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오...많이 놀랐나보네요.”

벽을 부술 정도로 마법을 쓴 제 잘못이라고 덧붙이는 말이 있었지만 퍼블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난감한 얼굴로 먼지를 털어내던 아난타는 구멍 난 벽 너머에서 부르는 소리에 다시 한 번 미안하단 말을 덧붙인 후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앞의 파편들이 둥실 떠오르더니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고 이내 벽은 금 간곳 하나 없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에 굳어있던 퍼블리는 다시 교실로 가는 발을 뗐다.


“여러분 점심시간에 많이 놀라셨죠? 방음 마법 실험을 하는 김에 방어 마법 실험도 겸하고 있는 터라 소란이 일어났지요. 그러니 지진이 아니니까 학교는 일찍 안 끝난답니다, 그러니 창문으로 뛰어나가지 마시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쉬움 섞인 탄식들이 늘어진 채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첫날처럼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은 아난타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책이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역사 시간은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몇몇 학생들이 이번엔 자습을 기대하는 건지 다른 책을 꺼내기도 했다. 물론 공부용이 아닌 베개용이었다.

“왜 제가 역사책을 들고 오지 않았을까 궁금해 하는 것 같네요. 사실 오늘 제가 가르치는 부분은 아무래도 제가 경험자라고 할 수 있으니 책은 필요 없을 거란 생각에 두고 왔답니다.”

경험담이라는 말에 눈치 빠른 학생들은 나른하게 늘어지던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오늘 수업 부분의 경험자라고 하면 과연 누구겠는가.

“저희 마법사측에서 직접 숲으로 들어간 팀은 네 팀입니다. 하늘의 현자 컨티뉴가 속한 소수정예 다섯 명중 세 명의 팀, 이 왕국의 공주님과 교류했던 흑기사단, 지금의 신성지대를 세운 책사 홀리와 철퇴로 유명한 프라이드가 이끌던 군단, 마법과 무술의 결합을 수행한 아홉 명의 격투가들이 모인 팀 전장과 분노.”

잠시 숨을 삼킨 아난타는 한탄과 같은 말을 꺼냈다.

“저는 바로 전장과 분노에 속했던 마법사이자 격투가랍니다.”


비록 점심시간 바로 뒤의 수업이었지만 자는 건 물론 조는 학생은 없었다. 수업은 책에 있는 내용을 설명하는 딱딱한 설명이 아닌 자신의 경험담을 실감나게 얘기하는 데에 큰 흥미를 느꼈고 실제로 내용은 긴장감이 돌 정도로 머릿속에 잘 들어왔다. 누구든 설명보단 이야기를 더 쉽게 받아들이기 마련이었고 그 증거가 바로 학생들의 수업태도였다.

집중해서 얘기를 듣던 퍼블리는 눈을 크게 뜨고 아난타를 바라보다가 이마를 책에다 아프지 않게 내려찍었다. 다행히 이쪽을 보고 있진 않았는지 목소리는 끊기거나 걱정스레 다가오지 않고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런 퍼블리의 행동에 아니카가 퍼블리의 머리카락이 닿지 않은 책의 윗 모서리 부분에 무슨 일이냐고 적었다. 퍼블리는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고 손만 움직여 바로 그 아래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나 정말 바보 같아서.’

아니카는 우리 근육이가 또 왜 이럴까라고 적으려다가 하루종일 생각에 잠겨있던 퍼블리를 떠올리고는 손을 멈췄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퍼블리가 답을 찾은 것 같아 수업이 끝난 후에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물어보기도 전에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리자마자 퍼블리가 자리에서 뛰쳐나가다시피 일어서 문 밖으로 나가버려 본인도 거의 뛰어가다시피 따라가느라 바빴다. 교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발견한 퍼블리는 방금 전까지 수업 아닌 수업을 하던 아난타를 불러 세우고 있었다. 아난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을 반쯤 뒤돌아 있는 상태였다가 자신을 불러 세운 상대를 보자 난감한 기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아니카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때에 퍼블리가 급한 기색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용건이자 질문을 내놓았다.

“혹시 패치라는 마법사를 아시나요?”

다가오던 아니카도 멈춰 섰다.

순간 시간이 늘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긴장감이 둘을 감쌌지만 그런 게 무색하게 아난타는 의아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바로 다음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난타가 사라지고 조용했던 주위는 복도를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목소리와 발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니카는 다시 우두커니 서있는 퍼블리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너희 집에서 햇빛 쬐고 물 마시는 풀이...밸러니의 숲 정화 때 고개든 풀 같다?’

‘아까 아난타 선생님의 수업 들으면서 느꼈어. 어제 아빠의 수업이 수업 같지 않았던 건 역시 경험담이었기 때문이야!’

쓰고 지우는 소리가 제법 빨랐다. 왜냐하면 수업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필기가 많은 수업이라 이런 필담이 들키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일 순 있겠지만 그만큼 필기해야할 걸 놓치고 있단 점에서 불행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난타 선생님한테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하셨어. 경험담인 게 분명할 텐데 왜 모른다고 하신 걸까?’

‘모르는 게 더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 생각 많은 근육이?’

‘하지만 밸러니의 숲에 직접 들어간 건 네 팀이잖아?’

‘너 혹시 흑기사단이나 마법사 군단들이 많아봤자 10명 정도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 아래에 대답은 적어지지 않았다.


퍼블리는 수업시간 뿐만 아니라 쉬는시간에도 아니카의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밸러니의 숲의 크기에 대해서 지도까지 펼쳐들며 놀려대는 아니카를 피하는 동안 시계바늘이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알아봐야 할 건 흑이냐 백이냐 아님 삼총사냐 이 셋인데.”

“삼총사는 아닐 것 같아. 엄청 눈에 띌 텐데 모른다고 했으니까.”

“내 생각엔 아마 흑일 거야. 지금의 신성한 게 백에서 바뀐 거니까.”

마지막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리자마자 발소리와 목소리가 뒤이어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란을 거들며 교실 밖으로 나선 둘은 이젠 필담이 아닌 목소리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둘의 목소리는 소란을 거들면서도 묻혀서 흘러가기 바빴다. 한 바퀴 돌려 말하는 대화가 학교를 완전히 벗어나 운동장에 발을 딛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서 갈라졌다.

“저기..퍼블리 학생?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지만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뒤를 돌아보니 아난타가 미안한 기색으로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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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교실에 도착할 때쯤에 얘기를 마쳤고 교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1교시를 담당한 선생이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됐다. 떠드는 소리가 잠잠해지는 건 칠판을 두 번 두들길 때쯤이었다. 곧이어 교실을 채우는 건 수업 내용을 담은 말과 사각거리며 종이가 빽빽해지는 소리였지만 퍼블리의 머릿속은 아직까지도 무거운 안개로 채워져 있었다.

“자 그래서 오늘 배울 약새풀이란, 음...이걸 설명하기 전에 너희들 역사 어디까지 배웠지? 이거 이해하려면 밸러니의 숲 정화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맨 앞줄에 앉아있던 학생이 전반적인 건 배웠다며 답했고 익숙한 단어에 퍼블리는 초점을 다시 현실에 맞췄다.

“그래 그럼 알겠네. 밸러니의 숲을 정화하게 된 이유는 숲 자체가, 즉 저주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지? 약새풀도 이 저주의 산물이다. 가장 오래됐지.”

손을 한 번 슥 움직이자 금빛 가루가 따라가듯이 반짝이더니 곧이어 온통 새하얗고 빽빽해 보이는 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바로 약새풀이다. 진짜는 너무 귀해서 가져올 순 없고 이렇게나마 환영영상 마법으로 담아 와서 보는 게 최선이다. 나중에 재료 쪽으로 가는 애들은 진절머리 나게 듣고 보게 될 풀이지만. 이 풀은 밸러니의 숲에서만 자라고 채집할 수 있는 풀이고 재배가 불가능한 풀이지. 그리고 이것도 가르쳐줬는지는 모르겠는데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바로 이 풀이 저주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증거가 돼서 정화 작전이 세울 수 있게 만든 고마운 풀이지.”

분명 밸러니의 숲에서만 볼 수 있었던 풀은 숲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들판에서 발견된 덕분에 저주가 숲에서만 그치지 않고 점점 숲 바깥으로 나온다는 증거가 됐다. 선생의 말을 빌려 고맙다고도 할 수 있는 풀은 저주가 정화됨과 동시에 더 이상 자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밸러니의 저주가 섞인 마력을 양분삼아 자라기 때문에 저주가 정화되어 사라졌으니 당연하게도 이 풀은 정화에 성공한 순백의 날 이후로 그 어디에서도 자라지 않게 됐고 남아있는 약새풀들은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지. 원래도 저주가 가득한 숲에서 자란 터라 채집하기 힘들어서 비쌌는데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격이다. 그런데 저주를 먹고 자라는 풀이 왜 그렇게 비싸냐, 그건 이 풀은 태우면 냉기를 뿜어대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흔히 앞뒤 안 맞는 말을 지적할 때 약새풀 태우는 소리한다고들 하지. 바로 약새풀의 이런 특성에서 유래한 말이다.”

손과 함께 마법을 거둔 선생은 칠판에 방금 전까지 설명한 약새풀의 특성과 용도 및 가지고 있는 의의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퍼블리는 방금 전까지 봤던 약새풀을 잊을 새라 그리기 시작했고 아니카는 눈을 반쯤 감으며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판을 반쯤 채운 선생은 뒤돌아 학생들을 쭉 훑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말하는 건 무조건 시험문제 낼 거니까 깨어있는 기특한 녀석들은 자는 녀석들 깨우지 말고 들어. 이 풀은 저주를 양분삼아 자랐다는 거에 걸맞게 매우 무서운 풀이다. 이 풀을 먹게 되면 체내의 마력이 얼어붙게 되고 내버려두면 점점 속도가 빨라져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마력이 전부 얼게 된다면 그건 이미 얼음덩어리나 다름없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전부 다 얼어버리기 전에 얼어붙은 부분을 떼어내 부수는 거야. 마력은 마법을 쓰면서 소모되는 게 당연하고 또 그만큼 휴식을 취하면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임의로 떼어내 부순 마력은 돌아오지 않아.”

영원히.

덧붙인 말과 그 내용의 심각성에 비해 설명하는 목소리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먼 곳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가벼웠다.


점심시간이었지만 퍼블리는 또다시 생각에 잠겨있느라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웬일로 아니카 또한 그랬는데 평소와는 달리 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밥을 먹을 생각은 않고 그저 눈을 반쯤 감은 채 바라보고 있었지만 초점은 흐리지 않았고 오히려 뚫을 기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아니카는 옆에 앉아있는 퍼블리를 흘끗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는 밥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반쯤 흘러갔을 때 선도부 한 명이 찾아왔다.

“아침에 압수물품 관리하는 애가 깜빡 존 덕분에 이렇게 황금 같은 시간에 다른 애들 찾아오는구나~”

그렇게 아니카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선도부 학생을 따라갔고 퍼블리는 먼저 교실에 가 있기로 했다. 원래라면 운동장 두 바퀴는 돌았을 테지만 지금 필요한 건 역시나 답답한 안개를 몰아낼 시간이다.

마녀로 변장한 마법사는 퍼블리의 엄마이자 아빠였고 많은 걸 가르쳐줬지만 정작 본인에 대한 건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어린 날엔 물어볼 생각도 들기 전에 마을로 놀러가는 일이 잦았고 마녀왕국으로 온 이후엔 직설적이고 말동무가 되어줬던 아니카와 익살스럽고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놀아주던 GM이 보고 싶어서 울고 떼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그 때쯤에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마녀왕국에 왔냐고. 다만 그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왜 못 보게 하느냐는 원망이 섞인 외침이었을 거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니카와 다시 만나게 됐고 혹시나 잘못 본 걸까봐 두려운 마음에 눈을 맞춘 순간부터 있는 힘껏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바빴다. 그 때의 아니카는 매우 보기 드물게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당황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은 어쩌면 어느 날부턴가 만날 수 없었던 마법사 친구가 사실은 자신과 똑같은 마녀였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횡설수설 말을 하는 모습에 진정하라며 토닥이던 손길은 이제 더 이상 멀리가지 않는다며 늘 등굣길에서 인사와 함께 흔들며 안심시켜주고 있었다.

아니카는 퍼블리를 다시 만난 이후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퍼블리 또한 다시 만난 이후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만약 사정을 정확히 알게 되면 마법사가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헤어짐을 반복할까봐.


“으악!?”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음과 흔들림이 상념을 깨부쉈다.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는지 복도에 있던 학생들은 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명을 지르며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책상 아래에 몸을 숨기거나 가방을 챙겨 창문을 통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 학생들은 지진으로 학교가 일찍 끝나야한다며 외치고는 뛰쳐나간 이들을 따라갔다. 물론 그런 학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들과 선도부에 의해서 다시 학교 안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복도를 걷던 퍼블리는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는데 열 걸음 정도 앞에서 벽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먼지 연기 사이에서 언뜻 무언가 빨간색이 보였지만 연기 사이를 헤치고 나타난 건 단정히 묶었던 곱슬머리가 산발이 된 채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는 마법사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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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신성지대를 상징하는 금색 실이 박힌 하얀 망토자락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교실은 소란스러워졌다. 마지막 수업이었으니 빨리 나가고픈 마음에 손들은 책상 위의 짐들을 가방에 쓸어 담기 바빴으나 입은 방금 전까지 칠판 앞에서 수업을 하던 마법사에 대해 말하기 바빴다. 그건 퍼블리와 아니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퍼블리 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 같아?”

“그냥 엄청 친절한 사람 같은데?”

“난 저렇게 순하고 친절한 사람은 오히려 가면을 쓰고 혼자서 연극놀이를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저 안경이 가면같은 게 아닐까라며 우스갯소리를 덧붙이는 아니카의 말에 퍼블리는 이미 맴돌고 있던 마력과 함께 사라진 마법사를 보고 있는 듯이 다른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왠지 연극놀이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둘의 대화는 서로 가는 방향이 달라 갈라진 갈림길에서 멈췄다. 인사를 건네는 걸 끝으로 헤어지는 아쉬움에 고개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게 늦어졌지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제법 빨랐다. 집 앞에 도착한 후 열쇠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바로 문고리를 잡는 모습이 퍽 익숙했다. 왜냐하면 퍼블리의 보호자는 하교하는 시간엔 항상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짧게 끼익 우는 소리는 곧이어 이어진 인사에 묻혔다.

“다녀왔습니다. 엄마!”

인사가 향하는 끝엔 목과 입을 감싸는 형식으로 변형된 옷을 입고 있는 마법사가 책을 읽고 있었다.

마법사의 표정은 겉보기엔 한결같았지만 잠깐 스쳐지나가는 미묘한 눈빛에 퍼블리는 문을 잠그고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커튼을 치고는 인사보단 작은 목소리를 꺼냈다.

“이제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

대답은 옷자락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새겨진 장미무늬가 대신했다.

“...저도 몇 년째 아직 적응이 안 되는 걸요.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듣는 이가 없어도 속삭이 바람은 무시하지”

“말라고 했죠.”

말을 받은 퍼블리는 물이 담겨 있는 대야에 손을 담갔다. 너무 어려서 이젠 밀가루를 부은 물보다 더 뿌연 기억 속에서부터 지금 엄마라고 부르고 있는 그는 분명히 아빠라고 불렀었고 마법사다. 그리고 자신 또한 마법사인줄 알았다. 어느 날 신기하게 차려입은 마법사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늘 놀러갔던 마을보다 더 복잡하고 제 아빠처럼 신기하게 차려입은 마법사들이 잔뜩 돌아다니는 마을이었다. 나중에 알기로는 마법사들이 아닌 마녀들이었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옷차림은 그 때의 마녀들이 흔히 입고 다니던 유행이란 걸 깨닫게 된 건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생각이란 걸 다시 해보려고 했을 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기억 속의 뿌연 연기를 몰아내고 돌아다니던 동안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퍼블리는 옆에 걸린 수건에 물기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예전 집에 늘 놀러오던 아저씨 있지 않았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종이 넘기던 소리가 멈췄다.

“오늘 학교에서 마법사 한 분이 오셨어요. 어디더라...신성? 거기에서 오셨다고 하는데 마력 성질과 구조 이론이랑 역사에 대해 가르쳐주신다고 하셨어요. 그 선생님 머리색이 검은색이었는데 잘은 기억 안 나지만 예전에 늘 놀러오던 아저씨도 검은색 머리였던 것 같은데...”

“학교에서 본 그 마법사의 인상은?”

“어..엄청 동글동글해요. 안경도 동그랗고 눈도 동그랗고...이름이 아난타라고 했어요.”

“아난타?”

의아한 기색이 짙은 되물음에 퍼블리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뭔가 잘못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니 책은 이미 곱게 덮인 채 손에서 떠나있었다.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 꽤나 심각해보였고 뭐라 말을 다시 걸기엔 애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얼마가지 않았다.

“역사는 어디까지 배웠지?”

“밸러니의 숲 정화에서 그 때 선출된 팀 부분이요.”

“묘하게 적당한 때로군. 아마 배우고 있던 부분이 마녀왕국에서 선출된 팀에 관한 부분이겠지. 다음 아난타라고 한 그 마법사가 가르칠 부분은 마법사측의 팀과 둘 모두 있던 팀일 거다.”

말하는 내용과는 별개로 무엇이 미심쩍은지 눈썹을 찌푸리며 의자에 기대던 마법사는 다시 몸을 바로 세워 앉고는

“그 때 당시 마법사측은...”


깔깔 웃는 소리가 솟아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그 사이로 숨을 삼키던 아니카는 여느 때처럼 신랄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본전도 못 찾고 오히려 역사 수업을 받았다는 거네?”

말만으로도 사람의 속을 뒤집는 제 친구의 재능에 대한 감탄과는 별개로 뚱한 표정을 짓고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퍼블리의 모습에 아니카는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누르며 물어봤다.

“그래서 수업 소감은?”

“보통은 이쯤에서 그만 놀리지 않아?”

“어머, 그렇게 나랑 같이 지내놓고 다른 애들 행동을 떠올리는 거야?”

“본전은 여기서도 못 찾았네.”

한숨을 쉬고는 바닥의 돌멩이를 툭툭 차던 퍼블리는 어제부터 이어져 온 답답함에 고개를 들어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방금 찬 돌멩이처럼 금방 날아가고 시간이 지나면 구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수업. 아니카는 수업이라고 말했다.

“수업..이겠지?”

“그동안 네가 한 얘기 들어보면 그것도 수업이잖아?”

마법사는 퍼블리가 글을 쓸 수 있을 때부터 꽤나 많은 걸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론보단 실전이란 말처럼 퍼블리는 책과 설명으로 된 것보다 직접 보여주거나 경험을 살려 얘기해주는 데에 더 쉽게 받아들였다. 다만 완전한 실전이란 있을 수 없으니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론들을 설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남는 건 별로 없었다.

“근데 생각보다 기억에 남아.”

“세상에. 드디어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았나보다.”

“아니카.”

“알았어. 그만 놀릴게~”

아니카의 말 덕분에 무언가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잡힐 듯 말 듯 한 기분에 퍼블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기에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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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터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복도 벽 너머서부터 들려온다. 방음 마법에 관한 실험 공지가 내려오고 일주일정도 될 즈음엔 어깨를 떨기 바쁘던 학생들은 이젠 소리가 얼마나 늦어질까 시간을 재며 내기까지 하고 있었다. 소소했던 시간재기 내기는 처음과는 달리 사람들이 모인 후엔 주머니 속에 고이 담겨있던 돈을 꺼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모인만큼 액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를 제재하는 역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역할을 지닌 사람도 참가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선도부가 이래도 되는 거야?”

“선도부니까 하는 거지. 괜한데 돈 안 빠지게 전부 학생회비로 넘기잖아?”

이것이 학생회비 면제 비밀의 일부였다. 면제라기엔 애매했지만 자율적으로 낼 것인지 안 낼 것인지 본인이 정한다라고 한다면 거의 면제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학생회비는 가을이면 다가올 축제 속의 연구 대회에서 각 학부마다 운영될 돈이나 학생들의 아이디어 작품 등 크게 투자를 하는 다양한 데에 쓰이지만 어째선지 바닥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모르고 넘어가는 건 아니었다. 선도부나 학생회 친구를 둔다면 그림자에서 결탁된 비리라는 비밀을 알게 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물론 탐탁지 않아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오는 피해도 없었고 대부분 돈을 안 낸 학생이었기에 입이 무거워졌고 돈을 낸 학생들은 내심 아까워했으니 이런 비밀들에 만족스러워 하기까지 했다.

“그래 돈도 냈고 아까워하지도 않는 우리 퍼블리는 이러한 비리를 눈 감고 넘기지 못할 정의로운 학생인가요?”

“다른 애들한테 말해봤자 조용히 묻히게 만들 거면서! 좋진 않지만 그래도 좋은 데 쓰이는 거니까 가만히 있는 거야.”

“과연 우리 퍼블리 학생 생각대로 좋은 데에다 쓰고 있을까~?”

“안 그럼 네가 거기 한바탕 뒤집었겠지. 안 그래? 공포의 아니카씨?”

그에 주머니를 정리하던 선도부는 휘파람을 부르며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감탄을 덧붙였다.

“이제 꽤 받아칠 줄도 아네? 너희 아빠한테서 배웠어?”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숨기는데 서툰지 꾹 다문 입과 아무렇게나 던져진 시선이 대신 답해주고 있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선도부는 더 골려주고픈 마음이 들었지만 정해둔 선 바로 직전이었기에 그만뒀다. 만약 저 선을 넘는다면 겨우 다시 만나게 된 친구가 또 사라져 버릴까봐 친구의 비밀 바로 앞에 선을 그려놓았다. 제 귀여운 친구는 비밀에 완전히 손을 대는 순간 이번엔 아예 볼 수도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리라.

먼저 한 발짝 물러나는 건 언제나 누군지 정해져있었다.

“그보다 마력 성질과 구조 이론 숙제는 다 했어? 늘 틀리는 부분이 있어서 계속 물어봤잖아.”

“겨우 다 끝냈어! 다행히 이번 주는 문제없어!”

둘의 대화는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서 잠시 멈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사람으로 인해 완전히 멈췄다. 땀을 흘리며 숨을 고르던 그는 칠판 앞에 서서 학생들을 둘러보고 손수건을 꺼내 뺨에 갖다댔다.

“아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교실이 많고 여러 수업에 들어가다 보니까 아직까지도 길 외우기가 힘드네요.”

동그란 안경 너머의 동그란 눈이 깜빡거린다. 검은색 곱슬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동그랗게 묶어 올린 그는 학교 내의 유일한 마법사였다. 물론 마녀왕국으로 여행오는 마법사들은 많았지만 마녀왕국의 마법학교에서 마법사를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에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법사이기 이전에 전체적으로 동그란 느낌이 드는 모습처럼 그의 심성 또한 동그랗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더더욱 유명해졌다. 오죽하면 어린 마녀들이 모든 마법사가 그처럼 심성이 동그랄 거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의 첫인상은 여러모로 강렬했다.

“확실히 인상적인 면으론 신성지대 마법사들이 사람을 잘 보냈어. 대표로 오는 사람의 첫인상은 그 단체들의 인상을 좌지우지 하거든.”

