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날이 깜깜하군."
시각적 이외에 정신적으로 깜깜해지는건 처음이군.
물론 하얗다하더라도 안보이는건 매한가지라고 생각한 패치는 이곳에 발을 들인 후 치밀어오르는 울화와 두통에 대한 생소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감정에 한껏 속이 제법 뒤틀려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눈을 감으면 그것이 미래라고들 장난식으로 말하지만 눈을 떠도 다를 바가 없으니 그의 속이 답답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와 그의 일행에게서 모습이 겨우 보일 정도로 떨어져있는 당사자는 낯선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느끼기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는지 만면에 웃음을 띈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발길이 끊겼다고 생각되고 알려진 이곳에 발을 들인 바로 그 당사자인 용사는 정원지기인 패치가 보기엔 전혀 용사로서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원지기로서 본 것이기에 이곳의 주민들에 대한 의견과는 다를 수도 있었다.
"이곳은 정원지기가 오랫동안 떠나있던 곳이었으니 그 시간만큼 이곳의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이끌어온 곳입니다."
그런 패치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니면 그저 트집을 잡고 싶었는지 오래된 이야기라도 들려주듯 가벼우면서도 제 나름대로 무게감을 넣은 채 운을 떼는 노인을 패치는 아무런 생각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지기는 그곳에 살고있던 주민들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였지만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이곳엔 시간이 남기고 간 불필요하면서도 어찌보면 상처가 녹아있는, 남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몇몇의 주민들에게 새겨져 있었다. 그 오래된 시간중에 어디에서 새겨졌는지는 본인들조차 몰랐으며 설령 안다해도 외면해버리고 새겨진 바로 그 감정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눈 앞의 노인은 바로 그런 자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니 용사는 저희에게 맡기고 당신들이 좋아하는 낡은 글이나 찾으시길 바랍니다."
노인은 돌려서 말하는 것과 할 말중에 몇마디를 뺀 것에 대한 차이를 모르는지 제 나름대로 선심쓰듯 말하는 모습은 충분히 화를 불러일으킬만 했지만 패치는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일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눈 앞의 노인, 굿하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굿하트는 제 할 말만 하고는 패치가 입을 열을세라 용사를 보러간다는 핑계로 급하게 자리를 떴다. 패치 또한 붙잡을 생각따윈 없었고 애초에 주민이 정원지기에 그들의 일에 대해 행동제약을 걸만한 권한도 이유도 없었다. 굿하트의 말은 대부분 귀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가 텃세를 부린다는 것 쯤은 패치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그에겐 오랫동안 그들을 방치한 불특정 다수의 정원지기에 대한 주민의 불만을 들어줄 이유도 없었고 그 불만을 해소해줄 이유도 없었다. 현재 패치의 마음속엔 주민의 화풀이와 텃세에 대한 괘씸함과 불쾌함을 들일 장소가 없었다. 그의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혼란은 이름 그대로 그의 마음을 전부 어지럽히고 있었다.
"정원지기님!"
어느새 호칭을 정해버렸는지 기대감으로 가득 담긴 목소리가 상념이라는 늪에 젖어있던 그를 건져올렸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색은 그가 두르고 있는 정원지기의 로브처럼 밝은 녹색이었다. 잠깐의 시선을 맞추다가 이내 그의 시선은 또다시 흰 색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기엔 퍼블리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려놓은 흥분으로 인해 그것을 잡아채는 능력이 눌려 밀려나 있었다. 이미 자신이 동행을 허락했으니 퍼블리는 엄연히 그를 따라다닐 권리가 있었다.
"출발하지."
고대하던 간식거리를 입에 문 어린아이 마냥 해맑고 행복해보이는 웃음을 띄고 있던 퍼블리는 허둥지둥 잽싸게 패치의 뒤를 따랐다. 패치는 예상한 적 없는 그의 일행을 한 번 뒤돌아본 후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늪이 더 깊어졌다.
