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가 내 추측일세.”

하하...추측이 아니라 확신 아닌가요?”
확실하지 않은 확신은 추측보다 못하니 아직은 추측으로 하겠네.”
축하합니다~ 확실한 사실임다. 퍼블리를 데려와서 인질로 삼으면 처음 깼을 때보다 더하셨겠죠.”

어쩌면 저는 물론이고 당신마저 죽을 생각으로....

목이 마르다며 은근슬쩍 마법사가 마시던 컵으로 손을 뻗지만 컵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건 역시 마시고 있던 마법사였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따끔한 손등을 쥐고선 아야하고 아픈 건 싫다며 징징거리는 소리를 내보지만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 컵이 피처럼 물을 주르륵 내뱉으며 여기저기 파편을 튀기자 더 이상 했다간 단순히 아야하는 수준으로 아프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는지 조용해졌다. 물론 그마저도 오래가진 않았다. 무언가 나른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법사를 바라보던 치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선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마법사를 눈에 담았다. 평소라면 자꾸 보면 제 얼굴이 닳으니 먼저 네 눈을 닳게 해주겠다며 눈을 향해 공격을 날렸을 마법사는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더 짙게 웃음을 머금은 치트가 입을 열었다.

아아 그렇게 바라보니 뭐라도 주고 싶잖슴까~ , 어차피 오늘은 목소리도 많이 들었으니 소식 하나라도 드릴까 생각했으니 앞으로도 많이 목소리 좀 들려주십쇼~ 하지만 너무 많이 주면 탈날 테니 지금 간절하실 소식 하나만 드리겠슴다?”

이번엔 조금 더 오래 눈을 감다가 뜬 그가 밝은 어투로 말한다.

퍼블리는 지금 신성지대로 가고 있답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마법사의 얼굴은 밝음이랑 거리가 멀어졌다.

그게 무슨...!!”
워워 진정하십쇼.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된 와중이지만 걱정할 일은 없슴다. 제가 다 조치를 취해놨으니 이제 앞서 말씀한 것들은 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 됐으니 당신은 계속 여기에 머무르게 될겁니다. 기쁘지 않은가요? 전 매우 기쁜데.”

“...퍼블리가, 대체, , 신성지대로, 가는, 거지?”

뿌득 이가는 소리와 함께 살벌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둘이 있는 공간을 차갑게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정작 집중적으로 그 냉기를 받게 된 당사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답한다.

글쎄 저야 우리 패치 마음도 쉽게 알 수 없는데 퍼블리 마음을 어떻게 알겠슴까? 이렇게 제게 묻는 당신도 몰라서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도 아니고 애기 때 봤을 뿐인 저는 당연히 아무것도 모름다.”
그런 대답에도 분위기를 잡아 내리는 냉기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워졌지만 우습게도 여기서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냉기를 넘어서 살기까지 내뿜는 마법사를 사랑스럽게 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게도 정말 바쁜 와중에 잠깐 보러 온 거라 가봐야 함다. 물론 곁에 있어달라고 하시면 일이고 다 때려치고 곁에 꼭 붙어있을 생각임다~”
그에 마법사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섰다. 설마 진짜 제 말대로 할 건가 싶어서 놀람 조금과 기대 대부분인 눈빛으로 마법사를 바라봤지만 곧이어 의자를 쥐는 모습에 잽싸게 움직여 떠났다. 그렇게 도망치는 모습을 눈만 굴려 보고 있던 마법사는 의자에 다시 앉고는 눈을 감았다. 톡톡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다가 다시 눈을 뜬 마법사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입을 열었다.

조치라던지, 왕국 내에서 넓게 행사할 수 있다라는 말을 봤을 때 왕궁 마녀 중에 녀석이 심어놓은 첩자가 있다는 건 확실하군.”
아무런 표정 없이 생각을 고르고 건져 올리는 모습이 방금 전까지 살기를 내뿜던 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했다. 마법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오히려 퍼블리가 왕국 밖을 나온 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퍼블리의 뒤를 밟을 자를 붙여놨겠지만 왕국 내에서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마녀가 더 위험한 법이니까. 뒤를 밟고 있을 자도 신성지대에 들어가면 행동에 제약이 걸리니 더 안전하겠지만...신성지대 자체가 문제군.”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창 밖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마법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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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질 다 끝났습니다.”

문을 열자 쉼터의 주인이 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 안엔 퍼블리가 잡아왔던 토끼가 육포로 손질되어 담겨 있었다. 감사하다며 받아든 퍼블리는 아직 저를 보고 있는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실례했다며 다시 손님을 마주하는 자리로 물러나는 모습에 퍼블리는 그저 약간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지금까지 마을들을 거치면서 비슷한 반응을 많이 받아왔는데 저 정도는 매우 괜찮은 축에 속한 편이었다. 가끔가다 지나가던 마법사들이 퍼블리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당연히 그런 반응들을 접하게 된 퍼블리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라는 생각을 하며 쉼터의 방마다 있는 거울이나 꽝꽝 언 물웅덩이 위로 얼굴을 비추고 더듬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유를 알게 됐는데 어느 날은 지나가던 마법사 하나가 대놓고 퍼블리를 쳐다보는 걸 넘어서 가까이 다가와 신기하네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그에 퍼블리가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다가온 마법사가 먼저 물었다.

당신은 마법사예요, 마녀예요?”
마녀라고 대답하자 물어봤으면서도 놀라면서 당황스러워서 굳어있던 퍼블리도 실례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리저리 훑어보고 간 이상한 마법사 이후로 지나가던 마법사들이나 쉼터의 주인들이 마법사인지 마녀인지 물었고 퍼블리는 계속 마녀라고 대답하다가 어느 순간 마법사라고 대답하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해 마법사라고 대답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면 그제야 궁금증이 풀린 얼굴로 실례했다며 물러가는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쉼터의 주인들은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지만 한차례 이미 실례를 저질렀고 남에 대해 캐묻는 건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물러났다. 그 반응들은 퍼블리가 천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주로 여행하는 마녀들이 계산하는 방식이었기에 나온 반응이었지만 마법사 중에서도 그렇게 계산하는 자들이 있으니 사실은 마녀가 아닌가라고 의문을 품는 건 본인들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이상한 생각이었다. 설령 사실은 마녀라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쨌든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나를 마법사로 보고 있다는 건데...”

사실 마녀와 마법사는 딱 봐도 구분이 가능했다. 비유를 하자면 눈앞에 있는 게 흰 고양이냐 검은 강아지냐 구분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게 마녀와 마법사인데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는 마법사들이 저를 마녀인지 마법사인지 구분을 못하니 당연히 당사자인 퍼블리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떠오른 게 마법사인 제 아빠와 마녀왕국 밖에서 살았던 기억이었으니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버렸다. 일단 지금 퍼블리의 목표는 신성지대로 돌아간 아난타를 찾아가는 거였기 때문에 다시 고개를 들어 올라오는 궁금한 것들은 아빠인 마법사를 찾았을 때의 몫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잘라낸 퍼블리는 육포가 담긴 주머니를 제 짐 속에 넣어놓고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혼자 남아버렸어.

나를 두고 어디로 가버린 거니?

나는 계속 여기에서 기다렸어.

너를 기다렸어.

하지만 너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나는 지금까지 남아있었지.

 

마법사가 눈을 뜬 건 이틀하고도 여섯 시간이 지나서였다. 오래 누워있던 터라 멍한 기분이 한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놔주지 않았다. 고개만 돌려 주위를 돌아보자 방 안엔 누워있는 저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마법사는 발을 조심스럽게 방바닥으로 내려놨지만 힘을 주기엔 또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일어서자 몸이 휘청거리며 몇 번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았지만 계속해서 일어서려고 시도한 덕분에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을 짚은 손이 점점 벽에서 물러나자 그에 맞춰 마법사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방문을 여는 순간 얄미운 얼굴과 말투가 눈앞에서 잠깐 반짝이듯 떠오르며 사라졌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곁에 없는 그는 마법사도 익히 잘 아는 자였다. 밤이었을지 달이었을지 아님 호수였을지 모를 것에 취해 달이 환하게 뜬 밤, 호수 앞에서 제 이름과 그의 이름을 서로에게 건넸던 상대. 치트. 그게 바로 저를 납치해온 그의 정체였다. 물론 납치당할 때 가만히 있었던 마법사가 아니었다. 다만 정말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도 그럴게 마법사는 비록 본인 의지로 행한 상황이었지만 마력이 상당히 줄어 있는 상태였고 바로 그 때 치트가 납치하러 들이닥치는 바람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최대한의 저항 결과 집에 들이닥친 납치범의 오른팔을 부러뜨리고 왼팔을 탈골상태로 만들어놨지만 결국 정신을 잃은 건 본인이었다. 하지만 양 팔을 쉽게 쓸 수 없게 된 터라 기절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데려갈 순 없었던 치트는 곧바로 지원을 불렀고 안경을 벗고 검은 머리카락이 다시 빨갛게 변하면서 욕을 머금게 된 아난타가 한동안 치트를 놀려댔었다. 물론 이건 마법사가 모르는 뒷이야기였다.

겨우겨우 방에서 나온 마법사는 부엌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기분 나쁘다는 게 여실한 눈빛으로 쭉 주변을 훑어봤지만 머리만 아파왔는지 꾹꾹 눈썹 위를 문질렀다. 이 집은 비슷하다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아예 태우기 전 그대로 남겨둔 건가 생각할 정도로 마녀왕국으로 떠나기 전에 지냈던 집과 똑같았다. 단순히 집 구조가 아닌 물건들도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았는데 등받이에 자주 기대느라 조금 휘어진, 지금 앉은 의자가 바로 그 예다. 그렇게 쓰러지고 처음 이 꺼림칙하고 싫은 집에서 눈을 떴을 때 마법사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곁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던 그 얼굴은 울면서도 웃고 있었고 슬프면서도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부들부들 떨며 뺨을 쓰다듬던 손은 마치 손끝에 있는 게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하려고 더듬는 눈먼 자의 손짓 같았다. 곧이어 잠겨있으면서도 희열에 차 들뜬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었다.