옆에서 속삭이는 아니카의 말을 들으며 퍼블리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번에 신성지대에서 온 저 선생님의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 다만 과연 그 신성지대의 모든 마법사가 모두 동그랗다고 표현할 정도로 온화하고 배려심이 넘칠까.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귓가로 익살스러운 웃음소리와 무뚝뚝한 말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한 사람과 같다고 하기엔 추억 속에 잠겨있는 마법사들의 모습은 꽤나 다양했다. 이는 퍼블리 본인은 물론, 아니카 또한 알고 있을 사실이었고 쉬이 떠나지 않는 추억 속에서 배운 것들이다. 퍼블리같이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학생들을 깨우기 위해서인지 짝! 한 번 박수를 치는 소리가 크게 교실을 쓸어간다.

“지나가는 복도에서 한 번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수업으로 만나는 건 처음일 테니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겠어요! 제 이름은 아난타랍니다. 현재 마녀왕국과 여러가지로 교류하는 단체인 신성지대에서 학술적 교류를 위해 파견된 마법사랍니다.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마력 성질과 구조 이론에 대해 수업하러 왔지요. 아무래도 이런 걸 알기 위해선 마법사의 마력을 직접적으로 보는 게 더 이해가 빠를 테니 이렇게 직접 오게 됐답니다. 여러분들의 도우미가 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더 어지럽게 만드는 못된 속삭이 바람으로 변할지 모르겠네요. 너무 원망하진 말아주세요~”

아난타라고 하는 마법사는 일주일 정도 전에 방음 마법 실험 공지가 내려올 때 함께 등장한 선생님이었다. 마법사는 하나고 수업 들어야 할 학생들과 교실은 여럿이니 일주일에 3시간 있는 마력 성질과 구조 이론 수업 중 마지막 시간에만 수업하는 선생님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두 시간은 마녀의 마력을 한 시간은 마법사의 마력에 대해 배우는 거였다. 오히려 반대여야 하지 않느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런 말들과는 다르게 퍼블리에게 있어서 지금의 수업상황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 아니카 외엔 아무도 모를 퍼블리의 입장에선 마법사에 마력에 대해선 이미 배운 걸 넘어섰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의 속사정은 별개로 수업은 가르치는 사람처럼 매우 부드럽게 진행됐다. 다만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드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집중을 모으기 위한 박수소리에 다시 깨어나기 일쑤였다. 만약 배를 채운 지 얼마 안 됐을 때 수업을 했다면 박수소리에도 모두 잠들었을 테지만 거의 모든 학교 일과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수업이라 잠에 들지 않고 깨어있으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새 시계바늘이 종이 울릴 숫자 바로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벌써 수업이 다 끝나가네요. 하지만 아쉬워하지 마세요. 제가 이번엔 역사 수업도 맡게 되었답니다! 아무래도 책에 적혀있는 것보단 이렇게 마법사가 직접 마법사들의 역사를 말하는 게 더 실감나고 자세하게 알릴 수 있다는 의견이지요. 게다가 양측의 공통되고 유명한 역사가 있으니 서로의 입장과 시선이 더욱 중요하게 됐지요. 그럼 다음엔 역사 시간에 만나요, 학생 여러분!”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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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과거를 기억하면서 과거를 잃어버린, 과거를 기다리는 마법사와

그에게 다가온 아이의 이야기.





그를 더불어 그와 함께 있었던 마법사들의 입에서는 끝도 모를 뿐더러 시작도 까먹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바빴다. 그러다가 불어나버려 홍수가 되어버렸을 때, 잠시 뒤로 빠지는 입은 무뚝뚝한 현자일 때도 있었고 가장 많이 흘려보냈던,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해맑음일 때도, 혹은 그였을 때도 있었다. 해맑음이 뒤로 물러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해맑음이 물러나는 그 때는 바로 그와 현자의 작은 의견충돌이다. 그와 현자의 의견충돌은 거의 없을 정도로 둘은 잘 맞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어찌 보면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의견이 잔잔한 물결처럼 서로를 흔들기 일쑤였다.


현자는 운명을 말하고 그는 우연을 말했다.


현자가 말하기를 호수 밖으로 건져지는 시점에서부터 운명이라는 고리로 발을 내렸으며 그 위를 거닐면서 현재라는 운명과 손을 잡았다고 한다.


그가 말하기를 태어난 이후로부터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우연히 만남으로써 시작되며 그것이 길게 이어져 우연이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덧 씌워진다고 했다.


운명과 우연에 대해서 서로를 흔들기만 하던 의견 차이는 말 그대로 흔들기에서 끝나버렸을 뿐 그들의 사이를 무너뜨릴 순 없었다.


둘 중 누군가의 의견이 다른 한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바뀌기도 전에 그들은 헤어졌다.



이 세계에선 사람은 크게 둘로 나뉜다. 여자와 남자, 다르게 말하면 마녀와 마법사.

물론 전자보단 후자로 더 많이 말한다.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 차이는 마녀와 마법사를 구분 짓는 가장 큰 기준이지만 성별 외의 차이들 또한 존재하기에 그 차이들로 둘을 구분 짓는다. 


가장 큰 예로 태어나는 방식인데, 우선 마녀들은 제법 큰 장미에서 태어난다. 장미꽃이 활짝 피어나는 때에 그 속에서 아기가 나타나는데, 이 때 가장 먼저 아기를 안아든 마녀가 아기의 보호자가 된다. 아기들마다 성장속도는 제각각이지만 마력이 많을수록 성장속도는 빠르기에 보호자가 된 마녀는 말 그대로 보호자에서 멈출 때가 있지만 아기에게 정이 들어 더 깊은 관계를 원하는 마녀는 아기에게 '엄마' 혹은 '어머니'라는 부름을 요구한다.


이런 마녀들과는 달리 마법사들은 호수에서 태어난다. 보름달이 뜨는 밤, 동그란 달이 희게 혹은 푸르게 반짝이는 순간 호수가 거울이 되어 달의 빛을 잡는 순간 호수에서 아기가 나타난다. 물론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달이 빛나는 건 아니었고 심지어는 어떤 곳에서는 빛났지만 다른 곳에서는 빛나지 않았다는 말들도 들려오는데다가 빛난다 해도 반드시 그 자리에 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호수에 아기가 한 명만 있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두 명 혹은 세 명이 있을 때도 있었다. 아기들이 제멋대로인지 아니면 아기들을 품은 호수가 제멋대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대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기들은 아기였기에 말할 수 없었고 너무나 어려서 자라서는 잊어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마법사들은 근처에 있는 호수로 간다. 마법사들은 마녀들에 비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데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의견이 맞는 동료들이 대부분이라 호수에서 건진 아기는 각 마을마다 만들어져 있는 보호시설로 보낸다. 


그들은 돌본다는 개념보단 살린다는 개념으로 아기를 대하기에 보호자를 자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마녀들처럼 보호자를 넘어서 더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경우는 없다고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사례가 아예 없진 않았는지 이제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모르고 사라지고 있는 단어지만 마녀들의 '엄마' 혹은 '어머니'라는 말처럼 '아빠' 혹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오늘도 없군.”


달의 장난은 그다지 달가운 건 아니었다. 한순간 푸르게 반짝이던 빛은 그대로 비추고 있던 거울에 잡혔지만 그 아래에 있어야할 보호 받을 작은 새싹은 뿌연 살결도 내비치지 않는다. 딱딱하지 않은 거울에다가 투박한 손을 집어넣어보아도 손에 잡히는 건 축축하게 젖은 흙 뿐, 오히려 거울이 일그러지면서 달빛이 흐려지기 일쑤였다. 


행여나 자리잡은 게 짓궂은 새싹인지 마법사가 물러나려고 포기하는 순간에 나타날까봐 그런지 마법사는 몸을 돌리지 않는다. 아직 아무런 생각도 없는 아기에게 속아넘어갈 정도로 마법사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울 아래를 쏘아보는 눈은 보름달이 뿌려준 빛보다 훨씬 더 시리게 푸르다.


눈싸움의 끝은 항상 승자가 없었다. 눈을 먼저 감는 건 마법사지만 상대는 늘 그랬듯이 아기 대신 거울 위에 비친 마법사였기에 항상 비기고 있다. 눈싸움으로 시간을 바친 마법사는 거울의 역할을 끝낸 호수를 뒤로하며 늘 그랬듯이 자리를 떠나고 제 갈 길을 갔다. 오늘도 반복하기 위해 발을 떼는 마법사의 눈에 전에 없던 이상한 것이 들어온다.


“...장미꽃?”


정확히는 꽃봉오리다. 장미 정원은 물론, 장미 정원이 있을 마녀 왕국에 단 한 번도 발을 딛은 적이 없었던 마법사의 눈에 들어 온 장미꽃은 마법사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이상한 것이었다.


온 세상의 장미란 장미는 모두 뽑아가 한데 모아놓고 정원으로 만들어놓는 마녀들 덕에 그가 본 장미란 그가 자랐던 보호시설의 공용 책에서 본 장미꽃 그림이 다였다. 눈으로 직접 보게 된 진짜 장미꽃은 낯설지만 그 이전에 마녀들이 혈안이 된 채로 다 뽑아가고도 아직까지 야생에 남아있는 이상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책에서 본 장미는 붉은색 아니면 흰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붉은 빛과 흰 빛을 잡지 않고 여전히 눈 색 그대로 푸른색만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피어난다면 제 품에 가득 안길 정도로 큰 꽃봉우리 앞으로 다가간 마법사는 둥글게 말려있는 장미꽃잎을 쓸었다. 이내 그는 그의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호기심과 경계심에 양 팔이 묶였지만 고민의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앞으로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꽃봉오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경계심이 먼저 한 발을 내딛고 그는 피어나고 있는 장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포옹을 원하듯이 활짝 꽃잎을 열어젖힌 장미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것은


“아기...로군.”


당연하게도 아기는 여자였다. 물론 장미꽃에서 마녀가 될 여자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태어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달빛과 꽃잎 덕에 푸르스름하게 물든 하얀 머리카락이 적게나마 올라온 게 제법 앙증맞다. 애써 눈을 아래로 돌린 마법사는 완전히 내리기도 전에 어느새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녹색을 마주한다. 흠칫 놀란 그가 뒷걸음질 치자 동그란 녹색이 사정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우...우으...”


“이런!”


조막만한 입이 일그러지면서 더 큰 소란으로 번지기 전에 그는 잽싸게 아기를 안아들었다. 아기를 안아들어 달래주면 울음을 그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마법사가 간과한 게 있다면 그는 책으로만 이야기를 접했을 뿐 직접 아기를 안아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어색했으며 달래주는 방법도 잘 모르고 있는 초보자라는 점이다.


“으아아아앙!!”


“....머리가 아프군.”


모든 것은 빌어먹을 우연이기를 바라.








장미꽃향








마법사는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몇 분 전의 자신을 막아서고픈 마음이 호수 안 물풀의 오만만큼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집어지고 있는 마음은 물론, 그 외의 아무것도 모르고 까르륵 웃고 있는 아기에게서 더 이상 장미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는 웃는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인물들의 웃는 얼굴을 싫어했다. 아기의 웃음은 우는 얼굴보다 반가웠고 아기가 계속 웃을 수 있게 나름대로 마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곤 했지만 그는 지금 그럴 수 없었다.


“그래, 지금 이런 때 쓰는 단어가 호..호라? 뭐더라? 호..호...”


홀아비! 확신에 찬 목소리는 반딧불이가 만들어낸 바람처럼 가볍기 그지  없었다. 그 작은 가벼움 속에서 나온 단어는 분명 마법사가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호기롭게 단어를 꺼낸 사람은 하얀 수염이 풍성하면서도 반듯하게 자리 잡은 늙은 마법사,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가장 웃음이 많기로 유명하고 그 덕에 인기가 가장 많은 유쾌한 마법사.


늙은 마법사의 평판은 좋지만 우습게도 마법사가 싫어하는 특정 인물들의 웃는 얼굴의 주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늙은 마법사라는 건 약새풀을 태우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몇 십년동안 동굴 안의 박쥐처럼 로브 색도 감추던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홀아비가 되어서 나타났어? 자네 결심상 마녀 왕국에 있는 장미정원에서 훔쳐왔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여행 중이던 마녀랑 눈 맞아서 생겼다기엔 너무 안 닮았는데?”


“제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눈 맞았네 안 닮았네라는 소리가 나옵니까?”


“이 아기가 마녀니까 그렇지.”


아직 아기라서 마녀인지 마법사인지 겉으로 보기엔 구분할 수 없었지만 늙은 마법사의 확신에 찬 말이 날카로웠다. 말을 받은 마법사의 푸른 눈이 한차례 크게 떠지더니 본래의 크기보다 가늘어졌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뭡니까?”


“검집 던지기처럼 그냥 찍은 거지, 뭘!”


이어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마법사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어지럽다는 듯이 이마를 부여잡다가 이내 얼굴마저 쓸어내린다.


아기는 어느새 웃음을 멈춘 후 두 마법사 사이에서 녹색 구슬 같은 눈동자를 좌우로 반복해서 굴리는가 싶더니 마법사가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마법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익숙하게 얼굴에 닿아있던 손을 떼서 아기를 안아들었다.


“거 조심해. 원래 아기들은 보호자 감정에 예민하다고들 하니까.”


“...만약 호수에서 건진 평범한 마법사 아기였다면 진즉에 보호시설로 보냈을 겁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긴! 자네가 보름달이 뜰 때마다 뺀질나게 그 호수에 간다는 거 자네도 알고 나도 아는데!”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환한 얼굴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쉰 마법사는 아직까지 울먹이는 아기를 달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그러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웃어대는 늙은 마법사를 보며 그는 끓어오르는 속부터 식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 아기는 어디서 데려온 거야? 혹시 그 호수에서 태어난 아기야?”


“호수 옆에 장미가 피어있었습니다.”


야생 장미란 장미는 마녀들이 전부 뽑아서 그들 왕국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장미정원으로 옮긴지 오래였다. 야생에 방치해두면 언제 태어날지 모르는 아기가 그대로 장미에 방치된 채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러한 사고를 막기 위해 전부 한군데로 모인 장미꽃은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그저 이야기책이나 도감 속의 꽃일 뿐이었다.


“야생 장미라...아무리 호수 옆이더라도 마녀들이 가만 놔뒀을 리가 없을텐데?”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하나는 마녀들이 어느 순간부터 야생 장미를 찾기 위한 인식 마법에 손을 놓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마녀들의 인식 마법이 닿기도 전에 빠르게 피어났을 수도 있다는 것.”


“후자가 훨씬 설득력 있구만.”


잘게 흐느끼던 아기는 어느새 잠들어버린지 오래였다. 조심스럽게 아기를 고쳐 안은 마법사는 이번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그 아기를 데리고 나를 찾아온 이유는? 설마 이 늙은 마법사더러 키우라는...”


“주변에 아기를 키워본 마법사는 어르신 밖에 없으니 방법이나 조언을 들으러 온 겁니다.”


그리고 매우 후회 중이지. 입술을 꾹 깨물면서 뒷말을 씹어 삼킨 마법사는 조심히 이불 위로 아기를 내려놓았다. 평소 마법사를 알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다면 저주마법에 걸린 게 틀림없다면서 호들갑을 떨었을 테지만 마법사는 절대 늙은 마법사에게 아기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제 2의 늙은 마법사가 태어나는 건 사양이리라.


“어르신이라니! GM이라고 부르던 녀석은 어디 간 거야? 오랜만에 온 녀석이 이렇게 선을 긋다니, 이거 원 서운하구만 그래!”


“목소리 좀 낮춰주십시오. 아기 깹니다.”


“...저주마법 효과가 정말 대단하군.”


그런 늙은 마법사, GM의 말을 무시하며 잠투정을 하며 작은 몸부림을 치는 아기를 작게 토닥이는 마법사를 묘한 눈으로 보던 그가 무언가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보름달 뜬지가 2주일은 넘었는데 설마 그동안 아기 이름도 안 지어준 건 아니겠지?”


마법사는 말이 없었다. 웃음을 터뜨릴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무라는 것 또한 그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어색하게 웃음을 짓던 그는 아기를 토닥이는 손으로 눈을 돌렸다. 흰 장갑으로 둘러싸인 손은 서툴지만 다정함을 담은 채 아기에게 닿아간다. 그대로 침묵이 길게 이어가는 듯 싶었지만 그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문제를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아기 이름은 정했어?”


토닥이던 손이 멈췄다. 손은 그대로 거두어졌지만 아기는 편안한지 고른 숨을 뱉으며 뒤척이지 않고 잔다. 그런 아기를 바라보며 마법사는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푸른 눈을 눈꺼풀로 반쯤 덮는다.


가라앉은 그의 감정만큼 색이 짙어지는 그의 눈은 그가 자주 발을 옮기는 호수만큼이나 깊어진다. 그런 그의 눈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 순간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여전히 얄미워 보이는 웃음을 지은 채 빤히 바라봐도 마법사는 그런 시선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이 가라앉고 있다.


“이 아기는 마녀니까 당연히 보호시설로 보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도 마녀 왕국으로 갈 생각은 없어. 야생 장미에서 태어난 마녀 아기라는 점부터 엄청 귀찮으니깐 말이야. 뭣보다 그 아기를 맨 처음 안아들은 건 자네니 내가 가는 건 의미가 없어.”


“제가 처음 안아들었다는 걸 상대방이 어떻게 알고 확신합니까?”


“자네에게선 아직 장미향이 느껴지니까.”


그 말에 마법사는 언뜻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라진 게 아니라 익숙해진 거였나.


아직 붉은 기가 도는 말랑한 볼을 꾹꾹 눌러보지만 아기는 여전히 잠을 자느라 약간의 뒤척임으로 작은 저항만 할 뿐,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눈꺼풀이 완전히 내려오며 가라앉은 색마저 가린다.


“마녀 왕국에 지인이 있습니까?”


“설령 지인이 있더라도 지인 외의 다른 마녀들에게 있어선 마법사란 존재는 교류든 경계든 이방인이지.”


“마녀 왕국에도 보호시설이 존재합니까?”


“그랬다면 마녀들이 장미들을 한 데 모으진 않았을 거야.”

닫힌 눈꺼풀은 미동 없이 그대로 있었다. 마법사는 여전히 질문만 한다.


“저의 결심이 지독한 겁니까?”


“지금까지 지켜온 자네의 딱딱한 결심은 둘째치고 지금 마법 세상 돌아가는 바람 하나 잡아들어보면 마녀 왕국으로 여행가고 싶어하는 꿈돌이들도 마녀 왕국에 발을 딛는 걸 자제하고 있어.”


번쩍 푸른빛이 깜빡인다. 어쩐지 살짝 멍해보이는 얼굴은 그 흔한 속삭이 바람도 잡아보지 않은 터라 아무것도 몰랐다. 쉬이 볼 수 없는 마법사의 희귀한 얼굴을 보게 된 GM은 그렇게나 즐거웠는지 쉴 새 없이 들썩인다.


마법사는 이번엔 그의 웃음을 말리지 않았다.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그에게서 나온 적은 바람을 잡아들어 어쩌면 진짜인지 허구인지 모를 이야기의 살을 붙인다.


“설마...제가 생각하는 건 아니기를 바랍니다.”


“뭘 생각하고 있는데?”


“양쪽 모두 상처 입은 채로 방치되지 않았습니까? 특히 마녀들은 더더욱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어. 아직은 그거 아니니까 걱정 집어넣어.”


“‘아직은’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안심이라는 건 이미 그른 것입니다. 아무리 56년이 지났다지만 그들의 세상에 새겨진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시간이라는 모래에 묻혀진 정도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 오히려 상처가 더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마당인...!”


“자자 진정하고 이거나 마시고 있어. 그러다 아기 깨서 빽빽 운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건 제법 뜨겁지만 그 입에 닿아있는 건 차가운 얼음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입에 물려진 잔을 낚아채다시피 입에서 떼낸 마법사는 데인 혀를 식히고자 입술에 닿았던 얼음을 입안에서 굴리고 있다. 얼음을 동동 띄우고 있는 주제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갈색 액체는 그가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평범하게 끓였다면 그도 이렇게 싫어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입안에서 맴도는 향과 얼음으로 갈색 액체처럼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힌 채 마찬가지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커피를 저런 식으로 끓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로군요.”


“약새풀이라는 것도 널려있는 마당인데 이정도야 놀랍지도 새삼스럽지도 않지!”


“약새풀이 널려있다니. 풀을 수집하는 여행자나 도감을 만드는 사람이 들으면 거품 물 소리인 거 압니까?”


“에이! 야생 약새풀 말고 잔뜩 널려있을...”


“지금 당장 듣는 사람이 없다 해도 속삭이 바람은 무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법사의 가라앉은 말을 끝으로 GM은 더 이상 그에 관한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껄껄 웃으며 세상모르고 잠든 아기를 바라봤다. 일순 그 눈앞에서 주름살이 생기기 전의 손을 타고 갔던 아기들이 까르륵 웃고 있었다. 뻗고 있던 손을 거둔 그는 마법사의 눈을 마주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저 아기 어떡할 거야?”


“현재 그들의 세상을 보면 답은 하나밖에 없는 거나 다름없어 보입니다만.”


“대부분 잠으로 떠나보낸 주제에 바깥사람인 척 하기는...자넨 아직 마법사고 저 아기도 마녀야. 비록 로브를 벗긴 했지만 진명도 다시 취하지 않은 자네는 그저 이름 없는 마법사일 뿐이야. 적어도 아기가 부를 이름 정도는 있어야지 않겠어?”


“퍼블리 셔.”


푸른빛은 어느새 아기에게 닿아있었다.


“아기의 이름입니다. 비록 태어난 지 2주일 후에야 붙여줬지만 2주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겁니다.”


단호하게 꺼낸 말 뒤에 굳은 결심이 붙는다.


“아기에게 불려지는 건 이름이 아니라 아빠라는 호칭으로도 충분합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떨린다.


마법사가 그토록 만나기를 꺼리던 늙은 마법사를 찾은 데에는 상당한 마음가짐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만남을 가진 후 자리를 빠져나왔을 때는 어느새 후회를 달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날은 없다고 무방할 정도로 그는 늙은 마법사에게 감정적으로 말려들었다. 어찌 보면 엉망진창으로 보일 과거의 전적들에도 불과하고 마법사는 이번에도 찾아갔고 이번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다.


“아부브바아!”


촉촉한 입이 몇 번 우물거리자 천이 금새 축축해진다. 지친 기색이 만연한 한숨과 함께 천을 당기는 손은 제법 조심스러운 반면 물고 있는 입은 그런 배려보단 빼앗는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방금 전보다 훨씬 강하게 물고는 놔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는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함부로 넣지 않는 게 좋으니 어서 뱉어라.”


“부브브브!”


“후우...”


세번째 한숨이다. 늙은 마법사의 조언은 진지했다.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심심풀이로 꺼낸 것이 아닌, 진짜로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 꺼낸 요청이었고 건네받은 조언이었다. 마법사는 똑똑했고 건네받은 조언대로 아기를 키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의 손은 서툴렀고 품 안에 들어오는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조그마한 아기는 사랑스러운 얼굴과는 다르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악동이었다.


간신히 아기의 입에서 천을 빼낸 마법사는 칭얼거리는 아기의 등을 쓸어주며 달래주기 바빴다. 몸부림이 점점 가라앉고 어느 순간부터 색색 고른 숨소리와 그에 맞게 들썩이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하늘색의 작은 요람으로 아기를 내려놓은 마법사는 아기에게서 손을 때며 조용히 입을 연다.


