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무엇임까?"
장난스레 다가오는 말투엔 진중함이라곤 땅에 굴러다니는 깃털 만큼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에 채이는 하얀 깃털 하나를 집어올리는 검은 손의 경박스러움이 그 손에 닿아있는 깃털보다 더욱 가벼웠다.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인 사내를 흘낏 보며 아름다운 하얀 깃털을 두르고 있는 하얀 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다른 사람에게 건네줄 이름 따윈 버린지 오래네."
손길이 거두어짐과 동시에 하얀 새가 날아오른다. 하얀 깃털 하나가 또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숲에 한 사람의 발자국이 끊어진 시간의 공백을 메우려는지 한 방향으로 많은 수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발자국의 주인이 가는 곳은 언제나 같은 곳이었다. 반대의 방향으로 찍혀있는 발자국들 중에 숲을 가리키는 발자국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발자국은 희미해지더니 지워져서 제 모습을 감추고는 자신을 이정표 삼아 따라오던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흔한 일이었고 친절하게도 숲 밖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발자국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행여나 앞으로 나아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지 발자국이 사라진 곳에서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보면 빽빽하게 고개를 들어올린 풀들이 어른 발목은 쉽사리 삼켜버릴 만큼 몸을 뻗치고 있는 상태다. 더군다나 제멋대로 자란 풀들은 사람으로 인해 어질러지지 않은 채 자라온 그대로 저들끼리 몸을 꼬아놓고 있었다. 그렇게 항상 호기심 많은 자들을 멋대로 끌어들이고 사라지는 발자국의 주인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알고있으나 그에 개의치 않는지 발자국을 찍어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찍어내는 걸 넘어서 발자국인지 모를 정도로 뒤덮어버리고 싶어할 정도로 괴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괴짜가 숲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
"언제쯤이면 이름을 가르쳐주실라나~"
여전히 무게를 늘릴 생각은 없는지 가볍게 떠오르는 말투는 듣는 사람의 심기를 거슬러 놓기엔 충분했다. 처음 같았으면 두껍게 자리잡은 눈썹을 잘게 떨며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겠지만 몇번이고 겪어온 상황에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눈길조차 날카롭게 찌르지도 않고 묵묵히 제가 하고 있던 일을 이어간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작은 볍씨 한 줌을 한 손에 담아둔 채로 늘 자신에게로 찾아오는 또다른 작은 손님을 대접했고 작은 손님은 얌전히 손 위에 앉아 볍씨 사이의 여린 살들을 찌르지 않게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이 질투가 났는지 어깨 위로 감싸듯이 쥐는 손이 제법 힘을 세게 쥐며 잠깐 동안 붉은 손자국을 만들어낸다. 그런 무례한 행동에도 작은 손님을 향한 대접은 끝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저도 배고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칭얼거림은 거슬렸는지 그림처럼 굳어있는 줄 알았던 입이 움직인다.
"안타깝게도 자네가 만족할만한 양은 없군."
"아아 제가 먹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형식상으로 꺼내는 먹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그림이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그의 근처에서 그림이 아닌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컨데 그의 곁에 자리잡고 있는 두 손님이다.(정확히 한 명은 손님이라기 보단 불청객에 가까웠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웠는지 듣기좋은 소리를 울리고는 아직까지도 자신을 받쳐주고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쓸어내고는 점점 줄어드는 빛줄기를 보고 날아오른다. 분명히 열려있는 문이 아닌 그보다 위쪽에 자리잡은 창문의 어린아이 하나 정도는 들어갈 깨진 틈새로 날아가는 하얀 새에게서 언뜻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날아가버린 새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창문 너머의 하늘을 흘끗보던 그는 하나만 있었던 제 의자로 다가갔지만 곧바로 멈추고는 잘게 눈썹을 떨었다.