왜 저를 떠난 겁니까? 아니, 이젠 이유 따윈 상관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찾아냈고 이렇게 제 눈에 보이고 제 손에 닿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왔으니까 물을 필요도 없겠죠. 당신은 이제 절대 여기를, 나를 떠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제 얼굴 위로 고개를 숙이는 치트를 향해 박치기를 한 마법사는 그대로 목을 눌러 제압하려고 했지만 팔을 붙잡아 그대로 침대 위로 내리 누르는 그의 힘은 강한 걸 넘어서 절대 놓지 않겠다는 엄청난 집착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힘이 빠질 정도였다. 눈을 마주했을 때도 뚝뚝 떨어진다고 생각할 정도로 넘쳐흐르는 그 감정은 마법사가 질려서 순간 움직인다는 걸 잊어버릴 만큼 농도 짙고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 마법사는 안 보이면 마음도 식어버릴 거라고 생각한 제가 안일한 건지, 저렇게까지 마음을 붙들다 못해 집착을 덕지덕지 붙인 그가 비정상인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결론은 둘 다였다. 기억속의 시간을 거슬러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더듬던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해봤자 이 상황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고 지금 혼자 남아있을 퍼블리가 걱정이었다. 이렇게 저 혼자 있을 때 탈출시도를 한 때가 꽤 있었지만 문고리를 잡자마자 정신을 잃는 상황이라 아예 마법을 날려보려 했지만 몸에서 나온 마력이 일그러지며 흩어지기 일쑤였고 이곳이 과연 어떤 곳인지 주위의 마력과 제가 마녀왕국에서 걸어놓은 마법들을 탐지해봤지만 탐지만 가능했지 느껴지는 방향은 매번 탐지할 때마다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모든 탈출시도를 막아놓은 것처럼 철저하게 지어진 이 집은 마녀왕국이나 신성지대의 감옥보다 더 견고하고 철저할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는 것이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뜰 때마다 찌뿌둥한 수준이 아니라 한동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는 점에서 자고 있을 때 시간이 흐르는 건 단순히 하루 수준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어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마법사가 그동안 정신을 잃은 횟수가 꽤 됐다. 그에 마법사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건 왕국 내의 집에서 걸어뒀던 마법을 천천히 풀어 남은 마력량을 탐지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아내는 거였다. 우선 첫 번째는 방 안에 잠가뒀던 서랍이었다.

“....결국 뒷마당에 걸어둔 마법까지 풀어버리게 됐군.”
식품에 걸어둔 보존 마법을 제외하면 마법사가 집에 걸어놨던 거의 대부분의 마법을 풀어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사실 뒷마당의 마법은 풀어놓을 생각이 없었지만 풀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 들어 컵에 물을 따라 조금 마셨다. 아직 물이 남은 컵을 탁자 위에 툭툭 두 번 두드려보고는 찰랑거리는 물들을 빤히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계의 짧은 바늘이 두 번 정도 돌았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셨슴까?”

눈을 뜨자 문이 열린 소리가 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제 옆에 와서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에 혀를 차며 다시 눈을 감아버리자 들려오는 말이

그대로 키스해달라고 눈 감으신 검까?”

마법사는 조용히 물이 든 컵을 들어올렸다. 물을 뿌리려나 싶어서 당신이 마시던 물이라서 달다고 놀려줄 말을 준비했던 치트는 컵 째로 던지려는 손동작에 꺼내려던 말을 삼키고 잽싸게 마법사의 손목을 잡았다.

아무리 저라도 그걸 맞으면 아픔다?”
아프라고 던지지 안 아프라고 던지나? 아니 그래, 자네 말대로 아프지 않게 바로 죽길 바라며 던지면 되겠군.”
에헤이~ 그건 더 안 됩니다~”
컵 내려놓게 좀 놓으라는 말에 놓기는커녕 팔목과 손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기어이 다른 손까지 들어 올리게 만들자 그제야 놓는 모습이 얄미워 발로 잽싸게 정강이를 걷어차자 과장스럽게 맞은 데를 부여잡고 아파하며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앉는다.

그나저나 의외입니다?”
뭐가 말인가.”

지금까지 퍼블리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셨잖슴까?”

그 말에 눈을 살짝 찌푸린 마법사는 덤덤하게 말을 꺼낸다.

자네가 퍼블리한테 손도 대지 않은 걸 알고 있으니까?”

이런 쪽으로 저를 믿어주시는 검까? 감동임다~”

만약 퍼블리를 붙잡아 인질로 썼다면 내가 여기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퍼블리를 언급했겠지.”

그 말에 치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 후에 잡아왔을지 어떻게 알고요?”
그렇다면 잡아온 그 때 자네는 운을 뗐겠지. 이번에 나를 잡아온 자네의 방식을 봤을 때 자네는 매우 철저하니 섣불리 퍼블리에게 손을 댈 수도 없고 손을 대서도 안 되는데다가 자네는 지금 손 댈 생각도 없잖나. 손을 댈 수 없고 안 되는 이유는 퍼블리가 마녀왕국 내의 학생이니 학기 중에 사라지면 상당히 곤란해지지. 학교 측에서 퍼블리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거고 왕궁에서 실종된 학생을 찾는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조사대를 파견하면 퍼블리가 왕국 내에서 사라진 걸 알게 될 테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마녀는 보호자의 동의나 같이 동행하지 않는 이상 왕국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말일세.”

하지만 보호자도 같이 없는 상황이니 함께 손잡고 왕국 밖으로 나갔을 거라 추측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을까요?”
마녀들은 왕국 밖으로 나갈 때 검문소를 방문해서 밖으로 나간다는 임시 확인서를 작성하고 나가는 게 법이잖나. 게다가 대체 어느 마녀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제 아이를, 그것도 학기 중에 밖으로 데리고 나간단 말인가?”

그에 치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받았다.

, 확실히 그렇게 되면 조사대가 더 넓게 움직이긴 하겠지만 그건 그들만이 피곤하고 저는 별 문제 없슴다? 우리 패치도 방금 말했다시피 전 매우 철저하다고요? 그럴 능력도 되는 걸 넘어서 뛰어나고 마녀 왕국 내에서도 그랬듯이 넓게 행사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슴다.”

물론 그건 자네 얘기고 난 아직 내 얘기 중이었네만?”
무슨 소린지 의아해하는 눈빛을 받고서도 마법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물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어간다.

자네가 자네 능력 자부하듯이 나도 내 능력 좋다고 말할 수 있네. 자네가 찾아오던 그 집을 태우고 떠난 그 날부터 자네가 나를 납치해오던 날까지 마녀 왕국에서 마법사인 걸 들키지 않고 살아왔잖나. 거기다가 퍼블리를 다른 마녀들처럼 학교에 보낼 정도로 자연스럽게 살아왔지.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왕국 내의 탄생 기록은 손댈 수 없었네. 그 탄생기록은 장미정원에서 태어난 마녀들뿐만 아니라 결혼한 마녀들, 심지어 마법사와 결혼해 왕국을 떠난 마녀들의 아이가 마녀일 경우 기록하게 하는 대단한 기록일세. 내가 현 거주자들의 기록을 겨우 꼬고 가려서 이름을 등록해 살아온 처지니 말 다한 거나 다름없지. 가려진 걸 치우고 정리만 해놓는다면 왕궁은 내가 그 어디에도 속한 마녀가 아니란 걸 알아낼 테고.”
마법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치트를 바라봤다.

굳이 뒷말도 길게 덧붙여야하나?”
아뇨~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돼도 딱히 제가 걱정할 일은 아님다. 전 우리 패치가 저를 떠나는 게 걱정될 뿐.”

그럼 역시 손댈 생각이 없는 쪽이군. 비록 길게 말하긴 했지만 떠본 걸세. 자네 반응을 보아하니 딱히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을뿐더러 날 잡는데 혈안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퍼블리를 건드려봤자 자네에게 이득은 없으니까. 건드려봤자 나한테 더 반감을 사겠고 그에 맞춰 나는 내 몸도 신경 안 쓰고 날뛸 테니까 말일세.”

그에 치트는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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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전서구가 어떻게 찾냐면서 툴툴대긴 했어도 편지를 전달하러 온 이유는 퍼블리의 발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지대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 게 바로 전서구였고 전서구는 그 길을 따라 퍼블리를 찾으러 온 거였다. 다만 어디 길을 밟는지 안다고 해도 받는 자가 움직이는 데 그에 맞춰 찾아야하는 수고를 들이는 건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 퍼블리는 전서구에게 신성지대로 데려다달라고 했지만 전서구는 편지를 배달하는 작은 비둘기들이라면 모를까, 비둘기 우체부 대표라는 입장 때문에 다짜고짜 아무런 연락 없이 신성지대 땅을 밟는 건 예의가 아닌데다가 마녀왕국 측에 아무 말도 않고 신성지대로 가게 되면 꽤나 일이 복잡해진다고 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 둘의정치때문이었고 퍼블리는 실감은 못하지만 막연히 알고 있었기에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타협한 끝에 신성지대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걸로 마무리 됐다. 나름대로 안전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길을 가르쳐준 전서구가 바랐던 방향은 어른이 되기 전까진 왕국에서 나가는 걸 포기하거나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해 나가는 거였지만

아이고 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 보게!!”
어느 날 편지를 들고 찾아온 아니카에게 정황을 듣고 처음으로 퍼블리에게 편지배달을 하게 된 전서구가 알려준 길을 따라 가는 퍼블리를 찾아낸 후 부리로 머리를 마구 쪼아대며 외친 말이었다.