“처음 2주 동안은 내가 널 어떻게 돌봐왔는지 정말 아직까지도 신기하구나. 아니 어쩌면 돌본 게 아니라 네가 살기 위해서 스스로 버틴 것일지도 모르겠군.”


푸른빛에 반쯤 휘장을 친다. 처음 안아들었을 때 이후로 아기는 안긴 자세가 불편했는지 늘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고 우느라 새빨개진 아기의 얼굴과 당황하며 창백해지던 마법사의 얼굴이 둥실 떠오른다. 이내 그 어렴풋한 잔상이 보기 불편했는지 길게 내쉰 숨으로 흩트린다.


“나는 마녀들처럼 아기를 직접 키워본 적도 없고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아오느라 타인을 위하는 방법은 모른다. 어쩌면 내가 너를 키우는 건 너에게 불행일지도 모르지. 더군다나 나의 일방적인 다짐은 네가 원래 있어야할 자리로 가는 것도 막는구나.”


슬픔이 담길 법한 말들임에도 불구하고 담겨져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기에게서 떨어졌던 손은 떨어진 순간부터 계속해서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변명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하마.”


어느새 그의 손은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항상 야단치기만 했던 로메루가 밸러니의 장난을 받아주기라도 했는지 땅과 하늘 사이를 달리는 바람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포근하고 잔잔했다.


얌전하게 변한 그들은 어느새 잠을 자고 있는 얼굴의 뺨을 한 번씩 쓸어가고 풀내음을 머금은 웃음을 흘리고는 유유히 자리를 뜨곤 했다. 그들의 따뜻한 손길과 숨결에 더욱 풀어진 표정을 지으며 나른함에 빠져드는 아기가 있는 반면, 행여나 졸다가 아기를 떨어뜨릴까봐 나른함을 떨쳐내는 어른도 있었다.


바람이 조심스레 구름을 걷어내며 지나간 자리엔 구름 뒤로 웅크리고 있던 햇빛이 손을 뻗어내리기 시작했다. 따뜻했던 바람에 비해 햇빛은 제법 따가웠는지 나른함에 취해있던 아기가 작게 칭얼거리며 햇빛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마법사의 품에 파고들었다.


행여나 아기의 작은 숨이 막힐까봐 마법사는 파고드는 아기를 품에서 살짝 떼어놓았지만 아기는 불만스러웠는지 아까보다 더 크게 칭얼거린다.


“우으..이에에엥!”


요즘 들어 아기는 매우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꼭 어울리던 하늘색 요람에서 하얀 이불을 덮은 채 잠든 아기의 모습은 구름 속에 폭 파묻힌 천사였다. 마법사가 곁에 없어도 아기는 항상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부터 아기는 마법사의 품에 안길 때마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장미 꽃잎보다도 작은 손으로 마법사의 옷자락을 꼭 쥐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살 작은 손을 떼어내며 요람 위에 내려놓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깊어지는 옷 주름과 칭얼거림은 그의 마음을 당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아기는 요람에서 잠들기 거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의 품에서 떨어지는 걸 싫어했다. 물론 마법사도 아기를 늘 품에 안고 다닐 순 없으니 아기가 곤히 잠든 틈을 타 내려놓았지만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그 즉시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아기는 품에 안겨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마법사는 아기의 울음을 멈추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퍼블리.”


마법사가 아기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울음이 멈춘다. 아직까진 히끅거리며 어깨를 들썩이지만 눈물 담은 녹색 눈은 더 이상 울지 않고 동그랗게 뜨고는 빤히 쳐다보기 바빴다. 그럴 때마다 마법사는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는 아기가 신기하면서도 그렇게나 이름을 많이 불러주지 않았나 내심 뜨끔한 마음이 들곤 했다.


아직까지도 빤히 쳐다보는 동그란 눈과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찾아오는 나른함과 어딘지 모를 간지러움 때문에 매번 눈을 먼저 돌리는 건 마법사였다. 동시에 아기는 작은 손으로 다시 마법사의 옷자락을 잡는다.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우으으! 아부브아아바!”


“잠시만 놓거라. 너를 안은 채로는 네 밥을 준비하기 힘드니까.”

아기의 칭얼거림은 또다시 시작된다. 마법사는 머리가 아파오는지 눈을 질끈 감다가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한껏 비장하게 눈을 떴다.


“...가만히 있어라.”


늙은 마법사가 가르쳐준 건 꽤 다양했다. 그 한가지 예를 꺼낸다면 일은 봐야하지만 아기를 떨어뜨려놓을 수 없는 상황의 해결책. 설명을 들은 마법사는 되도록이면 오지 않았으면 하던 상황이었고 아기는 요람 속에서도 얌전했기에 안심했다. 하지만 아기는 아기였다.


“그 날 이후로 그녀석들이 없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다니...”


자조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는 뒤에서 버둥거리는 아기가 떨어지지 않게 엎드린 상태를 유지하고 천을 더 꽉 동여맸다. 등에 업힌 채 천으로 둘러싸여 받쳐져있는 아기는 새로운 상황이 재밌는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등 위로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작은 온기에 또다시 간지러움을 느끼던 마법사는 익숙하게 젖병에다가 가루를 넣고 물을 끓이던 순간 갑자기 뒤통수에서 미약하게 당기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귓가에 아기의 우물거리는 소리를 듣고 기겁했다.


"자..잠깐! 머리카락도 입에 넣는 게 아니야!"


재빨리 고개를 비틀어 아기에게서 멀어지지만 아기는 이젠 두 손까지 동원하며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물은 끓어넘치고 있는 지경이었으니 급하게 불을 끄기 위해서 손을 뻗는 순간 아기가 다시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여어 잘 키우고 있어?"


언제 왔는지도, 어떻게 찾아온 건지도 모를 늙은 마법사는 사전연락은 물론 노크까지 무시하며 태연하게 제 집 문을 열듯이 들어오며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생생하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그가 보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 날 마법사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아기는 잘 키우고 있는 모양이야.”


“당사자인 저는 전혀 동의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만.”


“부브으아!”


아기는 여전히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입으로 가져가기 일쑤다. 물론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아기의 손을 감싸쥐며 떼어내기 바빴다. 아기는 손에서 빠져나간 붉은 색의 가닥들이 아쉬운지 울음을 터뜨릴 기색을 보이자 마법사는 아기를 안은 팔을 약하게 흔들며 아기를 달래주려고 했지만 아기는 이미 울음 섞인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쩔쩔매는 모습에 즐거운 건 다름 아닌 늙은 마법사다.


“자네 머리카락을 잘라서 장난감으로 만들어주면 어때?”


“농담은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농담 아닌데!”


껄껄 웃으면서 반격하는 말은 그저 조용히 무시해주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은 마법사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는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게 등을 토닥였다. 서서히 울음이 가라앉는 아기와 조금 힘들어 보이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늙은 마법사는 어느새 웃는 걸 멈추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이 제법 따갑게 느껴졌는지 아기가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힘차게 익숙한 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꽉 쥔 손이 어른만큼 강하진 않지만 평소와는 달리 힘이 들어간 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아기도 그 잔잔함이 폭풍 전의 고요함이라는 걸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아기를 키운 지 이제 막 한 달 남짓 했나?”


“한 달은 넘었습니다만.”


“내가 마녀 아기는 키워본 적이 없는데다 마녀들이 주문 마법을 가장 많이 쓰는 만큼 제일 먼저 깨우치는 건 입에서 나오는 소리, 즉 말이지. 지금 새삼스럽게 말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라.”


“뭐가 말입니까?”


“보통 마법사 아기들이 옹알이를 하는 시기는 4개월부터였어.”


순간적인 침묵이 주위를 감싸안으며 그들의 입가를 어루만진다.


“앞서 말했다시피 마녀 아기라는 점을 신경 써도 아무리 빨라야 한 달 정도야. 하지만 자네가 나를 찾아온 건 아기가 태어난 지 2주일 조금 넘어서였나? 그 때 자네의 반응을 보면 아기의 옹알이가 매우 익숙해보였지.”


마법사는 아무런 말없이 아기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아기가 살살 눈꺼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손도 조금씩 멈추더니 어느새 잠든 아기는 푹신한 요람과 이불에 둘러싸여있었다.


살살 작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푸른빛과 흰 색 덕분에 하늘을 쓰다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실 없는 생각을 접어두고 다시 무거운 주제로 말을 담그기 시작했다.


“일종의 주의입니까?”


“일종이 아닌 주의 자체야. 몸을 가장 많이 뺀 나무는 가장 먼저 베어지고 색을 가장 많이 머금은 꽃은 가장 먼저 꺾이는 법이야.”


“아무리 귀한 약초라도 전혀 돋아나본 적 없는 곳에서 돋아나면 그들의 눈엔 아무것도 아닌  잡초입니다.”


“그렇다 해도 눈에 띄는 법, 늦든 빠르든 손이 뻗어오는 건 시간문제야.”


마법사는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됐다. 분명 그는 주의를 주고 있지만 그에 따른 대답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명 그가 하고 싶은 말, 즉 해결책은 따로 있지만 아직도 마법사의 입에선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마법사도 알고 있을 터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른다. 


마법사는 똑똑했고 촉이 좋았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뜨리는 늙은 마법사지만 그를 알아온 시간이 현재까지의 삶의 8할은 차지했다. 붉은 색이 서로 마주보며 험한 줄을 새기고 그 아래의 파란 색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늙은 마법사는 어느새 다시 웃음을 되찾아 하얀 이를 익살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호수에서 건진 데 물 냄새 나는 거고 장미꽃 심은 데 장미꽃 나는 거지.”


“그게 당연한 이치인 건 알지만 문제는 장미꽃이 호수 옆에 났다는 겁니다.”


“그럼 당연한 이치로 돌려놔야겠지?”


“그 뒤에 붙을 해결책은 저에게 있어서 해결은 커녕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게 뻔하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걸로 치겠습니다.”


“아기 문제 해결이 우선 아녀?”


“아까 하신 말씀들을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에잉! 재미없긴!”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낄낄 웃는 모습을 보면 포기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마법사는 그의 기대에 부흥해줄 생각따윈 없었다. 그저 웃는 얼굴에 더군다나 연장자에게 가시 돋힌 말을 더 이상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 언제나 그랬듯이 마법사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입을 닫는 건 물론이요 시선은 먼 곳을 향했다. 먼 곳이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아기가 누워있는 요람이었다.

자리잡은 변화를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는 건 옆에서 보는 제 3자였기에 늙은 마법사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숨과 함께 짧은 기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하는 모습에 마법사도 외면하는 걸 그만두고 그를 따라 일어났다.


“아아 배웅은 필요 없어! 어차피 다음에 또 올 테니까 매번 배웅하는 것도 질리잖아?”


“매번이라...자주 오신다는 말씀입니까?”


“아기들한텐 필요한 게 많으니까 자주 올 수밖에 없지. 아니면 찾아오던가?”


“...매번 신세집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터뜨리는 웃음에 민망한 기분도 잠시, 그들의 인사가 끝났다.


마법사는 그 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라는 건 어떤 때에는 느리면서 과거를 뭉개는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때에는 그 어느 것보다도 빠르면서 과거를 선명하게 새긴다는 것을.







만남








“거 시X! 그 새낀 또 어디로 꽁무니 뺐어?!”

“욕은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아니 X발, 내가 지금 욕을 안 하게 생겼어!? 단체 수장이라는 새끼가 아랫것들은 피똥 싸게 뺑이치고 있는데 그 옆에서 허구한 날 당당하게 놀러나가니까 내가 이 지X이지!”

“당신은 지금 상관인 수장을 욕하고 계십니다. 부디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그 개 X같은 배추머리 수장새끼가 지금 일하다 말고 나가서 처 놀고 있으니까 내가 욕을 X나게 하잖아!!!”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전혀 맞물릴 생각 없이 일방적으로 건네지는 대화의 주인들은 그들이 닥친 상황 자체가 꽤나 익숙해보였다. 물론 익숙한 것과 별개로 험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은 말과 함께 올라오는 목소리처럼 얼굴에 피가 많이 올라와 몰렸는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얼마간 더 험한 말들을 쏟아낸 후엔 조금은 진정했는지 숨을 가쁘게 내쉬며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열을 품고 있는 목소리로 천천히 까칠한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엔 대체 얼마나....후-X발 나가서 놀려고 숨 쉬면서도 휘날리는 찌꺼기들까지 없앴냐?”

“얼마나 자리를 비울 진 저 또한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이제까지와는 달리 철저하게 뒷정리를 한 걸 봐선 꽤나 오래 걸릴 듯 싶습니다만.”

“아, 그건 나도 아는데 그 X같은 새끼가 지금까지 나가서 해온 개짓거리들의 기간 보고 대충 견적 좀 때려서 맞춰보라고!”

“어쩌면 모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화려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



“빠빠아아아아아아아!!”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우렁찬 소리가 나올까.
아기는 아직 기어다니고 있었지만 거의 어린아이가 뛰어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아기가 먼저 깨우친 건 마녀답게 언어적인 면이었지만 몸도 그에 못지않게 성장이 빨라보였다.

복잡한 마음이 섞인 한숨이 채 나오기도 전에 삼켜버린 마법사는 아기를 안아올렸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한동안 아기의 성장이 멈추는 듯이 거의 변한 게 없었던 일이 있었다. 심지어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 마저 멈춰버려 당황한 마음에 이번에는 늙은 마법사를 직접 찾아가려고 하는 순간 아기의 성장이 다시 시작됐었다. 다만 처음같이 빠르지는 않을 뿐.

마법사는 다른 마법사 아기들처럼 변해버린 성장속도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걱정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기가 걸음마를 익힌다면 얼마안 가 뛰어다닐지도 모를 기세라 결국엔 달라진 건 그닥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의 예상은 제대로 적중했다.


“꺄아아아아!”

“퍼블리.”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기가 부딪쳐서 다칠까 단호하게 이름을 부르지만 아기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가 일어서는 모습에 오히려 더 신나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같이 놀아주려고 하는 줄 알았는지 펄쩍펄쩍 뛴다.

당연하게도 아기는 아기인지라 얼마 가지 못하고 마법사의 품에 안긴 채 방으로 되돌아왔다.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아기가 답답해하면서 버둥거릴 거란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마법사의 품에 파고들었다. 푹신한 이불 위로 내려놓은 뒤 부엌으로 갔다. 

물론 아기는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고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 즉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기는 그대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안 돼.”

“이잉!”

마법사가 집 안에서 절대로 아기를 들여보내지 않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다름 아닌 부엌이었다. 물론 아직 기어 다니지도 못할 때에는 아기를 천으로 감싸서 업은 후 자주 부엌에 들어왔으나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퍼블리가 걸음마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일어날 뻔 했다.

마법사는 아직까지 그 때를 떠올리면 무표정으로 항상 굳어있던 얼굴이 창백해지며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가 자란 아기의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잠시 방 안에 두고 부엌으로 갔을 때 문을 열어둔 게 화근이었다. 

그릇을 꺼내는 동안 뒤에서 탁탁-하고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봤더니 아기가 서랍이 딸린 그릇 씻는 곳을 치고 있었다. 문제는 아기의 바로 그 위에 칼이 걸쳐져 있었다는 거였고 잽싸게 달려온 마법사가 칼을 치운 덕에 칼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법사의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그 날 이후론 마법사는 아기를 방 안에 둘 때 꼭 문을 닫았지만 어째서인지 문고리가 고장난 덕분에 아기가 힘차게 밀면 열리게 됐다. 문고리를 튼튼하게 고쳐야겠다면서 작은 불평을 내도 방 문을 잠그지 않아도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아기가 방 안에 갇힌 건 마찬가지라는 걸 느꼈는지 고치는 걸 미루고 있다. 다만 아기가 나와서 부엌으로 따라 들어오려고 할 땐 단호하게 막아섰다.

“사실 이렇게 혼자 두는 것도 나쁘지만 부엌은 위험한 게 많아서 안 돼.”

아기들에게 이기는 어른들은 없다고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직까진 마법사의 승리였다. 단호한 말투와 눈빛에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걸 느낀 것 같지만 발을 다시 뒤로 돌리진 않았다. 누가 마법사의 아기가 아니랄까봐 그처럼 눈에 보이는 단호한 고집에 잠시 한숨을 쉬던 마법사는 그래도 무릎을 굽히며 앉아 아기와 눈을 마주했다.

“퍼블리.”

아기는 여전히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은 건지 떼를 쓰면서 찌푸리던 눈마저 동그랗게 뜨고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 아기가 귀여웠는지 픽 웃음을 터뜨린 마법사는 손을 들어 하늘빛을 머금은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기 또한 기분이 좋았는지 아기 특유의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조금 풀린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

결국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기는 불만스럽게 칭얼거렸지만 닫힌 문은 한동안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앉은 채 다리를 흔들며 불만을 담아 바닥을 쳐도 미리 이불을 깔아둔 덕에 폭폭 부드럽고 앙증맞은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예 누워버리고 이번엔 팔까지 거들었다. 

곧 지루해졌는지 다시 일어나서는 힘껏 문을 밀었다. 마법사는 이번엔 바로 부엌으로 갔는지 아까 서 있던 자리에는 없었다. 아장아장 걸으며 점점 방에서 멀어졌지만 부엌이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아기는 마법사를 찾는지 여기저기 고개를 흔들지만 낮은 아기의 시야에서 보이는 거라곤 의자다리와 제일 낮은 곳에 있는 서랍칸들과 아기를 위해 만든 밋밋한 밀짚 인형들뿐이었다. 그러다가 아기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집 밖으로 나가는 현관문이었다. 

아기는 그 문을 눈빛만으로도 뚫을 기세로 빤히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방 안에 있을 때 닫힌 문과 똑같이 느껴졌는지 상당히 불만스러운 기색이 보였다.
아기는 그대로 문으로 달려가 있는 힘껏 밀어대기 시작했지만 열리기는 커녕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그마한 입에서 불만을 가득담은 칭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이이잉!”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몸이 기울었다. 그대로 넘어진 아기가 훌쩍이며 일어나 주저앉은 채로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

“으우아?”

살며시 흔들리는 녹색들이 녹색 빛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흔든 부드러운 바람이 작은 몸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마법사의 품에 안겨있던 때 이후로 몇 달간 아기는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흙들이 아쉬웠는지 작은 발바닥이 지나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작은 하얀 그릇이 떨어져 방바닥을 나뒹군다. 용케 그릇은 깨지지 않았지만 담겨 있던 이유식이 쏟아지는 바람에 바닥이 어지러워졌고 안타깝게도 치워야할 사람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급한 마음만큼 바닥을 쿵쿵 울리는 소리는 매우 요란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멈췄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그의 손이 떨리는 이유는 찬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꽉 닫아서 잠가놓았을 문인데 어째서인지 아기가 있던 방과 똑같이 문고리가 고장나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건 어느정도 사람의 발길을 탄 덕에 풀이 자라지 않은 흙바닥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건 그 위에 있는 작은 발바닥 자국이다.

“퍼블리!!”

그 위를 어른의 발이 다급하게 덮는다.



*****


“퍼블리! 퍼블리!”

아기는 대체 어디까지 갔을까, 그 작은 발로 얼마 가지 못했을텐데 머리카락은 커녕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밸러니의 심술부리는 날이라도 되는지 아기의 발자국도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마법사의 집을 둘러싼 숲은 위험한 생물들이 살고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걸음마를 뗀지 얼마 안 된 아기가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기가 혼자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어찌됐건 간에 아기를 혼자 내버려둔 건 마법사 본인이었으니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스스로 망치를 두드리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리 오래 매달리지는 않았다. 우선 아기를 찾는 게 먼저였고 자책은 그 후였다.

아기가 우는 건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발 아기가 울어서라도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길 바랄 정도로 간절해졌다. 

불안감이 점점 커져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눈앞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앞이 보이지 않아질 정도였지만 그는 자신의 눈에서 앞을 가리다 못해 넘쳐서 창백한 뺨을 뜨겁게 쓰다듬어 내려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많이 잡아도 방문 앞을 떠나서 이유식을 만들고 있는 동안, 아기가 가장 싫어하는 그 시간 동안 흙바닥에 남겨놓았던 작은 발자국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버렸다. 그 시간은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기는 물론 어린아이들이 미아가 되기엔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 내에 아기의 걸음으론 숲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였다.

처음에 했던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생각이 번쩍 튀어나와 그의 머릿속을 붙잡았다.

어느새 뛰는 것도 멈춘 채 숨을 거칠게 내쉬던 그는 깊게 들이쉬며 고르기 시작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 주위와는 반대로 남아있던 눈물들을 마저 털어낸 눈은 냉랭하게 식어있었다.

“...허!”

짧게 토해낸 숨과 함께 나온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녹아들어있었다. 그 복잡하게 섞인 감정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분노였다.

“나와.”

뒤이어 나오는 목소리 또한 싸늘하기 그지없었지만 반대로 그의 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매우 끓어있는 상태였다.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건 나무와 바람에 쓸리는 풀들의 소리 뿐, 그가 바라보는 곳엔 사람 그림자는 물론 숨소리조차 다가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나와.”

순간 무언가가 흔들리는 듯한 기색이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계속해서 주시하던 곳으로 다가갔다. 급하게 달려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걷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을 잡으러 가는 사냥꾼의 발걸음과 같았다.

빽빽하게 늘어서있는 나무들 아래의 그림자로 다다른 순간

“빠빠아아아!!”

그토록 간절했으며 애를 태우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평소라면 저렇게 크게 소리를 내면 작은 목이 망가지지 않을까라는 걱정 담긴 생각이 자리잡았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것보다도 반가웠으며 간절한 소리였다.
숨이 턱 막히는 것과 함께 급하게 뒤를 돌아보자 평소 또렷하게 반짝이던 녹색 빛에 물기가 가득 담겨 아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뺨에 잔뜩 자국을 남기다 못해 계속해서 떨어지는 빛들은 흙투성이인 작은 맨발 위로 떨어져 산산히 부서지며 빨갛게 부어오른 여린 살들을 쓸어내려가 흙바닥에 짙은 자국을 남기며 숨어들어가고 있었다.

마법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바로 아기에게 달려갔다. 몸을 숙이고 팔을 벌려 작은 몸을 안아 올리고 작은 손도 자신보다 큰 옷자락을 꽉 잡아 놓지 않았다. 들썩이는 등을 한 손으로 쓸어주며 천천히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퍼블리.”

제 이름을 부르자 우는 걸 멈춘 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아직 들썩이며 완전히 진정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는지 그의 어깨에 조그마한 얼굴을 파묻으면서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기가 완전히 진정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아기의 등을 쓸어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 고른 숨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울다가 지쳤는지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감은 채 잠든 아기의 뺨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그에 안도감과 까맣게 타들어간 속상함을 담은 한숨을 내쉬고는 눈보다 더 빨갛게 부어오른 발이 아프지 않게 고쳐 안으며 굳은 몸을 움직였다.

몇 발작 걸어가던 마법사가 다시 멈춰섰다. 이내 뒤를 돌아본 그의 눈은 아기를 바라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아기가 나타나기 전에 계속 주시하던 곳을 쏘아봤다. 작게 입을 달싹였지만 그 입에서 나온 한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는 그대로 자리를 뜨며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다.

고요함만이 남은 그곳에서 나무들 아래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



“빠아?”

“불편한가?”

“무으야?”

“외출용으로 새 옷을 하나 마련했다.”

“새오오?”