불과 몇분전에 일어났던 일을 오래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꺼내는 것처럼 회상 아닌 회상에 잠겨있던 패치는 다시 천진난만하게 지금의 정신없는 상황처럼 정신없이 휘날리는 파란 머리카락이 달린 용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까 자신에게 텃세를 부리던 굿하트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용사를 잡아세우며 이곳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은 마치 예절교육을 시키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예절교육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웃음을 짓는 손자의 모습 같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굿하트의 모습을 보면 그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됐다. 사람의 얼굴색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을까. 조곤조곤하게 어르는 어투와는 다르게 붉어진 얼굴과 비례해 난폭하게 용사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는 모습은 가까이서 보면 한 명의 비극이었고 멀리서 보면 다수의 희극이었다. 굿하트는 정원지기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또한 정원의 주민. 자신이 살고있는 정원의 구역이 늘어나는 것이 그와 이곳 주민들의 바람이었다. 그것은 정원지기 또한 마찬가지. 비록 악감정을 가졌어도 목적은 같으리라.
"용사님을 설득시킬 방법이라도 내보시오."
실제로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용사는 이미 굿하트의 인내에 대한 시험이라는 수준을 넘어섰다. 심호흡을 한 후 마음을 진정시켜보아도 이리저리 휘날리는 파란 머리카락 사이의 어린아이 마냥 해맑은 얼굴을 다시 마주하면 진정시킨 의미도 없이 오히려 배로 돌아와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미 많은 시간의 틈이 가로막고 있지만 굿하트는 이곳 나름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시절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언제나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는 영웅심리가 넘쳤고 구역을 넓혀가는 데에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것 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그들의 행방에 대해 궁금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정원의 주민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흔한 동화에서 나오는 영웅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어느순간 그들의 선행 아닌 선행은 당연하게 굳어져갔다. 마지막 용사가 이곳을 떠나고 다음 용사가 와서 아름다운 동화의 멋진 절정을 이루리라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러한 기대감을 시간이 질질 끌어 가늘어져 끊어지기까지 아슬아슬한 그 순간 다음 용사가 나타났다. 그 한순간을 기점으로 늘어졌던 기대감이 시간을 무시하고 다시 끌어모아 제 몸집을 키우더니 열정에 몸을 실어 불태웠다. 하지만 불태운건 열정 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친구들을 많이 만들거야!"
지금 저 말을 내뱉는 게 누구의 입인가. 분명 저의 말은 아닐테고 근처에는 아무도 없으니 남은 사람은 용사가 아닌가. 굿하트는 세월이라는 시간을 핑계삼아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넓다고 자신하는 마음으로 앞서 한 설명을 반복했다. 물론 용사가 친구를 만드는건 용사 개인의 자유이니 막을 이유는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곳의 정원 구역을 넓히는 것이라고 인식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기대감은 의미가 없었기에. 또 한 번 장황한 굿하트의 설명이 끝나자 검은 눈을 한 번 깜빡인 용사는 히잉 콧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굳이 넓혀야됑?"
그렇게 굿하트는 폭발했다.