그 때 전서구가 예상치 못한 건 마법사가 은둔하다시피 지낸 덕에 일어난, 협소하다 못해 아예 없다시피 한 왕국내의 인맥과 퍼블리의 행동력 및 체력이었다.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학교까지 다니고 있던 어린 마녀가 혼자 나갈리 없다는 건 왕국내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물론 몇몇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보호자인 어른들과 법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왕국 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나고 일주일 후 왕국 마녀에 의해 보호자의 동의나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왕국을 나갈 수 없는 마법에 걸리게 된다. 당연하게도 왕국 내에서 태어나지 않은 퍼블리는 그 마법이 걸려있지 않았고 퍼블리가 사라졌다고 외치고 다닐 보호자도 없었다. 더군다나 유일하게 퍼블리의 행방에 의문을 품을 학교는 모든 수업이 끝나있어서 방학상태였고 이렇게 전서구가 또 편지를 배달하게 된 지금에서야 다시 수업들이 시작됐다. 본인이 알려준 길이지만 꽤 시간이 걸리는 터라 왕국 내에서만 지내던 어린 마녀는 가던 도중 지칠 법도 했지만 퍼블리의 체력은 마법사는 물론 주위의 선생이나 학생들이 인정할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비록 겨울이 끝나고 봄의 시작도 지나 한창 꽃가루가 눈과 코를 간지럽힐 때가 됐지만 퍼블리는 그 긴 여행에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기운 넘쳐 보인다면서 신기해하던 전서구의 증언도 있었다. 어리둥절한 전서구의 얼굴을 떠올리던 퍼블리는 조금 웃고는 계속 발을 움직였다. 그림자가 조금 더 길어졌을 즈음에 쉬어갈 마을을 발견했다. 어렸을 땐 몰랐지만 마법사들이 사는 마을은 마녀왕국과 많이 다른 점이 있었다. 마을에 들어선 퍼블리는 하루 묵을 쉼터를 찾아 들어갔다.

하루랑 손질이요. 남은 건 신성지대 돈으로 주세요.”

그렇게 말한 퍼블리는 오는 길에 잡은 토끼와 두툼한 천들을 건넸다. 쉼터의 주인은 힐끗 보더니 열쇠 하나와 꽤나 정교한 세공을 한 흰 동전 두 개와 금칠을 한 동전 다섯 개를 꺼내 건넸다. 받아든 퍼블리는 열쇠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새겨져있는 방문을 찾아 열쇠를 꽂아 돌리고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눈에 보이는 침대 위로 몸을 던진 퍼블리는 신성지대의 화폐들을 손에 올려놓고 살펴봤다. 다른 손으론 가지고 있던 마녀왕국 화폐들을 꺼내 서로 비교해봤다. 마녀왕국의 화폐엔 누구나 다 아는 장미 모양으로 세공이 되어있었고 신성지대 화폐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작대기 두 개를 교차해서 놓은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이 사는 마을은 신성지대와 달리 대부분 소규모인 터라 거래는 주로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화폐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맨 처음 들리게 된 마을에서 퍼블리가 어찌해야할지 몰라 쩔쩔매자 가만히 보고 있던 마을의 대표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마녀왕국과 가까운 마을들은 마녀왕국 화폐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아서 마녀왕국 화폐로 거래가 가능하지만 신성지대와 가까운 마을들은 신성지대 화폐를 가지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다고 했고 그 중간에 있는 마을들은 대부분 물물교환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마을엔 여행 나온 마녀들이 마녀왕국 화폐를 많이 쓰고 개서 짐 속에 넣기 쉬운 천들로 바꾼다고 설명해줬다. 작은 마을에선 은근히 천을 만들기가 번거롭고 힘든 덕에 물물교환 할 때 가장 반기는 물건이라고 덧붙이는 말에 퍼블리는 가지고 있던 돈 일부를 제외하고 천으로 바꿨다. 그렇게 여행하면서 천의 가치가 더 높아 곤란할 땐 다른 물건들을 더 받거나 중간에 잡아온 동물이나 먹을 수 있는 열매, 풀들을 건네 육포나 건조과일로 손질해주거나 요리하는 값으로 때우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신성지대니 가지고 있던 천들을 전부 신성지대 화폐로 바꿨다. 화폐들을 전부 주머니에 넣은 퍼블리는 목에 걸려있는 줄을 잡아 당겨 올리고는 그에 옷 속에서 딸려 나온 줄에 달린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 든 파란장미꽃잎이 잡아당기는 손길에 맞춰 흔들렸다. 유리병엔 매우 강한 보호마법이 걸려있었다. 맨 처음 유리병에 묶어 놓은 줄이 끊어져버려 돌 위로 떨어질 때 깨진 건 유리병이 아니라 돌이었으니 그 효과는 자연스럽게 입증해버렸고 또다시 보게 된 마법사의 엄청난 마법에 할 말을 잃었다. 더 튼튼한 줄을 사서 유리병을 줄에 묶은 이후 퍼블리는 유리병을 이름 그대로인 유리병처럼 대하진 않았다. 깨질까봐 조심조심 다니던 걸 그만둔 이후론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한동안 유리병을 살살 흔들어 그에 맞춰 흔들리는 장미꽃잎을 지켜보던 퍼블리가 유리병을 꼭 쥐고 제 품으로 끌어안은 후 눈을 감았다. 마법사와 결혼한 마녀는 없었고 마법사는 아빠인 동시에 엄마이기도 하면서 하나뿐인 보호자였다. 사실 퍼블리는 마법사가 사라지고 사흘이 지났을 때 그동안 제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지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마법사에게 무언가 묻기 전부터 상상해오던 이 두려움의 정체는 마법사가 저를 두고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일이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를 이 두려움의 원인을 알게 된 건 마법사에게 옛날에 마법사에게 구애하던 자에 대해 떠올렸을 때였다.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진 않았지만 행동은 흐리지만 얼굴에 비해 세세하게 기억날 정도로 마법사에게 달라붙었던 자. 막연한 얄미움이 기억으로도 느껴졌었지만 되짚어서 생각해보면 곁에 있던 저도 기억에 남을 만큼 열심히 들이댔던 자였다는 거였고 그만큼 끈질기게 마법사에게 달라붙어 인연을 이룬 대단한 자였다. 하지만

끝냈어.”
그 집을 떠난 그 날. 내가 끝냈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퍼블리는 눈을 뜨며 쥐고 있던 유리병을 다시 제 옷 안으로 집어넣고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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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구가 고래고래 소리 지른 보람이 있었다. 결국엔 퍼블리를 찾아내서 땅 아래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날개에 쥐날 것 같다며 투덜거리는 전서구를 뒤로하고 다리에 묶여있는 편지를 풀어 소중히 쥐면서 읽었다.

 

우리 근육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지?

그래도 너무 열심히 뛰진 마. 그러다가 어디 부딪히거나 힘 빠져서 나중엔 뛰고 싶어도 못 뛰게 될지 모르니까 말야. 그리고 넌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에 이런 말이나 적고 못됐다고 입이나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겠지, 이 언니가 다 알고 있단다? 마음 같아선 좀 더 놀려주고 싶고 소소한 안부 묻기나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급한 것 같아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난 네가 떠난 날 이후로 계속 너희 집에 찾아가고 있어, 물론 열쇠는 네가 갖고 있으니까 들어갈 순 없지만 혹시 누가 찾아왔을지도 몰라서 늘 찾아가고 있어. 네가 뿌린 전단을 보고 찾았다거나 본 적이 있다고 하는 마녀가 있을 수도 있고 비둘기 우체부가 찾아왔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까지는 나 외엔 누가 찾아온 흔적도 없었어, 그런데 문제는 너희 집 자체야. 처음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희 집에서 냉기가 감돌고 있어. 그동안은 겨울이라서 잘 못 느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이제 봄이고 따뜻해진지 오래지, 겨울이 봄에 피는 꽃을 시기해 다시 손을 뻗는 날도 지나갔어. 그런데도 너희 집은 냉기가 돌고 있고 이건 겨울 냉기라고 하기엔 애매해. 냉기는 냉긴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냉기라고 해야 하나? 이상했지만 들어갈 순 없으니 그냥 너희 집을 빙 둘러보다가 이상한 데를 발견했어. 분명 너희 집 바로 뒤는 바위로 막혀있어서 공간이 없었는데 바위가 사라져있었어. 거기로 다가가 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고. 그 공간이 나를 밀어내는 느낌이야. 그래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어서 지금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 너희 아빠가 숨겨놓은 뒷마당 같은데 여기에 뭔가 단서가 있을 것 같아. 언제 한 번 마녀왕국 다시 들르러 올 때 너도 확인해봐. 물론 그 전에 내 얼굴 보러오는 건 까먹지 말고. 안 그럼 다음 편지엔 무슨 말이 적힐지 나도 몰라~?

 

편지를 다 읽은 퍼블리는 귓가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내용에 살짝 웃다가 본론으로 들어간 내용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냉기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그동안 마법사가 꽁꽁 싸매듯이 입던 옷차림이 떠올랐지만 다음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 바로 상상을 덮어두고 마저 읽었다. 숨겨놓은 뒷마당이라는 말에 당장 돌아가서 확인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 돌아갈 순 없었다.

저 혹시 아빠 말이야...”
아 글쎄 그 양반에 대한 건 저번에 말한 그게 전부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예전에 봤을 때도 옷을 거의 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입었어? 한여름에도 한겨울처럼.”
아니 그냥 평범했는데? 여름에는 망토도 벗고 팔다리 내놓고 다녔지.”
일 때문에 만나는 고객도 아니고 지인의 자식인데다가 지인의 지인에게 존댓말을 듣는 건 어색하다며 편하게 말하라는 나름대로의 배려에 퍼블리는 전서구에게 크게 격식을 차리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GM에게 데려다달라고 부탁을 뛰어넘어 고집을 부리던 퍼블리는 여행 중인 GM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찾을 수 없단 말에 2시간은 더 매달린 후에야 포기했다. 물론 GM을 찾아간 걸 포기한 거였고 마법사에 대해서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양반이 아무 말도 안 했어? 뭐 그 양반 성격에 말 안하는 건 당연하고 그걸 뛰어넘어 오히려 묻는 상대 붙잡고 정보 털어갈 위인이긴 하지만...”

뒷말은 그렇게 흐려놨지만 굳이 뒷내용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굉장히 우울하게 가라앉는 퍼블리의 모습에 전서구는 땀을 삐질 흘리며 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는 걸 전부 다 털어놓았다. 그렇게 퍼블리는 전서구의 시각으로 본 마법사의 과거 일부를 알게 되었는데 한 마디로 줄이면

용사 뒷바라지 하던 요정님이었지.”

