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트패치] 그림신부

단편 2016. 2. 14. 23:53

"이름이 무엇임까?"

장난스레 다가오는 말투엔 진중함이라곤 땅에 굴러다니는 깃털 만큼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에 채이는 하얀 깃털 하나를 집어올리는 검은 손의 경박스러움이 그 손에 닿아있는 깃털보다 더욱 가벼웠다.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인 사내를 흘낏 보며 아름다운 하얀 깃털을 두르고 있는 하얀 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다른 사람에게 건네줄 이름 따윈 버린지 오래네."

손길이 거두어짐과 동시에 하얀 새가 날아오른다. 하얀 깃털 하나가 또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숲에 한 사람의 발자국이 끊어진 시간의 공백을 메우려는지 한 방향으로 많은 수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발자국의 주인이 가는 곳은 언제나 같은 곳이었다. 반대의 방향으로 찍혀있는 발자국들 중에 숲을 가리키는 발자국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발자국은 희미해지더니 지워져서 제 모습을 감추고는 자신을 이정표 삼아 따라오던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흔한 일이었고 친절하게도 숲 밖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발자국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행여나 앞으로 나아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지 발자국이 사라진 곳에서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보면 빽빽하게 고개를 들어올린 풀들이 어른 발목은 쉽사리 삼켜버릴 만큼 몸을 뻗치고 있는 상태다. 더군다나 제멋대로 자란 풀들은 사람으로 인해 어질러지지 않은 채 자라온 그대로 저들끼리 몸을 꼬아놓고 있었다. 그렇게 항상 호기심 많은 자들을 멋대로 끌어들이고 사라지는 발자국의 주인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알고있으나 그에 개의치 않는지 발자국을 찍어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찍어내는 걸 넘어서 발자국인지 모를 정도로 뒤덮어버리고 싶어할 정도로 괴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괴짜가 숲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

"언제쯤이면 이름을 가르쳐주실라나~"

여전히 무게를 늘릴 생각은 없는지 가볍게 떠오르는 말투는 듣는 사람의 심기를 거슬러 놓기엔 충분했다. 처음 같았으면 두껍게 자리잡은 눈썹을 잘게 떨며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겠지만 몇번이고 겪어온 상황에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눈길조차 날카롭게 찌르지도 않고 묵묵히 제가 하고 있던 일을 이어간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작은 볍씨 한 줌을 한 손에 담아둔 채로 늘 자신에게로 찾아오는 또다른 작은 손님을 대접했고 작은 손님은 얌전히 손 위에 앉아 볍씨 사이의 여린 살들을 찌르지 않게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이 질투가 났는지 어깨 위로 감싸듯이 쥐는 손이 제법 힘을 세게 쥐며 잠깐 동안 붉은 손자국을 만들어낸다. 그런 무례한 행동에도 작은 손님을 향한 대접은 끝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저도 배고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칭얼거림은 거슬렸는지 그림처럼 굳어있는 줄 알았던 입이 움직인다.

"안타깝게도 자네가 만족할만한 양은 없군."

"아아 제가 먹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형식상으로 꺼내는 먹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그림이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그의 근처에서 그림이 아닌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컨데 그의 곁에 자리잡고 있는 두 손님이다.(정확히 한 명은 손님이라기 보단 불청객에 가까웠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웠는지 듣기좋은 소리를 울리고는 아직까지도 자신을 받쳐주고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쓸어내고는 점점 줄어드는 빛줄기를 보고 날아오른다. 분명히 열려있는 문이 아닌 그보다 위쪽에 자리잡은 창문의 어린아이 하나 정도는 들어갈 깨진 틈새로 날아가는 하얀 새에게서 언뜻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날아가버린 새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창문 너머의 하늘을 흘끗보던 그는 하나만 있었던 제 의자로 다가갔지만 곧바로 멈추고는 잘게 눈썹을 떨었다.

"이거 미안함다, 계속 이곳까지 걸어오고 서있느라 다리가 아파서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 하나뿐인 의자가 있었다. 오랫동안 그 의자 위에 앉아있던 사람은 단 한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앉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진즉에 얼굴에다 철판을 깔아놓은 상대를 잘 알고있던 그로선 대꾸한답시고 말을 꺼낸다면 피곤해지는 건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련없이 의자를 포기하고 먼지하나 묻어있지 않은 새 것 같이 깨끗한 책장에 몸을 기댄다. 그렇게 적게나마 제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자하는 모습에 불청객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렸다.

"그런 책장에 어정쩡하게 기대지 마시고 여기 제 무릎에 그 예쁜 엉덩이 좀 기대시는 게 어떠심까?"

그는 선을 넘어선 무례까지 넘어가주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아래 놓여있던 의자대신 상당히 오래된 것치곤 녹슬기는 커녕 새 것마냥 깨끗한 문에 몸을 기대며 자신의 오른쪽 눈가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 행동을 보면 그에게 맞기라도 한 것 같았지만 문지르는 손 아래에는 멍든 자국 하나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안에서 단단하게 잠궜는지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는 문에서 몸을 뗀 불청객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제 발목을 쓸어대는 풀을 헤치다가도 미련이 남는지 뒤를 돌아 얼룩 한 점 없이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작은 탑을 흘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대로 풀 밭을 나간다. 불청객이 사라진 이후에 풀 밭엔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새하얀 탑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전 항상 지각이네요."

쓰다듬는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만히 눈까지 감고 있는 하얀 새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불청객은 늘 그랬듯이 웃음을 띄우며 그의 곁에 다가선다. 하지만 그는 어제의 무례를 용서한 기억은 없었다. 뻗어오는 손을 피해 하얀 새를 끌어안은 상태로 책장으로 다가가는 그의 모습에 불청객은 얼굴에 띄워놓은 웃음과는 정 반대의 말을 꺼낸다.

"이것 참 서운합니다? 너무 딱딱하시길래 어제 농담 좀 한 건데..."

"농담이 언제부터 음담패설로 바뀌었는지 모르겠군."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날 얼음으로 만들어진 송곳으로 내리치는 것처럼 냉정하게 튀어나오는 말에 알아주지 못해 슬프다는 흐느낌과 함께 눈가를 쓸어가는 손에는 물기가 없었다. 그런 장난으로 이루어진 행동에 일일히 코웃음을 치는 것 또한 그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제게 기댄채로 잠에 빠져든 귀여운 새가 깰가 싶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잠든 아기를 품에 안은 마을 어머니들의 모습과 겹쳐보인다. 어제부터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됐던 의자에 앉은 불청객이 무릎 위로 얼굴을 받친 팔을 올려놓고는 웃음기 섞인 말을 꺼낸다.

"아빠는 접니까?"

"나는 아무래도 영원히 자네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군."

분명 꺼낸 말의 앞부분은 영원히 제 속에 간직하겠지. 아니면 상대의 속을 긁어주기 위해 꺼내거나. 이곳에서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많은 시간이 쓸고 가버린 자리에는 있었던 것이 시간과 함께 사라져버리곤 했다. 텅 비어버린 그곳을 방치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 쓸려나갈 때의 아픔 또한 사라져버렸다. 나름대로 깊게 잠겼다고 느꼈던 사색은 제 생각보다 얕았는지 곧바로 수면 위의 현실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얕은 사색에 잠겨있는 동안에 저를 끌어안음으로써 건져올린 불청객 때문이리라. 그 높이있는 머리를 숙인 덕에 제 목덜미에 닿는 뜨겁고 커다란 숨결에 의한 간지러움보다 제 손에 들려있는 따뜻하고 숨소리가 무너지는 게 더욱 신경쓰였던 그는 이번 무례에도 가만히 있었다.

"당신은 정말 그림입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곳에서 변한 것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 비록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며 비록 굳어있는 시간이 더 많지만 적게나마 열리는 입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이 그를 그림처럼 만들고 있었다. 분명히 살아 움직이면서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하나의 사실이 그림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그림에게 빠져버린,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헤매는 비극적인 연극의 주인공처럼 나지막하게 묻는 말은 변성기가 한참 전에 지난 어른의 무게가 달린 낮은 자리에 자리잡는 목소리인데도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아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보다 애처롭게 들린다. 보는 사람 없는 비극적인 연극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상황에 가벼운 바람이 쓸어가며 한층 더 안타까움이 흘러나온다.

그러한 분위기와 반대로 그는 그의 옷 안 속으로 어느샌가 집어넣은 채 다리를 쓰다듬는 손을 무시해줄 정도로 분위기를 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엔 꽤 아팠습니다!"

아까전에 내뱉었던 힘없는 목소리와 달리 목청 좋게 굳게 잠겨버린 깨끗한 문 너머를 향해 소리를 치던 불청객은 어제와는 달리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선다.

 

"드디어 지각을 면했네요."