아기가 제일 먼저 깨우친 게 언어적인 면이라는 걸 새삼 느낀 마법사는 글을 배우는 것 정도는 빠르게 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서재에 있는 책들 중에서 아기의 말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용 책은 없던 걸 떠올리고는 이번에 가는 김에 부탁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교육에 대한 열을 점점 불태우고 있는 동안 아기는 처음 입어보는 옷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불편한 기색 없이 좋아하고 있었다.

특별히 꾸미기 위한 장신구는 없지만 머리카락에 돌고 있는 색처럼 푸른 천을 눈 색을 따라 맞춘 녹색 천으로 만든 끈이 감싸 단정하게 모양을 잡았다.

아기를 무릎에 앉히자 신이 났는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짧은 머리카락을 빗으로 부드럽게 빗어주려고 했지만 놀아주기 위해 장난감을 꺼낸 줄 알았는지 손에 들려있는 빗을 향해 작은 손을 뻗는다. 그 손을 잡아주며 머리를 쓸어주자 또다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엉키진 않았지만 머리카락들의 길이가 서로서로 다른 게 눈에 들어오자 언제 한 번 다시 다듬어줘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빗질이 끝났다.

“너는 이번이 두 번째로 가는 거겠구나.”

“므?”

“늘 찾아오시는 할아버지네로 가는 거다. 그리고 그건 입에 넣는 게 아니야.”

내려놓은 틈을 타 빗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걸 막아 아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올려놓은 후 흰 양말과 아기의 발을 잡았다. 간지러운지 발을 흔들지만 잡고 있는 힘이 더 강했다. 계속해서 흔드는 아기의 발을 보고 마법사의 얼굴이 낮게 가라앉았다.

얼마 전, 문고리가 망가진 문을 나선 아기는 바로 앞의 숲에서 길을 잃었었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은 강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두려움 또한 강했다. 숲으로 들어선 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호기심 대신 두려움이 일어났고 마법사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거친 흙바닥을 밟으며 돌아다닌 발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돌에 긁혔는지 상처까지 생겼다. 상처를 가만히 보고만 있고 내버려둘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아기의 발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마법약으로 다시 부드러운 아기발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 빨갛게 부어오른 발이 떠오르는지 가라앉은 얼굴은 다시 돌아올 기색도 없었다.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양말을 마저 신겨줬다. 다른 맨발도 마저 양말을 신겨주기 위해 발을 쥔 손을 놓은 그 순간 아기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법사의 무릎에서 내려와 방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얼마 안 가 잡힌 아기는 나머지 발도 버둥거렸지만 결국엔 양말이 모두 신겨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아기는 그제야 다시 뛰어다녔고 마법사 또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회색 천으로 만들어진 외출용 로브를 두른 채 아기를 안아들고 문고리를 고친 문을 열었다.

“가자.”

집 밖의 숲을 벗어나 늙은 마법사가 있는 마을로 가는 내내 아기의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허어 오늘은 약새풀이 타면서 열기를 냈나? 웬일로 찾아왔어?”

늙은 마법사는 웃으면서 반쯤은 진심을 담아 마법사에게 물어봤다. 물론 그 말이 정말로 틀린 게 아니라 보통은 민망함을 느끼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거나 시선을 피할지도 모르지만 마법사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그도 늙은 마법사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어느 정도 뻔뻔함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문득 주름진 눈가가 씰룩였다. 마법사도 눈치 챌 정도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이 아니었으면 어린아이라고 생각될 법한 밝게 빛나는 눈이 빤히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아기를 꼭 껴안고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저번에 보니 걸음마도 곧잘 하던 것 같던데 신발이 없는 걸 보면 오다가 잃어버린 건 아닐 테고...”

꽤나 재밌는 걸 발견한 것처럼 눈빛이 더욱 부담스럽게 반짝인다.

“집에서부터 계속 안고 왔어?”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문을 넘어서 바깥까지 뛰어나가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귀로 뛰어든다. 마을 사람들은 그 웃음소리가 익숙한지 계속해서 웃음소리가 나오는 집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다시 제 할 일들을 하러 간다. 웃음소리가 멈춘 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저렇게 뛰어다니는 거 많이 답답했나본데? 설마 자네한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렇지만 너무 그렇게 싸고도는 것도 안 좋다고?”

호수가 가까이 있는데다가 아기를 키우는 마법사들도 있는 마을이라 시선을 받을 만한 일은 없었지만 아기는 낯선 곳이 두려운지 오는 내내 마법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왔었다. 

다행히도 마법사의 집으로 자주 찾아오던 늙은 마법사 덕에 얼굴이 기억에 남았는지 집에서처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안정을 되찾은 아기의 모습에 안도와 함께 떠오른 얼마 전 기억에 조금 쓰라림을 담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큰 웃음이 멈추고 잔웃음이 나오던 입도 부드러운 호를 지운 다음 딱딱한 선을 머금었다. 오랜 세월을 장난과 웃음만으로 살아온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 그 모습에 안심한 마법사는 안도 섞인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웬 일로 찾아왔어? 보니까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늙은 마법사가 눈치 빠르게 먼저 말을 꺼낸 덕에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잡혔다. 아기는 무거움도 못 느끼고 마냥 기분 좋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 아기에게 잠시 눈길을 준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질질 끄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그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잠시 동안 퍼블리를 맡아주세요.”

진지하게 꺼낸 본론은 사실 늙은 마법사에겐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기를 돌본 경험이 있는 것은 물론 마을 내에서 아기를 키우는 마법사들 모두 그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그만큼 능숙한 사람은 없었기에 그의 끝없는 장난기에 머리를 붙잡고 그의 웃음에 불안감을 가지는 사람들이었지만 아기를 돌보는 것에 관해선 진지했고 그를 믿었다. 

가끔 일이 있는 사람도 아기를 옆집보단 그에게 맡겼다. 그도 자신의 능숙함을 알기에 서슴없이 맡았고 마을 내의 아기들과 아이들은 그를 잘 따랐다.

그만큼 그는 눈치가 빨랐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에게도.

“뭔가 일이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졌군 그래?”

“약새풀을 입에 넣어줘도 시원찮을 녀석이 숲을 방패삼고 그림자를 두르더군요.”

“그 시원찮을 녀석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였어? 이것 참...마냥 웃으면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에 딱히 불만을 담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그것보다 처리해야 할 일이 더욱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네 성정엔 퍼블리를 더더욱 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비록 자네 몸이 그 지경이 되었다지만 오히려 그만큼 자네 마법 효과는 굉장할 텐데.”

그 말에 마법사는 시선을 조금 돌려 늙은 마법사의 뒤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기를 바라봤다. 성장이 매우 빠르지만 아직은 아기인 마녀. 시선을 느꼈는지 아기가 고개를 돌린다.

“꺄하!”

아기 특유의 맑은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 퍼진다.

그는 아기를 바라보며 마주 웃어줬지만 그 안엔 조금 씁쓸함이 담겼다.

“퍼블리가 혼자 있는 걸 싫어하더군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어른들 사이엔 침묵이 다가와 그들의 입가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고 아기가 뛰어다니는 소리만이 내려앉으려는 적막을 열심히 쫓아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늙은 마법사였다.

“그래 맡기는 건 문제 없어. 다만 퍼블리가 싫어할 거야.”

“퍼블리가 잘 따르는 사람은 지금 저 외엔 당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보다 아기를 잘 돌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 맡기는 겁니다.”

아기가 싫어한다는 말에 이해가 안 가는지 의문 섞인 말을 건네고는 제 앞에 놓인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해진 커피를 조금 마신다. 그에 늙은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다. 잔이 다 비워지지 않았지만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아기가 그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빠아?”

아기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토박토박 걸어와 마법사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 귀여운 모습에 잠시 웃음이 터진 마법사는 무릎을 굽혀 앉아 아기의 예쁜 녹색 빛을 마주하고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라.”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멍하니 입을 벌리며 서있던 아기가 눈을 깜빡이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아직 아기의 다리로는 따라잡기 힘들었다. 아기가 문에 도착하는 것보다 마법사가 문을 열고 나가는 시간이 더 빨랐다.

“빠빠아아아아!!!”

아기는 이미 닫힌 문을 작은 손으로 두드리며 마법사를 불렀지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아기의 어깨가 점점 들썩이며 녹색 빛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늙은 마법사는 한숨을 쉬며 아기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조심히 안아올렸지만 아기는 여전히 버둥거렸다. 그에 늙은 마법사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똑똑하던 녀석이 이럴 땐 멍청해지는구만.”



*****



아기를 늙은 마법사에게 맡기고 나온 마법사는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길목에 멈춰선 채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발길이 자주 닿아 자연스럽게 풀이 몸을 비켜 만들어진 흙 길 외엔 온통 풀밖에 보이지 않는 초원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눈을 감은 그는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가 조금씩 내쉬었다.

“나와.”

바람만이 조금 불어와 그의 말을 담아갔지만 얼마가지 않아 흔적도 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주변엔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은 물론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는 그를 지나가는 바람의 손길을 느끼며 마음속에서 약간의 인내심이라는 꽃을 피워냈다. 꽃의 씨앗도 그걸 자라게 해줄 물도 없던 그 꽃은 순식간에 피어났고 어디선가 날아오는 바람으로 단숨에 피워낸 꽃잎들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허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감은 눈으로 꽃잎들을 바라봤지만 얼마가지 않아 흩날려진 꽃잎들은 사라졌다. 그의 짧은 말처럼.

언제나 걷을 수 있는 얄팍한 휘장이 묵직하게 들어져 푸른색을 보였다. 어쩌면 인내심이란 그 눈에 담겨지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흩날리며 사라진 꽃잎에 호응했는지 푸른색을 기다리던 노란색이 흥미를 담은 채 반짝인다.

“안녕하심까?”

아무것도 없었던 길목 한가운데 마법사의 바로 앞에 키가 큰 마법사가 서있었다.
두르고 있는 로브는 검은색이었다. 머리카락도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이 아닌 건 하얀 얼굴과 한쪽에 검은색을 함께 품고 있는 노란빛이었다.

마법사는 마법사를 만났다.







푸른 달





“퍼블리!”


푸른색을 머금은 하얀 머리카락들이 부드러운 천처럼 흔들린다. 하얗고 가벼운 천으로 만든 옷은 시원해 보였지만 땀에 젖어있었다. 어깨에는 닿지 않지만 목을 거의 덮을 정도로 길어진 머리카락들이 더웠는지 머리카락을 그러모으던 손이 멈췄다. 


머리카락 아래에서 깜빡이는 녹색 빛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 시선 끝에 노란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은 아이가 반가운 기색이 만연한 얼굴로 손을 높이 든 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에 따라 마주 손을 들어 흔들어주며 달려오는 친구를 맞이했다.


“아니카!”


아기는 어느새 아이가 되어있었다.


“요즘엔 마을에 자주 오는 것 같네?”


“그건 아니카 너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자주 왕국에서 나오는 걸? 그 때마다 내가 놀러나가고 싶다고 떼를 썼지!”


아이들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서로 꺼내서 건네기 바빴다. 그 사이에 서툰 말이 나오면 다른 아이가 고쳐주는 식으로 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주변을 채우는 아이들의 대화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닿았지만 익숙한 상황인지 금세 흩어졌다.


간혹 가다 조금 오랫동안 머무르는 시선들이 있었는데 주로 그 시선들은 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에게 머물렀다. 아니카라고 불린 아이는 마을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을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움직이기 편하게 만든 흰색 계통의 옷이 대부분이었다. 아니카의 옷은 좀 더 격식을 차린 외출용 옷으로 보였지만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가 아닌 마녀왕국의 상징인 장미무늬가 새겨진 녹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아니카는 마을에 자주 놀러오는 어린 마녀아이였다.


“엄마가 그나마 여기 GM 마법사님이랑 친분이 있으셔서 안심하고 나를 놔두고 가는 거지 다른 데는 어림도 없어. 사실 나처럼 이렇게 자주 나오는 애들도 거의 없어.”


“왜 거의 없어?”


“어른 마녀들이 엄청 싸고돌거든. 절대 왕국 밖으로 못 나가게 해.”


퍼블리는 아니카의 말을 듣고는 그대로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아빠인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도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선 아이를 많이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자라면 자랄수록 활동적이고 점점 호기심이 두려움을 밀고 나오는 아이 덕에 밖으로 나가는 편이 많아졌다.


살고 있는 집 바로 앞의 숲 일부 정도만 들어가게 할 수 있게 했다. 숲 자체는 이미 마법사가 전부 길을 다 알고 있었지만 아기 때 있었던 일 때문에 늘 함께 다니기 일쑤였다. 


그나마 숲을 나오는 길과 마을로 오는 길은 알게 되었는데 그건 부득이하게 마법사가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없었을 때였고 절대 아이를 혼자두지 않았기에 늙은 마법사가 있는 마을로 찾아가느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남게 된 길이었다. 


물론 아이는 얌전히 기다리는 성격도 아니었고 늙은 마법사도 억지로 애를 붙잡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게 마을 내에서 뛰어다니며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친해지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마을로 온 아니카를 만나게 됐다.


“근데 너희 아빠는 왜 안 보여? 우리 엄마는 GM 마법사님이랑 얘기하다가 뭐 찾을 게 있다면서 항상 풀떼기를 들고 오는데 너희 아빠는 본 적이 없어.”


“음...우리 아빠는 이사한? 이사아한?”


“이상한.”


“응. 이상한 아..아자...띠?”


“이상한 아저씨?”


만약 그 이상한 아저씨가 아이들 곁에 있었다면 아저씨가 아니라며 징징거렸을지도 모를 테지만 원래 얘기의 주인공은 자리에 없는 법이었다.


퍼블리의 말을 고쳐주며 다음 말을 재촉하면서 이어주는 아니카 덕에 퍼블리는 어려운 아직 자신에겐 어려운 단어들을 곱씹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퍼블리의 말을 듣던 아니카는 전부 끝났을 때 자신의 머릿속 방식대로 요약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아저씨가 나타날 때마다 너희 아빠한테 껄떡대고 너희 아빤 썩은 표정으로 너를 GM 마법사님한테 맡긴다 이거네.”


“껄떡? 썩은 표정?”


“아, 썩은 표정은 네가 말한 나빠 보이는 얼굴을 말하는 거고 껄떡댄다는 건 그 아저씨가 너희 아빠 어깨나 허리 끌어안는 거랑 이상한 말들 하는 걸 말하는 거야. 음...잠깐만! 껄떡댄다는 거 더 정확한 단어가 있었는데? 으으...그래! 구애행위!”


마법사가 들으면 기함할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아니카였다. 퍼블리는 그런 아니카의 말을 듣고 껄떡, 썩은 표정, 구애행위를 조용히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좋은 것만 듣고 살아갈 순 없다면서 어른 마녀들과 마법사들이 종종 합리화를 하는데다가 마법사도 최대한 엄한 말들을 멀리하고 있지만 언젠가 듣게 될 거라고 각오는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저건 아니라며 피곤함을 가득 담은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거나 아니카의 입을 막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마법사는 아이들 곁에 없었다.


“어쨌든 그 이상한 아저씨가 너희 아빠를 좋아하는 거야.”


“좋아해?”


“그리고 너희 아빠는 그 아저씨를 싫어하고.”


“싫어해?”


그렇게 아이들의 얘기는 길어졌다.




*****




제대로 마주한 첫 만남은 매우 최악이었다.

주변에 있던 모든 풀들이 불타버려 재가 되거나 얼어붙은 채로 부서지는 건 기본이었고 발자국이 찍혀 있던 흙은 금세 뒤엎어져 재가 되거나 얼음조각이 되어버린 풀들과 뒤섞이다 못해 함께 하늘을 날았다.


그 상황은 두 마법사의 작품이었는데 정확힌 한 마법사의 공격마법과 다른 마법사의 방어마법이 함께 이룬 합작이었다. 중간에 방어마법을 펼치며 피하는 마법사가 대화를 청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단 게 문제였다. 그렇게 화려한 마법의 난사는 공격하던 마법사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질 때가 되어서야 멈췄다.


사실 방어하던 마법사가 먼저 안색이 나빠졌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어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만약 주위에 구경꾼이 있다면 절로 박수를 쳤을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다만 도망친 마법사는 마지막에 보여줬던 끈기만큼 매우 끈질긴 마법사였다.


“안녕하심까?”


다음날 아침, 문을 열어보니 뻔뻔하게 웃는 낯짝이 높게 있었다.


전날 그렇게 마법을 난사하다시피 한 후에 마법사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안겨드는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기도 하루 종일 우느라 마법사 못지않게 피곤했는지 오는 동안 그의 품에서 잠든 채로 도착했고 마법사 또한 옷을 아기를 이불 위에 눕힌 후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옆에 쓰러져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깬 마법사는 붕 뜬 머리카락도 미처 정리할 생각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분명 상대방도 안색이 나빠질 정도로 방어마법을 써댄 것도 모자라 그대로 순간이동 마법까지 썼을 텐데 그와는 다르게 매우 쌩쌩한 낯이다.


마법사는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아직까지도 피로는 회복되기는 커녕 더더욱 쌓인 상태인데다가 집 안엔 아기까지 있다. 상대방은 회복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저 우위를 잡기 위해 연기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현재 자신은 그 연기마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그렇게 노란 빛과 생각하는 동안 마주한 끝에 결론을 냈다. 마법사는 그대로 얌전히 문을 닫았다.


처음보다 더 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마법사는 그대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아기의 옆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거 참, 너무 살벌하신 거 아님까?”


“진짜 살벌한 게 뭔지 몰라서 그런 소릴 하고 앉았군 그래.”


“손에 들려있는 칼부터 멀리 두시고 대화로 풀어나가길 바람다.”


마법사의 손에 들려있는 칼은 무기로 휘두르는 것처럼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비록 불청객의 목에다 바로 갖다 대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현재 그의 표정을 보면 진즉에 하고도 남았을 걸 간신히 인내하고 있다는 뜻을 가득 담고 있었다.


위협당하는 불청객은 처음에 만났을 때와 같이 웃는 얼굴이었지만 목 뒤로 흐르는 식은땀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며 경계를 낮추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움직임에 경계가 더 강해졌는지 칼을 든 손이 움찔거렸다.


“우선 한 가지 오해를 풀고자 하는데 전 퍼블리를 건든 적은 없슴다.”


“누구 마음대로 내 아이 이름을 부르는 거지?”


“이름정도는 봐주십쇼~ 숲에서 그렇게 애타게 부르면서 찾...어이쿠!”


빠르게 칼을 휘두르지만 잽싸게 피한 덕에 뒤로 물러나며 흩날리는 머리카락도 건드리지 못했다. 애초에 위협을 반 정도 담아 휘둘렀기에 어느 정도 싸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있을 속도였다. 물론 나머지 반은 진심이었기에 싸운 경험이 없거나 별로 없는 경우라면 피를 보거나 머리카락이 날아가는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일단 다시 말할 테니 부디 그 살벌한 칼 좀 예쁜 손에서 놓으십쇼!”


칼은 탁자 위에 올려놓는 걸로 살벌한 대치를 마무리 됐다. 물론 완전히 마무리 됐다기엔 칼은 방금 전까지 휘두르던 사람 바로 앞에 놓아뒀기에 언제 다시 손에 쥐어질지는 앞으로 꺼낼 말에 달렸다.


“일단 제가 건드린 건 바로 당신임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칼을 들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어진 것 같네만?”


“우연히 숲을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누군가가 퍼블리라는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서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흥미로워서 빙글빙글 돌게 미로마법을 걸어서 지켜봤을 뿐입니다. 설마 찾는 게 아기였을...”


다시 한 번 칼이 휘둘러졌다. 이번엔 진심이었기에 기겁하며 잽싸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멀찍이 물러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칼부림이 일어났지만 용케 가구들에 스치는 일은 없었다. 결국 피 한 방울도 나는 일 없이 사태는 끝이 났다. 칼을 휘두르던 마법사가 지쳐보이는 얼굴로 멈춰섰기 때문이다.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면서 혀를 찬 그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치상태를 이용해 나름대로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진정하고 다시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긴장해서 흘린 식은 땀 외에는 불청객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불리한 건 자신이었기에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서, 아기를 찾아 숲을 돌아다니던 사람한테 미로마법을 쓰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까지 찾아와서 대화를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뭘 원하는 거지?”


그의 말에 불청객은 빙글빙글 웃던 낯을 싹 지우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에 긴장하며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마주 쏘아보기 시작했다. 칼을 쥔 손에 힘을 더 주고 마력을 불어넣으며 언제 날아올지 모를 공격과 마법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마치며 자세를 조금 낮췄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던 불청객이 그를 따라 몸을 조금 숙이자 새삼 큰 키를 실감하게 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점점 더 경계하는 그를 향해 다시 환하게 웃더니 드디어 말을 꺼냈다.


“그쪽 얼굴 정말 제 취향인데 키스해도 됩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말이 나온 입을 향해 탁자가 뛰어들었다.




*****



“이쯤 되면 제 정성을 알아주실 때가 됐지 않슴까?”


“자네의 변태성에 대한 정성을 말인가?”


“저의 끈질긴 순애성에 대한 정성을 말이죠.”


“순애성이 언제부터 변태성이 되어있었지?”


한 마디도 빼먹지 않는 그의 성정에 늘 한 발 물러서는 건 불청객이다.


다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지우지 않는 얄미운 미소는 언제나 감정적인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나타내고 있는지 지워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에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 마법사의 3년 동안의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만약 불청객의 가장 처음이자 표면적 목적이 그의 일상으로 파고드는 것이라면 이미 성공한지 오래라고 할 수 있었다.


새삼 다시 올라오는 경계와 함께 심란한 마음까지 그 끝자락에 붙어 끌려올라온다. 이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뻔뻔하게 웃는 얼굴은 늘 그랬듯이 일상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아기의 성장은 빠르다고 들었지만 설마 저렇게 빨리 자랄 줄은 몰랐네요.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빠른 것 같았지만...”


“꼭 보호자라도 되는 듯이 말을 하는군.”


“몇 년 동안 이렇게 찾아오다 못해 붙어 다니는데 보호자가 아니면 이상한 거 아닙니까? 이제 보니 우리는 부부인...말은 하고 공격을 하십쇼!”


“말을 하면 자네의 헛소리만큼이나 의미가 없지. 그렇게 원한다면 특별히 친절을 베풀어서 말해주겠네, 한 번으로 끝날 거란 생각은 접게.”


매섭고 빠른 공격이 다시 날아온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피하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지다 못해 철철 넘쳐흐를 정도였다. 그에 마법사는 사람의 속을 긁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에 감탄 반, 짜증 반을 담으며 발을 휘둘러 그의 다리를 찼다. 


다리 공격은 예상치 못했는지 맞은 부분을 붙잡고 아파하지만 사실 찬 사람의 발이 더 아팠다.


“...자네는 강철로 된 바지라도 입고 다니는 건가?”


“윽..뭐..제 입으로도 말하긴 뭐하지만 제가 다른 사람 속을 긁는 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서 말임다. 그러다보니 맞을 때를 대비해 온 몸에 방어마법을 두르고 다니죠.”


“자네의 그 천부적인 재능은 겸손 떨지 않고 자네 입으로 자랑스럽게 말해도 되네. 나 또한 인정하는 바니까.”