GM 외엔 알 수 없었던 마법사의 지인 중에 용사라는 존재를 알게 됐다.

네 아빠는 인맥 만들거나 관리하는 건 그다지 관심 없어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으니 네가 GM 밖에 모르는 건 당연한 거야. 솔직히 나는 그 양반이 용사양반 뒷바라지 하러 다닌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전서구가 말하는 용사라는 마법사는 폭풍 그 자체였다. 굉장히 천진난만한 성격에다가 호기심이 많고 그런 만큼 사고를 몰고 왔다고 한다. 마법사의 뒷바라지는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막거나 아니면 사고를 해결하거나였는데 완전히 나서서 해결하는 게 아닌 뒤에서 도와 결국엔 용사 스스로가 끝낼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식이었다. 물론 악의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기에 끝이 좋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결국 사고는 사고였다며 투덜거리는 전서구에 퍼블리가 의아해하니

그 용사양반 사고치는 거 빠르게 수습한답시고 내 등 위에 올라탄 게 너희 아빠다.”

전서구를 올라타게 된 이유에 대해 알게 된 것과 동시에 전서구의 푸념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다가 용사가 사건사고를 해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특유의 천진난만함에 친해진 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마녀왕국의 공주님과 흑기사단, 아난타가 속했었다는 전장과 분노였다. 하지만 아난타는 축제가 끝나고 일주일 후에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며 제가 있던 곳으로 다시 떠났다. 물론 떠나기 전에 찾아가봤지만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전서구 덕분에 꽤나 중요한 연결고리를 알게 된 퍼블리는 용사의 인맥이었던 자들을 찾아갈 생각으로 왕국에서 나왔다. 비록 간접적인 인맥이지만 늘 용사 곁에 붙어있었으니 알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퍼블리를 상념에서 끌어올린 건 아프지 않게 머리를 쪼는 전서구의 부리였다.

고 박치기로 상대할 육체파 머리로 뭘 그리 삥삥 생각하고 있냐? 얼릉 답장이나 써. 이래봬도 바쁘신 몸이야!”

그에 어깨를 들썩이며 일어나 종이와 펜을 꺼낸 퍼블리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평평한 바위를 발견하고 그 위에 종이를 댔다. 뒤에서 느이 아빠 머릿속은 GM이랑 정 반대긴 하지만 두뇌파들도 아이고 이게 뭣이다냐하고 기겁하며 던지려던 도전장 집어삼키게 해서 쫓아낼 양반이라며 은근히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흘러 건네는 말은 못들은 체 하고는 간단한 안부인사와 언제 한 번 왕국에 들릴 테니 너야말로 까먹지 말고 얼굴 볼 준비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내려갔다.

혹시 신성지대로 갈 일 없어?”
갈 일 없어! 거 은근슬쩍 물어보면서 내 소중한 등짝에 몸 올릴 생각하지 마라! 가는 길 가르쳐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

전서구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에 편지를 매달고 왕국으로 돌아갔다. 퍼블리는 그런 전서구가 작아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옷에 묻은 풀들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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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셋이 둘러앉을 만한 탁자, 그 옆에 놓인 넉넉한 크기의 의자 두 개와 아이가 앉을만한 작은 의자 하나, 방은 두 개였고 그 중 한 방은 침대와 서랍이 딸린 책상, 책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과 옷장 하나로 꽤나 있을 게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조금 휑해보였지만 무언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위적인 느낌이 감도는 방이었다. 마법사는 이 방을 가장 싫어했고 그 다음으로는 이 집 자체를 싫어했다. 사실 가구나 물건들 몇 개를 제외하면 그동안 마법사가 지내왔던 집들은 죄다 비슷했다. 거실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크기의 공간에서부터 이어진 방 두 개와 부엌 하나, 화장실. 특히 부엌은 집에 조금만 들어서면 눈에 보일 정도였기에 집이 좁아보였지만 혼자서 지내기엔 당연히 넓었다. 지금 있는 나머지 방 하나엔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과 작은 베개, 담요가 놓여있지만 그 방은 지금 전혀 쓸 일이 없었다. 지금 이 집에서 쓰고 있는 공간은 부엌과 침대가 있는 방이 전부였다. 책을 넘기다가 처음 온 날을 떠올린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어디 아픈데 있슴까?”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번엔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아픈데 있으시죠? 늘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니까 어디가 아픈지 몰라서 제가 매일 전부 다 살펴볼 수밖에 없잖슴까~ 물론 저야 매우 좋아서 불만은 없습니다만 정확하게 말씀해주셔야 우리 패치도 안 아프고 저도 속 안 썩죠~”

그에 마법사는 속이 썩어가는 건 난데 왜 네놈 속이 썩어가냐고 따지듯이 말하려고 했으나 그저 손을 들어 눈과 이마를 쓸고 입술을 짓씹으며 꾹 눌러 넣었다. 뭐라 말해봤자 제 입만 아플 거란 걸 깨달은 이후론 계속해서 그의 말을 무시했지만 짜증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상대는 대답이 없어도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해주면 더 날뛰는 녀석이라 지금의 마법사에게 있어선 답이 없는 상대였다.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을 삭히고 있던 도중 조금만 더 세게 물면 피가 나올 것 같은 입술에 불쾌한 감각이 찾아왔다. 그에 마법사는 퍼득! 어깨를 떨며 주먹을 날렸다.

이 미친...!!”
오랜만에 입을 열어주시는데 하는 말이 욕이라니 저 상처받슴다~”

주먹에 맞은 뺨과 입을 감싸며 가증스럽게 우는 척을 하는 그 모습에 마법사는 그저 들고 있던 책을 덮어 휘둘렀다. 꽤나 위협적인 터라 가만히 주먹도 맞고 있었던 그는 잽싸게 물러나 피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피할 걸 예상했는지 다리를 움직여 물러난 만큼 빠르게 다가가 발로 찼다.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는지 발차기에 맞은 옆구리를 붙잡고 끙끙거리더니 부들부들 떠는 손을 들어 올려 선을 그리듯이 슥 그어보이자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마법사가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다가가 손을 뻗어 몸을 받친 그는 욱신거리는 옆구리와 방금 전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험악한 표정은 사라지고 곤히 잠든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안아 방문을 열고 침대 위에 눕혀놓았다.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입에 아까처럼 입을 맞추고 이불까지 꼭꼭 덮어주며 잠든 마법사를 보살폈다. 그리고는 시간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문 밖으로 나섰다. 중간에 몇 번이나 아쉬운 눈빛으로 마법사를 돌아보다가 문을 닫고 집을 나선 그는 방금 전까지 짓던 웃음을 싹 없애고는 집에서 멀어질 때마다 한숨을 쉬며 지루한 표정을 새겼다.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한숨 푹푹 쉬고 지랄이야?”
다시 안경 씌워드릴까요? 욕 찍찍 내뱉으라고 다시 돌아오게 한 게 아닌데 말이죠?”
그에 대신 표정으로 욕을 하는 얼굴에 진심으로 다시 안경을 씌울까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둘이 집을 감싼 풀밭과 나무들에서 벗어났을 때 그들 뒤에 남아있는 건 휑한 돌과 모래뿐이었다.

 

아니 진짜 미치겠네!?”

푸드득 날개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제법 큰 깃털이 땅 위로 내려앉는다. 커다란 비둘기가 발목에 편지 하나를 묶고선 아래를 바라보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잘 나가고 모르는 길 없다지만 달랑 받는 마녀 이름만 써놓으면 어떡하라고!?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마법사들이나 멀리 여행 떠나는 마녀들도 편지 받는 장소 정돈 정해놓는다 이 말이야!”

그렇게 불평불만을 내뱉으며 아래는 숲과 들판이 가득한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비둘기의 정체는 바로 비둘기 우체부의 대표 비둘기 전서구였다.

할배도 그렇고 그 마법사 양반도 그렇고 아주 다 제멋대로지! 한동안 둘이 잠잠해서 아 이젠 살겠구나~ 했는데! 이젠 그 양반 자식이야? 그것도 마녀!?”

퍼블리가 마녀왕국을 떠나기 전에 찾아간 건 바로 전서구였다. 당연히 한 단체 그것도 거의 모든 마녀와 마법사들이 이용한다는 비둘기 우체부의 대표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간다고 해도 쉽게 만날 순 없었다. 마녀왕국에서 축제를 즐긴 전서구는 처음엔 축제가 끝나고 다시 제 둥지로 갈 생각이었지만 마침 그 때 마녀왕국 내에서 전달할 편지들이 있었기에 몇 달동안만 더 있다가 갈려고 했었다. 그러던 도중 자신을 찾는다는 어린 마녀 얘기를 들었을 땐 의아해했지만 어디 먼데다가 편지를 보내려고 한 줄 알았다. 그에 멀리 가는 비둘기들에게 부탁하거나 꼭 저를 통해서 보내고 싶다면 예약을 해두라는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GM할아버지한테 연락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GM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바로 달려 나왔다. 전서구는 GM이 꽤나 여러 인맥 두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왕궁 마녀라면 몰라도 생판 처음 보는 어린 마녀가 사적으로 그를 알고 있는 경우는 몰랐으니 놀랄만도 했다. 그러다가 평소 GM의 성정을 알고 있던 전서구는 이내 수긍했다. 아마 왕국 밖으로 놀러 나왔다가 친해진 경우겠지 싶어서 GM이 소개해줬냐고 묻자

아뇨, 아빠가 말씀해주셨어요. 제 아빠 이름이 패치인데요...”

그 말에 전서구는 뒤집어졌다.

그 양반이 아빠라는 시점에서 범상치 않았지만...!”
누가 아빠라고? 패치? 그 마법사 양반이? 아니 그보다 그 양반이 애를 키운다고? 거기다가 마법사도 아니고 마녀?

당시의 전서구는 혼란에 빠져 정신이 없었고 퍼블리가 마법사의 자식인 게 믿기지 않았다. 물론 바로 다음 순간 퍼블리가 자신을 올라타며 GM이 있는 데로 데려다달라고 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수긍해버렸다. 그 마법사의 자식이 아니면 이렇게 바로 올라타려 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전서구는 그 때를 회상하고 툴툴거리며 저 아래 녹색 가득한 세상에 외쳤다.