"이거 미안함다, 계속 이곳까지 걸어오고 서있느라 다리가 아파서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 하나뿐인 의자가 있었다. 오랫동안 그 의자 위에 앉아있던 사람은 단 한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앉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진즉에 얼굴에다 철판을 깔아놓은 상대를 잘 알고있던 그로선 대꾸한답시고 말을 꺼낸다면 피곤해지는 건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련없이 의자를 포기하고 먼지하나 묻어있지 않은 새 것 같이 깨끗한 책장에 몸을 기댄다. 그렇게 적게나마 제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자하는 모습에 불청객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렸다.
"그런 책장에 어정쩡하게 기대지 마시고 여기 제 무릎에 그 예쁜 엉덩이 좀 기대시는 게 어떠심까?"
그는 선을 넘어선 무례까지 넘어가주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아래 놓여있던 의자대신 상당히 오래된 것치곤 녹슬기는 커녕 새 것마냥 깨끗한 문에 몸을 기대며 자신의 오른쪽 눈가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 행동을 보면 그에게 맞기라도 한 것 같았지만 문지르는 손 아래에는 멍든 자국 하나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안에서 단단하게 잠궜는지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는 문에서 몸을 뗀 불청객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제 발목을 쓸어대는 풀을 헤치다가도 미련이 남는지 뒤를 돌아 얼룩 한 점 없이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작은 탑을 흘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대로 풀 밭을 나간다. 불청객이 사라진 이후에 풀 밭엔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새하얀 탑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전 항상 지각이네요."
쓰다듬는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만히 눈까지 감고 있는 하얀 새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불청객은 늘 그랬듯이 웃음을 띄우며 그의 곁에 다가선다. 하지만 그는 어제의 무례를 용서한 기억은 없었다. 뻗어오는 손을 피해 하얀 새를 끌어안은 상태로 책장으로 다가가는 그의 모습에 불청객은 얼굴에 띄워놓은 웃음과는 정 반대의 말을 꺼낸다.
"이것 참 서운합니다? 너무 딱딱하시길래 어제 농담 좀 한 건데..."
"농담이 언제부터 음담패설로 바뀌었는지 모르겠군."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날 얼음으로 만들어진 송곳으로 내리치는 것처럼 냉정하게 튀어나오는 말에 알아주지 못해 슬프다는 흐느낌과 함께 눈가를 쓸어가는 손에는 물기가 없었다. 그런 장난으로 이루어진 행동에 일일히 코웃음을 치는 것 또한 그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제게 기댄채로 잠에 빠져든 귀여운 새가 깰가 싶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잠든 아기를 품에 안은 마을 어머니들의 모습과 겹쳐보인다. 어제부터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됐던 의자에 앉은 불청객이 무릎 위로 얼굴을 받친 팔을 올려놓고는 웃음기 섞인 말을 꺼낸다.
"아빠는 접니까?"
"나는 아무래도 영원히 자네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군."
분명 꺼낸 말의 앞부분은 영원히 제 속에 간직하겠지. 아니면 상대의 속을 긁어주기 위해 꺼내거나. 이곳에서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많은 시간이 쓸고 가버린 자리에는 있었던 것이 시간과 함께 사라져버리곤 했다. 텅 비어버린 그곳을 방치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 쓸려나갈 때의 아픔 또한 사라져버렸다. 나름대로 깊게 잠겼다고 느꼈던 사색은 제 생각보다 얕았는지 곧바로 수면 위의 현실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얕은 사색에 잠겨있는 동안에 저를 끌어안음으로써 건져올린 불청객 때문이리라. 그 높이있는 머리를 숙인 덕에 제 목덜미에 닿는 뜨겁고 커다란 숨결에 의한 간지러움보다 제 손에 들려있는 따뜻하고 숨소리가 무너지는 게 더욱 신경쓰였던 그는 이번 무례에도 가만히 있었다.
