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고 신성지대를 상징하는 금색 실이 박힌 하얀 망토자락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교실은 소란스러워졌다. 마지막 수업이었으니 빨리 나가고픈 마음에 손들은 책상 위의 짐들을 가방에 쓸어 담기 바빴으나 입은 방금 전까지 칠판 앞에서 수업을 하던 마법사에 대해 말하기 바빴다. 그건 퍼블리와 아니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퍼블리 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 같아?”

“그냥 엄청 친절한 사람 같은데?”

“난 저렇게 순하고 친절한 사람은 오히려 가면을 쓰고 혼자서 연극놀이를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저 안경이 가면같은 게 아닐까라며 우스갯소리를 덧붙이는 아니카의 말에 퍼블리는 이미 맴돌고 있던 마력과 함께 사라진 마법사를 보고 있는 듯이 다른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왠지 연극놀이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둘의 대화는 서로 가는 방향이 달라 갈라진 갈림길에서 멈췄다. 인사를 건네는 걸 끝으로 헤어지는 아쉬움에 고개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게 늦어졌지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제법 빨랐다. 집 앞에 도착한 후 열쇠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바로 문고리를 잡는 모습이 퍽 익숙했다. 왜냐하면 퍼블리의 보호자는 하교하는 시간엔 항상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짧게 끼익 우는 소리는 곧이어 이어진 인사에 묻혔다.

“다녀왔습니다. 엄마!”

인사가 향하는 끝엔 목과 입을 감싸는 형식으로 변형된 옷을 입고 있는 마법사가 책을 읽고 있었다.

마법사의 표정은 겉보기엔 한결같았지만 잠깐 스쳐지나가는 미묘한 눈빛에 퍼블리는 문을 잠그고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커튼을 치고는 인사보단 작은 목소리를 꺼냈다.

“이제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

대답은 옷자락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새겨진 장미무늬가 대신했다.

“...저도 몇 년째 아직 적응이 안 되는 걸요.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듣는 이가 없어도 속삭이 바람은 무시하지”

“말라고 했죠.”

말을 받은 퍼블리는 물이 담겨 있는 대야에 손을 담갔다. 너무 어려서 이젠 밀가루를 부은 물보다 더 뿌연 기억 속에서부터 지금 엄마라고 부르고 있는 그는 분명히 아빠라고 불렀었고 마법사다. 그리고 자신 또한 마법사인줄 알았다. 어느 날 신기하게 차려입은 마법사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늘 놀러갔던 마을보다 더 복잡하고 제 아빠처럼 신기하게 차려입은 마법사들이 잔뜩 돌아다니는 마을이었다. 나중에 알기로는 마법사들이 아닌 마녀들이었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옷차림은 그 때의 마녀들이 흔히 입고 다니던 유행이란 걸 깨닫게 된 건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생각이란 걸 다시 해보려고 했을 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기억 속의 뿌연 연기를 몰아내고 돌아다니던 동안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퍼블리는 옆에 걸린 수건에 물기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예전 집에 늘 놀러오던 아저씨 있지 않았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종이 넘기던 소리가 멈췄다.

“오늘 학교에서 마법사 한 분이 오셨어요. 어디더라...신성? 거기에서 오셨다고 하는데 마력 성질과 구조 이론이랑 역사에 대해 가르쳐주신다고 하셨어요. 그 선생님 머리색이 검은색이었는데 잘은 기억 안 나지만 예전에 늘 놀러오던 아저씨도 검은색 머리였던 것 같은데...”

“학교에서 본 그 마법사의 인상은?”

“어..엄청 동글동글해요. 안경도 동그랗고 눈도 동그랗고...이름이 아난타라고 했어요.”

“아난타?”

의아한 기색이 짙은 되물음에 퍼블리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뭔가 잘못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니 책은 이미 곱게 덮인 채 손에서 떠나있었다.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 꽤나 심각해보였고 뭐라 말을 다시 걸기엔 애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얼마가지 않았다.

“역사는 어디까지 배웠지?”

“밸러니의 숲 정화에서 그 때 선출된 팀 부분이요.”

“묘하게 적당한 때로군. 아마 배우고 있던 부분이 마녀왕국에서 선출된 팀에 관한 부분이겠지. 다음 아난타라고 한 그 마법사가 가르칠 부분은 마법사측의 팀과 둘 모두 있던 팀일 거다.”

말하는 내용과는 별개로 무엇이 미심쩍은지 눈썹을 찌푸리며 의자에 기대던 마법사는 다시 몸을 바로 세워 앉고는

“그 때 당시 마법사측은...”


깔깔 웃는 소리가 솟아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그 사이로 숨을 삼키던 아니카는 여느 때처럼 신랄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본전도 못 찾고 오히려 역사 수업을 받았다는 거네?”

말만으로도 사람의 속을 뒤집는 제 친구의 재능에 대한 감탄과는 별개로 뚱한 표정을 짓고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퍼블리의 모습에 아니카는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누르며 물어봤다.

“그래서 수업 소감은?”

“보통은 이쯤에서 그만 놀리지 않아?”

“어머, 그렇게 나랑 같이 지내놓고 다른 애들 행동을 떠올리는 거야?”

“본전은 여기서도 못 찾았네.”

한숨을 쉬고는 바닥의 돌멩이를 툭툭 차던 퍼블리는 어제부터 이어져 온 답답함에 고개를 들어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방금 찬 돌멩이처럼 금방 날아가고 시간이 지나면 구름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수업. 아니카는 수업이라고 말했다.

“수업..이겠지?”

“그동안 네가 한 얘기 들어보면 그것도 수업이잖아?”

마법사는 퍼블리가 글을 쓸 수 있을 때부터 꽤나 많은 걸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론보단 실전이란 말처럼 퍼블리는 책과 설명으로 된 것보다 직접 보여주거나 경험을 살려 얘기해주는 데에 더 쉽게 받아들였다. 다만 완전한 실전이란 있을 수 없으니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론들을 설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남는 건 별로 없었다.

“근데 생각보다 기억에 남아.”

“세상에. 드디어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았나보다.”

“아니카.”

“알았어. 그만 놀릴게~”

아니카의 말 덕분에 무언가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잡힐 듯 말 듯 한 기분에 퍼블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기에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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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터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복도 벽 너머서부터 들려온다. 방음 마법에 관한 실험 공지가 내려오고 일주일정도 될 즈음엔 어깨를 떨기 바쁘던 학생들은 이젠 소리가 얼마나 늦어질까 시간을 재며 내기까지 하고 있었다. 소소했던 시간재기 내기는 처음과는 달리 사람들이 모인 후엔 주머니 속에 고이 담겨있던 돈을 꺼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모인만큼 액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를 제재하는 역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역할을 지닌 사람도 참가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선도부가 이래도 되는 거야?”

“선도부니까 하는 거지. 괜한데 돈 안 빠지게 전부 학생회비로 넘기잖아?”

이것이 학생회비 면제 비밀의 일부였다. 면제라기엔 애매했지만 자율적으로 낼 것인지 안 낼 것인지 본인이 정한다라고 한다면 거의 면제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학생회비는 가을이면 다가올 축제 속의 연구 대회에서 각 학부마다 운영될 돈이나 학생들의 아이디어 작품 등 크게 투자를 하는 다양한 데에 쓰이지만 어째선지 바닥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모르고 넘어가는 건 아니었다. 선도부나 학생회 친구를 둔다면 그림자에서 결탁된 비리라는 비밀을 알게 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물론 탐탁지 않아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오는 피해도 없었고 대부분 돈을 안 낸 학생이었기에 입이 무거워졌고 돈을 낸 학생들은 내심 아까워했으니 이런 비밀들에 만족스러워 하기까지 했다.

“그래 돈도 냈고 아까워하지도 않는 우리 퍼블리는 이러한 비리를 눈 감고 넘기지 못할 정의로운 학생인가요?”

“다른 애들한테 말해봤자 조용히 묻히게 만들 거면서! 좋진 않지만 그래도 좋은 데 쓰이는 거니까 가만히 있는 거야.”

“과연 우리 퍼블리 학생 생각대로 좋은 데에다 쓰고 있을까~?”

“안 그럼 네가 거기 한바탕 뒤집었겠지. 안 그래? 공포의 아니카씨?”

그에 주머니를 정리하던 선도부는 휘파람을 부르며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감탄을 덧붙였다.

“이제 꽤 받아칠 줄도 아네? 너희 아빠한테서 배웠어?”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숨기는데 서툰지 꾹 다문 입과 아무렇게나 던져진 시선이 대신 답해주고 있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선도부는 더 골려주고픈 마음이 들었지만 정해둔 선 바로 직전이었기에 그만뒀다. 만약 저 선을 넘는다면 겨우 다시 만나게 된 친구가 또 사라져 버릴까봐 친구의 비밀 바로 앞에 선을 그려놓았다. 제 귀여운 친구는 비밀에 완전히 손을 대는 순간 이번엔 아예 볼 수도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리라.

먼저 한 발짝 물러나는 건 언제나 누군지 정해져있었다.

“그보다 마력 성질과 구조 이론 숙제는 다 했어? 늘 틀리는 부분이 있어서 계속 물어봤잖아.”

“겨우 다 끝냈어! 다행히 이번 주는 문제없어!”

둘의 대화는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서 잠시 멈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사람으로 인해 완전히 멈췄다. 땀을 흘리며 숨을 고르던 그는 칠판 앞에 서서 학생들을 둘러보고 손수건을 꺼내 뺨에 갖다댔다.

“아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교실이 많고 여러 수업에 들어가다 보니까 아직까지도 길 외우기가 힘드네요.”

동그란 안경 너머의 동그란 눈이 깜빡거린다. 검은색 곱슬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동그랗게 묶어 올린 그는 학교 내의 유일한 마법사였다. 물론 마녀왕국으로 여행오는 마법사들은 많았지만 마녀왕국의 마법학교에서 마법사를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에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법사이기 이전에 전체적으로 동그란 느낌이 드는 모습처럼 그의 심성 또한 동그랗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더더욱 유명해졌다. 오죽하면 어린 마녀들이 모든 마법사가 그처럼 심성이 동그랄 거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의 첫인상은 여러모로 강렬했다.

“확실히 인상적인 면으론 신성지대 마법사들이 사람을 잘 보냈어. 대표로 오는 사람의 첫인상은 그 단체들의 인상을 좌지우지 하거든.”

옆에서 속삭이는 아니카의 말을 들으며 퍼블리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번에 신성지대에서 온 저 선생님의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 다만 과연 그 신성지대의 모든 마법사가 모두 동그랗다고 표현할 정도로 온화하고 배려심이 넘칠까.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귓가로 익살스러운 웃음소리와 무뚝뚝한 말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한 사람과 같다고 하기엔 추억 속에 잠겨있는 마법사들의 모습은 꽤나 다양했다. 이는 퍼블리 본인은 물론, 아니카 또한 알고 있을 사실이었고 쉬이 떠나지 않는 추억 속에서 배운 것들이다. 퍼블리같이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학생들을 깨우기 위해서인지 짝! 한 번 박수를 치는 소리가 크게 교실을 쓸어간다.

“지나가는 복도에서 한 번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수업으로 만나는 건 처음일 테니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겠어요! 제 이름은 아난타랍니다. 현재 마녀왕국과 여러가지로 교류하는 단체인 신성지대에서 학술적 교류를 위해 파견된 마법사랍니다.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마력 성질과 구조 이론에 대해 수업하러 왔지요. 아무래도 이런 걸 알기 위해선 마법사의 마력을 직접적으로 보는 게 더 이해가 빠를 테니 이렇게 직접 오게 됐답니다. 여러분들의 도우미가 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더 어지럽게 만드는 못된 속삭이 바람으로 변할지 모르겠네요. 너무 원망하진 말아주세요~”

아난타라고 하는 마법사는 일주일 정도 전에 방음 마법 실험 공지가 내려올 때 함께 등장한 선생님이었다. 마법사는 하나고 수업 들어야 할 학생들과 교실은 여럿이니 일주일에 3시간 있는 마력 성질과 구조 이론 수업 중 마지막 시간에만 수업하는 선생님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두 시간은 마녀의 마력을 한 시간은 마법사의 마력에 대해 배우는 거였다. 오히려 반대여야 하지 않느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런 말들과는 다르게 퍼블리에게 있어서 지금의 수업상황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 아니카 외엔 아무도 모를 퍼블리의 입장에선 마법사에 마력에 대해선 이미 배운 걸 넘어섰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의 속사정은 별개로 수업은 가르치는 사람처럼 매우 부드럽게 진행됐다. 다만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드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집중을 모으기 위한 박수소리에 다시 깨어나기 일쑤였다. 만약 배를 채운 지 얼마 안 됐을 때 수업을 했다면 박수소리에도 모두 잠들었을 테지만 거의 모든 학교 일과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수업이라 잠에 들지 않고 깨어있으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새 시계바늘이 종이 울릴 숫자 바로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벌써 수업이 다 끝나가네요. 하지만 아쉬워하지 마세요. 제가 이번엔 역사 수업도 맡게 되었답니다! 아무래도 책에 적혀있는 것보단 이렇게 마법사가 직접 마법사들의 역사를 말하는 게 더 실감나고 자세하게 알릴 수 있다는 의견이지요. 게다가 양측의 공통되고 유명한 역사가 있으니 서로의 입장과 시선이 더욱 중요하게 됐지요. 그럼 다음엔 역사 시간에 만나요, 학생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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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과거를 기억하면서 과거를 잃어버린, 과거를 기다리는 마법사와

그에게 다가온 아이의 이야기.





그를 더불어 그와 함께 있었던 마법사들의 입에서는 끝도 모를 뿐더러 시작도 까먹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바빴다. 그러다가 불어나버려 홍수가 되어버렸을 때, 잠시 뒤로 빠지는 입은 무뚝뚝한 현자일 때도 있었고 가장 많이 흘려보냈던,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해맑음일 때도, 혹은 그였을 때도 있었다. 해맑음이 뒤로 물러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해맑음이 물러나는 그 때는 바로 그와 현자의 작은 의견충돌이다. 그와 현자의 의견충돌은 거의 없을 정도로 둘은 잘 맞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어찌 보면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의견이 잔잔한 물결처럼 서로를 흔들기 일쑤였다.


현자는 운명을 말하고 그는 우연을 말했다.


현자가 말하기를 호수 밖으로 건져지는 시점에서부터 운명이라는 고리로 발을 내렸으며 그 위를 거닐면서 현재라는 운명과 손을 잡았다고 한다.


그가 말하기를 태어난 이후로부터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우연히 만남으로써 시작되며 그것이 길게 이어져 우연이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덧 씌워진다고 했다.


운명과 우연에 대해서 서로를 흔들기만 하던 의견 차이는 말 그대로 흔들기에서 끝나버렸을 뿐 그들의 사이를 무너뜨릴 순 없었다.


둘 중 누군가의 의견이 다른 한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바뀌기도 전에 그들은 헤어졌다.



이 세계에선 사람은 크게 둘로 나뉜다. 여자와 남자, 다르게 말하면 마녀와 마법사.

물론 전자보단 후자로 더 많이 말한다.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 차이는 마녀와 마법사를 구분 짓는 가장 큰 기준이지만 성별 외의 차이들 또한 존재하기에 그 차이들로 둘을 구분 짓는다. 


가장 큰 예로 태어나는 방식인데, 우선 마녀들은 제법 큰 장미에서 태어난다. 장미꽃이 활짝 피어나는 때에 그 속에서 아기가 나타나는데, 이 때 가장 먼저 아기를 안아든 마녀가 아기의 보호자가 된다. 아기들마다 성장속도는 제각각이지만 마력이 많을수록 성장속도는 빠르기에 보호자가 된 마녀는 말 그대로 보호자에서 멈출 때가 있지만 아기에게 정이 들어 더 깊은 관계를 원하는 마녀는 아기에게 '엄마' 혹은 '어머니'라는 부름을 요구한다.


이런 마녀들과는 달리 마법사들은 호수에서 태어난다. 보름달이 뜨는 밤, 동그란 달이 희게 혹은 푸르게 반짝이는 순간 호수가 거울이 되어 달의 빛을 잡는 순간 호수에서 아기가 나타난다. 물론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달이 빛나는 건 아니었고 심지어는 어떤 곳에서는 빛났지만 다른 곳에서는 빛나지 않았다는 말들도 들려오는데다가 빛난다 해도 반드시 그 자리에 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호수에 아기가 한 명만 있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두 명 혹은 세 명이 있을 때도 있었다. 아기들이 제멋대로인지 아니면 아기들을 품은 호수가 제멋대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대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기들은 아기였기에 말할 수 없었고 너무나 어려서 자라서는 잊어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마법사들은 근처에 있는 호수로 간다. 마법사들은 마녀들에 비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데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의견이 맞는 동료들이 대부분이라 호수에서 건진 아기는 각 마을마다 만들어져 있는 보호시설로 보낸다. 


그들은 돌본다는 개념보단 살린다는 개념으로 아기를 대하기에 보호자를 자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마녀들처럼 보호자를 넘어서 더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경우는 없다고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사례가 아예 없진 않았는지 이제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모르고 사라지고 있는 단어지만 마녀들의 '엄마' 혹은 '어머니'라는 말처럼 '아빠' 혹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오늘도 없군.”


달의 장난은 그다지 달가운 건 아니었다. 한순간 푸르게 반짝이던 빛은 그대로 비추고 있던 거울에 잡혔지만 그 아래에 있어야할 보호 받을 작은 새싹은 뿌연 살결도 내비치지 않는다. 딱딱하지 않은 거울에다가 투박한 손을 집어넣어보아도 손에 잡히는 건 축축하게 젖은 흙 뿐, 오히려 거울이 일그러지면서 달빛이 흐려지기 일쑤였다. 


행여나 자리잡은 게 짓궂은 새싹인지 마법사가 물러나려고 포기하는 순간에 나타날까봐 그런지 마법사는 몸을 돌리지 않는다. 아직 아무런 생각도 없는 아기에게 속아넘어갈 정도로 마법사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울 아래를 쏘아보는 눈은 보름달이 뿌려준 빛보다 훨씬 더 시리게 푸르다.


눈싸움의 끝은 항상 승자가 없었다. 눈을 먼저 감는 건 마법사지만 상대는 늘 그랬듯이 아기 대신 거울 위에 비친 마법사였기에 항상 비기고 있다. 눈싸움으로 시간을 바친 마법사는 거울의 역할을 끝낸 호수를 뒤로하며 늘 그랬듯이 자리를 떠나고 제 갈 길을 갔다. 오늘도 반복하기 위해 발을 떼는 마법사의 눈에 전에 없던 이상한 것이 들어온다.


“...장미꽃?”


정확히는 꽃봉오리다. 장미 정원은 물론, 장미 정원이 있을 마녀 왕국에 단 한 번도 발을 딛은 적이 없었던 마법사의 눈에 들어 온 장미꽃은 마법사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이상한 것이었다.


온 세상의 장미란 장미는 모두 뽑아가 한데 모아놓고 정원으로 만들어놓는 마녀들 덕에 그가 본 장미란 그가 자랐던 보호시설의 공용 책에서 본 장미꽃 그림이 다였다. 눈으로 직접 보게 된 진짜 장미꽃은 낯설지만 그 이전에 마녀들이 혈안이 된 채로 다 뽑아가고도 아직까지 야생에 남아있는 이상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책에서 본 장미는 붉은색 아니면 흰색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붉은 빛과 흰 빛을 잡지 않고 여전히 눈 색 그대로 푸른색만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피어난다면 제 품에 가득 안길 정도로 큰 꽃봉우리 앞으로 다가간 마법사는 둥글게 말려있는 장미꽃잎을 쓸었다. 이내 그는 그의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호기심과 경계심에 양 팔이 묶였지만 고민의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앞으로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꽃봉오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경계심이 먼저 한 발을 내딛고 그는 피어나고 있는 장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포옹을 원하듯이 활짝 꽃잎을 열어젖힌 장미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것은


“아기...로군.”


당연하게도 아기는 여자였다. 물론 장미꽃에서 마녀가 될 여자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태어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달빛과 꽃잎 덕에 푸르스름하게 물든 하얀 머리카락이 적게나마 올라온 게 제법 앙증맞다. 애써 눈을 아래로 돌린 마법사는 완전히 내리기도 전에 어느새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녹색을 마주한다. 흠칫 놀란 그가 뒷걸음질 치자 동그란 녹색이 사정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우...우으...”


“이런!”


조막만한 입이 일그러지면서 더 큰 소란으로 번지기 전에 그는 잽싸게 아기를 안아들었다. 아기를 안아들어 달래주면 울음을 그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마법사가 간과한 게 있다면 그는 책으로만 이야기를 접했을 뿐 직접 아기를 안아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어색했으며 달래주는 방법도 잘 모르고 있는 초보자라는 점이다.


“으아아아앙!!”


“....머리가 아프군.”


모든 것은 빌어먹을 우연이기를 바라.








장미꽃향








마법사는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몇 분 전의 자신을 막아서고픈 마음이 호수 안 물풀의 오만만큼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집어지고 있는 마음은 물론, 그 외의 아무것도 모르고 까르륵 웃고 있는 아기에게서 더 이상 장미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는 웃는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인물들의 웃는 얼굴을 싫어했다. 아기의 웃음은 우는 얼굴보다 반가웠고 아기가 계속 웃을 수 있게 나름대로 마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곤 했지만 그는 지금 그럴 수 없었다.


“그래, 지금 이런 때 쓰는 단어가 호..호라? 뭐더라? 호..호...”


홀아비! 확신에 찬 목소리는 반딧불이가 만들어낸 바람처럼 가볍기 그지  없었다. 그 작은 가벼움 속에서 나온 단어는 분명 마법사가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호기롭게 단어를 꺼낸 사람은 하얀 수염이 풍성하면서도 반듯하게 자리 잡은 늙은 마법사,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가장 웃음이 많기로 유명하고 그 덕에 인기가 가장 많은 유쾌한 마법사.


늙은 마법사의 평판은 좋지만 우습게도 마법사가 싫어하는 특정 인물들의 웃는 얼굴의 주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늙은 마법사라는 건 약새풀을 태우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몇 십년동안 동굴 안의 박쥐처럼 로브 색도 감추던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홀아비가 되어서 나타났어? 자네 결심상 마녀 왕국에 있는 장미정원에서 훔쳐왔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여행 중이던 마녀랑 눈 맞아서 생겼다기엔 너무 안 닮았는데?”


“제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눈 맞았네 안 닮았네라는 소리가 나옵니까?”


“이 아기가 마녀니까 그렇지.”


아직 아기라서 마녀인지 마법사인지 겉으로 보기엔 구분할 수 없었지만 늙은 마법사의 확신에 찬 말이 날카로웠다. 말을 받은 마법사의 푸른 눈이 한차례 크게 떠지더니 본래의 크기보다 가늘어졌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뭡니까?”


“검집 던지기처럼 그냥 찍은 거지, 뭘!”


이어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마법사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어지럽다는 듯이 이마를 부여잡다가 이내 얼굴마저 쓸어내린다.


아기는 어느새 웃음을 멈춘 후 두 마법사 사이에서 녹색 구슬 같은 눈동자를 좌우로 반복해서 굴리는가 싶더니 마법사가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마법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익숙하게 얼굴에 닿아있던 손을 떼서 아기를 안아들었다.


“거 조심해. 원래 아기들은 보호자 감정에 예민하다고들 하니까.”


“...만약 호수에서 건진 평범한 마법사 아기였다면 진즉에 보호시설로 보냈을 겁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긴! 자네가 보름달이 뜰 때마다 뺀질나게 그 호수에 간다는 거 자네도 알고 나도 아는데!”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환한 얼굴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쉰 마법사는 아직까지 울먹이는 아기를 달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그러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웃어대는 늙은 마법사를 보며 그는 끓어오르는 속부터 식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 아기는 어디서 데려온 거야? 혹시 그 호수에서 태어난 아기야?”


“호수 옆에 장미가 피어있었습니다.”


야생 장미란 장미는 마녀들이 전부 뽑아서 그들 왕국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장미정원으로 옮긴지 오래였다. 야생에 방치해두면 언제 태어날지 모르는 아기가 그대로 장미에 방치된 채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러한 사고를 막기 위해 전부 한군데로 모인 장미꽃은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그저 이야기책이나 도감 속의 꽃일 뿐이었다.


“야생 장미라...아무리 호수 옆이더라도 마녀들이 가만 놔뒀을 리가 없을텐데?”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하나는 마녀들이 어느 순간부터 야생 장미를 찾기 위한 인식 마법에 손을 놓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마녀들의 인식 마법이 닿기도 전에 빠르게 피어났을 수도 있다는 것.”


“후자가 훨씬 설득력 있구만.”


잘게 흐느끼던 아기는 어느새 잠들어버린지 오래였다. 조심스럽게 아기를 고쳐 안은 마법사는 이번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그 아기를 데리고 나를 찾아온 이유는? 설마 이 늙은 마법사더러 키우라는...”


“주변에 아기를 키워본 마법사는 어르신 밖에 없으니 방법이나 조언을 들으러 온 겁니다.”


그리고 매우 후회 중이지. 입술을 꾹 깨물면서 뒷말을 씹어 삼킨 마법사는 조심히 이불 위로 아기를 내려놓았다. 평소 마법사를 알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들었다면 저주마법에 걸린 게 틀림없다면서 호들갑을 떨었을 테지만 마법사는 절대 늙은 마법사에게 아기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제 2의 늙은 마법사가 태어나는 건 사양이리라.


“어르신이라니! GM이라고 부르던 녀석은 어디 간 거야? 오랜만에 온 녀석이 이렇게 선을 긋다니, 이거 원 서운하구만 그래!”


“목소리 좀 낮춰주십시오. 아기 깹니다.”


“...저주마법 효과가 정말 대단하군.”


그런 늙은 마법사, GM의 말을 무시하며 잠투정을 하며 작은 몸부림을 치는 아기를 작게 토닥이는 마법사를 묘한 눈으로 보던 그가 무언가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보름달 뜬지가 2주일은 넘었는데 설마 그동안 아기 이름도 안 지어준 건 아니겠지?”


마법사는 말이 없었다. 웃음을 터뜨릴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무라는 것 또한 그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어색하게 웃음을 짓던 그는 아기를 토닥이는 손으로 눈을 돌렸다. 흰 장갑으로 둘러싸인 손은 서툴지만 다정함을 담은 채 아기에게 닿아간다. 그대로 침묵이 길게 이어가는 듯 싶었지만 그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문제를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아기 이름은 정했어?”


토닥이던 손이 멈췄다. 손은 그대로 거두어졌지만 아기는 편안한지 고른 숨을 뱉으며 뒤척이지 않고 잔다. 그런 아기를 바라보며 마법사는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푸른 눈을 눈꺼풀로 반쯤 덮는다.


가라앉은 그의 감정만큼 색이 짙어지는 그의 눈은 그가 자주 발을 옮기는 호수만큼이나 깊어진다. 그런 그의 눈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 순간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여전히 얄미워 보이는 웃음을 지은 채 빤히 바라봐도 마법사는 그런 시선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이 가라앉고 있다.


“이 아기는 마녀니까 당연히 보호시설로 보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도 마녀 왕국으로 갈 생각은 없어. 야생 장미에서 태어난 마녀 아기라는 점부터 엄청 귀찮으니깐 말이야. 뭣보다 그 아기를 맨 처음 안아들은 건 자네니 내가 가는 건 의미가 없어.”


“제가 처음 안아들었다는 걸 상대방이 어떻게 알고 확신합니까?”


“자네에게선 아직 장미향이 느껴지니까.”


그 말에 마법사는 언뜻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라진 게 아니라 익숙해진 거였나.


아직 붉은 기가 도는 말랑한 볼을 꾹꾹 눌러보지만 아기는 여전히 잠을 자느라 약간의 뒤척임으로 작은 저항만 할 뿐,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눈꺼풀이 완전히 내려오며 가라앉은 색마저 가린다.


“마녀 왕국에 지인이 있습니까?”


“설령 지인이 있더라도 지인 외의 다른 마녀들에게 있어선 마법사란 존재는 교류든 경계든 이방인이지.”


“마녀 왕국에도 보호시설이 존재합니까?”


“그랬다면 마녀들이 장미들을 한 데 모으진 않았을 거야.”

닫힌 눈꺼풀은 미동 없이 그대로 있었다. 마법사는 여전히 질문만 한다.


“저의 결심이 지독한 겁니까?”


“지금까지 지켜온 자네의 딱딱한 결심은 둘째치고 지금 마법 세상 돌아가는 바람 하나 잡아들어보면 마녀 왕국으로 여행가고 싶어하는 꿈돌이들도 마녀 왕국에 발을 딛는 걸 자제하고 있어.”


번쩍 푸른빛이 깜빡인다. 어쩐지 살짝 멍해보이는 얼굴은 그 흔한 속삭이 바람도 잡아보지 않은 터라 아무것도 몰랐다. 쉬이 볼 수 없는 마법사의 희귀한 얼굴을 보게 된 GM은 그렇게나 즐거웠는지 쉴 새 없이 들썩인다.


마법사는 이번엔 그의 웃음을 말리지 않았다.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그에게서 나온 적은 바람을 잡아들어 어쩌면 진짜인지 허구인지 모를 이야기의 살을 붙인다.


“설마...제가 생각하는 건 아니기를 바랍니다.”


“뭘 생각하고 있는데?”


“양쪽 모두 상처 입은 채로 방치되지 않았습니까? 특히 마녀들은 더더욱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어. 아직은 그거 아니니까 걱정 집어넣어.”


“‘아직은’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안심이라는 건 이미 그른 것입니다. 아무리 56년이 지났다지만 그들의 세상에 새겨진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시간이라는 모래에 묻혀진 정도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 오히려 상처가 더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마당인...!”


“자자 진정하고 이거나 마시고 있어. 그러다 아기 깨서 빽빽 운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건 제법 뜨겁지만 그 입에 닿아있는 건 차가운 얼음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입에 물려진 잔을 낚아채다시피 입에서 떼낸 마법사는 데인 혀를 식히고자 입술에 닿았던 얼음을 입안에서 굴리고 있다. 얼음을 동동 띄우고 있는 주제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갈색 액체는 그가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평범하게 끓였다면 그도 이렇게 싫어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입안에서 맴도는 향과 얼음으로 갈색 액체처럼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힌 채 마찬가지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커피를 저런 식으로 끓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로군요.”


“약새풀이라는 것도 널려있는 마당인데 이정도야 놀랍지도 새삼스럽지도 않지!”


“약새풀이 널려있다니. 풀을 수집하는 여행자나 도감을 만드는 사람이 들으면 거품 물 소리인 거 압니까?”


“에이! 야생 약새풀 말고 잔뜩 널려있을...”


“지금 당장 듣는 사람이 없다 해도 속삭이 바람은 무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법사의 가라앉은 말을 끝으로 GM은 더 이상 그에 관한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껄껄 웃으며 세상모르고 잠든 아기를 바라봤다. 일순 그 눈앞에서 주름살이 생기기 전의 손을 타고 갔던 아기들이 까르륵 웃고 있었다. 뻗고 있던 손을 거둔 그는 마법사의 눈을 마주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저 아기 어떡할 거야?”


“현재 그들의 세상을 보면 답은 하나밖에 없는 거나 다름없어 보입니다만.”


“대부분 잠으로 떠나보낸 주제에 바깥사람인 척 하기는...자넨 아직 마법사고 저 아기도 마녀야. 비록 로브를 벗긴 했지만 진명도 다시 취하지 않은 자네는 그저 이름 없는 마법사일 뿐이야. 적어도 아기가 부를 이름 정도는 있어야지 않겠어?”


“퍼블리 셔.”


푸른빛은 어느새 아기에게 닿아있었다.


“아기의 이름입니다. 비록 태어난 지 2주일 후에야 붙여줬지만 2주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겁니다.”


단호하게 꺼낸 말 뒤에 굳은 결심이 붙는다.


“아기에게 불려지는 건 이름이 아니라 아빠라는 호칭으로도 충분합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떨린다.


마법사가 그토록 만나기를 꺼리던 늙은 마법사를 찾은 데에는 상당한 마음가짐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만남을 가진 후 자리를 빠져나왔을 때는 어느새 후회를 달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날은 없다고 무방할 정도로 그는 늙은 마법사에게 감정적으로 말려들었다. 어찌 보면 엉망진창으로 보일 과거의 전적들에도 불과하고 마법사는 이번에도 찾아갔고 이번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다.


“아부브바아!”


촉촉한 입이 몇 번 우물거리자 천이 금새 축축해진다. 지친 기색이 만연한 한숨과 함께 천을 당기는 손은 제법 조심스러운 반면 물고 있는 입은 그런 배려보단 빼앗는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방금 전보다 훨씬 강하게 물고는 놔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는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함부로 넣지 않는 게 좋으니 어서 뱉어라.”


“부브브브!”


“후우...”


세번째 한숨이다. 늙은 마법사의 조언은 진지했다.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심심풀이로 꺼낸 것이 아닌, 진짜로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 꺼낸 요청이었고 건네받은 조언이었다. 마법사는 똑똑했고 건네받은 조언대로 아기를 키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의 손은 서툴렀고 품 안에 들어오는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조그마한 아기는 사랑스러운 얼굴과는 다르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악동이었다.


간신히 아기의 입에서 천을 빼낸 마법사는 칭얼거리는 아기의 등을 쓸어주며 달래주기 바빴다. 몸부림이 점점 가라앉고 어느 순간부터 색색 고른 숨소리와 그에 맞게 들썩이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하늘색의 작은 요람으로 아기를 내려놓은 마법사는 아기에게서 손을 때며 조용히 입을 연다.


“처음 2주 동안은 내가 널 어떻게 돌봐왔는지 정말 아직까지도 신기하구나. 아니 어쩌면 돌본 게 아니라 네가 살기 위해서 스스로 버틴 것일지도 모르겠군.”


푸른빛에 반쯤 휘장을 친다. 처음 안아들었을 때 이후로 아기는 안긴 자세가 불편했는지 늘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고 우느라 새빨개진 아기의 얼굴과 당황하며 창백해지던 마법사의 얼굴이 둥실 떠오른다. 이내 그 어렴풋한 잔상이 보기 불편했는지 길게 내쉰 숨으로 흩트린다.


“나는 마녀들처럼 아기를 직접 키워본 적도 없고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아오느라 타인을 위하는 방법은 모른다. 어쩌면 내가 너를 키우는 건 너에게 불행일지도 모르지. 더군다나 나의 일방적인 다짐은 네가 원래 있어야할 자리로 가는 것도 막는구나.”


슬픔이 담길 법한 말들임에도 불구하고 담겨져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기에게서 떨어졌던 손은 떨어진 순간부터 계속해서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변명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하마.”


어느새 그의 손은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항상 야단치기만 했던 로메루가 밸러니의 장난을 받아주기라도 했는지 땅과 하늘 사이를 달리는 바람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포근하고 잔잔했다.


얌전하게 변한 그들은 어느새 잠을 자고 있는 얼굴의 뺨을 한 번씩 쓸어가고 풀내음을 머금은 웃음을 흘리고는 유유히 자리를 뜨곤 했다. 그들의 따뜻한 손길과 숨결에 더욱 풀어진 표정을 지으며 나른함에 빠져드는 아기가 있는 반면, 행여나 졸다가 아기를 떨어뜨릴까봐 나른함을 떨쳐내는 어른도 있었다.


바람이 조심스레 구름을 걷어내며 지나간 자리엔 구름 뒤로 웅크리고 있던 햇빛이 손을 뻗어내리기 시작했다. 따뜻했던 바람에 비해 햇빛은 제법 따가웠는지 나른함에 취해있던 아기가 작게 칭얼거리며 햇빛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마법사의 품에 파고들었다.


행여나 아기의 작은 숨이 막힐까봐 마법사는 파고드는 아기를 품에서 살짝 떼어놓았지만 아기는 불만스러웠는지 아까보다 더 크게 칭얼거린다.


“우으..이에에엥!”


요즘 들어 아기는 매우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꼭 어울리던 하늘색 요람에서 하얀 이불을 덮은 채 잠든 아기의 모습은 구름 속에 폭 파묻힌 천사였다. 마법사가 곁에 없어도 아기는 항상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부터 아기는 마법사의 품에 안길 때마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장미 꽃잎보다도 작은 손으로 마법사의 옷자락을 꼭 쥐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살 작은 손을 떼어내며 요람 위에 내려놓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깊어지는 옷 주름과 칭얼거림은 그의 마음을 당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아기는 요람에서 잠들기 거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의 품에서 떨어지는 걸 싫어했다. 물론 마법사도 아기를 늘 품에 안고 다닐 순 없으니 아기가 곤히 잠든 틈을 타 내려놓았지만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그 즉시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아기는 품에 안겨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마법사는 아기의 울음을 멈추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퍼블리.”


마법사가 아기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울음이 멈춘다. 아직까진 히끅거리며 어깨를 들썩이지만 눈물 담은 녹색 눈은 더 이상 울지 않고 동그랗게 뜨고는 빤히 쳐다보기 바빴다. 그럴 때마다 마법사는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는 아기가 신기하면서도 그렇게나 이름을 많이 불러주지 않았나 내심 뜨끔한 마음이 들곤 했다.


아직까지도 빤히 쳐다보는 동그란 눈과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찾아오는 나른함과 어딘지 모를 간지러움 때문에 매번 눈을 먼저 돌리는 건 마법사였다. 동시에 아기는 작은 손으로 다시 마법사의 옷자락을 잡는다.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우으으! 아부브아아바!”


“잠시만 놓거라. 너를 안은 채로는 네 밥을 준비하기 힘드니까.”

아기의 칭얼거림은 또다시 시작된다. 마법사는 머리가 아파오는지 눈을 질끈 감다가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한껏 비장하게 눈을 떴다.


“...가만히 있어라.”


늙은 마법사가 가르쳐준 건 꽤 다양했다. 그 한가지 예를 꺼낸다면 일은 봐야하지만 아기를 떨어뜨려놓을 수 없는 상황의 해결책. 설명을 들은 마법사는 되도록이면 오지 않았으면 하던 상황이었고 아기는 요람 속에서도 얌전했기에 안심했다. 하지만 아기는 아기였다.


“그 날 이후로 그녀석들이 없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다니...”


자조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는 뒤에서 버둥거리는 아기가 떨어지지 않게 엎드린 상태를 유지하고 천을 더 꽉 동여맸다. 등에 업힌 채 천으로 둘러싸여 받쳐져있는 아기는 새로운 상황이 재밌는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등 위로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작은 온기에 또다시 간지러움을 느끼던 마법사는 익숙하게 젖병에다가 가루를 넣고 물을 끓이던 순간 갑자기 뒤통수에서 미약하게 당기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귓가에 아기의 우물거리는 소리를 듣고 기겁했다.