! 퍼블리 어딨냐? 아니카가 편지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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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는 혼자서 아침을 맞이하고 학교로 갔다.

도서실이 공사를 끝냈고 퍼블리는 책을 하나 빌렸다.

사흘이 지났다.

퍼블리는 경비대에 들르고 엄마를 찾는다는 전단을 돌렸다.

일주일이 지났다.

퍼블리는 책을 반납했다.

학교가 끝났을 때 아니카와 함께 교문을 나서고 집으로 돌아갔다.

퍼블리는 여전히 혼자였다.

여름이 끝났다.

마법사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먹는 빵은 여전히 양이 많았다.

가을이 다가왔다.

퍼블리는 그 날 이후 계속 마법사의 방을 청소하러 들어왔다.

먼지를 닦던 도중 잠겨있던 서랍이 열렸다.

마법으로 잠겨있었는지 별다른 잠금장치가 없었던 서랍이었다.

서랍 안엔 작은 유리병이 하나 들어있었다.

유리병 안엔 파란 장미꽃잎이 들어있었다.

퍼블리는 그 날 이후로 유리병을 꼭 쥐며 잠들었다.

가을이 끝났다.

아니카는 가끔 퍼블리의 집에 찾아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잤다.

파란 장미꽃잎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본 아니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왔다.

학교의 모든 수업들이 끝나가고 있었다.

퍼블리는 책을 하나 샀다.

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될 때 퍼블리는 누군가를 찾아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카는 말없이 퍼블리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봤다.

퍼블리는 아니카에게 그저 웃음으로 대답했다.

새해가 다가왔다.

햇빛이 떠오르는 이른 아침 퍼블리는 밖으로 나와 집 문을 잠갔다.

퍼블리는 마녀왕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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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마지막 날은 학생들의 날이나 다름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아리에 들어간 학생들의 날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행사를 열순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개인이 하는 데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었다. 동아리가 아닌 10명 이내의 소규모 학생들도 행사를 열었지만 동아리의 규모가 더 크고 지나가는 마녀들을 모으는데 더 유리하다는 건 당연했다. 취지는 후세대들의 발전을 기리기 위한 날이라고 하지만 마녀들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 갖는 이름에 대해 의아해했다. 첫째 날은 추억 둘째 날은 자유 그리고 다가온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의 이름은 바로 망각이다.

축제날 이름을 짓는 기준은 다른 건 몰라도 이 마지막 날만큼은 모르겠어. 왜 망각인 거야?”
그거야 이름 지은 어른들만 알겠지.”
행사를 시작하는 동아리부터 아직 준비 중인 동아리까지 둘러본 아니카는 늘상 나오는 퍼블리의 의문에 대답해주며 얼음을 갈아 넣은 포도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왜 망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아직까지도 왕궁 측에서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많은 마녀들이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축제가 시작된 순간부터 이름은 정해져 있었다고만 대답하니 대답을 받은 마녀들은 각자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다만 신빙성 없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어서 마녀들은 이젠 그러려니 했다. 물론 역사적인 부분에선 아직까지도 말이 많았다.

딱히 축제 이름 기원 같은 건 알고 싶지 않고 오늘만큼은 제발 사고 안 쳤으면 좋겠다. 선생님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애들이 날뛰면 나도 오늘 뛰러 가야할지도 몰라.”

그 말에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부디 아니카가 바쁠 일이 없길 속으로 바라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른 아침인데도 축제를 즐기러 나온 마녀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팔찌는 뭐야?”
못 보던 거라며 덧붙인 아니카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팔찌를 바라봤다.

어제 샀어. 어때?”
장신구는 거슬려서 안 하던 애가 웬일이니?”
그에 퍼블리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팔찌를 쓰다듬었다.

“..엄마랑 짝으로 맞췄어.”
너희 엄마 나오셨니?”
어제 계속 내 옆에 있었는데?”

근데 왜 나는 못 봤을까?”
아마 엄마가 무슨 마법을 걸어서 그런가봐 그래서 그런지 지나가던 마녀들도 엄마를 못 봤어.”

그 말에 아니카는 잠깐 할 말을 잃었는지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정말 엄청난 실력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게 참 신기하네. 아니 실력자라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가?”
대단한 마법이라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아니카가 저렇게 말할 정도니 굉장하다 외엔 무슨 말을 더 붙여야할지 가늠이 안 되던 퍼블리는 깔끔하게 생각하던 걸 포기했다.

근데 장식은 뭐야? 예쁘게 생겼네?”
아니카는 팔찌에 달린 얼음꽃무늬 돌조각을 보며 감탄했다. 그에 퍼블리는 어제의 일화를 신나게 얘기해줬고 자기는 무지개 구슬을 장신구로 달아줬다며 뿌듯해했다. 그러다가 어제 아난타를 만났을 때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는 또 까먹을까 얼른 얘기를 꺼내기 바빴다.

어제 아난타 선생님이 엄마더러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지 않았냐고 했어! 엄마는 역시 그 때 참가자인 건 분명해!”

나온 대답은?”
...지금 제 기억엔 없다고 했나?”
얘기를 들은 아니카는 정말 둘 다 어렵게도 말한다며 호호 웃으면서 작게 투덜댔다.

그런데 오늘도 나오신대?”

...그건 모르겠어. 확답은 안줬는데...”
그래도 퍼블리의 눈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아마 어제처럼 찾아온 걸 보고 내심 오지 않을까 싶었던 터라 지금도 마음속으로는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퍼블리의 속내가 예상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아니카는 만약 안 나온다면 혹시라도 나중에 만나게 됐을 때 오랜만에 꺼내는 건 인사가 아니라 신랄한 비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퍼블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퍼블리의 기대에 맞는 말을 꺼낸다.

나오겠지. 어제도 나왔었는데 오늘도 안 나오겠어?”

그에 퍼블리는 웃으며 아니카의 말을 받아들였다.

 

언제나 느끼는 냉기였지만 마법사에겐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냉기였다. 몸속의 모든 피를 얼려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에 절로 소름이 끼쳤다. 탐욕스럽게 손길을 뻗치던 냉기와 그에 얼어붙은 것들을 잘라내고 남은 건 하품할 때 나올까말까 하는 눈물 한 방울 보다 적었지만 얼마 안 가 발악하는 손길처럼 무지막지하게 부풀어 오를게 눈에 훤했다. 피곤한 기색으로 의자에 기대앉은 마법사가 아직 이른 아침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어느새 한낮이었다. 그에 헛웃음을 흘리며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10번 정도 숨을 고르게 쉬던 마법사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했다.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푹 눌러 쓴 마법사는 주머니를 살펴보다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대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이곳 마녀 왕국으로 오면서 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약 퍼블리였다면 문을 열었을 테고 비둘기 우체부는 창문에다 부리를 톡톡 두드리니까 말이다. 마법사는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살짝 숨을 몰아쉬자 어지럼증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한 번 감았다 뜬 눈에는 전에 없던 날카로운 빛이 담겼다. 눈에 담은 것과 비슷하게 손에서도 날카로운 빛이 반짝이며 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은 덕에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집안을 울려놓고 사라졌다. 문 너머에서 기다리던 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집안으로 들어왔다.

저기...여기 퍼블리 학생의 집이 맞나요?”
들리는 목소리는 마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어제 만났던 아난타라는 마법사가 떠올랐지만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 과연 먼저 찾아온 자가 급하다는 게 맞는 건지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다시 말을 꺼낸 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어제 축제에서 만났던 아난타라고 합니다. 분명 저번에 퍼블리 학생한테 물어보길 여기가 집이라고 했는데...”

잠깐 그대로 있던 마법사는 한숨 쉬듯이 숨을 내쉬고는 문고리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문을 열자 동그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동그란 안경을 쓴 마법사가 제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고 있었다.

 

역시 여긴 복작복작하네.”

돌직구를 던지는 광고를 내건 식물부는 작년 반딧불이꽃을 남긴 곳답게 행사가 아직 준비단계인데도 마녀들이 찾아와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다만 퍼블리에겐 선도부의 특권을 가진 아니카라는 친구가 있었다.

올해는 무슨 식물일까?”

글쎄다. 작년보다 훨씬 더 피곤해 보이던데 일단 작년보다 엄청난 걸 준비하고 있겠지.”

그렇게 대답하는 아니카는 별 감흥이 없어보였다. 작년에 식물부가 반딧불이꽃을 선보이며 하늘을 장식할 때도 아니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물론 반딧불이꽃이 그냥 빛만 반짝이며 흩뿌렸다면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도 없었고 마녀들도 그저 박수치는 데에 그쳤을 거다. 하지만 반딧불이꽃은 실제로 살아있는 것처럼 꽃잎을 움직이며 날아다닌다. 이게 반딧불이꽃이 인기 있는 이유다.

그런데 작년엔 해질 때 선보였는데 이번엔 꽤 일찍 선보이려고 하네?”
아직 행사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고 낮이었다. 오후에서 저녁쯤에 넘어갈 때쯤 시작하려는지 준비시간이 생각보다 이른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리는 걸 보면 생각보다 돌직구 광고가 잘 먹혔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는 식물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그 틈새를 공략해 바로 옆 행사장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행사를 광고하면서 돌아다니고 있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있던 퍼블리도 어느샌가 물피리를 손에 쥐며 자리로 돌아왔다.

동아리에 들어가서 느는 건 광고하고 마녀들 끌어오는 실력이 아닐까 싶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얻어 온 물피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 번 불어본 퍼블리는 물방울이 둥실 올라오자 톡톡 두드리기 바빴다. 아니카도 옆에 붙어서 두드리자 물방울들이 터지며 손가락을 적셨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던 둘은 아직도 시작하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할 것 같은 느낌에 결국 다시 일어섰다. 세군데 더 돌고 돌아왔을 쯤에야 시작을 하려는지 행사 준비를 하던 학생들이 달아놓은 베일 뒤로 모습을 감췄다. 퍼블리와 아니카가 자리를 찾아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를 가리던 베일이 마녀 한 명 나올 정도로 살짝 걷혀졌다.