용사의 특이한 성향은 멀리서도 보았고 앞에서 지친 기색으로 축 늘어진 굿하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았다. 이내 자신에게 와서 닦달아닌 닦달을 해대는 굿하트를 힐끗 본 패치는 저 멀리서 뛰어다니는 용사를 주시했다. 사실상 현재상황에 용사가 온다고 해서 이곳 주민들의 바람이자 정원지기의 표면 목표인 구역 즉 땅 넓히기가 이루어질리는 없었다. 앞은 다른 정원지기들과 주민들의 구역, 뒤는 '저주받은 검은 땅'. 제아무리 많은 권한을 쥐고있다는 정원지기여도 그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었다. 없는 땅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없는 그로선 없는 땅을 찾으러가지 않는 용사의 생각에 좋아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애매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원지기의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었지 순전히 그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였다. 애초에 정원지기의 진짜 목표이자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는 땅 넓히기가 아니었다. 땅 넓히기는 그저 진짜 목표를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패치가 생각에 잠기자 묘한 침묵의 상황이 발생했다. 이 순간만큼 퍼블리는 자신이 제 3자의 입장인게 감사한 만큼 원망스러운 점이 없잖아 있었다. 직접적으로 굿하트의 분노와 패치의 침묵인지 무시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을 받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제 3자였기에 직접적인 발언권은 없었다. 괜히 잘못나섰다가 굿하트의 분노의 화살이 자신에게도 꽂힐 수 있었고 경솔한 발언으로 인해 패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다. 묘한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녹색의 눈을 굴리던 퍼블리가 인내심이 다한 굿하트가 소리지를 태세로 입을 열자 당황하여 제지하려는 그 순간
"이곳의 주민과 정원지기는 용사에게 맞춰 인도할 뿐."
누구에게는 길고 누구에게는 짧았을 침묵의 끝에서 패치가 한마디를 내놓았다. 비록 다른 문제 때문에 생각의 대부분을 잡아먹는다 할지라도 그는 지금은 자신이 정원지기라는 걸 인식했다.
"그런 용사의 수준에 맞춰서 가면 될걸세."
가령 보물찾기라던지.
할말을 끝낸 패치는 바로 그 즉시 자리를 떴다. 이쯤하면 어둔한 자라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가 땅을 보물로 비유했다고 알아들은 굿하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지 않은 감정으로 바라보는 정원지기라지만 해결책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찝찝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패치를 흘끗 본 굿하트는 다시 용사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떴고 멍하니 지켜보던 퍼블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패치의 뒤를 좇았다. 뒤에서 다급하게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패치는 또다시 상념에 빠졌다. 그로선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언가를 계속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에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까워지고 있는 발소리에 그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퍼블리를 돌아보았다. 우연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진실인지를 판별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가지의 가설 중에 우연을 제외한 것이 맞다면 그에게 있어서 퍼블리는 가장 경계해야하는 대상이다.(여기서 치트는 자연스럽게 예외로 넘어갔다.) 타인에게 정을 붙이지 않는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정도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이제까지 생각해왔지만 어째서인지 퍼블리는 그렇게 대하기 힘들었다. 어느새 그의 곁까지 따라온 퍼블리를 바라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그러자 녹색 눈이 마주해온다. 한순간 말을 멈춘 패치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 나를 따라오려는 거지?"
패치는 자기가 꺼내놓고도 참 늦게 꺼낸다고 생각했다. 질문을 받은 퍼블리는 눈을 깜빡이고 한껏 광을 내더니 꿈을 꾸는 아이처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원지기가 제 꿈입니다!"
마주하던 푸른 눈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 덕에 빛을 내고있는 녹색 눈은 어둡게 가라앉은 푸른 눈을 볼 수 없었다.
정이란건 붙여선 안 돼.
2.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를 겁니다!"
"미안해. 너의 마음은 받아줄 수가 없어!"
어린 녀석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뭘 하는 거지?
마을 어딘가에서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을 용사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건만 공터에서 웬 어린아이 두명이 누가봐도 연인 혹은 아직 이루어지기 직전인 한 쌍의 남녀가 하는 말을 하고있다. 소꿉놀이라고 치기엔 그들의 표정이 온갖 정성과 힘을 들여 그리다시피 쓴 글씨처럼 진지했을 뿐더러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 다른 아이를 붙잡는 모습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이겠거니 했어도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느껴져 발걸음을 멈추고 짜게 식은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패치의 시선을 받은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르륵 웃으며 패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한 아이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깜빡였다.
"정원지기 아찌. 몰라요?"
"뭘?"