"당신은 정말 그림입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곳에서 변한 것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 비록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며 비록 굳어있는 시간이 더 많지만 적게나마 열리는 입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이 그를 그림처럼 만들고 있었다. 분명히 살아 움직이면서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하나의 사실이 그림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그림에게 빠져버린,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헤매는 비극적인 연극의 주인공처럼 나지막하게 묻는 말은 변성기가 한참 전에 지난 어른의 무게가 달린 낮은 자리에 자리잡는 목소리인데도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아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보다 애처롭게 들린다. 보는 사람 없는 비극적인 연극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상황에 가벼운 바람이 쓸어가며 한층 더 안타까움이 흘러나온다.
그러한 분위기와 반대로 그는 그의 옷 안 속으로 어느샌가 집어넣은 채 다리를 쓰다듬는 손을 무시해줄 정도로 분위기를 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엔 꽤 아팠습니다!"
아까전에 내뱉었던 힘없는 목소리와 달리 목청 좋게 굳게 잠겨버린 깨끗한 문 너머를 향해 소리를 치던 불청객은 어제와는 달리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선다.
"드디어 지각을 면했네요."
이제야 겨우 해가 뜨기 위해 검은 색의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제 빛을 내비추는 시각에 갑작스레 들이닥치고 하는 말이 하얀 새보다 일찍 도착한데에 대한 기쁨이라니. 보통 사람이었으면 저 뻔뻔한 얼굴에 벌컥 화를 내며 제 풀에 지쳐갈 때까지 가겠지만 잠에 들지 않고 깨진 창문 너머로 내려오던 환한 빛이 검은 밤과 함께 사그라드는 모습을 구경하며 하얀 빛을 뽐내고 옅게 그 주위를 맴도는 푸른색을 달며 아침과 함께 찾아 올 작은 손님을 기다리던 그로썬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한 불청객을 보게 되었을 때 아마 벙찐 얼굴이었으리라. 처음 그를 찾아 온 이후로 언제나 자연스럽게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은 불청객은 제 나쁜 손버릇을 고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또다시 제 옷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손을 미처 밀어내지 못하고 당황하면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허리를 단단하게 붙든 다른 손에 의해 그러지 못했다. 작정한 듯 점점 깊숙히 들어오던 손의 주인은 이 시간이 오래가길 빌었지만 늘 그랬듯이 신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뒷 목에서 느껴지는 따가움과 함께 무언가에 휘날리는 작은 바람소리를 달고 온 부드러운 것이 불청객의 어깨를 내려친다. 연신 느껴지는 따가움에 양 손을 놓아버리고는 제 뒷 쪽으로 뻗어보지만 방해자는 쉬이 잡히지 않는다.
"이리와, 퍼블리."
작지만 제법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바람 소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제 몸을 털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요란한 바람 소리의 주인이자 방해자인 작은 손님은 저를 부르는 그에게로 날아간다. 쓰라리는 뒷 목을 문지르던 불청객이 볼멘소리를 툭툭 내뱉는다.
"거 성질 참 더럽네요."
"자네 손버릇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만."
마치 주인에게 칭찬 받는 것처럼 얌전히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는 저 작은 새가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었지만 제 잘못이 있었기에 그는 늘 호선을 그리던 입술을 삐죽 내밀고 노란 눈으로 밉살스러운 하얀 덩어리를 쏘아보는 것으로 그쳤다. 작게 고운 소리를 울리는 하얀 새에게서 눈을 뗀 불청객이 무언가 또 못마땅한 게 있는지 투덜거린다.
"그 새 이름보다 당신의 이름을 먼저 듣고 싶었습니다만?"
"저번에도 지금과 유사한 질문에 답했던 것 같은데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설마 그럴리가요."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말이죠.
덧붙이는 뒷말은 들은 척 않고 하얀 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모습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이어진 지금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평소보다 가늘어지게 만든 불청객은 그 변함없는 모습에 약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 새도 당신처럼 그림이 된 녀석입니까?"
그대로 그림이 되었는지 굳어있는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깨진 창문 너머로 내려오는 빛이 검은 밤을 뿌리쳤을 때 열려있던 문이 굳게 닫혔다. 그 곳에 남아있는 건 그림 뿐이다.