모두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사회자 역할을 맡은 학생이 그 사이로 나와 혀 아래에 음성 증폭마법이 걸려 있는 구슬을 굴리며 외쳤다. 그리고는 다양한 마법들을 선보이며 무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마법들이 빛을 반짝이면서 아직 걷혀지지 않은 베일을 쓸어가며 베일 너머에 가려져 있는 것들을 까맣게 비추고는 바로 손을 떼버리면서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준비한 건 과연 무엇일까요? 맞추는 분들껜 저희가 준비한 상품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손에 마법도구 상점의 도구 교환권을 쥐며 들어올리자 앉아있던 많은 마녀들이 저마다 크게 목소리를 높여 알고 있는 식물 이름들을 외치거나 다른 물건이나 벌레들에 식물이름을 합쳐 부르기 시작했다. 5분정도 들어주던 사회자는 웃으면서 모두 다 틀렸다고 외치며 그 이후로 나오는 대답들을 잘라냈다.

아아~ 우리가 식물부라고 식물 이름만 얘기하다니 너무 단순하게들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우리의 이름이 식물부인 이상 절대 바뀌지 않겠네요!”
그렇게 외치고는 관객들을 쭉 훑어보던 사회자는 대뜸 말했다.

혹시 혈액특성이론 배운 학생들?”
그에 퍼블리를 포함해 학년이 같았을 학생들이 어깨를 들썩였다. 모를 수가 있나 시험을 쪽지시험으로 때운 것도 모자라 시험기간을 일주일로 팍 줄여놓은 선생의 과목으로 유명한데.

오늘 우리가 보여줄 건 그 혈액특성이론도 포함해서 만든 물건이에요. 모두들 색들이 다 똑같은 색은 아니라는 거 아시죠? 빨간색이라고 해도 사과의 빨간색이랑 피의 빨간색은 다르죠. 그리고 사과들마다 빨간색이 짙냐 옅냐의 차이도 있고요. 그래서 우리는 혹시 장미도 모두 빨간색이지만 다 다르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 말에 관객들 중 일부가 설마라는 얼굴로 사회자를 올려다봤지만 사회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물론 그렇다고 장미를 연구할 순 없죠!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나쁜 일인데요! 그래서 우리는 보호자분들과 장미 정원으로 안내해주시는 왕궁 마녀분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러자 모두 그렇다고 대답해줬어요! 여러분들은 자기가 태어난 장미의 색이 얼마나 짙고 옅은가 아니면 밝게 예쁜가 어둡게 예쁜가가 궁금하지 않나요? 그런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장미색 맞추기 종이!”
베일이 완전히 걷히고 베일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연한 회색 종이뭉치를 들고 무대 밖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각자 앞에 있는 줄로 가 종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쓰는 방법은 간단해요. 피를 그 종이에다 묻히면 본인이 태어났던 장미의 색이 나온답니다! 피니까 당연히 빨갛게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래 놔둬보세요. 원래 피는 시간이 지나면 굳어서 갈색으로 변하지만 그 종이에 묻은 피는 장미색으로 변한 이후로 절대 변하지 않아요!”
그에 관객들은 반신반의 하면서 종이 모서리에 새끼손가락을 대며 살짝 베어내곤 종이에 피를 묻혔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일행들과 나란히 들어 비교하던 마녀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종이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종이를 들고만 있던 아니카도 피를 묻혀 종이를 지켜봤다. 그런데 아니카의 종이는 다른 마녀들과는 달리 핏자국이 점점 작아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장미에서 태어나지 않은 마녀라서 그런지 빨간색은커녕 핏자국도 안 남고 사라지네?”
그렇게 말한 아니카는 퍼블리를 돌아봤는데 퍼블리는 자신의 종이를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아니카가 다가서서 퍼블리의 종이를 바라보자

“...파란색?”
퍼블리만큼 당황한 아니카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봤다. 다행히 주위의 마녀들은 전부 제 걸 확인하느라 바쁜지 둘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카는 종이에서 눈을 못 떼는 퍼블리의 손을 잡고 유유히 행사장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분수대까지 걷는데도 퍼블리는 여전히 종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수대에 털썩 앉은 퍼블리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을 꺼낸다.

왜 파란색이지?”
“...그건 나도 궁금해.”

종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아니카는 제가 가지고 있는 종이를 건넸다. 하지만 그 종이에서도 똑같이 핏자국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아니카 혹시 파란장미 본적 있어?”
파란장미는 물론이고 그냥 장미도 영상구나 사진에 담긴 거 외엔 못 봤어. 애초에 장미 보기가 그렇게 쉬울 리가 없잖니?”
그럼 대체 이 종이에 나타난 색은 뭐란 말인가. 물론 퍼블리도 제 태생이 평범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이건 지금까지 해왔던 온갖 상상을 뛰어넘었다. 다른 색 장미라니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건 엄마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어.”

“...뭔가 엄청난 비밀을 듣게 될 것 같지만....혹시 알아내는데 성공하면 나한테도 알려줘.”
퍼블리는 파란색으로 변한 부분을 쓸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날 이후로 그 전날의 순간들을 전부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떠올렸습니다. 가만히 앉아있을 때도 바쁘게 일을 했을 때도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나타나 한동안 꿈이 달콤한 현실인지 아니면 현실이 차가운 악몽인지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구분하는 방법은 쉽더군요. 꿈에서는 고통이 없고 현실에서는 고통이 있었으니까 현실을 인지하는 건 금방이었고 저는 꿈으로 도망치고 싶었지요. 꿈이 현실이 되길 바랐습니다. 물론 현실은 그런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으니 제가 이렇게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런 현실을 부수는 방법은 있었죠, 단지 막막했을 뿐. 하지만 결국엔 저는 성공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찾아냈으니까요.

 

해는 이미 지고 있었고 마법사는 마지막 축제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퍼블리를 사로잡고 있는 건 실망감이 아닌 긴장과 초조함이었다. 긴장이 발목에 들러붙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있는지 돌아가는 길이 제법 길게 느껴졌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퍼블리는 심호흡을 하며 문고리에 댄 손을 돌릴까 말까 10분 째 고민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5분을 더했을 때 쯤에야 용기를 냈다.

..다녀왔습니다!”
떨리는 제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눈을 또르륵 굴리고는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은커녕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집안에 이상함을 느낀 퍼블리가 마법사의 방으로 다가갔다. 늘 닫혀있었던 방문은 오늘만큼은 열려있었는데 외출 준비를 했었는지 외투걸이에 늘 밖으로 나올 때마다 두르던 망토와 모자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부엌이나 화장실에도 가봤지만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갔다가 엇갈렸나?”
문 밖에서 긴장하고 있던 게 무색해지자 허탈한 기분에 부엌으로 식탁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퍼블리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바구니를 발견했다. 아까 미처 못 보고 넘어간 터라 퍼블리는 깜짝 놀랐다가 다시 진정하고 바구니를 살펴봤다. 어딘가 익숙한 과일 향에 바구니를 덮은 하얀 천을 들춰보니 안에는 딸기가 가득 들어있었다.

웬 딸기?”
예상치 못한 내용물에 당황한 퍼블리가 딸기 하나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혹시라도 상하거나 마법이 걸린 건 아닌가 싶었지만 상한 부분은 없었고 마법에 걸려있는 건 본인의 탐지마법으론 한계가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딸기바구니를 미심쩍게 보던 퍼블리는 마법사가 보존 마법을 잔뜩 걸어놓은 빵바구니들 옆에 뒀다. 마법이 걸려있는 물건 옆에 다른 물건을 놓으면 마력이 옮겨가 같은 마법이 걸린다는 얘기를 마법사한테 들은 적이 있어 갖다놓은 거였다. 저녁은 역시 빵으로 때울까 싶었지만 축제를 돌아다니느라 이것저것 먹은 게 있어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 다시 의자에 가서 앉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던 퍼블리는 마법사가 돌아오면 어떤 식으로 물어봐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한동안 머리를 붙잡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은 어느새 늘 잠들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물론 늦게까지 행사를 하는 데가 있긴 있었지만 마법사가 늦게까지 축제를 즐길 성격은 아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퍼블리는 고개를 저으며 몰아냈다고 생각한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마법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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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마녀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밝았을 때보다 더 활발하게 놀고 있었다. 사탕꽃을 입에 물며 작년 식물부의 야심작 반딧불이꽃이 하늘을 장식하는 걸 보며 퍼블리가 말했다.

저거 우리 학교 식물부 애들이 만들었어요.”
아무 말 없이 반딧불이꽃을 톡톡 건드리는 마법사의 모습에 신이 났는지 퍼블리는 말을 더 꺼내기 시작했다.

내일이 바로 우리 학교 동아리들이 단체로 실력발휘 하는 날이에요! 물론 다른 학교 애들도 열심히 하겠지만...우리 동네는 당연히 우리 학교가 하니까 응원해야죠! 식물부가 올해도 뭔가 단단히 준비한 것 같은데 꼭 보고 싶어요!”
퍼블리가 열심히 말하는 동안 마법사는 어느새 반딧불이꽃을 손에 올려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반딧불이꽃을 이루고 있는 마법들이 고등마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다른 마법을 중첩시키는 기술력은 꽤나 높이 살만 했기에 눈길이 갔다. 분명 어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궁 마녀가 되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기술력으로 세상을 살아갈게 분명했다. 꽃과 만든자에 대한 감상을 끝낸 마법사는 퍼블리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식물부를 보러 내일도 나올까 고민하던 순간 누군가를 눈에 담았다.

엄마?”
퍼블리는 말하던 걸 멈추고 마법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눈에 들어온 자를 보고 반가운 기색이 만연해졌다.

아난타 선생님!”
멀리 있는데다가 지나가는 마녀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름을 불린 당사자는 딴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아난타라고 불린 자를 집중해서 바라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멀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머리에 쓴 동그란 모자와 멀리서도 눈에 띄는 동그란 안경이었다.