이제야 겨우 해가 뜨기 위해 검은 색의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제 빛을 내비추는 시각에 갑작스레 들이닥치고 하는 말이 하얀 새보다 일찍 도착한데에 대한 기쁨이라니. 보통 사람이었으면 저 뻔뻔한 얼굴에 벌컥 화를 내며 제 풀에 지쳐갈 때까지 가겠지만 잠에 들지 않고 깨진 창문 너머로 내려오던 환한 빛이 검은 밤과 함께 사그라드는 모습을 구경하며 하얀 빛을 뽐내고 옅게 그 주위를 맴도는 푸른색을 달며 아침과 함께 찾아 올 작은 손님을 기다리던 그로썬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한 불청객을 보게 되었을 때 아마 벙찐 얼굴이었으리라. 처음 그를 찾아 온 이후로 언제나 자연스럽게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은 불청객은 제 나쁜 손버릇을 고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또다시 제 옷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손을 미처 밀어내지 못하고 당황하면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허리를 단단하게 붙든 다른 손에 의해 그러지 못했다. 작정한 듯 점점 깊숙히 들어오던 손의 주인은 이 시간이 오래가길 빌었지만 늘 그랬듯이 신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뒷 목에서 느껴지는 따가움과 함께 무언가에 휘날리는 작은 바람소리를 달고 온 부드러운 것이 불청객의 어깨를 내려친다. 연신 느껴지는 따가움에 양 손을 놓아버리고는 제 뒷 쪽으로 뻗어보지만 방해자는 쉬이 잡히지 않는다.

"이리와, 퍼블리."

작지만 제법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바람 소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제 몸을 털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요란한 바람 소리의 주인이자 방해자인 작은 손님은 저를 부르는 그에게로 날아간다. 쓰라리는 뒷 목을 문지르던 불청객이 볼멘소리를 툭툭 내뱉는다.

"거 성질 참 더럽네요."

"자네 손버릇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만."

마치 주인에게 칭찬 받는 것처럼 얌전히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는 저 작은 새가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었지만 제 잘못이 있었기에 그는 늘 호선을 그리던 입술을 삐죽 내밀고 노란 눈으로 밉살스러운 하얀 덩어리를 쏘아보는 것으로 그쳤다. 작게 고운 소리를 울리는 하얀 새에게서 눈을 뗀 불청객이 무언가 또 못마땅한 게 있는지 투덜거린다.

"그 새 이름보다 당신의 이름을 먼저 듣고 싶었습니다만?"

"저번에도 지금과 유사한 질문에 답했던 것 같은데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설마 그럴리가요."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말이죠.

덧붙이는 뒷말은 들은 척 않고 하얀 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모습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이어진 지금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평소보다 가늘어지게 만든 불청객은 그 변함없는 모습에 약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다.

"그 새도 당신처럼 그림이 된 녀석입니까?"

그대로 그림이 되었는지 굳어있는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깨진 창문 너머로 내려오는 빛이 검은 밤을 뿌리쳤을 때 열려있던 문이 굳게 닫혔다. 그 곳에 남아있는 건 그림 뿐이다.

그 이후로 깨진 창문 너머의 색이 네 번 바뀌는 때까지 불청객은 찾아오지 않았다. 다시 검게 바뀌는지 옅어진 빛을 바라보며 그는 하나밖에 없는 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밖에 없는 침대에 몸을 기댄다. 그에게 있어서 잠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작은 손님이 나타나기 전까진 깨어있는 게 더더욱 불필요했었다. 아직 작은 손님이기 전의 하얀 새와 처음 만났던 날처럼 고운 울음소리로 자신을 깨웠던 그 순간을, 손님이란 게 생겨난 이후로 오랜만에 시간에 의해 쓸려버린 곳에서 작게 쌓인 그 날의 기대감을 원하며 눈을 감는다. 깨진 창문 너머로부터 밝은 빛과 함께 제 곁으로 내려오는 고운 울음소리를 기다리며.

그리고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건 푸른색이 은은하게 도는 하얀 깃털에 폭 파묻힌 녹색의 구슬이 아니라 창문 너머의 밤하늘 보다 훨씬 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의 노란 눈동자였다.

"일어나셨슴까?"

진중함대신 장난기가 잔뜩 담겨있는 말투는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했다. 가까이 붙어있는 불청객의 얼굴을 밀어내고 깨진 창문 너머로 내려오는 빛이 환한 걸 보면 작은 손님이 올 시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늘 눈에 띄면서도 익숙한 하얀 색이 없다.

"그동안 마을 의식 때문에 바빠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딱 붙어있던 새는 어디갔슴까?"

그 질문엔 대답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자신이 내놓고 싶었던 질문이다. 늘 고운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오던 작은 손님은 어째서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걸까? 작은 손님은 숨바꼭질을 좋아하기는 커녕 찾아오는 밝은 시간부터 떠나버리는 어두운 시간까지 그의 곁에서 잠시라도 떨어지는 거리마저 아까워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찾아오지 않은 건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숨이 흐트러진 그의 등을 두드리던 불청객은 말없이 자리를 뜬다. 열려있던 문이 닫히고 검은 밤보다 더한 정적이 그를 휩쓴다.

 

"의식은 언제나 요란한 주제에 지루함다."

게다가 당신을 만난 이후로 갈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창문의 깨진 틈 사이로 날아들어오던 작은 손님이 오지않은 그 날부터 다시 꾸준히 밝은 빛이 내려올 때마다 찾아오던 불청객은 커다란 손님으로 바뀌어있었다. 작은 손님의 부재는 커다란 손님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는지 창문 너머의 색이 6번이나 바뀐 지금까지 아무런 말 없이 커다란 손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던 커다란 손님은 대답에 대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지만 이번만큼은 예상을 눌렀다.

"어째서?"

"예?"

언제나 여유로웠던 얼굴이 이번엔 한껏 당황을 담아낸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푸른 눈에 커다란 손님은 더이상 아무런 의문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와 만나게 된 것이 어째서 갈 이유가 없게 된 건가?"

눈꺼풀이 노란색을 한 번 쓸어간다. 이내 부드러움을 머금은 미소가 빠르게 새겨지더니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야 당신이 진짜니까 말입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손님이 날숨과 함께 이야기를 내놓기 시작한다.

"저희 마을엔 아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진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한 마법사가 풀 한포기 없는 황폐한 땅 위에 작은 탑을 세웠다.
마법사는 탑에 여러가지 마법을 걸어놓고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마법사가 떠난 후 햇빛을 받은 탑은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탑이 빛을 낸 순간 탑을 중심으로 황폐했던 땅 위엔 풀이 돋아났고 나무가 자랐으며 꽃이 피어났다.
비옥해진 땅 위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어느새 커다란 마을이 만들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또다른 마법사가 나타나 탑을 지키기 시작했다.
탑은 늘 아름답게 빛났고 마법사는 탑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어졌다.
많은 시간이 흘러가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가운데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탑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탑을 없애기로 결정했지만 탑을 지키던 마법사는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마법사의 마법에 탑을 없애려던 마을 사람들은 물러났지만 마법사와의 사이는 매우 나빠져버렸다.
어느날 마법사가 잠시 탑을 비운 틈을 타, 마을 사람들은 탑을 무너뜨렸다.
탑이 무너진 그 순간 비옥했던 땅이 황폐해지고 풀과 꽃은 시들었으며 나무는 말라버렸다.
돌아온 마법사는 크게 슬퍼하며 탑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새로 세워진 탑은 새하얀 탑이었다.
다시 세워진 탑 주위로 다시 풀이 돋고 꽃이 피며 비옥한 땅이 되었지만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면서 마을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숲은 마을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며 탑을 감쌌다.
마을 사람들은 숲 근처에서 마을을 새로 만들어내고는 매년마다 숲을 향하여 마법사에게 잘못을 빌었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집마다 그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의 책장에 꽃여있는 많은 책들 중에선 없는 책이다.

"매년 열리고 있고 얼마전에 끝난 의식은 이야기 마지막 부분의 마법사에게 잘못을 비는 겁니다."

의식의 이름은 자비라고 불리지요.

자비라는 의식에선 마을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대표로 뽑는다. 대표로 뽑힌 사람은 하얀 돌을 든 채 마을 중앙에 만들어진 가장 높은 봉대 위의 의자에 앉아 숲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밑에선 한껏 치장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애절한 노래를 부른다. 노래 속엔 마법사에 대한 사과와 자비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고 봉대 위의 대표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하얀 돌에 입을 맞추고선 숲을 향해 있는 힘껏 던진다. 여기서 의식의 대표로 뽑히는 조건은

"붉은 머리카락입니다."

손가락 사이로 얽히는 붉은 색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잘못을 받아줄 마법사와 똑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을 대표로 세우는 거죠."

하지만 붉은 머리카락은 흔하진 않았고 대표로 뽑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붉은 기가 도는 갈색머리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의식이 끝난 후에는 다시 비옥한 땅을 만들어준 마법사에게 감사하며 결혼을 준비하던 연인이 결혼식에 입을 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어떻게 생각하심까?"

그림으로만 봐왔던 마법사님.

의식의 주인공인 마법사는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가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마법사를 눈에 담던 커다란 손님 또한 더이상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고 조용히 떨어져 열려있는 문 밖으로 나선다. 동화책 속의 마법사처럼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감고 앉아있다.

 

"퍼블리."

어제 꺼냈던 이야기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마냥 태연하게 말을 꺼내는 손님의 말을 자르고 그가 꺼낸 건 다름아닌 하얀 새의 이름이다.

"예전 마을에서 살았던 아이의 이름이지."

하지만 이번에 말하는 대상은 달랐다. 예전 마을은 탑이 무너지기 전의 마을임을 손님은 눈치챘고 새로운 탑을 지은 마법사가 옛날 이야기를 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나는 스승님의 마지막 마법을 찾아다녔고 오랜 여행 끝에 마침내 찾았지."