"이거 되게 유명한 연극에서 나오는 건데!"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질문을 건넨 아이는 물론 다른 아이도 까르륵 웃는다. 유명한 연극이 어디 한 둘인가. 거기다가 저런 고백 대사는 널리고 널린터라 굳이 콕 집어서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는 연극은 동화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이 대부분일테니 범위는 줄일 수 있었지만 패치는 굳이 알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이들은 다시 저들끼리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소꿉놀이에 들어갔다. 그 또한 관심을 끊고는 다시 제 갈길로 바삐 발을 돌렸다. 그렇게 아이들은 그의 모습이 손가락 두마디의 모습 정도로 작아져 보일 때까지 어쩌면 그가 사라지고 난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갈 놀이를 즐겼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는 기록자. 나는 당신을 기록할 거예요."
안타깝게도 멀어져가는 그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 정원지기님! 찾았어요!"
가끔 GM의 집에 얼굴을 잠깐 비추는 패치보다는 이곳의 지리를 더 잘 아는 퍼블리가 도움을 자처하며 발에 속도를 가한채 먼저 자리를 떠난 것도 잠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던 패치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까지도 찾아낸 퍼블리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 없이 안내를 청했다. 그런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퍼블리는 기쁘다는 모습을 숨기지 않으며 앞장섰다. 그리고 그는 앞서가는 퍼블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은 그는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고민거리였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는 심정. 그 마음은 다름 아닌 퍼블리를 향하고 있었다.
"피유~!"
그들이 도착한 곳엔 용사가 등에 달려있던 망토를 온 몸에 두르며 머리만 내놓고 작은 숨을 규칙적으로 내뱉었다. 행여나 그 규칙적인 숨이 깨질까봐 먼발치에서 용사를 유심히 살펴보던 패치는 용사의 손에 쥐어져있는 낯선 몽둥이에 의구심을 품는 한편 누군가가 용사를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자리잡은건 다름아닌 두마리의 들개였다.
"이게 뭐다냐?"
"정체불명."
용사를 앞발로 꾹꾹 눌러보고 주위를 돌며 이리저리 살펴보던 들개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 온 또다른 낯선 냄새와 더불어 본인들을 향해있는 낯선 시선에 덩달아 고개를 돌리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패치와 퍼블리의 시선을 마주쳤다. 패치는 그들 또한 이곳의 주민이라 판단하고 간단하게 눈인사로 끝내고 마저 용사에 대해 판단하려고 했지만
"퍼블리! 오랜만이다냐! 오옹~? 그 옆엔 정원지기 아니다냐?!"
"반갑!"
그들의 소란에 용사가 눈을 뜨는 것과 패치가 몸을 숨기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덩달아 놀란 퍼블리 마저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숨겼다. 이윽고 들개들의 방정맞은 사과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숨을 고르느라 그것을 들을 틈은 없었다. 잠시 진정을 되찾은 퍼블리는 숨을 고르고 있는 패치를 보며 문득 든 의문에 행여나 용사에게 들킬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정원지기들은 용사 앞에선 모습을 감춰야하는 거예요?"
어찌보면 뜬금없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물어볼 법한 질문에 잠시동안 눈을 마주하던 패치는 곧바로 돌리면서 그가 두르고 있는 정원지기들이 입는 녹색 로브의 후드를 꾹 눌러쓰며 행여나 다시 눈이 마주칠까 눈까지 감으며 대답했다.
"앞에서 명성으로 주목받는 건 정원사로 만족하고 정원사가 남긴 것을 대신하여 누리고 있는 정원지기들은 그 대신 정원사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숨어서 정원을 지켜나가겠다는 의미네. 어찌보면 이것은 최소한의 양심을 나타낸 것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일세.
분명 그가 하는 말의 뜻은 알지만 무엇을 가리키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던 퍼블리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일 수 밖에 없었고 그대로 넘기기엔 무언가 찜찜했기에 그의 말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기 위해서 재차 묻고자 했지만 갑자기 그들의 위로 올라오는 그림자에 시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고있던 패치 또한 느꼈는지 후드 자락을 잡고있던 손을 놓고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그림자를 만들어낸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 앞에 있는건 앞서 봤던 두마리의 들개보다 훨씬 큰 덩치를 지닌 검은색의 들개였다. 검은 들개또한 시선을 느끼고 눈을 굴려 그의 아래에 있는 패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쪽이 그렇게 처 유명한 정원지기렸다?"