"자..잠깐! 머리카락도 입에 넣는 게 아니야!"


재빨리 고개를 비틀어 아기에게서 멀어지지만 아기는 이젠 두 손까지 동원하며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물은 끓어넘치고 있는 지경이었으니 급하게 불을 끄기 위해서 손을 뻗는 순간 아기가 다시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여어 잘 키우고 있어?"


언제 왔는지도, 어떻게 찾아온 건지도 모를 늙은 마법사는 사전연락은 물론 노크까지 무시하며 태연하게 제 집 문을 열듯이 들어오며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생생하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그가 보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 날 마법사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아기는 잘 키우고 있는 모양이야.”


“당사자인 저는 전혀 동의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만.”


“부브으아!”


아기는 여전히 마법사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입으로 가져가기 일쑤다. 물론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아기의 손을 감싸쥐며 떼어내기 바빴다. 아기는 손에서 빠져나간 붉은 색의 가닥들이 아쉬운지 울음을 터뜨릴 기색을 보이자 마법사는 아기를 안은 팔을 약하게 흔들며 아기를 달래주려고 했지만 아기는 이미 울음 섞인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쩔쩔매는 모습에 즐거운 건 다름 아닌 늙은 마법사다.


“자네 머리카락을 잘라서 장난감으로 만들어주면 어때?”


“농담은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농담 아닌데!”


껄껄 웃으면서 반격하는 말은 그저 조용히 무시해주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은 마법사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는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게 등을 토닥였다. 서서히 울음이 가라앉는 아기와 조금 힘들어 보이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늙은 마법사는 어느새 웃는 걸 멈추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이 제법 따갑게 느껴졌는지 아기가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힘차게 익숙한 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꽉 쥔 손이 어른만큼 강하진 않지만 평소와는 달리 힘이 들어간 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아기도 그 잔잔함이 폭풍 전의 고요함이라는 걸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아기를 키운 지 이제 막 한 달 남짓 했나?”


“한 달은 넘었습니다만.”


“내가 마녀 아기는 키워본 적이 없는데다 마녀들이 주문 마법을 가장 많이 쓰는 만큼 제일 먼저 깨우치는 건 입에서 나오는 소리, 즉 말이지. 지금 새삼스럽게 말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라.”


“뭐가 말입니까?”


“보통 마법사 아기들이 옹알이를 하는 시기는 4개월부터였어.”


순간적인 침묵이 주위를 감싸안으며 그들의 입가를 어루만진다.


“앞서 말했다시피 마녀 아기라는 점을 신경 써도 아무리 빨라야 한 달 정도야. 하지만 자네가 나를 찾아온 건 아기가 태어난 지 2주일 조금 넘어서였나? 그 때 자네의 반응을 보면 아기의 옹알이가 매우 익숙해보였지.”


마법사는 아무런 말없이 아기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아기가 살살 눈꺼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손도 조금씩 멈추더니 어느새 잠든 아기는 푹신한 요람과 이불에 둘러싸여있었다.


살살 작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푸른빛과 흰 색 덕분에 하늘을 쓰다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실 없는 생각을 접어두고 다시 무거운 주제로 말을 담그기 시작했다.


“일종의 주의입니까?”


“일종이 아닌 주의 자체야. 몸을 가장 많이 뺀 나무는 가장 먼저 베어지고 색을 가장 많이 머금은 꽃은 가장 먼저 꺾이는 법이야.”


“아무리 귀한 약초라도 전혀 돋아나본 적 없는 곳에서 돋아나면 그들의 눈엔 아무것도 아닌  잡초입니다.”


“그렇다 해도 눈에 띄는 법, 늦든 빠르든 손이 뻗어오는 건 시간문제야.”


마법사는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됐다. 분명 그는 주의를 주고 있지만 그에 따른 대답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명 그가 하고 싶은 말, 즉 해결책은 따로 있지만 아직도 마법사의 입에선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마법사도 알고 있을 터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른다. 


마법사는 똑똑했고 촉이 좋았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뜨리는 늙은 마법사지만 그를 알아온 시간이 현재까지의 삶의 8할은 차지했다. 붉은 색이 서로 마주보며 험한 줄을 새기고 그 아래의 파란 색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늙은 마법사는 어느새 다시 웃음을 되찾아 하얀 이를 익살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호수에서 건진 데 물 냄새 나는 거고 장미꽃 심은 데 장미꽃 나는 거지.”


“그게 당연한 이치인 건 알지만 문제는 장미꽃이 호수 옆에 났다는 겁니다.”


“그럼 당연한 이치로 돌려놔야겠지?”


“그 뒤에 붙을 해결책은 저에게 있어서 해결은 커녕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게 뻔하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걸로 치겠습니다.”


“아기 문제 해결이 우선 아녀?”


“아까 하신 말씀들을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에잉! 재미없긴!”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낄낄 웃는 모습을 보면 포기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마법사는 그의 기대에 부흥해줄 생각따윈 없었다. 그저 웃는 얼굴에 더군다나 연장자에게 가시 돋힌 말을 더 이상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 언제나 그랬듯이 마법사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입을 닫는 건 물론이요 시선은 먼 곳을 향했다. 먼 곳이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아기가 누워있는 요람이었다.

자리잡은 변화를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는 건 옆에서 보는 제 3자였기에 늙은 마법사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숨과 함께 짧은 기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하는 모습에 마법사도 외면하는 걸 그만두고 그를 따라 일어났다.


“아아 배웅은 필요 없어! 어차피 다음에 또 올 테니까 매번 배웅하는 것도 질리잖아?”


“매번이라...자주 오신다는 말씀입니까?”


“아기들한텐 필요한 게 많으니까 자주 올 수밖에 없지. 아니면 찾아오던가?”


“...매번 신세집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터뜨리는 웃음에 민망한 기분도 잠시, 그들의 인사가 끝났다.


마법사는 그 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라는 건 어떤 때에는 느리면서 과거를 뭉개는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때에는 그 어느 것보다도 빠르면서 과거를 선명하게 새긴다는 것을.







만남








“거 시X! 그 새낀 또 어디로 꽁무니 뺐어?!”

“욕은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아니 X발, 내가 지금 욕을 안 하게 생겼어!? 단체 수장이라는 새끼가 아랫것들은 피똥 싸게 뺑이치고 있는데 그 옆에서 허구한 날 당당하게 놀러나가니까 내가 이 지X이지!”

“당신은 지금 상관인 수장을 욕하고 계십니다. 부디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그 개 X같은 배추머리 수장새끼가 지금 일하다 말고 나가서 처 놀고 있으니까 내가 욕을 X나게 하잖아!!!”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전혀 맞물릴 생각 없이 일방적으로 건네지는 대화의 주인들은 그들이 닥친 상황 자체가 꽤나 익숙해보였다. 물론 익숙한 것과 별개로 험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은 말과 함께 올라오는 목소리처럼 얼굴에 피가 많이 올라와 몰렸는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얼마간 더 험한 말들을 쏟아낸 후엔 조금은 진정했는지 숨을 가쁘게 내쉬며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열을 품고 있는 목소리로 천천히 까칠한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엔 대체 얼마나....후-X발 나가서 놀려고 숨 쉬면서도 휘날리는 찌꺼기들까지 없앴냐?”

“얼마나 자리를 비울 진 저 또한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이제까지와는 달리 철저하게 뒷정리를 한 걸 봐선 꽤나 오래 걸릴 듯 싶습니다만.”

“아, 그건 나도 아는데 그 X같은 새끼가 지금까지 나가서 해온 개짓거리들의 기간 보고 대충 견적 좀 때려서 맞춰보라고!”

“어쩌면 모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화려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



“빠빠아아아아아아아!!”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우렁찬 소리가 나올까.
아기는 아직 기어다니고 있었지만 거의 어린아이가 뛰어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아기가 먼저 깨우친 건 마녀답게 언어적인 면이었지만 몸도 그에 못지않게 성장이 빨라보였다.

복잡한 마음이 섞인 한숨이 채 나오기도 전에 삼켜버린 마법사는 아기를 안아올렸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한동안 아기의 성장이 멈추는 듯이 거의 변한 게 없었던 일이 있었다. 심지어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 마저 멈춰버려 당황한 마음에 이번에는 늙은 마법사를 직접 찾아가려고 하는 순간 아기의 성장이 다시 시작됐었다. 다만 처음같이 빠르지는 않을 뿐.

마법사는 다른 마법사 아기들처럼 변해버린 성장속도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걱정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기가 걸음마를 익힌다면 얼마안 가 뛰어다닐지도 모를 기세라 결국엔 달라진 건 그닥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의 예상은 제대로 적중했다.


“꺄아아아아!”

“퍼블리.”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기가 부딪쳐서 다칠까 단호하게 이름을 부르지만 아기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가 일어서는 모습에 오히려 더 신나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같이 놀아주려고 하는 줄 알았는지 펄쩍펄쩍 뛴다.

당연하게도 아기는 아기인지라 얼마 가지 못하고 마법사의 품에 안긴 채 방으로 되돌아왔다.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아기가 답답해하면서 버둥거릴 거란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마법사의 품에 파고들었다. 푹신한 이불 위로 내려놓은 뒤 부엌으로 갔다. 

물론 아기는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고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 즉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기는 그대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안 돼.”

“이잉!”

마법사가 집 안에서 절대로 아기를 들여보내지 않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다름 아닌 부엌이었다. 물론 아직 기어 다니지도 못할 때에는 아기를 천으로 감싸서 업은 후 자주 부엌에 들어왔으나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퍼블리가 걸음마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일어날 뻔 했다.

마법사는 아직까지 그 때를 떠올리면 무표정으로 항상 굳어있던 얼굴이 창백해지며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가 자란 아기의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 잠시 방 안에 두고 부엌으로 갔을 때 문을 열어둔 게 화근이었다. 

그릇을 꺼내는 동안 뒤에서 탁탁-하고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봤더니 아기가 서랍이 딸린 그릇 씻는 곳을 치고 있었다. 문제는 아기의 바로 그 위에 칼이 걸쳐져 있었다는 거였고 잽싸게 달려온 마법사가 칼을 치운 덕에 칼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법사의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그 날 이후론 마법사는 아기를 방 안에 둘 때 꼭 문을 닫았지만 어째서인지 문고리가 고장난 덕분에 아기가 힘차게 밀면 열리게 됐다. 문고리를 튼튼하게 고쳐야겠다면서 작은 불평을 내도 방 문을 잠그지 않아도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아기가 방 안에 갇힌 건 마찬가지라는 걸 느꼈는지 고치는 걸 미루고 있다. 다만 아기가 나와서 부엌으로 따라 들어오려고 할 땐 단호하게 막아섰다.

“사실 이렇게 혼자 두는 것도 나쁘지만 부엌은 위험한 게 많아서 안 돼.”

아기들에게 이기는 어른들은 없다고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직까진 마법사의 승리였다. 단호한 말투와 눈빛에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걸 느낀 것 같지만 발을 다시 뒤로 돌리진 않았다. 누가 마법사의 아기가 아니랄까봐 그처럼 눈에 보이는 단호한 고집에 잠시 한숨을 쉬던 마법사는 그래도 무릎을 굽히며 앉아 아기와 눈을 마주했다.

“퍼블리.”

아기는 여전히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은 건지 떼를 쓰면서 찌푸리던 눈마저 동그랗게 뜨고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 아기가 귀여웠는지 픽 웃음을 터뜨린 마법사는 손을 들어 하늘빛을 머금은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기 또한 기분이 좋았는지 아기 특유의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조금 풀린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

결국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기는 불만스럽게 칭얼거렸지만 닫힌 문은 한동안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앉은 채 다리를 흔들며 불만을 담아 바닥을 쳐도 미리 이불을 깔아둔 덕에 폭폭 부드럽고 앙증맞은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예 누워버리고 이번엔 팔까지 거들었다. 

곧 지루해졌는지 다시 일어나서는 힘껏 문을 밀었다. 마법사는 이번엔 바로 부엌으로 갔는지 아까 서 있던 자리에는 없었다. 아장아장 걸으며 점점 방에서 멀어졌지만 부엌이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아기는 마법사를 찾는지 여기저기 고개를 흔들지만 낮은 아기의 시야에서 보이는 거라곤 의자다리와 제일 낮은 곳에 있는 서랍칸들과 아기를 위해 만든 밋밋한 밀짚 인형들뿐이었다. 그러다가 아기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집 밖으로 나가는 현관문이었다. 

아기는 그 문을 눈빛만으로도 뚫을 기세로 빤히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방 안에 있을 때 닫힌 문과 똑같이 느껴졌는지 상당히 불만스러운 기색이 보였다.
아기는 그대로 문으로 달려가 있는 힘껏 밀어대기 시작했지만 열리기는 커녕 조금이라도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그마한 입에서 불만을 가득담은 칭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이이잉!”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몸이 기울었다. 그대로 넘어진 아기가 훌쩍이며 일어나 주저앉은 채로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

“으우아?”

살며시 흔들리는 녹색들이 녹색 빛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흔든 부드러운 바람이 작은 몸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마법사의 품에 안겨있던 때 이후로 몇 달간 아기는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흙들이 아쉬웠는지 작은 발바닥이 지나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작은 하얀 그릇이 떨어져 방바닥을 나뒹군다. 용케 그릇은 깨지지 않았지만 담겨 있던 이유식이 쏟아지는 바람에 바닥이 어지러워졌고 안타깝게도 치워야할 사람은 이미 방을 나가버렸다. 급한 마음만큼 바닥을 쿵쿵 울리는 소리는 매우 요란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멈췄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그의 손이 떨리는 이유는 찬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꽉 닫아서 잠가놓았을 문인데 어째서인지 아기가 있던 방과 똑같이 문고리가 고장나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건 어느정도 사람의 발길을 탄 덕에 풀이 자라지 않은 흙바닥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건 그 위에 있는 작은 발바닥 자국이다.

“퍼블리!!”

그 위를 어른의 발이 다급하게 덮는다.



*****


“퍼블리! 퍼블리!”

아기는 대체 어디까지 갔을까, 그 작은 발로 얼마 가지 못했을텐데 머리카락은 커녕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밸러니의 심술부리는 날이라도 되는지 아기의 발자국도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마법사의 집을 둘러싼 숲은 위험한 생물들이 살고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걸음마를 뗀지 얼마 안 된 아기가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기가 혼자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어찌됐건 간에 아기를 혼자 내버려둔 건 마법사 본인이었으니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스스로 망치를 두드리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리 오래 매달리지는 않았다. 우선 아기를 찾는 게 먼저였고 자책은 그 후였다.

아기가 우는 건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발 아기가 울어서라도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길 바랄 정도로 간절해졌다. 

불안감이 점점 커져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눈앞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앞이 보이지 않아질 정도였지만 그는 자신의 눈에서 앞을 가리다 못해 넘쳐서 창백한 뺨을 뜨겁게 쓰다듬어 내려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많이 잡아도 방문 앞을 떠나서 이유식을 만들고 있는 동안, 아기가 가장 싫어하는 그 시간 동안 흙바닥에 남겨놓았던 작은 발자국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버렸다. 그 시간은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기는 물론 어린아이들이 미아가 되기엔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 내에 아기의 걸음으론 숲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였다.

처음에 했던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생각이 번쩍 튀어나와 그의 머릿속을 붙잡았다.

어느새 뛰는 것도 멈춘 채 숨을 거칠게 내쉬던 그는 깊게 들이쉬며 고르기 시작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 주위와는 반대로 남아있던 눈물들을 마저 털어낸 눈은 냉랭하게 식어있었다.

“...허!”

짧게 토해낸 숨과 함께 나온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녹아들어있었다. 그 복잡하게 섞인 감정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분노였다.

“나와.”

뒤이어 나오는 목소리 또한 싸늘하기 그지없었지만 반대로 그의 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매우 끓어있는 상태였다.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건 나무와 바람에 쓸리는 풀들의 소리 뿐, 그가 바라보는 곳엔 사람 그림자는 물론 숨소리조차 다가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나와.”

순간 무언가가 흔들리는 듯한 기색이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계속해서 주시하던 곳으로 다가갔다. 급하게 달려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걷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을 잡으러 가는 사냥꾼의 발걸음과 같았다.

빽빽하게 늘어서있는 나무들 아래의 그림자로 다다른 순간

“빠빠아아아!!”

그토록 간절했으며 애를 태우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평소라면 저렇게 크게 소리를 내면 작은 목이 망가지지 않을까라는 걱정 담긴 생각이 자리잡았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것보다도 반가웠으며 간절한 소리였다.
숨이 턱 막히는 것과 함께 급하게 뒤를 돌아보자 평소 또렷하게 반짝이던 녹색 빛에 물기가 가득 담겨 아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뺨에 잔뜩 자국을 남기다 못해 계속해서 떨어지는 빛들은 흙투성이인 작은 맨발 위로 떨어져 산산히 부서지며 빨갛게 부어오른 여린 살들을 쓸어내려가 흙바닥에 짙은 자국을 남기며 숨어들어가고 있었다.

마법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바로 아기에게 달려갔다. 몸을 숙이고 팔을 벌려 작은 몸을 안아 올리고 작은 손도 자신보다 큰 옷자락을 꽉 잡아 놓지 않았다. 들썩이는 등을 한 손으로 쓸어주며 천천히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퍼블리.”

제 이름을 부르자 우는 걸 멈춘 아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아직 들썩이며 완전히 진정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는지 그의 어깨에 조그마한 얼굴을 파묻으면서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기가 완전히 진정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아기의 등을 쓸어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 고른 숨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울다가 지쳤는지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감은 채 잠든 아기의 뺨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그에 안도감과 까맣게 타들어간 속상함을 담은 한숨을 내쉬고는 눈보다 더 빨갛게 부어오른 발이 아프지 않게 고쳐 안으며 굳은 몸을 움직였다.

몇 발작 걸어가던 마법사가 다시 멈춰섰다. 이내 뒤를 돌아본 그의 눈은 아기를 바라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아기가 나타나기 전에 계속 주시하던 곳을 쏘아봤다. 작게 입을 달싹였지만 그 입에서 나온 한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는 그대로 자리를 뜨며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다.

고요함만이 남은 그곳에서 나무들 아래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



“빠아?”

“불편한가?”

“무으야?”

“외출용으로 새 옷을 하나 마련했다.”

“새오오?”

아기가 제일 먼저 깨우친 게 언어적인 면이라는 걸 새삼 느낀 마법사는 글을 배우는 것 정도는 빠르게 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서재에 있는 책들 중에서 아기의 말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용 책은 없던 걸 떠올리고는 이번에 가는 김에 부탁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교육에 대한 열을 점점 불태우고 있는 동안 아기는 처음 입어보는 옷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불편한 기색 없이 좋아하고 있었다.

특별히 꾸미기 위한 장신구는 없지만 머리카락에 돌고 있는 색처럼 푸른 천을 눈 색을 따라 맞춘 녹색 천으로 만든 끈이 감싸 단정하게 모양을 잡았다.

아기를 무릎에 앉히자 신이 났는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짧은 머리카락을 빗으로 부드럽게 빗어주려고 했지만 놀아주기 위해 장난감을 꺼낸 줄 알았는지 손에 들려있는 빗을 향해 작은 손을 뻗는다. 그 손을 잡아주며 머리를 쓸어주자 또다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엉키진 않았지만 머리카락들의 길이가 서로서로 다른 게 눈에 들어오자 언제 한 번 다시 다듬어줘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빗질이 끝났다.

“너는 이번이 두 번째로 가는 거겠구나.”

“므?”

“늘 찾아오시는 할아버지네로 가는 거다. 그리고 그건 입에 넣는 게 아니야.”

내려놓은 틈을 타 빗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걸 막아 아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올려놓은 후 흰 양말과 아기의 발을 잡았다. 간지러운지 발을 흔들지만 잡고 있는 힘이 더 강했다. 계속해서 흔드는 아기의 발을 보고 마법사의 얼굴이 낮게 가라앉았다.

얼마 전, 문고리가 망가진 문을 나선 아기는 바로 앞의 숲에서 길을 잃었었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은 강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두려움 또한 강했다. 숲으로 들어선 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호기심 대신 두려움이 일어났고 마법사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거친 흙바닥을 밟으며 돌아다닌 발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돌에 긁혔는지 상처까지 생겼다. 상처를 가만히 보고만 있고 내버려둘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아기의 발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마법약으로 다시 부드러운 아기발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 빨갛게 부어오른 발이 떠오르는지 가라앉은 얼굴은 다시 돌아올 기색도 없었다.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양말을 마저 신겨줬다. 다른 맨발도 마저 양말을 신겨주기 위해 발을 쥔 손을 놓은 그 순간 아기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법사의 무릎에서 내려와 방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얼마 안 가 잡힌 아기는 나머지 발도 버둥거렸지만 결국엔 양말이 모두 신겨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아기는 그제야 다시 뛰어다녔고 마법사 또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회색 천으로 만들어진 외출용 로브를 두른 채 아기를 안아들고 문고리를 고친 문을 열었다.

“가자.”

집 밖의 숲을 벗어나 늙은 마법사가 있는 마을로 가는 내내 아기의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허어 오늘은 약새풀이 타면서 열기를 냈나? 웬일로 찾아왔어?”

늙은 마법사는 웃으면서 반쯤은 진심을 담아 마법사에게 물어봤다. 물론 그 말이 정말로 틀린 게 아니라 보통은 민망함을 느끼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거나 시선을 피할지도 모르지만 마법사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그도 늙은 마법사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어느 정도 뻔뻔함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문득 주름진 눈가가 씰룩였다. 마법사도 눈치 챌 정도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이 아니었으면 어린아이라고 생각될 법한 밝게 빛나는 눈이 빤히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아기를 꼭 껴안고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저번에 보니 걸음마도 곧잘 하던 것 같던데 신발이 없는 걸 보면 오다가 잃어버린 건 아닐 테고...”

꽤나 재밌는 걸 발견한 것처럼 눈빛이 더욱 부담스럽게 반짝인다.

“집에서부터 계속 안고 왔어?”

마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문을 넘어서 바깥까지 뛰어나가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귀로 뛰어든다. 마을 사람들은 그 웃음소리가 익숙한지 계속해서 웃음소리가 나오는 집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다시 제 할 일들을 하러 간다. 웃음소리가 멈춘 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저렇게 뛰어다니는 거 많이 답답했나본데? 설마 자네한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렇지만 너무 그렇게 싸고도는 것도 안 좋다고?”

호수가 가까이 있는데다가 아기를 키우는 마법사들도 있는 마을이라 시선을 받을 만한 일은 없었지만 아기는 낯선 곳이 두려운지 오는 내내 마법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왔었다. 

다행히도 마법사의 집으로 자주 찾아오던 늙은 마법사 덕에 얼굴이 기억에 남았는지 집에서처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안정을 되찾은 아기의 모습에 안도와 함께 떠오른 얼마 전 기억에 조금 쓰라림을 담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큰 웃음이 멈추고 잔웃음이 나오던 입도 부드러운 호를 지운 다음 딱딱한 선을 머금었다. 오랜 세월을 장난과 웃음만으로 살아온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 그 모습에 안심한 마법사는 안도 섞인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웬 일로 찾아왔어? 보니까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늙은 마법사가 눈치 빠르게 먼저 말을 꺼낸 덕에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잡혔다. 아기는 무거움도 못 느끼고 마냥 기분 좋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 아기에게 잠시 눈길을 준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질질 끄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그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잠시 동안 퍼블리를 맡아주세요.”

진지하게 꺼낸 본론은 사실 늙은 마법사에겐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기를 돌본 경험이 있는 것은 물론 마을 내에서 아기를 키우는 마법사들 모두 그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그만큼 능숙한 사람은 없었기에 그의 끝없는 장난기에 머리를 붙잡고 그의 웃음에 불안감을 가지는 사람들이었지만 아기를 돌보는 것에 관해선 진지했고 그를 믿었다. 

가끔 일이 있는 사람도 아기를 옆집보단 그에게 맡겼다. 그도 자신의 능숙함을 알기에 서슴없이 맡았고 마을 내의 아기들과 아이들은 그를 잘 따랐다.

그만큼 그는 눈치가 빨랐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에게도.

“뭔가 일이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졌군 그래?”

“약새풀을 입에 넣어줘도 시원찮을 녀석이 숲을 방패삼고 그림자를 두르더군요.”

“그 시원찮을 녀석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였어? 이것 참...마냥 웃으면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에 딱히 불만을 담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그것보다 처리해야 할 일이 더욱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네 성정엔 퍼블리를 더더욱 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비록 자네 몸이 그 지경이 되었다지만 오히려 그만큼 자네 마법 효과는 굉장할 텐데.”

그 말에 마법사는 시선을 조금 돌려 늙은 마법사의 뒤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기를 바라봤다. 성장이 매우 빠르지만 아직은 아기인 마녀. 시선을 느꼈는지 아기가 고개를 돌린다.

“꺄하!”

아기 특유의 맑은 웃음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 퍼진다.

그는 아기를 바라보며 마주 웃어줬지만 그 안엔 조금 씁쓸함이 담겼다.

“퍼블리가 혼자 있는 걸 싫어하더군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어른들 사이엔 침묵이 다가와 그들의 입가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고 아기가 뛰어다니는 소리만이 내려앉으려는 적막을 열심히 쫓아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늙은 마법사였다.

“그래 맡기는 건 문제 없어. 다만 퍼블리가 싫어할 거야.”

“퍼블리가 잘 따르는 사람은 지금 저 외엔 당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보다 아기를 잘 돌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 맡기는 겁니다.”

아기가 싫어한다는 말에 이해가 안 가는지 의문 섞인 말을 건네고는 제 앞에 놓인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해진 커피를 조금 마신다. 그에 늙은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다. 잔이 다 비워지지 않았지만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아기가 그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빠아?”

아기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토박토박 걸어와 마법사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 귀여운 모습에 잠시 웃음이 터진 마법사는 무릎을 굽혀 앉아 아기의 예쁜 녹색 빛을 마주하고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라.”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멍하니 입을 벌리며 서있던 아기가 눈을 깜빡이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아직 아기의 다리로는 따라잡기 힘들었다. 아기가 문에 도착하는 것보다 마법사가 문을 열고 나가는 시간이 더 빨랐다.

“빠빠아아아아!!!”

아기는 이미 닫힌 문을 작은 손으로 두드리며 마법사를 불렀지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아기의 어깨가 점점 들썩이며 녹색 빛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늙은 마법사는 한숨을 쉬며 아기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조심히 안아올렸지만 아기는 여전히 버둥거렸다. 그에 늙은 마법사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똑똑하던 녀석이 이럴 땐 멍청해지는구만.”



*****



아기를 늙은 마법사에게 맡기고 나온 마법사는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길목에 멈춰선 채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발길이 자주 닿아 자연스럽게 풀이 몸을 비켜 만들어진 흙 길 외엔 온통 풀밖에 보이지 않는 초원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눈을 감은 그는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가 조금씩 내쉬었다.

“나와.”

바람만이 조금 불어와 그의 말을 담아갔지만 얼마가지 않아 흔적도 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주변엔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은 물론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는 그를 지나가는 바람의 손길을 느끼며 마음속에서 약간의 인내심이라는 꽃을 피워냈다. 꽃의 씨앗도 그걸 자라게 해줄 물도 없던 그 꽃은 순식간에 피어났고 어디선가 날아오는 바람으로 단숨에 피워낸 꽃잎들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허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감은 눈으로 꽃잎들을 바라봤지만 얼마가지 않아 흩날려진 꽃잎들은 사라졌다. 그의 짧은 말처럼.

언제나 걷을 수 있는 얄팍한 휘장이 묵직하게 들어져 푸른색을 보였다. 어쩌면 인내심이란 그 눈에 담겨지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흩날리며 사라진 꽃잎에 호응했는지 푸른색을 기다리던 노란색이 흥미를 담은 채 반짝인다.

“안녕하심까?”

아무것도 없었던 길목 한가운데 마법사의 바로 앞에 키가 큰 마법사가 서있었다.
두르고 있는 로브는 검은색이었다. 머리카락도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이 아닌 건 하얀 얼굴과 한쪽에 검은색을 함께 품고 있는 노란빛이었다.

마법사는 마법사를 만났다.







푸른 달





“퍼블리!”


푸른색을 머금은 하얀 머리카락들이 부드러운 천처럼 흔들린다. 하얗고 가벼운 천으로 만든 옷은 시원해 보였지만 땀에 젖어있었다. 어깨에는 닿지 않지만 목을 거의 덮을 정도로 길어진 머리카락들이 더웠는지 머리카락을 그러모으던 손이 멈췄다. 


머리카락 아래에서 깜빡이는 녹색 빛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 시선 끝에 노란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은 아이가 반가운 기색이 만연한 얼굴로 손을 높이 든 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에 따라 마주 손을 들어 흔들어주며 달려오는 친구를 맞이했다.


“아니카!”


아기는 어느새 아이가 되어있었다.


“요즘엔 마을에 자주 오는 것 같네?”


“그건 아니카 너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자주 왕국에서 나오는 걸? 그 때마다 내가 놀러나가고 싶다고 떼를 썼지!”


아이들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서로 꺼내서 건네기 바빴다. 그 사이에 서툰 말이 나오면 다른 아이가 고쳐주는 식으로 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주변을 채우는 아이들의 대화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닿았지만 익숙한 상황인지 금세 흩어졌다.


간혹 가다 조금 오랫동안 머무르는 시선들이 있었는데 주로 그 시선들은 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에게 머물렀다. 아니카라고 불린 아이는 마을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을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움직이기 편하게 만든 흰색 계통의 옷이 대부분이었다. 아니카의 옷은 좀 더 격식을 차린 외출용 옷으로 보였지만 마법사들이 입는 로브가 아닌 마녀왕국의 상징인 장미무늬가 새겨진 녹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아니카는 마을에 자주 놀러오는 어린 마녀아이였다.


“엄마가 그나마 여기 GM 마법사님이랑 친분이 있으셔서 안심하고 나를 놔두고 가는 거지 다른 데는 어림도 없어. 사실 나처럼 이렇게 자주 나오는 애들도 거의 없어.”


“왜 거의 없어?”


“어른 마녀들이 엄청 싸고돌거든. 절대 왕국 밖으로 못 나가게 해.”


퍼블리는 아니카의 말을 듣고는 그대로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아빠인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도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선 아이를 많이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자라면 자랄수록 활동적이고 점점 호기심이 두려움을 밀고 나오는 아이 덕에 밖으로 나가는 편이 많아졌다.


살고 있는 집 바로 앞의 숲 일부 정도만 들어가게 할 수 있게 했다. 숲 자체는 이미 마법사가 전부 길을 다 알고 있었지만 아기 때 있었던 일 때문에 늘 함께 다니기 일쑤였다. 


그나마 숲을 나오는 길과 마을로 오는 길은 알게 되었는데 그건 부득이하게 마법사가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없었을 때였고 절대 아이를 혼자두지 않았기에 늙은 마법사가 있는 마을로 찾아가느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남게 된 길이었다. 


물론 아이는 얌전히 기다리는 성격도 아니었고 늙은 마법사도 억지로 애를 붙잡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게 마을 내에서 뛰어다니며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친해지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마을로 온 아니카를 만나게 됐다.


“근데 너희 아빠는 왜 안 보여? 우리 엄마는 GM 마법사님이랑 얘기하다가 뭐 찾을 게 있다면서 항상 풀떼기를 들고 오는데 너희 아빠는 본 적이 없어.”


“음...우리 아빠는 이사한? 이사아한?”


“이상한.”


“응. 이상한 아..아자...띠?”


“이상한 아저씨?”


만약 그 이상한 아저씨가 아이들 곁에 있었다면 아저씨가 아니라며 징징거렸을지도 모를 테지만 원래 얘기의 주인공은 자리에 없는 법이었다.


퍼블리의 말을 고쳐주며 다음 말을 재촉하면서 이어주는 아니카 덕에 퍼블리는 어려운 아직 자신에겐 어려운 단어들을 곱씹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퍼블리의 말을 듣던 아니카는 전부 끝났을 때 자신의 머릿속 방식대로 요약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아저씨가 나타날 때마다 너희 아빠한테 껄떡대고 너희 아빤 썩은 표정으로 너를 GM 마법사님한테 맡긴다 이거네.”


“껄떡? 썩은 표정?”


“아, 썩은 표정은 네가 말한 나빠 보이는 얼굴을 말하는 거고 껄떡댄다는 건 그 아저씨가 너희 아빠 어깨나 허리 끌어안는 거랑 이상한 말들 하는 걸 말하는 거야. 음...잠깐만! 껄떡댄다는 거 더 정확한 단어가 있었는데? 으으...그래! 구애행위!”


마법사가 들으면 기함할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아니카였다. 퍼블리는 그런 아니카의 말을 듣고 껄떡, 썩은 표정, 구애행위를 조용히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좋은 것만 듣고 살아갈 순 없다면서 어른 마녀들과 마법사들이 종종 합리화를 하는데다가 마법사도 최대한 엄한 말들을 멀리하고 있지만 언젠가 듣게 될 거라고 각오는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저건 아니라며 피곤함을 가득 담은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거나 아니카의 입을 막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마법사는 아이들 곁에 없었다.


“어쨌든 그 이상한 아저씨가 너희 아빠를 좋아하는 거야.”


“좋아해?”


“그리고 너희 아빠는 그 아저씨를 싫어하고.”


“싫어해?”


그렇게 아이들의 얘기는 길어졌다.




*****




제대로 마주한 첫 만남은 매우 최악이었다.

주변에 있던 모든 풀들이 불타버려 재가 되거나 얼어붙은 채로 부서지는 건 기본이었고 발자국이 찍혀 있던 흙은 금세 뒤엎어져 재가 되거나 얼음조각이 되어버린 풀들과 뒤섞이다 못해 함께 하늘을 날았다.


그 상황은 두 마법사의 작품이었는데 정확힌 한 마법사의 공격마법과 다른 마법사의 방어마법이 함께 이룬 합작이었다. 중간에 방어마법을 펼치며 피하는 마법사가 대화를 청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단 게 문제였다. 그렇게 화려한 마법의 난사는 공격하던 마법사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질 때가 되어서야 멈췄다.


사실 방어하던 마법사가 먼저 안색이 나빠졌지만 마지막 힘을 짜내어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만약 주위에 구경꾼이 있다면 절로 박수를 쳤을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다만 도망친 마법사는 마지막에 보여줬던 끈기만큼 매우 끈질긴 마법사였다.


“안녕하심까?”


다음날 아침, 문을 열어보니 뻔뻔하게 웃는 낯짝이 높게 있었다.


전날 그렇게 마법을 난사하다시피 한 후에 마법사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안겨드는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기도 하루 종일 우느라 마법사 못지않게 피곤했는지 오는 동안 그의 품에서 잠든 채로 도착했고 마법사 또한 옷을 아기를 이불 위에 눕힌 후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옆에 쓰러져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깬 마법사는 붕 뜬 머리카락도 미처 정리할 생각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분명 상대방도 안색이 나빠질 정도로 방어마법을 써댄 것도 모자라 그대로 순간이동 마법까지 썼을 텐데 그와는 다르게 매우 쌩쌩한 낯이다.


마법사는 스물스물 기어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아직까지도 피로는 회복되기는 커녕 더더욱 쌓인 상태인데다가 집 안엔 아기까지 있다. 상대방은 회복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저 우위를 잡기 위해 연기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현재 자신은 그 연기마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그렇게 노란 빛과 생각하는 동안 마주한 끝에 결론을 냈다. 마법사는 그대로 얌전히 문을 닫았다.


처음보다 더 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마법사는 그대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아기의 옆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거 참, 너무 살벌하신 거 아님까?”


“진짜 살벌한 게 뭔지 몰라서 그런 소릴 하고 앉았군 그래.”


“손에 들려있는 칼부터 멀리 두시고 대화로 풀어나가길 바람다.”


마법사의 손에 들려있는 칼은 무기로 휘두르는 것처럼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비록 불청객의 목에다 바로 갖다 대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현재 그의 표정을 보면 진즉에 하고도 남았을 걸 간신히 인내하고 있다는 뜻을 가득 담고 있었다.


위협당하는 불청객은 처음에 만났을 때와 같이 웃는 얼굴이었지만 목 뒤로 흐르는 식은땀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며 경계를 낮추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움직임에 경계가 더 강해졌는지 칼을 든 손이 움찔거렸다.


“우선 한 가지 오해를 풀고자 하는데 전 퍼블리를 건든 적은 없슴다.”


“누구 마음대로 내 아이 이름을 부르는 거지?”


“이름정도는 봐주십쇼~ 숲에서 그렇게 애타게 부르면서 찾...어이쿠!”


빠르게 칼을 휘두르지만 잽싸게 피한 덕에 뒤로 물러나며 흩날리는 머리카락도 건드리지 못했다. 애초에 위협을 반 정도 담아 휘둘렀기에 어느 정도 싸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있을 속도였다. 물론 나머지 반은 진심이었기에 싸운 경험이 없거나 별로 없는 경우라면 피를 보거나 머리카락이 날아가는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일단 다시 말할 테니 부디 그 살벌한 칼 좀 예쁜 손에서 놓으십쇼!”


칼은 탁자 위에 올려놓는 걸로 살벌한 대치를 마무리 됐다. 물론 완전히 마무리 됐다기엔 칼은 방금 전까지 휘두르던 사람 바로 앞에 놓아뒀기에 언제 다시 손에 쥐어질지는 앞으로 꺼낼 말에 달렸다.


“일단 제가 건드린 건 바로 당신임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칼을 들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어진 것 같네만?”


“우연히 숲을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누군가가 퍼블리라는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서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흥미로워서 빙글빙글 돌게 미로마법을 걸어서 지켜봤을 뿐입니다. 설마 찾는 게 아기였을...”


다시 한 번 칼이 휘둘러졌다. 이번엔 진심이었기에 기겁하며 잽싸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멀찍이 물러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칼부림이 일어났지만 용케 가구들에 스치는 일은 없었다. 결국 피 한 방울도 나는 일 없이 사태는 끝이 났다. 칼을 휘두르던 마법사가 지쳐보이는 얼굴로 멈춰섰기 때문이다.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면서 혀를 찬 그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치상태를 이용해 나름대로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진정하고 다시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긴장해서 흘린 식은 땀 외에는 불청객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불리한 건 자신이었기에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서, 아기를 찾아 숲을 돌아다니던 사람한테 미로마법을 쓰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까지 찾아와서 대화를 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뭘 원하는 거지?”