그 이후로 깨진 창문 너머의 색이 네 번 바뀌는 때까지 불청객은 찾아오지 않았다. 다시 검게 바뀌는지 옅어진 빛을 바라보며 그는 하나밖에 없는 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밖에 없는 침대에 몸을 기댄다. 그에게 있어서 잠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작은 손님이 나타나기 전까진 깨어있는 게 더더욱 불필요했었다. 아직 작은 손님이기 전의 하얀 새와 처음 만났던 날처럼 고운 울음소리로 자신을 깨웠던 그 순간을, 손님이란 게 생겨난 이후로 오랜만에 시간에 의해 쓸려버린 곳에서 작게 쌓인 그 날의 기대감을 원하며 눈을 감는다. 깨진 창문 너머로부터 밝은 빛과 함께 제 곁으로 내려오는 고운 울음소리를 기다리며.
그리고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건 푸른색이 은은하게 도는 하얀 깃털에 폭 파묻힌 녹색의 구슬이 아니라 창문 너머의 밤하늘 보다 훨씬 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의 노란 눈동자였다.
"일어나셨슴까?"
진중함대신 장난기가 잔뜩 담겨있는 말투는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했다. 가까이 붙어있는 불청객의 얼굴을 밀어내고 깨진 창문 너머로 내려오는 빛이 환한 걸 보면 작은 손님이 올 시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늘 눈에 띄면서도 익숙한 하얀 색이 없다.
"그동안 마을 의식 때문에 바빠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딱 붙어있던 새는 어디갔슴까?"
그 질문엔 대답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자신이 내놓고 싶었던 질문이다. 늘 고운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오던 작은 손님은 어째서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걸까? 작은 손님은 숨바꼭질을 좋아하기는 커녕 찾아오는 밝은 시간부터 떠나버리는 어두운 시간까지 그의 곁에서 잠시라도 떨어지는 거리마저 아까워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찾아오지 않은 건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숨이 흐트러진 그의 등을 두드리던 불청객은 말없이 자리를 뜬다. 열려있던 문이 닫히고 검은 밤보다 더한 정적이 그를 휩쓴다.
"의식은 언제나 요란한 주제에 지루함다."
게다가 당신을 만난 이후로 갈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창문의 깨진 틈 사이로 날아들어오던 작은 손님이 오지않은 그 날부터 다시 꾸준히 밝은 빛이 내려올 때마다 찾아오던 불청객은 커다란 손님으로 바뀌어있었다. 작은 손님의 부재는 커다란 손님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는지 창문 너머의 색이 6번이나 바뀐 지금까지 아무런 말 없이 커다란 손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던 커다란 손님은 대답에 대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지만 이번만큼은 예상을 눌렀다.
"어째서?"
"예?"
언제나 여유로웠던 얼굴이 이번엔 한껏 당황을 담아낸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푸른 눈에 커다란 손님은 더이상 아무런 의문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와 만나게 된 것이 어째서 갈 이유가 없게 된 건가?"
눈꺼풀이 노란색을 한 번 쓸어간다. 이내 부드러움을 머금은 미소가 빠르게 새겨지더니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야 당신이 진짜니까 말입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손님이 날숨과 함께 이야기를 내놓기 시작한다.
"저희 마을엔 아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진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한 마법사가 풀 한포기 없는 황폐한 땅 위에 작은 탑을 세웠다.
마법사는 탑에 여러가지 마법을 걸어놓고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마법사가 떠난 후 햇빛을 받은 탑은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탑이 빛을 낸 순간 탑을 중심으로 황폐했던 땅 위엔 풀이 돋아났고 나무가 자랐으며 꽃이 피어났다.
비옥해진 땅 위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어느새 커다란 마을이 만들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또다른 마법사가 나타나 탑을 지키기 시작했다.
탑은 늘 아름답게 빛났고 마법사는 탑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어졌다.
많은 시간이 흘러가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가운데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탑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탑을 없애기로 결정했지만 탑을 지키던 마법사는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마법사의 마법에 탑을 없애려던 마을 사람들은 물러났지만 마법사와의 사이는 매우 나빠져버렸다.