진심과 비꼼이 들어간 말에도 그저 웃음을 유지하고 있는 얼굴은 정말 얄미웠다. 사실 그 얄미운 웃음의 주인이 매일 온 몸에 방어마법을 두르고 다니게 된 건 마법사가 3년 동안 날린 공격들 때문이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만약 말하면 망설임 없이 더 강한 공격들이 날아오리라.


“그보다 이렇게 저랑 만날 때마다 퍼블리를 놔두고 와도 되는 겁니까? 저야 단 둘이 데이트하는 게 좋지만 애는 보호자랑 같이 있고 싶어한다구요?”


그에 마법사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에 그의 둔함을 지적하게 돼서 기쁜지 얄미운 얼굴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마법사의 속에서 표정과 함께 떠오른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얄미운 불청객이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거에 놀랐다. 설령 그게 마법사의 아이일지라도.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 그리고 누구 멋대로 퍼블리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겐가.”


“에이~ 계속 애라고 부를 수도 없잖슴까? 이름 정도는 허락해주십쇼.”


“그렇게 말해서 은근슬쩍 내 이름도 가르쳐달라고 하지 말게.”


은근히 낮게 깔리고 능글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꺼낸다. 그에 아쉬운지 혀를 살짝 깨물듯이 쏙 내놓는 모습에 어림도 없다는 듯이 짧고 단호하게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린다. 그런 그가 귀여워 보이는지 제 키에 맞게 제법 큰 손을 살살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으로 뻗었지만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허공을 휘저었다.


“거 너무하심다!”


“다짜고짜 남의 머리에 손을 뻗는 게 더 무례하고 너무하지 않나.”


“우리 딸기님이 너무 귀여운 바람에 애정을 담아서...”


“자네의 애정 따윈 필요 없네. 그리고 누가 딸기인가?”


수차례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렸지만 가르쳐줄 이름은 없다는 그의 말에 멋대로 애칭이랍시고 붙여놓은 게 바로 딸기였다. 물론 처음 그 단어를 들었을 땐 질색하다 못해 주변의 물건들이 그의 손에 의해 날아다니기 일쑤였다. 이젠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반박하는 걸 보면 불청객의 시점에선 장족의 발전이요 그의 내면에선 반쯤의 체념이었다.


“머리카락이 새빨간 게 꼭 딸기 같이 예쁜 색이라서 붙여준 애칭인데 말임다. 게다가 딸기는 맛있다구요? 마녀왕국에서 재배하는 딸기도 맛있지만 야생딸기는 더더욱 달달하니 상상만 해도 딸기향이 맴도는 게 근처에 야생딸기가 있는 건가 돌아보게 만들지 뭡니까.”


마녀왕국이라는 말에 순간 마법사의 눈가가 살짝 떨렸지만 태연하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다. 그런 그의 동요를 발견한 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이 노란 빛을 둥글게 감싸며 가리고는 입으로 마저 이야기를 꺼낸다.


“나중에 저와 함께 마녀왕국에 가보시지 않겠슴까?”


“내가 왜 자네랑 가나?”


“마녀왕국 안에 데이트 명소가 꽤 많습니...”


언제나 대화의 끝은 불청객의 말이 끊어지면서 끝났다. 마법사의 공격으로 인해 말이 끊어지는 경우는 많았지만 대화를 끝내는 건 불청객의 뒷주머니 안에 자리 잡은 채 빛과 진동을 일으키는 통신 수정구였다. 


그 뒤는 지난 3년 동안 변함없었고 변함없었던 만큼 자연스러웠다. 수정구를 확인하는 불청객을 뒤로한 채 마법사는 아이가 있는 마을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의 뒤엔 아무도 없었다.




*****




“그래서, 네가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는 딸기가 1년하고도 3개월 동안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잠수를 타고 딱 3년되는 나머지 1년하고도 9개월이랑 거기에서 지금까지 이은 빌어먹을 땡땡이를 일삼는 이유다 이거냐?”


“그만한 가치가 있는 흥미롭고도 예쁜 딸기니까 계속 얼굴을 익혀줘야지 안 그럼 다른 녀석들이 채갈테니 당연한 거 아님까?”


“오냐 X발! 오늘 그냥 너 죽고 다 때려치자 이 사시 배추머리 새꺄!”


갖은 욕설과 함께 화려한 불과 날카로운 빛들이 방안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에 함께 날아다니는 물건과 그 파편들은 덤이었다. 그 사이를 채우는 건 상당한 검열을 요하는 엄청난 수의 욕설들과 성질을 긁는 웃음소리였다. 마법들과 물건들과 욕설들을 부드럽게 피하던 자는 피하는 내내 방금 전까지 보고 왔던 사람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마녀를 키우는 마법사라니 정말 흥미롭지 않습니까?




*****



“아빠아아!”


아이는 이제 아기 때처럼 마법사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일은 없었지만 그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에 친구와 하던 얘기도 다 끝내기 전에 그에게로 손을 뻗으며 달려가기 바빴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곁에 있던 친구인 아니카는 제법 놀랐는지 늘상 입에 달고 다니던 미소도 내려놓고 입과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뜨던 눈 또한 동그랗게 만들고는 그 뒤에서 아이를 빤히 바라봤다.


달려오는 아이를 안아 올린 마법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마주 바라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늘 마을 아이들과는 조금 아슬아슬하게 차이가 나는 아이와 달리 입은 옷이 다른 것도 있지만 멀리서 보아도 확연하게 다르면서 가장 눈에 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주한 덕에 불안함이라는 팽팽하면서도 가는 실이 그의 심장을 쓸면서 놀라게 했다.


마녀다. 그것도 또래의.


마녀아이는 둘을 빤히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이내 네 걸음 정도 떨어져서 멈춰선 후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아니카예요. 퍼블리가 그렇게 반가워하는 걸 보면 당신은 퍼블리네 아빠인 것 같네요.”


복잡한 단어 없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나올만한 말이었지만 문제는 그 말을 꺼낸 게 마법사의 다리 길이도 되지 않는 어린애에게서 나온 말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이 빠른 게 불안하면서도 내심 뿌듯했지만 더듬지도 어린애처럼 발음이 조금 어눌한 감도 없는 마녀아이를 보며 뿌듯함을 내리누르고 불안함을 약간 덜어냈다. 애초에 마녀들의 교육방식도 모르는데 아이가 마녀아이들처럼 될 거라는 생각 자체가 설레발이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심하다는 자책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면 빨리 늙으니까 안 쉬는 게 좋을 거예요. 한창 얼굴이 탱탱하고 빤들빤들할 때부터 관리해야지 안 그럼 오랫동안 물 먹은 손처럼 쭈글쭈글 해져요?”


마법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추스르고는 묘한 눈으로 바라보기 무섭게 마녀아이의 입은 거침없었다.


“이렇게 술술 말하는 어린애가 신기한 건 알겠지만 재주 많은 호수 속 물고기 보듯이 보면 실례인 거 아시죠?”


과연 저 말을 꺼내는 애가 기껏해야 서너살 정도 먹었을 어린애란 말인가. 물론 성인 마녀가 마법으로 변신한 게 아니란 것쯤은 마법사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마법의 흔적 자체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왕국 바깥에 볼일이 있던 마녀가 일을 해결하는 동안 자신의 아이를 마을에 두고 간 것이겠지. 


그 마녀는 이 마을의 기둥인 늙은 마법사와 어느 정도 작은 친분이라도 지니고 있을 테고. 대충 그려지는 상황에 아직까진 친구가 된 저 작은 마녀 외엔 마녀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으니 일단은 괜찮지만 더 이상 아이를 마을에 맡기기엔 위험부담이 큰 것 같았다.


아이는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 하나를 풀면서 뒤돌아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고쳐 안으며 발을 돌리던 마법사는 마녀아이에게 말했다.


“아직은 어린 덕에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말해두마. 마법사 앞에서 재주 많은 물고기라는 말은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란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는 마법사가 말을 꺼낸 후에 바로 돌아선 이유는 아마 마녀아이의 멍한 표정을 모르는 척 해주겠다는 배려이리라.


“아빠, 아빠! 아빠는 그 이상한 아저씨가 싫어?”


집에 도착했는데도 품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이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꺼내자 당황한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이는 확신했는지 입을 앙 다물었다.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이 다문 입술에 의해 올라가자 안 그래도 귀여운 얼굴이 더 귀여워졌다. 그에 작게 웃음이 터진 그였지만 아이는 그의 웃음을 못 봤는지 눈까지 꼭 감은 채 무언가 중얼거리듯 입을 우물거리고는 다시 눈을 뜨며 단호한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아빠 지켜줄게!”


갑작스러운 아이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은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아이는 제 할 말을 계속해서 꺼냈다.


“그 이상한 아저씨가 아빠한테 구애행위라는 걸 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 아저씨가 껄떡대니까 아빠가 늘 썩은 표정 지으면서 나 할아버지네 마을에다 맡기고 간다는 것도!”


구애행위라니, 껄떡댄다니, 썩은 표정이라니, 분명 그런 말들을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 그가 살아온 모든 세월에 맹세컨대 절대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아이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터라 그대로 굳어있자 잔뜩 힘을 준 아이의 눈에 불이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르던 마법사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한숨만으로는 진정이 안됐던지 두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마 저 말들은 그동안 같이 놀던 마녀아이에게서 배운 말들일 것이다. 


언제부터 같이 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제대로 말을 배운 아이에게 잊으라고 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물론 바르고 고운 말들만 들으면서 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하다못해 저 말들은 아니었다.


“...퍼블리.”


“아빠.”


“그러니까..그 구애행위라는 말...”


“응! 그 아저씨는 아빠를 좋아하지만 아빠는 그 아저씨 싫어하니까!”


아이의 말에 그의 말이 멈췄다. 그대로 손을 내려놓고 아이를 바라보니 드물게 눈썹이 미간으로 모이고 바깥을 향해 솟아있었다. 그런 단호한 얼굴을 보자니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진 그였지만 이번 웃음은 어딘가 차가웠다. 


그런 속을 알 리가 없는 아이는 제가 보기엔 아빠가 지켜주겠다는 자신의 말에 기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에 주던 힘을 풀며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제야 그의 품에서 폴짝 내려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아이를 보던 그는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처음 제대로 만났을 때부터 속을 긁어놓질 않나, 저랑 사귀자고 하질 않나. 의심 갈 정도로 가볍게 굴면서도 입은 매우 솔직했다. 그는 아까 전까지 보고 왔던 사람을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눈에 흥미만 가득 담고선 한 번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 않나?




*****




마법사는 한숨을 내쉬려다 멈췄다. 마녀아이의 한숨 쉬면 빨리 늙는다는 당돌한 말이 짧게 스쳐지나갔지만 꼭 그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이의 앞에서 한숨을 쉬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참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고뇌하다가 이내 숨을 천천히 고르고는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장을 보며 누워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녹색 눈은 마치 전구처럼 빛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졸린 기색 없이 또렷했다.


“...퍼블리 얼른 자야지.”


“안 졸려!”


그래 그건 나도 아주 잘 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낮잠까지 거른 건 자고 싶지 않다는 걸로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낮잠을 자는 게 좋지만 꼭 필수는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잠들어야하는 밤에도 졸리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군다나 늘 자던 낮잠도 거른 아이가 졸리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퍼블리.”


“안 졸려!”


아이는 고집스럽게 졸리지 않단 말만 반복하며 눈을 부릅떴다. 이쯤 되면 졸리지 않은 게 아니라 일부러 졸음을 쫓아내고 있는 걸 마법사가 모를 리 없었다. 그에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이 더욱 가늘어지며 예리해지지만 아이의 고집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물론 아이를 상대로 계속해서 눈을 찌푸릴 순 없기에 눈을 꾹 감던 그는 조금 표정을 풀고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마.”


옛날이야기란 옛날이라는 무대를 바탕으로 진실과 허구를 섞어서 만든 재미있는 사건으로 듣는 사람의 흥미를 돋우며 이야기를 재촉하게끔 만들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꺼내면 아이가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더 잠을 자려고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전통적인 역사 수업은 지루하기 마련이었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한시름 덜어놓았는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이내 아이를 따라 잠에 빠져들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눈은 쉽게 떠지지 않았다. 아마 그 뺀질거리면서 속을 긁는 녀석이 또 찾아왔으리라. 이대로 무시하고 다시 잠들어도 녀석은 아마 끝까지 기다리다 못해 직접 집 안으로 발을 들일 것이다. 그러다가 아직까지 자고 있는 자신을 보고 머리맡에 앉아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게 눈에 훤했다. 


아니면 저번처럼 그 긴 손가락으로 제 볼을 꾹꾹 눌러대다가 깨어난다면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예쁜 얼굴을 가만히 보면서 아끼는 것도 좋아하지만 너무 예뻐서 유혹 당했다고 뻔뻔하게 말을 하겠지. 그럼 그 때서야 그 웃는 낯짝에 침 대신 베개를 던지고 일어나도 괜찮았다. 지금은 너무나도 졸렸다.


잠에 취한 마법사는 조금 아래로 흘러내려간 이불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이불을 끌어올렸다. 옆에 있을 아이에게 다시 제대로 이불을 덮어주기 위해 쭉 당겨 옆으로 손을 뻗었지만 분명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잠에 눌려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잠을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또렷해졌다.


“아빠는 자고 있어, 아저씨!”


“그러니까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잖슴까? 그리고 아저씨라니, 전 아직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가 아님다!”


소리가 또렷해져서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열린 현관문 너머로 보이는 건 늘 찾아오는 녀석과 옆자리에 있어야했던 아이였다. 지난 3년 동안 최대한 녀석과 아이를 만나지 않게 하기위해 그간 아이를 마을에 맡겨두고 온 노력이 무색하다는 듯이 둘은 서로를 제대로 마주보면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4살이 되어가는 아이랑 저렇게 말다툼하고 있는 녀석은 그가 알던 뱀을 100마리는 품은 듯 능글거리는 녀석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유치했다. 그런 황당함이 가득 담긴 시선을 느낀 건지 제 큰 키까지 수그리며 아이와 말다툼을 하던 녀석이 고개를 들고는 멀거니 서있던 그를 바라보며 아는 체를 한다.


“오! 드디어 일어나셨슴까?”


“아빠!”


그 말에 아이도 잽싸게 뒤돌아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리고는 팔을 양쪽으로 쭉 편 채 막아서는 모양새가 제법 귀여웠다. 아마 어제 꺼낸 지켜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매우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눈에 불을 켜지만 오히려 상대방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몸을 수그리며 아이와 눈을 맞췄다.


“뭡니까? 안아달라는 겁니까?”


“아니야!”


“이렇게 팔을 쭉 벌리고는...”


그대로 손을 뻗어 아이를 안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이에게 닿기도 전에 위에서 내려온 손이 손등을 찰싹 때리고는 아이에게 닿지 못하게 막아섰다. 시선을 올리니 눈썹을 조금 찌푸리는 것 외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던 마법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찌푸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황당하다는 듯이 짧게 헛웃음을 터뜨린 불청객은 손을 거두며 손바닥을 보이고는 흔들었다.


“장난입니다, 장난. 그동안 그렇게 싸매고 다닌 거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진짜로 털 끝 하나 댈 생각도 안 듬다.”


억울하다는 투로 말하지만 숲에 흔히 피어있는 꽃의 씨앗만큼도 먹히지 않았다. 마법사는 그를 무시하고는 여전히 둘 사이에서 꼿꼿이 자릴 지키고 서 있는 아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이 또한 고개를 젖히며 마법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안절부절 못하며 얼른 마법사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마법사는 자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퍼블리.”


그에 화난 줄 알았는지 아이가 푹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고는 웅얼거리며 말한다.


“아빠..지켜줄 거야...”


그런 아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마법사는 푸른색이 녹아들어있는 예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다시 한 번 아이를 부르며 말했다.


“퍼블리, 아빠가 저 아저씨보다 쎄.”


그 말을 들은 아이가 퍼뜩 고개를 들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주보고는 둥글게 눈을 접으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 아기와 마법사를 바라보던 불청객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글쎄 아저씨 아니라고 했잖슴까!”


그 이후로 아이와 불청객의 대치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어른보다 어린아이의 체력이 약한 건 당연했고 결국 아이가 가장 먼저 지쳐서 물러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이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물론 지치긴 지쳤다. 다만 마법사의 품속에 딱 붙어서 쉬고 있을 뿐,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오히려 마법사였다. 그는 제 품에 기대서 열심히 눈에 힘을 주고 있는 아이가 귀여우면서도 마녀 아이에게서 정확히 무슨 말을 들었을 지가 궁금했다. 


어제 아이가 한 말들을 보면 어쩐지 평범하진 않을 것 같아 머리가 아파오고 있었지만 의외로 지금 상황이 재밌었기에 멀뚱히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끼어든다 해도 그는 당연히 아이의 손을 들어줄 것이니 애초에 불청객에게 승산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난 아빠랑 매일매일 같이 잔다!”


“흐음? 실컷 같이 자두십쇼~ 저는 앞으로 우리 딸기랑 더 많이 같이 자게 될 겁니다~”


“그럴 일 없으니 꿈 깨게. 그리고 딸기라는 말 좀 집어치우게.”


다만 마법사에게서 이 상황이 곤란한 건 바로 아이가 듣고 있다는 것이다. 차마 아이 앞에서 험한 말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말을 가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불청객은 여전히 속을 긁어놓는 데에 재미가 들렸는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알고서 저렇게 계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속을 긁어놓는 재능만큼 눈치 또한 빠른 편이니 말이다. 원래 이때쯤이라면 손에 잡힌 무언가가 날카롭고 빠르게 불청객에게로 날아갔겠지만 그는 아이가 멀뚱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앞으로 아이가 없을 때 던질 물건들과 그 개수를 머릿속에서 착실하게 쌓아놓고 있었다. 이것만은 눈치 빠른 불청객도 모르리라.


이런 둘의 잔잔한 폭풍이 가라앉은 건 둘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가 대화를 가르며 꺼낸 말 덕분이었다.


“딸기가 뭐야?”


딸기가 귀중한 과일인 건 아니었지만 야생 딸기는 직접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잘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들도 야생 딸기를 찾기보다는 직접 딸기를 키우거나 마녀왕국에서 사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딸기를 비롯해 그와 비슷한 과일들은 아이가 모르는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흐음? 모르십니까? 아주 맛있는 과일인데 말임다~”


딸기에 대한 설명이 나오자 아이는 눈에 가득 담던 경계심을 내려놓고 흥미로 반짝임을 채워 넣었다. 화려한 입담에 주물러져 나오는 장황한 설명 덕에 아마 아이에게 있어서 딸기란 동화 속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요정의 과일이 되어있으리라. 그런 아이의 반응을 즐기는지 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이를 안고 있는 마법사를 힐끗 보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묘사에 마지막을 새겨 넣는다.


“당신의 아빠님처럼 꼭 닮은 매력적인 과일이죠.”


그 말에 빨간 눈썹이 까딱인 것도 잠시,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무언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볼을 부풀렸다. 녹색 빛에는 어쩐지 실망이 섞여 들어가 있어서 어른 둘은 당황해하면서도 의아했지만 바로 투정 섞인 아이의 어투와 함께 나온 말로 인해 의문은 풀렸다.


“아직 딱딱한 거 잘 못 씹는데...”


터져 나온 웃음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물론 아이는 완전히 경계심을 버리지 않았던 터라 다음날 다시 찾아온 불청객에겐 단호함이 가득 담긴 녹색 빛이 마중을 나왔다. 물론 그건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매일같이 이어졌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일에 어느 샌가 마법사 또한 자신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익숙해져버렸다. 그 증거로 아침식사를 차려놓은 식탁 위엔 한사람의 몫이 더 올라와있었다.


아마 그 변화를 눈치 챈 건 불청객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뿐이었지만 그는 굳이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게 연결된 실은 섣불리 손을 대면 언제 떨어질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얇았다. 하지만 이것이 한 가닥씩 쌓이고 쌓이면 그 어느 것도 자를 수 없을 터이다. 


예리하게 빛나는 노란 빛을 눈꺼풀이 둥근 선을 그리며 감춘다.





*****



“우우...”


아이는 요즘 들어 많이 심심해보였다. 마법사랑 같이 있는 건 매우 좋아했지만 같이 놀았던 친구가 그리웠는지 종종 문 밖을 힐끗거리며 돌아보고 있었다. 그동안 아이를 마을에 맡긴 이유는 최대한 아이와 불청객이 만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져버린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사실상 마을로 가는 일은 이제 거의 없었다. 


늘 친구와 놀았을 테니 심심한 건 당연할 터. 그런 아이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마법사의 눈에 미안한 기색이 서렸다. 사실 마을에 가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이의 친구인 마녀아이, 정확히는 그 마녀아이를 마을로 데려왔을 마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왕국 바깥에 볼일이 있는지 자주 나오는 것 같은데 아직 어린 마녀는 구분을 못하지만 혹시나 마녀가 아이를 보게 된다면 들킬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눈도 제법 예민한 편이지만 어른들의 눈은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구별하는 데 이골이 나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문을 보는 횟수가 많아지는 아이를 보며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아이의 키에 맞게 몸을 낮춘다.


“퍼블리.”


“우웅?”


“혹시 네 친구의 보호자, 음...이 말은 아직 어렵나?그러니까...”


“엄마라는 단어 알아! 아니카가 가르쳐줬어!”


그 말에 난감함을 해결한 그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친구네 엄마를 만난 적이 있느냐?”


“우웅..아니! 아니카네 엄마는 늘 아니카를 마을 입구에다 두고 풀 모으러 간대! 그리고 아니카네 엄마가 오기 전에 아빠가 늘 더 빨리 왔어.”


언제부터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녀가 왕국을 자주 나오는 이유를 알게 된 그는 납득했다. 자연 만큼 다양한 풀들을 모으기에 좋은 곳은 없었기에 발을 내미는 것이리라. 다만 굳이 아이까지 바깥으로 데려와 마을에다 맡기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GM을 신뢰한다 해도 왕국 안에 있는 게 마녀의 입장으로선 더 안전할 텐데도. 


물론 그저 마녀아이가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서 떼를 쓴 결과인지는 그도 몰랐다. 우선 아이가 마녀와 마주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아이 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우선 마녀는 처음 GM을 만날 때를 제외하면 마을 입구까지만 오고 풀을 찾으러 간다. 


마법사가 아이를 데리러 오는 시간은 일정하게 연락이 오는 불청객의 통신 수정구 덕분에 그에 따라 일정해졌다. 시간을 가늠한 마법사는 시계를 바라봤다. 충분하다.


“그럼 오랜만에 마을에 데려다줄까?”


그 말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곧 이어질 반응은 아마 기쁜 마음에 활짝 필 웃음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이는 갑자기 무언가 크게 결심한 것처럼 외쳤고 그 말에 그는 당황했다.


“이번엔 나 혼자 마을로 가볼래!”


나무문이 끼익-기름칠을 재촉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윽고 발을 내밀어 모습을 드러낸 건 아이 하나뿐, 안쪽에서 어른의 한숨이 들려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지금 이 순간 그 효과를 발휘했다. 물론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마법사는 아이에게 각종 보호마법은 물론,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 곧바로 집으로 올 수 있게 하는 텔레포트 마법도 걸어놓았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마치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이미 닫힌 문을 쳐다봤지만 아이가 다시 돌아와 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고 같이 가자며 그 작은 발로 앙증맞게 앞장 서는 일은 없었다. 기분이 가라앉은 게 여실히 보일 정도로 음울한 분위기를 내뿜던 그는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가면서 깨달은 사실에 고개를 들어 벽에 높이 걸려있는 낡은 시계를 쳐다봤다. 