그의 말에 불청객은 빙글빙글 웃던 낯을 싹 지우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에 긴장하며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마주 쏘아보기 시작했다. 칼을 쥔 손에 힘을 더 주고 마력을 불어넣으며 언제 날아올지 모를 공격과 마법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마치며 자세를 조금 낮췄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던 불청객이 그를 따라 몸을 조금 숙이자 새삼 큰 키를 실감하게 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점점 더 경계하는 그를 향해 다시 환하게 웃더니 드디어 말을 꺼냈다.


“그쪽 얼굴 정말 제 취향인데 키스해도 됩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말이 나온 입을 향해 탁자가 뛰어들었다.




*****



“이쯤 되면 제 정성을 알아주실 때가 됐지 않슴까?”


“자네의 변태성에 대한 정성을 말인가?”


“저의 끈질긴 순애성에 대한 정성을 말이죠.”


“순애성이 언제부터 변태성이 되어있었지?”


한 마디도 빼먹지 않는 그의 성정에 늘 한 발 물러서는 건 불청객이다.


다만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지우지 않는 얄미운 미소는 언제나 감정적인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나타내고 있는지 지워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에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 마법사의 3년 동안의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만약 불청객의 가장 처음이자 표면적 목적이 그의 일상으로 파고드는 것이라면 이미 성공한지 오래라고 할 수 있었다.


새삼 다시 올라오는 경계와 함께 심란한 마음까지 그 끝자락에 붙어 끌려올라온다. 이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뻔뻔하게 웃는 얼굴은 늘 그랬듯이 일상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아기의 성장은 빠르다고 들었지만 설마 저렇게 빨리 자랄 줄은 몰랐네요.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빠른 것 같았지만...”


“꼭 보호자라도 되는 듯이 말을 하는군.”


“몇 년 동안 이렇게 찾아오다 못해 붙어 다니는데 보호자가 아니면 이상한 거 아닙니까? 이제 보니 우리는 부부인...말은 하고 공격을 하십쇼!”


“말을 하면 자네의 헛소리만큼이나 의미가 없지. 그렇게 원한다면 특별히 친절을 베풀어서 말해주겠네, 한 번으로 끝날 거란 생각은 접게.”


매섭고 빠른 공격이 다시 날아온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피하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지다 못해 철철 넘쳐흐를 정도였다. 그에 마법사는 사람의 속을 긁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에 감탄 반, 짜증 반을 담으며 발을 휘둘러 그의 다리를 찼다. 


다리 공격은 예상치 못했는지 맞은 부분을 붙잡고 아파하지만 사실 찬 사람의 발이 더 아팠다.


“...자네는 강철로 된 바지라도 입고 다니는 건가?”


“윽..뭐..제 입으로도 말하긴 뭐하지만 제가 다른 사람 속을 긁는 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서 말임다. 그러다보니 맞을 때를 대비해 온 몸에 방어마법을 두르고 다니죠.”


“자네의 그 천부적인 재능은 겸손 떨지 않고 자네 입으로 자랑스럽게 말해도 되네. 나 또한 인정하는 바니까.”


진심과 비꼼이 들어간 말에도 그저 웃음을 유지하고 있는 얼굴은 정말 얄미웠다. 사실 그 얄미운 웃음의 주인이 매일 온 몸에 방어마법을 두르고 다니게 된 건 마법사가 3년 동안 날린 공격들 때문이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만약 말하면 망설임 없이 더 강한 공격들이 날아오리라.


“그보다 이렇게 저랑 만날 때마다 퍼블리를 놔두고 와도 되는 겁니까? 저야 단 둘이 데이트하는 게 좋지만 애는 보호자랑 같이 있고 싶어한다구요?”


그에 마법사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에 그의 둔함을 지적하게 돼서 기쁜지 얄미운 얼굴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마법사의 속에서 표정과 함께 떠오른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얄미운 불청객이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거에 놀랐다. 설령 그게 마법사의 아이일지라도.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 그리고 누구 멋대로 퍼블리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겐가.”


“에이~ 계속 애라고 부를 수도 없잖슴까? 이름 정도는 허락해주십쇼.”


“그렇게 말해서 은근슬쩍 내 이름도 가르쳐달라고 하지 말게.”


은근히 낮게 깔리고 능글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꺼낸다. 그에 아쉬운지 혀를 살짝 깨물듯이 쏙 내놓는 모습에 어림도 없다는 듯이 짧고 단호하게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린다. 그런 그가 귀여워 보이는지 제 키에 맞게 제법 큰 손을 살살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으로 뻗었지만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허공을 휘저었다.


“거 너무하심다!”


“다짜고짜 남의 머리에 손을 뻗는 게 더 무례하고 너무하지 않나.”


“우리 딸기님이 너무 귀여운 바람에 애정을 담아서...”


“자네의 애정 따윈 필요 없네. 그리고 누가 딸기인가?”


수차례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렸지만 가르쳐줄 이름은 없다는 그의 말에 멋대로 애칭이랍시고 붙여놓은 게 바로 딸기였다. 물론 처음 그 단어를 들었을 땐 질색하다 못해 주변의 물건들이 그의 손에 의해 날아다니기 일쑤였다. 이젠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반박하는 걸 보면 불청객의 시점에선 장족의 발전이요 그의 내면에선 반쯤의 체념이었다.


“머리카락이 새빨간 게 꼭 딸기 같이 예쁜 색이라서 붙여준 애칭인데 말임다. 게다가 딸기는 맛있다구요? 마녀왕국에서 재배하는 딸기도 맛있지만 야생딸기는 더더욱 달달하니 상상만 해도 딸기향이 맴도는 게 근처에 야생딸기가 있는 건가 돌아보게 만들지 뭡니까.”


마녀왕국이라는 말에 순간 마법사의 눈가가 살짝 떨렸지만 태연하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다. 그런 그의 동요를 발견한 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이 노란 빛을 둥글게 감싸며 가리고는 입으로 마저 이야기를 꺼낸다.


“나중에 저와 함께 마녀왕국에 가보시지 않겠슴까?”


“내가 왜 자네랑 가나?”


“마녀왕국 안에 데이트 명소가 꽤 많습니...”


언제나 대화의 끝은 불청객의 말이 끊어지면서 끝났다. 마법사의 공격으로 인해 말이 끊어지는 경우는 많았지만 대화를 끝내는 건 불청객의 뒷주머니 안에 자리 잡은 채 빛과 진동을 일으키는 통신 수정구였다. 


그 뒤는 지난 3년 동안 변함없었고 변함없었던 만큼 자연스러웠다. 수정구를 확인하는 불청객을 뒤로한 채 마법사는 아이가 있는 마을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의 뒤엔 아무도 없었다.




*****




“그래서, 네가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는 딸기가 1년하고도 3개월 동안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잠수를 타고 딱 3년되는 나머지 1년하고도 9개월이랑 거기에서 지금까지 이은 빌어먹을 땡땡이를 일삼는 이유다 이거냐?”


“그만한 가치가 있는 흥미롭고도 예쁜 딸기니까 계속 얼굴을 익혀줘야지 안 그럼 다른 녀석들이 채갈테니 당연한 거 아님까?”


“오냐 X발! 오늘 그냥 너 죽고 다 때려치자 이 사시 배추머리 새꺄!”


갖은 욕설과 함께 화려한 불과 날카로운 빛들이 방안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에 함께 날아다니는 물건과 그 파편들은 덤이었다. 그 사이를 채우는 건 상당한 검열을 요하는 엄청난 수의 욕설들과 성질을 긁는 웃음소리였다. 마법들과 물건들과 욕설들을 부드럽게 피하던 자는 피하는 내내 방금 전까지 보고 왔던 사람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마녀를 키우는 마법사라니 정말 흥미롭지 않습니까?




*****



“아빠아아!”


아이는 이제 아기 때처럼 마법사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일은 없었지만 그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에 친구와 하던 얘기도 다 끝내기 전에 그에게로 손을 뻗으며 달려가기 바빴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곁에 있던 친구인 아니카는 제법 놀랐는지 늘상 입에 달고 다니던 미소도 내려놓고 입과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뜨던 눈 또한 동그랗게 만들고는 그 뒤에서 아이를 빤히 바라봤다.


달려오는 아이를 안아 올린 마법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마주 바라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늘 마을 아이들과는 조금 아슬아슬하게 차이가 나는 아이와 달리 입은 옷이 다른 것도 있지만 멀리서 보아도 확연하게 다르면서 가장 눈에 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주한 덕에 불안함이라는 팽팽하면서도 가는 실이 그의 심장을 쓸면서 놀라게 했다.


마녀다. 그것도 또래의.


마녀아이는 둘을 빤히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이내 네 걸음 정도 떨어져서 멈춰선 후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아니카예요. 퍼블리가 그렇게 반가워하는 걸 보면 당신은 퍼블리네 아빠인 것 같네요.”


복잡한 단어 없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나올만한 말이었지만 문제는 그 말을 꺼낸 게 마법사의 다리 길이도 되지 않는 어린애에게서 나온 말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이 빠른 게 불안하면서도 내심 뿌듯했지만 더듬지도 어린애처럼 발음이 조금 어눌한 감도 없는 마녀아이를 보며 뿌듯함을 내리누르고 불안함을 약간 덜어냈다. 애초에 마녀들의 교육방식도 모르는데 아이가 마녀아이들처럼 될 거라는 생각 자체가 설레발이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심하다는 자책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쉬면 빨리 늙으니까 안 쉬는 게 좋을 거예요. 한창 얼굴이 탱탱하고 빤들빤들할 때부터 관리해야지 안 그럼 오랫동안 물 먹은 손처럼 쭈글쭈글 해져요?”


마법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추스르고는 묘한 눈으로 바라보기 무섭게 마녀아이의 입은 거침없었다.


“이렇게 술술 말하는 어린애가 신기한 건 알겠지만 재주 많은 호수 속 물고기 보듯이 보면 실례인 거 아시죠?”


과연 저 말을 꺼내는 애가 기껏해야 서너살 정도 먹었을 어린애란 말인가. 물론 성인 마녀가 마법으로 변신한 게 아니란 것쯤은 마법사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마법의 흔적 자체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왕국 바깥에 볼일이 있던 마녀가 일을 해결하는 동안 자신의 아이를 마을에 두고 간 것이겠지. 


그 마녀는 이 마을의 기둥인 늙은 마법사와 어느 정도 작은 친분이라도 지니고 있을 테고. 대충 그려지는 상황에 아직까진 친구가 된 저 작은 마녀 외엔 마녀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으니 일단은 괜찮지만 더 이상 아이를 마을에 맡기기엔 위험부담이 큰 것 같았다.


아이는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 하나를 풀면서 뒤돌아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고쳐 안으며 발을 돌리던 마법사는 마녀아이에게 말했다.


“아직은 어린 덕에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말해두마. 마법사 앞에서 재주 많은 물고기라는 말은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란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는 마법사가 말을 꺼낸 후에 바로 돌아선 이유는 아마 마녀아이의 멍한 표정을 모르는 척 해주겠다는 배려이리라.


“아빠, 아빠! 아빠는 그 이상한 아저씨가 싫어?”


집에 도착했는데도 품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이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꺼내자 당황한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이는 확신했는지 입을 앙 다물었다.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이 다문 입술에 의해 올라가자 안 그래도 귀여운 얼굴이 더 귀여워졌다. 그에 작게 웃음이 터진 그였지만 아이는 그의 웃음을 못 봤는지 눈까지 꼭 감은 채 무언가 중얼거리듯 입을 우물거리고는 다시 눈을 뜨며 단호한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아빠 지켜줄게!”


갑작스러운 아이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은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아이는 제 할 말을 계속해서 꺼냈다.


“그 이상한 아저씨가 아빠한테 구애행위라는 걸 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 아저씨가 껄떡대니까 아빠가 늘 썩은 표정 지으면서 나 할아버지네 마을에다 맡기고 간다는 것도!”


구애행위라니, 껄떡댄다니, 썩은 표정이라니, 분명 그런 말들을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 그가 살아온 모든 세월에 맹세컨대 절대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아이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터라 그대로 굳어있자 잔뜩 힘을 준 아이의 눈에 불이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르던 마법사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한숨만으로는 진정이 안됐던지 두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마 저 말들은 그동안 같이 놀던 마녀아이에게서 배운 말들일 것이다. 


언제부터 같이 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제대로 말을 배운 아이에게 잊으라고 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물론 바르고 고운 말들만 들으면서 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하다못해 저 말들은 아니었다.


“...퍼블리.”


“아빠.”


“그러니까..그 구애행위라는 말...”


“응! 그 아저씨는 아빠를 좋아하지만 아빠는 그 아저씨 싫어하니까!”


아이의 말에 그의 말이 멈췄다. 그대로 손을 내려놓고 아이를 바라보니 드물게 눈썹이 미간으로 모이고 바깥을 향해 솟아있었다. 그런 단호한 얼굴을 보자니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진 그였지만 이번 웃음은 어딘가 차가웠다. 


그런 속을 알 리가 없는 아이는 제가 보기엔 아빠가 지켜주겠다는 자신의 말에 기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에 주던 힘을 풀며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제야 그의 품에서 폴짝 내려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아이를 보던 그는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처음 제대로 만났을 때부터 속을 긁어놓질 않나, 저랑 사귀자고 하질 않나. 의심 갈 정도로 가볍게 굴면서도 입은 매우 솔직했다. 그는 아까 전까지 보고 왔던 사람을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눈에 흥미만 가득 담고선 한 번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 않나?




*****




마법사는 한숨을 내쉬려다 멈췄다. 마녀아이의 한숨 쉬면 빨리 늙는다는 당돌한 말이 짧게 스쳐지나갔지만 꼭 그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이의 앞에서 한숨을 쉬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참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고뇌하다가 이내 숨을 천천히 고르고는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장을 보며 누워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녹색 눈은 마치 전구처럼 빛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졸린 기색 없이 또렷했다.


“...퍼블리 얼른 자야지.”


“안 졸려!”


그래 그건 나도 아주 잘 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낮잠까지 거른 건 자고 싶지 않다는 걸로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낮잠을 자는 게 좋지만 꼭 필수는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잠들어야하는 밤에도 졸리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 더군다나 늘 자던 낮잠도 거른 아이가 졸리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퍼블리.”


“안 졸려!”


아이는 고집스럽게 졸리지 않단 말만 반복하며 눈을 부릅떴다. 이쯤 되면 졸리지 않은 게 아니라 일부러 졸음을 쫓아내고 있는 걸 마법사가 모를 리 없었다. 그에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이 더욱 가늘어지며 예리해지지만 아이의 고집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물론 아이를 상대로 계속해서 눈을 찌푸릴 순 없기에 눈을 꾹 감던 그는 조금 표정을 풀고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마.”


옛날이야기란 옛날이라는 무대를 바탕으로 진실과 허구를 섞어서 만든 재미있는 사건으로 듣는 사람의 흥미를 돋우며 이야기를 재촉하게끔 만들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꺼내면 아이가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더 잠을 자려고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전통적인 역사 수업은 지루하기 마련이었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한시름 덜어놓았는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이내 아이를 따라 잠에 빠져들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눈은 쉽게 떠지지 않았다. 아마 그 뺀질거리면서 속을 긁는 녀석이 또 찾아왔으리라. 이대로 무시하고 다시 잠들어도 녀석은 아마 끝까지 기다리다 못해 직접 집 안으로 발을 들일 것이다. 그러다가 아직까지 자고 있는 자신을 보고 머리맡에 앉아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게 눈에 훤했다. 


아니면 저번처럼 그 긴 손가락으로 제 볼을 꾹꾹 눌러대다가 깨어난다면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예쁜 얼굴을 가만히 보면서 아끼는 것도 좋아하지만 너무 예뻐서 유혹 당했다고 뻔뻔하게 말을 하겠지. 그럼 그 때서야 그 웃는 낯짝에 침 대신 베개를 던지고 일어나도 괜찮았다. 지금은 너무나도 졸렸다.


잠에 취한 마법사는 조금 아래로 흘러내려간 이불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이불을 끌어올렸다. 옆에 있을 아이에게 다시 제대로 이불을 덮어주기 위해 쭉 당겨 옆으로 손을 뻗었지만 분명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잠에 눌려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잠을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또렷해졌다.


“아빠는 자고 있어, 아저씨!”


“그러니까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잖슴까? 그리고 아저씨라니, 전 아직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가 아님다!”


소리가 또렷해져서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열린 현관문 너머로 보이는 건 늘 찾아오는 녀석과 옆자리에 있어야했던 아이였다. 지난 3년 동안 최대한 녀석과 아이를 만나지 않게 하기위해 그간 아이를 마을에 맡겨두고 온 노력이 무색하다는 듯이 둘은 서로를 제대로 마주보면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4살이 되어가는 아이랑 저렇게 말다툼하고 있는 녀석은 그가 알던 뱀을 100마리는 품은 듯 능글거리는 녀석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유치했다. 그런 황당함이 가득 담긴 시선을 느낀 건지 제 큰 키까지 수그리며 아이와 말다툼을 하던 녀석이 고개를 들고는 멀거니 서있던 그를 바라보며 아는 체를 한다.


“오! 드디어 일어나셨슴까?”


“아빠!”


그 말에 아이도 잽싸게 뒤돌아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리고는 팔을 양쪽으로 쭉 편 채 막아서는 모양새가 제법 귀여웠다. 아마 어제 꺼낸 지켜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매우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눈에 불을 켜지만 오히려 상대방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몸을 수그리며 아이와 눈을 맞췄다.


“뭡니까? 안아달라는 겁니까?”


“아니야!”


“이렇게 팔을 쭉 벌리고는...”


그대로 손을 뻗어 아이를 안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이에게 닿기도 전에 위에서 내려온 손이 손등을 찰싹 때리고는 아이에게 닿지 못하게 막아섰다. 시선을 올리니 눈썹을 조금 찌푸리는 것 외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던 마법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찌푸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황당하다는 듯이 짧게 헛웃음을 터뜨린 불청객은 손을 거두며 손바닥을 보이고는 흔들었다.


“장난입니다, 장난. 그동안 그렇게 싸매고 다닌 거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진짜로 털 끝 하나 댈 생각도 안 듬다.”


억울하다는 투로 말하지만 숲에 흔히 피어있는 꽃의 씨앗만큼도 먹히지 않았다. 마법사는 그를 무시하고는 여전히 둘 사이에서 꼿꼿이 자릴 지키고 서 있는 아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이 또한 고개를 젖히며 마법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안절부절 못하며 얼른 마법사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마법사는 자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퍼블리.”


그에 화난 줄 알았는지 아이가 푹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고는 웅얼거리며 말한다.


“아빠..지켜줄 거야...”


그런 아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마법사는 푸른색이 녹아들어있는 예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다시 한 번 아이를 부르며 말했다.


“퍼블리, 아빠가 저 아저씨보다 쎄.”


그 말을 들은 아이가 퍼뜩 고개를 들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주보고는 둥글게 눈을 접으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 아기와 마법사를 바라보던 불청객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글쎄 아저씨 아니라고 했잖슴까!”


그 이후로 아이와 불청객의 대치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어른보다 어린아이의 체력이 약한 건 당연했고 결국 아이가 가장 먼저 지쳐서 물러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이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물론 지치긴 지쳤다. 다만 마법사의 품속에 딱 붙어서 쉬고 있을 뿐,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오히려 마법사였다. 그는 제 품에 기대서 열심히 눈에 힘을 주고 있는 아이가 귀여우면서도 마녀 아이에게서 정확히 무슨 말을 들었을 지가 궁금했다. 


어제 아이가 한 말들을 보면 어쩐지 평범하진 않을 것 같아 머리가 아파오고 있었지만 의외로 지금 상황이 재밌었기에 멀뚱히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끼어든다 해도 그는 당연히 아이의 손을 들어줄 것이니 애초에 불청객에게 승산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난 아빠랑 매일매일 같이 잔다!”


“흐음? 실컷 같이 자두십쇼~ 저는 앞으로 우리 딸기랑 더 많이 같이 자게 될 겁니다~”


“그럴 일 없으니 꿈 깨게. 그리고 딸기라는 말 좀 집어치우게.”


다만 마법사에게서 이 상황이 곤란한 건 바로 아이가 듣고 있다는 것이다. 차마 아이 앞에서 험한 말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말을 가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불청객은 여전히 속을 긁어놓는 데에 재미가 들렸는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알고서 저렇게 계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속을 긁어놓는 재능만큼 눈치 또한 빠른 편이니 말이다. 원래 이때쯤이라면 손에 잡힌 무언가가 날카롭고 빠르게 불청객에게로 날아갔겠지만 그는 아이가 멀뚱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앞으로 아이가 없을 때 던질 물건들과 그 개수를 머릿속에서 착실하게 쌓아놓고 있었다. 이것만은 눈치 빠른 불청객도 모르리라.


이런 둘의 잔잔한 폭풍이 가라앉은 건 둘의 말을 듣고 있던 아이가 대화를 가르며 꺼낸 말 덕분이었다.


“딸기가 뭐야?”


딸기가 귀중한 과일인 건 아니었지만 야생 딸기는 직접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잘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들도 야생 딸기를 찾기보다는 직접 딸기를 키우거나 마녀왕국에서 사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딸기를 비롯해 그와 비슷한 과일들은 아이가 모르는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러웠다.


“흐음? 모르십니까? 아주 맛있는 과일인데 말임다~”


딸기에 대한 설명이 나오자 아이는 눈에 가득 담던 경계심을 내려놓고 흥미로 반짝임을 채워 넣었다. 화려한 입담에 주물러져 나오는 장황한 설명 덕에 아마 아이에게 있어서 딸기란 동화 속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요정의 과일이 되어있으리라. 그런 아이의 반응을 즐기는지 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이를 안고 있는 마법사를 힐끗 보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묘사에 마지막을 새겨 넣는다.


“당신의 아빠님처럼 꼭 닮은 매력적인 과일이죠.”


그 말에 빨간 눈썹이 까딱인 것도 잠시,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무언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볼을 부풀렸다. 녹색 빛에는 어쩐지 실망이 섞여 들어가 있어서 어른 둘은 당황해하면서도 의아했지만 바로 투정 섞인 아이의 어투와 함께 나온 말로 인해 의문은 풀렸다.


“아직 딱딱한 거 잘 못 씹는데...”


터져 나온 웃음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물론 아이는 완전히 경계심을 버리지 않았던 터라 다음날 다시 찾아온 불청객에겐 단호함이 가득 담긴 녹색 빛이 마중을 나왔다. 물론 그건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매일같이 이어졌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일에 어느 샌가 마법사 또한 자신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익숙해져버렸다. 그 증거로 아침식사를 차려놓은 식탁 위엔 한사람의 몫이 더 올라와있었다.


아마 그 변화를 눈치 챈 건 불청객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뿐이었지만 그는 굳이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게 연결된 실은 섣불리 손을 대면 언제 떨어질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얇았다. 하지만 이것이 한 가닥씩 쌓이고 쌓이면 그 어느 것도 자를 수 없을 터이다. 


예리하게 빛나는 노란 빛을 눈꺼풀이 둥근 선을 그리며 감춘다.





*****



“우우...”


아이는 요즘 들어 많이 심심해보였다. 마법사랑 같이 있는 건 매우 좋아했지만 같이 놀았던 친구가 그리웠는지 종종 문 밖을 힐끗거리며 돌아보고 있었다. 그동안 아이를 마을에 맡긴 이유는 최대한 아이와 불청객이 만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져버린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사실상 마을로 가는 일은 이제 거의 없었다. 


늘 친구와 놀았을 테니 심심한 건 당연할 터. 그런 아이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마법사의 눈에 미안한 기색이 서렸다. 사실 마을에 가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이의 친구인 마녀아이, 정확히는 그 마녀아이를 마을로 데려왔을 마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왕국 바깥에 볼일이 있는지 자주 나오는 것 같은데 아직 어린 마녀는 구분을 못하지만 혹시나 마녀가 아이를 보게 된다면 들킬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눈도 제법 예민한 편이지만 어른들의 눈은 담아온 세월만큼이나 구별하는 데 이골이 나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문을 보는 횟수가 많아지는 아이를 보며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아이의 키에 맞게 몸을 낮춘다.


“퍼블리.”


“우웅?”


“혹시 네 친구의 보호자, 음...이 말은 아직 어렵나?그러니까...”


“엄마라는 단어 알아! 아니카가 가르쳐줬어!”


그 말에 난감함을 해결한 그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친구네 엄마를 만난 적이 있느냐?”


“우웅..아니! 아니카네 엄마는 늘 아니카를 마을 입구에다 두고 풀 모으러 간대! 그리고 아니카네 엄마가 오기 전에 아빠가 늘 더 빨리 왔어.”


언제부터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녀가 왕국을 자주 나오는 이유를 알게 된 그는 납득했다. 자연 만큼 다양한 풀들을 모으기에 좋은 곳은 없었기에 발을 내미는 것이리라. 다만 굳이 아이까지 바깥으로 데려와 마을에다 맡기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GM을 신뢰한다 해도 왕국 안에 있는 게 마녀의 입장으로선 더 안전할 텐데도. 


물론 그저 마녀아이가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서 떼를 쓴 결과인지는 그도 몰랐다. 우선 아이가 마녀와 마주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아이 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우선 마녀는 처음 GM을 만날 때를 제외하면 마을 입구까지만 오고 풀을 찾으러 간다. 


마법사가 아이를 데리러 오는 시간은 일정하게 연락이 오는 불청객의 통신 수정구 덕분에 그에 따라 일정해졌다. 시간을 가늠한 마법사는 시계를 바라봤다. 충분하다.


“그럼 오랜만에 마을에 데려다줄까?”


그 말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곧 이어질 반응은 아마 기쁜 마음에 활짝 필 웃음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이는 갑자기 무언가 크게 결심한 것처럼 외쳤고 그 말에 그는 당황했다.


“이번엔 나 혼자 마을로 가볼래!”


나무문이 끼익-기름칠을 재촉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윽고 발을 내밀어 모습을 드러낸 건 아이 하나뿐, 안쪽에서 어른의 한숨이 들려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지금 이 순간 그 효과를 발휘했다. 물론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마법사는 아이에게 각종 보호마법은 물론,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 곧바로 집으로 올 수 있게 하는 텔레포트 마법도 걸어놓았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마치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이미 닫힌 문을 쳐다봤지만 아이가 다시 돌아와 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고 같이 가자며 그 작은 발로 앙증맞게 앞장 서는 일은 없었다. 기분이 가라앉은 게 여실히 보일 정도로 음울한 분위기를 내뿜던 그는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가면서 깨달은 사실에 고개를 들어 벽에 높이 걸려있는 낡은 시계를 쳐다봤다. 


늘 아침 일찍 들이닥치던 녀석이 오늘은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늦는 건가 싶은 생각에 아침식사 시간은 지났고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불청객은 아무도 모르는 새에 손님이 되어있었다.


찬장 안에 넣어둔 간식들은 각자 양이 많진 않았지만 종류별로 다양한 덕에 보아보니 꽤나 많은 양이 되어 간식 바구니를 그득히 채웠다. 두 사람이 먹기엔 조금 많아보였고 아이는 나간 지 얼마 안 된데다가 제가 일러준 대로 늘 마을에서 집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돌아올 테니 아이의 몫을 남겨두자는 생각에 조금 덜어낸다. 


무언가 허전함에 물끄러미 간식 바구니를 내려다보다가 옆에 놓인 빈 컵이 시선에 들어오며 힌트를 준다. 다시 찬장을 열어 찻잎이 들어있는 통을 꺼냄으로써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바구니와 통을 들고 다시 탁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린다. 그와 동시에 순간 누군가 물감이라도 엎은 건지 눈앞에 보이는 색들이 섞여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 온건 바닥과 함께 섞여서 마찬가지로 눈을 어지럽게 하는 간식들과 찻잎들이다.




*****




마을은 오랜만에 온 작은 손님 덕에 웃음이 가득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오다시피 했던 작은 손님은 이미 마을 사람들에겐 똑같은 마을 어린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늘 같은 시간에 작은 손님을 마을에 데려다 주던 보호자인 마법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아이도 마을에 오는 일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은 허전함을 느끼게 되어버렸지만 그들보다 더한 사람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손님이자 친구인 어린 마녀였다. 늘 얼굴에 매달고 다니던 웃음마저 내린 채 매일 마을로 찾아와 늘 아이와 함께 앉아있던 공터에 앉아 마을 입구를 바라보는 어린 마녀를 본다면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지나가던 가벼운 바람도 알아채고는 위로하듯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고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그런 작은 위로도 어린 마녀에게 다시 웃음을 주워 주지 못했지만 대신 방법을 이끌었다. 뺨을 더듬는 머리카락들을 잡아 정리하던 어린 마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바람이 분 방향을 쳐다봤다.


웃음이 다시 뛰어올라 그대로 사뿐히 앉았다.


“퍼블리!”


푸른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손길을 맡기며 허공을 예쁘게 수놓고 있었다. 어느새 아이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오랜만에 마을을 찾아온 아이에게 뛰어가고 싶어 안달 난 자식들을 말리느라 바빴다. 물론 아이는 다 같은 친구라고 외칠 테지만 저 둘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이 봐도 둘이서 가장 친한 친구라는 건 금방 눈치 챌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게 바로 어른들의 생각이었다. 몇몇 눈치 빠른 애들은 아직까지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른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아이들과 어른들은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기 일쑤였고 그들 모두의 얼굴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아이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가 우선이었는지 금세 고개를 돌린다. 어린 마녀는 그런 그들의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고마움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는 밝은 목소리로 얘기를 꺼내는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아이들은 행복했다.


“그래서 내가 그 아저씨한테서 아빠를 지키려고 매일 아침마다 일찍 일어났어! 그러다보니까 낮잠 시간도 많아지고 밤에도 일찍 자게 됐어.”


아이는 친구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처음 했던 말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도 종종 있었지만 다시 처음의 말을 되돌리게끔 이끌어주는 아니카 덕분에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흐음- 그럼 그 아저씨 아직도 찾아오는 거야?”


“응.”


“그리고 너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막고?”


“음...요새는 아니야. 같이 아침도 먹게 됐어. 하지만 아빠 내가 지키는 건 여전해!”


상당히 중간과정이 궁금할 법한 내용이었다. 물론 아이는 그 궁금증이 오래가지 않도록 이야기를 꺼냈지만 워낙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들에 그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결정적으로 아이가 손님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와 이유를 단번에 짚어낼 수 있었다.


“그 아저씨 말솜씨가 굉장한가보네?”


“말솜씨?”


“말을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미끌미끌하게 하는 능력이야.”


말이 미끌미끌하다는 설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설명해야할 어린 마녀는 그저 웃으면서 아이의 표정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마 말 그대로 미끌미끌한 촉각적인 감각으로 뜻을 받아들였을 테지만 더 풀어서 설명하기엔 본인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했다. 


설명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심통이 났는지 뺨을 조금 부풀리고는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다시 웃음이 터진다. 어린 마녀는 오랜만에 실컷 웃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시간이 한창 늦장을 부리길 바랐다.


“퍼블리 네가 아직 어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얼마 안 가서 그렇게 벽을 어느 정도 허무는 걸 보면 그 아저씨 진짜 대단한 걸? 너희 아빠도 금방 넘어가겠다-라고 하기엔 너희 아빠 벽은 더 만만치 않아서 잘 모르겠네, 3년이나 밀어낸 걸 보면 말이야. 그렇게 따지니 너희 아빠도 대단한데?”


친구가 하는 벽이니 밀어내니 라는 말들이 이해가 가진 않지만 적어도 마지막 말은 자신의 아빠를 칭찬하는 듯한 말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좋아했다. 그러다가 친구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아-하고 작게 터뜨린 탄성에 곧바로 눈을 깜빡인다.


“맞다! 너희 아빠한테 가서 전해줘! 저번의 그 말뜻이 뭔지 알았고 그런 말 써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어른의 호수같이 넓은 마음으로 어린애의 귀여운 실수로 용서해달라고 말야.”


아이는 여전히 눈을 깜빡였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오늘따라 어려운 단어는 아니지만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기껏 만났는데 설명을 듣는 것보단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꺼내는 게 우선이었는지 아빠에게 전해줄 말을 외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귀를 기울여 듣던 어린 마녀는 문득 저 멀리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익숙한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시간이 늦장을 부릴 리는 없는데다가 오히려 이런 즐거운 때일수록 심술이라도 부리는지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하늘은 아직 새파랬고 아무리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것과 진짜 빠른 것의 차이는 어리다고 해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진짜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늘이 새파랗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빠르게 달린 건 따로 있었다.


“엄마!”


늘 아이가 아빠와 함께 떠나는 시간으로부터 조금 지나 해질녘이 될 즈음에야 오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로 꽤나 빨리 왔다. 그런 친구의 외침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는 친구에게 엄마라고 불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친구와 마찬가지로 꽤나 낯선 모양새의 옷차림과 아빠와 마을 어른들과는 확실히 어딘가 전체적으로 달라 보이는 생김새였다. 그에 아이는 친구가 예전에 했던 마녀와 마법사들은 확실히 구분된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녀는 당연하게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멍하니 마녀를 바라보던 아이는 무언가 가슴 안쪽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에 깜짝 놀라며 그 부분을 긁어댔지만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녀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더더욱 심해졌다. 그런 아이가 눈에 띄었는지 마녀가 아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화들짝 놀란 아이가 재빨리 입을 열어 더듬거리며 인사했다.


“아..안녕하세요! 저는 퍼..퍼블리예요!”


중간에 목소리가 삑 새어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인사를 마친 아이의 모습이 제법 귀여웠는지 작게 웃음을 터뜨린 마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는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뜨다가 다시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웬일로 일찍 왔어?”


“얘는, 엄마가 일찍 온 게 싫으니?”


“매일 해 떨어질 때쯤에야 겨우겨우 풀 들고 오던 엄마가 오늘은 일찍 온데다가 평소보다 많이 들고 온 거 보면 어디서 제대로 빨간 밭이라도 발견했나보다 싶지.”


“빨간 밭?”


또 처음 듣는 단어에 궁금해 하는 기색을 보이자 어린 마녀는 설명에 재미가 들렸는지 바로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번에 마녀는 장미꽃에서 태어난다고 했고 장미꽃은 대부분 빨간색이라고 했지? 예전에는 왕국에 장미정원은 없었고 야생 장미꽃들이 많았는데 그런 야생 장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빨간 밭이라고 불렀어. 이제는 그만큼 귀한 게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을 빨간 밭이라고 하는 거야.”


이제는 제 아이가 신나서 다른 친구에게 설명을 하는 모습이 마치 자랑하고 싶어 하는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아서 마녀는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하는 것이 있었는지 둘 사이로 슬며시 끼어들었다. 


친구와의 대화가 끊어지게 된 게 상당히 불만스러웠는지 슬쩍 웃음을 거두는 제 아이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엄마보단 친구다 이거니?


“우리 아니카처럼 밖으로 나오는 애는 처음 보는구나. 네 보호자는 어디있니?”


“아빠는 집에 있어요! 오늘은 저 혼자 마을로 가보고 싶다고 해서 혼자 오는 게 허락 됐어요!”


그 말에 마녀의 눈이 아까보다 훨씬 커졌다. 마치 믿을 수 없는 얘길 들었다는 듯이 쳐다보자 아이가 놀랐는지 흠칫 뒤로 물러난다. 그런 마녀의 반응에 의문을 품은 건 다름 아닌 어린 마녀였다. 지금 이상한 쪽은 누가 봐도 마녀였으니 어린 마녀는 그대로 둘 사이로 다가와 서로를 막아서고는 입을 열었다.


“엄마, 그 풀 독성 있다며? 그렇게 멍하니 입 벌리고 있다가 그 풀 입 안으로 들어가겠다. 퍼블리, 미안하지만 오늘 엄마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아서 빨리 가야할 것 같네.”


그 말에 아이가 방금 전보다 더 깜짝 놀라며 울상을 짓는다. 아마 오랜만에 만났는데 일찍 헤어지는 게 꽤나 아쉬운 모습이었지만 어린 마녀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싶었다. 옷자락을 꽉 잡는 친구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리며 조심스레 힘을 준다. 그리고는 늘 달던 웃음을 얼굴에 띠고선 지극히 태연하고도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어차피 내일 또 만날 텐데 뭘?”


그런 친구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그제야 다시 해맑게 웃는 아이는 친구의 옷자락을 놓았다. 하늘은 아직 새파랬지만 또다시 찾아오리라.


“그럼 내일 보자!”


아이는 아직까지도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녀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마을 입구 쪽으로 그대로 달려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고는 친구를 향해 한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안녕!”


뛰어가는 다리는 아쉬움이 조금 무게를 잡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고픈 마음이 좀 더 앞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오늘 마법사에게 마녀를 만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친구인 아니카도 마녀지만 어른 마녀를 처음 본 느낌은 엄연히 달랐다. 마을 어른들도 전부 다르게 생겼지만 신기하게도 마법사와 마녀를 구분하라고 하면 당장 구분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분명 머리카락도 달렸고 눈, 코, 입도 다 똑같이 두 개에다가 하나씩인데도 구분할 수 있다고. 


그리고 궁금한 것도 있었다. 이상하게 마녀를 만났을 때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었고 아무리 긁어내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며 마법사에게 이게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아이에게서 있어서 마법사는 모르는 게 없는 대단한 아빠였으니 말이다. 


마법사라면 자신을 간질이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줄 것이다. 다만 없애고는 싶지 않았다. 무언가 나쁘지만은 않은 이상한 느낌이었기에 그저 정체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만약 마법사가 없애야한다고 말한다면 많이 슬플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뒤는 우선 마법사에게 말하고 나서 생각하고 싶었다. 마녀를 만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하고 싶었다.


숲 속을 가로질러 어느새 도착한 집 앞마당에서 아이의 발이 폴짝 뛴다. 있는 힘껏 뜀박질한 덕분에 문고리에 손이 닿고 힘을 주어 돌리니 문이 끼이익 기름칠을 재촉하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리고


“아빠!!”


붉은 색이 마치 피처럼 바닥에 정신없이 흩어져 수를 놓았다.






*****



호수가 있었다.


숲 한가운데 있는데도 호수는 매우 맑았다. 크기가 다른 호수들처럼 크지 않은 덕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서 그런지 물이 더러워진 적은 없었지만 물이 어디로 흘러들어오는 건지 늘 의문스러운 호수였다. 


숲 한가운데에 커다란 거울을 툭 떨어뜨려놓은 것 같은 호수는 푸른 달이 뜨는 밤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호수였다. 적어도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을 때는 그랬다. 아마 처음 호수를 발견한 건 떠올려도 안개 끼듯이 뿌연 희미한 시절이었을 거다. 적어도 지금보단 발이 매우 작았던 때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그 호수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어린 내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발이 너무나도 작고 깨끗했기에.