어느날 마법사가 잠시 탑을 비운 틈을 타, 마을 사람들은 탑을 무너뜨렸다.
탑이 무너진 그 순간 비옥했던 땅이 황폐해지고 풀과 꽃은 시들었으며 나무는 말라버렸다.
돌아온 마법사는 크게 슬퍼하며 탑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새로 세워진 탑은 새하얀 탑이었다.
다시 세워진 탑 주위로 다시 풀이 돋고 꽃이 피며 비옥한 땅이 되었지만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면서 마을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숲은 마을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며 탑을 감쌌다.
마을 사람들은 숲 근처에서 마을을 새로 만들어내고는 매년마다 숲을 향하여 마법사에게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집마다 그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의 책장에 꽃여있는 많은 책들 중에선 없는 책이다.
"매년 열리고 있고 얼마전에 끝난 의식은 이야기 마지막 부분의 마법사에게 잘못을 비는 겁니다."
의식의 이름은 자비라고 불리지요.
자비라는 의식에선 마을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대표로 뽑는다. 대표로 뽑힌 사람은 하얀 돌을 든 채 마을 중앙에 만들어진 가장 높은 봉대 위의 의자에 앉아 숲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밑에선 한껏 치장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애절한 노래를 부른다. 노래 속엔 마법사에 대한 사과와 자비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고 봉대 위의 대표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하얀 돌에 입을 맞추고선 숲을 향해 있는 힘껏 던진다. 여기서 의식의 대표로 뽑히는 조건은
"붉은 머리카락입니다."
손가락 사이로 얽히는 붉은 색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잘못을 받아줄 마법사와 똑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을 대표로 세우는 거죠."
하지만 붉은 머리카락은 흔하진 않았고 대표로 뽑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붉은 기가 도는 갈색머리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의식이 끝난 후에는 다시 비옥한 땅을 만들어준 마법사에게 감사하며 결혼을 준비하던 연인이 결혼식에 입을 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어떻게 생각하심까?"
그림으로만 봐왔던 마법사님.
의식의 주인공인 마법사는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가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마법사를 눈에 담던 커다란 손님 또한 더이상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고 조용히 떨어져 열려있는 문 밖으로 나선다. 동화책 속의 마법사처럼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감고 앉아있다.
"퍼블리."
어제 꺼냈던 이야기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마냥 태연하게 말을 꺼내는 손님의 말을 자르고 그가 꺼낸 건 다름아닌 하얀 새의 이름이다.
"예전 마을에서 살았던 아이의 이름이지."
하지만 이번에 말하는 대상은 달랐다. 예전 마을은 탑이 무너지기 전의 마을임을 손님은 눈치챘고 새로운 탑을 지은 마법사가 옛날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나는 스승님의 마지막 마법을 찾아다녔고 오랜 여행 끝에 마침내 찾았지."
처음 탑을 만든 마법사는 붉은 마법사의 스승이었다. 스승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하얀 탑을 발견한 그는 스승의 마법을 기리기 위해 탑을 지키기 시작했다. 탑을 찾아오는 손님은 전부 마을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언제나 친절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탑을 찾아오는 손님은 점점 줄어들었고 몇십년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 마법사를 꺼림칙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10년 쯤 지났는데 오랜만에 온 손님은 웬 아이였네."
파란 두건 속에 전부 집어넣지 못하고 삐죽 나온 푸른기 도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늘 눈을 빛내며 마법사를 찾아오고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마을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사람들과 그다지 살갑게 지내지 않은 마법사는 짧게 대답해주거나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고 그것마저도 좋았는지 아이는 쉴새없이 말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1년이 지났을 때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찾아왔네."
어른들과 아이는 별개였다. 애초에 어른들은 아이가 탑을 찾아오는지조차 몰랐다. 다짜고짜 찾아온 어른들은 탑으로 온 목적을 꺼냈다.
"마을 한가운데를 차지한 탑이 거슬리니 무너뜨리겠다고 하더군."