"자네가 저 들개들의 대장인가."
앞서 말했듯이 모든 주민들이 정원지기에게 우호적이진 않았다. 그들의 눈엔 오랫동안 이곳을 떠난 정원지기가 달갑지 않았고 권력과 지휘권을 쥔 채 뒤에 숨어서 나몰라라 상태로 그들의 등을 떠미는 걸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눈은 어느정도는 정확했지만 다른 면으로는 헛다리를 짚었다. 흔히 변명거리로 혹은 흔한 사실인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다라는 점이 패치에게 작용됐다. 오히려 패치는 등 떠미는 정원지기의 등을 붙잡고 앞으로 끌고 갈 사람이었다. 다만 그 사실을 그 앞의 검은 들개가 알 수 있을진 미지수였다. 그렇게 미묘한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익숙한 상황에 퍼블리가 검은 들개를 설득하려는 순간
뻐억-!!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가 들어도 명백히 딱딱한 무언가에 누군가가 맞은 소리였고 그것을 증명하듯 잽싸게 돌아간 그들의 시선 끝엔 피투성이로 쓰러져있는 작은 들개와 마찬가지로 피가 묻은 나무 막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얼어붙었고 그대로 굳어버린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깨버린건 다름아닌 방금 사태의 장본인이었다. 용사는 태연한 얼굴로 나무 막대를 집어들더니 곧이어 제 얼굴높이까지 들어올리곤
"이렇게 앙!하고 물어야징~"
또다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무슨 속셈이지?"
용사를 물어뜯어 죽이겠다고 뛰쳐나가려는걸 퍼블리와 함께 달려있는 네 발 중 두 발을 부여잡으면서 제지해보았고 그마저도 실패 해 어떻게든 용사를 엄호하기 위해서 돌까지 주워들었건만 노란 눈에서 번쩍이던 살기 가득한 붉은 잔상은 사라지고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목소리가 매우 잠잠해진 채 다시 처음처럼 그리고 용사를 해코지하려는 악당으로 보듯이 자신을 경계하는 투로 질문하는 들개의 모습에 패치는 어이가 없는 한편 저 검은 들개의 마음을 손바닥 뒤집 듯 바꿔놓은 용사의 친화력에 감탄 비슷한 평가를 내놓았다. 이렇게 생각에 잠긴다고 해서 저 질문이 도로 들어가는건 아니었기에, 어차피 말해야 할 사실이긴 했지만 그는 들개들이 그나마 용사에 한해서 정말로 우호적인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한 발 멈췄다.
"정원지기는 용사를 무사히 인도해야한다. 애초에 무슨 속셈이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하군."
"이상하다라...그건 내가 처 할말이다. 어차피 이곳 사람들 모두가 처 알고있는 사실 아닌가? 그런데 왜 시치미를 처 떼고 있는 거지?"
시선을 돌리니 아까 피투성이로 싸우던 들개 두마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용사가 던져대는 나무 막대를 쫓아가면서 함께 놀고있었다. 그런 둘에 비해 확실히 대장이라는 역할의 값을 빛내고 있는 검은 들개에게로 다시 시선을 마주하고는 이번엔 직설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자네들이 정원지기에게는 우호적이진 않겠지만 적어도 용사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흥! 의심이 처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정원지기로군."
퍼블리는 둘의 대화에 행여나 싸움이라도 일어날까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계속해서 가라앉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더불어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앞으로 나섰다.
"진정해요 형! 정원지기님은 용사를 인도하기 위해서..."
"용사를 어디로 처 인도한다는 거지?"
"그야 새로운 땅을 찾아서..."