“안녕?”


호수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누구인지 보니 아기다. 아니 어른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고 나 또한 빤히 바라보는데 모르겠다.


“안녕.”


마주 인사해주니 기분이 좋은지 환하게 웃는다. 역시 아기인가?


“왜 거기서 안 나와?”


“응? 난 이미 나갔는데?”


질문을 건네자 솔직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럼 질문을 바꿀게. 왜 안 돌아와?”


그런 내 표정은 지독히도 무표정했다. 질문을 바꾸자마자 호수에서 나왔던 사람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어느새 주변엔 안개가 가득했다. 보이는 건 여전히 거울처럼 깨끗하게 안개마저 비추는 호수뿐이다.


다시 호수를 바라본 순간, 호수가 거울처럼 깨져버렸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태연한 얼굴로 그 깨진 틈 사이로 뛰어들었다. 부딪히는 파편들은 몸에 닿자마자 물방울이 되어 옷과 팔을 차갑게 쓸어가고는 다시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공중을 떠다닌다. 물론 그것들을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나는 바쁘게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호수 밑바닥에 도착했고 그곳엔


“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깨졌던 것들이 다시 모여 원래대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물이 된 것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쌓이기 시작하면서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물속에 잠겼지만 나는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점점 올라갈수록 더 강해지는 물살에 큰 압박을 느끼고 있지만 고통스럽진 않았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 미련이 남아있는지 가라앉으려고 했으나 역시나 다시 되돌아가는 호수는 나를 밀어낸다. 아니 사실 가라앉고 있는데 내가 다시 올라가려는 건가? 그건 지금의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가라앉고 올라가고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늘 찾아올 때마다 떠있는 보름달이 보인다. 아니 보름달이 뜰 때마다 내가 찾아오는 거였나? 호수에 비칠 때마다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보름달을 호수 안에서 바라보니 푸른색이다. 아, 푸른 달이구나. 그런데 왜 아기는 호수에 없지?


아아 정말이지 지독한 꿈이다. 푸른 달이 뜬 날 무엇이든 비춰주는 커다란 거울 같았던 호수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꿈인데도 지독하다.


“이래서는 현실과 다를 바가 없잖나.”


어느새 작았던 내 발은 어른의 발처럼 커져 있었다.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꿈. 깨어나면 말 그대로 현실만이 남아있겠지. 꿈에서조차 현실을 보여주다니 정말이지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 꿈이라서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호수 안으로 뛰어든 건 너무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실랑이 끝에 나는 호수 밖으로 나간다. 호수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젠가 친구들이랑 손잡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그리고 호수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를 기다린 건 장미꽃 향...




*****



“일어나셨슴까?”


마법사는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게 몸이 붕 떠있는 것 같은 기분에 몸을 움직여보려고 하지만 그 즉시 몸 자체가 납덩이가 된 것 마냥 무거워지는 느낌에 관두고는 다시 힘을 빼자 또 붕 뜬 기분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상태를 눈치 챘는지 옆에서 그를 바라보던 손님은 제 큰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눈을 다시 감겨준다.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았으니까 다시 자두십쇼.”


그제야 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를 다시 말리려다가 작게 달싹이는 입술에 그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조심스럽게 귀를 그의 입술 바로 위로 기울인다.


“뒷..마당...세줄..기 정도...”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저 흐릿한 푸른빛으로 빤히 바라만 볼뿐. 그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손님이었지만 별 다른 말없이 그의 말대로 뒷마당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문이 닫히자 그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방 안을 둘러봤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방 밖에 있거나 다른 방에 있는 것 같았다. 그대로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쓰러지기 전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간다. 


분명 아이가 마을로 혼자 가고 오늘따라 늦는 녀석을 맞이하기 위해 찬장에서 과자와 차를 꺼낸 게 마지막 기억이다. 창문 너머로 하늘을 봤을 때 저 아래로 붉은 빛이 꺼져가고 있는 걸 보면 지금은 늦은 저녁쯤이려나 싶은 생각을 하던 중 문이 열렸다. 그러자 보이는 얼굴은 늘 달고 있던 뻔뻔한 웃음이 아닌 당황과 놀라움을 그득히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주친 눈에 그는 슬쩍 눈을 찌푸렸다. 어째 저 눈에 담기는 건 변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무겁게 느껴지는 팔을 들어 올리며 말없이 손을 뻗었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행동에 뒷마당에서 가져온 것을 그의 손 위로 올려놓았다.


“하..하하...정말이지 놀랐습니다? 물론 처음 제대로 마주했을 때도 당신은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게 빛났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지금 당장 듣는 사람이 없다 해도 속삭이 바람은 무시하지 말게.”


그는 더 이상의 말은 원치 않았는지 단호한 목소리로 뒷말을 잘라낸다. 그에 어깨를 들썩이며 물러나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면 아직도 흥미로운지 눈을 빛내는 모습이 마치 다음 기회를 노리는 맹수 같았다. 그런 그 눈빛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댔다. 


열기가 점차 가라앉고 냉기가 그런 열기를 발판 삼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눈만 굴려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힘겹게 말을 끌고 나온다.


“퍼블리는...”


“옆방에서 아주 잘~자고 있으니 걱정은 우리 딸기씨 몸부터 걱정하십쇼. 오늘은 일이 있어서 좀 늦었긴 했지만 오자마자 아주 깜짝 놀랐슴다?”


투덜대듯이 말하지만 내용은 알아듣기 쉬웠다. 사실 내용이랄 것도 없이 저절로 쉽게 상상이 될 상황이었다. 다만 친구와 함께 노느라 손님보다 늦게 올 거라고 생각한 퍼블리가 의외로 예상과는 달리 빨리 왔다는 점이 조금 상상 밖이었지만 결국 어린아이가 다 큰 어른을 침대까지 들고 가는 건 불가능했기에 그를 침대까지 옮긴 건 퍼블리보다 늦게 온 손님이었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슴다~ 세상에 얼마나 놀랐는지 평소엔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던 우리 퍼블리가 제가 오자마자 붙잡고는 당신을 살려달라면서 울고 집 안으로 들어가보니 우리 딸기씨는 쓰러져있질 않나, 바닥은 엉망이질 않나~”


피곤한 기색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름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건지 가벼운 어투로 말하던 손님은 벽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고 말을 멈추며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희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어깨가 아니라면 사람과 매우 닮은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안색이 창백했다. 사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지만 아무리 표현이래도 아직 살아있는 걸로 보이는 사람에게 시체 같다는 표현을 쓰면 정말 그대로 숨을 멈출까봐 꾹 눌러 담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머리를 감싸주고는 그대로 다시 침대로 몸을 눕히는 손길이 곧 꺼져갈 것 같은 불이 꺼지지 않게 조심해서 다루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 그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을 테니. 그러다 문득 울음소리와 함께 처절한 말이 머리를 맴돈다.


“우리...끅! 아빠..왜 이래요? 왜 이렇게 아빠 흑!..이마 뜨거워요? 왜 아..안 깨어나는 거예요?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저 이제 아빠...흑...혼자 있게 안 끅!할..윽!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말은 환자에겐 가볍게 했지만 그 환자를 둘러싼 상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사실 그를 간호한 본인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덕에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처음 상황을 맞닥뜨렸을 땐 놀람과 당황에 몸은 물론 미끌미끌한 말솜씨처럼 빠르고 유연한 머리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으니 말이다. 겨우 삼킨 한숨이 결국엔 못 참고 튀어나와버렸다.



처음 쓰러진 걸 발견한 후부터 정신을 차리고 뒷마당에서 가져온 걸 씹어 삼키기 전까지 열이 펄펄 끓어 머리처럼 빨갛게 되는 게 아닌가 싶던 얼굴은 빨간 기색 없이 시리기만 했다. 그렇게 계속 바라보던 손님은 장갑을 벗고 제 큰 손으로 마법사의 뺨을 감쌌다.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까 싶은 마음을 담아.


“정말이지, 너무 정이 들어버린 거 아닌가 싶슴다~”


사실 있는 정 없는 정 생길 정도로 3년 동안 뺀질나게 찾아왔으니 정이 안 들 수가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정드는 것도 상당히 여러 가지 감정이 있는 것이지만 지금 그 정에 담긴 감정이 예상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냥 나쁘진 않은지 옅게 웃던 그가 갑자기 무언가 재미있는 장난이 떠오른 모양인지 평소의 얄미운 웃음을 짓더니 베개 하나를 들고 오고는 마법사의 바로 옆에 툭 놓더니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추고는 그 속으로 파고든다.


“이런 기회가 언제나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놓칠 수야 없지 않겠슴까? 그리고 계속 곁에서 간호한 사람을 내칠 정도로 매정하진 않을 거라 전 믿겠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바로 옆에 눕는 모습을 만약 마법사가 다시 깨어나서 봤다면 몸이 아픈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주먹이나 베개를 날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잠든 때에 일방적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얼굴로 가져간다. 이번엔 뺨을 감싸는 게 아닌 뺨까지 내려와 그림처럼 붙은 머리카락들을 떼어내다가 머리 쪽으로 더듬어 올라가며 새빨간 머리카락들을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동화책 속의 요정 머리카락처럼 아름답게 붉었다.


어느새 창문 너머의 붉은색은 꺼져갔고 남아있는 건 이것뿐이다.


“...허?”


사실 그는 빠른 눈치만큼 감각도 제법 예민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자고 있는 도중에 누군가 가까이 오는 걸 알아채고 깨어날 정도로 꽤나 예민하고 경계를 잘 세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사실 깨어나는 상황은 자고 있는 그에게 다가오는 자가 살기를 지닌 대상이거나 자는 동안 날아오는 공격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인 생존본능에 따를 상황이었지만 덕분에 예민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저도 요즘엔 일이 많아서 피곤하긴 했지만...”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텅 비어있는 옆자리를 바라봤다. 물론 이렇게 멍든 데 없이 멀쩡한 걸 보면 적어도 언제 일어나서 자리를 벗어났을지 모를 마법사는 공격의사가 없었다는 거였고 그 덕에 깨어날 이유가 없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이렇게 가까이, 그것도 침대가 사실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에 거의 딱 붙어서 함께 누워있었던 사람이 움직이면 예민하지 않은 사람도 알아채고 잠에서 깨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직은 달이 환하게 떠있는 늦은 밤인걸 보면 잠들게 된 지 몇 시간 정도밖에 안 됐는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환자가 일어나서 사라질 때까지 깨어나지 않은 게 말이 되는가.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깨어나게 된 것도 잠결에 뒤척이다가 무의식적으로 마법사가 있던 곳을 더듬었는데 손에 잡히는 건  사람 덕분에 높게 올라온 이불의 감촉이 아닌 푹 꺼진 허전함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그는 오래 앉아있지 않았다. 그대로 방을 나서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아이가 자고 있는 옆방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여전히 아이만 있었고 색색 작고 고른 숨소리가 넓은 빈자리를 채웠다.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작은 뺨에 그는 마법사의 곁을 지키겠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댔던 낮 시간의 아이를 떠올렸다. 물론 아이는 결국 울다 지쳐 마법사의 옷자락을 꽉 쥔 채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고 그런 아이까지 열이 오른 덕에 간호해야할 사람이 늘어났다. 


그나마 아이는 울고 흥분한 감정에 의해 오른 열이라 금방 내려졌던 터라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잠들어있는 아이를 한 번 살펴보고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방을 나선다.


“그렇담 밖에 나갔단 말인데...”


짚이는 또 다른 곳은 바로 뒷마당이었지만 현관문을 열자 보이는 발자국들에 자연스럽게 가야할 방향이 정해졌다. 맨 발로 나갔는지 신발자국들 사이의 사람의 맨 발자국 덕분에 그는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당신이 미아가 된 겁니까?”


물론 그 때와는 달리 불청객은 사라졌기에 발자국이 끊기거나 숲을 헤매 찾지 못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방해꾼이 없으니까.


발자국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있었다.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니 보름달조차 쉬이 빛을 내리지 못하도록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에 의해 어두워지는 바람에 발자국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라도 하나 가져오는 거라며 투덜거리지만 손은 이미 빛을 내는 마법을 쓰기 위해 눈높이에 맞춰 올라가있었다. 그러다가 앞을 보게 된 그는 그대로 손을 내렸다. 


앞을 바라보니 발자국이 어느새 나무들의 끝을 벗어나있었다. 그대로 따라가 발을 내딛는 순간 빛이 눈을 향해 달려든 것만 같은 기분에 눈을 깜빡인다. 다시 앞을 바라보니 굉장히 깨끗한 상태의 호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나무들이 자리를 비켜주듯이 빙 둘러싼 가운데 어디서 물이 솟아오르는 건지 모를 호수는 커다란 거울 하나를 가져와 툭 떨어뜨려놓은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아마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던 건 저 호수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미아씨! 여기 계셨슴까? 제가 데리러 왔슴다~!”


그를 당황하게 했던 미아가 호수 바로 앞에 서있었다. 아니 미아라고 하기엔 이곳을 알고 일부러 온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아마 다 큰 미아는 그대로 뒤돌아 당황한 표정으로 왜 여기에 왔냐고 물을 게 뻔했고 그 모습에 먼저 말을 건 그는 늘 그렇듯이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우리 다 큰 미아를 찾으러 왔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수 바로 앞에 서있는 미아는 어째선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문득 그의 눈에 흙투성이의 발이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지 상처는 없어 보이는 발은 어쩐지 보이지 않는 줄에 묶여있는 듯이 미동도 없었다. 애초에 제정신이었다면 신발정도는 신고 나왔을 거란 생각에 미치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다.


“뭐하고 있는 겁니까?”


바로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자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마치 그가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마법사의 모습은 무척이나 덤덤했다.


“여기에 호수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게다가 이렇게 깨끗한 호수는 또 처음이고요. 자다가 깼을 때 이 호수가 보고 싶었슴까?”


“꿈을 꿨네.”


그렇게 대꾸한 마법사는 다시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흐음? 무슨 꿈입니까?”


“이 호수가 나오는 꿈. 현실을 보여주는 기분 나쁜 꿈이었지.”


“꿈에서조차 현실적이면 꽤나 슬프다는 걸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예쁜 호수가 나오는 꿈이라면 나름대로 괜찮은 꿈 아님까?”


“호수가 깨졌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꿈이로군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눈치 빠른 그는 아까와의 차이점을 눈치 채고 잽싸게 말을 질문으로 바꿨다.


“저 호수가 깨지는 게 기분이 나쁘셨슴까?”


“현실을 보여주는 게 기분이 나쁠 뿐이지 호수가 깨진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네.”


“흠...그렇담 지금 호수가 아니라 뭘 보고 있는 겁니까?”


“호수 밑바닥. 호수가 깨진 덕에 바로 내려갈 수 있었네만 지금은 깨지지 않는군.”


“호수 밑바닥에 내려가고 싶습니까?”


“내가 찾는 것이 바로 거기 있네.”


“호오? 그럼 그걸 꿈에서는 찾았습니까?”


“아무것도 없었네. 그게 현실을 보여주는 거라서 정말 기분이 나빴지.”


“그렇다면 우리 딸기씨가 찾는 게 무엇입니까?”


“내 과거.”


순간 정적이 호수 주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질문을 꺼내는 걸 멈춘 덕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된 침묵의 결과물이다. 지금의 마법사가 반응하는 건 다름 아닌 질문이었지만 그는 이번엔 무슨 질문을 꺼내야할지 곤혹스러운 상태였다. 


찾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꺼내기 전까진 기껏해야 소중한 물건이 호수에 빠졌다는 걸로 예상했지만 그런 그의 뻔하고 빈약한 상상과 예측을 비웃듯이 나온 대답은 상당히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호수 밑바닥에는 제정신인지 모를 상태로까지 깨어나 찾는 것이 있고 그건 바로 과거란다. 그리고 먼저 찾아간 꿈속에선 호수 밑바닥엔 아무것도 없었고 그게 현실을 보여주는 거라서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마법사가 말하는 과거와 현실이 무엇인지를 제쳐두고 꿈과 현실이라는 걸 구분하자면 지금은 현실이다. 일단은 호수가 깨질 일은 없었고 다른 방법으로 호수 밑바닥에 가게 되어도 있는 건 젖은 흙과 물을 잔뜩 머금어 빤질빤질할 돌멩이들 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마법사의 시선을 따라 호수로 눈을 돌리자 보이는 건 호수에 비친 나무들과 푸른 달뿐이었다. 푸른 달로 비춰지는 호수는 보름달이 뜬 날에 아기가 태어난다고 했는데 이 호수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모든 호수가 보름달이 뜬 날에 아기가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별다른 감흥 없이 호수를 살펴보고 있는 순간 푸른 달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고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에 반응하듯이 마법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깨끗한 호수와는 달리 하늘은 구름이 덕지덕지 껴있는 날이네요.”


언제 몰려왔을지 모를 구름이 달을 가리면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달이 있을 곳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내리고 다시 마법사를 바라봤지만 마법사는 호수를 쳐다보던 것처럼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번엔 하늘에는 미래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할까라는 농담 섞인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느릿느릿 흘러가던 구름이 어느새 제 몸을 다 끌어안고 다른 하늘로 비켜서자 잠시 가려졌던 노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랗군.”


“뭐, 아기가 태어나는 호수에선 파랗게 보이지만 원래 달은 노랗지 않습니까?”


그 말에 고개를 내려 호수에 비친 푸른 달을 보던 마법사는 다시 노란 달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몇 번 두 달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마법사는 멍하니 말을 꺼냈다.


“여긴 현실이었군 그래.”


“그럼 현실이지요, 멀쩡한 호수가 깨지는 꿈이 아님다.”


느릿하게 모습을 감추며 다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푸른빛은 아직도 꿈의 세계에 있는 건지 몽롱한 기색이었지만 적어도 현실이란 걸 알아챈 입은 다시 꾹 다물렸다. 픽하고 튀어나온 웃음이 정적을 걷어낸다.


“우리 딸기씨는 정말 귀엽네요~”


“딸기 아닐세.”


“아아 이제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려는 검까? 아직까지도 잠에 취해 멍해 보이는 모습이 정말 귀여운데 말임다~ 그나저나 딸기씨라고 불리기 싫으면 이름이라도 좀 가르쳐주십쇼? 3년이나 얼굴 맞댄 사인데 이름조차 모르다니 너무하다고 생각 안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자네도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잖나.”


노란빛이 깜빡인다. 그러다 이내 호선을 그린다.


“제 이름은 치트입니다.”


그 말에 푸른빛이 느릿하게 깜빡이며 똑바로 그를 마주한다. 그동안 조용했으면서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람이 그들 사이를 지나가자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며 점점 느려진다. 마치 시간을 붙잡는 것처럼.


“패치.”


늘어지던 시간이 마치 이 순간을 위한 장식처럼 천천히 흘러가다가 멈추는 듯이 주위의 그 어떤 소리도 끌고 오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그들 사이를 지나가던 바람소리조차.


“그게 내 이름일세.”


몽롱한 푸른빛과 흔들리는 붉은 비단과 호수 바로 옆에서 비춰지는 푸른 달이 그 주위의 분위기를 몽환적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이자 미련 없이 움직이는 모습에 그건 마치 한순간의 꿈이었다는 듯이 사라져버린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만 가지. 라는 딱딱한 말은 기어이 관객을 몽환적인 한순간의 꿈에서 현실로 끌어낸다. 


비록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 여운은 현실까지 쫓아와 진심으로 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하하...”


자신도 모르게 묻혀있던 진심이 안쪽에서부터 심장을 두드린다.






인사









“그래서 많이 아팠다면서?”

그동안 봐왔던 얄미운 웃음이 아니라 얄미움은 물론 익살스러움까지 가득 담긴 웃음이 잠에서 깨어난 마법사를 반겼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몽유병인지 뭔지 알 수없는 상태에서 손님 이름을 알게 되다 못해 몇  십년 동안 꺼내지도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덜컥 알려주고 말았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얼굴색이 저번에 봤을 때랑 똑같은데?”

“제가 일어나는 걸 못 견디는 두 녀석 덕분입니다.”

사실 그는 완전히 기력을 회복한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그를 돌보는 걸 자처하는 한 아이와 한 어른의 극성은 며칠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사실 쓰러지고 난 후 바로 다음날 평소처럼 일어나서 늘 그랬듯이 아침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훨씬 빨리 일어난 사람이 있었으니

“아~하십쇼.”

“...뭐하는 건가?”

“뭐하긴요? 먹여드리려고 하잖슴까.”

물론 찡그리는 표정을 보고 상대의 감정 상태를 못 알아볼 사람은 아니었지만 늘 뻔뻔함을 달고 사는 녀석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의 찡그린 표정에도 불구하고 꾹 다물다 못해 못마땅하게 비틀려 있는 입에다가 죽이 담긴 숟가락을 가까이 갖다 대는 저 뻔뻔함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없어질까 고민하는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얄미운 웃음을 달고서는 그의 짜증을 더욱 부추긴다.

“우리 패치~ 얼른 드셔야죠?”

“이름 부르라고 허락한 적 없으니 자네 멋대로 이름 부르지 말게.”

“아아 서운합니다! 치트라고 불러주십쇼~”

그는 기억에 없는 소리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 밤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일어나자마자 떠오른 기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보통 이런 기억은 나지 않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며 대체 몽유병도 뭣도 아닌 그 상태는 뭐였는지 의문이 일어났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호수 앞에서 제 앞의 숟가락을 내밀고 있는 녀석의 질문을 받고 있는 것처럼 무척이나 생생한데도 그 때의 상태를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평소라면 정말 어림도 없는 상황인데다가 절대 누군가에게 호수가 있는 곳을 알려주거나 그럴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만큼 그 호수는 그에게 있어서 민감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적이 또 있었슴까? 이제야 말하지만 그 때 뒷마당 쪽에 급하게 뜯은 것처럼 보이는 게 꽤 있어서 말임다.”

마법사는 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가라앉은 눈으로 무언가 생각에 잠기던 그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비키게.”

“어허! 안 됩니다. 환자는 쉬어야죠?”

“밤에 멀쩡히 움직이는 걸 생생하게 봤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어서 비키게.”

“정상인 상태는 아니였잖슴까?”

물론 그에겐 저 뻔뻔한 낯짝이 방해가 아니었다. 마음먹고 힘을 쓰면 밀어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고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만 의외의 복병이 그의 앞길을 막았을 뿐이다.

“아빠 안 돼!”

방문을 나서자 잔뜩 부어있는 눈으로 또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녹색 빛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이의 울음은 그를 당황하게 하기엔 충분했고 이제 괜찮다며 아이를 달래며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누워있는 신세였다.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구만 그래!”

심란해 보이는 마법사의 얼굴에 늙은 마법사는 껄껄 웃으며 3년 산 아이가 몇십년 산 마법사를 이기다니 아이란 건 굉장하네라는 말을 놀리기 위해 꺼내고 있지만 사실 마법사가 심란한 데엔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평소라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딱딱하게 말을 내뱉을 마법사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놀리던 걸 멈춘 늙은 마법사는 웃는 얼굴 그대로 의문을 눈에 가득담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 마법사는 그 마저도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지 여전히 심각했다. 우선 그의 상태와 더불어 궁금한 것도 있었기에 늙은 마법사는 묻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동안 퍼블리가 마을에 오지 않았던데 말을 들어보니 쓰러진지는 며칠 정도고 그 전엔 딱히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자넬 괴롭혀왔던 문제가 해결됐나?”

그 말에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던 마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잡아챈 늙은 마법사는 또다시 무언가 놀릴 만한 말이 떠올랐는지 익살스럽게 웃었다. 반응 이후 다시 주변을 살펴보게 된 마법사가 그 웃음에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퍼블리를 맡기기 시작한 날에 자네가 말한 그 약새풀을 입에 넣어줘도 시원찮을 녀석이 고백이라도 했어?”

이번에도 나온 말은 없었다. 하지만 늙은 마법사는 만족했다. 입을 딱 일자로 다문 채 눈을 크게 뜨는 마법사의 반응이 대답이었다.

바로 전날

“좋아합니다.”

늙은 마법사의 말대로 과거 불청객이면서 약새풀을 입에 넣어줘도 시원찮을 녀석이자 현재 손님이 된 녀석은 마법사에게 고백을 했다. 그리고 이건 지금까지 마법사를 심란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마법사의 반응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동안 얼굴이 취향이네 이렇게 매일 같이 얼굴 맞대니 부부 아니냐 자신의 순애성을 봐주십쇼 등 헛소리를 꺼낸 전적이 화려했으니 말이다. 또 시작이냐는 듯 녀석을 돌아보자 보이는 건 평소처럼 얄밉고 가벼운 웃음이 아닌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하고 무거운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마법사는 잔뜩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이번엔 또 뭔가?”

“뭐긴요? 고백이잖슴까?”

그 말에 푸른빛이 자연스럽게 반으로 접혔다. 마법사는 이미 녀석이 왜 자기를 찾아오는지 근본적인 감정으론 잘 알고 있었다.

“이참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자네에게 어떤 형태로든 정이 쌓이긴 했으니 이렇게 손님으로 보고 있지만 자네를 믿을 순 없네.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흥미만 잔뜩 가진 채 다가오고 있었잖나, 그러니 이제 그런 농담은 그만두게.”

“그렇다면 전 언제나 솔직하다는 거 아시잖슴까? 이건 농담이 아님다.”

문제는 그 솔직함이 꽤나 변태적이고 가벼웠다는 게 문제였다는 말이다. 확실히 그는 가볍게 말했을지언정 꽤 솔직한 편이었다. 거짓을 말하기보단 중요한 말을 생략하기에 가까웠고 그 가벼움으로 가렸다는 점이 꽤나 교묘했지만 그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기엔 충분했다. 

다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퍼블리의 말을 빌려 그동안의 행동은 구애행위라고 할 정도였고 항상 얼굴이 취향이라던지 키스하면 안 되냐는 식으로 가벼운 투를 쓰며 무례하게 굴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여태까지의 솔직하지만 가벼움으로 가렸던 것들이 이번 말이 진심이라는 증거가 되어버린 것 같았지만

“열 번의 춤 모두 같은 사람을 선택해서 췄다고 한들 열한 번째 춤 또한 어떠한 춤을 추고 누구랑 출지 정하는 건 춤추는 사람 아닌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진지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이쯤 되면 마법사도 그가 진심인지 아니면 태세 전환으로 효과를 보고 있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 마법사의 표정은 다시 떨떠름해졌다. 우선 그를 믿지는 않지만 진실을 알기 위해 우선 그가 진심이라는 가정을 세우고선 다시 말을 꺼냈다.

“계기가 뭔가?”

“그날 밤입니다.”

“자네는 몽유병도 뭣도 아닌 뭔지 모를 상태의 환자한테 반하나?”

“그렇게 결과만 빼서 말하면 제가 취향이 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잖슴까? 그 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당사자는 모를 검다.”

“분위기는 둘째 치고 상태가 우선이지 않은가.”

“아시다시피 전 솔직합니다. 당신 얼굴은 제 취향이고 그날 밤이 아주 결정타를 날렸지 말임다.”

마법사는 더 이상 묻기를 포기했다. 계속해서 물어봤자 같은 말만 나올 것이고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기에 그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의외로군. 자네는 왠지 고백을 하면 꽤나 화려하게 할 것 같았는데.”

가볍게 시점을 비튼 말에 그의 눈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짝였다.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신은 환자잖슴까? 하지만 저는 빨리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게 우선이었죠~ 그럼 제가 제대로 고백하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어느새 손까지 꼭 잡고 있었다. 어쩐지 그동안 올려다보던 녀석이 이렇게 눈까지 반짝이며 말하는 모습이 꽤나 낯설면서도 확실히 저보다 어리고 젊은 마법사긴 하구나 싶었다. 

물론 그도 아직은 젊다고 할 수 있었지만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마법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픽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웃고는 대답했다.

“꿈 깨게.”

그리고 웃음과는 별개로 진실여부에 대한 심란함은 아직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물론 받아줄 생각은 없었지만 다른 이유로 문제가 있었다. 마법사는 그놈의 정이 뭔지 겨우 3년하고도 몇 개월 지난 주제에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는 게 여간 어지럽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을 꽉 감으면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한참동안 그대로 있던 마법사는 어지러운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득 눈을 뜨고 보이는 문틈 너머에 늙은 마법사가 가져온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뒤돌아보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에 마법사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어줬다. 

잔뜩 가라앉은 그의 눈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늙은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고 그는 그 기다림에 부응했다.

“예전의 그 말, 지금도 유효합니까?”



*****



방 안은 매우 싸늘한 기운이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그에 들어오던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라며 방 한가운데서 매우 가라앉은 눈으로 서류를 보고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대로 다시 문 너머로 뒷걸음질 치기 일쑤였고 방금 전까지 합쳐서 벌써 6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그에 보다 못한 한 사람이 각종 험한 욕들을 입에 머금으며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모습에 욕을 꺼내려던 열기가 픽 식어 내리고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나가서 뭐 잘못 처먹고 왔냐?”

“헛소리 할 거면 빨랑 나가십쇼.”

기분이 나빠도 웃고 또 웃으면서 독설을 날리거나 엿을 먹였지 저렇게 정색한 얼굴은 처음 봤기에 뭐라 말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는 그대로 방 밖으로 나온다. 왜 똑같은 상황이 6번이나 반복됐는지 눈치 챈 그는 앞으로 6번은 훌쩍 뛰어넘을 상황에 그제서야 꺼내지 못했던 욕을 아낌없이 내뱉었다. 

아마 이렇게 그가 직접 나서기 전에 물러섰던 6명의 방문자들은 얼른 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처음 보는 얼굴 상태의 배추머리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열띤 추리를 벌일 게 눈에 훤했다. 웬일로 딸기딸기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 농땡이 치러 나가는 일 없이 얌전히 앉아있나 싶었더니만 그에게 있어서 배추머리는 나가도 짜증나는데 안 나가도 머리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점점 솟아오르는 두통에 손을 들어 머리를 꾹꾹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히는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쉴 새 없이 욕을 뱉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뒷주머니에서 밝은 빛이 터졌고 꽤나 신경질적으로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밝게 빛나고 있는 수정구를 꺼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걸 내가 알면 이렇게 밖에서 욕을 하겠냐?"

이렇게 연락한 녀석도 직접적으로 만날 순 없지만 아마 이렇게 수정구로 연락을 취하다가 얼굴을 보게 된 게 틀림없을 터다. 거칠게 머리를 긁던 그는 툭 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거 X발 맨날 나가서 보고 오는 그 딸긴지 뭔지한테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했나."

그럴 리는 없겠지라고 덧붙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정답이었다.


                           
*****



"...자네 차인지 이제 이틀 정도밖에 안 됐네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데."

어제 늙은 마법사가 왔다간 후로 아이는 여전히 걱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지만 그래도 침대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어제는 고백했던 손님이 그에게 차이고 난 바로 다음날이자 오지 않았던 그런 날이었다. 실연이라는 게 꽤나 충격이 큰 건가 싶을 정도로 놀라워하면서 내심 신경을 쓰고 있던 그는 지금 바로 그 생각을 고이 접어 저 멀리 날려 보냈다. 

평소라면 잠가놔도 어떻게든 열어서 들어왔을 녀석이 웬일로 노크를 하길래 늙은 마법사가 다시 방문했나 싶어서 별 생각 없이 여는 것과 동시에 그를 반기는 건 오색찬란하게 흔들리는 천들이었다.

멍하니 흩날리는 천들을 바라보다가 곧이어 상황파악에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이런 일을 벌인 장본인은 틈을 줄 생각이 없었는지 천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고 아직까지도 허공에 흩날리는 천들을 붙잡고는 그 천들로 그를 감싸며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현재로 이어졌다. 마법사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뻔뻔한 얼굴 너머에 있을 속내를 파악하는 건 진즉에 포기했다고 놓아버린 것 같았는데 또다시 궁금해지는 걸 보면 아닌 모양인가보다. 

아직까지도 그를 감싼 채 커다란 손으로 붙잡고 있는 천은 푸른색이었다. 그에 서로 닮아있는 푸른 눈이 살짝 가라앉은 채로 이 일의 원흉을 올려다봤다.

“이 천들은 뭔가?”

“요즘 유행하는 고백방법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천 하나만 가져오는 거지만 어디 하나로 가당키나 하겠슴까?”

진지했던 표정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싹 사라지고 평소대로의 뺀질거리는 얼굴이 돌아왔다. 어쩐지 이번 일도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은 빠른 태세와 분위기 전환이다. 그에 그도 평소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치우라고 하려던 순간

“이쁘다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아이가 녹색 빛을 반짝이며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색의 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고백용으로 쓰인 오색찬란한 천들은 훗날 아이의 옷이 되었다.

“근데 아빠랑 아저씨 뭐하고 있는 거야?”

“아저씨 아니라고 했잖슴까. 지금 당신 아버지께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만?”

아마 그가 기대했던 반응은 한껏 화난 표정을 짓거나 울상을 지으며 저와 마법사 사이로 뛰어들어 저번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을 테다. 사실은 그저 놀리기 위해서지만 이유란 걸 덧붙인다면 요 며칠간 아이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확연히 평소보다 가라앉은 모습이 눈에 밟혀 잔상처럼 남아있었기에 다시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다만 장난이라기엔 고백은 진지했기 때문에 완전히 장난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마법사의 아이인 만큼 확실하게 말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며 아빠가 두 명이 될 거라고 아이가 반응을 보인다면 덧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이가 없단 얼굴로 막힌 물길 주제에 저 너머의 호수나 바라보고 있다고 쏘아붙였을 거다. 

멀뚱히 저를 올려다보며 큰 눈을 깜빡이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아저씨 우리 아빠한테 또 구애행위하고 있었어요?”

순간 멍한 얼굴이 되어버렸지만 아이의 말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빠를 좋아해도 그렇게 껄떡대는 건 나빠요! 아빠가 싫어하잖아요!”

자기는 과연 이제 겨우 3살인 아이에게서 뭘 들은 걸까. 애초에 저게 애가 할 수 있는 말인가.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마법사를 쳐다봤다. 그에 헛기침을 한 마법사가 슬쩍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변명하자면 나는 저 말들을 가르친 적이 없네.”

늘 흔하게 불어와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움직인다는 걸 보여줬던 바람도 이번엔 오지 않았다.

“...눈 좀 돌리게.”

결국 두르고 있던 천을 그의 얼굴에 던지고는 땅 위로 어질러진 천들을 주워 아이와 함께 들어가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가 됐다. 물론 천들은 흙투성이가 되어버렸으니 빨래통으로 들어가게 됐고 아이는 아쉬운 눈으로 손을 뻗어봤지만 결국 닿게 된 곳은 씻는 물을 담아놓은 바구니였다.

그 후의 상황은 마법사가 아프기 전의 일상과 다를 게 없었다. 셋은 같이 자리에 앉아 배를 채웠고 손님은 늘 그랬듯이 아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집주인 마법사에게 껄떡대기 바빴고 아이는 그런 둘의 사이를 가르며 마법사의 무릎 위에 앉아 동화책을 들어올렸다. 손님은 그런 아이에게 툴툴거리며 그의 자랑인 말솜씨로 동화를 아름답고 부드럽게 풀어줬고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재촉하기 바빴다. 

마법사는 그런 둘을 보며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작은 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손님은 하늘 한쪽이 빨갛게 타들어갈 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대로 문을 나선 후에 사라졌다. 저번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일상이었다. 다만 조금 바뀐 것들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솔직해지고 적극적인 고백과 어느새 아래까지 많이 내려간 귀여운 경계심이다. 그런 일상을 되돌아보던 마법사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외면하듯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




“그 녀석 참 적극적인데?”


이야기를 들은 이후 쉴 틈 어깨를 들썩이다가 웃음소리 사이로 겨우 꺼낸 말이었다. 물론 그 말을 듣게 된 당사자의 표정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웃는 사람도 그 표정을 봤지만 우선 웃는 게 더 먼저였으니 마저 웃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당사자에게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렇게 시계바늘이 조금 아래로 움직였을 때쯤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히익! 히익! 그래서 대답은?”


“뻔히 알면서 묻는 겁니까?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뻔히 알기 이전에 거울로 네 지금 얼굴이나 한 번 봐~ 중요한 건 네 마음 아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어떤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얼굴로 마음이 나왔다시피 당연히 제 마음에 따라 거절한 겁니다.”


팔짱을 끼고는 눈을 감은 채 단호한 말투로 말을 끝냈지만 이상하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슬쩍 눈을 뜨고 바라보니 미묘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늙은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입은 수염에 가려진 터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평소 늘 웃음기를 담던 눈은 굉장히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당사자는 물론 마주보게 된 사람도 복잡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아마 사람이 사람인지라 더 그럴지도 모른다고 마법사는 생각했다.


“예전에 자네 없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똑똑하던 녀석이 이럴 땐 멍청해진단 말야.”


“...다짜고짜 무슨 말씀이십니까?”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야. 그 땐 그나마 다른 사람 마음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자기 자신한테도 둔할 줄이야...”


그런 늙은 마법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해봤자 득 될 건 없다는 생각에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혀를 끌끌 차고는 한숨까지 쉬는 모습에 그는 더더욱 늙은 마법사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일단 지금 상황으로선 접어두는 게 좋지만 앞으로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는 게 좋을 거야. 자네 지금 자네에게 열심히 고백하는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그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뻔뻔함을 가득 담아 웃고 있는 얄미운 얼굴이었다. 반사적으로 혀를 차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그에 대해 떠올려본다. 처음 제대로 마주하게 된 집으로 돌아가던 길의 기억, 그리고 그 후의 죽일 듯이 마법과 칼들을 날려대던 기억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천천히...3년간의 기억들은 거의 같은 기억들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늘 마을에 다녀오고 그런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늘 만난 자리에 서있었던 짜증나는 녀석. 그렇게 이어지고 늘어진 3년 동안의 경계와 벽은 우스울 정도로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뜨릴 수 있게 한 건 마법사도 그도 아닌 그와 그렇게나 만나게 하지 않기 위해 떨어뜨려놨던 아이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불청객이 아닌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어버렸고 심지어 아이와도 매우 잘 지내고 있었다. 틈 따위 보이지도 않았던,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그 벽은 그저 아이의 귀여운 행동 하나로 쉬이 걷어진 천이자 3년이라는 시간으로 늘어진 의미 없는 끈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허탈하지는 않았다. 아마 마법사 본인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터였다.


“얄미운 데다가 속내도 시꺼먼 녀석입니다. 다만 3년 동안의 미운정이 든 아쉬운 녀석입니다.”