당연하게도 마법사는 반대했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꺼내는 아이와 달리 마법사를 설득하기 위한 말을 꺼냈고 끝에는 협박까지 꺼내놓았다.
"그 일로 인해 은근히 틀어져있던 마을 사람들과는 공개적으로 틀어졌고 1년 새에 정든 아이가 나름대로 걱정 돼서 더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다그쳤지."
그런데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더군.
"싫어요! 오지 말라는 이유 어른들 때문이죠? 탑을 무너뜨리려는 어른들이 나쁜 거예요! 저도 여기서 탑을 지킬 거예요!"
호기롭게 외친 것과 달리 허망하게도 탑 밖으로 내쫓긴 아이는 그 날 이후로 계속해서 탑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마법사는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스승님의 기일이 되는 날 스승님의 무덤에 가기 위해 잠시 탑을 비웠네."
사실 그는 스승이 탑에 남긴 마법을 전부 발견해낸지 오래였다. 탑을 무너뜨려도 스승의 마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탑을 무너뜨리는데 반대한 이유는 그저 스승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라는 어린애같은 고집 때문이었다. 소중하게 지켜왔던 주제에 스승이 만든 탑이 다른 마법(자신의 마법까지도)이 닿지 않고 온전한 것을 원하던 마법사는 흔한 보호마법 하나 걸지 않고 제가 자리를 비운 걸 마을 사람들이 모를 거라는 안일한 방심으로 인해 수많은 세월 동안 지켜왔던 탑이 무너졌다.
"무너진 탑을 봤을 땐 허탈함이 느껴졌지만 무언가의 강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지."
생각보다 그의 마음은 덤덤했다.
무너진 잔해 아래로 튀어나온 작은 손을 보기 전까진.
"내친 이후로 아이가 들어오지 못하게 항상 문을 잠궜네."
몇번이고 잠긴 문을 두들기던 아이는 어느날 꾈 써서 문보다 위쪽에 자리잡은 창문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렇게 창문이 깨지면서 어린아이 하나 정도는 들어갈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하필 꾀를 쓴 날은 마법사가 탑을 비운 스승의 기일이자 마을 사람들이 탑을 무너뜨린 날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그 탑 안에 아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탑을 무너뜨리기 위한 포탄을 쐈다.
"정이란건 대단하더군."
시간이 남아있는 감정을 쓸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터져나와 붉게 물든 채 눈을 감은 아이의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마법사는 새로운 탑을 만들어냈다.
아이의 머리 색을 닮은 무덤의 비석 같은 새하얀 탑을.
그렇게 아이는 탑 아래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숲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숲에 접근하지 못하고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주를 걸었다."
마을이 사라진 사람들은 하나의 진실이 빠진 이야기 그림책을 만들었고 마법사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원히 그림으로 남았다.
"감정에 휩쓸려 섣불리 건 저주 때문에 나는 저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 저주에 걸린 자들의 후손이 존재하는 이상 이 탑을 나갈 수 없게 됐고 세월을 보내게 됐지."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그대로 깨뜨렸을 거라고 만들어둔 창문의 깨진 틈새로 새 한마리가 날아들어왔다. 푸른기가 도는 하얀 깃털이 두건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과 그렇게나 똑같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새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줬네."
퍼블리. 아이를 닮은 새는 아이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손님은 이야기가 끝났는지 입을 굳게 닫은 마법사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럼 제가 저 마을 출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반겼고 유일하게 마을을 벗어날 수 있는 그를 극진하게 대했다. 이미 그가 마법사가 있는 탑으로 온 시점에서부터 그는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 거나 다름 없었다. 침묵으로 긍정하던 마법사가 한참만에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연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외지인이더라도 탑을 발견할 수 없게 마법을 걸어놨다고 생각했던 마법사는 자신의 허술함에 조용히 혀를 찼다. 제 저주로 인해 이름을 버리게 된 마법사라지만 이렇게나 약해지다니 스승의 밑에서 열심히 수련하던 과거의 자신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면 기함을 토했을 거다. 눈꺼풀을 내리면서 눈을 감춘 마법사는 또다시 그림처럼 앉아있었고 그와 동시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생각보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치트."