처음 탑을 만든 마법사는 붉은 마법사의 스승이었다. 스승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하얀 탑을 발견한 그는 스승의 마법을 기리기 위해 탑을 지키기 시작했다. 탑을 찾아오는 손님은 전부 마을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언제나 친절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탑을 찾아오는 손님은 점점 줄어들었고 몇십년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 마법사를 꺼림칙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10년 쯤 지났는데 오랜만에 온 손님은 웬 아이였네."

파란 두건 속에 전부 집어넣지 못하고 삐죽 나온 푸른기 도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늘 눈을 빛내며 마법사를 찾아오고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마을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사람들과 그다지 살갑게 지내지 않은 마법사는 짧게 대답해주거나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고 그것마저도 좋았는지 아이는 쉴새없이 말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1년이 지났을 때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찾아왔네."

어른들과 아이는 별개였다. 애초에 어른들은 아이가 탑을 찾아오는지조차 몰랐다. 다짜고짜 찾아온 어른들은 탑으로 온 목적을 꺼냈다.

"마을 한가운데를 차지한 탑이 거슬리니 무너뜨리겠다고 하더군."

당연하게도 마법사는 반대했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꺼내는 아이와 달리 마법사를 설득하기 위한 말을 꺼냈고 끝에는 협박까지 꺼내놓았다.

"그 일로 인해 은근히 틀어져있던 마을 사람들과는 공개적으로 틀어졌고 1년 새에 정든 아이가 나름대로 걱정 돼서 더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다그쳤지."

그런데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더군.

"싫어요! 오지 말라는 이유 어른들 때문이죠? 탑을 무너뜨리려는 어른들이 나쁜 거예요! 저도 여기서 탑을 지킬 거예요!"

호기롭게 외친 것과 달리 허망하게도 탑 밖으로 내쫓긴 아이는 그 날 이후로 계속해서 탑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마법사는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스승님의 기일이 되는 날 스승님의 무덤에 가기 위해 잠시 탑을 비웠네."

사실 그는 스승이 탑에 남긴 마법을 전부 발견해낸지 오래였다. 탑을 무너뜨려도 스승의 마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탑을 무너뜨리는데 반대한 이유는 그저 스승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라는 어린애같은 고집 때문이었다. 소중하게 지켜왔던 주제에 스승이 만든 탑이 다른 마법(자신의 마법까지도)이 닿지 않고 온전한 것을 원하던 마법사는 흔한 보호마법 하나 걸지 않고 제가 자리를 비운 걸 마을 사람들이 모를 거라는 안일한 방심으로 인해 수많은 세월 동안 지켜왔던 탑이 무너졌다.

"무너진 탑을 봤을 땐 허탈함이 느껴졌지만 무언가의 강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지."

생각보다 그의 마음은 덤덤했다.

무너진 잔해 아래로 튀어나온 작은 손을 보기 전까진.

"내친 이후로 아이가 들어오지 못하게 항상 문을 잠궜네."

몇번이고 잠긴 문을 두들기던 아이는 어느날 꾈 써서 문보다 위쪽에 자리잡은 창문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렇게 창문이 깨지면서 어린아이 하나 정도는 들어갈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하필 꾀를 쓴 날은 마법사가 탑을 비운 스승의 기일이자 마을 사람들이 탑을 무너뜨린 날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그 탑 안에 아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탑을 무너뜨리기 위한 포탄을 쐈다.

"정이란건 대단하더군."

시간이 남아있는 감정을 쓸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터져나와 붉게 물든 채 눈을 감은 아이의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마법사는 새로운 탑을 만들어냈다.

아이의 머리 색을 닮은 무덤의 비석 같은 새하얀 탑을.

그렇게 아이는 탑 아래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숲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숲에 접근하지 못하고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주를 걸었다."

마을이 사라진 사람들은 하나의 진실이 빠진 이야기 그림책을 만들었고 마법사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원히 그림으로 남았다.

"감정에 휩쓸려 섣불리 건 저주 때문에 나는 저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 저주에 걸린 자들의 후손이 존재하는 이상 이 탑을 나갈 수 없게 됐고 세월을 보내게 됐지."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그대로 깨뜨렸을 거라고 만들어둔 창문의 깨진 틈새로 새 한마리가 날아들어왔다. 푸른기가 도는 하얀 깃털이 두건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과 그렇게나 똑같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새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줬네."

퍼블리. 아이를 닮은 새는 아이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손님은 이야기가 끝났는지 입을 굳게 닫은 마법사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럼 제가 저 마을 출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반겼고 유일하게 마을을 벗어날 수 있는 그를 극진하게 대했다. 이미 그가 마법사가 있는 탑으로 온 시점에서부터 그는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 거나 다름 없었다. 침묵으로 긍정하던 마법사가 한참만에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연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외지인이더라도 탑을 발견할 수 없게 마법을 걸어놨다고 생각했던 마법사는 자신의 허술함에 조용히 혀를 찼다. 제 저주로 인해 이름을 버리게 된 마법사라지만 이렇게나 약해지다니 스승의 밑에서 열심히 수련하던 과거의 자신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면 기함을 토했을 거다. 눈꺼풀을 내리면서 눈을 감춘 마법사는 또다시 그림처럼 앉아있었고 그와 동시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생각보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치트."

짧게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가벼웠지만 그 속에 담긴 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챈 푸른 눈이 잘게 흔들린다.

"제 이름입니다."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신호탄으로 마법사가 손을 들어올려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린다.

마법사는 또다시 새로운 손님에게 정을 주고 말았다.

 

"이거 어떱니까?"

화려하게 치장된 천 옷을 들고 와서는 다짜고짜 묻는 치트의 모습에 마법사는 미간을 찌푸린다. 창문 너머의 색이 바뀐지 10번은 넘어가는 그와 마법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마법사에게 다가가던 치트는 배려라는 걸 배워왔는지 조금 떨어진 거리를 두며 부드럽게 말을 건네왔고 마법사는 무시하던 말들에 일일히 대답까지 해주는 정성을 키우기 시작했다. 들고 온 옷을 마법사에게 가까이 들이대며 기대 섞인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 꼭 어른에게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쓸데 없이 화려하군."

하얀 천 위로 수놓아진 금빛 실들이 눈을 사로잡았지만 알고 있는 의복 모습이 아주 오래 전에 멈춰버린데다 소박하게 옷을 입고 다니던 마법사로선 눈 앞의 옷은 쓸데없이 화려한 천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냉정한 대답에 짐짓 실망했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같다.

"이건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에 입는 옷이라구요!"

그런 말에도 가늘게 뜬 눈은 커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억지로 마법사의 품에 옷을 안겨주는 그가 잽싸게 덧붙였다.

"결혼식날 신랑이 입는 옷입니다."

아니다. 사실 신부 옷이다.

하지만 마법사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리가 없었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에 마법사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제 품으로 들어온 신부 옷을 쏘아봤지만 눈에 들어오는 천의 하얀 색깔에 작은 손님을 떠올린다. 손 안에 들어오는 따뜻함 온기와 부드러운 흰 깃털의 감촉을 떠올리며 천을 쓸어내리는 마법사의 모습은 마치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 같이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그런 마법사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말한다.

"나중에 그 새를 찾았을 때 곁에 둘 수 있게 새장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천을 쓸어내리던 손이 멈춘다. 그리고 말을 끝낸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열려있는 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그는 언제나 자리를 뜨곤 했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갑자기 시간이 멈추는 듯한 착각이 든 마법사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알 수 없는 농간의 손길은 시간을 늘이는 것 만으론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또다시 손을 휘두른다.

"패치."

문 밖을 나서려던 발이 멈춘다.

"내 이름일세."

아이가 죽고 하얀 탑을 세우며 아이를 죽인 마을 사람들과 아이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죄책감의 원망을 향한 저주로 인해 탑에 갇혀버리고 마법의 힘을 대부분 잃어버린 바로 그 날 이후로 영원히 버리게 될 줄 알았던 이름이 다시 올라온다. 그것이 누군가의 농간인지 자신의 의지인지 알 길은 없었고 중요하지 않았다. 마법사로서의 자격을 잃은 그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름을 들은 자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본다.

"예쁜 이름이네요."

그리고 문은 닫혀 있었고 그 앞에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안에 남은 사람은 단 한사람 뿐.

그림으로 남았던 마법사는 사라지고 패치만이 남았다.

 

그 날 패치는 하루종일 고민에 빠져들었다. 치트가 옷을 두고 간 의도는 명백했다. 더군다나 제 몸에 딱 맞아보이는 옷은 누가봐도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소박하게 살아온데다 탑에 갇힌 이후로 늘 같은 옷만 입고 살아온 그는 화려한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를 위해 옷을 만들었을 치트를 떠올리며 이대로 버리기엔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붙잡고 고민을 하던 그는 결국 한 번 입어보기로 결심했다. 일부러 바닥에 흘러내리도록 길게 늘어져있는 천을 슬쩍 들어올리며 어색해하던 그는 다리 사이가 휑한 낯선 감각에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래도 만들어온 정성을 생각해서 이번 한 번만 입은 모습을 보여주자고 결심한 그는 침대 위로 옷이 최대한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몸을 기대고 내일 날이 밝을 때 자신을 깨울 치트를 기다리며 잠에 빠져든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얼마나 창문 너머의 색이 바뀌었을까. 잠들어 있던 그는 전혀 모를 것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로 아무도 깨워주는 사람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패치는 무언가 큰 충격에 빠진 얼굴로 몸을 반쯤 일으킨다.