이번엔 가려진 한구석에서 또다시 묻는다. 그걸로 끝?


“그래야만 합니다.”


말을 다 듣게 된 늙은 마법사는 그나마 달고 있었던 미소마저 내려놓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마법사를 빤히 바라봤다. 더 말을 해보라고 해봤자 정작 담게 될 내용은 대답은 그걸로 충분하다느니 더 이상 대답은 없다며 덮는 것도 모자라 잘라버릴 테고 아니면 아예 지금처럼 계속 입을 닫아버릴 게 뻔했다. 


결국 더 묻는 걸 포기하고는 소매에서 손을 꺼냈다. 손에 쥐고 있던 건 늙은 마법사가 그의 집으로 발을 들인 목적이자 떠나보낼 무언의 재촉이었다.


“준비는 다 해놨으니 이것만 잘 들고 잘 숨기면 돼.”


“감사합니다.”


저걸 받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도 남아있을 것도 없겠지.


만약 지금 손을 내미는 자신이 완전한 제 3자였다면 건네주는 손과 받는 손이 마치 현실성 없는 소설의 한 장면 같다고 말했을 거라며 자조 섞인 눈빛을 따라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어째선지 그의 속말 그대로 소설처럼 움직이는 손들이 느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꽤 오랫동안 쥐고 있었는지 따뜻하지만 변할 수 없었던 딱딱한 감촉이 그의 다른 감각들도 마저 현실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에 아 하고 뜻 모를 감탄도 함께 딸려 나오고는 곧바로 흩어져버리기 바빴다.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눈 또한 느릿하게 깜빡인다.


“진..짜..군요.”


“그럼 진짜지 어디 흐물렁한 짜가겠어? 만드느라 고생 좀 했지!”


“잠깐, 만드셨다니...구한 게 아닌..”


“구하긴 어디서 구해? 그게 구한다고 해도 구해질 것도 아닌 건 너도 아주 잘 알잖냐?”


마법사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디서부터 따져야할 지, 그 뒷내용이 어떻게 되어있을지 듣는 것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얌전히 비어있는 다른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 한 것도 없는데 어째선지 피곤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낄낄 다시 웃음을 달게 된 늙은 마법사는 익살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 못 보는 거야 하도 익숙해서 그렇다 치지만 그 모습을 못 보는 게 좀 아쉬워~ 그러니까 자주 놀러와잉~”


“오늘 이후로 앞으로의 모습은 물론 멀쩡한 제 모습도 영원히 못 보게 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미리 드리지 못했던 작별인사를 지금 할까 싶습니다만.”


“에헤이~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겨~! 그러니까 넣어둬!”


손을 들어 올려 과장스럽게 흔들어대는 모습엔 나름의 진심도 섞여있는 것 같았지만 함께 올라온 가벼운 웃음에 침묵으로 흘려보냈다. 정말 그대로 영원한 작별이 되어버릴 뻔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더 이상 농담으로 말하기엔 너무 무거워져버렸는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언제나 여유로우면서도 꽤나 날카롭게 상황을 찌르던 녀석을 떠올렸다. 


아마 지금도 옆에 있었다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작은 바람으로 구름을 움직여 하늘의 그림을 바꾸는 건 분명 굉장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이곳에 남길 바람이라고 부드럽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저번이라고는 해도 며칠 전이지만 자네는 꽤나 철저하면서도 빠르게 준비하지, 아니 어쩌면 계속해서 준비했을 텐데...”


그가 말을 고르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늙은 마법사는 먼저 말을 꺼냄으로써 침묵을 거두어 내심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비록 입은 여전히 다물려져 있었지만 그런 질문이 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담담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답이 충분했는지 혀를 끌끌 차고는 그렇게 빠른 걸 보면 역시 자네도 젊은이에 속한다는 둥 잔소리보단 가볍고 흔히 꺼내보는 말보다는 조금 씁쓸함을 담은 말들을 꺼내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덧붙인다.


“그 녀석한텐 말은 하고 가는 거야? 나야 이젠 익숙하지만 자네의 그 녀석은 자네보다 더 어리고 혈기 넘치잖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모든 생각이 그에 얻어맞아 물러나버렸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추가적으로 말들이 날아왔다.


“굳이 그럴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란 말 하지도 말아. 젊은 녀석인데다 가벼운 녀석이니 금방 흘려버릴 녀석이란 말도. 분명 말을 들어보면 친해진 것도 3년이라는 시간에 비해 그나마 최근인 것 같지만 그 3년의 미운정이 얄팍한 것 같지만 그게 쌓인 데다 막아설 이유마저 사라진 덕에 그렇게 짧은 시간 만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게다가”


그 입의 호선은 정곡을 찌르는 부드러운 칼날이다.


“애초에 말과 행동이 가벼워도 사람 자체가 가벼울 순 없는 노릇이야.”




*****




“자네는 참 부지런하군 그래.”


늘 일정한 시간, 이른 아침에 찾아오는 손님은 눈을 껌뻑이며 마법사를 빤히 쳐다보기 바빴다. 물론 마법사 또한 일찍 일어나 매일 같이 그를 기다리다시피 했지만 무언가 말 그대로 손님을 대접한다는 느낌을 내며 그를 상대했다. 


물론 지금도 평소와 행동이 다를 바가 없지만 무언가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에 어쩐지 묘한 기운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그 묘한 기운이 기분 나쁜 게 아닌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은 종류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무시하는 게 더 어리석을 정도였다. 다만 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찝찝함이 그를 계속해서 붙들어 괴롭히고는 놔주질 않았다. 


그런 상념에 빠진 그를 끌어올린 건 바로 마법사의 부름이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하나? 어서 오지 않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 무언가 막이 깨어지듯 순간 환해졌다. 언제나 한 발 떨어져서 그를 막아서거나 멀거니 보고만 있던 마법사가 먼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꽤나 최근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3년 동안 세워져 있었던 벽은 아이와 친해짐으로써 진즉에 허물어졌어야 할 것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던 느낌이었지만 지금 마법사와의 거리는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계기가 있다.


“무슨 일입니까?”


“다짜고짜 무슨 소린가?”


“평소와 달리 저를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주시니 기쁩니다만 한편으론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좀 찝찝하다고 해야 할까요? 뭔가 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생각하기론 저한테 잘못한 것도 없을 텐데다 그런 걸 호의로 퉁치는 성격도 아니시니...그렇담 역시 제 고백이 통했..”


“호의란 걸 알아챌 눈치가 있다면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는 게 정상일 텐데 말일세. 게다가 자넨 기회라는 게 생기면 놓치지 않고 잡아챌 녀석인 줄 알았는데 그 가벼운 입김으로 저 멀리 날려버리려고 하는 걸 보면 내가 잘못 봤나보군 그래.”


그 말에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자리에 앉았다. 이유는 언제든 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미뤄두고 꽤나 귀중하게 온 기회이자 현재를 즐기자는 심정으로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마법사를 바라본다. 마법사는 여전히 그 웃음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조금 까딱이고는 홱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런 반응도 그에겐 그저 귀여웠는지 다문지 얼마 안 된 입을 열려던 순간 아직까지 자고 있던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는 방문이 열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웅얼거리던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랑 아저씨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나?”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쩜 부모자식 아니랄까봐 하는 말도 닮았는지 귀엽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던 마법사는 여전히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주러 다가갔다. 안아 올리니 따뜻한 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은 손으로 마법사를 꽉 잡은 아이는 다시 잠에 빠졌는지 얌전해졌다. 


작은 등을 토닥여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던 마법사는 아직까지도 멈추지 않는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 그를 쏘아봤다. 그에 계속 웃음을 달고 있던 그는 한차례 진정하기 위해 숨을 몰아쉬더니 숨이 잘못 들어갔는지 기침을 한다.


“콜록! 아아 거슬렸다면 죄송함다~ 아무리 다른 땅에다 심어도 사과 씨 다르고 포도 씨 다르다고들 하지만 역시 키우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건 확실하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요~”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말에 대꾸하는 것보다 아이를 다시 방 안에 데려다놓는 게 더 우선이었기에 문 닫히는 소리만 그의 귀로 찾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리고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나오는 마법사였다. 키에 맞게 꽤나 긴 다리를 이용해 금세 자리를 좁힌 그는 마법사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나름대로 걱정을 담아 말을 건넸다.


“역시 상태가 안 좋군요. 얼른 다시 누워계십..”


“은근 슬쩍 만지작거리지 말게.”


“제 손길보단 눈부터 봐주십쇼. 지금 눈으로 유혹 중입니다만?”


“창가의 먼지만큼도 안 먹히니 얼른 떨어지길 바라네만.”


이 이상 말을 덧붙여도 안 먹힐 걸 깨달은 그는 얌전히 물러났다. 사실 안 먹힐 걸 잘 알고 장난삼아 한 말이니 그다지 큰 타격도 없었다. 애초에 첫 고백 때 차인 것만큼 타격이 올만한 것도 더 이상 없었으니 이제 그에게 문제 될 건 없다. 그런 그를 흘끗 보던 마법사는 밖으로 나갈 것처럼 발을 옮기며 그에게 말했다.


“혹시 같이 호수로 갈 수 있겠나?”





*****




“그래서 어디서 머리를 다쳤다고?”


“다짜고짜 뭔 헛소립니까?”


“그거야 네가 조울증 마냥 기분 드럽다는 거 팍팍 티내다가 갑자기 또 생글생글 처 웃으니까 하는 소리지 어디서 건방지게 헛소리로 치부해?”


“당신이야말로 매우 건방지다는 걸 알고 있기나 합니까? 제가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망정이지 기분이 나빴던 얼마 전이었다면 그 뚫린 입이 더 큰 구멍으로 뚫렸을 검다.”


“수장대우 받고 싶으면 거 시X 땡땡이를 치질 말던가!”


거칠고 천박한 욕들이 섞인 말이 날아오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매우 좋아진 상태였다. 원래라면 이쯤 됐을 때 늘 달던 웃음도 거두고 천박한 말 더 이상 들어줄 생각 없다며 큰 공격 하나 날릴 법한 녀석이 계속해서 생글생글 웃고 있자 그에게 험한 욕들을 마구 꺼내 날리던 자도 질리면서도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진짜 어디 가서 머리라도 맞고 왔냐? 물론 네 놈이 쉽게 맞아줄 녀석은 아니지만 지금 완전 이상한 거 알지? 뭐 원래도 이상하지만.”


결국 그에게도 인내심은 바닥이란 게 드러나는지라 방 안은 그 혼자만의 공간이 됐다. 물론 문 너머에서 여전히 험한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는 지금의 기분을 마음껏 느끼는 게 더 중요했다. 눈을 감으니 꽤나 당황한 얼굴로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늘 굳게 다물고 있었던 입술을 뻐끔거리던 마법사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예상하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아 그런 얼굴이 되어버린 게 분명했다. 마법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새롭고도 즐거운 비밀을 간직하게 된 것만 같아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막진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그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에 젖어있었다. 그는 오늘 아침 마법사가 제게 했던 말을 꺼내 기분 좋은 어투로 입에 담았다.


“저는 기회라는 게 생기면 놓치지 않고 잡아챌 녀석입니다~”


말과 함께 만족스러우면서도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물론 또 다가선다면 마법사는 질색하면서 밀어낼 게 뻔했지만 이제 그런 거부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터, 비록 쌓인 일이 많아서 이렇게나 일찍 오게 됐지만 그는 오늘만큼 값진 날도 없다며 기분 좋게 일을 처리했다. 아쉽지 않다고 할 순 없겠지만 이제 앞으로도 기회는 충분했다. 


그는 다시 여유로워졌다.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서 이유도 모른 채 단단히 자리 잡고 있던 조급함은 오늘 호수에서의 대화 덕분에 사라졌다. 여유를 되찾게 된 그는 천천히 마법사의 심장에 접근할 계획들을 잔뜩 세우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머릿속에서만 떠 있던 상상이 바로 눈앞으로 내려온 것처럼 곧 가까워질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무엇이든지 확신을 얻으면 비로소 안정이 되고 다시 차분하게 현재를 굴릴 수 있기에 그는 지금 나름의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한순간을 즐기고 있던 그였지만 곧이어 빛을 내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수정구 덕분에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여유를 봐줄 틈은 없다는 듯이 빛을 내는 수정구에 그는 조금 기분이 가라앉나 싶었지만 곧이어 연락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을 때 자연스럽게 기분이 다시 좋아지며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자리를 비웠죠?”


사실 상대방은 얼굴만 제대로 못 마주했다 뿐이지 그의 최근 일에 대해선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마다 거친 말투와 욕설을 곁들이며 그의 행동 및 감정 상태를 매일 보고하다시피 통신 수정구를 통해 불평해대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다. 굳이 그에 대한 말은 물론 아무런 대답도 꺼내지 않고 이어지는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미안함다~ 하지만 그만큼 저에겐 매우 즐겁고 가치 있던 순간이어서 놓칠 수야 없었지요, 조만간 자리 하나 새로 마련해야할지도 모름다?”


“새로운 동료입니까?”


“음~ 저에겐 동료 그 이상인 분이라서 말임다. 일단 제 곁에 두고 싶으니 자리 하나 정돈 마련해놓는 게 좋지 않겠슴까?”


누구든지 간에 결국엔 그의 선택이 시작이자 끝이다. 갑작스럽게 그들의 곁 혹은 위로 들어오게 될 자에 대한 반발 따윈 처음부터 나타나지도 않았다. 물론 본인이 아닌 다른 자들에게서 나타나겠지만 어차피 얼마 가지도 않아 가라앉을 게 뻔했다. 결국 누군지 모를 새로운 자가 그의 총애를 받으며 자리를 잡는 건 이미 정해진 결과다.


그도 그에게 가까이 있던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



그는 늘 그랬듯이 숲 속에 숨어있는 작은 집으로 찾아갔다. 이른 아침은 아직 새벽의 냉기를 놓지 못했는지 차가웠지만 그를 반긴 것만큼 차갑진 않았다. 아침의 흔한 바람 한 점도 없는데 새벽도 아침도 만들어낸 게 아닌 냉기는 지독하게도 기어와 그의 발목부터 움켜잡으며 점점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까지 올라와 싸늘하게 식혔지만 가슴 속에서 날뛰는 불을 더욱 매섭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발치에는 늘 입에 담고 다니는 애칭이었던 딸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언젠가 아이에게 설명해줬던 달콤하고 새빨갛게 익은 딸기는 뭉개지고 흙투성이가 되어 풀들 사이로 제 미운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마치 현재 그의 마음처럼.


검은색이다. 무너져버렸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손잡이가 잡히는 문도, 집주인의 마음을 나타내듯이 천으로 가려져 있던 창문도, 그 문 너머에 있었을 모든 것도,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던 뒷마당도. 분명히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린 흔적들인데도 냉기가 머무르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지만 왜 재가 되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왜 불을 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그의 귓가를 맴돌며 눈앞을 어지럽힌다. 손을 들어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던 그는 순간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땅을 더듬으며 넘어지지 않게 버텼다. 그 아래에 숨어있던 딸기가 있었는지 물컹한 느낌이 그를 깨웠다. 그는 손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어디론가 멍하니 달려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던 곳.



*****



“뭐 이미 한 번 온데다가 보게 된 호수지만 밤에 보는 호수와 낮에 보는 호수는 다르네요. 앞으로 얼씬도 못하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 데려와주시다니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슴다~”


“막는다고 해도 자네가 안 올 사람은 아니잖나? 그동안 이 호수로 오지 않은 이유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 아닌가.”


“아뇨!아뇨! 흥미롭긴 매우 흥미롭슴다. 하지만 제가 뭘 할 수도 없는 곳이잖슴까?”


오직 당신의 기억만이 답을 쥐고 있을 뿐.


마법사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날 밤으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이 호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섣불리 말을 건네지 않았다. 다시 현실과 꿈의 경계로 눈을 돌린 마법사는 두 번째로 보여줬던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 로메루와 밸러니의 이야기를 알고 있나?”


“그거 모르면 마법사가 아니라 갑자기 땅에서 솟구친 흙 인형 아님까?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마녀들도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동화잖슴까.”


“그럼 그 결말도?”


“당연하죠. 하지만 쓴 사람마다 책마다 결말이 다르기로 유명한 터라 제가 본 책 외의 결말은 모름다. 다만 제일 처음 본 결말이 밸러니가 떠나는 로메루를 뒤늦게나마 따라가는 결말이었네요. 그 다음으로 보고 듣게 된 결말들은 꽤나 다양했던데 모든 책과 똑같이 로메루는 떠나고 밸러니는 여전히 제 고집으로 그 작은 숲 속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끝난 책도 있다고 하더군요.”


“고집...인가?”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로메루도 고집을 부린 거나 마찬가짐다. 아무래도 제가 읽고 들은 동화책들은 거의 마법사들 손을 탄 책이다 보니 자유를 추구하고 끝없는 여행을 떠난 마법사인 로메루를 중심으로 서술되다시피 했고 밸러니가 일방적으로 고집을 부리는 모습으로 나왔죠. 물론 공정하게 서술됐어도 마법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마법사잖슴까?”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아 이어갈 수 없었기에. 다만 이번에는 멍하니 호수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마법사는 품에 손을 집어넣더니 언제부터 가져왔는지 모를 익숙한 천을 꺼내 그대로 온 몸을 꽁꽁 싸매다시피 둘렀다. 하늘하늘하며 부드러운 끝자락이 펄럭이며 거울 같은 호수의 바로 위로 뻗어가며 비춰진 하늘과 하나로 이어졌다.


“어울리나?”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져 보였다.


“...네, 어울립니다.”


아니, 어울린다는 말도 부족합니다.


덧붙여야할 뒷말은 나오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더 봐야했으니까. 굉장히 멀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그대로 마법사에게 다가가 껴안았다.


“좋아합니다.”


그는 그렇게 꽉 안은 채 속삭이기 바빴다. 가슴 속의 무언가가 올라오면서 그의 손에 힘을 실어줬다. 아아 여지가 있구나. 마법사는 그의 품에 있었다. 그렇게나 가까이 있었지만 마법사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정구가 빛을 내고 떠나가는 그를 향해 마법사가 말했다.



*****



“하..하하...”


거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와 다음 숨을 재촉하며 신음을 내질러야 했지만 나온 건 허탈한 웃음이었다. 호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커다란 거울처럼 깨끗했고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마법사가 정식으로 초대한 그 때처럼 호수에 비춰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제 커다란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늘과 호수를 구분하게 해주는 건 녹색, 그 색들을 올린 채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큰 나무들과 그 아래에서 색을 머금은 풀들. 하늘을 담은 호수를 구분하는 그 녹색의 풀들 위에 있어선 안 되는, 없었길 바라는 색이 있었다.


“하...하..”


그의 키에 맞게 길게 쭉 뻗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다리를 지탱하는 발이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얼마가지 않아 녹색이 무릎에 뭉개지면서 사정없이 휘어잡았다. 언제나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은 부들부들 떨리며 아래로 내려가 호수 바로 앞에 있는 그 색으로 다가갔다.


“이게...대답입니까?”


잡았음에도 손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차가운 대답뿐만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손에 쥐어졌다. 무엇인지 일일이 설명하기엔 엉키고 섞이고 커져서 감당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는 지금 절대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현실이다. 


그 순간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을 툭 건드리고 간다. 푸른색이 그의 눈앞에 흔들린다.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그의 귓가를 맴돌며 눈앞을 어지럽힌다.


“안녕.”





prologue end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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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내가 알고 있었던 것들을 가르쳐줬을 뿐이네."

나긋나긋하게 주위를 감싸는 목소리는 처음 듣는 사람이 듣기에도 얌전히 잡힐 만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목소리 앞에 자리잡은 커다란 검은 바위는 그 틈새로 서로 다르게 물들어 있는 빛을 힐끗힐끗 내보이며 그 자리에 앉아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깜빡임을 반복하는 하얀 빛과 붉은 빛을 놓치지 않고 마주하면서 손으로 입을 감싸듯이 턱을 괴면서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었던 것들이 그들에겐 모르는 것들이었다는 게 문제였던 거지."

밝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몇가닥씩 짝을 이루고 흘러내리면서 이마를 쓸어간다. 뿐만 아니라 눈까지 뻗어오는 마리카락에 그는 나머지 손을 들면서 다시금 머리카락을 올리며 눈을 감싸고 있는 낯선 물건을 다시 제자리로 고쳐 쓴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는 말들은 아무런 감정을 담아두지 않았지만 살짝 눈동자를 덮으며 아래로 휘어지는 눈매는 꽤 부드럽다.

하지만 손 아래의 입이 웃고 있지 않는 건 그 누가 알았을까.

 


"드디어 날이 밝았군."

그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잔뜩 깃털이 달린 날개와 더불어 육중한 몸을 바닥에 늘어뜨린 모습이 꽤 피곤해 보인다. 물론 하루종일 파란색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파란 하늘을 하루종일 날개로 휘젓고 녹색 땅을 발에 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달콤한 휴식처가 될 땅은 물론 분명히 파란색이었던 하늘 마저 검게 물들어버리고 말로만 듣던 언데드들과 서서히 묻혀져가던 검은 전쟁이 다시금 모습을 들어낼 것이라는 상황과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서 튀어나온 반전에 지칠대로 지쳐버린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반전을 발견한 사람은 본인이었으니 말 다한 거나 다름 없었다.

"그보다 여기 배였어!?"

몸은 지쳤을 지언정 전서구의 목청은 영원하리. 분명 그들이 엎치락 뒤치락 했던 모래사장 옆은 바로 바다였으니 모래사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집이라고 생각했었다. 모래사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은 맞았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바다 위였다. 부리를 벌린 채 쉴새없이 호들갑을 떠는 전서구의 모습에 비해 상당히 대조될 정도로 차분하게 앉아있는 퍼블리 또한 시선은 창문 너머의 나누어진 푸른색들을 향하고 있지만 눈동자는 매우 흐리다. 녹색 눈동자에 뛰어들어 휘젓는 진실들은 흐려진 것 만큼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알 수 없는 막막한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고선 날카로운 창들을 들이민다. 그 확실치 않은 것들은 아마 검은 진실에서 튀어나온 배신감이리라.

우습게도 녹색은 불신을 품지 않는다.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요."

충격에 가라앉은 배처럼 가라앉아있을 거라 생각되던 목소리는 아직까지 모래사장 위에서 투닥거리고 있었는지 의외로 낭랑하다.

"확실히 모든 게 이상하긴 하지만 정원지기님을 의심하기엔 아직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요. 게다가 제가 정원지기님을 만난 건 하늘이 두 번 바뀐 정도지만 정원지기님이 이곳에 오시고 나서 하늘이 14번은 바뀌었어요. 만약 정원지기님이 범인이라면 바로 오신 그 푸른 날의 밤이 사라졌어야해요."

묵묵히 말을 들고있던 언데드들은 순박한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전서구 또한 쉴새없이 움직이던 부리를 잠시 멈추고 커다란 눈동자를 데룩 굴린다.

"사실 저는 정원지기님을 믿고 싶어요. 방금 전에 말했다시피 정원지기님을 만난 건 고작 두 번째 푸른 날인데다가 그저 제가 일방적으로 뒤를 따르는 것 뿐이었지만 그래도 정원지기님이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어쩌면..."

푸른 빛을 머금은 흰 색의 가닥들이 고개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흔들리며 창문 너머로 내려오는 햇빛과 부딪히는 모습과 동시에 아래에 자리잡은 녹색은 햇빛을 받아들였는지 선명하다.

"그 분 또한 피해자일 수도 있어요."

기억에도 없는 너는 무엇을 그리 확신하는 거지?

배를 향해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제법 시원하다. 서로 다른 파란색들 사이의 선 위를 끊어놓는 배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우뚝 떠있다. 그곳은 무대이며 주인은 관객이고 손님은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 있는 배우이니라. 그것은 극적이지만 그 누구도 거짓이라 말하지 못 한다.

"형님!! 형니이이임!!!"

무언가에 부딪혔는지 작게 흔들리던 것도 잠시, 곧이어 들이닥친 언데드들은 날이 밝자마자 작은 배를 타고 어디론가 배를 몰던 이들이었다. 방 안의 모두가 그들을 주목하는 가운데 순박한 눈은 답지 않게 두려움을 가득 담고 이가 듬성듬성 나있는 입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전혀 반길만한 것이 못 됐다.

"메르시가 사라졌어요!!!"

또다른 어두운 무대가 열린다.

 

"기억할 수 있어?"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떨리는 목소리는 어리다.

"글쎄..."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무덤덤하게 말을 꺼내는 목소리는 어른이다.

"글쎄라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네."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사방을 부딪혀보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정적 뿐이다.

"이젠 모르겠어..."

흰 색과 검은 색이 요동친다. 공간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인지 그의 마음이 공간을 따라 복잡해지는지 오직 그 만이 알 수 있다.

"나는 후회하고 있는 건가?"

목소리는 처음부터 하나다.

 

"여기는...."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몸을 두르고 있는 녹색의 천이 흔들린다. 천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천과 달리 붉은 색이었고 순식간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강렬했다.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그는 다름아닌 정원지기다. 푸른 눈에 담기는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이었고 문득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갑자기 그는 고개를 세차게 돌려 위를 올려다봤다.

"...역시 그녀석은 예찬(禮讚)이었나?"

푸른 빛이 날카롭게 쏘아보는 곳엔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 그의 눈에 자리를 잡는다.

"하얀 달...빌어먹게도 여전하군."

검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이질적인 하얀 점이다. 아니 점이라고 부르기엔 크기는 그가 부른 이름처럼 달같았지만 달이라고 하기엔 티 하나 없이 완벽한 흰 색의 점은 위화감이 들기 마련이었다. 하얀 달을 쏘아보던 그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잽싸게 어딘가로 몸을 숨겼다.

"우와앙! 달이 엄청 새하얘!"

"그러게요? 신기해라..."

그들의 눈엔 보이지 않겠지만 그는 바위 뒤로 숨으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등불을 손에 쥐고 돌아다니는 그들 중 키가 큰 남자의 모습을 보며 헛기침이 나오려던걸 간신히 눌러 담았다. 그 남자는 이곳에 있을 리가 없고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런데요, 용사님. 우리 어디까지 온 걸까요? 분명 바다가 나올 때가 됐는데..."

"우웅..."

이리저리 삐죽 뻗친 푸른 머리카락과 순진하게 깜빡이며 반짝이는 녹색 눈은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은 퍼블리와 전서구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존재였다. 바위에 올린 손이 힘을 가득 쥔 채로 긁어내리면서 손톱 밑의 여린 살에 상처를 낸다. 바위 뿐만 아니라 서로를 깎아내려는지 살벌하게 갈리는 잇새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분노에 가득 찬 말을 내뱉는다.

"그 솟은 머리를 뽑아버릴 자식이 대체 무슨 생각이지!?"

바위에 스며들은 핏자국 또한 그의 분노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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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색은 밤을 돌려줄 생각이 없어보인다. 내려앉은 자리를 끈질기게도 잡고 있는 모습이 질릴 법도 한데 바깥을 바라보는 눈은 변함없이 굳어있다. 과연 저 바깥은 시간이 흐르고 있을까. 그들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건 그들만이 알고 있다. 흔들리는 촛불이 그림자를 잡아끌며 이리저리 휘두른다. 열심히 제 몸을 흔들어대는 촛불과는 달리 촛불이 담겨있는 등을 사이에 놓고 앉아있는 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노란 머리카락이 촛불로 인해 짙은 색으로 빛난다. 정원지기를 바라보는 얼굴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정원지기에게 고정하는 시선은 여전했다. 하지만 정원지기는 여전히 바깥을 바라본다.

"어디가 진실이고 어디가 거짓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네."

침묵을 깬 건 의외로 정원지기다. 시선은 여전히 변함 없지만 이어서 움직이는 입이 연달아 침묵을 부순다.

"설령 있다해도 그들은 이미 손을 놓아버린지 오래인데다"

마침내 굳어있는 눈을 돌려 자신을 향하는 검은 눈을 마주하지만

"애초에 거짓 속에서 살아온 자들에겐 진실이 없는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것은 벽이다. 절대 안을 허락하지 않는 벽. 그것이 얼마나 견고할지는 세운 자만이 알 수 있으리라. 서로 벽을 내세우며 상대의 벽 너머를 끊임없이 주시하지만 서로 그러한 행동이 얼마나 의미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서로간의 딱딱한 기싸움의 끝은 정원지기가 자리를 뜨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나무판자와 체중이 떨어져나간 의자다리가 서로 밀어내는 소리와 함께 정원지기는 문으로 제 발의 방향을 돌린다. 문을 열기 전, 낭랑한 목소리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발목을 잡는다.

"등불은 필요 없으세요?"

말 대신 마저 문을 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몸이 반쯤 검은 세상을 향해가는 순간 묵직한 목소리가 제 무게를 이용해 말을 꺼낸다.

"다음부터 사람을 대할 땐 흥미로운 눈을 접어두길 바라네."

"뭐, 그렇담 이것만 듣고 가세요."

돌아보지는 않는다.

"자기들 밖에 모르신다는 정원지기치곤 그 애에게 상당히 신경 많이 쓰고 열렬한 눈빛도 보내고 있단 거 알아요. 그 눈빛이 평범하게 상상하는 그런 단내 가득한 그런 눈빛이 아니라 좀 상상 외의 것이라 의문스럽지만."

아니 애초에 단내 가득한 눈이어도 문제가 있을 것 같네요.

말로만 봐서는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웃음기를 머금을 법한 투로 말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유지해왔던 웃음도 띄우지 않고 계속해서 말한다.

"그 애를 하얗게 보지 말고 자세히 봐요."

담백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찔러들어온다.

"그 애 머리카락이 얼마나 빛나는지, 그 애 눈이 얼마나 예쁜 녹색인지 제대로 봐두시라고요."

문이 닫힌다.

 

 


"말도 안 돼! 정원지기님이 그럴 이유는 없어!"

"하지만 이상하잖아! 몇십년 전 일인데다가 정원지기들이 들을까 쉬쉬했다는데 어떻게 알겠어?! 이 구역에서 살아왔다면 모를까, 그 빨간 정원지기님 출신이 이 구역이 아닌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그럼 그 몇십년 전 일은 어떤데? 만약 정원지기님이 범인이라면 그 몇십년 전 일의 범인은 누구야? 정원지기님은 인간인데다가 몇십년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어!"

갑작스럽게 벌어진 둘의 말다툼에 언데드들은 멀뚱히 신명나게 움직이는 입과 부리를 바라본다. 그 둘에게서 튀어나오는 여러 감정 섞인 말들을 멀뚱히 주워담던 그들이 확신할 수 있던 것은 저들이 말이 바로 화제의 정원지기를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고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서로 상반된 의견을 던져대고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 말들은 점점 꼬이면서 정적이 쌓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지 이리저리 어지럽히기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지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 저들이 각자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상황에 비해 단순했다. 엉켜버린 말들을 정리하기 위해 가위로 자르듯 그 둘 사이로 제 큰 덩치를 밀고 들어간 언데드가 분위기를 손으로 누르듯이 눌러내린다.

"진...정...."

"그래. 흥분하면 오히려 꼬인다."

그들의 중재로 얼굴까지 벌겋게 올라온 열을 가라앉히던 둘은 서로 다른 의미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의도치 않게 자신도 모르던 숨겨진 진실의 끄트머리를 끄집어낸 것 같은 기분에 전서구는 날개로 눈가를 쓸어내리기에 바빴고 그에 비해 어딘가 멍해 보이는 퍼블리는 창밖의 검은 세상을 바라보고 벌리고 있던 입을 꾹 다문다. 그 속에 들어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 흔들리는 녹색 빛이 검은색을 꿰뚫고자 하는 것처럼 돌릴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흔들림을 진정시키고자 떨리지만 단호하게 깜빡이던 빛이 다시금 길을 세운다. 과연 누구를 믿고 무엇이 그리 이곳을 휘젓는 것인가. 검은 세상은 자신의 색 그대로 모든 것을 검게 만들어놓고는 유유히 남아있는 자들을 휘저어 놓는다. 제가 믿던 것이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부수기 바쁜 저 검은색은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저 우연히 끄집어나온 단면에 자신이 믿어오던 것이 쉽사리 무너져 내리는 것인가?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다시금 돌아오는 녹색 빛은 흔들림을 끌어내린 상태다.

"검은 전쟁 때까지 있었던 정원지기에 대해 말해주세요."

 


아무도 곁에 없어요.
당신은 떠나가고 나는 그를 떠났고
허무하게 당신을 떠나보낸 나는 한탄하고
허무하게 그를 떠난 나는 후회하고
그 끝에 나의 텅 빈 손만이 나를 맞이해요.

나는 나를 원망해요.

 


"검게 내려앉은 세상엔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는 빛도 사라져버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탐욕스럽게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니.."

조용히 주변을 감싸는 목소리는 제물을 바치는 의식의 주문처럼 나지막히 흘러간다. 발을 내딛는 소리마저 집어 삼키는 검은 세상은 의식의 제사장 마저 잡아삼킬 기세로 덤벼들지만 아무런 떨림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목소리는 탐욕스러운 검은 세상조차 무섭지 않다는 마음을 대변하듯이 주변의 정적을 향해 부딪힌다. 그와 더불어 여전히 내딛는 소리 또한 일정하게 부딪히지만 쉴새없이 반복한다. 검은 세상은 계속해서 집어삼킨다 아니...

"모두가 뿌리치고 밀어내며 떠나가고 떠나보내며 남아있는 텅 빈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쥐니.."

집어삼키는 건 누구인가?

"도망치는 그의 발에 족쇄를, 잊지 못할 추억을."

내딛는 소리가 점점 조용해진다. 과연 그 또한 먹혀버린 것일까.

아님 그가 집어삼켜버린 것일까?

"도망치는 그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의 발 끝에 자리잡고 있는 하얀 세상을 집어삼키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다정하게 경고한다. 하얀 세상을 싫어하는 주제에 미련을 남겨둔 것인지 다시 발을 들이고는 떠나가지 못한 채 방황하는 모습 마저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검은 세상은 여전히 집어삼키기에 바쁘다. 물고서는 놔주지 않은 채 붙드는 손길은 위태롭기 그지 없었다. 그와 반대로 여유로운 그의 손엔 흔한 등불 하나조차 없다.

"무너지는 가짜 세상은 안타깝게도 그 소중하고 얄팍한 장막을 눈 앞에서 갈기갈기 찢길지니..."

여유로운 그 또한 검은 세상처럼 검은색이다.

"그것이야말로 다름아닌 도망치던 당신이 원하던 일."

우습게도 그를 감싸고 있는 색은 밝은 녹색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배...아니 패치?"

그 앞에 주저앉은 자를 감싸는 것 또한 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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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좀 짧습니다...죄송합니다.ㅠ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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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을 봐요.
하얀 세상을 달리고 있는 아이가 있어요.
하얀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해요.
아이는 이 하얀 세상이 마음에 드나봐요.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아이를 하얗게 보는 거죠?

 

 

"워매 저게 뭐시당가!?"

호들갑 속에서도 익살스러움은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것인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릴 사람이 있을 법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러한 웃음의 여유를 주고 싶어하는 것 같진 않아보였다. 제 옆에서 열심히 커다란 날개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호들갑을 떠는 전서구와 그와는 달리 아무런 말 없이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는 퍼블리를 보면 극과 극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지만 얼이 빠져있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창 밖의 풍경은 이제까지 그들이 봐왔던 것이 아닌데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입은 열고 있지만 하나의 입에선 나오는 말이 없었고 하나의 부리에선 그다지 도움되지 않는 호들갑만 쏟아질 뿐. 그런 그들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묵묵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열심히 움직이던 녹색 빛이 진정이 되었는지 움직임을 멈추지만 어둡게 가라앉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아보였다.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기색이 만연한 눈으로 퍼블리는 자신들을 데려온 사람을 바라본다.

"우선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우리도 지나가다 발견한 것 뿐이니까."

우리라는 말에 가라앉은 눈이 살짝 크게 떠지더니 그제야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시선이 눈에 들어왔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 위의 두건을 두어번 쓸어내린다. 그 옆에선 진정이 되었는지 아니면 호들갑을 떨다가 지친건지 숨을 몰아쉬며 날개를 늘어뜨린 전서구가 제 일행처럼 크고 동그란 눈을 데룩 굴리며 시선들을 의식한다. 물론 저들을 도와줬다고는 하나 어떤 사람인지 모를, 게다가 한명이 아닌 다수의 시선을 받은 그들은 마음 한편으론 작은 경계심을 세우기 시작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호기심이 우선이었다. 바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두운 방안에서 각각의 빛을 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그들은 조심스레 탁자위에 자리잡은 등불을 들어올린다.

"어..언데드?"

칙칙한 색의 피부를 지니면서 그중의 몇몇 신체일부가 없는 그들은 영락없는 언데드였다. 다만 언데드들을 봤다는 사람들의 말과 제 기억에 언데드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상상과는 다르게 순한 눈을 굴리며 등불을 들어올린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은 들려온 말과 떠오른 상상 속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얼빠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실례였음을 깨닫고는 잽싸게 등불을 내린다. 그와 동시에 방금전까지 제 눈에 담아뒀던 칙칙한 색에 둘러싸인 순한 눈이 코 앞으로 와있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뒤로 물러나는 반응에도 상관없이 덧니가 듬성듬성 박혀있는 입이 보기 좋은 둥근 선을 그린다. 그런 입과 마찬가지로 둥그런 순한 눈이 함께 자리잡으니 누가 그들을 나쁘게 볼 수 있겠는가.

"인간 보는거 오랜만이네!"

"오랜만! 오랜만!"

목소리를 모아 함께 외치는 그들은 동화를 듣는 어린아이들처럼 해맑았다. 머리속에 자리잡던 언데드에 대한 편견이 제 모습을 감추는 건 생각보다 오래지나지 않았다. 자잘하게 남은 경계의 잔해는 따뜻하고 작은 바람만 다시 한 번 불어온다면 그대로 날아가버려 돌아오지 않으리라.

"심하게 경계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바깥에 우리 인식이 많이 흐릿해졌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자 다른 언데드들과는 달리 무거워보이는 갑주를 입고있는 덩치가 제법 큰 언데드였다.

"아, 그게...언데드들이 모습을 감춘지 오래됐다고 들었는데..."