짧게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가벼웠지만 그 속에 담긴 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챈 푸른 눈이 잘게 흔들린다.
"제 이름입니다."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신호탄으로 마법사가 손을 들어올려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린다.
마법사는 또다시 새로운 손님에게 정을 주고 말았다.
"이거 어떱니까?"
화려하게 치장된 천 옷을 들고 와서는 다짜고짜 묻는 치트의 모습에 마법사는 미간을 찌푸린다. 창문 너머의 색이 바뀐지 10번은 넘어가는 그와 마법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마법사에게 다가가던 치트는 배려라는 걸 배워왔는지 조금 떨어진 거리를 두며 부드럽게 말을 건네왔고 마법사는 무시하던 말들에 일일히 대답까지 해주는 정성을 키우기 시작했다. 들고 온 옷을 마법사에게 가까이 들이대며 기대 섞인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꼭 어른에게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쓸데 없이 화려하군."
하얀 천 위로 수놓아진 금빛 실들이 눈을 사로잡았지만 알고 있는 의복 모습이 아주 오래 전에 멈춰버린데다 소박하게 옷을 입고 다니던 마법사로선 눈 앞의 옷은 쓸데없이 화려한 천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냉정한 대답에 짐짓 실망했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같다.
"이건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에 입는 옷이라구요!"
그런 말에도 가늘게 뜬 눈은 커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억지로 마법사의 품에 옷을 안겨주는 그가 잽싸게 덧붙였다.
"결혼식날 신랑이 입는 옷입니다."
아니다. 사실 신부 옷이다.
하지만 마법사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리가 없었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에 마법사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제 품으로 들어온 신부 옷을 쏘아봤지만 눈에 들어오는 천의 하얀 색깔에 작은 손님을 떠올린다. 손 안에 들어오는 따뜻함 온기와 부드러운 흰 깃털의 감촉을 떠올리며 천을 쓸어내리는 마법사의 모습은 마치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 같이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그런 마법사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말한다.
"나중에 그 새를 찾았을 때 곁에 둘 수 있게 새장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천을 쓸어내리던 손이 멈춘다. 그리고 말을 끝낸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열려있는 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그는 언제나 자리를 뜨곤 했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갑자기 시간이 멈추는 듯한 착각이 든 마법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알 수 없는 농간의 손길은 시간을 늘이는 것 만으론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또다시 손을 휘두른다.
"패치."
문 밖을 나서려던 발이 멈춘다.
"내 이름일세."
아이가 죽고 하얀 탑을 세우며 아이를 죽인 마을 사람들과 아이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죄책감의 원망을 향한 저주로 인해 탑에 갇혀버리고 마법의 힘을 대부분 잃어버린 바로 그 날 이후로 영원히 버리게 될 줄 알았던 이름이 다시 올라온다. 그것이 누군가의 농간인지 자신의 의지인지 알 길은 없었고 중요하지 않았다. 마법사로서의 자격을 잃은 그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름을 들은 자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본다.
"예쁜 이름이네요."
그리고 문은 닫혀 있었고 그 앞에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안에 남은 사람은 단 한사람 뿐.
그림으로 남았던 마법사는 사라지고 패치만이 남았다.
그 날 패치는 하루종일 고민에 빠져들었다. 치트가 옷을 두고 간 의도는 명백했다. 더군다나 제 몸에 딱 맞아보이는 옷은 누가봐도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소박하게 살아온데다 탑에 갇힌 이후로 늘 같은 옷만 입고 살아온 그는 화려한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를 위해 옷을 만들었을 치트를 떠올리며 이대로 버리기엔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붙잡고 고민을 하던 그는 결국 한 번 입어보기로 결심했다. 일부러 바닥에 흘러내리도록 길게 늘어져있는 천을 슬쩍 들어올리며 어색해하던 그는 다리 사이가 휑한 낯선 감각에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래도 만들어온 정성을 생각해서 이번 한 번만 입은 모습을 보여주자고 결심한 그는 침대 위로 옷이 최대한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몸을 기대고 내일 날이 밝을 때 자신을 깨울 치트를 기다리며 잠에 빠져든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얼마나 창문 너머의 색이 바뀌었을까. 잠들어 있던 그는 전혀 모를 것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로 아무도 깨워주는 사람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패치는 무언가 큰 충격에 빠진 얼굴로 몸을 반쯤 일으킨다.