"저주가..깨졌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는 발작하듯이 침대에서 튀어나오며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어제끼고는 언제나 막혔었던 문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맨 발에 제 발목까지 삼킬 정도로 자라있는 풀들이 따가울 법도 한데 그는 아랑곳 않고 풀들을 밟아대며 탑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동안 뛰어본 적 없는 다리가 쓰라릴텐데도 그는 달리는 걸 멈추지 않는다. 턱 끝까지 올라온 숨보다 제 머리 위부터 압박하는 불안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그는 달릴 수 밖에 없었다. 기어이 마을에 다다른 그가 헛구역질을 하는 건 한계까지 달려 차오른 숨 때문일까 그의 눈 앞에서 벌어진 광경 때문일까.

"하...이런 미친.."

온통 붉었다. 붉은 기 도는 갈색머리를 지닌 사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리뿐만 아니라 온 몸이 붉었다. 제게 뻗어오는 비릿하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차오른 숨과 더불어 제 속을 뒤집어 놓는다. 용케 입을 막지 않고 붉은 색으로 물든 마을을 눈에 담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결을 탄 비릿한 혈향이 자꾸 그의 곁을 맴돌며 괴롭힌다. 그것이 마치 마약이라도 된 듯이 속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머릿속 마저 헤집어놓는다. 좋지 않은 환상을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 어찌보면 마약보다 더 악질적이다. 그렇게 마을 깊숙히 들어서던 그가 결국 멈춘다.

"아..."

잔인한 광경과는 맞지 않게 저멀리 앙증맞은 새장이 보인다.

깨진 창문 틈새로 제가 들어갈 크기를 만들어 놓고 뿌듯해하는 어린아이가 보인다.

그 앙증맞은 새장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하얀 덩어리가 보인다.

그 작은 탑 속에서 제가 오길 기다리며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을 하얀 머리카락의 아이가 보인다.

새장 속의 하얀 덩어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탑의 잔해 아래에 깔려있는 아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우욱..우웨엑!"

오랜 세월동안 아무것도 들어가있지 않았을 빈 속을 게워낸다. 게워내도, 게워내도 끝없이 게워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아 예쁜 것만 보여드리고 싶은데 말임다."

장난스레 다가오는 말투엔 진중함이라곤 땅에 흩뿌려져 있는 혈흔 만큼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뒤에서 끌어안는 손이 그렇게 차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저는 워낙에 질투가 심해서 말입니다. 당연히 저 새는 거슬릴 수밖에 없지 않겠슴까?"

하얀 천 안을 파고드는 손길이 너무나도 소름끼친다.

"탑을 발견할 수 있었던건 간단합니다."

저도 마법사입니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섞인 비밀이 귓가를 맴돈다.

"처음엔 단순히 산 속에 숨겨진 탑과 마법 때문에 접근했슴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늘보다 따갑다.

"그런데 그 탑 안에서 보게 된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지 뭡니까?"

그림책 속에 표현된 마법사 본인의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그림이여.

"그렇게 저는 매일 당신을 찾아오고"

그림인데 불구하고 살아있는 자를 유혹하는 살아있는 그림이여.

"당신을 찾아오는 새를 죽였습니다."

어서 그림에서 나와 당신을 보고 반해버린 내 마음을 책임지시길.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듣고"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 속에서 끌어내리라.

제 몸을 더듬는 손길에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는 무너져내린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림책 속에서 나온 나의 그림 신부여....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트패치] 그림신부-태워진 그림책  (0) 2016.08.31
PL  (0) 2016.08.20
한달  (0) 2016.07.30
[치트패치]르리님+샤샤님  (0) 2016.03.20
[치트패치] 담피르 치트X뱀파이어 패치  (0) 2016.03.01
Posted by 메멤
,

1.

"대화를 원하는 건가?"

내놓은 질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서 마주하고 있지만 살아있다는 기준으로 따져보았을 때 우리는 오래전에 죽었네."

한차례 숨을 들이킨 후 그는 담담하지만 서글프게 내뱉는다.

"들리지도 않고 전해지지도 않는군."

주저앉지는 않는다.

 


하루라는 건 짧으면서도 길었다. 아침부터 시작되서 저녁까지 이어지는 밝은 순간은 모두가 깨어있는 덕에 짧게 느껴지지만 모두가 잠들어있는 어두운 순간은 혼자서 깨어있다면 그 어느때보다도 길게 느껴진다. 물론 그 혼자마저도 잠에 빠져든다면 하루는 더할나위 없이 짧아진다. 언제 어두웠냐고 시치미 떼는 것처럼 밝다 못해 눈부신 햇빛에 잠시간 눈을 찌푸리던 패치는 어쩐지 햇빛의 핑계를 자꾸 대고싶은 마음이 이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들개들의 협조 덕에 용사는 무사히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보물찾기에 들어갔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당당하게 앞서 가는 뒷모습은 불리고 있는 호칭 그대로 용사처럼 보였지만 나무 막대를 높이 들어올리며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달려나가는 앞모습은 동화속의 용사를 흉내내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런 용사의 곁을 함께 달려나가는 들개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용사님, 용사님! 막대 한 번만 더 휘둘러주시면 안돼요?"

저 보채는 목소리가 과연 자신들과 비슷한, 어린 녀석들보단 나이먹은 녀석들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나이먹은 녀석들을 가장하는 어린 녀석들의 목소리일까. 눈부셔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햇빛을 본받았는지 없는 발광원을 만들어낼 정도로 반짝이는 눈들은 어린 녀석들이고 용사의 주위에 몰려들어 함께 달려나가는 몸뚱아리는 나이먹은 녀석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검은 들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도 이런 생각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저 앞의 나이가 혼동되는 녀석들보단 덜해도 그들보다 한 발 앞선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리라. 걸음을 아주 잠깐 늦췄을 뿐인데 어느새 저 멀리까지 가있는 용사를 보다가 뒤를 돌아보던 검은 들개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전부터 모두에게 내려지는 말이었다.

"여기는..."

풀숲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던 퍼블리가 멍하니 말을 흘렸다. 그런 그의 말에 앞서가던 사람이 멈춰섰다. 주변의 풀과 비슷한 색의 천을 온몸에 두르며 제 본연의 색을 지우고 있는 정원지기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내놓는 것도 잠시, 색을 가리는 그와 다르게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도 그러한 생각도 한 적 없던 주민은 그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게 멀다고 혹은 가깝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행여나 놓칠까 눈을 부릅뜨며 뒷모습을 쫓았지만 뒷모습은 쉬이 앞모습을 보여주는 여유를 내어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선과 마주치는 눈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유 모를 야속이라도 느꼈겠지만 그 뒤를 따르는 주민은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했을 뿐.

"아는 곳인가?"

어느새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옆에서 저에게 하는 물음에 화들짝 놀라던 퍼블리는 푹 눌러쓴 녹색의 가벼운 천 아래에서 무심하게 빛을 내는 푸른눈과 마주쳤다.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마주서서 얼굴을 가리는 천 덕분에 그늘진 얼굴에서 유독 그의 눈이 띄었다. 다행히 미처 천 아래로 전부 들어가지 못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와 시선을 분산시켜준 덕에 슬며시 눈을 돌린 퍼블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여기서 살고 있어요."

안 본지 꽤 됐지만.

퍼블리의 말에 패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인연이 있는 마당에 같은 땅을 밟고 같은 구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끼리 인연이 아니란 법은 없었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는 일에 그는 금방 관심을 껐다. 사람과 살갑게 지내지도 않고 넉살좋게 말을 이어붙일 만한 재주도 키우지 않는 그로선 그저 침묵이 최선이자 나름의 배려였다. 물론 그것은 말 그대로 나름이었지만 퍼블리는 개의치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치 자신이 말한 아는 사람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옛 추억에 잠긴 눈으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마을 사람들 중 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그 아는 사람이 눈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건 얼마 지나지 않았다. 멍하니 열린 입이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카?"

"오, 퍼블리!"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마주하던 두 사람의 모습을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던 패치는 아니카라고 불린 노란 머리카락의 여자가 바로 그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다. 믈론 그는 그들의 정다운 상황에 끼어들 여지도 생각도 없었으므로 살짝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그 쪽이 용사 뒷꽁무니 빨빨 따라다니는 괴짜 정원지기?"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며 거리낌 없이 말을 뱉어내는 아니카에 그는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노렸는지 잽싸게 다가온 아니카가 그의 손을 잡아채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서 내놓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눈에 참~ 잘 띄게 생기셨네!"

모습을 숨겨야하는 정원지기에게 전혀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이다라고 하기엔 애매한 말에 손이 해방된 즉시 그는 머리를 감싸고 있는 천을 더욱 잡아 눌렀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에 담겨있는 건 다름아닌 흥미였다. 앞서 그녀의 말과 함께 담긴 그 흥미를 발견한 패치는 자연스럽게 일어난 경계로 인해 올라온 불쾌감에 작게 침음성을 흘리고 눈썹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에 삐졌냐는 직설적인 물음에 아예 몸을 돌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들어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귀엽다는 알 수 없는 평가 또한 무시하며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퍼블리가 당황하며 그를 부르며 뒤를 쫓았고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니카는 콧소리를 내더니 제 자리였을 어디론가로 돌아갔다.

"정원지기까지 왔으니 용사가 발을 들인 게 분명해!"