"모습을 감췄다기엔 애매하지만...검은 전쟁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거야?"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질문에 퍼블리는 그제야 의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 전쟁은 그들의 구역에서 한 때 가장 유명했던 사건이었다. 다만 꽤나 오래 전의 사건이기도 했고 지금은 한창 이곳으로 들어온 정원지기에 대한 소문이 가장 큰 사건이나 다름없었기에 오래 된 사건은 자연스럽게 묻혀져버렸다. 더군다나 자신은 그 사건에서 살았던, 그리고 기억하는 세대가 아니었기에 그저 어른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듣고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물론 바닷가로 쓸려온 조개가 그 위로 다가오는 모래들에 묻힌다해도 그것을 눈에 담은 사람들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간혹가다 나이먹은 어른들이 다시 한 번 실감 못할 그 이야기를 꺼내놓기에 완전히 묻히진 않았다. 언데드들이 모습을 감춘 것 또한 그 사건 때문이리라.

"그래, 정원지기가 왔다고 했지? 확실히 케케묵은 옛날 얘기들보다는 가까운 얘기가 더 큰 법이니까."

"에이, 형님! 케케묵기는 커녕 몇십년밖에 안 된, 완전 시퍼런 얘기구만!"

"그건 우리한테나 그렇지 짜식들아!"

투박하지만 그들간의 정이 잔뜩 담겨있는 말들이 오가는걸 본다면 그들은 도저히 검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평범한 정원의 주민이 아닌가. 어른들의 이야기는 전부가 믿을게 못 되지만 상당한 분노가 담겨있으면서도 어딘가 슬픈 구석이 하나씩 담겨있던, 그들에 한해선 너무나도 진짜같은 이야기를 떠올리면 차츰 혼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과연 이야기로 이루어진 멀리 느껴지는 진실성이 담긴 어른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기억을 믿어야 할까, 제 눈으로 새겨지는 그들의 모습으로 인한 기억을 믿어야 할까. 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소란은 얼마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가 이어지고 오랜만에 발을 들인 정원지기의 이야기가 묻혀지겠군."

분위기가 가라앉는건 순식간이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용히 입을 다무는 모습은 약간의 공포와 날아가버린 경계를 돌아오게 하는데 탁월했다. 그 둘을 쥐고 있는 긴장은 일어난 채로 쉽사리 몸을 비켜주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적막까지 끌어 주변을 짓누른다. 숨소리조차 쉬이 들려주지 않으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그들 사이로 그들이 아직까진 흐르는 시간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제 몸을 흔드는 등불 속의 작은 촛불은 꺼질 줄 모르고 계속해서 빛을 낸다. 그리고 누군가가 적막을 마저 잡아 끌어내린다.

"저 바깥의 믿을 수 없는 상황이 검은 전쟁의 원흉이다."

담담하게 무거운 분위기를 끌어내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슬퍼보인다.

 

 

"우와아앙!"

"그렇게 신기하세요?"

"온통 까매!"

창문에 딱 붙어서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제법 큰 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다. 즐거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그의 시선을 같이하며 창 밖 너머로 눈을 돌린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조금 어두워진 낯빛은 어린아이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등불은 아이보단 그에게 가까이 있었기에 아이의 표정은 등불조차 비출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창 밖 너머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터라 아이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그 누구도 볼 수 없던 표정을 순식간에 지워버린 아이는 조심스럽게 등불을 들어올리며 그에게 다가간다.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엔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로 인해 우연히 만났지만 집으로 데려온 건 분명 자신의 선택이었고 해코지를 당한다 해도 현재 상황에선 그 누구도 도와주러 올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절대로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거라는 걸 믿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종종 이곳으로 내려온 손님. 매번 자신의 나이 많은 친구들과 어느날 갑자기 떠나버린 부모님이 이야기해주곤 했던 손님.

"용사님."

부름에 응답하듯 머리가 한 쪽으로 기울며 달려있는 푸른 머리카락들을 흔든다. 부름에 대한 작은 의문을 표하는 그를 바라보며 아이가 말한다.

"저 밖의 상황이 무섭지 않나요?"

다가오는 물음에 녹색 빛이 두어번 깜빡거린다. 여전히 두려움은 담겨있지 않았다.

"아깐 온통 하얀 데에 갔다왔어!"

"하얀 데요?"

저 바깥같은 곳이 더 있단 말인가. 이번엔 하얀색으로.

하지만 아이는 단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곳이다. 물론 지금 또한 처음 겪어보고 있다. 만약 날이 지나고 또다시 제게로 나타난다면 전혀 반갑지 않으리라. 아이는 또다시 어두운 낯빛을 꺼낸다. 이번에는 등불이 그 표정을 비추고 그는 그 표정을 보게 된다. 아이의 표정에 그는 또다시 의문을 꺼내려고 했지만 아이가 말을 꺼내는 것이 먼저였다.

"어른들이 그러는데 옛날에 제 친구들이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한가지 못 된 짓을 했대요."

그리고 어른들이 말하는 못 된 짓은 바로 저거예요.

아이의 시선과 함께 그는 다시 창 밖 너머를 바라본다. 그 많던 풀도 나무도 하다못해 작은 벌레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바깥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이 까맣다.

사람도 집도 달빛도 없이.

 

 

"인간들은 우리들의 짓이라고 몰아세웠지."

자신조차 비추지 않는 저 검은 공간을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도 실종되는 인간도 몇몇 있었고."

호기심은 크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데에 대한 두려움보다 클까?

"우리들은 뭉쳐다니는 데다가 그리 멀리 가지 않아서 사라지는 일은 없었어."

호기심의 대가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뿌려놓고는 유유히 제 할일을 계속한다.

"의심 받기는 딱이었지."

두려움은 다른 것들도 불러오곤 했다.

"그...리..고....쫓...겨..났...다....."

두려움으로 인해 나타난 의심과 분노의 화살은 사정없이 그들을 찔러대기 바빴다.

"우리는 물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까 물 천지인 바다는 우리를 가둬두기엔 제격이었겠지."

그리고 그들은 애써 상처를 감춘다.

"우리가 바다로 쫓겨났어도 밤은 돌아오지 않았어."

두려움은 애써 그 자리를 벗어난다.

"신성 녀석들이 끈질기게 우리를 몰아세우더라."

남아있는 두려움은 화살을 더 세게 누른다.

"그렇게 밤은 몇 달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너희들의 손은 어디로 향해있니?

방 안은 고요하다. 하나의 사건에서 나온 두가지의 이야기는 이리저리 엇갈려져 있었다. 하나의 이야기는 믿고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몰아세울 순 없다. 왜냐하면 진실을 아는 자들은 듣는 자가 아닌 이야기를 하는 자들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이야기를 전부 믿지 않기엔 엇갈린 두 이야기가 너무나도 굳게 머릿속에 자리잡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검은 전쟁의 원인이 다시 나타났다. 자신들은 더이상 어른들이 말해주는 머나먼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경험자가 되어버렸다.

"해가 지면 사람들은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보다시피 저 밖을 돌아다닐 만용을 부릴 자들은 얼마 없었고 그마저도 사라졌어. 행여나 들어오지 못 한 가족들이 있을까봐 찾아다닐 수 있게 늘 등불을 지니고 다녔었지."

하지만 그 등불을 지닌 사람들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돌아오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만 돌아오지 못 한 사람들도 많았어. 어쨌건 긴 싸움 끝에 우리는 바다로 물러났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그럼 왜 정원지기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

"그 정원지기 마저도 저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원지기는 패치가 오기 전까지 마지막 정원지기였다.

"고귀한 정원지기가 사라졌으니 신성녀석들은 사고사로 위장했어. 더이상 땅을 넓힐 수 없는 구역인데다 저런 사람 잡아먹는 밤이 찾아온다는 걸 알면 이곳은 완전히 내쳐지게 되겠지. 농사야 짓고 살 수 있는데다 여긴 넓으니까 먹고 사는덴 지장이 없지만 정원지기를 등에 업은 신성녀석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게 전부 다 무너지는 상황이니 비밀로 부쳤다. 애초에 넓힐 땅이라곤 다른 구역들이 다 잡아먹고 둘러싼 상태니 정원지기가 여기로 올 리는 없었지만."

그런 그들의 간절함이 제법 하늘 높이 올랐는지 정원지기가 나타난데다 용사까지 발을 들였다. 아마 살판이 났겠지.

"시간도 꽤 흘렀고 사람들도 점점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아직까지 남아있으니 말은 돌긴 돌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희들 반응을 보니 제법 잠잠해졌겠네."

하지만 이젠 다시 떠오르겠군.

"잠깐."

불쑥 부리에서 튀어나온 한마디에 그자리의 모든 시선이 말을 꺼내놓은 전서구에게로 향한다.

"그럼 그 정원지기님은 어떻게 알고 계신거야?"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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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화를 원하는 건가?"

내놓은 질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서 마주하고 있지만 살아있다는 기준으로 따져보았을 때 우리는 오래전에 죽었네."

한차례 숨을 들이킨 후 그는 담담하지만 서글프게 내뱉는다.

"들리지도 않고 전해지지도 않는군."

주저앉지는 않는다.

 


하루라는 건 짧으면서도 길었다. 아침부터 시작되서 저녁까지 이어지는 밝은 순간은 모두가 깨어있는 덕에 짧게 느껴지지만 모두가 잠들어있는 어두운 순간은 혼자서 깨어있다면 그 어느때보다도 길게 느껴진다. 물론 그 혼자마저도 잠에 빠져든다면 하루는 더할나위 없이 짧아진다. 언제 어두웠냐고 시치미 떼는 것처럼 밝다 못해 눈부신 햇빛에 잠시간 눈을 찌푸리던 패치는 어쩐지 햇빛의 핑계를 자꾸 대고싶은 마음이 이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들개들의 협조 덕에 용사는 무사히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보물찾기에 들어갔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당당하게 앞서 가는 뒷모습은 불리고 있는 호칭 그대로 용사처럼 보였지만 나무 막대를 높이 들어올리며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달려나가는 앞모습은 동화속의 용사를 흉내내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런 용사의 곁을 함께 달려나가는 들개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용사님, 용사님! 막대 한 번만 더 휘둘러주시면 안돼요?"

저 보채는 목소리가 과연 자신들과 비슷한, 어린 녀석들보단 나이먹은 녀석들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나이먹은 녀석들을 가장하는 어린 녀석들의 목소리일까. 눈부셔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햇빛을 본받았는지 없는 발광원을 만들어낼 정도로 반짝이는 눈들은 어린 녀석들이고 용사의 주위에 몰려들어 함께 달려나가는 몸뚱아리는 나이먹은 녀석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검은 들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도 이런 생각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저 앞의 나이가 혼동되는 녀석들보단 덜해도 그들보다 한 발 앞선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리라. 걸음을 아주 잠깐 늦췄을 뿐인데 어느새 저 멀리까지 가있는 용사를 보다가 뒤를 돌아보던 검은 들개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전부터 모두에게 내려지는 말이었다.

"여기는..."

풀숲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던 퍼블리가 멍하니 말을 흘렸다. 그런 그의 말에 앞서가던 사람이 멈춰섰다. 주변의 풀과 비슷한 색의 천을 온몸에 두르며 제 본연의 색을 지우고 있는 정원지기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내놓는 것도 잠시, 색을 가리는 그와 다르게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도 그러한 생각도 한 적 없던 주민은 그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게 멀다고 혹은 가깝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행여나 놓칠까 눈을 부릅뜨며 뒷모습을 쫓았지만 뒷모습은 쉬이 앞모습을 보여주는 여유를 내어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선과 마주치는 눈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유 모를 야속이라도 느꼈겠지만 그 뒤를 따르는 주민은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했을 뿐.

"아는 곳인가?"

어느새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옆에서 저에게 하는 물음에 화들짝 놀라던 퍼블리는 푹 눌러쓴 녹색의 가벼운 천 아래에서 무심하게 빛을 내는 푸른눈과 마주쳤다.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마주서서 얼굴을 가리는 천 덕분에 그늘진 얼굴에서 유독 그의 눈이 띄었다. 다행히 미처 천 아래로 전부 들어가지 못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와 시선을 분산시켜준 덕에 슬며시 눈을 돌린 퍼블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여기서 살고 있어요."

안 본지 꽤 됐지만.

퍼블리의 말에 패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인연이 있는 마당에 같은 땅을 밟고 같은 구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끼리 인연이 아니란 법은 없었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는 일에 그는 금방 관심을 껐다. 사람과 살갑게 지내지도 않고 넉살좋게 말을 이어붙일 만한 재주도 키우지 않는 그로선 그저 침묵이 최선이자 나름의 배려였다. 물론 그것은 말 그대로 나름이었지만 퍼블리는 개의치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치 자신이 말한 아는 사람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옛 추억에 잠긴 눈으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마을 사람들 중 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그 아는 사람이 눈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건 얼마 지나지 않았다. 멍하니 열린 입이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카?"

"오, 퍼블리!"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마주하던 두 사람의 모습을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던 패치는 아니카라고 불린 노란 머리카락의 여자가 바로 그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다. 믈론 그는 그들의 정다운 상황에 끼어들 여지도 생각도 없었으므로 살짝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그 쪽이 용사 뒷꽁무니 빨빨 따라다니는 괴짜 정원지기?"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며 거리낌 없이 말을 뱉어내는 아니카에 그는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노렸는지 잽싸게 다가온 아니카가 그의 손을 잡아채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서 내놓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눈에 참~ 잘 띄게 생기셨네!"

모습을 숨겨야하는 정원지기에게 전혀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이다라고 하기엔 애매한 말에 손이 해방된 즉시 그는 머리를 감싸고 있는 천을 더욱 잡아 눌렀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에 담겨있는 건 다름아닌 흥미였다. 앞서 그녀의 말과 함께 담긴 그 흥미를 발견한 패치는 자연스럽게 일어난 경계로 인해 올라온 불쾌감에 작게 침음성을 흘리고 눈썹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에 삐졌냐는 직설적인 물음에 아예 몸을 돌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들어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귀엽다는 알 수 없는 평가 또한 무시하며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퍼블리가 당황하며 그를 부르며 뒤를 쫓았고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니카는 콧소리를 내더니 제 자리였을 어디론가로 돌아갔다.

"정원지기까지 왔으니 용사가 발을 들인 게 분명해!"

드넓은 정원에서는 가려졌던 정원지기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선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녹색 일색으로 이루어진 천을 두른 정원지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묵묵히 제 갈길을 갔다. 원래 다리없는 말이 다리있는 말보다 빠르다는 건 속담처럼 사용될 만큼 누구나가 다 알고있었지만 소식을 듣는 자들은 무조건적으로 그 내용을 믿지 않았다. 처음 주민들이 용사가 발을 들였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늘어져서 희미해져버렸지만 다시 제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는 기대감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반가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감정들의 축제 후에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의문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용사가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은 이유에서부터 정말로 용사가 발을 들였을까라는 말까지. 쓸모없는 의심과 생각의 연장선으로 그들은 불안감 마저 다시 일으켜 세웠고 기대감과 불신의 줄다리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의미없는 시합이 시작된 순간 용사가 여행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눈에 띄어선 안 될 정원지기가 주민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유명인사 마스코트가 된 소감은 어때요?"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은 악의 없이 순수하게 웃으면서 돌직구를 날리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눈 앞의 웃는 낯은 과연 순수한 것일까 아니면 순수함을 가장한 것인가. 둘다 아니라면 비꼬는 걸 증폭시키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어버린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비약이니라. 만난지 얼마 안 됐고 헤어진지도 얼마 안 된 사람이 눈 앞에 있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더군다나 상대는 따라온 것이 아니라 제 자리로 되돌아갔을 뿐 오히려 찾아가게 된 건 패치 본인이었다. 옆에서 말할 시간을 놓친 퍼블리가 머쓱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패치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따질 수도 없었고 그러한 입장도 아니였다. 단지 지금의 상황이 그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을 선사하고 있을 뿐.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에 비해 맘춰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던 패치는 떨떠름한 기색을 전부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 마을의 대표였나?"

"어머 지금 첫 단추 잘못 끼웠다는 거 나타내고 있는 말툰가요?"

저 직설적인 말투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물론 남들이 듣기에는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는 위험한 버릇이지만 남을 헐뜯기 위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패치 또한 모르지 않았다. 어찌보면 진심이기에 더욱 상처를 입을 수 있지만 그는 그녀의 말투보다 더욱 불편한 게 있다면 못으로 고정된 듯한 검은 눈동자 속에 담겨있는 상대의 감정이었다. 그것은....

"저..아니카. 곧 있으면 용사님이 올 거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퍼블리 덕에 그녀는 그제야 다른 화제로 눈길을 돌렸다. 둘은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는 사이를 넘어서 소꿉친구처럼 꽤 친한 모습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용사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담아두다가 잊어버리게 할 생각인지 눈을 굳게 감던 패치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 바로 눈을 떴다. 시선의 주인은 다름아닌 퍼블리였다.

"저...아니카가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예요."

"그 정도는 알고 있네."

제 친우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박힌 걸까 걱정하던 퍼블리는 그제야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반은 못 되는지 제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들의 곁으로 온 아니카는 그 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이며 콧소리를 냈다. 둘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로 돌아갔지만 정작 두사람 모두의 눈의 관심을 받게 된 아니카의 시선은 적어도 그 둘에게 향하진 않았다. 변함없이 고정된 웃음으로 어딘가를 주시하던 그녀는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쩐지 엄청난 일이 다가오는 것 같은데요?"

그런 그녀의 말에 둘의 시선의 방향이 그녀의 시선의 방향과 같아졌다. 그 시선들의 끝에 자리잡고 있는 건 얼마나 발에 힘을 가했는지 희뿌연 먼지연기를 이끌고 달려오는 세마리의 들개였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요란한 등장에 부산스럽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러한 시선들을 무시한 채 마을로 들어선 그들은 누군가를 찾는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패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지치지도 않는지 이어서 달려오며 그를 불렀다.

"어이, 요정!"

"와우. 귀여운 별명이네요."

덧붙여지는 아니카의 말에 잠시 눈썹을 찌푸린 그는 뒤에 이어지는 들개의 말에 펴지기는 커녕 더욱 미간 사이의 골이 깊어졌다.

"용사가 사라졌다!"

2.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면 그건 내가 아닌가?"

대답은 아니라는 말을 담고 돌아온다. 애초에 기억이라는 건 그저 당신이 담고 있는 것일 뿐이고 그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작은 조각이다. 그렇게 다른 말을 덧붙여서 오는 대답에 질문자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입을 연다.

"하나의 작은 조각일지라도 그것 또한 나다."

게다가 기억이라는 건 하나의 작은 조각이라고 칭할 수도 없었다. 기억이라는 건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물론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었다. 질문자가 또다른 질문을 꺼낸다.

"내가 너를 잊으면 어떨 것 같나?"

그에 대답하는 사람은 잘게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누르며 대답했다.

"조각이 떨어져나간 곳에서부터 온통 금이 가있는 깨진 도자기처럼 아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픈 대상은 누구인가?"

대답하는 사람은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대답한다.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고통스러운지 왼쪽 가슴을 부여잡는 그를 보며 질문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를 기억하는 내가 죽었구나."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을 때 주위에 뭐가 있었지?"

마을은 또다른 소식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다. 이곳으로 오던 용사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는 건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던 주민들에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주민들 사이에선 또다시 불안감이 기대감을 짓누르며 그 위를 타고 올라온 것도 모자라 주변으로 동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감이 혼란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정원지기는 끝까지 냉정했다. 그는 용사를 처음 본 순간부터 기대를 꺼내지 않았는지 혹은 이곳에서 뿌리깊게 살아온 주민이 아니어서 그런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는 상황 덕에 동요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정원지기가 있기에 내심 품고 있던 기대감이 헛되이 실망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라며 또다른 기대감으로 그를 의지했다.

"휑한 풀밭."

퉁명스럽지만 쓸데없이 덧붙이는 게 없는 말은 그에게 있어선 장황한 설명이 자질구레하게 묘사되어 있는 말보다 훨씬 더 나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제일 안좋은 대답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들이 건너 온 곳이 주변이 뻥 뚫리고 온 사방이 풀 천지인 초원이다. 검은 들개또한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지라 상대가 인상을 찌푸리며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하려고 한다면 그에 맞서 말 그대로 휑한 풀밭에 어떤 장식물 같은 거라도 있겠냐고 반박할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협조가 아닌 내재되어있던 반발심이 밀어내버릴 말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꺼내질 일은 없었다.

"질문을 바꾸지. 근처에 하얀 글씨가 새겨진 검은 비석들이 있지 않았나?"

새로운 질문을 받은 들개들은 이번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대신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가 꺼내는 질문은 긴급상황에 따라 무게가 달려있지만 방금 전의 질문의 무게는 앞서 말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질문 자체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검은 들개는 그 질문을 코웃음치며 가볍게 받아들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는지 몇번이고 노란 눈빛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대답은 검은 들개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없었다냐!"

"전무!"

말투는 가벼웠지만 오히려 금방 나온 대답이 늦게 나온 대답보다 정확할 때가 많다. 나머지 들개들의 말에 패치는 더이상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겠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꺼낼 말을 고심해서 고르고 있는 건지 입가를 쓸며 턱을 괴듯이 팔을 들어올렸다. 가볍게 입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처럼 그는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되짚었다. 그들이 초원을 건너기 시작한 순간부터 용사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의도치 않은 시선 끌기로 인해 다른 주민들을 모아오는 순간까지 그들은 곁에 있었다. 다만 그들이 마음을 놓는 것이 잘못됐던 것일까.

"우선 그 앞전의 상황은 제쳐두고 자네들이 잠에 빠져든 때로 돌아가지."

신나게 놀다가 지친 용사가 드러눕고 그의 곁에서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버린 그들은 입이 여러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나마 그들을 제외하고 용사와 어울려 놀면서 사라지기 전까지 곁에 남아있었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잠들어있는 용사와 들개들을 보고 의도치 않은 소란에 행여나 그들이 잠에서 깰까봐 고개 돌리는 것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주위를 살펴본 후 다시 그들을 봤을 땐

"용사들은 기본적으로 정원의 주민들보단 신체능력이 좋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곳으로 오는 용사들의 기본적인 신체능력은 웬만한 주민들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물론 이런 사실은 주민들 또한 알고 있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검은 들개는 그 말의 저의를 깨닫고는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이며 노란 눈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곧이어 낮게 가라앉은 나오는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곁에 있던 두마리의 들개가 잠시간 몸을 떨었다.

"네녀석이 처 말하려는 건 그 용사가 초인이라도 된다 이거냐?"

목소리만큼 가라앉은 분위기에 긴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정작 그 말을 받은 당사자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실감하지 않는 것 마냥 떨리는 기색하나 없이 덤덤했다.

"그럴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지."

"그것 참 대단한 가능성이군! 설령 용사가 초인이라고 해도 아무리 우리가 자고 있었지만 움직이는 낌새를 처 알 수 있고 냄새 또한 처 맡을 수 있다!"

높아져가는 목소리에 비해 점점 더 가라앉다 못해 싸늘해지기까지 한 그의 서슬 퍼런 기색은 날카롭게 쏟아지는 금이 가버린 자존심의 파편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당장이라도 뒤에서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퍼블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혹은 이미 터져버린 걸지도 모르는 상황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란히 옆에 서있던 아니카는 오히려 지금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눈에 빛을 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얗게 자리잡고 있는 이까지 내보이며 환한 웃음을 짓는 얼굴은 굳게 다물린 입을 아플 정도로 깨물며 식은땀을 흘리는 무리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시선이 모이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굳건하게 눈 앞에서 버티고 있는 가라앉은 상황의 연출자들 때문이리라. 잠깐의 침묵은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능력이라도 있는지 내내 기다리는 자들에게 고역만 남기고 끝이라는 달가워하면서도 동시에 반길 수 없는 것을 마침표로 찍고 유유히 떠나가곤 했다.

"그렇다면 두가지가 나오는군. 하나는 그대로 다른 마을에 도착했거나 다른 하나는 경계를 넘어갔다는 것."

"지금 우리를...!"

"만약 저 두가지 상황을 담고 있는 가능성 자체가 잘못된 거라면."

담담하게 말을 자르는 말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용사는 스스로 떠났다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유유히 제 모습을 내놓은 한마디는 상대의 말을 잘라버린 것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 나타날 말들 마저 원치 않았는지 보이지 않는 칼날을 휘두르며 침묵을 유지하기 바빴다. 상황의 당사자들과 군중인지 상황 끝의 무리인지 모를 마을 사람들도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을 모르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용사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검은 들개부터 그 주장을 들었을 사람들까지 가장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르는 가정이었다.

단지 그것은 입에 올리기도 꺼려울 정도로 제일 최악인 가정중 하나였기에

 


"우웅?"

잠결이라는 건 없는 건지 눈을 뜨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키는 그의 체력은 보기와는 다르게 섣불리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일으켰다고 하기엔 애매했다.

"온통 하얗다!"

몸을 딛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림자 하나 없는 하얀 공간이 무서울 법도 한데 무섭긴 커녕 오히려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는 모습은 지금쯤이면 알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공포로 인해 울음을 터뜨렸을 어린아이들과는 달랐다. 아직 공포라는 걸 느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호기심에 계속해서 팔을 휘두르던 그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그곳에서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시간이라는 게 흘러가는지 조금이라도 움직임에 따라 그늘져가는 곳이 있는지 모든 것이 의문스러운 곳에서 늘 그랬듯이 하나의 변화가 들려왔다.

"안녕?"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하얀색이었고 몸을 돌렸던게 무색할 정도로 같았다.

"안녕!"

변화가 반가웠던 건지 마주하는 인사는 밝았다.

"밝은 아이구나."

우리 아이들도 너처럼 밝았으면 좋았으련만...

조심스럽게 흐려지는 뒷말에 눈을 깜빡이는 그를 보며 작게 울리는 한숨 후의 말은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잠시 하소연 좀 해도 되겠니?"

여전히 웃음을 달고 있는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이어진 말은 하소연이라기 보단 아주 오래전에 전해내려 왔다던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하고 얇은 물줄기가 흐르듯이 내놓기 시작했다.

"아주 예전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단다."

녹색 눈을 두차례 쓸어가던 눈꺼풀이 제자리로 멈춰서는 순간까지도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게 너무 무서워서 무턱대고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멋대로 그들을 잡아끌고 뭉쳐다니는 모습을 본 후에야 나는 겨우 진정될 수 있었어."

멈춰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아래로 제 무게를 짓눌러간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아들이 두 명 생겼단다."

앞서 담담하게 얘기한 것과 달리 조금 높이가 올라간 목소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귓가를 쓰다듬는다.

"한 명은 나를 조금 닮아있었고 다른 한 명은 내 친구를 떠오르게 생겼었지."

파란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린다. 뒤에 이어진 이야기는 두 아들이 언제부터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됐는지, 어쩌다가 싸웠다던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는 중이었다. 반쯤 사라진 녹색 눈이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던 어느날 둘에게, 그리고 내 친구에게 제대로 인사하기도 전에 나는 이곳을 떠나버렸단다."

그의 주변을 한바퀴 천천히 돈 목소리가 이번엔 질문을 꺼낸다.

"이곳은 즐겁니?"

눈꺼풀이 완전히 녹색 눈을 움켜쥐기 전에 항상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자리잡은 미소가 대답한다. 소리없는 대답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는지 잘게 웃음을 터뜨리던 목소리가 잠들기 전에 건네는 인사마냥 조용하게 속삭이며 떠나간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여전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3.

"우선 각 마을마다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가?"

용사가 다른 마을로 갔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움직이기로 결정했는지 연락수단을 물어보지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잠잠했다. 애초에 교류라고는 용사라는 존재로 인해 교류해왔을 그들로선 더이상 비상 연락을 취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끊어진지 오래였다. 침묵으로 부정하는 그들의 대표가 말한다.

"그런거 진작에 끊어먹은지 오래예요."

물론 그 사실 또한 정원지기가 모를리는 없었다. 그들을 오랫동안 방치한 정원지기들은 책임을 그들에게로 돌렸을지도 몰랐겠지만 그는 그런 무의미한 말싸움에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법한데도 그는 그저 얇은 눈꺼풀로 눈을 반쯤 가리며 그의 속내를 들어내지 않을 뿐. 그렇게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숨을 고르게 내쉬던 그는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사람을 부른다.

"퍼블리."

"..네!"

자신을 부를 줄은 몰랐는지 한박자 늦게 대답한 퍼블리는 꽤 긴장했는지 온 몸이 딱딱하게 보일 정도로 굳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모든 시선이 굳어있는 퍼블리에게로 향했지만 잘게 떨리는 녹색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여전히 변함 없는 걸로 보아 사람들의 시선보단 마주하고 있는 푸른눈에 더욱 긴장하는 것 같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에 그는 방금 전 떠올린 생각을 말한다.

"아니 멀쩡한 주민을 갑자기 끌고오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성인 남자보다 몇배는 더 큰 덩치를 자랑하는 비둘기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끌려오다시피 마을로 들어선다.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잽싸게 마을을 벗어난 퍼블리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시작의 마을이었고 퍼블리는 그 체구 어디에서 힘이 솟아나오는지 정원지기의 말을 따라 GM의 집 지붕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졸고있는 덩치 큰 비둘기, 전서구를 거의 끌고오다시피 데려왔다. 하지만 역시 힘들었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는 모습은 보는 사람도 절로 지친듯한 느낌을 주기까지했다. 그런 퍼블리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는 정원지기는 불만스러워 보이는 전서구를 향해 변함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한다.

"긴급 상황이라 잠시 실례했네. 지금 자네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라네."

"움머?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이렇게 심각해요?"

정원지기의 말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내리눌러 가라앉은 분위기에 자신에게도 그 불안이라는 감정이 멋대로 숨어들어왔는지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마을 사람들을 살펴보던 전서구는 두 번 눈을 깜빡인다. 그런 그의 불안과 마을 사람들의 불안을 한시라도 빨리 해소시키기 위해 정원지기는 더 말이 나오기 전에 본론을 꺼낸다.

"지금 용사님이 실종상태라네. 용사님의 행방을 한시라도 빨리 알아내기 위해선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지."

불안 위에 부담도 얹혀진다. 본인 한정으로 더더욱 가라앉은 분위기에 전서구는 당장 이곳을 뜨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하며 깊게 생각했다. 실제로 제 머리 위에서 성인 남자 정도의 무게가 누르는 느낌이 나기 전까진.

"우억?! 저기요, 정원지기님?!"

"용사님을 찾기 위해선 비행하면서 찾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네만."

"아니 애초에 비둘기가 어떻게 사람을 태워요!"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 그들을 멍하니 보던 퍼블리가 잽싸게 그들에게로 다가온다.

"자..잠시만요, 정원지기님!"

"봐요! 쟤도 사람이 어떻게 비둘기 위에 올라탈..."

"제가 가게 해주세요!"

그 말에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는 정원지기와는 별개로 전서구의 표정은 근원을 알아볼 수 없는 배신감에 절어있었다.

"저..저도 이곳의 주민이다보니까 길이나 장소같은 데를 많이 알아요! 그러니까..."

그 말의 저의는 이미 알아챈지 오래였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나타내는 행동을 보면 그 누구라도 자신을 돕고 싶어한다는 게 뻔히 보였다. 정원지기는 다른 의미로 곤란함을 느끼고 있다. 단순히 지금의 상황을 듣기만 한다면 정원지기가 되고 싶은 주민의 눈에 들기 위한 아양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 곤란에 빠져있다. 분명 정원지기가 되고 싶어하는 데다가 정원지기에게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주민이지만 도움을 자처하는 모습은 아양이라기보단....

"노을."

"네?"

"해가지면 돌이킬 수 없다. 노을이 지기 전까지 찾아오게."

그것은 분명 허락의 말이리라. 멍하니 받은 말을 곱씹던 퍼블리는 이내 반가운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음 짓는다.

"네!"

툴툴 터져나오는 전서구의 불만을 뒤로하고 퍼블리는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올라타며 날아오르기를 재촉한다. 불만 섞인 목소리는 날아오르는 주인의 모습과 더불어 사람들의 눈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기대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정원지기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머나~?"

그리고 언제 왔는지 모를 검은눈과 코앞에서 마주친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그 위에 떠오르는 감정과는 별개로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절로 거부감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뒤로 한발짝 물러나는 대신 눈을 조금 찌푸리는 정원지기를 보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주민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먼저 시선을 피하는 사람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정해져있었다. 부드럽게 흔들리며 푸른빛을 가려버리는 붉은색에 짐짓 아쉽다는 듯이 얼마간 더 바라보던 그녀는 멈출 생각 없이 마을 밖으로 향하는 발목을 붙잡을 만한 말을 꺼낸다.

"당신네들의 기원에 관한 전설은 안 찾나요?"

그 말은 제대로 된 효과가 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는 정원지기를 볼 수 있다. 다시 제 모습을 보이는 푸른빛이 아까와는 달리 상당한 빛을 내고 있다. 시선을 받은 그녀의 웃음소리는 넓게 퍼져나간다. 미묘한 대치 상황을 펼치고 있는 둘의 모습에 아직까지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이 슬그머니 발을 빼며 제 위치로 돌아간 후 그들만이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미묘한 대치상황이 막을 내린다.

"따라오시겠어요?"

긍정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원지기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서로에게 엇박을 두드리는 발걸음 소리가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대신하여 울린다. 그러다 자신을 따라오는 정원지기를 뒤돌아 바라보는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마주해오는 웃음에도 정원지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뒤따라오는 꼴이 제법 귀엽네요."

그리고 변화가 생긴다.

펴질 기색을 보이지 않는 미간 사이의 주름을 펴줄 요량인지 가까이 다가오는 손가락은 이내 막아서는 손바닥 앞에서 물러난다. 그 사이 주름은 더더욱 깊게 패인다.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자 그들은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제까지 기록을 숨겨왔나?"

"숨겨온 건 아니죠."

물어보지 않으셨잖아요?

태연하게도 대답하는 꼴이 제법 얄미울테지만 정원지기는 개의치 않는다. 농을 건네도 깊게 패이기만 하던 인상이 오히려 조금 펴진다. 정원지기는 잠시 의자에 딸린 등받이에 제 몸을 기대더니 곁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벽의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의외로 정의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정원지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면 알고 있지만 그녀가 열렬히 비추고 있는 감정 때문에 외면하는 것일까.

"자네가 보기엔 정원지기가 정의로운가?"

"정원지기가 아니라 앞에 계신 눈 마주치는 거 피하는 부끄럼쟁이씨 말하는 건데요?"

나도 정원지기다만.

그는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섣불리 꺼냈다간 무슨 소리가 날아올지 모르고 부끄럼쟁이라는 말에 머리가 아팠으니 그저 한숨만 내쉬는 그를 보던 그녀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큰 웃음을 터뜨린다. 여전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건 매우 껄끄러운지 툭 날아온 말에도 그는 끝까지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끝까지 푸른빛을 따라가는 검은색은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을 내고 있다. 푸른빛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보이는 건 똑같이 푸른색을 빛내는 창문 너머의 하늘이다.

"보내놓고는 걱정 되나봐요?"

이번 말은 그 뜻이 명백히 드러나있는 덕에 알 수 있었지만 앞서 언급된 정의파에 대한 저의는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그 스스로가 그다지 정의롭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정의로운 면을 보여준 적도 없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는 건가?

"단순한 충고가 걱정과 정의로 연결될 정도로 정원이 삭막해졌나보군."

"퍼블리에 관해서 말한 건 맞지만 다른 이유도 있긴 해요."

한데 모아 제법 높게 올려묶은 머리카락들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정원지기들이 아득바득 찾으려는 기원의 전설들은 사실 이 구역에 많이 남아있었어요. 그들이 유일하게 남았다고 주장하는 일부밖에 안 남은 시 몇줄 말고도."

그런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동화나 동요로 잔뜩 부풀려져 있죠.

이번엔 무언가 답답했는지 이제까지 보여왔던 여유로운 모습과 달리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기던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전과 달리 굳어있는게 눈에 띈다.

"사실 '정원지기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 속의 전설, 고작 시 몇줄밖에 안 써진 그 빈약한 전설은 그저 간판일 뿐이고 실제로 지금의 상황을 이루고 있는 건 전설을 낳은 '최초의 정원' 이후의 정원지기들의 기록들과 그들의 보이지 않는 텃세 덕분이지 전설 자체는 오히려 방해물일 뿐. 찾는 것에 관심따윈 없잖아요? 아니 관심 있는 높으신 분들이 꽤 있었죠?"

하루빨리 훼손하는데 혈안이신 분들.

"빙빙 돌려묻는 건 역시 적성에 안 맞으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질문을 내놓기 위해 그녀는 한차례 숨을 들이쉬고 그 이후에 나올 질문이 무엇인지 그는 정확히 알 것만 같은 어림짐작을 한다.

"훼손하러 직접 납신 귀한 몸이세요, 귀한 몸들 위협하는 시한폭탄이세요?"

대답은 그녀또한 어느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처음 집 안으로 들어설 때보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자랑하려는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이 처음 봤을 때보다 방향이 기울어져있다. 창문 너머로 향하는 푸른빛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가 입을 연다.

4.

 우리들은 계속해서 찾아갈 겁니다.
우리들을 태어나게 해준 신, 하얀 정원사의 의지를 받들어 '최초의 영광'을 거머쥘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우리들의 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검게 변해버린 변절자들을 물리칠겁니다.
그러니 우리들을 믿고 따라주십시오.
신이 내린 축복의 그늘에서 우리 정원지기들은 미래를 위해 과거로 향합니다.

-'최초의 정원' 이후의 최초의 정원지기 연맹의 연설문-

 

"어디에 있는거지..."

그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은 혼통 푸른색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그들이 찾는 푸른색은 애석하게도 땅에서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속 깊은 한숨을 내쉬니 아래에서 열심히 날개짓을 하는 전서구는 답답함을 넘어서 울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오는 숨들이 제법 버거운지 식은땀을 흘리다가 다시 숨을 토해내는 걸 반복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붕 위에서 졸고 있다가 다짜고짜 끌려와서 본의아니게 안하던 운동을 하게 된 전서구는 숨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날개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고 그 위에 타고있던 퍼블리는 시야가 점점 낮아지는 걸 느꼈다.

"아이고오~ 날개 떨어진다아!"

"자..잠깐만! 날개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안타깝게도 퍼블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괜찮아?"

"으으..날개에 쥐가 났어."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전에 있는 힘, 없는 힘 끌어모아 열심히 날개를 움직인 덕에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급하게 땅으로 내려온 그들은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하며(정확히는 한 비둘기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퍼블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울상을 짓는 전서구 옆에서 하늘에서도 제 머리카락 한 올 보여주지 않는 용사를 찾는걸 포기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드디어 퍼블리의 시야에서 그제야 하늘이 아닌 푸른색이 들어온다.

