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마지막 날은 학생들의 날이나 다름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아리에 들어간 학생들의 날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행사를 열순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개인이 하는 데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었다. 동아리가 아닌 10명 이내의 소규모 학생들도 행사를 열었지만 동아리의 규모가 더 크고 지나가는 마녀들을 모으는데 더 유리하다는 건 당연했다. 취지는 후세대들의 발전을 기리기 위한 날이라고 하지만 마녀들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 갖는 이름에 대해 의아해했다. 첫째 날은 추억 둘째 날은 자유 그리고 다가온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의 이름은 바로 망각이다.
“축제날 이름을 짓는 기준은 다른 건 몰라도 이 마지막 날만큼은 모르겠어. 왜 망각인 거야?”
“그거야 이름 지은 어른들만 알겠지.”
행사를 시작하는 동아리부터 아직 준비 중인 동아리까지 둘러본 아니카는 늘상 나오는 퍼블리의 의문에 대답해주며 얼음을 갈아 넣은 포도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왜 망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아직까지도 왕궁 측에서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많은 마녀들이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축제가 시작된 순간부터 이름은 정해져 있었다고만 대답하니 대답을 받은 마녀들은 각자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다만 신빙성 없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어서 마녀들은 이젠 그러려니 했다. 물론 역사적인 부분에선 아직까지도 말이 많았다.
“딱히 축제 이름 기원 같은 건 알고 싶지 않고 오늘만큼은 제발 사고 안 쳤으면 좋겠다. 선생님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애들이 날뛰면 나도 오늘 뛰러 가야할지도 몰라.”
그 말에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부디 아니카가 바쁠 일이 없길 속으로 바라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른 아침인데도 축제를 즐기러 나온 마녀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팔찌는 뭐야?”
못 보던 거라며 덧붙인 아니카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팔찌를 바라봤다.
“어제 샀어. 어때?”
“장신구는 거슬려서 안 하던 애가 웬일이니?”
그에 퍼블리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팔찌를 쓰다듬었다.
“..엄마랑 짝으로 맞췄어.”
“너희 엄마 나오셨니?”
“어제 계속 내 옆에 있었는데?”
“근데 왜 나는 못 봤을까?”
“아마 엄마가 무슨 마법을 걸어서 그런가봐 그래서 그런지 지나가던 마녀들도 엄마를 못 봤어.”
그 말에 아니카는 잠깐 할 말을 잃었는지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정말 엄청난 실력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게 참 신기하네. 아니 실력자라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가?”
대단한 마법이라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아니카가 저렇게 말할 정도니 굉장하다 외엔 무슨 말을 더 붙여야할지 가늠이 안 되던 퍼블리는 깔끔하게 생각하던 걸 포기했다.
“근데 장식은 뭐야? 예쁘게 생겼네?”
아니카는 팔찌에 달린 얼음꽃무늬 돌조각을 보며 감탄했다. 그에 퍼블리는 어제의 일화를 신나게 얘기해줬고 자기는 무지개 구슬을 장신구로 달아줬다며 뿌듯해했다. 그러다가 어제 아난타를 만났을 때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는 또 까먹을까 얼른 얘기를 꺼내기 바빴다.
“어제 아난타 선생님이 엄마더러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지 않았냐고 했어! 엄마는 역시 그 때 참가자인 건 분명해!”
“나온 대답은?”
“어...지금 제 기억엔 없다고 했나?”
얘기를 들은 아니카는 정말 둘 다 어렵게도 말한다며 호호 웃으면서 작게 투덜댔다.
“그런데 오늘도 나오신대?”
“음...그건 모르겠어. 확답은 안줬는데...”
그래도 퍼블리의 눈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아마 어제처럼 찾아온 걸 보고 내심 오지 않을까 싶었던 터라 지금도 마음속으로는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퍼블리의 속내가 예상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아니카는 만약 안 나온다면 혹시라도 나중에 만나게 됐을 때 오랜만에 꺼내는 건 인사가 아니라 신랄한 비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퍼블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퍼블리의 기대에 맞는 말을 꺼낸다.
“나오겠지. 어제도 나왔었는데 오늘도 안 나오겠어?”
그에 퍼블리는 웃으며 아니카의 말을 받아들였다.