드넓은 정원에서는 가려졌던 정원지기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선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녹색 일색으로 이루어진 천을 두른 정원지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묵묵히 제 갈길을 갔다. 원래 다리없는 말이 다리있는 말보다 빠르다는 건 속담처럼 사용될 만큼 누구나가 다 알고있었지만 소식을 듣는 자들은 무조건적으로 그 내용을 믿지 않았다. 처음 주민들이 용사가 발을 들였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늘어져서 희미해져버렸지만 다시 제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는 기대감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반가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감정들의 축제 후에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의문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용사가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은 이유에서부터 정말로 용사가 발을 들였을까라는 말까지. 쓸모없는 의심과 생각의 연장선으로 그들은 불안감 마저 다시 일으켜 세웠고 기대감과 불신의 줄다리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의미없는 시합이 시작된 순간 용사가 여행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눈에 띄어선 안 될 정원지기가 주민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유명인사 마스코트가 된 소감은 어때요?"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은 악의 없이 순수하게 웃으면서 돌직구를 날리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눈 앞의 웃는 낯은 과연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순수함을 가장한 것인가. 둘다 아니라면 비꼬는 걸 증폭시키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어버린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비약이니라. 만난지 얼마 안 됐고 헤어진지도 얼마 안 된 사람이 눈 앞에 있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더군다나 상대는 따라온 것이 아니라 제 자리로 되돌아갔을 뿐 오히려 찾아가게 된 건 패치 본인이었다. 옆에서 말할 시간을 놓친 퍼블리가 머쓱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패치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따질 수도 없었고 그러한 입장도 아니였다. 단지 지금의 상황이 그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을 선사하고 있을 뿐.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에 비해 맘춰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던 패치는 떨떠름한 기색을 전부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 마을의 대표였나?"

"어머 지금 첫 단추 잘못 끼웠다는 거 나타내고 있는 말툰가요?"

저 직설적인 말투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물론 남들이 듣기에는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는 위험한 버릇이지만 남을 헐뜯기 위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패치 또한 모르지 않았다. 어찌보면 진심이기에 더욱 상처를 입을 수 있지만 그는 그녀의 말투보다 더욱 불편한 게 있다면 못으로 고정된 듯한 검은 눈동자 속에 담겨있는 상대의 감정이었다. 그것은....

"저..아니카. 곧 있으면 용사님이 올 거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퍼블리 덕에 그녀는 그제야 다른 화제로 눈길을 돌렸다. 둘은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는 사이를 넘어서 소꿉친구처럼 꽤 친한 모습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용사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담아두다가 잊어버리게 할 생각인지 눈을 굳게 감던 패치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 바로 눈을 떴다. 시선의 주인은 다름아닌 퍼블리였다.

"저...아니카가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예요."

"그 정도는 알고 있네."

제 친우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박힌 걸까 걱정하던 퍼블리는 그제야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반은 못 되는지 제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들의 곁으로 온 아니카는 그 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이며 콧소리를 냈다. 둘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로 돌아갔지만 정작 두사람 모두의 눈의 관심을 받게 된 아니카의 시선은 적어도 그 둘에게 향하진 않았다. 변함없이 고정된 웃음으로 어딘가를 주시하던 그녀는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쩐지 엄청난 일이 다가오는 것 같은데요?"

그런 그녀의 말에 둘의 시선의 방향이 그녀의 시선의 방향과 같아졌다. 그 시선들의 끝에 자리잡고 있는 건 얼마나 발에 힘을 가했는지 희뿌연 먼지연기를 이끌고 달려오는 세마리의 들개였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요란한 등장에 부산스럽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러한 시선들을 무시한 채 마을로 들어선 그들은 누군가를 찾는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패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지치지도 않는지 이어서 달려오며 그를 불렀다.

"어이, 요정!"

"와우. 귀여운 별명이네요."

덧붙여지는 아니카의 말에 잠시 눈썹을 찌푸린 그는 뒤에 이어지는 들개의 말에 펴지기는 커녕 더욱 미간 사이의 골이 깊어졌다.

"용사가 사라졌다!"

2.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면 그건 내가 아닌가?"

대답은 아니라는 말을 담고 돌아온다. 애초에 기억이라는 건 그저 당신이 담고 있는 것일 뿐이고 그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작은 조각이다. 그렇게 다른 말을 덧붙여서 오는 대답에 질문자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입을 연다.

"하나의 작은 조각일지라도 그것 또한 나다."

게다가 기억이라는 건 하나의 작은 조각이라고 칭할 수도 없었다. 기억이라는 건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물론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었다. 질문자가 또다른 질문을 꺼낸다.

"내가 너를 잊으면 어떨 것 같나?"

그에 대답하는 사람은 잘게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누르며 대답했다.

"조각이 떨어져나간 곳에서부터 온통 금이 가있는 깨진 도자기처럼 아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픈 대상은 누구인가?"

대답하는 사람은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대답한다.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고통스러운지 왼쪽 가슴을 부여잡는 그를 보며 질문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를 기억하는 내가 죽었구나."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을 때 주위에 뭐가 있었지?"

마을은 또다른 소식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다. 이곳으로 오던 용사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는 건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던 주민들에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주민들 사이에선 또다시 불안감이 기대감을 짓누르며 그 위를 타고 올라온 것도 모자라 주변으로 동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감이 혼란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정원지기는 끝까지 냉정했다. 그는 용사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대를 꺼내지 않았는지 혹은 이곳에서 뿌리깊게 살아온 주민이 아니어서 그런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는 상황 덕에 동요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정원지기가 있기에 내심 품고 있던 기대감이 헛되이 실망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라며 또다른 기대감으로 그를 의지했다.

"휑한 풀밭."

퉁명스럽지만 쓸데없이 덧붙이는 게 없는 말은 그에게 있어선 장황한 설명이 자질구레하게 묘사되어 있는 말보다 훨씬 더 나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제일 안좋은 대답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들이 건너 온 곳이 주변이 뻥 뚫리고 온 사방이 풀 천지인 초원이다. 검은 들개또한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지라 상대가 인상을 찌푸리며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하려고 한다면 그에 맞서 말 그대로 휑한 풀밭에 어떤 장식물 같은 거라도 있겠냐고 반박할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협조가 아닌 내재되어있던 반발심이 밀어내버릴 말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꺼내질 일은 없었다.

"질문을 바꾸지. 근처에 하얀 글씨가 새겨진 검은 비석들이 있지 않았나?"

새로운 질문을 받은 들개들은 이번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대신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가 꺼내는 질문은 긴급상황에 따라 무게가 달려있지만 방금 전의 질문의 무게는 앞서 말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질문 자체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검은 들개는 그 질문을 코웃음치며 가볍게 받아들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는지 몇번이고 노란 눈빛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대답은 검은 들개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없었다냐!"

"전무!"

말투는 가벼웠지만 오히려 금방 나온 대답이 늦게 나온 대답보다 정확할 때가 많다. 나머지 들개들의 말에 패치는 더이상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겠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꺼낼 말을 고심해서 고르고 있는 건지 입가를 쓸며 턱을 괴듯이 팔을 들어올렸다. 가볍게 입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처럼 그는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되짚었다. 그들이 초원을 건너기 시작한 순간부터 용사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의도치 않은 시선 끌기로 인해 다른 주민들을 모아오는 순간까지 그들은 곁에 있었다. 다만 그들이 마음을 놓는 것이 잘못됐던 것일까.

"우선 그 앞전의 상황은 제쳐두고 자네들이 잠에 빠져든 때로 돌아가지."

신나게 놀다가 지친 용사가 드러눕고 그의 곁에서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버린 그들은 입이 여러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나마 그들을 제외하고 용사와 어울려 놀면서 사라지기 전까지 곁에 남아있었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잠들어있는 용사와 들개들을 보고 의도치 않은 소란에 행여나 그들이 잠에서 깰까봐 고개 돌리는 것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주위를 살펴본 후 다시 그들을 봤을 땐

"용사들은 기본적으로 정원의 주민들보단 신체능력이 좋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곳으로 오는 용사들의 기본적인 신체능력은 웬만한 주민들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물론 이런 사실은 주민들 또한 알고 있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검은 들개는 그 말의 저의를 깨닫고는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이며 노란 눈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곧이어 낮게 가라앉은 나오는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곁에 있던 두마리의 들개가 잠시간 몸을 떨었다.

"네녀석이 처 말하려는 건 그 용사가 초인이라도 된다 이거냐?"

목소리만큼 가라앉은 분위기에 긴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정작 그 말을 받은 당사자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실감하지 않는 것 마냥 떨리는 기색하나 없이 덤덤했다.

"그럴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지."

"그것 참 대단한 가능성이군! 설령 용사가 초인이라고 해도 아무리 우리가 자고 있었지만 움직이는 낌새를 처 알 수 있고 냄새 또한 처 맡을 수 있다!"

높아져가는 목소리에 비해 점점 더 가라앉다 못해 싸늘해지기까지 한 그의 서슬 퍼런 기색은 날카롭게 쏟아지는 금이 가버린 자존심의 파편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당장이라도 뒤에서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퍼블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혹은 이미 터져버린 걸지도 모르는 상황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란히 옆에 서있던 아니카는 오히려 지금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눈에 빛을 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얗게 자리잡고 있는 이까지 내보이며 환한 웃음을 짓는 얼굴은 굳게 다물린 입을 아플 정도로 깨물며 식은땀을 흘리는 무리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시선이 모이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굳건하게 눈 앞에서 버티고 있는 가라앉은 상황의 연출자들 때문이리라. 잠깐의 침묵은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능력이라도 있는지 내내 기다리는 자들에게 고역만 남기고 끝이라는 달가워하면서도 동시에 반길 수 없는 것을 마침표로 찍고 유유히 떠나가곤 했다.