"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이 찾던 푸른색이 아니다. 하늘과는 다르게 짙은 색이 하늘과 맞닿으며 선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숨결이 짙은 색을 뽐내는 물 위로 일정하게 손짓을 하며 근처에 자리잡은 모래들로 이끈다. 한차례 짙은 물의 색이 새하얀 거품을 내며 모래들을 쓸어버리고는 다시 물어가는데 그들의 짙은 색은 모래에게로 옮겨갔는지 젖은 자리가 제법 어둡게 모습을 드러낸다. 몇번이고 그 과정을 반복하는 그들에게로 다가간 퍼블리는 멍하니 냉기를 머금은 숨결을 마주한다. 더이상 움직일 힘도 없다며 툴툴 말을 내뱉던 전서구는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퍼블리가 사라지고 없자 눈을 굴리더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다가 물러나는 바닷물로 향해가는 퍼블리를 발견하고선 한차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소리를 키운다.

"거 용사님이 거기에다 창포 감았냐?! 아니면 진주라도 발견했어?!"

아직 숨을 고르지도 못했는데도 제법 익살스럽게 외치는 걸 보면 아직 힘이 남아있을 법 했다. 계속해서 앞만 바라보던 퍼블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도 시선을 돌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짙은 색을 옮겨받은 젖은 모래 바로 앞에서 수평선 너머를 멀거니 바라보던 퍼블리는 무언가의 변화를 느꼈는지 갑자기 뒤를 돌더니 전서구를 향해 뛰어간다. 아까의 외침으로 모든 힘을 썼는지 상당히 지친 기색으로 드러누운 채 눈을 감고 있던 전서구는 자신의 배 위로 느껴지는 익숙한 무게에 발작하듯이 튀어오른다.

"야..야! 잠깐만, 나 아직 쥐난 거 안풀렸어!"

"빨리...빨리 돌아가야 해!"

그렇게나 크고 요란하게 외치는데도 서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아니면 상대방도 제 소리가 묻힐 정도로 요란하게 내뱉는지 그 둘은 전혀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하고 있는 채 제 말만 꺼내면서 옥신각신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의 그림자는 점점 몸을 길게 늘리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조롱하듯이 따라한다. 그들의 두위에서 하얀 빛을 내던 모래들이 조심스레 붉은색을 머금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 둘의 몸이 모래투성이가 되는 순간까지도 붉은색은 점점 제 색을 짙게 나타내기 시작한다.

"잠깐만 기다리봐! 돌아가야 한다니? 푸르딩딩한 용사님은 어쩌고?!"

분명 쥐가 안풀렸다고 말한 날개로 제 위를 올라타려는 퍼블리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계속해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퍼블리의 말에 잽싸게 의문을 내놓는다. 퍼블리는 그 질문에 어느정도 진정을 했는지 억지로 전서구 위에 올라타려던 걸 멈추며 말한다.

"노을..."

"뭐?"

"정원지기님이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하셨어!"

그러니 돌아가야 해.

분명 충고는 유용하다. 하지만 문제는 어째서 그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전서구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물론 평소라면 그다지 의문을 내놓더라도 받아들였겠지만 지금 받아들여야 할 전서구가 매우 지쳐있다는 게 문제였다. 퍼블리의 말에 담긴 패치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또다시 날개를 움직여야할 뿐만 아니라 점점 해가 제 빛을 빨갛게 태우면서 내보이는 노을을 본다면 시간 또한 얼마 남지않아 그만큼 더 빠르게 날개를 움직여야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아직 저는 다 쉬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어질 말과 행동은 상당히 단순하다.

"해가 지는 게 뭐 어때서? 언제는 해가 한 번도 안 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 동네는 심심해서 그런지 깡통소리 나는 옆동네랑은 달리 꽤 조용하다고?"

"그치만 해가 지기 전에..."

"아, 그러니까 안전하다니까?!!"

그렇게 또다시 서로의 의견은 굽혀지지 않는다. 목이 아플 법도 한데 그치지 않는 그들의 소리는 잔잔하고 일정하게 울려퍼지는 파도의 소리를 이리저리 흐트러놓기엔 충분했다. 만약 여유를 찾아 이곳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을 향해 쓴소리를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제외한 바람도, 그 손길에 의한 바다의 물결도, 그들의 소리에 묻힌 파도의 소리도 변하는 것 없이 똑같이 지나가고 되돌아온다.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그 풍경 속에서도 시간은 그것들과 상관없이 유유히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들의 소리의 중심을 차지하는 노을지는 시간은 놀리듯이 그들에게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은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여줄 심산인지 아주 잠깐 어두워지는 하늘과 바다의 사이에서 붉은 빛을 있는 힘껏 내뿜고는 유유히 자리를 뜬다.

"벌써 해가..."

"아니, 해가 져도 문제될 건 없..."

그 순간, 모든 것이 검게 변한다.

누군가가 제 눈을 가린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빛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왠지 모르게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 그것은 분명히 마음 안 쪽 어딘가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공포로 인한 착각이리라. 허우적거리며 있는 힘껏 손을 흔들어 보아도 분명히 흔들고 있는 제 손마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쪽이야."

제 눈에도 보이지 않던 몸이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분명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했는데...!"

창밖의 광경을 바라본 정원지기는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정확히는 한 비둘기지만.)을 떠올리며 머리를 짚는다. 그의 맞은편에서 시선을 함께하는 그녀는 어째선지 아무런 말이 없다. 한참동안 창밖을 쏘아보던 그는 제 의자에 걸쳐두었던 녹색 로브를 집어들고는 다시 제 몸에 두른다. 모습을 숨기기 위해 뒤덮는 녹색이 오히려 주변을 감싸고 있는 밤이 지니는 어둠을 발판삼아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쩌다보니 본래의 목적을 잃은 로브를 두르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향하는 발목을 낭랑한 목소리가 잽싸게 잡아세운다.

"어디가세요?"

"돌아오지 않은 녀석들을 찾으러 간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사춘기들을 찾으러 저 까만 도화지로 색칠공부하러 가시게요?"

흘끗 눈동자만 돌려 바라본 얼굴은 여전히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는 낯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즐거운지는 그도 모른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 있다면 분명히 빛을 내고는 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까 전까지 감정을 가득 담은 검은 눈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걸까. 그렇다고 텅 비었다기보다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벽을 마주보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에게 있어선 여간 꺼리지 않을리가 없었다. 멈춰있는 검은 벽이 점점 그를 몰아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가?"

"간단해요."

생채기라도 날까봐 조심스레 검은 벽을 쓸어가는 눈꺼풀이 잘게 떨린다.

"저 밖의 상황이 퍼블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가요?"

걱정이라는 걸 입에 물은 그녀는 웃지 않는다.

 

"우웅?"

흔들리는 움직임에 따라 푸른색들이 춤을 추듯 흔들린다. 푸른색들 사이로 녹색이 제 모습을 깜빡깜빡 전등 장난을 하듯이 꺼졌다가 빛을 낸다. 일어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앉아있는 꼴이 퍽 우습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없었고 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손에 꽉 쥐고 있던 막대로 아래를 이리저리 찌르더니 막히는 느낌을 딛고선 일어난다. 다만 흔들리는 걸 보면 위태롭기 그지 없다. 여전히 막대를 쥔 채로 균형을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또다시 제 녹색 빛을 깜빡인다.

"이번엔 온통 시꺼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위가 무섭지 않은지 천진난만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흔든다. 그러다가 넘어지기를 몇번, 아프지도 않은지 새어나오는 웃음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더이상 막대를 짚은 채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제법 큰소리나게 주저앉은 그는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을 바라본다. 이전에 그에게 다가왔던 목소리를 기다리는 걸까? 이번엔 바닥을 짚어보지도 않는데도 손에 들려있는 막대는 여전히 손에서 떼어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이 멈춰있다고 착각되는 순간, 아주 사소한 것이 정적을 깨뜨린다.

"아..."

이번에도 먼저 나타나는 건 목소리다. 다만 그가 알고 있던 목소리가 아니다. 무언가를 담은 말이라기 보단 작은 감정을 담은 감탄이 주위의 정적을 두드린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희미한 빛과 함께 조그마한 발소리가 다가온다.

"거기 누구 있엉?"

그의 질문에 발소리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더욱 소리를 죽인 채 다가온다. 마침내 노란 불빛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후 그들은 서로를 마주본다. 노란 불빛을 들고 있는 소녀가 멀뚱히 그와 눈을 마주한다.

"안뇽!"

용사와 아이가 만났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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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금 매우 의미없는 시간 위에서 걷고 있는 겁니다."

하얀 공간 위에 두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사람이 누워있는 다른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 검은 가죽으로 감싸여져 있는 손으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당신은 당신을 죽이면서까지 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겁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뺨을 쓰다듬던 손이 눈을 향한다. 얇은 눈꺼풀 너머에 있을 눈동자를 직시하듯이 눈을 떼지 않는다. 이윽고 내뱉는 숨은 소리가 작았지만 탄식 섞인 한숨이다.

"애초에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군요."

우리는 이미 죽었으니까.

 

"이것 참. 선배님은 언제나 판을 키우는군요."

곤란하다는 말투에 비해 입가의 미소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둥글게 선을 두른 눈매가 고립된 구역을 향하면서 그곳을 기억하려는지 담아두고 있었다. 믄득 올려다 본 하늘은 이제 눈을 감고 잠이라는 휴식을 취할 시간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아름다운 붉은 빛을 내며 점차 검게 변해갔다. 그러한 광경에 묘한 희열과 기대감을 품던 치트가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칼로 글을 새기듯이 날카로우면서도 깊게 되뇌인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목표라는 모든 것은 신중해야했고 그만큼 길게도 시간을 늘어뜨리기도 했다. 누군가가 바라보면 너무나도 짧다고, 혹은 너무나도 길다고 할 수 있는 목표지점은 누구나가 아닌 본인에게 있어선 당연하게도 멀리있었다.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달리기 끝에 도착했을 그곳에서 반기는 것은 기대에 따른 환희, 모든 기대를 짓밟는 배신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려오는 과정 자체에서도 환희를 느꼈다. 그렇다면 그 끝에 있을 환희는 얼마나 거대할까.

"이제 마중 나갈 시간이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보라색을 담은 머리카락이 한순간 흔들렸다가 사라졌다. 이제 기다리는 시간이 막을 내리고 무대를 이끌어갈 시간이 도래했다.

"선배님이 잊으셨으니 다시 한 번 말하겠슴다."

물론 지금 제 앞에 없으셔서 듣진 못하시겠지만.

"저는 게임보단 인형극을 더 좋아함다."

각본은 이미 짜여져 있었고 대사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결말 또한 정해져 있었고 무대가 절정으로 오르는 순간 관객들의 시선이 전부 흥분을 담고 무대를 바라볼 것이며 인형이 그러한 시선을 받아들이지 못해 행여나 무대 밖으로 뛰쳐나갈까봐 족쇄까지 달아둔지 오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인형은 완벽한 인형이 되어 무대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그러한 모습 또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 위한 춤사위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당연한 일과가 되어버린 상상으로 그는 인내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조바심 또한 지니게 되었다. 표면적으론 상반된 감정이지만 그 두가지의 감정은 각자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점점 커지는 그런 종류였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서로가 서로의 자극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희로 바뀔 기대감의 양분. 그는 그것들을 머금고는 사람좋은 얼굴로 발을 내딛었다. 문득 어딘가 슬퍼보이는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가볍게 쓸어갔다. 잠시 멈춰선 그는 이내 흘러지나가는 바람 처럼 흘려보냈다.

석양이 사라지면서 검게 물들기 시작하는 곳을 향해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나?"

높은 톤의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상냥해 보이지만 어딘가 날카롭게 찔릴 것 같은 미소를 띄운 여자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눈을 빛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건 밤이 되어버린 하늘 뿐이었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 발견이라도 했는지 흥미롭게 주시한다. 침대로 향했어야 할 발은 아직까지 탁자 아래의 마룻바닥에 멈춰있었고 침대 위로 누웠어야 할 몸은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이불을 끌어당겼어야 할 두 손은 하나는 얼굴을 받치고 다른 하나는 검지손가락을 내민 채 탁자 위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마치 손님을 기다리는 집주인의 모습이었지만 이 시간에 찾아 올 손님은 없었다. 밝은 노란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사물을 비출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이윽고 다시 나타난 눈동자는 커다란 흥미를 담고 있었다.

"재밌는 손님이 올 것 같네?"

이윽고 불이 꺼졌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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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날이 깜깜하군."

시각적 이외에 정신적으로 깜깜해지는건 처음이군.

물론 하얗다하더라도 안보이는건 매한가지라고 생각한 패치는 이곳에 발을 들인 후 치밀어오르는 울화와 두통에 대한 생소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감정에 한껏 속이 제법 뒤틀려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눈을 감으면 그것이 미래라고들 장난식으로 말하지만 눈을 떠도 다를 바가 없으니 그의 속이 답답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와 그의 일행에게서 모습이 겨우 보일 정도로 떨어져있는 당사자는 낯선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느끼기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는지 만면에 웃음을 띈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발길이 끊겼다고 생각되고 알려진 이곳에 발을 들인 바로 그 당사자인 용사는 정원지기인 패치가 보기엔 전혀 용사로서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원지기로서 본 것이기에 이곳의 주민들에 대한 의견과는 다를 수도 있었다.

"이곳은 정원지기가 오랫동안 떠나있던 곳이었으니 그 시간만큼 이곳의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이끌어온 곳입니다."

그런 패치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니면 그저 트집을 잡고 싶었는지 오래된 이야기라도 들려주듯 가벼우면서도 제 나름대로 무게감을 넣은 채 운을 떼는 노인을 패치는 아무런 생각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지기는 그곳에 살고있던 주민들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였지만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이곳엔 시간이 남기고 간 불필요하면서도 어찌보면 상처가 녹아있는, 남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몇몇의 주민들에게 새겨져 있었다. 그 오래된 시간중에 어디에서 새겨졌는지는 본인들조차 몰랐으며 설령 안다해도 외면해버리고 새겨진 바로 그 감정에 충실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눈 앞의 노인은 바로 그런 자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니 용사는 저희에게 맡기고 당신들이 좋아하는 낡은 글이나 찾으시길 바랍니다."

노인은 돌려서 말하는 것과 할 말중에 몇마디를 뺀 것에 대한 차이를 모르는지 제 나름대로 선심쓰듯 말하는 모습은 충분히 화를 불러일으킬만 했지만 패치는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일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눈 앞의 노인, 굿하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굿하트는 제 할 말만 하고는 패치가 입을 열을세라 용사를 보러간다는 핑계로 급하게 자리를 떴다. 패치 또한 붙잡을 생각따윈 없었고 애초에 주민이 정원지기에 그들의 일에 대해 행동제약을 걸만한 권한도 이유도 없었다. 굿하트의 말은 대부분 귀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가 텃세를 부린다는 것 쯤은 패치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그에겐 오랫동안 그들을 방치한 불특정 다수의 정원지기에 대한 주민의 불만을 들어줄 이유도 없었고 그 불만을 해소해줄 이유도 없었다. 현재 패치의 마음속엔 주민의 화풀이와 텃세에 대한 괘씸함과 불쾌함을 들일 장소가 없었다. 그의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혼란은 이름 그대로 그의 마음을 전부 어지럽히고 있었다.

"정원지기님!"

어느새 호칭을 정해버렸는지 기대감으로 가득 담긴 목소리가 상념이라는 늪에 젖어있던 그를 건져올렸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색은 그가 두르고 있는 정원지기의 로브처럼 밝은 녹색이었다. 잠깐의 시선을 맞추다가 이내 그의 시선은 또다시 흰 색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기엔 퍼블리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려놓은 흥분으로 인해 그것을 잡아채는 능력이 눌려 밀려나 있었다. 이미 자신이 동행을 허락했으니 퍼블리는 엄연히 그를 따라다닐 권리가 있었다.

"출발하지."

고대하던 간식거리를 입에 문 어린아이 마냥 해맑고 행복해보이는 웃음을 띄고 있던 퍼블리는 허둥지둥 잽싸게 패치의 뒤를 따랐다. 패치는 예상한 적 없는 그의 일행을 한 번 뒤돌아본 후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늪이 더 깊어졌다.

불과 몇분전에 일어났던 일을 오래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꺼내는 것처럼 회상 아닌 회상에 잠겨있던 패치는 다시 천진난만하게 지금의 정신없는 상황처럼 정신없이 휘날리는 파란 머리카락이 달린 용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까 자신에게 텃세를 부리던 굿하트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용사를 잡아세우며 이곳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은 마치 예절교육을 시키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예절교육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웃음을 짓는 손자의 모습 같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굿하트의 모습을 보면 그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됐다. 사람의 얼굴색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을까. 조곤조곤하게 어르는 어투와는 다르게 붉어진 얼굴과 비례해 난폭하게 용사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는 모습은 가까이서 보면 한 명의 비극이었고 멀리서 보면 다수의 희극이었다. 굿하트는 정원지기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또한 정원의 주민. 자신이 살고있는 정원의 구역이 늘어나는 것이 그와 이곳 주민들의 바람이었다. 그것은 정원지기 또한 마찬가지. 비록 악감정을 가졌어도 목적은 같으리라.

"용사님을 설득시킬 방법이라도 내보시오."

실제로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용사는 이미 굿하트의 인내에 대한 시험이라는 수준을 넘어섰다. 심호흡을 한 후 마음을 진정시켜보아도 이리저리 휘날리는 파란 머리카락 사이의 어린아이 마냥 해맑은 얼굴을 다시 마주하면 진정시킨 의미도 없이 오히려 배로 돌아와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미 많은 시간의 틈이 가로막고 있지만 굿하트는 이곳 나름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시절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언제나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는 영웅심리가 넘쳤고 구역을 넓혀가는 데에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것 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그들의 행방에 대해 궁금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정원의 주민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흔한 동화에서 나오는 영웅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어느순간 그들의 선행 아닌 선행은 당연하게 굳어져갔다. 마지막 용사가 이곳을 떠나고 다음 용사가 와서 아름다운 동화의 멋진 절정을 이루리라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러한 기대감을 시간이 질질 끌어 가늘어져 끊어지기까지 아슬아슬한 그 순간 다음 용사가 나타났다. 그 한순간을 기점으로 늘어졌던 기대감이 시간을 무시하고 다시 끌어모아 제 몸집을 키우더니 열정에 몸을 실어 불태웠다. 하지만 불태운건 열정 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친구들을 많이 만들거야!"

지금 저 말을 내뱉는 게 누구의 입인가. 분명 저의 말은 아닐테고 근처에는 아무도 없으니 남은 사람은 용사가 아닌가. 굿하트는 세월이라는 시간을 핑계삼아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넓다고 자신하는 마음으로 앞서 한 설명을 반복했다. 물론 용사가 친구를 만드는건 용사 개인의 자유이니 막을 이유는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곳의 정원 구역을 넓히는 것이라고 인식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기대감은 의미가 없었기에. 또 한 번 장황한 굿하트의 설명이 끝나자 검은 눈을 한 번 깜빡인 용사는 히잉 콧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굳이 넓혀야됑?"

그렇게 굿하트는 폭발했다.

용사의 특이한 성향은 멀리서도 보았고 앞에서 지친 기색으로 축 늘어진 굿하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았다. 이내 자신에게 와서 닦달아닌 닦달을 해대는 굿하트를 힐끗 본 패치는 저 멀리서 뛰어다니는 용사를 주시했다. 사실상 현재상황에 용사가 온다고 해서 이곳 주민들의 바람이자 정원지기의 표면 목표인 구역 즉 땅 넓히기가 이루어질리는 없었다. 앞은 다른 정원지기들과 주민들의 구역, 뒤는 '저주받은 검은 땅'. 제아무리 많은 권한을 쥐고있다는 정원지기여도 그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었다. 없는 땅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없는 그로선 없는 땅을 찾으러가지 않는 용사의 생각에 좋아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애매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원지기의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었지 순전히 그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였다. 애초에 정원지기의 진짜 목표이자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는 땅 넓히기가 아니었다. 땅 넓히기는 그저 진짜 목표를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패치가 생각에 잠기자 묘한 침묵의 상황이 발생했다. 이 순간만큼 퍼블리는 자신이 제 3자의 입장인게 감사한 만큼 원망스러운 점이 없잖아 있었다. 직접적으로 굿하트의 분노와 패치의 침묵인지 무시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을 받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제 3자였기에 직접적인 발언권은 없었다. 괜히 잘못나섰다가 굿하트의 분노의 화살이 자신에게도 꽂힐 수 있었고 경솔한 발언으로 인해 패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다. 묘한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녹색의 눈을 굴리던 퍼블리가 인내심이 다한 굿하트가 소리지를 태세로 입을 열자 당황하여 제지하려는 그 순간

"이곳의 주민과 정원지기는 용사에게 맞춰 인도할 뿐."

누구에게는 길고 누구에게는 짧았을 침묵의 끝에서 패치가 한마디를 내놓았다. 비록 다른 문제 때문에 생각의 대부분을 잡아먹는다 할지라도 그는 지금은 자신이 정원지기라는 걸 인식했다.

"그런 용사의 수준에 맞춰서 가면 될걸세."

가령 보물찾기라던지.

할말을 끝낸 패치는 바로 그 즉시 자리를 떴다. 이쯤하면 어둔한 자라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가 땅을 보물로 비유했다고 알아들은 굿하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지 않은 감정으로 바라보는 정원지기라지만 해결책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찝찝한 얼굴로 멀어져가는 패치를 흘끗 본 굿하트는 다시 용사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떴고 멍하니 지켜보던 퍼블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패치의 뒤를 좇았다. 뒤에서 다급하게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패치는 또다시 상념에 빠졌다. 그로선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언가를 계속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에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까워지고 있는 발소리에 그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퍼블리를 돌아보았다. 우연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진실인지를 판별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가지의 가설 중에 우연을 제외한 것이 맞다면 그에게 있어서 퍼블리는 가장 경계해야하는 대상이다.(여기서 치트는 자연스럽게 예외로 넘어갔다.) 타인에게 정을 붙이지 않는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정도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이제까지 생각해왔지만 어째서인지 퍼블리는 그렇게 대하기 힘들었다. 어느새 그의 곁까지 따라온 퍼블리를 바라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그러자 녹색 눈이 마주해온다. 한순간 말을 멈춘  패치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 나를 따라오려는 거지?"

패치는 자기가 꺼내놓고도 참 늦게 꺼낸다고 생각했다. 질문을 받은 퍼블리는 눈을 깜빡이고 한껏 광을 내더니 꿈을 꾸는 아이처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원지기가 제 꿈입니다!"

마주하던 푸른 눈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 덕에 빛을 내고있는 녹색 눈은 어둡게 가라앉은 푸른 눈을 볼 수 없었다.

정이란건 붙여선 안 돼.

2.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를 겁니다!"

"미안해. 너의 마음은 받아줄 수가 없어!"

어린 녀석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뭘 하는 거지?

마을 어딘가에서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을 용사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건만 공터에서 웬 어린아이 두명이 누가봐도 연인 혹은 아직 이루어지기 직전인 한 쌍의 남녀가 하는 말을 하고있다. 소꿉놀이라고 치기엔 그들의 표정이 온갖 정성과 힘을 들여 그리다시피 쓴 글씨처럼 진지했을 뿐더러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 다른 아이를 붙잡는 모습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이겠거니 했어도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느껴져 발걸음을 멈추고 짜게 식은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패치의 시선을 받은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르륵 웃으며 패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한 아이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깜빡였다.

"정원지기 아찌. 몰라요?"

"뭘?"

"이거 되게 유명한 연극에서 나오는 건데!"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질문을 건넨 아이는 물론 다른 아이도 까르륵 웃는다. 유명한 연극이 어디 한 둘인가. 거기다가 저런 고백 대사는 널리고 널린터라 굳이 콕 집어서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는 연극은 동화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이 대부분일테니 범위는 줄일 수 있었지만 패치는 굳이 알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이들은 다시 저들끼리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소꿉놀이에 들어갔다. 그 또한 관심을 끊고는 다시 제 갈길로 바삐 발을 돌렸다. 그렇게 아이들은 그의 모습이 손가락 두마디의 모습 정도로 작아져 보일 때까지 어쩌면 그가 사라지고 난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갈 놀이를 즐겼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는 기록자. 나는 당신을 기록할 거예요."

안타깝게도 멀어져가는 그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 정원지기님! 찾았어요!"

가끔 GM의 집에 얼굴을 잠깐 비추는 패치보다는 이곳의 지리를 더 잘 아는 퍼블리가 도움을 자처하며 발에 속도를 가한채 먼저 자리를 떠난 것도 잠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던 패치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까지도 찾아낸 퍼블리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 없이 안내를 청했다. 그런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퍼블리는 기쁘다는 모습을 숨기지 않으며 앞장섰다. 그리고 그는 앞서가는 퍼블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은 그는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고민거리였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는 심정. 그 마음은 다름 아닌 퍼블리를 향하고 있었다.

"피유~!"

그들이 도착한 곳엔 용사가 등에 달려있던 망토를 온 몸에 두르며 머리만 내놓고 작은 숨을 규칙적으로 내뱉었다. 행여나 그 규칙적인 숨이 깨질까봐 먼발치에서 용사를 유심히 살펴보던 패치는 용사의 손에 쥐어져있는 낯선 몽둥이에 의구심을 품는 한편 누군가가 용사를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자리잡은건 다름아닌 두마리의 들개였다.

"이게 뭐다냐?"

"정체불명."

용사를 앞발로 꾹꾹 눌러보고 주위를 돌며 이리저리 살펴보던 들개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 온 또다른 낯선 냄새와 더불어 본인들을 향해있는 낯선 시선에 덩달아 고개를 돌리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패치와 퍼블리의 시선을 마주쳤다. 패치는 그들 또한 이곳의 주민이라 판단하고 간단하게 눈인사로 끝내고 마저 용사에 대해 판단하려고 했지만

"퍼블리! 오랜만이다냐! 오옹~? 그 옆엔 정원지기 아니다냐?!"

"반갑!"

그들의 소란에 용사가 눈을 뜨는 것과 패치가 몸을 숨기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덩달아 놀란 퍼블리 마저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숨겼다. 이윽고 들개들의 방정맞은 사과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숨을 고르느라 그것을 들을 틈은 없었다. 잠시 진정을 되찾은 퍼블리는 숨을 고르고 있는 패치를 보며 문득 든 의문에 행여나 용사에게 들킬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정원지기들은 용사 앞에선 모습을 감춰야하는 거예요?"

어찌보면 뜬금없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물어볼 법한 질문에 잠시동안 눈을 마주하던 패치는 곧바로 돌리면서 그가 두르고 있는 정원지기들이 입는 녹색 로브의 후드를 꾹 눌러쓰며 행여나 다시 눈이 마주칠까 눈까지 감으며 대답했다.

"앞에서 명성으로 주목받는 건 정원사로 만족하고 정원사가 남긴 것을 대신하여 누리고 있는 정원지기들은 그 대신 정원사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숨어서 정원을 지켜나가겠다는 의미네. 어찌보면 이것은 최소한의 양심을 나타낸 것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일세.

분명 그가 하는 말의 뜻은 알지만 무엇을 가리키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던 퍼블리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일 수 밖에 없었고 그대로 넘기기엔 무언가 찜찜했기에 그의 말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기 위해서 재차 묻고자 했지만 갑자기 그들의 위로 올라오는 그림자에 시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고있던 패치 또한 느꼈는지 후드 자락을 잡고있던 손을 놓고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그림자를 만들어낸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 앞에 있는건 앞서 봤던 두마리의 들개보다 훨씬 큰 덩치를 지닌 검은색의 들개였다. 검은 들개또한 시선을 느끼고 눈을 굴려 그의 아래에 있는 패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쪽이 그렇게 처 유명한 정원지기렸다?"

"자네가 저 들개들의 대장인가."

앞서 말했듯이 모든 주민들이 정원지기에게 우호적이진 않았다. 그들의 눈엔 오랫동안 이곳을 떠난 정원지기가 달갑지 않았고 권력과 지휘권을 쥔 채 뒤에 숨어서 나몰라라 상태로 그들의 등을 떠미는 걸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눈은 어느정도는 정확했지만 다른 면으로는 헛다리를 짚었다. 흔히 변명거리로 혹은 흔한 사실인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다라는 점이 패치에게 작용됐다. 오히려 패치는 등 떠미는 정원지기의 등을 붙잡고 앞으로 끌고 갈 사람이었다. 다만 그 사실을 그 앞의 검은 들개가 알 수 있을진 미지수였다. 그렇게 미묘한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익숙한 상황에 퍼블리가 검은 들개를 설득하려는 순간

뻐억-!!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가 들어도 명백히 딱딱한 무언가에 누군가가 맞은 소리였고 그것을 증명하듯 잽싸게 돌아간 그들의 시선 끝엔 피투성이로 쓰러져있는 작은 들개와 마찬가지로 피가 묻은 나무 막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얼어붙었고 그대로 굳어버린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을 깨버린건 다름아닌 방금 사태의 장본인이었다. 용사는 태연한 얼굴로 나무 막대를 집어들더니 곧이어 제 얼굴높이까지 들어올리곤

"이렇게 앙!하고 물어야징~"

또다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무슨 속셈이지?"

용사를 물어뜯어 죽이겠다고 뛰쳐나가려는걸 퍼블리와 함께 달려있는 네 발 중 두 발을 부여잡으면서 제지해보았고 그마저도 실패 해 어떻게든 용사를 엄호하기 위해서 돌까지 주워들었건만 노란 눈에서 번쩍이던 살기 가득한 붉은 잔상은 사라지고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목소리가 매우 잠잠해진 채 다시 처음처럼 그리고 용사를 해코지하려는 악당으로 보듯이 자신을 경계하는 투로 질문하는 들개의 모습에 패치는 어이가 없는 한편 저 검은 들개의 마음을 손바닥 뒤집 듯 바꿔놓은 용사의 친화력에 감탄 비슷한 평가를 내놓았다. 이렇게 생각에 잠긴다고 해서 저 질문이 도로 들어가는건 아니었기에, 어차피 말해야 할 사실이긴 했지만 그는 들개들이 그나마 용사에 한해서 정말로 우호적인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한 발 멈췄다.

"정원지기는 용사를 무사히 인도해야한다. 애초에 무슨 속셈이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하군."

"이상하다라...그건 내가 처 할말이다. 어차피 이곳 사람들 모두가 처 알고있는 사실 아닌가? 그런데 왜 시치미를 처 떼고 있는 거지?"

시선을 돌리니 아까 피투성이로 싸우던 들개 두마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용사가 던져대는 나무 막대를 쫓아가면서 함께 놀고있었다. 그런 둘에 비해 확실히 대장이라는 역할의 값을 빛내고 있는 검은 들개에게로 다시 시선을 마주하고는 이번엔 직설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자네들이 정원지기에게는 우호적이진 않겠지만 적어도 용사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흥! 의심이 처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정원지기로군."

퍼블리는 둘의 대화에 행여나 싸움이라도 일어날까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계속해서 가라앉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더불어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앞으로 나섰다.

"진정해요 형! 정원지기님은 용사를 인도하기 위해서..."

"용사를 어디로 처 인도한다는 거지?"

"그야 새로운 땅을 찾아서..."

거기까지 말하던 퍼블리는 곧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정원지기가 용사를 인도하는 이유는 용사가 새로운 땅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곳이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이유는 다름아닌 그 새로운 땅이 있을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정원 구역을 침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법행위에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남은 곳이라곤 '저주받은 검은 땅'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그대로 저주받은 땅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고 접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용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러니까 발뺌할 생각말고 얼른 처 말하지 그래 잘나신 요정양반?"

"요정이라니..."

"뒤에서 몰래 도움의 손길을 처 주는게 요정이 아니면 대체 뭐지?"

평생 들어본 적 없고 들어볼일 없다는 생각조차 든 적 없는 호칭에 패치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따지기엔 미묘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호칭에 잠시간 말을 꺼내는걸 멈췄지만 이내 호칭따위엔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 말을 마저 받아갔다.

"요컨데 용사는 믿되 정원지기는 믿지 못하겠다?"

침묵은 긍정이라고들 하고 침묵과 더불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들개의 표정을 본다면 긍정이 맞다는 확인사살까지 들었다. 물론 검은 들개 하나의 의견이지만 엄연히 들개들의 대장이었기에 나머지 들개들의 의사또한 검은 들개에게 반영된다는 전제하에 그들이 용사에게 우호적이라고 판단한 패치는 주민들에겐 비밀이었지만 언젠가는 밝히게 될 진실이자 목적을 말하기 위해 한가지 더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정원지기의 목적에 대해서 잘 아는가?"

"네녀석들 목적이야 땅을 처 넓히는 것이겠지만 그거말고 처 숨기는게 또하나 있다는건 이미 애저녁에 처 눈치챈지 오래다."

"눈치는 있군."

"이곳에 오랫동안 처 살면서 없는게 이상한 거다."

한마디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검은 들개를 보고 패치는 판단을 끝냈다. 이러한 감정 소모적인 대치상황은 의미가 없다는걸 알고있던 패치는 꺼낼 시간까지 늘릴 정도로 무게를 잡고있는 패를 꺼내놓았다.

"보물찾기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군."

3.

"저기..."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또 한 번의 데자뷰를 느낀 패치는 아직도 의구심 가득한 녹색 눈과 마주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째서 정원지기들은 그들이 찾는 것을 감춰온 거예요?"

"질문의 의도가 뭔가?"

"의도같은 건 없어요! 다만 어째서 함께 찾으려고 하지 않았느냐가 궁금한 거예요! 함께 찾는 게 훨씬 빠를텐데...물론 그나마 지금이라도 밝혀서 함께 찾을 순 있지만, 처음부터 말했다면!"

"자네가 한가지 오해하는 게 있군."

퍼블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챈 패치는 퍼블리의 말을 정정해주고자 말 허리를 잘랐다. 퍼블리는 오해라는 말에 자신이 내뱉은 말 중에 무언가 실수라도 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았지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전에 패치의 말이 앞섰다.

"지금이라도 밝혀진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감추어져 오고있네만."

"네?"

"쉽게 말해 밝힌 것은 내 독단이라는 말일세."

타인의 일상을 얘기하듯 가볍다라고드 느낄 수 있을 법한 하지만 어느정도 진중한 어투로 얘기하는 패치였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말은 있는 그대로여도 진중하다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무거웠다. 그 무게를 받아들이기엔 버거웠는지 아니면 자신이 받아들였지만 가늠할 수 없는 무게에 들어 온 순간부터 느껴지지 않는다는 착각이 든 건지 분명하게도 패치의 말을 들었을 퍼블리는 아무런 반응도 못한 채 멍하니 패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꺼풀이 두어번 녹색 눈동자를 쓸어간 후에야 자신에게 들어 온, 제 발 앞에 떨어진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조심스럽고 천천히 자각한 퍼블리는 이내 펄쩍 뛰려는 자신의 발을 간신히 땅에 붙이고는 억눌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그렇다면 정..원지기님은 규칙을 위...반했다는 말인가..요?"

목소리와 더불어 떨리는 녹색 눈동자가 대답을 요구했고 그에 패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큰 비밀을 꺼낸 입과 동일한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굳게 닫혀있는 입은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답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고작 시선을 조금 바꿨을 뿐인데 굳은 입을 대신해 마주하게 된 푸른 눈에는 명백한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그 눈에서 그리고 누군가가 말하고 흔히들 듣게 되는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에서 퍼블리는 대답을 얻었다. 힘이 쭉 빠지는 기분과 함께 대답을 받는 것과 동시에 만들어진 질문이 나지막하게 튀어나왔다.

"어째서 규칙까지 위반하면서 저희를 돕는 건가요?"

앞서 나온 질문과 달리 이번에 받게 된 질문에 패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퍼블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설령 안다고 해도 숨겨야 할 이유도 모를 그런 솔직한 사람이었고 그러한 사람이었기에 솔직한 마음 그대로 말 속에 담겨 패치에게 닿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퍼블리를 보며 패치는 우선적으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예전부터 주민들을 이용해왔지만 암묵적으로 주민들은 그 사실을 애써 사회의 흐름이라는 현실 뿐만 아니라 마음 깊숙히 보이지 않게 묻어두고 그 위에 자신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왔건만 그 뿌리 깊숙한 곳까지 파헤쳐버리는 확인사살이자 진실을 자신이 보란듯이 내던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배신감도 느낄 법 한데도 따져오는 말 대신 걱정을 담은 것에 패치가 의외라는 생각이 든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자네들을 위해 규칙을 위반한 게 아닐세."

"네?"

"어차피 모든 정원으로 밝혀질 진실, 이제까지 입을 다문 것은 그들의 입장에선 시간끌기였을 뿐이고 이제는 적극적인 주민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몰린 터라 그 시간끌기마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지."

나는 그저 제일 먼저 무너뜨렸을 뿐.

하지만 그건 누구를 위해서?

안타깝게도 그 대답을 들은 자는 눈 앞의 퍼블리가 아니었다.

 

"보~물~찾~기이이이이~?"

눈빛을 반짝이는게 여간 범상치 않다. 굿하트는 그나마 흥미를 보이는 용사의 모습에 안도했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에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곳으로 발을 들일 용사를 제일 처음으로 안내하는 역할에 자부심을 갖고 그 세월에 합당하게 웃는 낯을 유지하던 굿하트는 최대한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렇게 자신을 긍정적으로 되새기고 한껏 자애로운 표정으로 무장한 굿하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용사를 예쁜 손주보듯이 부드럽게 대할 마음으로 용사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럼 친구들도 데꼬 가야징!"

"허허 벌써 친구들을 만들었구나?"

대단하다는 칭찬까지 덧붙이며 용사를 추켜세우면서 친구들이 누군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곧이어 누구든 간에 같이 따라가서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거란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대로 모든 것이 동화책 속 이야기 마냥 술술 풀려나가는 기분에 살짝 눈을 감으며 웃고 있던 굿하트는 친구가 왔다는 용사의 말에 감았던 눈을 뜨고 용사의 친구가 된 자랑스러운 주민들을 바라봤다.

"물어왔다냐!"

"귀환!"

그렇게 굿하트는 또다시 폭발했다.

정원지기들은 모든 것의 개방을 목적으로 용사와 모험가들을 지지하며 그만큼 늘어난 주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정원을 넓힌다고들 하지만 어찌보면 구역을 나누는 일에서부터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배려한답시고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붙여놓는다고 해도 그들은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소한 행동으로 인해 이해관계는 틀어질 수 있었고 설령 모든 걸 눈 감아줄 정도로 끈끈한 사이라고 해도 그들의 후손까지 완전하게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이라는 것은 옅어져서 희미해질 정도로 모든 것을 늘이는 재주가 있었다.