거기까지 말하던 퍼블리는 곧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정원지기가 용사를 인도하는 이유는 용사가 새로운 땅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곳이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이유는 다름아닌 그 새로운 땅이 있을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정원 구역을 침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법행위에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남은 곳이라곤 '저주받은 검은 땅'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그대로 저주받은 땅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고 접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용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러니까 발뺌할 생각말고 얼른 처 말하지 그래 잘나신 요정양반?"
"요정이라니..."
"뒤에서 몰래 도움의 손길을 처 주는게 요정이 아니면 대체 뭐지?"
평생 들어본 적 없고 들어볼일 없다는 생각조차 든 적 없는 호칭에 패치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따지기엔 미묘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호칭에 잠시간 말을 꺼내는걸 멈췄지만 이내 호칭따위엔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 말을 마저 받아갔다.
"요컨데 용사는 믿되 정원지기는 믿지 못하겠다?"
침묵은 긍정이라고들 하고 침묵과 더불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들개의 표정을 본다면 긍정이 맞다는 확인사살까지 들었다. 물론 검은 들개 하나의 의견이지만 엄연히 들개들의 대장이었기에 나머지 들개들의 의사또한 검은 들개에게 반영된다는 전제하에 그들이 용사에게 우호적이라고 판단한 패치는 주민들에겐 비밀이었지만 언젠가는 밝히게 될 진실이자 목적을 말하기 위해 한가지 더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정원지기의 목적에 대해서 잘 아는가?"
"네녀석들 목적이야 땅을 처 넓히는 것이겠지만 그거말고 처 숨기는게 또하나 있다는건 이미 애저녁에 처 눈치챈지 오래다."
"눈치는 있군."
"이곳에 오랫동안 처 살면서 없는게 이상한 거다."
한마디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검은 들개를 보고 패치는 판단을 끝냈다. 이러한 감정 소모적인 대치상황은 의미가 없다는걸 알고있던 패치는 꺼낼 시간까지 늘릴 정도로 무게를 잡고있는 패를 꺼내놓았다.
"보물찾기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군."
3.
"저기..."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또 한 번의 데자뷰를 느낀 패치는 아직도 의구심 가득한 녹색 눈과 마주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째서 정원지기들은 그들이 찾는 것을 감춰온 거예요?"
"질문의 의도가 뭔가?"
"의도같은 건 없어요! 다만 어째서 함께 찾으려고 하지 않았느냐가 궁금한 거예요! 함께 찾는 게 훨씬 빠를텐데...물론 그나마 지금이라도 밝혀서 함께 찾을 순 있지만, 처음부터 말했다면!"
"자네가 한가지 오해하는 게 있군."
퍼블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챈 패치는 퍼블리의 말을 정정해주고자 말 허리를 잘랐다. 퍼블리는 오해라는 말에 자신이 내뱉은 말 중에 무언가 실수라도 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았지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전에 패치의 말이 앞섰다.
"지금이라도 밝혀진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감추어져 오고있네만."
"네?"
"쉽게 말해 밝힌 것은 내 독단이라는 말일세."
타인의 일상을 얘기하듯 가볍다라고드 느낄 수 있을 법한 하지만 어느정도 진중한 어투로 얘기하는 패치였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말은 있는 그대로여도 진중하다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무거웠다. 그 무게를 받아들이기엔 버거웠는지 아니면 자신이 받아들였지만 가늠할 수 없는 무게에 들어 온 순간부터 느껴지지 않는다는 착각이 든 건지 분명하게도 패치의 말을 들었을 퍼블리는 아무런 반응도 못한 채 멍하니 패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꺼풀이 두어번 녹색 눈동자를 쓸어간 후에야 자신에게 들어 온, 제 발 앞에 떨어진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조심스럽고 천천히 자각한 퍼블리는 이내 펄쩍 뛰려는 자신의 발을 간신히 땅에 붙이고는 억눌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그렇다면 정..원지기님은 규칙을 위...반했다는 말인가..요?"