늘 아침 일찍 들이닥치던 녀석이 오늘은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늦는 건가 싶은 생각에 아침식사 시간은 지났고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불청객은 아무도 모르는 새에 손님이 되어있었다.


찬장 안에 넣어둔 간식들은 각자 양이 많진 않았지만 종류별로 다양한 덕에 보아보니 꽤나 많은 양이 되어 간식 바구니를 그득히 채웠다. 두 사람이 먹기엔 조금 많아보였고 아이는 나간 지 얼마 안 된데다가 제가 일러준 대로 늘 마을에서 집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돌아올 테니 아이의 몫을 남겨두자는 생각에 조금 덜어낸다. 


무언가 허전함에 물끄러미 간식 바구니를 내려다보다가 옆에 놓인 빈 컵이 시선에 들어오며 힌트를 준다. 다시 찬장을 열어 찻잎이 들어있는 통을 꺼냄으로써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바구니와 통을 들고 다시 탁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린다. 그와 동시에 순간 누군가 물감이라도 엎은 건지 눈앞에 보이는 색들이 섞여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 온건 바닥과 함께 섞여서 마찬가지로 눈을 어지럽게 하는 간식들과 찻잎들이다.




*****




마을은 오랜만에 온 작은 손님 덕에 웃음이 가득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오다시피 했던 작은 손님은 이미 마을 사람들에겐 똑같은 마을 어린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늘 같은 시간에 작은 손님을 마을에 데려다 주던 보호자인 마법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아이도 마을에 오는 일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은 허전함을 느끼게 되어버렸지만 그들보다 더한 사람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손님이자 친구인 어린 마녀였다. 늘 얼굴에 매달고 다니던 웃음마저 내린 채 매일 마을로 찾아와 늘 아이와 함께 앉아있던 공터에 앉아 마을 입구를 바라보는 어린 마녀를 본다면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지나가던 가벼운 바람도 알아채고는 위로하듯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고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그런 작은 위로도 어린 마녀에게 다시 웃음을 주워 주지 못했지만 대신 방법을 이끌었다. 뺨을 더듬는 머리카락들을 잡아 정리하던 어린 마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바람이 분 방향을 쳐다봤다.


웃음이 다시 뛰어올라 그대로 사뿐히 앉았다.


“퍼블리!”


푸른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손길을 맡기며 허공을 예쁘게 수놓고 있었다. 어느새 아이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오랜만에 마을을 찾아온 아이에게 뛰어가고 싶어 안달 난 자식들을 말리느라 바빴다. 물론 아이는 다 같은 친구라고 외칠 테지만 저 둘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이 봐도 둘이서 가장 친한 친구라는 건 금방 눈치 챌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게 바로 어른들의 생각이었다. 몇몇 눈치 빠른 애들은 아직까지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른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아이들과 어른들은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기 일쑤였고 그들 모두의 얼굴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아이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가 우선이었는지 금세 고개를 돌린다. 어린 마녀는 그런 그들의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고마움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는 밝은 목소리로 얘기를 꺼내는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아이들은 행복했다.


“그래서 내가 그 아저씨한테서 아빠를 지키려고 매일 아침마다 일찍 일어났어! 그러다보니까 낮잠 시간도 많아지고 밤에도 일찍 자게 됐어.”


아이는 친구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처음 했던 말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도 종종 있었지만 다시 처음의 말을 되돌리게끔 이끌어주는 아니카 덕분에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흐음- 그럼 그 아저씨 아직도 찾아오는 거야?”


“응.”


“그리고 너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막고?”


“음...요새는 아니야. 같이 아침도 먹게 됐어. 하지만 아빠 내가 지키는 건 여전해!”


상당히 중간과정이 궁금할 법한 내용이었다. 물론 아이는 그 궁금증이 오래가지 않도록 이야기를 꺼냈지만 워낙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들에 그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결정적으로 아이가 손님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와 이유를 단번에 짚어낼 수 있었다.


“그 아저씨 말솜씨가 굉장한가보네?”


“말솜씨?”


“말을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미끌미끌하게 하는 능력이야.”


말이 미끌미끌하다는 설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설명해야할 어린 마녀는 그저 웃으면서 아이의 표정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마 말 그대로 미끌미끌한 촉각적인 감각으로 뜻을 받아들였을 테지만 더 풀어서 설명하기엔 본인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했다. 


설명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심통이 났는지 뺨을 조금 부풀리고는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다시 웃음이 터진다. 어린 마녀는 오랜만에 실컷 웃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시간이 한창 늦장을 부리길 바랐다.


“퍼블리 네가 아직 어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얼마 안 가서 그렇게 벽을 어느 정도 허무는 걸 보면 그 아저씨 진짜 대단한 걸? 너희 아빠도 금방 넘어가겠다-라고 하기엔 너희 아빠 벽은 더 만만치 않아서 잘 모르겠네, 3년이나 밀어낸 걸 보면 말이야. 그렇게 따지니 너희 아빠도 대단한데?”


친구가 하는 벽이니 밀어내니 라는 말들이 이해가 가진 않지만 적어도 마지막 말은 자신의 아빠를 칭찬하는 듯한 말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좋아했다. 그러다가 친구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아-하고 작게 터뜨린 탄성에 곧바로 눈을 깜빡인다.


“맞다! 너희 아빠한테 가서 전해줘! 저번의 그 말뜻이 뭔지 알았고 그런 말 써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어른의 호수같이 넓은 마음으로 어린애의 귀여운 실수로 용서해달라고 말야.”


아이는 여전히 눈을 깜빡였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오늘따라 어려운 단어는 아니지만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기껏 만났는데 설명을 듣는 것보단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꺼내는 게 우선이었는지 아빠에게 전해줄 말을 외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귀를 기울여 듣던 어린 마녀는 문득 저 멀리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익숙한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시간이 늦장을 부릴 리는 없는데다가 오히려 이런 즐거운 때일수록 심술이라도 부리는지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하늘은 아직 새파랬고 아무리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것과 진짜 빠른 것의 차이는 어리다고 해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진짜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늘이 새파랗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빠르게 달린 건 따로 있었다.


“엄마!”


늘 아이가 아빠와 함께 떠나는 시간으로부터 조금 지나 해질녘이 될 즈음에야 오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로 꽤나 빨리 왔다. 그런 친구의 외침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는 친구에게 엄마라고 불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친구와 마찬가지로 꽤나 낯선 모양새의 옷차림과 아빠와 마을 어른들과는 확실히 어딘가 전체적으로 달라 보이는 생김새였다. 그에 아이는 친구가 예전에 했던 마녀와 마법사들은 확실히 구분된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녀는 당연하게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멍하니 마녀를 바라보던 아이는 무언가 가슴 안쪽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에 깜짝 놀라며 그 부분을 긁어댔지만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녀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더더욱 심해졌다. 그런 아이가 눈에 띄었는지 마녀가 아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화들짝 놀란 아이가 재빨리 입을 열어 더듬거리며 인사했다.


“아..안녕하세요! 저는 퍼..퍼블리예요!”


중간에 목소리가 삑 새어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인사를 마친 아이의 모습이 제법 귀여웠는지 작게 웃음을 터뜨린 마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는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뜨다가 다시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웬일로 일찍 왔어?”


“얘는, 엄마가 일찍 온 게 싫으니?”


“매일 해 떨어질 때쯤에야 겨우겨우 풀 들고 오던 엄마가 오늘은 일찍 온데다가 평소보다 많이 들고 온 거 보면 어디서 제대로 빨간 밭이라도 발견했나보다 싶지.”


“빨간 밭?”


또 처음 듣는 단어에 궁금해 하는 기색을 보이자 어린 마녀는 설명에 재미가 들렸는지 바로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번에 마녀는 장미꽃에서 태어난다고 했고 장미꽃은 대부분 빨간색이라고 했지? 예전에는 왕국에 장미정원은 없었고 야생 장미꽃들이 많았는데 그런 야생 장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빨간 밭이라고 불렀어. 이제는 그만큼 귀한 게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을 빨간 밭이라고 하는 거야.”


이제는 제 아이가 신나서 다른 친구에게 설명을 하는 모습이 마치 자랑하고 싶어 하는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아서 마녀는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하는 것이 있었는지 둘 사이로 슬며시 끼어들었다. 


친구와의 대화가 끊어지게 된 게 상당히 불만스러웠는지 슬쩍 웃음을 거두는 제 아이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엄마보단 친구다 이거니?


“우리 아니카처럼 밖으로 나오는 애는 처음 보는구나. 네 보호자는 어디있니?”


“아빠는 집에 있어요! 오늘은 저 혼자 마을로 가보고 싶다고 해서 혼자 오는 게 허락 됐어요!”


그 말에 마녀의 눈이 아까보다 훨씬 커졌다. 마치 믿을 수 없는 얘길 들었다는 듯이 쳐다보자 아이가 놀랐는지 흠칫 뒤로 물러난다. 그런 마녀의 반응에 의문을 품은 건 다름 아닌 어린 마녀였다. 지금 이상한 쪽은 누가 봐도 마녀였으니 어린 마녀는 그대로 둘 사이로 다가와 서로를 막아서고는 입을 열었다.


“엄마, 그 풀 독성 있다며? 그렇게 멍하니 입 벌리고 있다가 그 풀 입 안으로 들어가겠다. 퍼블리, 미안하지만 오늘 엄마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아서 빨리 가야할 것 같네.”


그 말에 아이가 방금 전보다 더 깜짝 놀라며 울상을 짓는다. 아마 오랜만에 만났는데 일찍 헤어지는 게 꽤나 아쉬운 모습이었지만 어린 마녀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싶었다. 옷자락을 꽉 잡는 친구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리며 조심스레 힘을 준다. 그리고는 늘 달던 웃음을 얼굴에 띠고선 지극히 태연하고도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어차피 내일 또 만날 텐데 뭘?”


그런 친구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그제야 다시 해맑게 웃는 아이는 친구의 옷자락을 놓았다. 하늘은 아직 새파랬지만 또다시 찾아오리라.


“그럼 내일 보자!”


아이는 아직까지도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녀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마을 입구 쪽으로 그대로 달려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고는 친구를 향해 한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안녕!”


뛰어가는 다리는 아쉬움이 조금 무게를 잡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고픈 마음이 좀 더 앞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오늘 마법사에게 마녀를 만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친구인 아니카도 마녀지만 어른 마녀를 처음 본 느낌은 엄연히 달랐다. 마을 어른들도 전부 다르게 생겼지만 신기하게도 마법사와 마녀를 구분하라고 하면 당장 구분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분명 머리카락도 달렸고 눈, 코, 입도 다 똑같이 두 개에다가 하나씩인데도 구분할 수 있다고. 


그리고 궁금한 것도 있었다. 이상하게 마녀를 만났을 때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었고 아무리 긁어내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며 마법사에게 이게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아이에게서 있어서 마법사는 모르는 게 없는 대단한 아빠였으니 말이다. 


마법사라면 자신을 간질이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줄 것이다. 다만 없애고는 싶지 않았다. 무언가 나쁘지만은 않은 이상한 느낌이었기에 그저 정체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만약 마법사가 없애야한다고 말한다면 많이 슬플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뒤는 우선 마법사에게 말하고 나서 생각하고 싶었다. 마녀를 만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하고 싶었다.


숲 속을 가로질러 어느새 도착한 집 앞마당에서 아이의 발이 폴짝 뛴다. 있는 힘껏 뜀박질한 덕분에 문고리에 손이 닿고 힘을 주어 돌리니 문이 끼이익 기름칠을 재촉하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리고


“아빠!!”


붉은 색이 마치 피처럼 바닥에 정신없이 흩어져 수를 놓았다.






*****



호수가 있었다.


숲 한가운데 있는데도 호수는 매우 맑았다. 크기가 다른 호수들처럼 크지 않은 덕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서 그런지 물이 더러워진 적은 없었지만 물이 어디로 흘러들어오는 건지 늘 의문스러운 호수였다. 


숲 한가운데에 커다란 거울을 툭 떨어뜨려놓은 것 같은 호수는 푸른 달이 뜨는 밤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호수였다. 적어도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을 때는 그랬다. 아마 처음 호수를 발견한 건 떠올려도 안개 끼듯이 뿌연 희미한 시절이었을 거다. 적어도 지금보단 발이 매우 작았던 때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그 호수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어린 내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발이 너무나도 작고 깨끗했기에.


“안녕?”


호수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누구인지 보니 아기다. 아니 어른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고 나 또한 빤히 바라보는데 모르겠다.


“안녕.”


마주 인사해주니 기분이 좋은지 환하게 웃는다. 역시 아기인가?


“왜 거기서 안 나와?”


“응? 난 이미 나갔는데?”


질문을 건네자 솔직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럼 질문을 바꿀게. 왜 안 돌아와?”


그런 내 표정은 지독히도 무표정했다. 질문을 바꾸자마자 호수에서 나왔던 사람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어느새 주변엔 안개가 가득했다. 보이는 건 여전히 거울처럼 깨끗하게 안개마저 비추는 호수뿐이다.


다시 호수를 바라본 순간, 호수가 거울처럼 깨져버렸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태연한 얼굴로 그 깨진 틈 사이로 뛰어들었다. 부딪히는 파편들은 몸에 닿자마자 물방울이 되어 옷과 팔을 차갑게 쓸어가고는 다시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공중을 떠다닌다. 물론 그것들을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나는 바쁘게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호수 밑바닥에 도착했고 그곳엔


“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깨졌던 것들이 다시 모여 원래대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물이 된 것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쌓이기 시작하면서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물속에 잠겼지만 나는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점점 올라갈수록 더 강해지는 물살에 큰 압박을 느끼고 있지만 고통스럽진 않았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 미련이 남아있는지 가라앉으려고 했으나 역시나 다시 되돌아가는 호수는 나를 밀어낸다. 아니 사실 가라앉고 있는데 내가 다시 올라가려는 건가? 그건 지금의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가라앉고 올라가고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늘 찾아올 때마다 떠있는 보름달이 보인다. 아니 보름달이 뜰 때마다 내가 찾아오는 거였나? 호수에 비칠 때마다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보름달을 호수 안에서 바라보니 푸른색이다. 아, 푸른 달이구나. 그런데 왜 아기는 호수에 없지?


아아 정말이지 지독한 꿈이다. 푸른 달이 뜬 날 무엇이든 비춰주는 커다란 거울 같았던 호수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꿈인데도 지독하다.


“이래서는 현실과 다를 바가 없잖나.”


어느새 작았던 내 발은 어른의 발처럼 커져 있었다.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꿈. 깨어나면 말 그대로 현실만이 남아있겠지. 꿈에서조차 현실을 보여주다니 정말이지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 꿈이라서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호수 안으로 뛰어든 건 너무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실랑이 끝에 나는 호수 밖으로 나간다. 호수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젠가 친구들이랑 손잡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그리고 호수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를 기다린 건 장미꽃 향...




*****



“일어나셨슴까?”


마법사는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게 몸이 붕 떠있는 것 같은 기분에 몸을 움직여보려고 하지만 그 즉시 몸 자체가 납덩이가 된 것 마냥 무거워지는 느낌에 관두고는 다시 힘을 빼자 또 붕 뜬 기분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상태를 눈치 챘는지 옆에서 그를 바라보던 손님은 제 큰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눈을 다시 감겨준다.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았으니까 다시 자두십쇼.”


그제야 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를 다시 말리려다가 작게 달싹이는 입술에 그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조심스럽게 귀를 그의 입술 바로 위로 기울인다.


“뒷..마당...세줄..기 정도...”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저 흐릿한 푸른빛으로 빤히 바라만 볼뿐. 그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손님이었지만 별 다른 말없이 그의 말대로 뒷마당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문이 닫히자 그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방 안을 둘러봤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방 밖에 있거나 다른 방에 있는 것 같았다. 그대로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쓰러지기 전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간다. 


분명 아이가 마을로 혼자 가고 오늘따라 늦는 녀석을 맞이하기 위해 찬장에서 과자와 차를 꺼낸 게 마지막 기억이다. 창문 너머로 하늘을 봤을 때 저 아래로 붉은 빛이 꺼져가고 있는 걸 보면 지금은 늦은 저녁쯤이려나 싶은 생각을 하던 중 문이 열렸다. 그러자 보이는 얼굴은 늘 달고 있던 뻔뻔한 웃음이 아닌 당황과 놀라움을 그득히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주친 눈에 그는 슬쩍 눈을 찌푸렸다. 어째 저 눈에 담기는 건 변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무겁게 느껴지는 팔을 들어 올리며 말없이 손을 뻗었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행동에 뒷마당에서 가져온 것을 그의 손 위로 올려놓았다.


“하..하하...정말이지 놀랐습니다? 물론 처음 제대로 마주했을 때도 당신은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게 빛났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지금 당장 듣는 사람이 없다 해도 속삭이 바람은 무시하지 말게.”


그는 더 이상의 말은 원치 않았는지 단호한 목소리로 뒷말을 잘라낸다. 그에 어깨를 들썩이며 물러나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면 아직도 흥미로운지 눈을 빛내는 모습이 마치 다음 기회를 노리는 맹수 같았다. 그런 그 눈빛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댔다. 


열기가 점차 가라앉고 냉기가 그런 열기를 발판 삼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눈만 굴려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힘겹게 말을 끌고 나온다.


“퍼블리는...”


“옆방에서 아주 잘~자고 있으니 걱정은 우리 딸기씨 몸부터 걱정하십쇼. 오늘은 일이 있어서 좀 늦었긴 했지만 오자마자 아주 깜짝 놀랐슴다?”


투덜대듯이 말하지만 내용은 알아듣기 쉬웠다. 사실 내용이랄 것도 없이 저절로 쉽게 상상이 될 상황이었다. 다만 친구와 함께 노느라 손님보다 늦게 올 거라고 생각한 퍼블리가 의외로 예상과는 달리 빨리 왔다는 점이 조금 상상 밖이었지만 결국 어린아이가 다 큰 어른을 침대까지 들고 가는 건 불가능했기에 그를 침대까지 옮긴 건 퍼블리보다 늦게 온 손님이었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슴다~ 세상에 얼마나 놀랐는지 평소엔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던 우리 퍼블리가 제가 오자마자 붙잡고는 당신을 살려달라면서 울고 집 안으로 들어가보니 우리 딸기씨는 쓰러져있질 않나, 바닥은 엉망이질 않나~”


피곤한 기색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름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건지 가벼운 어투로 말하던 손님은 벽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고 말을 멈추며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희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어깨가 아니라면 사람과 매우 닮은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안색이 창백했다. 사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지만 아무리 표현이래도 아직 살아있는 걸로 보이는 사람에게 시체 같다는 표현을 쓰면 정말 그대로 숨을 멈출까봐 꾹 눌러 담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머리를 감싸주고는 그대로 다시 침대로 몸을 눕히는 손길이 곧 꺼져갈 것 같은 불이 꺼지지 않게 조심해서 다루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 그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을 테니. 그러다 문득 울음소리와 함께 처절한 말이 머리를 맴돈다.


“우리...끅! 아빠..왜 이래요? 왜 이렇게 아빠 흑!..이마 뜨거워요? 왜 아..안 깨어나는 거예요?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저 이제 아빠...흑...혼자 있게 안 끅!할..윽!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말은 환자에겐 가볍게 했지만 그 환자를 둘러싼 상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사실 그를 간호한 본인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덕에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처음 상황을 맞닥뜨렸을 땐 놀람과 당황에 몸은 물론 미끌미끌한 말솜씨처럼 빠르고 유연한 머리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으니 말이다. 겨우 삼킨 한숨이 결국엔 못 참고 튀어나와버렸다.



처음 쓰러진 걸 발견한 후부터 정신을 차리고 뒷마당에서 가져온 걸 씹어 삼키기 전까지 열이 펄펄 끓어 머리처럼 빨갛게 되는 게 아닌가 싶던 얼굴은 빨간 기색 없이 시리기만 했다. 그렇게 계속 바라보던 손님은 장갑을 벗고 제 큰 손으로 마법사의 뺨을 감쌌다.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까 싶은 마음을 담아.


“정말이지, 너무 정이 들어버린 거 아닌가 싶슴다~”


사실 있는 정 없는 정 생길 정도로 3년 동안 뺀질나게 찾아왔으니 정이 안 들 수가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정드는 것도 상당히 여러 가지 감정이 있는 것이지만 지금 그 정에 담긴 감정이 예상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냥 나쁘진 않은지 옅게 웃던 그가 갑자기 무언가 재미있는 장난이 떠오른 모양인지 평소의 얄미운 웃음을 짓더니 베개 하나를 들고 오고는 마법사의 바로 옆에 툭 놓더니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추고는 그 속으로 파고든다.


“이런 기회가 언제나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놓칠 수야 없지 않겠슴까? 그리고 계속 곁에서 간호한 사람을 내칠 정도로 매정하진 않을 거라 전 믿겠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바로 옆에 눕는 모습을 만약 마법사가 다시 깨어나서 봤다면 몸이 아픈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주먹이나 베개를 날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잠든 때에 일방적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얼굴로 가져간다. 이번엔 뺨을 감싸는 게 아닌 뺨까지 내려와 그림처럼 붙은 머리카락들을 떼어내다가 머리 쪽으로 더듬어 올라가며 새빨간 머리카락들을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동화책 속의 요정 머리카락처럼 아름답게 붉었다.


어느새 창문 너머의 붉은색은 꺼져갔고 남아있는 건 이것뿐이다.


“...허?”


사실 그는 빠른 눈치만큼 감각도 제법 예민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자고 있는 도중에 누군가 가까이 오는 걸 알아채고 깨어날 정도로 꽤나 예민하고 경계를 잘 세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사실 깨어나는 상황은 자고 있는 그에게 다가오는 자가 살기를 지닌 대상이거나 자는 동안 날아오는 공격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인 생존본능에 따를 상황이었지만 덕분에 예민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저도 요즘엔 일이 많아서 피곤하긴 했지만...”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텅 비어있는 옆자리를 바라봤다. 물론 이렇게 멍든 데 없이 멀쩡한 걸 보면 적어도 언제 일어나서 자리를 벗어났을지 모를 마법사는 공격의사가 없었다는 거였고 그 덕에 깨어날 이유가 없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이렇게 가까이, 그것도 침대가 사실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에 거의 딱 붙어서 함께 누워있었던 사람이 움직이면 예민하지 않은 사람도 알아채고 잠에서 깨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직은 달이 환하게 떠있는 늦은 밤인걸 보면 잠들게 된 지 몇 시간 정도밖에 안 됐는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환자가 일어나서 사라질 때까지 깨어나지 않은 게 말이 되는가.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깨어나게 된 것도 잠결에 뒤척이다가 무의식적으로 마법사가 있던 곳을 더듬었는데 손에 잡히는 건  사람 덕분에 높게 올라온 이불의 감촉이 아닌 푹 꺼진 허전함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그는 오래 앉아있지 않았다. 그대로 방을 나서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아이가 자고 있는 옆방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여전히 아이만 있었고 색색 작고 고른 숨소리가 넓은 빈자리를 채웠다.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작은 뺨에 그는 마법사의 곁을 지키겠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댔던 낮 시간의 아이를 떠올렸다. 물론 아이는 결국 울다 지쳐 마법사의 옷자락을 꽉 쥔 채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고 그런 아이까지 열이 오른 덕에 간호해야할 사람이 늘어났다. 


