고 합니다!"

분명 어제 마주쳤지만 갑작스러운 GM의 등장과 중대한 소식에 제대로 된 작별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흐지부지 헤어진 상대였다. 이제는 이름까지 알았으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이전에 그는 눈 앞의 상대, 퍼블리가 본인의 이름을 대기 전에도 이미 알고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있었다. 그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퍼블리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태도는 평소에 마주쳤던 사람들을 대한 태도와 확연히 다른데다가 섣부르게 건넨 질문으로 인해 남들 모르게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분명 퍼블리는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절대 그 질문의 의미는 가볍지 않으리라. 그는 내심 눈 앞의 퍼블리가 어제의 질문을 잊어버린 상태이길 바랬다.

"그런데 어제 그 질문은..."

"...그건 잊어주게."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 현실로 와닿는 일은 별로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뱉을 뻔한 한숨을 삼키고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방향을 돌려 이 축복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정원에 그와 같은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랬다.

"왔어?"

그들에게서 몇발자국 떨어져있는 곳에 언제왔는지 모를 GM이 하얀 이를 드러낸 웃는 낯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상황에 그는 결국 한숨을 뱉었다. 그들, 정확히는 패치를 향해 다가온 GM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갖구가!"

특유의 웃음과 함께 건네받은 것은 칼집이 꽂혀있는 작은 단검이었다. 용사 혹은 모험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의 뒤를 밟으며 도움을 주고 새로운 길로 그들을 인도하는 정원지기였기에 그들이 위험할 때 덩달아 위험해질 수 있지만 그는 단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뒤를 밟는 정원지기답게 몰래 용사의 곁에 두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저기..."

GM으로 인해 잠시간 시선에서 벗어난 퍼블리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단검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다시 퍼블리에게로 돌아왔다. 퍼블리는 어제처럼 흐린 끝을 맺고 싶지 않았다. 아니 끝을 맺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오래전에 담았던, 오래전부터 담아두고 있던 현실을 마주함으로써 가라앉았지만 끝이 안보이는 밑바닥을 열심히 차내며 거부해오던 동경이 눈 앞에 다가온 이상에 가까운 이상으로 인해 그동안의 줄다리기에 대한 보상처럼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에 따라오는 일말의 기대감은 더이상의 인내가 지루했는지 녹색의 눈동자와 간절한 목소리에 몸을 실어 그에게로 다가섰다.

"저도 따라갈 수 있게 해주세요!"

물론 그것은 어림없는 소리였다. 만약 이곳에 다른 정원지기들이 있었다면 혀차는 소리와 안타까움과 비웃음이 섞인 우려를 가장한 눈빛들이 일제히 방금 호기롭게 요청을 한 사람에게로 쏟아졌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거절하기 위해 시선을 마주쳤으나 입안에서 맴돌던 다름아닌 그 거절이 쏜살같이 속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갔다. 고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에서 그는 알고 싶지않은 상대의 마음을 깨달았다.

저 눈은 거절하더라도 몰래 뒤따라올 눈이다.

그 깨달음은 의도치 않게 그의 상상을 자극했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의 뒤를 신중에 신중을 가해 밟는 정원지기와 마찬가지로 발을 들인 바로 그 정원지기의 뒤를 밟는 이곳의 주민.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상황인가. 그리고 상상은 두통으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제 할일을 했을터다.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의 뒤를 밟는다면 그 또한 나름의 배려로 모른체 할테지만 저 고집스러운 주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럴 리 없을테지만 어쩐지 늙어가는 기분에 몸의 힘이 빠졌다.

"좋다."

"거절하셔도 따라갈..예?"

거절을 각오하고 선전포고를 하려던 퍼블리는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분명한 허락이었는데도 퍼블리의 머릿속에 제대로 잡기까지는 선전포고의 각오를 되새긴 만큼 길게 이어졌다. 이윽고 드디어 자리를 잡았는지 퍼블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니 이미 뛰면서 눈을 빛냈다. 잠시 진정이 됐는지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퍼블리를 보며 패치는 퍼블리가 쓴 두건사이로 삐져나온 푸른색이 도는 흰 머리카락을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쪽은 행복해보이고 한쪽은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미묘한 상황을 지켜보던 GM은 또다시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것을 패치에게 넘겼다. 그것은 다름아닌 빛바랜 종이였다. 사람의 손길을 탄지 꽤 오래된 것 같은 종이를 펼쳐본 패치는 그 위에 적혀있는 글을 읽어내려갔다.

정원을 거닐고 있는 무리
그 앞의 인연
옛 땅으로
악연으로 변해버린 인연
인연과의 단절
용이 날아오른다.

"이건 뭡니까?"

"옛날에 늬들 몰래 발견해서 꿍쳐둔 시!"

GM이 가리키는 다수는 다름아닌 정원지기를 뜻했다. 그 말을 들어본다면 지금 이 종이에 적힌 시는 어쩌면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만큼 중요한 '정원지기의 기원'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급격하게 밀려오는 두통과 울화가 한꺼번에 치밀었지만 한 편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안도감을 느꼈다. 어울리지 않을 상반된 감정들의 다툼에서 승리자는 안도감이었고 곧이어 진정된 그는 시라고 하기엔 이렇다한 설명이나 비유 없이 핵심만 나타내고 가장 끝의 개연성 없이 이어지는 부분에 의아함이 들었다. 이건 시라기보단

"무언가를 메모 한 것 같군."

하지만 시라고 확신한 데엔 이유가 있을 터. 그는 GM을 바라보며 빠진 부분에 대해 물었다.

"제목은 무엇입니까?"

"그건..."

그에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변한 GM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 분위기에 동조해 그들의 옆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던 퍼블리마저 긴장을 하며 다음 이어질 GM의 말에 집중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기이한 분위기에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패치는 또다시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다시 움직이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시곗바늘 마냥 GM의 입이 열렸다.

"비밀이지롱!"

거의 무의식적으로 패치의 손이 GM의 멱살을 잡았고 맥이 탁 풀린 퍼블리가 실망했다는 기색을 내뱉기 전에 기겁한 채로 패치를 붙잡았다. 온 사방으로 널리 퍼지는 GM의 웃음소리는 그러한 소란을 더욱 보탰다.

Posted by 메멤
,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