"저주가..깨졌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는 발작하듯이 침대에서 튀어나오며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어제끼고는 언제나 막혔었던 문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맨 발에 제 발목까지 삼킬 정도로 자라있는 풀들이 따가울 법도 한데 그는 아랑곳 않고 풀들을 밟아대며 탑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동안 뛰어본 적 없는 다리가 쓰라릴텐데도 그는 달리는 걸 멈추지 않는다. 턱 끝까지 올라온 숨보다 제 머리 위부터 압박하는 불안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그는 달릴 수 밖에 없었다. 기어이 마을에 다다른 그가 헛구역질을 하는 건 한계까지 달려 차오른 숨 때문일까 그의 눈 앞에서 벌어진 광경 때문일까.
"하...이런 미친.."
온통 붉었다. 붉은 기 도는 갈색머리를 지닌 사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리뿐만 아니라 온 몸이 붉었다. 제게 뻗어오는 비릿하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차오른 숨과 더불어 제 속을 뒤집어 놓는다. 용케 입을 막지 않고 붉은 색으로 물든 마을을 눈에 담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결을 탄 비릿한 혈향이 자꾸 그의 곁을 맴돌며 괴롭힌다. 그것이 마치 마약이라도 된 듯이 속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머릿속 마저 헤집어놓는다. 좋지 않은 환상을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 어찌보면 마약보다 더 악질적이다. 그렇게 마을 깊숙히 들어서던 그가 결국 멈춘다.
"아..."
잔인한 광경과는 맞지 않게 저멀리 앙증맞은 새장이 보인다.
깨진 창문 틈새로 제가 들어갈 크기를 만들어 놓고 뿌듯해하는 어린아이가 보인다.
그 앙증맞은 새장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하얀 덩어리가 보인다.
그 작은 탑 속에서 제가 오길 기다리며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을 하얀 머리카락의 아이가 보인다.
새장 속의 하얀 덩어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탑의 잔해 아래에 깔려있는 아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우욱..우웨엑!"
오랜 세월동안 아무것도 들어가있지 않았을 빈 속을 게워낸다. 게워내도, 게워내도 끝없이 게워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아 예쁜 것만 보여드리고 싶은데 말임다."
장난스레 다가오는 말투엔 진중함이라곤 땅에 흩뿌려져 있는 혈흔 만큼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뒤에서 끌어안는 손이 그렇게 차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저는 워낙에 질투가 심해서 말입니다. 당연히 저 새는 거슬릴 수밖에 없지 않겠슴까?"
하얀 천 안을 파고드는 손길이 너무나도 소름끼친다.
"탑을 발견할 수 있었던건 간단합니다."
저도 마법사입니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섞인 비밀이 귓가를 맴돈다.
"처음엔 단순히 산 속에 숨겨진 탑과 마법 때문에 접근했슴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늘보다 따갑다.
"그런데 그 탑 안에서 보게 된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지 뭡니까?"
그림책 속에 표현된 마법사 본인의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그림이여.
"그렇게 저는 매일 당신을 찾아오고"
그림인데 불구하고 살아있는 자를 유혹하는 살아있는 그림이여.
"당신을 찾아오는 새를 죽였습니다."
어서 그림에서 나와 당신을 보고 반해버린 내 마음을 책임지시길.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듣고"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 속에서 끌어내리라.
제 몸을 더듬는 손길에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는 무너져내린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림책 속에서 나온 나의 그림 신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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