저번에 얘기했던 그 선생님이에요! 인사하러 가요!”
퍼블리는 마법사의 손을 잡아끌며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마녀들 사이로 길을 찾아 다가가기 시작했다. 가까워질수록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누군가랑 대화하는지 옆을 바라보며 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는 순간

선생님!”

지나가던 마녀들이 잠깐 시야를 가렸지만 바로 마주하게 된 얼굴은 상당히 동글동글한 인상이었다.

퍼블리 학생?”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발견했다는 둥 아까 학생들도 많이 인사하러 왔다는 둥 서로 얘기를 주고받던 둘의 대화는 아난타의 시선이 돌려지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저번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이번에 신성지대에서 온 마법사 아난타예요.”
마법사가 살짝 의아함을 품자 눈치 챈 퍼블리가 작은 목소리로 모자를 가져다주러 왔을 때 옆에 있었다고 속삭였다.

퍼블리의 어머니입니다. 저번엔 제가 인사할 새도 없게 갔으니 인사를 하지 못한 데에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역시나라고도 할 수 있는 딱딱한 말이었다. 그에 퍼블리가 살짝 입 끄트머리를 달달 떤 채 웃으며 아난타를 바라봤지만 아난타는 그리 무안하거나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난타의 표정에 놀라 애써 달고 있던 미소가 단번에 날아갔다.

“...우리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지 않나요?”
마법사의 시선이 잠깐 퍼블리에게 닿았다가 다시 아난타에게로 돌아갔다. 받은 어투는 그저 안부를 묻듯이 가벼웠지만 마법사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가 입을 열었다.

적어도 지금 제 기억엔 없습니다.”

마법사의 대답에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 마법사는 어딘가 후련하면서도 아쉬워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건 미안함이었다. 계속 지켜보던 퍼블리가 의아해했지만 그 이유는 금방 풀어졌다.

, 이런...인사를 나눈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바로 가야할 것 같네요. 내일 있을 행사 때문에 지금 교직원들이 난리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랑 엄마도 해가 졌으니 조금만 더 즐기다가 집에 돌아가려고 생각 중이었거든요.”

그럼 내일 봐요 퍼블리 학생, 그리고 퍼블리 어머님도 나중에 보게 될 때 제가 먼저 인사드릴게요.”
그렇게 서로 인사하고 퍼블리와 함께 자리를 뜨던 마법사는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려 멀어져가는 아난타를 눈에 담았다. 그에 마침 똑같이 뒤돌아보던 아난타와 마주쳤다. 무언가 입모양으로 짧게 말하고는 고개를 다시 제 앞으로 돌리는 모습까지 보던 마법사는 퍼블리의 부름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누군가가 부르는 바람에 얼마 가지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블리!”
선도부 일로 축제를 즐기지 못한 아니카였다. 퍼블리는 반갑게 인사하려다 문득 옆에 있는 마법사를 생각하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묻혀놨던 불안감이 아니카가 다가올 때마다 싹트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아니카는 그런 퍼블리의 불안을 모르고 있었다.

날뛰는 모기떼들 제압하느라 시간 다 갔네.”
...지금 끝난 거야?”
아니 아직 할 일이 남았어. 그냥 가다가 너 보이길래 인사하러 온 거야. 오늘 축제 즐기는 건 진작해 포기했지 뭐.”
그런데 가까이 다가온 아니카는 마법사를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곁에 있는 걸 전혀 눈치 못챈 것처럼 퍼블리만 보고 얘기했다. 그러다 퍼블리는 마법사가 상품들을 주머니에 넣었을 때 마녀들이 눈길도 주지 않은 걸 떠올렸다.

일단 내일 봐! 내일은 선도부들도 축제를 즐기라면서 선생님들이 선도부들 대신 뛸 거래. 그래서 내일은 같이 놀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을 끝낸 아니카는 손을 흔들며 다시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퍼블리는 아니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마법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마법사는 별말 없이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아까보다 조금 높게 떠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가지.”

그렇게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가는 동안에도 퍼블리가 불안해할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씻고 하루를 마칠 준비를 한 마법사는 잘 자라는 인사를 끝으로 방으로 들어갔고 퍼블리도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제 손목의 팔찌를 쓰다듬고는 침대 옆 탁상 위에 두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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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보세요!”
앞으로도 생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퍼블리에게 있어서 오늘은 최근 중에 가장 행복하고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물방울을 뿜어대는 나비 머리장식을 제 머리 위에 올려놓고 돌아보는 퍼블리는 처음으로 축제를 돌아다녔을 때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니 마법사가 스스로 마주 짓던 웃음도 눈치 채지 못하고 왜 그러냐고 묻자 퍼블리는 잽싸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앞장서서 복작거리는 마녀들 사이를 갈라 길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마녀들이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위를 올려다보자 그에 따라 올려다본 둘의 눈에 비둘기들이 입에 가루가 든 병을 물고 날아다니면서 하늘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법사는 어제 퍼블리에게 들은 난동 피운 비둘기들이 떠올랐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고 퍼블리는 다행히 그런 마법사의 생각을 모른 채 비둘기들이 그리는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비둘기들 아래에 장신구를 파는 가게가 보였고 마녀들은 그런 광고에 넘어가주며 장신구 가게로 다가갔다. 당연히 가판대에 자리잡은 장신구들의 무늬는 모글리제의 산들바람이었다. 퍼블리 또한 마녀들을 따라가더니 장신구 색이 하나 다른 팔찌 한 쌍을 사서 파란색 팔찌를 마법사한테 넘겼다.

제 건 빨간색이에요!”

아마 빨간색은 마법사를, 파란색은 퍼블리 본인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퍼블 리가 주위를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자라서 같이 다니는 축제는 둘 모두에게 즐거웠다. 처음에 퍼블리는 마법사가 그냥 아무런 선호 없이 제가 가자는 대로 따라가면 어떡하나 싶은 게 무색하게도 마법사는 생각보다 호불호를 잘 나타냈다. 싫다고 딱 잘라내기보단 거기 있는 것보단 저기 있는 게 더 좋다는 식이었다. 마법사가 선호하는 행사는 퍼블리가 좋아하는 행사와 많이 겹쳤다. 마법보다는 몸을 쓰는 행사였는데 그 중에서 마법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건 공을 던져 물건을 맞추는 행사였다. 범상치 않은 운동실력을 보여주며 마법사까지 경쟁상대에 포함해 상품을 싹 쓸어오던 퍼블리도 이것만큼은 마법사를 이기지 못했다. 던지는 족족 맞추고 엄지손톱 크기의 얼음꽃무늬 돌조각도 맞춰서 떨어뜨리는 걸 보고 사실 마법사의 정체는 흑기사단도 정화하는 자들이 아닌 공 던지기 요정 볼라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볼라 본인이 마녀와 마법사 사이에서 놀고 싶어서 그들 사이로 숨어든 게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던져요?”
하다보면.”
던지기 실력을 빌미삼아 과거를 살짝 떠볼까 싶었지만 바로 나온 마법사의 대답에 포기한 퍼블리는 다음 행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잔뜩 타온 상품들이 떠올랐는지 마법사를 돌아보자 주머니에 넣는 모습에 그저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말하는 주머니는 따로 들고 다니는 가방이나 가죽 혹은 천 주머니 같은 게 아닌 말 그대로 옷에 달려있는 주머니였다. 물론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 다면 사람 상품 중엔 작은 상품들도 있었지만 어른 마녀 얼굴만한 그릇도 있었다. 그 그릇까지도 기껏해야 손보다 조금 넉넉한 주머니에 들어가고 있다 이 말이다. 당연하게도 마법을 썼겠지만 무게의 부피와 중량을 무시하는 마법을 각 상품들에다가 일일이 걸었을지 아니면 주머니에다가 걸었을지는 마법사만이 알 뿐이었지만 확실한 건 그 마법 자체가 상당한 고등 마법이라는 건 마녀들과 마법사들은 물론 다섯 살 먹은 어린 애들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마녀들이 돌아다니는 길 한가운데서 보이는데 지나가는 마녀들은 눈길 하나 안 주니 그 외 더한 마법 자체를 본인에게 걸었을 게 뻔했다. 퍼블리의 질린 기색이 섞인 눈빛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봤다. 마법사의 눈빛은 왜 그렇게 보느냐라는 뜻도 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는 듯한.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질문을 듣고 나서 판단하지.”
그에 퍼블리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답이라면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 묵묵히 주머니에 전부 집어넣던 마법사는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앞에 있던 퍼블리 또한 그 모습에 뒤돌아서 다시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뒤따르던 마법사가 아하고 아주 작은 감탄을 내며 멈춰선 퍼블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까르르 웃는 아이들과 눈을 빛내는 어른들 손에 들린 무지개 구슬에 닿았다.

아까 그 학생이네?”

...? ?”

다시 돌아올 줄 알았어! 어이 거기 채스터! 얼른 돈 내놔! 내가 기른 구슬 재료들은 이 왕국에서 제일 싱싱하고 색을 잘낸다고 자부했잖아?”

성질도 급하긴! 아직 해보겠다고 말도 안 꺼냈잖아! 게다가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같은 길을 밟은 건지 아닌지도 구분 안 하고!”
구분하고 말고가 뭐 있어? 어차피 이 길 계속 가면 분수대밖에 안 나오잖아. 괜히 돈 주기 싫어서 입씨름하지 말고 순순히 포기해라?”

돈 주기 싫은 건 당연한 거고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지.”

두 마녀의 대화를 듣던 마법사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무지개 구슬을 보고도 안 만든다며 떠난 퍼블리가 다시 돌아와 만들겠다고 할지 아니면 그대로 안 올지 내기를 했을 터. 하지만 퍼블리가 내기 대상이 되었어도 그리 기분 나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퍼블리가 축제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시 한 번 무거운 손이 올라와 잊지 말라는 듯이 심장을 꽉 쥐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해 소리치면서도 친절하게 재료를 참가자들에게 나눠주던 두 마녀는 입을 멈추고 퍼블리를 바라봤다. 퍼블리는 중간부터 다시 무지개 구슬에 시선이 팔려 둘이 나눈 외침들은 흘려들어 내기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때마침 고개를 든 퍼블리가 웃으면서 외쳤다.