그나마 아이는 울고 흥분한 감정에 의해 오른 열이라 금방 내려졌던 터라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잠들어있는 아이를 한 번 살펴보고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방을 나선다.


“그렇담 밖에 나갔단 말인데...”


짚이는 또 다른 곳은 바로 뒷마당이었지만 현관문을 열자 보이는 발자국들에 자연스럽게 가야할 방향이 정해졌다. 맨 발로 나갔는지 신발자국들 사이의 사람의 맨 발자국 덕분에 그는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당신이 미아가 된 겁니까?”


물론 그 때와는 달리 불청객은 사라졌기에 발자국이 끊기거나 숲을 헤매 찾지 못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방해꾼이 없으니까.


발자국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있었다.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니 보름달조차 쉬이 빛을 내리지 못하도록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에 의해 어두워지는 바람에 발자국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라도 하나 가져오는 거라며 투덜거리지만 손은 이미 빛을 내는 마법을 쓰기 위해 눈높이에 맞춰 올라가있었다. 그러다가 앞을 보게 된 그는 그대로 손을 내렸다. 


앞을 바라보니 발자국이 어느새 나무들의 끝을 벗어나있었다. 그대로 따라가 발을 내딛는 순간 빛이 눈을 향해 달려든 것만 같은 기분에 눈을 깜빡인다. 다시 앞을 바라보니 굉장히 깨끗한 상태의 호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나무들이 자리를 비켜주듯이 빙 둘러싼 가운데 어디서 물이 솟아오르는 건지 모를 호수는 커다란 거울 하나를 가져와 툭 떨어뜨려놓은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아마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던 건 저 호수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미아씨! 여기 계셨슴까? 제가 데리러 왔슴다~!”


그를 당황하게 했던 미아가 호수 바로 앞에 서있었다. 아니 미아라고 하기엔 이곳을 알고 일부러 온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아마 다 큰 미아는 그대로 뒤돌아 당황한 표정으로 왜 여기에 왔냐고 물을 게 뻔했고 그 모습에 먼저 말을 건 그는 늘 그렇듯이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우리 다 큰 미아를 찾으러 왔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수 바로 앞에 서있는 미아는 어째선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문득 그의 눈에 흙투성이의 발이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지 상처는 없어 보이는 발은 어쩐지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있는 듯이 미동도 없었다. 애초에 제정신이었다면 신발정도는 신고 나왔을 거란 생각에 미치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다.


“뭐하고 있는 겁니까?”


바로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자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마치 그가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마법사의 모습은 무척이나 덤덤했다.


“여기에 호수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게다가 이렇게 깨끗한 호수는 또 처음이고요. 자다가 깼을 때 이 호수가 보고 싶었슴까?”


“꿈을 꿨네.”


그렇게 대꾸한 마법사는 다시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흐음? 무슨 꿈입니까?”


“이 호수가 나오는 꿈. 현실을 보여주는 기분 나쁜 꿈이었지.”


“꿈에서조차 현실적이면 꽤나 슬프다는 걸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예쁜 호수가 나오는 꿈이라면 나름대로 괜찮은 꿈 아님까?”


“호수가 깨졌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꿈이로군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눈치 빠른 그는 아까와의 차이점을 눈치 채고 잽싸게 말을 질문으로 바꿨다.


“저 호수가 깨지는 게 기분이 나쁘셨슴까?”


“현실을 보여주는 게 기분이 나쁠 뿐이지 호수가 깨진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네.”


“흠...그렇담 지금 호수가 아니라 뭘 보고 있는 겁니까?”


“호수 밑바닥. 호수가 깨진 덕에 바로 내려갈 수 있었네만 지금은 깨지지 않는군.”


“호수 밑바닥에 내려가고 싶습니까?”


“내가 찾는 것이 바로 거기 있네.”


“호오? 그럼 그걸 꿈에서는 찾았습니까?”


“아무것도 없었네. 그게 현실을 보여주는 거라서 정말 기분이 나빴지.”


“그렇다면 우리 딸기씨가 찾는 게 무엇입니까?”


“내 과거.”


순간 정적이 호수 주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질문을 꺼내는 걸 멈춘 덕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된 침묵의 결과물이다. 지금의 마법사가 반응하는 건 다름 아닌 질문이었지만 그는 이번엔 무슨 질문을 꺼내야할지 곤혹스러운 상태였다. 


찾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꺼내기 전까진 기껏해야 소중한 물건이 호수에 빠졌다는 걸로 예상했지만 그런 그의 뻔하고 빈약한 상상과 예측을 비웃듯이 나온 대답은 상당히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호수 밑바닥에는 제정신인지 모를 상태로까지 깨어나 찾는 것이 있고 그건 바로 과거란다. 그리고 먼저 찾아간 꿈속에선 호수 밑바닥엔 아무것도 없었고 그게 현실을 보여주는 거라서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마법사가 말하는 과거와 현실이 무엇인지를 제쳐두고 꿈과 현실이라는 걸 구분하자면 지금은 현실이다. 일단은 호수가 깨질 일은 없었고 다른 방법으로 호수 밑바닥에 가게 되어도 있는 건 젖은 흙과 물을 잔뜩 머금어 빤질빤질할 돌멩이들 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마법사의 시선을 따라 호수로 눈을 돌리자 보이는 건 호수에 비친 나무들과 푸른 달뿐이었다. 푸른 달로 비춰지는 호수는 보름달이 뜬 날에 아기가 태어난다고 했는데 이 호수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모든 호수가 보름달이 뜬 날에 아기가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별다른 감흥 없이 호수를 살펴보고 있는 순간 푸른 달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고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에 반응하듯이 마법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깨끗한 호수와는 달리 하늘은 구름이 덕지덕지 껴있는 날이네요.”


언제 몰려왔을지 모를 구름이 달을 가리면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달이 있을 곳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내리고 다시 마법사를 바라봤지만 마법사는 호수를 쳐다보던 것처럼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번엔 하늘에는 미래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할까라는 농담 섞인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느릿느릿 흘러가던 구름이 어느새 제 몸을 다 끌어안고 다른 하늘로 비켜서자 잠시 가려졌던 노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랗군.”


“뭐, 아기가 태어나는 호수에선 파랗게 보이지만 원래 달은 노랗지 않습니까?”


그 말에 고개를 내려 호수에 비친 푸른 달을 보던 마법사는 다시 노란 달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몇 번 두 달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마법사는 멍하니 말을 꺼냈다.


“여긴 현실이었군 그래.”


“그럼 현실이지요, 멀쩡한 호수가 깨지는 꿈이 아님다.”


느릿하게 모습을 감추며 다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푸른빛은 아직도 꿈의 세계에 있는 건지 몽롱한 기색이었지만 적어도 현실이란 걸 알아챈 입은 다시 꾹 다물렸다. 픽하고 튀어나온 웃음이 정적을 걷어낸다.


“우리 딸기씨는 정말 귀엽네요~”


“딸기 아닐세.”


“아아 이제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려는 검까? 아직까지도 잠에 취해 멍해 보이는 모습이 정말 귀여운데 말임다~ 그나저나 딸기씨라고 불리기 싫으면 이름이라도 좀 가르쳐주십쇼? 3년이나 얼굴 맞댄 사인데 이름조차 모르다니 너무하다고 생각 안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자네도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잖나.”


노란빛이 깜빡인다. 그러다 이내 호선을 그린다.


“제 이름은 치트입니다.”


그 말에 푸른빛이 느릿하게 깜빡이며 똑바로 그를 마주한다. 그동안 조용했으면서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람이 그들 사이를 지나가자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며 점점 느려진다. 마치 시간을 붙잡는 것처럼.


“패치.”


늘어지던 시간이 마치 이 순간을 위한 장식처럼 천천히 흘러가다가 멈추는 듯이 주위의 그 어떤 소리도 끌고 오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그들 사이를 지나가던 바람소리조차.


“그게 내 이름일세.”


몽롱한 푸른빛과 흔들리는 붉은 비단과 호수 바로 옆에서 비춰지는 푸른 달이 그 주위의 분위기를 몽환적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이자 미련 없이 움직이는 모습에 그건 마치 한순간의 꿈이었다는 듯이 사라져버린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만 가지. 라는 딱딱한 말은 기어이 관객을 몽환적인 한순간의 꿈에서 현실로 끌어낸다. 


비록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 여운은 현실까지 쫓아와 진심으로 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하하...”


자신도 모르게 묻혀있던 진심이 안쪽에서부터 심장을 두드린다.






인사









“그래서 많이 아팠다면서?”

그동안 봐왔던 얄미운 웃음이 아니라 얄미움은 물론 익살스러움까지 가득 담긴 웃음이 잠에서 깨어난 마법사를 반겼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몽유병인지 뭔지 알 수없는 상태에서 손님 이름을 알게 되다 못해 몇  십년 동안 꺼내지도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덜컥 알려주고 말았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얼굴색이 저번에 봤을 때랑 똑같은데?”

“제가 일어나는 걸 못 견디는 두 녀석 덕분입니다.”

사실 그는 완전히 기력을 회복한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그를 돌보는 걸 자처하는 한 아이와 한 어른의 극성은 며칠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사실 쓰러지고 난 후 바로 다음날 평소처럼 일어나서 늘 그랬듯이 아침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훨씬 빨리 일어난 사람이 있었으니

“아~하십쇼.”

“...뭐하는 건가?”

“뭐하긴요? 먹여드리려고 하잖슴까.”

물론 찡그리는 표정을 보고 상대의 감정 상태를 못 알아볼 사람은 아니었지만 늘 뻔뻔함을 달고 사는 녀석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의 찡그린 표정에도 불구하고 꾹 다물다 못해 못마땅하게 비틀려 있는 입에다가 죽이 담긴 숟가락을 가까이 갖다 대는 저 뻔뻔함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없어질까 고민하는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얄미운 웃음을 달고서는 그의 짜증을 더욱 부추긴다.

“우리 패치~ 얼른 드셔야죠?”

“이름 부르라고 허락한 적 없으니 자네 멋대로 이름 부르지 말게.”

“아아 서운합니다! 치트라고 불러주십쇼~”

그는 기억에 없는 소리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 밤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일어나자마자 떠오른 기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보통 이런 기억은 나지 않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며 대체 몽유병도 뭣도 아닌 그 상태는 뭐였는지 의문이 일어났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호수 앞에서 제 앞의 숟가락을 내밀고 있는 녀석의 질문을 받고 있는 것처럼 무척이나 생생한데도 그 때의 상태를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평소라면 정말 어림도 없는 상황인데다가 절대 누군가에게 호수가 있는 곳을 알려주거나 그럴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만큼 그 호수는 그에게 있어서 민감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적이 또 있었슴까? 이제야 말하지만 그 때 뒷마당 쪽에 급하게 뜯은 것처럼 보이는 게 꽤 있어서 말임다.”

마법사는 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가라앉은 눈으로 무언가 생각에 잠기던 그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비키게.”

“어허! 안 됩니다. 환자는 쉬어야죠?”

“밤에 멀쩡히 움직이는 걸 생생하게 봤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어서 비키게.”

“정상인 상태는 아니였잖슴까?”

물론 그에겐 저 뻔뻔한 낯짝이 방해가 아니었다. 마음먹고 힘을 쓰면 밀어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고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만 의외의 복병이 그의 앞길을 막았을 뿐이다.

“아빠 안 돼!”

방문을 나서자 잔뜩 부어있는 눈으로 또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녹색 빛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이의 울음은 그를 당황하게 하기엔 충분했고 이제 괜찮다며 아이를 달래며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누워있는 신세였다.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구만 그래!”

심란해 보이는 마법사의 얼굴에 늙은 마법사는 껄껄 웃으며 3년 산 아이가 몇십년 산 마법사를 이기다니 아이란 건 굉장하네라는 말을 놀리기 위해 꺼내고 있지만 사실 마법사가 심란한 데엔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평소라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딱딱하게 말을 내뱉을 마법사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놀리던 걸 멈춘 늙은 마법사는 웃는 얼굴 그대로 의문을 눈에 가득담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마법사는 그 마저도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지 여전히 심각했다. 우선 그의 상태와 더불어 궁금한 것도 있었기에 늙은 마법사는 묻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동안 퍼블리가 마을에 오지 않았던데 말을 들어보니 쓰러진지는 며칠 정도고 그 전엔 딱히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자넬 괴롭혀왔던 문제가 해결됐나?”

그 말에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던 마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잡아챈 늙은 마법사는 또다시 무언가 놀릴 만한 말이 떠올랐는지 익살스럽게 웃었다. 반응 이후 다시 주변을 살펴보게 된 마법사가 그 웃음에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퍼블리를 맡기기 시작한 날에 자네가 말한 그 약새풀을 입에 넣어줘도 시원찮을 녀석이 고백이라도 했어?”

이번에도 나온 말은 없었다. 하지만 늙은 마법사는 만족했다. 입을 딱 일자로 다문 채 눈을 크게 뜨는 마법사의 반응이 대답이었다.

바로 전날

“좋아합니다.”

늙은 마법사의 말대로 과거 불청객이면서 약새풀을 입에 넣어줘도 시원찮을 녀석이자 현재 손님이 된 녀석은 마법사에게 고백을 했다. 그리고 이건 지금까지 마법사를 심란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마법사의 반응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동안 얼굴이 취향이네 이렇게 매일 같이 얼굴 맞대니 부부 아니냐 자신의 순애성을 봐주십쇼 등 헛소리를 꺼낸 전적이 화려했으니 말이다. 또 시작이냐는 듯 녀석을 돌아보자 보이는 건 평소처럼 얄밉고 가벼운 웃음이 아닌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하고 무거운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마법사는 잔뜩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이번엔 또 뭔가?”

“뭐긴요? 고백이잖슴까?”

그 말에 푸른빛이 자연스럽게 반으로 접혔다. 마법사는 이미 녀석이 왜 자기를 찾아오는지 근본적인 감정으론 잘 알고 있었다.

“이참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자네에게 어떤 형태로든 정이 쌓이긴 했으니 이렇게 손님으로 보고 있지만 자네를 믿을 순 없네.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흥미만 잔뜩 가진 채 다가오고 있었잖나, 그러니 이제 그런 농담은 그만두게.”

“그렇다면 전 언제나 솔직하다는 거 아시잖슴까? 이건 농담이 아님다.”

문제는 그 솔직함이 꽤나 변태적이고 가벼웠다는 게 문제였다는 말이다. 확실히 그는 가볍게 말했을지언정 꽤 솔직한 편이었다. 거짓을 말하기보단 중요한 말을 생략하기에 가까웠고 그 가벼움으로 가렸다는 점이 꽤나 교묘했지만 그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다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퍼블리의 말을 빌려 그동안의 행동은 구애행위라고 할 정도였고 항상 얼굴이 취향이라던지 키스하면 안 되냐는 식으로 가벼운 투를 쓰며 무례하게 굴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여태까지의 솔직하지만 가벼움으로 가렸던 것들이 이번 말이 진심이라는 증거가 되어버린 것 같았지만

“열 번의 춤 모두 같은 사람을 선택해서 췄다고 한들 열한 번째 춤 또한 어떠한 춤을 추고 누구랑 출지 정하는 건 춤추는 사람 아닌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진지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이쯤 되면 마법사도 그가 진심인지 아니면 태세 전환으로 효과를 보고 있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 마법사의 표정은 다시 떨떠름해졌다. 우선 그를 믿지는 않지만 진실을 알기 위해 우선 그가 진심이라는 가정을 세우고선 다시 말을 꺼냈다.

“계기가 뭔가?”

“그날 밤입니다.”

“자네는 몽유병도 뭣도 아닌 뭔지 모를 상태의 환자한테 반하나?”

“그렇게 결과만 빼서 말하면 제가 취향이 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잖슴까? 그 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당사자는 모를 검다.”

“분위기는 둘째 치고 상태가 우선이지 않은가.”

“아시다시피 전 솔직합니다. 당신 얼굴은 제 취향이고 그날 밤이 아주 결정타를 날렸지 말임다.”

마법사는 더 이상 묻기를 포기했다. 계속해서 물어봤자 같은 말만 나올 것이고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기에 그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의외로군. 자네는 왠지 고백을 하면 꽤나 화려하게 할 것 같았는데.”

가볍게 시점을 비튼 말에 그의 눈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짝였다.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신은 환자잖슴까? 하지만 저는 빨리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게 우선이었죠~ 그럼 제가 제대로 고백하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어느새 손까지 꼭 잡고 있었다. 어쩐지 그동안 올려다보던 녀석이 이렇게 눈까지 반짝이며 말하는 모습이 꽤나 낯설면서도 확실히 저보다 어리고 젊은 마법사긴 하구나 싶었다. 

물론 그도 아직은 젊다고 할 수 있었지만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마법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픽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웃고는 대답했다.

“꿈 깨게.”

그리고 웃음과는 별개로 진실여부에 대한 심란함은 아직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물론 받아줄 생각은 없었지만 다른 이유로 문제가 있었다. 마법사는 그놈의 정이 뭔지 겨우 3년하고도 몇 개월 지난 주제에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는 게 여간 어지럽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을 꽉 감으면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한참동안 그대로 있던 마법사는 어지러운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득 눈을 뜨고 보이는 문틈 너머에 늙은 마법사가 가져온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뒤돌아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에 마법사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어줬다. 

잔뜩 가라앉은 그의 눈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늙은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고 그는 그 기다림에 부응했다.

“예전의 그 말, 지금도 유효합니까?”



*****



방 안은 매우 싸늘한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그에 들어오던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라며 방 한가운데서 매우 가라앉은 눈으로 서류를 보고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대로 다시 문 너머로 뒷걸음질 치기 일쑤였고 방금 전까지 합쳐서 벌써 6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그에 보다 못한 한 사람이 각종 험한 욕들을 입에 머금으며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모습에 욕을 꺼내려던 열기가 픽 식어 내리고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나가서 뭐 잘못 처먹고 왔냐?”

“헛소리 할 거면 빨랑 나가십쇼.”

기분이 나빠도 웃고 또 웃으면서 독설을 날리거나 엿을 먹였지 저렇게 정색한 얼굴은 처음 봤기에 뭐라 말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는 그대로 방 밖으로 나온다. 왜 똑같은 상황이 6번이나 반복됐는지 눈치 챈 그는 앞으로 6번은 훌쩍 뛰어넘을 상황에 그제서야 꺼내지 못했던 욕을 아낌없이 내뱉었다. 

아마 이렇게 그가 직접 나서기 전에 물러섰던 6명의 방문자들은 얼른 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처음 보는 얼굴 상태의 배추머리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열띤 추리를 벌일 게 눈에 훤했다. 웬일로 딸기딸기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 농땡이 치러 나가는 일 없이 얌전히 앉아있나 싶었더니만 그에게 있어서 배추머리는 나가도 짜증나는데 안 나가도 머리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점점 솟아오르는 두통에 손을 들어 머리를 꾹꾹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히는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쉴 새 없이 욕을 뱉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뒷주머니에서 밝은 빛이 터졌고 꽤나 신경질적으로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밝게 빛나고 있는 수정구를 꺼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걸 내가 알면 이렇게 밖에서 욕을 하겠냐?"

이렇게 연락한 녀석도 직접적으로 만날 순 없지만 아마 이렇게 수정구로 연락을 취하다가 얼굴을 보게 된 게 틀림없을 터다. 거칠게 머리를 긁던 그는 툭 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거 X발 맨날 나가서 보고 오는 그 딸긴지 뭔지한테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했나."

그럴 리는 없겠지라고 덧붙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정답이었다.


                           
*****



"...자네 차인지 이제 이틀 정도밖에 안 됐네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데."

어제 늙은 마법사가 왔다간 후로 아이는 여전히 걱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지만 그래도 침대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어제는 고백했던 손님이 그에게 차이고 난 바로 다음날이자 오지 않았던 그런 날이었다. 실연이라는 게 꽤나 충격이 큰 건가 싶을 정도로 놀라워하면서 내심 신경을 쓰고 있던 그는 지금 바로 그 생각을 고이 접어 저 멀리 날려 보냈다. 

평소라면 잠가놔도 어떻게든 열어서 들어왔을 녀석이 웬일로 노크를 하길래 늙은 마법사가 다시 방문했나 싶어서 별 생각 없이 여는 것과 동시에 그를 반기는 건 오색찬란하게 흔들리는 천들이었다.

멍하니 흩날리는 천들을 바라보다가 곧이어 상황파악에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이런 일을 벌인 장본인은 틈을 줄 생각이 없었는지 천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고 아직까지도 허공에 흩날리는 천들을 붙잡고는 그 천들로 그를 감싸며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현재로 이어졌다. 마법사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뻔뻔한 얼굴 너머에 있을 속내를 파악하는 건 진즉에 포기했다고 놓아버린 것 같았는데 또다시 궁금해지는 걸 보면 아닌 모양인가보다. 

아직까지도 그를 감싼 채 커다란 손으로 붙잡고 있는 천은 푸른색이었다. 그에 서로 닮아있는 푸른 눈이 살짝 가라앉은 채로 이 일의 원흉을 올려다봤다.

“이 천들은 뭔가?”

“요즘 유행하는 고백방법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천 하나만 가져오는 거지만 어디 하나로 가당키나 하겠슴까?”

진지했던 표정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싹 사라지고 평소대로의 뺀질거리는 얼굴이 돌아왔다. 어쩐지 이번 일도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은 빠른 태세와 분위기 전환이다. 그에 그도 평소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치우라고 하려던 순간

“이쁘다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아이가 녹색 빛을 반짝이며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색의 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고백용으로 쓰인 오색찬란한 천들은 훗날 아이의 옷이 되었다.

“근데 아빠랑 아저씨 뭐하고 있는 거야?”

“아저씨 아니라고 했잖슴까. 지금 당신 아버지께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만?”

아마 그가 기대했던 반응은 한껏 화난 표정을 짓거나 울상을 지으며 저와 마법사 사이로 뛰어들어 저번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을 테다. 사실은 그저 놀리기 위해서지만 이유란 걸 덧붙인다면 요 며칠간 아이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확연히 평소보다 가라앉은 모습이 눈에 밟혀 잔상처럼 남아있었기에 다시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만 장난이라기엔 고백은 진지했기 때문에 완전히 장난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마법사의 아이인 만큼 확실하게 말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며 아빠가 두 명이 될 거라고 아이가 반응을 보인다면 덧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이가 없단 얼굴로 막힌 물길 주제에 저 너머의 호수나 바라보고 있다고 쏘아붙였을 거다. 

멀뚱히 저를 올려다보며 큰 눈을 깜빡이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아저씨 우리 아빠한테 또 구애행위하고 있었어요?”

순간 멍한 얼굴이 되어버렸지만 아이의 말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빠를 좋아해도 그렇게 껄떡대는 건 나빠요! 아빠가 싫어하잖아요!”

자기는 과연 이제 겨우 3살인 아이에게서 뭘 들은 걸까. 애초에 저게 애가 할 수 있는 말인가.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마법사를 쳐다봤다. 그에 헛기침을 한 마법사가 슬쩍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변명하자면 나는 저 말들을 가르친 적이 없네.”

늘 흔하게 불어와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움직인다는 걸 보여줬던 바람도 이번엔 오지 않았다.

“...눈 좀 돌리게.”