"그렇다면 두가지가 나오는군. 하나는 그대로 다른 마을에 도착했거나 다른 하나는 경계를 넘어갔다는 것."

"지금 우리를...!"

"만약 저 두가지 상황을 담고 있는 가능성 자체가 잘못된 거라면."

담담하게 말을 자르는 말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용사는 스스로 떠났다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유유히 제 모습을 내놓은 한마디는 상대의 말을 잘라버린 것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 나타날 말들 마저 원치 않았는지 보이지 않는 칼날을 휘두르며 침묵을 유지하기 바빴다. 상황의 당사자들과 군중인지 상황 끝의 무리인지 모를 마을 사람들도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을 모르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용사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검은 들개부터 그 주장을 들었을 사람들까지 가장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르는 가정이었다.

단지 그것은 입에 올리기도 꺼려울 정도로 제일 최악인 가정중 하나였기에

 


"우웅?"

잠결이라는 건 없는 건지 눈을 뜨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키는 그의 체력은 보기와는 다르게 섣불리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일으켰다고 하기엔 애매했다.

"온통 하얗다!"

몸을 딛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림자 하나 없는 하얀 공간이 무서울 법도 한데 무섭긴 커녕 오히려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는 모습은 지금쯤이면 알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공포로 인해 울음을 터뜨렸을 어린아이들과는 달랐다. 아직 공포라는 걸 느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호기심에 계속해서 팔을 휘두르던 그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그곳에서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시간이라는 게 흘러가는지 조금이라도 움직임에 따라 그늘져가는 곳이 있는지 모든 것이 의문스러운 곳에서 늘 그랬듯이 하나의 변화가 들려왔다.

"안녕?"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하얀색이었고 몸을 돌렸던게 무색할 정도로 같았다.

"안녕!"

변화가 반가웠던 건지 마주하는 인사는 밝았다.

"밝은 아이구나."

우리 아이들도 너처럼 밝았으면 좋았으련만...

조심스럽게 흐려지는 뒷말에 눈을 깜빡이는 그를 보며 작게 울리는 한숨 후의 말은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잠시 하소연 좀 해도 되겠니?"

여전히 웃음을 달고 있는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이어진 말은 하소연이라기 보단 아주 오래전에 전해내려 왔다던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하고 얇은 물줄기가 흐르듯이 내놓기 시작했다.

"아주 예전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단다."

녹색 눈을 두차례 쓸어가던 눈꺼풀이 제자리로 멈춰서는 순간까지도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게 너무 무서워서 무턱대고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멋대로 그들을 잡아끌고 뭉쳐다니는 모습을 본 후에야 나는 겨우 진정될 수 있었어."

멈춰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아래로 제 무게를 짓눌러간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아들이 두 명 생겼단다."

앞서 담담하게 얘기한 것과 달리 조금 높이가 올라간 목소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귓가를 쓰다듬는다.

"한 명은 나를 조금 닮아있었고 다른 한 명은 내 친구를 떠오르게 생겼었지."

파란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린다. 뒤에 이어진 이야기는 두 아들이 언제부터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됐는지, 어쩌다가 싸웠다던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는 중이었다. 반쯤 사라진 녹색 눈이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던 어느날 둘에게, 그리고 내 친구에게 제대로 인사하기도 전에 나는 이곳을 떠나버렸단다."

그의 주변을 한바퀴 천천히 돈 목소리가 이번엔 질문을 꺼낸다.

"이곳은 즐겁니?"

눈꺼풀이 완전히 녹색 눈을 움켜쥐기 전에 항상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자리잡은 미소가 대답한다. 소리없는 대답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는지 잘게 웃음을 터뜨리던 목소리가 잠들기 전에 건네는 인사마냥 조용하게 속삭이며 떠나간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여전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3.

"우선 각 마을마다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가?"

용사가 다른 마을로 갔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움직이기로 결정했는지 연락수단을 물어보지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잠잠했다. 애초에 교류라고는 용사라는 존재로 인해 교류해왔을 그들로선 더이상 비상 연락을 취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끊어진지 오래였다. 침묵으로 부정하는 그들의 대표가 말한다.

"그런거 진작에 끊어먹은지 오래예요."

물론 그 사실 또한 정원지기가 모를리는 없었다. 그들을 오랫동안 방치한 정원지기들은 책임을 그들에게로 돌렸을지도 몰랐겠지만 그는 그런 무의미한 말싸움에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법한데도 그는 그저 얇은 눈꺼풀로 눈을 반쯤 가리며 그의 속내를 들어내지 않을 뿐. 그렇게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숨을 고르게 내쉬던 그는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사람을 부른다.

"퍼블리."

"..네!"

자신을 부를 줄은 몰랐는지 한박자 늦게 대답한 퍼블리는 꽤 긴장했는지 온 몸이 딱딱하게 보일 정도로 굳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모든 시선이 굳어있는 퍼블리에게로 향했지만 잘게 떨리는 녹색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여전히 변함 없는 걸로 보아 사람들의 시선보단 마주하고 있는 푸른눈에 더욱 긴장하는 것 같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에 그는 방금 전 떠올린 생각을 말한다.

"아니 멀쩡한 주민을 갑자기 끌고오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성인 남자보다 몇배는 더 큰 덩치를 자랑하는 비둘기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끌려오다시피 마을로 들어선다.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잽싸게 마을을 벗어난 퍼블리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시작의 마을이었고 퍼블리는 그 체구 어디에서 힘이 솟아나오는지 정원지기의 말을 따라 GM의 집 지붕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졸고있는 덩치 큰 비둘기, 전서구를 거의 끌고오다시피 데려왔다. 하지만 역시 힘들었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는 모습은 보는 사람도 절로 지친듯한 느낌을 주기까지했다. 그런 퍼블리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는 정원지기는 불만스러워 보이는 전서구를 향해 변함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한다.

"긴급 상황이라 잠시 실례했네. 지금 자네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라네."

"움머?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이렇게 심각해요?"

정원지기의 말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내리눌러 가라앉은 분위기에 자신에게도 그 불안이라는 감정이 멋대로 숨어들어왔는지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마을 사람들을 살펴보던 전서구는 두 번 눈을 깜빡인다. 그런 그의 불안과 마을 사람들의 불안을 한시라도 빨리 해소시키기 위해 정원지기는 더 말이 나오기 전에 본론을 꺼낸다.

"지금 용사님이 실종상태라네. 용사님의 행방을 한시라도 빨리 알아내기 위해선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지."

불안 위에 부담도 얹혀진다. 본인 한정으로 더더욱 가라앉은 분위기에 전서구는 당장 이곳을 뜨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하며 깊게 생각했다. 실제로 제 머리 위에서 성인 남자 정도의 무게가 누르는 느낌이 나기 전까진.

"우억?! 저기요, 정원지기님?!"

"용사님을 찾기 위해선 비행하면서 찾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네만."

"아니 애초에 비둘기가 어떻게 사람을 태워요!"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 그들을 멍하니 보던 퍼블리가 잽싸게 그들에게로 다가온다.

"자..잠시만요, 정원지기님!"

"봐요! 쟤도 사람이 어떻게 비둘기 위에 올라탈..."

"제가 가게 해주세요!"

그 말에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는 정원지기와는 별개로 전서구의 표정은 근원을 알아볼 수 없는 배신감에 절어있었다.

"저..저도 이곳의 주민이다보니까 길이나 장소같은 데를 많이 알아요! 그러니까..."

그 말의 저의는 이미 알아챈지 오래였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나타내는 행동을 보면 그 누구라도 자신을 돕고 싶어한다는 게 뻔히 보였다. 정원지기는 다른 의미로 곤란함을 느끼고 있다. 단순히 지금의 상황을 듣기만 한다면 정원지기가 되고 싶은 주민의 눈에 들기 위한 아양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 곤란에 빠져있다. 분명 정원지기가 되고 싶어하는 데다가 정원지기에게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주민이지만 도움을 자처하는 모습은 아양이라기보단....

"노을."

"네?"

"해가지면 돌이킬 수 없다. 노을이 지기 전까지 찾아오게."

그것은 분명 허락의 말이리라. 멍하니 받은 말을 곱씹던 퍼블리는 이내 반가운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음 짓는다.

"네!"

툴툴 터져나오는 전서구의 불만을 뒤로하고 퍼블리는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올라타며 날아오르기를 재촉한다. 불만 섞인 목소리는 날아오르는 주인의 모습과 더불어 사람들의 눈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기대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정원지기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머나~?"

그리고 언제 왔는지 모를 검은눈과 코앞에서 마주친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그 위에 떠오르는 감정과는 별개로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절로 거부감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뒤로 한발짝 물러나는 대신 눈을 조금 찌푸리는 정원지기를 보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주민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먼저 시선을 피하는 사람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정해져있었다. 부드럽게 흔들리며 푸른빛을 가려버리는 붉은색에 짐짓 아쉽다는 듯이 얼마간 더 바라보던 그녀는 멈출 생각 없이 마을 밖으로 향하는 발목을 붙잡을 만한 말을 꺼낸다.

"당신네들의 기원에 관한 전설은 안 찾나요?"