언제나 느끼는 냉기였지만 마법사에겐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냉기였다. 몸속의 모든 피를 얼려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에 절로 소름이 끼쳤다. 탐욕스럽게 손길을 뻗치던 냉기와 그에 얼어붙은 것들을 잘라내고 남은 건 하품할 때 나올까말까 하는 눈물 한 방울 보다 적었지만 얼마 안 가 발악하는 손길처럼 무지막지하게 부풀어 오를게 눈에 훤했다. 피곤한 기색으로 의자에 기대앉은 마법사가 아직 이른 아침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어느새 한낮이었다. 그에 헛웃음을 흘리며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10번 정도 숨을 고르게 쉬던 마법사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했다.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푹 눌러 쓴 마법사는 주머니를 살펴보다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대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이곳 마녀 왕국으로 오면서 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약 퍼블리였다면 문을 열었을 테고 비둘기 우체부는 창문에다 부리를 톡톡 두드리니까 말이다. 마법사는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살짝 숨을 몰아쉬자 어지럼증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한 번 감았다 뜬 눈에는 전에 없던 날카로운 빛이 담겼다. 눈에 담은 것과 비슷하게 손에서도 날카로운 빛이 반짝이며 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은 덕에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집안을 울려놓고 사라졌다. 문 너머에서 기다리던 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집안으로 들어왔다.
“저기...여기 퍼블리 학생의 집이 맞나요?”
들리는 목소리는 마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어제 만났던 아난타라는 마법사가 떠올랐지만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 과연 먼저 찾아온 자가 급하다는 게 맞는 건지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다시 말을 꺼낸 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어제 축제에서 만났던 아난타라고 합니다. 분명 저번에 퍼블리 학생한테 물어보길 여기가 집이라고 했는데...”
잠깐 그대로 있던 마법사는 한숨 쉬듯이 숨을 내쉬고는 문고리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문을 열자 동그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동그란 안경을 쓴 마법사가 제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고 있었다.
“역시 여긴 복작복작하네.”
돌직구를 던지는 광고를 내건 식물부는 작년 반딧불이꽃을 남긴 곳답게 행사가 아직 준비단계인데도 마녀들이 찾아와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다만 퍼블리에겐 선도부의 특권을 가진 아니카라는 친구가 있었다.
“올해는 무슨 식물일까?”
“글쎄다. 작년보다 훨씬 더 피곤해 보이던데 일단 작년보다 엄청난 걸 준비하고 있겠지.”
그렇게 대답하는 아니카는 별 감흥이 없어보였다. 작년에 식물부가 반딧불이꽃을 선보이며 하늘을 장식할 때도 아니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물론 반딧불이꽃이 그냥 빛만 반짝이며 흩뿌렸다면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도 없었고 마녀들도 그저 박수치는 데에 그쳤을 거다. 하지만 반딧불이꽃은 실제로 살아있는 것처럼 꽃잎을 움직이며 날아다닌다. 이게 반딧불이꽃이 인기 있는 이유다.
“그런데 작년엔 해질 때 선보였는데 이번엔 꽤 일찍 선보이려고 하네?”
아직 행사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고 낮이었다. 오후에서 저녁쯤에 넘어갈 때쯤 시작하려는지 준비시간이 생각보다 이른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리는 걸 보면 생각보다 돌직구 광고가 잘 먹혔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는 식물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그 틈새를 공략해 바로 옆 행사장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행사를 광고하면서 돌아다니고 있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있던 퍼블리도 어느샌가 물피리를 손에 쥐며 자리로 돌아왔다.
“동아리에 들어가서 느는 건 광고하고 마녀들 끌어오는 실력이 아닐까 싶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얻어 온 물피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 번 불어본 퍼블리는 물방울이 둥실 올라오자 톡톡 두드리기 바빴다. 아니카도 옆에 붙어서 두드리자 물방울들이 터지며 손가락을 적셨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던 둘은 아직도 시작하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할 것 같은 느낌에 결국 다시 일어섰다. 세군데 더 돌고 돌아왔을 쯤에야 시작을 하려는지 행사 준비를 하던 학생들이 달아놓은 베일 뒤로 모습을 감췄다. 퍼블리와 아니카가 자리를 찾아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를 가리던 베일이 마녀 한 명 나올 정도로 살짝 걷혀졌다.