"대체 왜 하필 그녀석들인 거냐!"

저 멀리서 들리는 노성에 고개를 돌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난장판을 본다면 누구든 그 앞전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시뻘건 얼굴에더 목에 핏대를 세운 채로 윤 세상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굿하트와 그러한 상대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 용사. 그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를 정신 사납게 맴돌고 있는 들개 두마리의 모습을 본다면 보는 사람이 현기증을 느끼며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난장판이 따로 없군."

냉정한 정원지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봐, 요정."

패치는 아직도 할말이 남았냐는 듯한 얼굴로 검은 들개를 돌아봤다. 무엇이 그리 불만인건지 계속해서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보면 패치 또한 그다지 좋은 기분이 들진 않았다. 잔뜩 찌푸린 얼굴 사이로 번뜩이는 노란 눈에는 깊은 불신이 담겨있었고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그는 무언가 머리를 살짝 치고 가는 듯한 느낌에 눈썹을 찌푸렸으나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검은 들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은 들개는 순간적으로 찌푸려진 그의 눈썹을 놓치지 않고 봤으나 그 부분에 대해선 상대 또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판단을 세우고는 이내 상대가 기다리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아직 네 놈에게 신뢰를 처 하지 않는다."

"그건 이미 알고있는 사항이다만?"

생판모르는 남이 보아도 알만한 태도를 보이고선 굳이 말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확인사살까지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 뒤에 붙을 말이 아직 남았겠지만 검은 들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 멀어지기 위해 외면하는 굿하트 보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검은 들개의 영리함에 용사를 도와줄 조력자로는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첫인상 평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첫인상은 좋게 보여라.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상대방이 호의를 지닌 채 다가온다면 그는 경계하면서 밀어낼 위인이었다. 의도가 어찌됐건 그는 나머지 말을 뭉개버린 상황을 만들었지만 그정도에 뭉개져버릴 만큼 검은 들개는 말을 아끼는 편이 아니었다.

"목표라곤 쥐뿔도 처 보이지 않는 곳에 그나마 목표를 처 내놓았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이제까지 그걸 처 숨겨왔다는 거겠지."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정원지기에 대해 회의감을 가진, 조금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이었고 카드의 뒷면을 보기위해 뒤집듯이 금방 보여지는 패였다. 배신감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말로 불평하고 쏘아붙일 뿐 남은 길이 그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매달린다. 하지만 눈앞의 검은 들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찾는 목적을 처 말해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처 막을 것이다.

검은 들개가 원하는 건 부흥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단순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선 엉켜버린 실타래보다 복잡하게 엉켜있으면서 뭉쳐있는 긍지가 더욱 중요했다.

"자네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눈치 빠른 요정녀석이 처 할 말이 고작 그거냐? 일부러 시치미 처 떼도 소용없다. 네 놈들 뒤가 구리다는 걸 모르는 녀석은 처 어리버리한 꼬맹이들 밖에 없어."

그 말에 패치는 순간적으로 자신과 마주쳤던 녹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퍼블리도 꼬맹이 축에 드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요컨대 목적도 모르고 용사를 도와 함께 찾아내게 됐는데 그다지 좋은 용도로 쓰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긍지에 먹칠을 한다는 뜻이었고 목적을 밝히지 않으면 도움은 커녕 방해를 할 것이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물론 목적을 밝힌다하더라도 그들의 긍지에 안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이라고 불리는 하얀 정원사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자네는 코웃음을 치겠지."

그만큼 의미없는 질문을 꺼낼 정도로 그가 내놓을 대답과 연관이 컸다.

"지금 '정원지기의 기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초장밖에 남지 않은 시밖에 없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지기가 정원을 통제하는 당위성은 하얀 정원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남기고 간 기록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덕에 버티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것 또한 한계가 있을 뿐더러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럴 수록 그들은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무슨 수단이라도 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계속되는 정원."

하얀 정원사가 바로 존재했던 시절의 기록.

"그곳에 모든 것이 잠들어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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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원지기의 일은 직업이름 그대로 정원을 지키는 것이다. 남몰래 정원을 가꾸고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을 인도하고 정원을 넘보는 자들을 경계하는 정원지기의 역할은 그 누구보다 중요하다. 무엇보다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을 인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 모두를 인도해야하는건 아니다. 그들 중 우리가 인도해야할 자들을 선별하는데 우리는 그들을 용사 혹은 모험가라고 한다.

-'정원지기가 되기위해 꼭 필독해야하는 서적!'중에서 발췌-

 

"절대 허락할 수 없으니 돌아가게."

그들은 정원의 잡초만큼이나 끈질겼다. 아무리 밟아도 뿌리채 뽑아도 언제 이곳을 벗어난 적이 있었냐는 듯 비웃듯이 그곳에 자리를 잡는 잡초들처럼. 다만 그들은 비웃을 수 없는 위치였다. 오히려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뿌리채 뽑아버릴지도 모르는 그에게 매달려야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을지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알고 있을만한 상황이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십니까? 저희들을 가엽게 여겨주십시오."

그렇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목적의 억지다. 하지만 그런 억지를 듣고 있는 그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래왔듯이 냉정하고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그런 그의 눈을 바라 본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체념의 기색이 올라오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로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간다면 그대로 없어지기는 커녕 전부를 잠식할 것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오늘을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다음으로 날이 밝을 날 또다시 올것이다. 지겹도록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판으로 찍어낸 듯이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며 그에게 존재할지 모를 동정심을 유발한 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 방법이 먹혀들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으로. 이런 그들의 생각을 알고있는 자들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무슨 근거로?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오늘을 끝내기로 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는 투로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가는 그들을 담고있던 아니 담고 있었을지가 의문일 눈의 시선은 금세 방향을 바꿨다. 상대가 무너질때까지 몰아붙이며 한 발 물러나 숨을 고르며 상대가 지칠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끝없을 게임판. 그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행동 모든 것으로 그 말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 끝없을 판은 그들 스스로 끝을 맺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무의식이 넓혀가고 있는 지금껏 외면하고 있는 감정의 자리로 인해. 그 감정 이전에 애초에 게임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체념이라는 감정이 자리잡기 전에 오롯이 존재하던 끝 모를 자만이 만든 그저 허무한 허상일 뿐 그에게 있어선 그저 낭비되는 시간이었다. 그 낭비되는 시간이 되돌아오는 것은 얼마남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간을 붙잡혔던 그는 제 할일을 하기위해 발을 움직였다.

"아이고~또 시달리신겁니까?"

이거야 원 유능한 사람도 피곤합니다?

언제왔는지 능글맞은 웃음소리로 어느새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사내의 모습에 영원한 모습을 새긴 화석마냥 변함없던 그의 얼굴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깨 뿐만 아니라 그의 왼쪽 목덜미를 쓰다듬는 무례한 손을 그는 매섭게 쳐냈다. 과장스럽게 뒤로 물러난 사내는 내쳐진 손을 쓸어내리며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내보였다.

"동정심 없다고 오해받는 까칠한 선배님을 걱정하는 후배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다니 정말 슬프지 말입니다?"

"슬픈 얼굴이 다 죽었군."

애초에 나에겐 동정심 따윈 존재하지 않다만?

모든 행동을 과장스럽게 그리고 요란스럽게 하는 사내는 꼭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광대같이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다. 사내의 손길이 닿은 목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데도 흔적을 없앨 것처럼 문지르던 그는 더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담아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끈질기게 앞을 막아서는 사내가 아니었다면. 그저 빤히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거슬렸는지 그의 얼굴에 완연하게 드러난 표정이 만족스러웠는지 사내는 휘파람을 불며 그의 목을 쓰다듬었던 손을 주름이 잡혀있는 미간으로 뻗었지만 사내보다 그가 한 발 빨랐다. 거리를 벌린 그는 싸늘한 눈으로 사내를 흘깃 보고는 자리를 떴다. 이런 둘의 모습을 멀리서 구경하던 다른 정원지기들은 늘상 있는 일이었는지 고개를 돌려 제 할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그 자리에 남은 사내에게 동정 섞인 혹은 비웃음을 담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그 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는 참견 많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 다가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패치 선배님 원래 까칠하시잖냐? 상처받지 말고 그냥 친해지는건 포기해."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 하지만 그 속엔 사내에 대한 미련함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비웃음의 근거가 무지에 대한 허상일지는 이야기의 당사자들 뿐만이 알 것이다.


정작 무안하다싶을 정도로 냉대를 받은 당사자는 주위의 시선과 방금 달아놓은 유리창처럼 그 너머가 훤히 보이는 주위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까보다 훨씬 더 즐거워보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즐겁게 만들고 있을까, 그것또한 당사자만이 알 뿐. 하지만 당사자는 타인에겐 말하지 않는다.

"아아 이거 미운털이 아주 단단히 잡혔나보네요?"

다만 당사자끼리 알고있을 뿐.

2.

그와 사내 즉 패치와 치트의 만남은 제3자의 눈으로 봤을땐 철천지 원수나 다름 없었다. 아니 일방적인 원수사이라고 봐야했다. 패치가 일방적으로 치트를 적대하고 싫어하는 기색을 숨김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설령 치트가 근처에 없다고 해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여지없이 불쾌감을 내비추기 일쑤였다. 한 번은 용기있는 정원지기 동료가 궁금증을 풀기위해 과거에 그와 치트에 대한 악연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

"아니. 나는 그녀석을 그 날 처음 봤네만."

패치가 말하는 그 날은 치트가 정원지기로 들어 온 날이다. 사실 정원지기는 적은 편은 아니지만 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새로운 정원지기는 기존에 있던 정원지기의 추천을 받아 후보라는 기회를 잡거나 기존에 있던 정원지기가 은퇴할 때 자신의 자리의 공백을 대신해서 내세우는 후임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추천이나 후임 외에 드물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들어오는 정원지기가 간혹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바로 패치였는데 그렇게 스스로 들어 온 정원지기에게는 특권이 하나 존재했다. 어제 패치를 찾아왔던 사람들도 패치의 특권 때문에 매달리다시피 했고 패치는 매일 거절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 패치 다음으로 스스로 들어 온 정원지기가 다름아닌 치트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는 주목 받게 되었고 패치 또한 같은 이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정원지기들이 새로운 정원지기를 보기위해 모인 그 날 명백히 떨어져있는 거리에도 그 둘을 한데 엮어서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명백한 적대를 목격했다.

이유없이 싫어한다는 것과는 한눈에 봐도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날 처음 본 사람에게 그런 적대감을 드러내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이런 적대를 받는 상대인 치트는 억울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는 그런 패치의 반응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에 그들은 대상을 바꿔서 치트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던 대답이 나올 일은 없었다.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의 대답은 오히려 그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인 애매모호한 대답이다. 이러한 치트의 대답보다는 단호하게 말한 패치의 대답이 그나마 더 나은 대답이라고 생각한 후 그들은 곧이어 의문을 접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그들의 일이 아니니까.


[모든 것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채로 길을 잃은 아이가 되어버렸어
정원사야 정원사야 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인 하얀 정원사야
너를 따르는 빛무리 처럼
너를 따르는 빛무리와 함께
그들을 바로 잡아주렴
검게 변해버린 것들을 너의 손으로 하얗게 물들이렴
정원을 지키는 하얀 정원사야
모든 것을 바로잡아주는 하얀 정원사야
너의 하얀 빛무리들을 우리에게 보내주렴
너의 손길을 우리에게 보내주렴
하얀 정원사야]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몸을 실은 노래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정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저 노래를 모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 정원의 주민이 아니다라고 단정지을 만큼 유명하면서 누구에게나 전해져오는 노래다. 노래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인공이자 제목인 '하얀 정원사'라는 노래는 다름아닌 '정원지기의 기원'이라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대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남아있는 전설 중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초장을 해석하고 변형하며 동요 수준으로 문장을 늘리고 노래로 전해진 덕에 전설은 묻혀지지 않았다.

정작 제대로 된 전설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평론가들은 현존하는 시조 중 가장 아름다운 시조라고 칭했고 수많은 해석가들은 그들보다 많은 해석을 내놓았으며 음유시인들은 다양한 노래로 편곡하여 연주를 했다. 평론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어와 해석가들이 가장 유력하게 믿고있는 해석과 음유시인들이 가장 공을 들인 음률이 만나 현재의 '하얀 정원사'가 만들어졌다.

"선배님도 저 노래 좋아하십니까?"

언제 따라온건지 또다시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는 치트를 보고 늘 그러했듯이 패치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간혹 이상하게도 자잘한 부분에 집요한 기질을 발휘하는 치트 때문에 패치의 기분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부담스러운 그의 눈을 피해 천진난만한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 본 패치는 다른 의미로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낯간지러운 노래군."

듣기에 따라서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 대답이었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유치한 노래라는 뜻이 담겨있을 수도 있고 나머지 하나는

"작사가가 선배님이셨습니까?"

다른 내용으로 되돌아온 질문에 그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내려놓았던 적대감을 다시 끓어올려 냉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 냉한 눈 속에 한심함을 담고 있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저 노래가 한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사람들로 인해 모습을 갖추었다는 건 세 살배기 꼬맹이도 아는 것을 자네는 모르는 건가?"

더군다나 저 노래는 나보다 태어난 해가 한참 전에 지났거늘.

패치는 다시 평소처럼 그가 떨어져나가길 바라며 그를 밀어냈고 대답을 들은 그는 다행히 바람대로 패치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들러붙기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처음에는 이성을 잃고 갖은 욕과 함께 주먹까지 휘두르기 일쑤였던 패치가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어깨를 내어주다가 밀어내기로 끝내는 것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밀려난 그는 제 입에서 떠나고 그대로 되돌아온 적도 없는 질문에 멋대로 대답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노래입니다."

가늘게 뜬 푸른 눈이 자신에게 와닿는 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드는지 검은색과 노란색이 함께 어우러진 달밤같은 눈을 검은 밤하늘에게 자신의 일부를 맡긴 초승달처럼 곱게 접으며 한껏 미소를 띄었다. 사람의 눈과 손을 유혹하는 정원의 꽃처럼 아찔한 미소였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눈앞에 있는 상대에겐 바람에 불어들어와 눈을 따갑게 만드는 흙보다 더한 눈 테러였다. 같은 땅을 딛고 있는 발의 방향을 바꾸고 재촉한다. 늘 그러했듯이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뜬다. 또다시 평소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그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입가의 호선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다시 돌아온 그들의 정적에 요란스러우면서도 잔잔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그 빈자리를 메운다. 자리가 부족했던 건지 이내 노랫소리는 그의 귓속까지 넘봤고 무형의 불청객이 거슬렸는지 감았던 눈을 다시 뜬 그는 아이들을 힐끗 보고는 제 일터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단 말입니다."

어느새 웃음은 사라져버렸다.

3.

어느 특정한 부분을 경계로 세상은 두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 곳은 온통 검은 세상, 다른 한 곳은 온통 하얀 세상. 그 두가지 색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세상. 그 둘을 구분하게 해주는 끝이 없는 일직선의 경계 위에 유일하게 색을 가진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부터라는 말이 무색하게 흐르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단이 마련되어있지 않은 무채색의 세상은 색을 가진 존재가 들어와 있어도 꿋꿋하게 본래의 존재를 과시하듯 변하는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색을 가진 이 또한 시간이 흐는다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을 작정인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계속해서 서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채로 무채색의 경계와 끝을 찾는 싸움을 하듯 그의 시선 또한 어느 두 곳에도 두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춰서서 적막과 함께 시간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어느 곳도 아닌 곳에 서 있구나."

그와 동시에 시간을 받아들였는지 눈을 감는다.

"너는 나를 기억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는 다시 눈을 뜬다.

"너와 나는 만나지도 않았고 이제 만날 수도 없는데..."

안타까움을 담은 목소리는 말을 남기고 떠나가버렸다. 이윽고 경계에 머물러 있던 발은 하얀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어느 곳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붉은 빛은 잠시 검은 세상을 등졌다.

 

꿈을 안 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꿈을 꾸기 마련이다. 다만 기억하지 못 할 뿐. 늘 잠에서 깨어나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 마냥 사라지는 꿈이 불만스러웠는지 바로 그 잠에서 깬 패치는 찜찜한 기분에 꿈과 함께 날아간 졸음을 붙잡을 생각이 없는지 그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벗어나 옆에 딸린 창문 너머로 눈을 돌렸다. 아직 해가 뜰 준비도 안 된 한밤중이다. 마침 보름인지 제 모습을 자랑하듯 동그랗게 떠있는 노란달이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마냥 어두운 밤하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저렇게 떠있는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그에게 있어선 진절머리 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달갑지 않은 밤하늘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피로감과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마음 한구석에서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어리석은 의문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왜 하필 그녀석과 닮은 거지?

"...정말 피로가 쌓일대로 쌓였나보군."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이 그러한 의문이 떠오른 것이 못마땅했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위로 누워 눈을 감은 채 다시 잠들기를 재촉했다. 분명 그는 노란달을 자랑하듯 내보이는 밤하늘 같은 녀석을 싫어한다. 녀석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의 기억에는 처음 만난 날이 새로운 후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이게된 그 날이 분명하다. 그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정원지기가 되기 전의 자신과 만나기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분명히 존재했고 자신또한 의식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유를 모를 뿐.

그 또한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최대한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피해다닌답시고 곧장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 민가까지 오기도 했으나 오히려 그것 또한 일정한 패턴이 되어버렸는지 귀신같이 알아채고서는 자신의 눈 앞에서 떡하니 나타난다. 그 이전에 그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지 그것 또한 알 수 없었다. 좋은 목적이 아니란것만 어렴풋이 눈치챘을 뿐.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패치는 또다시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더이상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았건만 오히려 기다렸다는듯 물밀듯이 밀려오는 잡념, 그것도 피하고 싶은 주체가 장악하고 있다는건 여간 불쾌한게 아니었다. 결국 잠을 재촉하는 것은 포기하고 다시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름대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분명 내일 일할때 상당히 피곤할게 뻔하다. 답답한 마음에 눈가를 쓸어내리던 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침대 바로 옆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잡념이 드디어 떠나갔지만 눈 앞이 선명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어지러운 느낌에 그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 튀어나간 채로 길을 잃은 아이가 되어버렸어"

본인의 입으로 낯간지럽다고 했던,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노래의 첫부분이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원사야 정원사야 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인 하얀 정원사야..."

하지만 얼마 가지않아 끊어져버렸다.

한 번의 호흡이 지나가고 감았던 눈을 뜨기위해 천천히 들려지고 있는 눈꺼풀 아래로 푸른색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창문 너머로 향한다.

"이것만큼은 같은 의견이군."

나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그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누구이고 무엇일까?

4.

전날 밤의 그의 우려와는 달리 밤새 잠을 설친 것 치곤 그는 다행히도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버틸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을 뿐이다.

"요건 몰랐지!"

그는 바로 눈 앞의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고 아래에 놓여있는 판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 그가 관리하는 정원 구역은 정원지기들에게도, 정원 너머에서 오는 자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다른 곳에 비해 넓은 것도 아니었고 선별된 용사와 모험가들이 이곳에 발을 들이기엔 물자지원이 부족한데다 발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곳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저주받은 검은 땅'과 가장 인접했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이미 다른 정원지기들의 활약으로 다른 정원의 땅이 되어버렸고 땅을 넓힐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곳이 다름아닌 '저주받은 검은 땅'이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치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이곳의 정원지기를 자처할 때 다른 정원지기들은 그를 만류하는 한편 골칫덩이를 자진해서 맡는 그를 비웃으면서 후련함을 느꼈다. 공백을 원치않는 정원지기의 법칙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자리였기에. 그는 모든 악조건을 무시했고 그 악조건으로 인해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인해 후회라는게 만들어졌다.

"...여기까지 하죠."

"아 왜애~ 이제 재밌어지려는데!"

안내수칙과 실제상황을 겪는 건 명백히 다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을 글로 적어놓으니 주의할 법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엔 예외라는 게 존재했고 그것이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름아닌 그 예외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눈 앞에서 껄껄 웃고 있는 상대를 보니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고 설령 쌓인 피로가 없다해도 만들어질 판이었다. 정원지기가 없는 이곳은 진작에 다른 정원에 흡수되어야 했지만 오랫동안 살아 온 주민들의 거센 반대와 그들에 대한 나름의 배려로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그 유예기간이 끝나가던 찰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영역을 지킬 운명이었는지 가장 필요한 정원지기의 존재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에잉~ 빡빡하긴!"

그가 물러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재차 권유하던 상대도 결국 포기했지만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가의 미소는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대 덕분에 그는 평생 느끼지 않을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눈 앞의 상대는 오랜시간 동안 정원지기가 없었던 이곳을 이끌어가고 유지했던 사람인데다 다른 그 누구보다 많은 걸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고 찾아다니는 정보를 쥐고 있거나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떠날 수가 없었다.

"자네 '하얀 정원사'라는 노래 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노래입니다만."

사실 그는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원하던 정보를 물어보았다. 질질 끄는 성격도 아닌데다 시간의 여유를 느끼는 취미도 없으니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껄껄 웃음을 짓는 상대와 함께 고스톱이라는 카드 게임을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는 처음 이후론 다시 정보를 묻는 것은 신중하게 고려하고 다시 질문을 꺼냈지만 상대방의 특유의 웃음과 입담에 그저 울화가 치밀어오를 뿐.

"그렇다면 이 노래의 바탕이 된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내용은 알고?"

"노래에 비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으니 잘 모릅니다."

사실 그는 모르진 않았다. 정원지기가 되면 당연하게도 알게되는 게 다름아닌 '정원지기의 기원'일텐데 아무리 훼손되었다지만 유일하게 일부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를 모른다는건 정원지기로서 정원지기의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실제로도 그는 정원지기의 역사에는 관심 없었다. 모른다고 대답한 이유 또한 그러한 마음과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라는 뜻이 담겨있었고 상대방이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는 온전히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달랐다. 상대 아니 GM은 여전히 웃는 낯을 고수하며 그 뜻을 못 알아챘는지 혹은 무시하려는지 그의 대답은 별개라는 듯 짧은 시를 읊었다.

"그의 손길은 하얀 빛무리
그저 감싸 안으며
이리저리 튀어나가며 방황하는 그들을
멈춰세운다
움직이지 않는 검은 바위도
그의 손길을 따라 그들의 곁으로..."

GM이 읊는 시는 다름아닌 '하얀 정원사'의 바탕이 된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의 초장이었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아름답다고 입을 모아 외치지만 그가 보기엔 여느 평범한 시와 다름 없었다. 그는 GM이 갑작스럽게 시를 읊는 것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걸 알았지만 그가 원하는 정보가 아니었고 그 시를 주체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낌새를 느꼈는지 그가 자리를 떠나는 것 보다 GM의 말이 더 빨랐다.

"시 자체보단 시를 해석한 걸 바탕으로 노래가 만들어졌지."

해석은 나도 모르지만 말야!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마냥 해맑아 보이지만 그 해맑음 덕분에 울화와 후회를 느껴본 그로선 달갑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 시가 발견된 것도 바로 이곳이야."

'정원지기의 기원'이라는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이었고 그 전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도 그 전설이 진짜인 것 처럼 아주 오래된 기록 또한 남아있었다. 빛 바랜 종이와 여기저기 망가져 있는 글이 새겨진 비석. 정원지기의 또다른 일은 그것들을 찾거나 찾은 후 훼손된 것이 있다면 그것들을 모아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그 시 또한 온전히 존재한 게 아닌 정원지기들의 작업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그 전설 자체가 정원지기들과 밀접하지만 정원지기들이 그렇게까지 전설에 집착하는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상당히 오랫동안 정원지기를 맡아 온 자들만이 아는 진실.

정원지기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정원을 넓히는 게 아니었다.

"자네가 찾는 곳은 정원지기들의 오랜 숙원을 풀기 위해선가?"

GM의 말에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GM이 하려는 말은 그가 맨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원하던 대답일 수도 있었다. 그는 GM을 바라보며 원하는 대답을 듣기위해 그의 대답을 내놓았다.

"저를 위해서입니다."

뻔뻔하다고 생각할 법한 말이지만 그의 단호한 목소리와 표정을 보면 뻔뻔하다라는 말보단 당당하다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GM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보다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는 번지르르한 말보단 좋네!"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아니! 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난 모르거덩!

그는 또다시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울화에 표정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고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던지 GM은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이곳으로 온 게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서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주먹이 곧장 앞으로 뻗어나가는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이렇게 또다시 평소처럼 시간이 지나갈게 분명한 상황에 그는 다시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문을 열고 GM의 집을 나서기 전 뒤에서 아직까지도 웃음기가 섞인 GM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가들 뒷꽁무니 보단 진짜를 찾으라구!"

그리고 문이 닫혔다.

5.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어린아이였을 때 유일하게 제자리에 앉아있던 어른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잡고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리 또한 찾아서 이끌어주기까지 했다.
흰 색 일색인 그는 그의 하얀 손길을 내밀어 질서를 만들었고 자리를 찾은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라 흰 빛무리가 됐다.
그리고 그는 하얀 신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동화 '하얀 신'의 첫부분-


"영광입니다!"

GM의 집에서 나온 패치는 얼마 안 가 발목을 붙잡히게 됐다. 물론 상대는 그럴 의도가 없었을테지만 패치는 갑작스럽게 닥쳐 온 상황에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 난데없이 자신의 앞을 막으면서 흡사 신도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데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평소의 패치라면 눈 앞의 상대에게 예의상 인사를 건네며 그대로 지나쳤겠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던 패치가 물었다.

"자네는 혹시 예찬(禮讚)인가?"

"네?"

퍼블리는 정원지기 지망생이었다. 정원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가꾸고 지키고 넓혀가는 그들에 대해 어린아이라면 한 번쯤은 담았을 동경을 퍼블리 또한 담았고 담겨져있는 채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상으로 이루어진 동경에 비해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이라는걸 증명하는게 즐거웠는지 이상을 가로막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상이 막히고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멀어지자 그로인해 자리잡고 있던 동경이 사그라드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개중에는 아직까지 동경이 자리잡고 있는 턱에 막연한 이상을 두고 현실과 끝이 보이지 않는, 불합리한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퍼블리는 후자였다. 정원지기가 되려면 능력 좋은 정원지기의 눈에 들어 그 자리를 넘겨받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고 퍼블리가 사는 구역엔 눈에 들기는 커녕 눈에 보이는 정원지기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만큼 막연하다 못해 존재했었나 싶을 가능성이 가망없는 희망고문처럼 드리워진 곳에 바로 그 정원지기가 발을 들였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정원지기가 된 자가.

"저...혹시 말씀하시는 예찬이 제가 알고 있는 그...."

"...아무것도 아니네. 초면에 실례했군."

아니 실례는 오히려 이쪽이 했는데...

패치가 말한 단어의 뜻과 퍼블리가 알아들은 단어의 뜻은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지칭하는 바가 다를 뿐. 더이상의 대화가 이어나가는걸 원치 않았는지 패치는 그 자리를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오~아직 안 갔넹?"

빨리 갈 걸 그랬군.

언제 나왔는지 그들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곳에서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GM의 모습에 패치는 자연스럽게 미간 사이의 주름을 늘렸다. 매번 휘둘리는 통에 경계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방심하는 자신의 모습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 틈새를 노려 자신의 속을 뒤집는 GM의 모습에 머리를 짚는다. 과연 이번엔 무슨 일인가 싶어 GM을 바라보는 한 편 어느 타이밍에 자리를 떠야하나 고심하는 동안 바로 그 GM에게서 경계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 나왔지만 그 내용은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자네, 드디어 할 일이 생겼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용사가 왔다구~!"

정원너머에서 오는 자들이 용사 혹은 모험가로 선택되는 기준은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우연찮게 정원에 당도해 길을 잃고 돌아갈 곳도 정착할 곳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 몇가지 테스트를 거쳐 뽑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원 어느 곳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다.

"우웅?"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는 바로 후자였다.


"드디어 재밌는 일이 벌어지려나 봅니다?"

노란 빛을 품고있는 눈이 곱게 휘어진다. 사람들은 작은 동물들이나 곤충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작 관찰대상이 되면 불쾌함을 느낀다. 물론 그것은 마땅히 불쾌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주변을 경계하게 된다. 그것은 관찰자가 자신의 존재를 들켰을 때 해당하는 사항이었으므로 주도면밀한 관찰자는 아직까진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여유로운 관찰자는 들키지 않으려고 먼발치에서 흔적을 지우는 한 편 관찰대상이 재빨리 흔적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줬으면하는 상반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존재가 발각된 후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는 오직 관찰자와 관찰대상에게 달렸다.

"당신 곁은 언제나 즐거워 보이네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즐겁지만.

스스로를 관찰자라고 생각하는 치트는 관찰대상인 패치가 있는 구역을 주시한지 꽤 오래되었다.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라해도 흔적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저 의심하거나 의심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시선이 닿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무언가 약간의 재미가 필요하다.

"그 때 말했지만 저는 인형극을 좋아합니다."

물론 기억하시진 못하겠지만.

누군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항상 그곳에 있었던 무대. 그 위에서 누구의 명령도 요청도 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빛날 것이고 눈에 띌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완벽한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무대가 무너져내리고 당신은 인형이 되겠죠."

그 모든 것이 진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이고 그는 그 거짓된 것을 이끌며 완벽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미 그의 손을 거친다는 시점에서부터 그것이 거짓이건 간에 그것은 완벽해질 것이다.

그리고 완벽은 하나의 진실로 무너져내린다.

모든 인형극의 시나리오는 관찰자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관찰자는 그런 시나리오를 자신했고 확신했다. 그리고 관찰자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즐기는 관중의 역할 또한 쥐고 있었다. 진실은 바꿀 수 없었고 족쇄 또한 미리 걸어놓은지 오래였다.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입가를 쓸어가면서 미소를 더듬었다. 곧이어 시작될 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극을 기대하는 어린아이 마냥 눈을 빛낸다. 한차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잔잔하게 내뱉는 것이 태풍이 오기 전의 조용한 날씨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당신을 죽이면서까지 무대를 이끌어 나가는군요."

제가 사랑하는 완벽 답습니다. 제 아무리 추악한 진실이라해도 당신의 완벽과는 별개가 되어버리겠죠.

"그러니 나는 당신을 살리겠습니다."

당신이 죽여버린 족쇄달린 인형으로.

6.

"거기서 뭐하니?"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질문에 대답했다.

"그저 서있습니다."

"정말?"

어느새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또다시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긴 온통 하얗구나."

"당신이 만든 곳이니까요."

"나는 하얗게 만든 적이 없는걸?"

"그들에겐 하얗게 보였던겁니다."

"너도?"

이번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어간다.

"그들은 나를 하얗게 보는구나."

"....그것 또한 그들이 그들을 위해서 거짓으로 보고 있는겁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니?"

그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제 그만 놓아주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에 그는 약간 화가났는지 눈을 치뜨고는 따지듯이 말했다.

"저도 이젠 어른입니다. 당신 없이는 못 살아가는 그런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그리울 뿐.

지금까지 흘러간 시간보다 더 길수도 있는, 어쩌면 영원으로 미뤄질 기약없는 재회에도 그는 그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다음엔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많이 늑장을 부리는게 좋겠구나."

작별인사를 하듯 바로 그의 옆에 있었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을 느낀 그는 목소리를 따라 눈을 돌렸다.

처음부터 그의 곁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들어 잠이 자주 깨는군."

그나마 그에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곧있으면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는지 거뭇거뭇하던 하늘 끝자락에서 어스름한 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밤이 찾아오면 그의 머리카락처럼 붉게 사라지던 태양이 아침이 오면 흰 빛을 뿌리며 다시 떠오르는 것에 묘한 느낌과 사소한 신비감에 잠시동안 멍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에겐 하늘 감상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바로 눈 앞에 닥쳐있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용사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수도 있었고 쓸데없는 기대감을 갖게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정원지기들이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그들이 다름아닌 정원을 넓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아니라 정원의 주민과 정원지기들 또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모험보다는 안전을 추구하는 이들이였기에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정원을 넓히는데 동참하는 이들은 혼자서 개척한다기 보단 용사와 모험가들의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낯선 곳으로 들어와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이루어진 용사와 모험가들에 비해 이곳의 사람들은 인도해야 할 그들을 이루고 있는 감정이 상당히 절제되어 있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자신들 즉 정원의 주민들을 위한 마음가짐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책임전가였다. 기대를 떠맡기고 실패하거나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받지 않는 책임전가. 하지만 그러한 사색에 잠기기도 전에 또다시 당황스러운 만남이 이어졌다.

"자네는 어제.."

"퍼블리 셔라고 합니다!"

분명 어제 마주쳤지만 갑작스러운 GM의 등장과 중대한 소식에 제대로 된 작별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흐지부지 헤어진 상대였다. 이제는 이름까지 알았으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이전에 그는 눈 앞의 상대, 퍼블리가 본인의 이름을 대기 전에도 이미 알고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있었다. 그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퍼블리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태도는 평소에 마주쳤던 사람들을 대한 태도와 확연히 다른데다가 섣부르게 건넨 질문으로 인해 남들 모르게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분명 퍼블리는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절대 그 질문의 의미는 가볍지 않으리라. 그는 내심 눈 앞의 퍼블리가 어제의 질문을 잊어버린 상태이길 바랬다.

"그런데 어제 그 질문은..."

"...그건 잊어주게."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 현실로 와닿는 일은 별로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뱉을 뻔한 한숨을 삼키고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방향을 돌려 이 축복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정원에 그와 같은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랬다.

"왔어?"

그들에게서 몇발자국 떨어져있는 곳에 언제왔는지 모를 GM이 하얀 이를 드러낸 웃는 낯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상황에 그는 결국 한숨을 뱉었다. 그들, 정확히는 패치를 향해 다가온 GM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갖구가!"

특유의 웃음과 함께 건네받은 것은 칼집이 꽂혀있는 작은 단검이었다. 용사 혹은 모험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의 뒤를 밟으며 도움을 주고 새로운 길로 그들을 인도하는 정원지기였기에 그들이 위험할 때 덩달아 위험해질 수 있지만 그는 단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뒤를 밟는 정원지기답게 몰래 용사의 곁에 두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저기..."

GM으로 인해 잠시간 시선에서 벗어난 퍼블리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단검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다시 퍼블리에게로 돌아왔다. 퍼블리는 어제처럼 흐린 끝을 맺고 싶지 않았다. 아니 끝을 맺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오래전에 담았던, 오래전부터 담아두고 있던 현실을 마주함으로써 가라앉았지만 끝이 안보이는 밑바닥을 열심히 차내며 거부해오던 동경이 눈 앞에 다가온 이상에 가까운 이상으로 인해 그동안의 줄다리기에 대한 보상처럼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에 따라오는 일말의 기대감은 더이상의 인내가 지루했는지 녹색의 눈동자와 간절한 목소리에 몸을 실어 그에게로 다가섰다.

"저도 따라갈 수 있게 해주세요!"

물론 그것은 어림없는 소리였다. 만약 이곳에 다른 정원지기들이 있었다면 혀차는 소리와 안타까움과 비웃음이 섞인 우려를 가장한 눈빛들이 일제히 방금 호기롭게 요청을 한 사람에게로 쏟아졌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거절하기 위해 시선을 마주쳤으나 입안에서 맴돌던 다름아닌 그 거절이 쏜살같이 속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갔다. 고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에서 그는 알고 싶지않은 상대의 마음을 깨달았다.

저 눈은 거절하더라도 몰래 뒤따라올 눈이다.

그 깨달음은 의도치 않게 그의 상상을 자극했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이곳에 발을 들인 용사의 뒤를 신중에 신중을 가해 밟는 정원지기와 마찬가지로 발을 들인 바로 그 정원지기의 뒤를 밟는 이곳의 주민.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상황인가. 그리고 상상은 두통으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제 할일을 했을터다.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의 뒤를 밟는다면 그 또한 나름의 배려로 모른체 할테지만 저 고집스러운 주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럴 리 없을테지만 어쩐지 늙어가는 기분에 몸의 힘이 빠졌다.

"좋다."

"거절하셔도 따라갈..예?"

거절을 각오하고 선전포고를 하려던 퍼블리는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분명한 허락이었는데도 퍼블리의 머릿속에 제대로 잡기까지는 선전포고의 각오를 되새긴 만큼 길게 이어졌다. 이윽고 드디어 자리를 잡았는지 퍼블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니 이미 뛰면서 눈을 빛냈다. 잠시 진정이 됐는지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퍼블리를 보며 패치는 퍼블리가 쓴 두건사이로 삐져나온 푸른색이 도는 흰 머리카락을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쪽은 행복해보이고 한쪽은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미묘한 상황을 지켜보던 GM은 또다시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것을 패치에게 넘겼다. 그것은 다름아닌 빛바랜 종이였다. 사람의 손길을 탄지 꽤 오래된 것 같은 종이를 펼쳐본 패치는 그 위에 적혀있는 글을 읽어내려갔다.

정원을 거닐고 있는 무리
그 앞의 인연
옛 땅으로
악연으로 변해버린 인연
인연과의 단절
용이 날아오른다.

"이건 뭡니까?"

"옛날에 늬들 몰래 발견해서 꿍쳐둔 시!"

GM이 가리키는 다수는 다름아닌 정원지기를 뜻했다. 그 말을 들어본다면 지금 이 종이에 적힌 시는 어쩌면 '검은 바위와 흰 빛무리의 화해'만큼 중요한 '정원지기의 기원'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급격하게 밀려오는 두통과 울화가 한꺼번에 치밀었지만 한 편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안도감을 느꼈다. 어울리지 않을 상반된 감정들의 다툼에서 승리자는 안도감이었고 곧이어 진정된 그는 시라고 하기엔 이렇다한 설명이나 비유 없이 핵심만 나타내고 가장 끝의 개연성 없이 이어지는 부분에 의아함이 들었다. 이건 시라기보단

"무언가를 메모 한 것 같군."

하지만 시라고 확신한 데엔 이유가 있을 터. 그는 GM을 바라보며 빠진 부분에 대해 물었다.

"제목은 무엇입니까?"

"그건..."

그에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변한 GM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 분위기에 동조해 그들의 옆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던 퍼블리마저 긴장을 하며 다음 이어질 GM의 말에 집중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기이한 분위기에 퍼블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패치는 또다시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다시 움직이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시곗바늘 마냥 GM의 입이 열렸다.

"비밀이지롱!"

거의 무의식적으로 패치의 손이 GM의 멱살을 잡았고 맥이 탁 풀린 퍼블리가 실망했다는 기색을 내뱉기 전에 기겁한 채로 패치를 붙잡았다. 온 사방으로 널리 퍼지는 GM의 웃음소리는 그러한 소란을 더욱 보탰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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