그 말은 제대로 된 효과가 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는 정원지기를 볼 수 있다. 다시 제 모습을 보이는 푸른빛이 아까와는 달리 상당한 빛을 내고 있다. 시선을 받은 그녀의 웃음소리는 넓게 퍼져나간다. 미묘한 대치 상황을 펼치고 있는 둘의 모습에 아직까지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이 슬그머니 발을 빼며 제 위치로 돌아간 후 그들만이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미묘한 대치상황이 막을 내린다.

"따라오시겠어요?"

긍정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원지기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서로에게 엇박을 두드리는 발걸음 소리가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대신하여 울린다. 그러다 자신을 따라오는 정원지기를 뒤돌아 바라보는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마주해오는 웃음에도 정원지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뒤따라오는 꼴이 제법 귀엽네요."

그리고 변화가 생긴다.

펴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 미간 사이의 주름을 펴줄 요량인지 가까이 다가오는 손가락은 이내 막아서는 손바닥 앞에서 물러난다. 그 사이 주름은 더더욱 깊게 패인다.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자 그들은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제까지 기록을 숨겨왔나?"

"숨겨온 건 아니죠."

물어보지 않으셨잖아요?

태연하게도 대답하는 꼴이 제법 얄미울테지만 정원지기는 개의치 않는다. 농을 건네도 깊게 패이기만 하던 인상이 오히려 조금 펴진다. 정원지기는 잠시 의자에 딸린 등받이에 제 몸을 기대더니 곁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벽의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의외로 정의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정원지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면 알고 있지만 그녀가 열렬히 비추고 있는 감정 때문에 외면하는 것일까.

"자네가 보기엔 정원지기가 정의로운가?"

"정원지기가 아니라 앞에 계신 눈 마주치는 거 피하는 부끄럼쟁이씨 말하는 건데요?"

나도 정원지기다만.

그는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섣불리 꺼냈다간 무슨 소리가 날아올지 모르고 부끄럼쟁이라는 말에 머리가 아팠으니 그저 한숨만 내쉬는 그를 보던 그녀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큰 웃음을 터뜨린다. 여전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건 매우 껄끄러운지 툭 날아온 말에도 그는 끝까지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끝까지 푸른빛을 따라가는 검은색은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을 내고 있다. 푸른빛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보이는 건 똑같이 푸른색을 빛내는 창문 너머의 하늘이다.

"보내놓고는 걱정 되나봐요?"

이번 말은 그 뜻이 명백히 드러나있는 덕에 알 수 있었지만 앞서 언급된 정의파에 대한 저의는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그 스스로가 그다지 정의롭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정의로운 면을 보여준 적도 없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는 건가?

"단순한 충고가 걱정과 정의로 연결될 정도로 정원이 삭막해졌나보군."

"퍼블리에 관해서 말한 건 맞지만 다른 이유도 있긴 해요."

한데 모아 제법 높게 올려묶은 머리카락들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정원지기들이 아득바득 찾으려는 기원의 전설들은 사실 이 구역에 많이 남아있었어요. 그들이 유일하게 남았다고 주장하는 일부밖에 안 남은 시 몇줄 말고도."

그런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동화나 동요로 잔뜩 부풀려져 있죠.

이번엔 무언가 답답했는지 이제까지 보여왔던 여유로운 모습과 달리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기던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전과 달리 굳어있는게 눈에 띈다.

"사실 '정원지기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 속의 전설, 고작 시 몇줄밖에 안 써진 그 빈약한 전설은 그저 간판일 뿐이고 실제로 지금의 상황을 이루고 있는 건 전설을 낳은 '최초의 정원' 이후의 정원지기들의 기록들과 그들의 보이지 않는 텃세 덕분이지 전설 자체는 오히려 방해물일 뿐. 찾는 것에 관심따윈 없잖아요? 아니 관심 있는 높으신 분들이 꽤 있었죠?"

하루빨리 훼손하는데 혈안이신 분들.

"빙빙 돌려묻는 건 역시 적성에 안 맞으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질문을 내놓기 위해 그녀는 한차례 숨을 들이쉬고 그 이후에 나올 질문이 무엇인지 그는 정확히 알 것만 같은 어림짐작을 한다.

"훼손하러 직접 납신 귀한 몸이세요, 귀한 몸들 위협하는 시한폭탄이세요?"

대답은 그녀또한 어느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처음 집 안으로 들어설 때보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자랑하려는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이 처음 봤을 때보다 방향이 기울어져있다. 창문 너머로 향하는 푸른빛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가 입을 연다.

4.

 우리들은 계속해서 찾아갈 겁니다.
우리들을 태어나게 해준 신, 하얀 정원사의 의지를 받들어 '최초의 영광'을 거머쥘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우리들의 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검게 변해버린 변절자들을 물리칠겁니다.
그러니 우리들을 믿고 따라주십시오.
신이 내린 축복의 그늘에서 우리 정원지기들은 미래를 위해 과거로 향합니다.

-'최초의 정원' 이후의 최초의 정원지기 연맹의 연설문-

 

"어디에 있는거지..."

그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은 혼통 푸른색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그들이 찾는 푸른색은 애석하게도 땅에서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속 깊은 한숨을 내쉬니 아래에서 열심히 날개짓을 하는 전서구는 답답함을 넘어서 울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오는 숨들이 제법 버거운지 식은땀을 흘리다가 다시 숨을 토해내는 걸 반복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붕 위에서 졸고 있다가 다짜고짜 끌려와서 본의아니게 안하던 운동을 하게 된 전서구는 숨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날개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고 그 위에 타고있던 퍼블리는 시야가 점점 낮아지는 걸 느꼈다.

"아이고오~ 날개 떨어진다아!"

"자..잠깐만! 날개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안타깝게도 퍼블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괜찮아?"

"으으..날개에 쥐가 났어."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전에 있는 힘, 없는 힘 끌어모아 열심히 날개를 움직인 덕에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급하게 땅으로 내려온 그들은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하며(정확히는 한 비둘기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퍼블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울상을 짓는 전서구 옆에서 하늘에서도 제 머리카락 한 올 보여주지 않는 용사를 찾는걸 포기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드디어 퍼블리의 시야에서 그제야 하늘이 아닌 푸른색이 들어온다.

"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이 찾던 푸른색이 아니다. 하늘과는 다르게 짙은 색이 하늘과 맞닿으며 선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숨결이 짙은 색을 뽐내는 물 위로 일정하게 손짓을 하며 근처에 자리잡은 모래들로 이끈다. 한차례 짙은 물의 색이 새하얀 거품을 내며 모래들을 쓸어버리고는 다시 물어가는데 그들의 짙은 색은 모래에게로 옮겨갔는지 젖은 자리가 제법 어둡게 모습을 드러낸다. 몇번이고 그 과정을 반복하는 그들에게로 다가간 퍼블리는 멍하니 냉기를 머금은 숨결을 마주한다. 더이상 움직일 힘도 없다며 툴툴 말을 내뱉던 전서구는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퍼블리가 사라지고 없자 눈을 굴리더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다가 물러나는 바닷물로 향해가는 퍼블리를 발견하고선 한차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소리를 키운다.

"거 용사님이 거기에다 창포 감았냐?! 아니면 진주라도 발견했어?!"

아직 숨을 고르지도 못했는데도 제법 익살스럽게 외치는 걸 보면 아직 힘이 남아있을 법 했다. 계속해서 앞만 바라보던 퍼블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도 시선을 돌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짙은 색을 옮겨받은 젖은 모래 바로 앞에서 수평선 너머를 멀거니 바라보던 퍼블리는 무언가의 변화를 느꼈는지 갑자기 뒤를 돌더니 전서구를 향해 뛰어간다. 아까의 외침으로 모든 힘을 썼는지 상당히 지친 기색으로 드러누운 채 눈을 감고 있던 전서구는 자신의 배 위로 느껴지는 익숙한 무게에 발작하듯이 튀어오른다.

"야..야! 잠깐만, 나 아직 쥐난 거 안풀렸어!"

"빨리...빨리 돌아가야 해!"

그렇게나 크고 요란하게 외치는데도 서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아니면 상대방도 제 소리가 묻힐 정도로 요란하게 내뱉는지 그 둘은 전혀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하고 있는 채 제 말만 꺼내면서 옥신각신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의 그림자는 점점 몸을 길게 늘리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조롱하듯이 따라한다. 그들의 두위에서 하얀 빛을 내던 모래들이 조심스레 붉은색을 머금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 둘의 몸이 모래투성이가 되는 순간까지도 붉은색은 점점 제 색을 짙게 나타내기 시작한다.

"잠깐만 기다리봐! 돌아가야 한다니? 푸르딩딩한 용사님은 어쩌고?!"

분명 쥐가 안풀렸다고 말한 날개로 제 위를 올라타려는 퍼블리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계속해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퍼블리의 말에 잽싸게 의문을 내놓는다. 퍼블리는 그 질문에 어느정도 진정을 했는지 억지로 전서구 위에 올라타려던 걸 멈추며 말한다.

"노을..."

"뭐?"

"정원지기님이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하셨어!"

그러니 돌아가야 해.

분명 충고는 유용하다. 하지만 문제는 어째서 그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전서구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물론 평소라면 그다지 의문을 내놓더라도 받아들였겠지만 지금 받아들여야 할 전서구가 매우 지쳐있다는 게 문제였다. 퍼블리의 말에 담긴 패치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또다시 날개를 움직여야할 뿐만 아니라 점점 해가 제 빛을 빨갛게 태우면서 내보이는 노을을 본다면 시간 또한 얼마 남지않아 그만큼 더 빠르게 날개를 움직여야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아직 저는 다 쉬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어질 말과 행동은 상당히 단순하다.