“모두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사회자 역할을 맡은 학생이 그 사이로 나와 혀 아래에 음성 증폭마법이 걸려 있는 구슬을 굴리며 외쳤다. 그리고는 다양한 마법들을 선보이며 무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마법들이 빛을 반짝이면서 아직 걷혀지지 않은 베일을 쓸어가며 베일 너머에 가려져 있는 것들을 까맣게 비추고는 바로 손을 떼버리면서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준비한 건 과연 무엇일까요? 맞추는 분들껜 저희가 준비한 상품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손에 마법도구 상점의 도구 교환권을 쥐며 들어올리자 앉아있던 많은 마녀들이 저마다 크게 목소리를 높여 알고 있는 식물 이름들을 외치거나 다른 물건이나 벌레들에 식물이름을 합쳐 부르기 시작했다. 5분정도 들어주던 사회자는 웃으면서 모두 다 틀렸다고 외치며 그 이후로 나오는 대답들을 잘라냈다.
“아아~ 우리가 식물부라고 식물 이름만 얘기하다니 너무 단순하게들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우리의 이름이 식물부인 이상 절대 바뀌지 않겠네요!”
그렇게 외치고는 관객들을 쭉 훑어보던 사회자는 대뜸 말했다.
“혹시 혈액특성이론 배운 학생들?”
그에 퍼블리를 포함해 학년이 같았을 학생들이 어깨를 들썩였다. 모를 수가 있나 시험을 쪽지시험으로 때운 것도 모자라 시험기간을 일주일로 팍 줄여놓은 선생의 과목으로 유명한데.
“오늘 우리가 보여줄 건 그 혈액특성이론도 포함해서 만든 물건이에요. 모두들 색들이 다 똑같은 색은 아니라는 거 아시죠? 빨간색이라고 해도 사과의 빨간색이랑 피의 빨간색은 다르죠. 그리고 사과들마다 빨간색이 짙냐 옅냐의 차이도 있고요. 그래서 우리는 혹시 장미도 모두 빨간색이지만 다 다르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 말에 관객들 중 일부가 설마라는 얼굴로 사회자를 올려다봤지만 사회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물론 그렇다고 장미를 연구할 순 없죠!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나쁜 일인데요! 그래서 우리는 보호자분들과 장미 정원으로 안내해주시는 왕궁 마녀분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러자 모두 그렇다고 대답해줬어요! 여러분들은 자기가 태어난 장미의 색이 얼마나 짙고 옅은가 아니면 밝게 예쁜가 어둡게 예쁜가가 궁금하지 않나요? 그런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장미색 맞추기 종이!”
베일이 완전히 걷히고 베일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연한 회색 종이뭉치를 들고 무대 밖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각자 앞에 있는 줄로 가 종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쓰는 방법은 간단해요. 피를 그 종이에다 묻히면 본인이 태어났던 장미의 색이 나온답니다! 피니까 당연히 빨갛게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래 놔둬보세요. 원래 피는 시간이 지나면 굳어서 갈색으로 변하지만 그 종이에 묻은 피는 장미색으로 변한 이후로 절대 변하지 않아요!”
그에 관객들은 반신반의 하면서 종이 모서리에 새끼손가락을 대며 살짝 베어내곤 종이에 피를 묻혔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일행들과 나란히 들어 비교하던 마녀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종이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종이를 들고만 있던 아니카도 피를 묻혀 종이를 지켜봤다. 그런데 아니카의 종이는 다른 마녀들과는 달리 핏자국이 점점 작아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장미에서 태어나지 않은 마녀라서 그런지 빨간색은커녕 핏자국도 안 남고 사라지네?”
그렇게 말한 아니카는 퍼블리를 돌아봤는데 퍼블리는 자신의 종이를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아니카가 다가서서 퍼블리의 종이를 바라보자
“...파란색?”
퍼블리만큼 당황한 아니카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봤다. 다행히 주위의 마녀들은 전부 제 걸 확인하느라 바쁜지 둘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카는 종이에서 눈을 못 떼는 퍼블리의 손을 잡고 유유히 행사장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분수대까지 걷는데도 퍼블리는 여전히 종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수대에 털썩 앉은 퍼블리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을 꺼낸다.