목소리와 더불어 떨리는 녹색 눈동자가 대답을 요구했고 그에 패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큰 비밀을 꺼낸 입과 동일한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굳게 닫혀있는 입은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답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고작 시선을 조금 바꿨을 뿐인데 굳은 입을 대신해 마주하게 된 푸른 눈에는 명백한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그 눈에서 그리고 누군가가 말하고 흔히들 듣게 되는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에서 퍼블리는 대답을 얻었다. 힘이 쭉 빠지는 기분과 함께 대답을 받는 것과 동시에 만들어진 질문이 나지막하게 튀어나왔다.
"어째서 규칙까지 위반하면서 저희를 돕는 건가요?"
앞서 나온 질문과 달리 이번에 받게 된 질문에 패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퍼블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설령 안다고 해도 숨겨야 할 이유도 모를 그런 솔직한 사람이었고 그러한 사람이었기에 솔직한 마음 그대로 말 속에 담겨 패치에게 닿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퍼블리를 보며 패치는 우선적으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예전부터 주민들을 이용해왔지만 암묵적으로 주민들은 그 사실을 애써 사회의 흐름이라는 현실 뿐만 아니라 마음 깊숙히 보이지 않게 묻어두고 그 위에 자신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왔건만 그 뿌리 깊숙한 곳까지 파헤쳐버리는 확인사살이자 진실을 자신이 보란듯이 내던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배신감도 느낄 법 한데도 따져오는 말 대신 걱정을 담은 것에 패치가 의외라는 생각이 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자네들을 위해 규칙을 위반한 게 아닐세."
"네?"
"어차피 모든 정원으로 밝혀질 진실, 이제까지 입을 다문 것은 그들의 입장에선 시간끌기였을 뿐이고 이제는 적극적인 주민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몰린 터라 그 시간끌기마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지."
나는 그저 제일 먼저 무너뜨렸을 뿐.
하지만 그건 누구를 위해서?
안타깝게도 그 대답을 들은 자는 눈 앞의 퍼블리가 아니었다.
"보~물~찾~기이이이이~?"
눈빛을 반짝이는게 여간 범상치 않다. 굿하트는 그나마 흥미를 보이는 용사의 모습에 안도했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에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곳으로 발을 들일 용사를 제일 처음으로 안내하는 역할에 자부심을 갖고 그 세월에 합당하게 웃는 낯을 유지하던 굿하트는 최대한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렇게 자신을 긍정적으로 되새기고 한껏 자애로운 표정으로 무장한 굿하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용사를 예쁜 손주보듯이 부드럽게 대할 마음으로 용사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럼 친구들도 데꼬 가야징!"
"허허 벌써 친구들을 만들었구나?"
대단하다는 칭찬까지 덧붙이며 용사를 추켜세우면서 친구들이 누군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곧이어 누구든 간에 같이 따라가서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거란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대로 모든 것이 동화책 속 이야기 마냥 술술 풀려나가는 기분에 살짝 눈을 감으며 웃고 있던 굿하트는 친구가 왔다는 용사의 말에 감았던 눈을 뜨고 용사의 친구가 된 자랑스러운 주민들을 바라봤다.
"물어왔다냐!"
"귀환!"
그렇게 굿하트는 또다시 폭발했다.
정원지기들은 모든 것의 개방을 목적으로 용사와 모험가들을 지지하며 그만큼 늘어난 주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정원을 넓힌다고들 하지만 어찌보면 구역을 나누는 일에서부터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배려한답시고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붙여놓는다고 해도 그들은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소한 행동으로 인해 이해관계는 틀어질 수 있었고 설령 모든 걸 눈 감아줄 정도로 끈끈한 사이라고 해도 그들의 후손까지 완전하게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이라는 것은 옅어져서 희미해질 정도로 모든 것을 늘이는 재주가 있었다.
"대체 왜 하필 그녀석들인 거냐!"