결국 두르고 있던 천을 그의 얼굴에 던지고는 땅 위로 어질러진 천들을 주워 아이와 함께 들어가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가 됐다. 물론 천들은 흙투성이가 되어버렸으니 빨래통으로 들어가게 됐고 아이는 아쉬운 눈으로 손을 뻗어봤지만 결국 닿게 된 곳은 씻는 물을 담아놓은 바구니였다.

그 후의 상황은 마법사가 아프기 전의 일상과 다를 게 없었다. 셋은 같이 자리에 앉아 배를 채웠고 손님은 늘 그랬듯이 아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집주인 마법사에게 껄떡대기 바빴고 아이는 그런 둘의 사이를 가르며 마법사의 무릎 위에 앉아 동화책을 들어올렸다. 손님은 그런 아이에게 툴툴거리며 그의 자랑인 말솜씨로 동화를 아름답고 부드럽게 풀어줬고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재촉하기 바빴다. 

마법사는 그런 둘을 보며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작은 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손님은 하늘 한쪽이 빨갛게 타들어갈 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대로 문을 나선 후에 사라졌다. 저번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일상이었다. 다만 조금 바뀐 것들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솔직해지고 적극적인 고백과 어느새 아래까지 많이 내려간 귀여운 경계심이다. 그런 일상을 되돌아보던 마법사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외면하듯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




“그 녀석 참 적극적인데?”


이야기를 들은 이후 쉴 틈 어깨를 들썩이다가 웃음소리 사이로 겨우 꺼낸 말이었다. 물론 그 말을 듣게 된 당사자의 표정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웃는 사람도 그 표정을 봤지만 우선 웃는 게 더 먼저였으니 마저 웃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당사자에게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렇게 시계바늘이 조금 아래로 움직였을 때쯤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히익! 히익! 그래서 대답은?”


“뻔히 알면서 묻는 겁니까?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뻔히 알기 이전에 거울로 네 지금 얼굴이나 한 번 봐~ 중요한 건 네 마음 아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어떤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얼굴로 마음이 나왔다시피 당연히 제 마음에 따라 거절한 겁니다.”


팔짱을 끼고는 눈을 감은 채 단호한 말투로 말을 끝냈지만 이상하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슬쩍 눈을 뜨고 바라보니 미묘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늙은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입은 수염에 가려진 터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평소 늘 웃음기를 담던 눈은 굉장히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당사자는 물론 마주보게 된 사람도 복잡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아마 사람이 사람인지라 더 그럴지도 모른다고 마법사는 생각했다.


“예전에 자네 없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똑똑하던 녀석이 이럴 땐 멍청해진단 말야.”


“...다짜고짜 무슨 말씀이십니까?”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야. 그 땐 그나마 다른 사람 마음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자기 자신한테도 둔할 줄이야...”


그런 늙은 마법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해봤자 득 될 건 없다는 생각에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혀를 끌끌 차고는 한숨까지 쉬는 모습에 그는 더더욱 늙은 마법사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일단 지금 상황으로선 접어두는 게 좋지만 앞으로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는 게 좋을 거야. 자네 지금 자네에게 열심히 고백하는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그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뻔뻔함을 가득 담아 웃고 있는 얄미운 얼굴이었다. 반사적으로 혀를 차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그에 대해 떠올려본다. 처음 제대로 마주하게 된 집으로 돌아가던 길의 기억, 그리고 그 후의 죽일 듯이 마법과 칼들을 날려대던 기억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천천히...3년간의 기억들은 거의 같은 기억들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늘 마을에 다녀오고 그런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늘 만난 자리에 서있었던 짜증나는 녀석. 그렇게 이어지고 늘어진 3년 동안의 경계와 벽은 우스울 정도로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뜨릴 수 있게 한 건 마법사도 그도 아닌 그와 그렇게나 만나게 하지 않기 위해 떨어뜨려놨던 아이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불청객이 아닌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어버렸고 심지어 아이와도 매우 잘 지내고 있었다. 틈 따위 보이지도 않았던,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그 벽은 그저 아이의 귀여운 행동 하나로 쉬이 걷어진 천이자 3년이라는 시간으로 늘어진 의미 없는 끈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허탈하지는 않았다. 아마 마법사 본인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터였다.


“얄미운 데다가 속내도 시꺼먼 녀석입니다. 다만 3년 동안의 미운정이 든 아쉬운 녀석입니다.”


이번엔 가려진 한구석에서 또다시 묻는다. 그걸로 끝?


“그래야만 합니다.”


말을 다 듣게 된 늙은 마법사는 그나마 달고 있었던 미소마저 내려놓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마법사를 빤히 바라봤다. 더 말을 해보라고 해봤자 정작 담게 될 내용은 대답은 그걸로 충분하다느니 더 이상 대답은 없다며 덮는 것도 모자라 잘라버릴 테고 아니면 아예 지금처럼 계속 입을 닫아버릴 게 뻔했다. 


결국 더 묻는 걸 포기하고는 소매에서 손을 꺼냈다. 손에 쥐고 있던 건 늙은 마법사가 그의 집으로 발을 들인 목적이자 떠나보낼 무언의 재촉이었다.


“준비는 다 해놨으니 이것만 잘 들고 잘 숨기면 돼.”


“감사합니다.”


저걸 받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도 남아있을 것도 없겠지.


만약 지금 손을 내미는 자신이 완전한 제 3자였다면 건네주는 손과 받는 손이 마치 현실성 없는 소설의 한 장면 같다고 말했을 거라며 자조 섞인 눈빛을 따라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어째선지 그의 속말 그대로 소설처럼 움직이는 손들이 느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꽤 오랫동안 쥐고 있었는지 따뜻하지만 변할 수 없었던 딱딱한 감촉이 그의 다른 감각들도 마저 현실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에 아 하고 뜻 모를 감탄도 함께 딸려 나오고는 곧바로 흩어져버리기 바빴다.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눈 또한 느릿하게 깜빡인다.


“진..짜..군요.”


“그럼 진짜지 어디 흐물렁한 짜가겠어? 만드느라 고생 좀 했지!”


“잠깐, 만드셨다니...구한 게 아닌..”


“구하긴 어디서 구해? 그게 구한다고 해도 구해질 것도 아닌 건 너도 아주 잘 알잖냐?”


마법사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디서부터 따져야할 지, 그 뒷내용이 어떻게 되어있을지 듣는 것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얌전히 비어있는 다른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 한 것도 없는데 어째선지 피곤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낄낄 다시 웃음을 달게 된 늙은 마법사는 익살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 못 보는 거야 하도 익숙해서 그렇다 치지만 그 모습을 못 보는 게 좀 아쉬워~ 그러니까 자주 놀러와잉~”


“오늘 이후로 앞으로의 모습은 물론 멀쩡한 제 모습도 영원히 못 보게 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미리 드리지 못했던 작별인사를 지금 할까 싶습니다만.”


“에헤이~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겨~! 그러니까 넣어둬!”


손을 들어 올려 과장스럽게 흔들어대는 모습엔 나름의 진심도 섞여있는 것 같았지만 함께 올라온 가벼운 웃음에 침묵으로 흘려보냈다. 정말 그대로 영원한 작별이 되어버릴 뻔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더 이상 농담으로 말하기엔 너무 무거워져버렸는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언제나 여유로우면서도 꽤나 날카롭게 상황을 찌르던 녀석을 떠올렸다. 


아마 지금도 옆에 있었다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작은 바람으로 구름을 움직여 하늘의 그림을 바꾸는 건 분명 굉장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이곳에 남길 바람이라고 부드럽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저번이라고는 해도 며칠 전이지만 자네는 꽤나 철저하면서도 빠르게 준비하지, 아니 어쩌면 계속해서 준비했을 텐데...”


그가 말을 고르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늙은 마법사는 먼저 말을 꺼냄으로써 침묵을 거두어 내심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비록 입은 여전히 다물려져 있었지만 그런 질문이 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담담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답이 충분했는지 혀를 끌끌 차고는 그렇게 빠른 걸 보면 역시 자네도 젊은이에 속한다는 둥 잔소리보단 가볍고 흔히 꺼내보는 말보다는 조금 씁쓸함을 담은 말들을 꺼내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덧붙인다.


“그 녀석한텐 말은 하고 가는 거야? 나야 이젠 익숙하지만 자네의 그 녀석은 자네보다 더 어리고 혈기 넘치잖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모든 생각이 그에 얻어맞아 물러나버렸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추가적으로 말들이 날아왔다.


“굳이 그럴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란 말 하지도 말아. 젊은 녀석인데다 가벼운 녀석이니 금방 흘려버릴 녀석이란 말도. 분명 말을 들어보면 친해진 것도 3년이라는 시간에 비해 그나마 최근인 것 같지만 그 3년의 미운정이 얄팍한 것 같지만 그게 쌓인 데다 막아설 이유마저 사라진 덕에 그렇게 짧은 시간 만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게다가”


그 입의 호선은 정곡을 찌르는 부드러운 칼날이다.


“애초에 말과 행동이 가벼워도 사람 자체가 가벼울 순 없는 노릇이야.”




*****




“자네는 참 부지런하군 그래.”


늘 일정한 시간, 이른 아침에 찾아오는 손님은 눈을 껌뻑이며 마법사를 빤히 쳐다보기 바빴다. 물론 마법사 또한 일찍 일어나 매일 같이 그를 기다리다시피 했지만 무언가 말 그대로 손님을 대접한다는 느낌을 내며 그를 상대했다. 


물론 지금도 평소와 행동이 다를 바가 없지만 무언가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에 어쩐지 묘한 기운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그 묘한 기운이 기분 나쁜 게 아닌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은 종류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무시하는 게 더 어리석을 정도였다. 다만 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찝찝함이 그를 계속해서 붙들어 괴롭히고는 놔주질 않았다. 


그런 상념에 빠진 그를 끌어올린 건 바로 마법사의 부름이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하나? 어서 오지 않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 무언가 막이 깨어지듯 순간 환해졌다. 언제나 한 발 떨어져서 그를 막아서거나 멀거니 보고만 있던 마법사가 먼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꽤나 최근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3년 동안 세워져 있었던 벽은 아이와 친해짐으로써 진즉에 허물어졌어야 할 것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던 느낌이었지만 지금 마법사와의 거리는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계기가 있다.


“무슨 일입니까?”


“다짜고짜 무슨 소린가?”


“평소와 달리 저를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주시니 기쁩니다만 한편으론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좀 찝찝하다고 해야 할까요? 뭔가 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생각하기론 저한테 잘못한 것도 없을 텐데다 그런 걸 호의로 퉁치는 성격도 아니시니...그렇담 역시 제 고백이 통했..”


“호의란 걸 알아챌 눈치가 있다면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는 게 정상일 텐데 말일세. 게다가 자넨 기회라는 게 생기면 놓치지 않고 잡아챌 녀석인 줄 알았는데 그 가벼운 입김으로 저 멀리 날려버리려고 하는 걸 보면 내가 잘못 봤나보군 그래.”


그 말에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자리에 앉았다. 이유는 언제든 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미뤄두고 꽤나 귀중하게 온 기회이자 현재를 즐기자는 심정으로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마법사를 바라본다. 마법사는 여전히 그 웃음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조금 까딱이고는 홱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런 반응도 그에겐 그저 귀여웠는지 다문지 얼마 안 된 입을 열려던 순간 아직까지 자고 있던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는 방문이 열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웅얼거리던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랑 아저씨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나?”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쩜 부모자식 아니랄까봐 하는 말도 닮았는지 귀엽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던 마법사는 여전히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주러 다가갔다. 안아 올리니 따뜻한 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은 손으로 마법사를 꽉 잡은 아이는 다시 잠에 빠졌는지 얌전해졌다. 


작은 등을 토닥여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던 마법사는 아직까지도 멈추지 않는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 그를 쏘아봤다. 그에 계속 웃음을 달고 있던 그는 한차례 진정하기 위해 숨을 몰아쉬더니 숨이 잘못 들어갔는지 기침을 한다.


“콜록! 아아 거슬렸다면 죄송함다~ 아무리 다른 땅에다 심어도 사과 씨 다르고 포도 씨 다르다고들 하지만 역시 키우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건 확실하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요~”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말에 대꾸하는 것보다 아이를 다시 방 안에 데려다놓는 게 더 우선이었기에 문 닫히는 소리만 그의 귀로 찾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리고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나오는 마법사였다. 키에 맞게 꽤나 긴 다리를 이용해 금세 자리를 좁힌 그는 마법사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나름대로 걱정을 담아 말을 건넸다.


“역시 상태가 안 좋군요. 얼른 다시 누워계십..”


“은근 슬쩍 만지작거리지 말게.”


“제 손길보단 눈부터 봐주십쇼. 지금 눈으로 유혹 중입니다만?”


“창가의 먼지만큼도 안 먹히니 얼른 떨어지길 바라네만.”


이 이상 말을 덧붙여도 안 먹힐 걸 깨달은 그는 얌전히 물러났다. 사실 안 먹힐 걸 잘 알고 장난삼아 한 말이니 그다지 큰 타격도 없었다. 애초에 첫 고백 때 차인 것만큼 타격이 올만한 것도 더 이상 없었으니 이제 그에게 문제 될 건 없다. 그런 그를 흘끗 보던 마법사는 밖으로 나갈 것처럼 발을 옮기며 그에게 말했다.


“혹시 같이 호수로 갈 수 있겠나?”





*****




“그래서 어디서 머리를 다쳤다고?”


“다짜고짜 뭔 헛소립니까?”


“그거야 네가 조울증 마냥 기분 드럽다는 거 팍팍 티내다가 갑자기 또 생글생글 처 웃으니까 하는 소리지 어디서 건방지게 헛소리로 치부해?”


“당신이야말로 매우 건방지다는 걸 알고 있기나 합니까? 제가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망정이지 기분이 나빴던 얼마 전이었다면 그 뚫린 입이 더 큰 구멍으로 뚫렸을 검다.”


“수장대우 받고 싶으면 거 시X 땡땡이를 치질 말던가!”


거칠고 천박한 욕들이 섞인 말이 날아오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매우 좋아진 상태였다. 원래라면 이쯤 됐을 때 늘 달던 웃음도 거두고 천박한 말 더 이상 들어줄 생각 없다며 큰 공격 하나 날릴 법한 녀석이 계속해서 생글생글 웃고 있자 그에게 험한 욕들을 마구 꺼내 날리던 자도 질리면서도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진짜 어디 가서 머리라도 맞고 왔냐? 물론 네 놈이 쉽게 맞아줄 녀석은 아니지만 지금 완전 이상한 거 알지? 뭐 원래도 이상하지만.”


결국 그에게도 인내심은 바닥이란 게 드러나는지라 방 안은 그 혼자만의 공간이 됐다. 물론 문 너머에서 여전히 험한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는 지금의 기분을 마음껏 느끼는 게 더 중요했다. 눈을 감으니 꽤나 당황한 얼굴로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늘 굳게 다물고 있었던 입술을 뻐끔거리던 마법사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예상하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아 그런 얼굴이 되어버린 게 분명했다. 마법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새롭고도 즐거운 비밀을 간직하게 된 것만 같아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막진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그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에 젖어있었다. 그는 오늘 아침 마법사가 제게 했던 말을 꺼내 기분 좋은 어투로 입에 담았다.


“저는 기회라는 게 생기면 놓치지 않고 잡아챌 녀석입니다~”


말과 함께 만족스러우면서도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물론 또 다가선다면 마법사는 질색하면서 밀어낼 게 뻔했지만 이제 그런 거부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터, 비록 쌓인 일이 많아서 이렇게나 일찍 오게 됐지만 그는 오늘만큼 값진 날도 없다며 기분 좋게 일을 처리했다. 아쉽지 않다고 할 순 없겠지만 이제 앞으로도 기회는 충분했다. 


그는 다시 여유로워졌다.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서 이유도 모른 채 단단히 자리 잡고 있던 조급함은 오늘 호수에서의 대화 덕분에 사라졌다. 여유를 되찾게 된 그는 천천히 마법사의 심장에 접근할 계획들을 잔뜩 세우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머릿속에서만 떠 있던 상상이 바로 눈앞으로 내려온 것처럼 곧 가까워질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무엇이든지 확신을 얻으면 비로소 안정이 되고 다시 차분하게 현재를 굴릴 수 있기에 그는 지금 나름의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한순간을 즐기고 있던 그였지만 곧이어 빛을 내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수정구 덕분에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여유를 봐줄 틈은 없다는 듯이 빛을 내는 수정구에 그는 조금 기분이 가라앉나 싶었지만 곧이어 연락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을 때 자연스럽게 기분이 다시 좋아지며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자리를 비웠죠?”


사실 상대방은 얼굴만 제대로 못 마주했다 뿐이지 그의 최근 일에 대해선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마다 거친 말투와 욕설을 곁들이며 그의 행동 및 감정 상태를 매일 보고하다시피 통신 수정구를 통해 불평해대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다. 굳이 그에 대한 말은 물론 아무런 대답도 꺼내지 않고 이어지는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미안함다~ 하지만 그만큼 저에겐 매우 즐겁고 가치 있던 순간이어서 놓칠 수야 없었지요, 조만간 자리 하나 새로 마련해야할지도 모름다?”


“새로운 동료입니까?”


“음~ 저에겐 동료 그 이상인 분이라서 말임다. 일단 제 곁에 두고 싶으니 자리 하나 정돈 마련해놓는 게 좋지 않겠슴까?”


누구든지 간에 결국엔 그의 선택이 시작이자 끝이다. 갑작스럽게 그들의 곁 혹은 위로 들어오게 될 자에 대한 반발 따윈 처음부터 나타나지도 않았다. 물론 본인이 아닌 다른 자들에게서 나타나겠지만 어차피 얼마 가지도 않아 가라앉을 게 뻔했다. 결국 누군지 모를 새로운 자가 그의 총애를 받으며 자리를 잡는 건 이미 정해진 결과다.


그도 그에게 가까이 있던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



그는 늘 그랬듯이 숲 속에 숨어있는 작은 집으로 찾아갔다. 이른 아침은 아직 새벽의 냉기를 놓지 못했는지 차가웠지만 그를 반긴 것만큼 차갑진 않았다. 아침의 흔한 바람 한 점도 없는데 새벽도 아침도 만들어낸 게 아닌 냉기는 지독하게도 기어와 그의 발목부터 움켜잡으며 점점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까지 올라와 싸늘하게 식혔지만 가슴 속에서 날뛰는 불을 더욱 매섭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발치에는 늘 입에 담고 다니는 애칭이었던 딸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언젠가 아이에게 설명해줬던 달콤하고 새빨갛게 익은 딸기는 뭉개지고 흙투성이가 되어 풀들 사이로 제 미운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마치 현재 그의 마음처럼.


검은색이다. 무너져버렸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손잡이가 잡히는 문도, 집주인의 마음을 나타내듯이 천으로 가려져 있던 창문도, 그 문 너머에 있었을 모든 것도,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던 뒷마당도. 분명히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린 흔적들인데도 냉기가 머무르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지만 왜 재가 되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왜 불을 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그의 귓가를 맴돌며 눈앞을 어지럽힌다. 손을 들어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던 그는 순간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땅을 더듬으며 넘어지지 않게 버텼다. 그 아래에 숨어있던 딸기가 있었는지 물컹한 느낌이 그를 깨웠다. 그는 손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어디론가 멍하니 달려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던 곳.



*****



“뭐 이미 한 번 온데다가 보게 된 호수지만 밤에 보는 호수와 낮에 보는 호수는 다르네요. 앞으로 얼씬도 못하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 데려와주시다니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슴다~”


“막는다고 해도 자네가 안 올 사람은 아니잖나? 그동안 이 호수로 오지 않은 이유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 아닌가.”


“아뇨!아뇨! 흥미롭긴 매우 흥미롭슴다. 하지만 제가 뭘 할 수도 없는 곳이잖슴까?”


오직 당신의 기억만이 답을 쥐고 있을 뿐.


마법사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날 밤으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이 호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섣불리 말을 건네지 않았다. 다시 현실과 꿈의 경계로 눈을 돌린 마법사는 두 번째로 보여줬던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 로메루와 밸러니의 이야기를 알고 있나?”


“그거 모르면 마법사가 아니라 갑자기 땅에서 솟구친 흙 인형 아님까?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마녀들도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동화잖슴까.”


“그럼 그 결말도?”


“당연하죠. 하지만 쓴 사람마다 책마다 결말이 다르기로 유명한 터라 제가 본 책 외의 결말은 모름다. 다만 제일 처음 본 결말이 밸러니가 떠나는 로메루를 뒤늦게나마 따라가는 결말이었네요. 그 다음으로 보고 듣게 된 결말들은 꽤나 다양했던데 모든 책과 똑같이 로메루는 떠나고 밸러니는 여전히 제 고집으로 그 작은 숲 속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끝난 책도 있다고 하더군요.”


“고집...인가?”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로메루도 고집을 부린 거나 마찬가짐다. 아무래도 제가 읽고 들은 동화책들은 거의 마법사들 손을 탄 책이다 보니 자유를 추구하고 끝없는 여행을 떠난 마법사인 로메루를 중심으로 서술되다시피 했고 밸러니가 일방적으로 고집을 부리는 모습으로 나왔죠. 물론 공정하게 서술됐어도 마법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마법사잖슴까?”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아 이어갈 수 없었기에. 다만 이번에는 멍하니 호수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마법사는 품에 손을 집어넣더니 언제부터 가져왔는지 모를 익숙한 천을 꺼내 그대로 온 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둘렀다. 하늘하늘하며 부드러운 끝자락이 펄럭이며 거울 같은 호수의 바로 위로 뻗어가며 비춰진 하늘과 하나로 이어졌다.


“어울리나?”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져 보였다.


“...네, 어울립니다.”


아니, 어울린다는 말도 부족합니다.


덧붙여야할 뒷말은 나오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더 봐야했으니까. 굉장히 멀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그대로 마법사에게 다가가 껴안았다.


“좋아합니다.”


그는 그렇게 꽉 안은 채 속삭이기 바빴다. 가슴 속의 무언가가 올라오면서 그의 손에 힘을 실어줬다. 아아 여지가 있구나. 마법사는 그의 품에 있었다. 그렇게나 가까이 있었지만 마법사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정구가 빛을 내고 떠나가는 그를 향해 마법사가 말했다.



*****



“하..하하...”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와 다음 숨을 재촉하며 신음을 내질러야 했지만 나온 건 허탈한 웃음이었다. 호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커다란 거울처럼 깨끗했고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마법사가 정식으로 초대한 그 때처럼 호수에 비춰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제 커다란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늘과 호수를 구분하게 해주는 건 녹색, 그 색들을 올린 채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큰 나무들과 그 아래에서 색을 머금은 풀들. 하늘을 담은 호수를 구분하는 그 녹색의 풀들 위에 있어선 안 되는, 없었길 바라는 색이 있었다.


“하...하..”


그의 키에 맞게 길게 쭉 뻗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다리를 지탱하는 발이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녹색이 무릎에 뭉개지면서 사정없이 휘어잡았다. 언제나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은 부들부들 떨리며 아래로 내려가 호수 바로 앞에 있는 그 색으로 다가갔다.


“이게...대답입니까?”


잡았음에도 손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차가운 대답뿐만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손에 쥐어졌다. 무엇인지 일일이 설명하기엔 엉키고 섞이고 커져서 감당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는 지금 절대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현실이다. 


그 순간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을 툭 건드리고 간다. 푸른색이 그의 눈앞에 흔들린다.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그의 귓가를 맴돌며 눈앞을 어지럽힌다.


“안녕.”





prologue end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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