“왜 파란색이지?”
“...그건 나도 궁금해.”
종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아니카는 제가 가지고 있는 종이를 건넸다. 하지만 그 종이에서도 똑같이 핏자국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아니카 혹시 파란장미 본적 있어?”
“파란장미는 물론이고 그냥 장미도 영상구나 사진에 담긴 거 외엔 못 봤어. 애초에 장미 보기가 그렇게 쉬울 리가 없잖니?”
그럼 대체 이 종이에 나타난 색은 뭐란 말인가. 물론 퍼블리도 제 태생이 평범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이건 지금까지 해왔던 온갖 상상을 뛰어넘었다. 다른 색 장미라니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건 엄마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어.”
“...뭔가 엄청난 비밀을 듣게 될 것 같지만....혹시 알아내는데 성공하면 나한테도 알려줘.”
퍼블리는 파란색으로 변한 부분을 쓸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날 이후로 그 전날의 순간들을 전부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떠올렸습니다. 가만히 앉아있을 때도 바쁘게 일을 했을 때도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나타나 한동안 꿈이 달콤한 현실인지 아니면 현실이 차가운 악몽인지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구분하는 방법은 쉽더군요. 꿈에서는 고통이 없고 현실에서는 고통이 있었으니까 현실을 인지하는 건 금방이었고 저는 꿈으로 도망치고 싶었지요. 꿈이 현실이 되길 바랐습니다. 물론 현실은 그런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으니 제가 이렇게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런 현실을 부수는 방법은 있었죠, 단지 막막했을 뿐. 하지만 결국엔 저는 성공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찾아냈으니까요.
해는 이미 지고 있었고 마법사는 마지막 축제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퍼블리를 사로잡고 있는 건 실망감이 아닌 긴장과 초조함이었다. 긴장이 발목에 들러붙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있는지 돌아가는 길이 제법 길게 느껴졌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퍼블리는 심호흡을 하며 문고리에 댄 손을 돌릴까 말까 10분 째 고민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5분을 더했을 때 쯤에야 용기를 냈다.
“다..다녀왔습니다!”
떨리는 제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눈을 또르륵 굴리고는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은커녕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집안에 이상함을 느낀 퍼블리가 마법사의 방으로 다가갔다. 늘 닫혀있었던 방문은 오늘만큼은 열려있었는데 외출 준비를 했었는지 외투걸이에 늘 밖으로 나올 때마다 두르던 망토와 모자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부엌이나 화장실에도 가봤지만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갔다가 엇갈렸나?”
문 밖에서 긴장하고 있던 게 무색해지자 허탈한 기분에 부엌으로 식탁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퍼블리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바구니를 발견했다. 아까 미처 못 보고 넘어간 터라 퍼블리는 깜짝 놀랐다가 다시 진정하고 바구니를 살펴봤다. 어딘가 익숙한 과일 향에 바구니를 덮은 하얀 천을 들춰보니 안에는 딸기가 가득 들어있었다.
“웬 딸기?”
예상치 못한 내용물에 당황한 퍼블리가 딸기 하나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혹시라도 상하거나 마법이 걸린 건 아닌가 싶었지만 상한 부분은 없었고 마법에 걸려있는 건 본인의 탐지마법으론 한계가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딸기바구니를 미심쩍게 보던 퍼블리는 마법사가 보존 마법을 잔뜩 걸어놓은 빵바구니들 옆에 뒀다. 마법이 걸려있는 물건 옆에 다른 물건을 놓으면 마력이 옮겨가 같은 마법이 걸린다는 얘기를 마법사한테 들은 적이 있어 갖다놓은 거였다. 저녁은 역시 빵으로 때울까 싶었지만 축제를 돌아다니느라 이것저것 먹은 게 있어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 다시 의자에 가서 앉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던 퍼블리는 마법사가 돌아오면 어떤 식으로 물어봐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한동안 머리를 붙잡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은 어느새 늘 잠들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물론 늦게까지 행사를 하는 데가 있긴 있었지만 마법사가 늦게까지 축제를 즐길 성격은 아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퍼블리는 고개를 저으며 몰아냈다고 생각한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마법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