"해가 지는 게 뭐 어때서? 언제는 해가 한 번도 안 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 동네는 심심해서 그런지 깡통소리 나는 옆동네랑은 달리 꽤 조용하다고?"

"그치만 해가 지기 전에..."

"아, 그러니까 안전하다니까?!!"

그렇게 또다시 서로의 의견은 굽혀지지 않는다. 목이 아플 법도 한데 그치지 않는 그들의 소리는 잔잔하고 일정하게 울려퍼지는 파도의 소리를 이리저리 흐트러놓기엔 충분했다. 만약 여유를 찾아 이곳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을 향해 쓴소리를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제외한 바람도, 그 손길에 의한 바다의 물결도, 그들의 소리에 묻힌 파도의 소리도 변하는 것 없이 똑같이 지나가고 되돌아온다.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그 풍경 속에서도 시간은 그것들과 상관없이 유유히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들의 소리의 중심을 차지하는 노을지는 시간은 놀리듯이 그들에게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은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여줄 심산인지 아주 잠깐 어두워지는 하늘과 바다의 사이에서 붉은 빛을 있는 힘껏 내뿜고는 유유히 자리를 뜬다.

"벌써 해가..."

"아니, 해가 져도 문제될 건 없..."

그 순간, 모든 것이 검게 변한다.

누군가가 제 눈을 가린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빛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왠지 모르게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 그것은 분명히 마음 안 쪽 어딘가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공포로 인한 착각이리라. 허우적거리며 있는 힘껏 손을 흔들어 보아도 분명히 흔들고 있는 제 손마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쪽이야."

제 눈에도 보이지 않던 몸이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분명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했는데...!"

창밖의 광경을 바라본 정원지기는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정확히는 한 비둘기지만.)을 떠올리며 머리를 짚는다. 그의 맞은편에서 시선을 함께하는 그녀는 어째선지 아무런 말이 없다. 한참동안 창밖을 쏘아보던 그는 제 의자에 걸쳐두었던 녹색 로브를 집어들고는 다시 제 몸에 두른다. 모습을 숨기기 위해 뒤덮는 녹색이 오히려 주변을 감싸고 있는 밤이 지니는 어둠을 발판삼아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쩌다보니 본래의 목적을 잃은 로브를 두르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향하는 발목을 낭랑한 목소리가 잽싸게 잡아세운다.

"어디가세요?"

"돌아오지 않은 녀석들을 찾으러 간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사춘기들을 찾으러 저 까만 도화지로 색칠공부하러 가시게요?"

흘끗 눈동자만 돌려 바라본 얼굴은 여전히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는 낯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즐거운지는 그도 모른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 있다면 분명히 빛을 내고는 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까 전까지 감정을 가득 담은 검은 눈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걸까. 그렇다고 텅 비었다기보다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벽을 마주보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에게 있어선 여간 꺼리지 않을리가 없었다. 멈춰있는 검은 벽이 점점 그를 몰아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가?"

"간단해요."

생채기라도 날까봐 조심스레 검은 벽을 쓸어가는 눈꺼풀이 잘게 떨린다.

"저 밖의 상황이 퍼블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가요?"

걱정이라는 걸 입에 물은 그녀는 웃지 않는다.

 

"우웅?"

흔들리는 움직임에 따라 푸른색들이 춤을 추듯 흔들린다. 푸른색들 사이로 녹색이 제 모습을 깜빡깜빡 전등 장난을 하듯이 꺼졌다가 빛을 낸다. 일어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앉아있는 꼴이 퍽 우습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없었고 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손에 꽉 쥐고 있던 막대로 아래를 이리저리 찌르더니 막히는 느낌을 딛고선 일어난다. 다만 흔들리는 걸 보면 위태롭기 그지 없다. 여전히 막대를 쥔 채로 균형을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또다시 제 녹색 빛을 깜빡인다.

"이번엔 온통 시꺼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위가 무섭지 않은지 천진난만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흔든다. 그러다가 넘어지기를 몇번, 아프지도 않은지 새어나오는 웃음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더이상 막대를 짚은 채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제법 큰소리나게 주저앉은 그는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을 바라본다. 이전에 그에게 다가왔던 목소리를 기다리는 걸까? 이번엔 바닥을 짚어보지도 않는데도 손에 들려있는 막대는 여전히 손에서 떼어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이 멈춰있다고 착각되는 순간, 아주 사소한 것이 정적을 깨뜨린다.

"아..."

이번에도 먼저 나타나는 건 목소리다. 다만 그가 알고 있던 목소리가 아니다. 무언가를 담은 말이라기 보단 작은 감정을 담은 감탄이 주위의 정적을 두드린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희미한 빛과 함께 조그마한 발소리가 다가온다.

"거기 누구 있엉?"

그의 질문에 발소리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더욱 소리를 죽인 채 다가온다. 마침내 노란 불빛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후 그들은 서로를 마주본다. 노란 불빛을 들고 있는 소녀가 멀뚱히 그와 눈을 마주한다.

"안뇽!"

용사와 아이가 만났다.

Posted by 메멤
,

"우린 지금 매우 의미없는 시간 위에서 걷고 있는 겁니다."

하얀 공간 위에 두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사람이 누워있는 다른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 검은 가죽으로 감싸여져 있는 손으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당신은 당신을 죽이면서까지 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겁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뺨을 쓰다듬던 손이 눈을 향한다. 얇은 눈꺼풀 너머에 있을 눈동자를 직시하듯이 눈을 떼지 않는다. 이윽고 내뱉는 숨은 소리가 작았지만 탄식 섞인 한숨이다.

"애초에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군요."

우리는 이미 죽었으니까.

 

"이것 참. 선배님은 언제나 판을 키우는군요."

곤란하다는 말투에 비해 입가의 미소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둥글게 선을 두른 눈매가 고립된 구역을 향하면서 그곳을 기억하려는지 담아두고 있었다. 믄득 올려다 본 하늘은 이제 눈을 감고 잠이라는 휴식을 취할 시간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아름다운 붉은 빛을 내며 점차 검게 변해갔다. 그러한 광경에 묘한 희열과 기대감을 품던 치트가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칼로 글을 새기듯이 날카로우면서도 깊게 되뇌인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목표라는 모든 것은 신중해야했고 그만큼 길게도 시간을 늘어뜨리기도 했다. 누군가가 바라보면 너무나도 짧다고, 혹은 너무나도 길다고 할 수 있는 목표지점은 누구나가 아닌 본인에게 있어선 당연하게도 멀리있었다.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달리기 끝에 도착했을 그곳에서 반기는 것은 기대에 따른 환희, 모든 기대를 짓밟는 배신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려오는 과정 자체에서도 환희를 느꼈다. 그렇다면 그 끝에 있을 환희는 얼마나 거대할까.

"이제 마중 나갈 시간이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보라색을 담은 머리카락이 한순간 흔들렸다가 사라졌다. 이제 기다리는 시간이 막을 내리고 무대를 이끌어갈 시간이 도래했다.

"선배님이 잊으셨으니 다시 한 번 말하겠슴다."

물론 지금 제 앞에 없으셔서 듣진 못하시겠지만.

"저는 게임보단 인형극을 더 좋아함다."

각본은 이미 짜여져 있었고 대사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결말 또한 정해져 있었고 무대가 절정으로 오르는 순간 관객들의 시선이 전부 흥분을 담고 무대를 바라볼 것이며 인형이 그러한 시선을 받아들이지 못해 행여나 무대 밖으로 뛰쳐나갈까봐 족쇄까지 달아둔지 오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인형은 완벽한 인형이 되어 무대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그러한 모습 또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 위한 춤사위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당연한 일과가 되어버린 상상으로 그는 인내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조바심 또한 지니게 되었다. 표면적으론 상반된 감정이지만 그 두가지의 감정은 각자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점점 커지는 그런 종류였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서로가 서로의 자극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희로 바뀔 기대감의 양분. 그는 그것들을 머금고는 사람좋은 얼굴로 발을 내딛었다. 문득 어딘가 슬퍼보이는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가볍게 쓸어갔다. 잠시 멈춰선 그는 이내 흘러지나가는 바람 처럼 흘려보냈다.

석양이 사라지면서 검게 물들기 시작하는 곳을 향해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나?"

높은 톤의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상냥해 보이지만 어딘가 날카롭게 찔릴 것 같은 미소를 띄운 여자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눈을 빛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건 밤이 되어버린 하늘 뿐이었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 발견이라도 했는지 흥미롭게 주시한다. 침대로 향했어야 할 발은 아직까지 탁자 아래의 마룻바닥에 멈춰있었고 침대 위로 누웠어야 할 몸은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이불을 끌어당겼어야 할 두 손은 하나는 얼굴을 받치고 다른 하나는 검지손가락을 내민 채 탁자 위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마치 손님을 기다리는 집주인의 모습이었지만 이 시간에 찾아 올 손님은 없었다. 밝은 노란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사물을 비출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이윽고 다시 나타난 눈동자는 커다란 흥미를 담고 있었다.

"재밌는 손님이 올 것 같네?"

이윽고 불이 꺼졌다.

Posted by 메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