저 멀리서 들리는 노성에 고개를 돌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난장판을 본다면 누구든 그 앞전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시뻘건 얼굴에더 목에 핏대를 세운 채로 윤 세상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굿하트와 그러한 상대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 용사. 그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를 정신 사납게 맴돌고 있는 들개 두마리의 모습을 본다면 보는 사람이 현기증을 느끼며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난장판이 따로 없군."
냉정한 정원지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봐, 요정."
패치는 아직도 할말이 남았냐는 듯한 얼굴로 검은 들개를 돌아봤다. 무엇이 그리 불만인건지 계속해서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보면 패치 또한 그다지 좋은 기분이 들진 않았다. 잔뜩 찌푸린 얼굴 사이로 번뜩이는 노란 눈에는 깊은 불신이 담겨있었고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그는 무언가 머리를 살짝 치고 가는 듯한 느낌에 눈썹을 찌푸렸으나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검은 들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은 들개는 순간적으로 찌푸려진 그의 눈썹을 놓치지 않고 봤으나 그 부분에 대해선 상대 또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판단을 세우고는 이내 상대가 기다리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아직 네 놈에게 신뢰를 처 하지 않는다."
"그건 이미 알고있는 사항이다만?"
생판모르는 남이 보아도 알만한 태도를 보이고선 굳이 말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확인사살까지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 뒤에 붙을 말이 아직 남았겠지만 검은 들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 멀어지기 위해 외면하는 굿하트 보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검은 들개의 영리함에 용사를 도와줄 조력자로는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첫인상 평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첫인상은 좋게 보여라.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상대방이 호의를 지닌 채 다가온다면 그는 경계하면서 밀어낼 위인이었다. 의도가 어찌됐건 그는 나머지 말을 뭉개버린 상황을 만들었지만 그정도에 뭉개져버릴 만큼 검은 들개는 말을 아끼는 편이 아니었다.
"목표라곤 쥐뿔도 처 보이지 않는 곳에 그나마 목표를 처 내놓았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이제까지 그걸 처 숨겨왔다는 거겠지."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정원지기에 대해 회의감을 가진, 조금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이었고 카드의 뒷면을 보기위해 뒤집듯이 금방 보여지는 패였다. 배신감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말로 불평하고 쏘아붙일 뿐 남은 길이 그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매달린다. 하지만 눈앞의 검은 들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찾는 목적을 처 말해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처 막을 것이다.
검은 들개가 원하는 건 부흥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단순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선 엉켜버린 실타래보다 복잡하게 엉켜있으면서 뭉쳐있는 긍지가 더욱 중요했다.
"자네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눈치 빠른 요정녀석이 처 할 말이 고작 그거냐? 일부러 시치미 처 떼도 소용없다. 네 놈들 뒤가 구리다는 걸 모르는 녀석은 처 어리버리한 꼬맹이들 밖에 없어."
그 말에 패치는 순간적으로 자신과 마주쳤던 녹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퍼블리도 꼬맹이 축에 드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요컨대 목적도 모르고 용사를 도와 함께 찾아내게 됐는데 그다지 좋은 용도로 쓰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긍지에 먹칠을 한다는 뜻이었고 목적을 밝히지 않으면 도움은 커녕 방해를 할 것이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물론 목적을 밝힌다하더라도 그들의 긍지에 안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이라고 불리는 하얀 정원사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자네는 코웃음을 치겠지."
그만큼 의미없는 질문을 꺼낼 정도로 그가 내놓을 대답과 연관이 컸다.
"지금 '정원지기의 기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초장밖에 남지 않은 시밖에 없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지기가 정원을 통제하는 당위성은 하얀 정원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남기고 간 기록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덕에 버티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 또한 한계가 있을 뿐더러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럴 수록 그들은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무슨 수단이라도 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계속되는 정원."
하얀 정원사가 바로 존재했던 시절의 기록.
"그곳에 모든 것이 잠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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