만들래요!”

채스터라고 불린 마녀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마법사는 이번엔 참가하지 않고 퍼블리가 만드는 걸 구경했다.

퍼블리는 제 앞에 놓인 무지개에 들어가는 세가지 색 열매들을 섞이지 않게 잘게 빻기 시작했다. 곱게 빻은 가루들을 투명한 진액과 함께 동그란 틀 안에 넣자 틀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틀도 투명해서 안쪽이 다 보였는데 가루들이 부딪히며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고 옆에서 조금씩 마법기구가 조정을 하자 어느 정도 양이 정해진 기본 색들은 섞여 색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침내 완성한 무지개 구슬은 정말 무지개를 담은 것처럼 예쁘고 한눈에 들어왔다. 구슬을 만들고 나니 어느새 해가 하늘 한 구석을 빨갛게 태우며 내려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퍼블리가 앞장섰지만 어디 가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까 내기에서 이긴 마녀가 말했던 대로 둘이 가고 있는 길의 끝엔 분수대밖에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손 좀 줘보세요.”

분수대에 앉자 퍼블리가 대뜸 손을 내밀고 말했다. 그에 오른손을 내밀려다가 고개를 젓자 왼손을 내밀자 퍼블리의 손이 가는 곳은 다름 아닌 비둘기로 광고하던 데에서 샀던 팔찌였다. 거기에 무지개 구슬을 대며 집중하던 퍼블리가 손을 놓자 구슬이 원래 팔찌 장식이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붙어있었다.

어때요? 괜찮죠?”
접착 마법으로 붙였는지 꽤나 감쪽같았다. 구슬을 만들 때보다 더 집중했었던 퍼블리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고 마법사는 팔찌에 붙은 구슬을 만져보다가 큰 충격을 받으면 금방 떨어지겠다고 충고하려고 했지만 차마 뿌듯해서 웃는 퍼블리에게 말할 순 없었다. 나중에 몰래 더 보강하겠다며 접착 마법을 뒷전으로 미룬 마법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까 공 던지기에서 얻은 얼음꽃무늬 돌조각이었다. 마법사가 몇 번 손으로 쓸자 울퉁불퉁하던 돌조각 표면이 매끄러워지고 모양이 구슬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

신기하게 바라보던 퍼블리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마법사가 팔찌에다가 가공한 돌조각을 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지개 구슬처럼 자연스럽게 팔찌 장식으로 자리 잡았다. 남색과 파란색 바탕의 돌조각 위에 새겨진 얼음꽃무늬는 정교했고 눈길을 사로잡았다.

진짜 예뻐요!”

퍼블리가 눈을 빛내며 예쁘다고 연신 외치고는 손을 높이 들어 얼음꽃무늬 돌조각 장식을 얻은 빨간색 팔찌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퍼블리의 모습에 마법사는 반대로 손을 들지 않고 고개를 숙여 무지개 구슬 장식을 얻은 파란색 팔찌를 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완전히 하늘을 까맣게 태우고 사라질 때 쯤 다시 비둘기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낮에 봤던 비둘기들처럼 병을 입에 물고 가루를 흩뿌리며 까만 하늘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표절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속에서도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분수대에 앉아있던 둘은 하늘을 바라보며 축제를 되새겼고 다시 축제를 즐기러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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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땅따먹기야?”
이번엔 땅따먹기 수준이 아니야!”

급하게 뛰어온 선도부는 이번엔 그런 귀여운 말이 아닌 폭동 수준이라고 했다. 축제 둘째 날은 아직 학생들의 무대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다시 한 번 그들의 성과를 두드려보는 날이었다. 물론 둘째 날은 자유라고 불리고 있었으니 이것도 어찌 보면 축제 중의 구경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인원수가 많은 동아리들이 연합을 한 것 같아. 인원이 아닌 각 동아리들이 할 수 있는 행사 규모에 맞춰서 배분해준 구역이라고 해도 듣지를 않아!”

선도부라고 하지만 앞도적인 숫자에는 진땀을 흘리고 거의 피신하다시피 물러날 수밖에 없는데 인원수 많은 것들끼리 붙어먹었다는 말에 아니카도 늘 달다시피 하던 웃음을 거두고 머리를 짚었다.

많은 새..녀석들도 축제 행사를 이끌어가는 건 몇 명만 뽑는 거잖아. 그놈의 인원수가 많다느니 인원이 많으니 자리가 많아야한다느니...걔네들 거기 땅에다가 재료 농사짓거나 마력 발전소 하나 세워서 행사 안 이끄는 애들 마력 쏟아 붇는대?”

곧이어 날선 말들이 잔뜩 쏟아져 나왔다. 아니카를 부르러 왔던 선도부는 식은땀과 울상을 지으며 아니카를 데려갔고 퍼블리는 그대로 혼자 남게 됐다. 자유라고 불리는 축제날이었지만 통제하는 마녀에게 있어선 축제 중에 자유란 거의 없었다. 동행인이 통제하러 가버린 터라 남은 마녀는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작년까진 아니카가 선도부가 아니었으니 항상 같이 축제를 즐겼다. 물론 퍼블리가 아니카에게 엄마랑 축제를 즐기지 않고 자기랑 즐기게 돼서 서운해 하지 않으시냐고 물어봤지만 그에 아니카는 처음엔 몇 번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지만 이제는 신나게 술 마시러 나간다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또래끼리 노는 게 더 즐거운 건 어른이든 아이든 똑같았다.

물론 퍼블리는 친구가 아니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아니카보다 덜 친해서 같이 축제를 돌아다니고 싶은 친구들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미 그 들도 제 짝인 친구들이랑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 더더욱 같이 돌아다닐 마음은 들지 않았다. 멍하니 분수대에 앉아서 축제가 한창 시작되는 모습들을 천천히 눈에 담기 시작한 퍼블리는 새삼스럽게 축제가 굉장히 소란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카와 함께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축제란 건 가만히 있는 마녀에겐 매우 소란스럽게 다가왔다. 그렇게 계속 앉아 있다가 분수가 이제 그만 가라는 듯이 물 몇 방울을 퍼블리의 등에 떠미는 손처럼 뿌리자 그제야 일어나 소란스러운 축제 무리로 걸어 들어갔다. 무지개 구슬을 만드는 행사와 투명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행사 등등 다양한 행사들이 있었지만 딱히 즐기고픈 마음이 없었던 퍼블리는 그저 한 발짝 떨어져 구경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지개 구슬 재료를 나눠주고 설명하고 있던 마녀가 그런 퍼블리를 발견했다.

학생! 학생도 한 번 만들어 봐요!”

, 아뇨! 저는 그냥 구경이 더 즐거워서요!”

그렇게 말한 퍼블리는 마녀들 사이를 빠져 나와 다시 분수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가라앉았다. 분명 축제는 소란스러운데 제 주변은 조용한 것 같았다. 아니카가 그렇게 수다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늘 범상치 않은 말을 꺼낸 터라 기억에 잘 남게 되고 잔상이 떠오른다는 걸 혼자 있게 돼서야 느끼게 됐다. 그러다가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은 아니카가 지금쯤이면 엄청난 독설을 날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여름인데도 한기가 느껴지면서 당할 애들을 생각하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가라앉은 기분 아래에서 웃음을 건져 올리던 퍼블리는 곧이어 눈앞에 나타나는 얼굴에 살짝 물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아빠랑 같이 축제 즐기고 싶었는데...”
아주 예전에 퍼블리가 마녀왕국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맞게 된 축제 때 마법사는 그런 퍼블리를 달래주기 위해 손을 잡고 축제를 돌아다녔다. 볼을 부풀린 퍼블리는 그저 땅만 보고 걸었지만 얼마 안 가 축제의 화려함에 시선과 서운함을 빼앗겼다. 신나게 뛰어다니기 시작한 퍼블리는 아마 환하게 웃고 있었을 거고 뒤에서 퍼블리를 보고 있던 마법사가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는 같이 있던 퍼블리 또한 몰랐다. 계속 앞만 보며 뛰어다녔으니 당연히 모를 만도 했다. 어쩌면 한 번 쯤은 뒤돌아봤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기억이 안 난다. 그 때의 마법사도 지금의 마법사처럼 온 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옷을 입었다. 그런데도 그 때 주위 마녀들은 마법사한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째서? 퍼블리는 잠시 의문을 가지며 다시 한 번 눈앞을 전부 차지하는 마법사의 옷차림을 살펴봤다. 마녀나 마법사의 시간은 어른이 되고 난 후 굉장히 느리게 흐른다고 들었다. 기억속의 마법사 또한 지금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옷까지 너무 최근인데?”
분명 그 때 유행하거나 입던 옷이랑 지금 입는 옷이랑은 현저히 다르다. 꽁꽁 싸매는 건 똑같아도 당시에 사서 입는 옷이니 유행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억에서 튀어나온 마법사의 옷차림은 너무 최신에 유행하는 옷차림이 아닌가. 그 때 마법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
눈을 깜빡이고 비벼서 다시 봐도 마법사는 사라지지 않았다. 분수대 앞에 서있는 마법사는 그런 퍼블리의 행동에 어쩐지 식은 눈으로 쳐다보고는 퍼블리에게 다가왔다.

...”
엄마.”
..엄마.”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 마법사였다. 축제 기간 내내 집 안에 틀어박혀있었던 혹은 있어야할 마법사다.

엄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반문하는 퍼블리에 마법사는 다시 눈썹을 찌푸리다가 그동안 제 행동들을 돌아보고 반사적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사정이 그랬다하더라도 제가 생각해도 보호자 자격을 박탈해야할 것 같았다. 퍼블리가 멍하니 마법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나왔어요?”
그리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기껏 나왔는데 왜 나왔냐고 묻다니, 무언가 볼일이 있어서 나온 게 틀림없을 텐데 말이다. 마법사라고 늘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디론가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축제 때 나오는 일은 그 때 이후로 없었는데...어쩐지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그 때

축제 때 같이 돌아다니지 않겠냐고 했잖나.”
짓누르던 것들이 이 순간만큼은 모두 물러났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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