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용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반응이 올라왔다. 이름을 먼저 꺼내며 반응한 자를 시작으로 모두 매우 반갑고 기쁜 얼굴로 용사라는 이름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엄청 재밌었던 마법사였지!”
맞아! 우리랑 신나게 놀고 배도 신나게 돌리고!”

신나는 용사였어!”

맞아 신나는 용사!”

나오는 말들은 전부 호의적이었다. 주로 신나고 즐겁게 노는 마법사이자 친구였다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대해 집중해서 듣던 퍼블리가 곧이어 이어지는 말들에 눈을 크게 떴다.

용사 옆에 늘 같이 있던 마법사도 있잖아!”

맞아! 빨간 머리에 파란 눈! 엄청 딱딱하던 마법사!”

술도 엄청 약했지!”

술 마셨을 때가 신났던 마법사!”

빨간 머리에 파란 눈과 딱딱하다는 건 맞지만 그 뒤로 계속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다 술 마셨을 때를 얘기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술을 마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퍼블리는 잇달아 나오는 그들의 얘기를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술에 취한 마법사가 바다가 저를 부른다며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로 빠졌다는 대목에 상상하던 퍼블리가 웃음이 터지자 얘기하던 이들이 신나서 기억을 열심히 더듬기 시작했다. 흑기사는 아무 말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집중해서 얘기를 듣는 퍼블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브레이니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겨 그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별이 잔뜩 뜰 때까지 떠든 그들은 술기운에 잠겨 잠들 때까지 입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 달도 안 뜬 날이라서 별이 잔뜩 보이는구만. 이리와 봐! 별이 잔뜩 뜬 날의 바다는 정말 장관이거든!”

코를 골며 잠든 흑기사단들에 비해 아직 졸리지 않은 퍼블리가 책을 붙들고 흐름을 읽어보기 위해 눈에 힘을 준 채 마치 책을 뚫어버릴 듯이 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브레이니가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어보였지만 망설이며 열 발짝 떨어져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을 지나가다가 보게 된 흑기사가 둘에게 그렇게 외치고는 갑판으로 갔다. 브레이니가 특유의 느린 말로 정말 예쁘다며 퍼블리가 같이 보러 가길 바라며 일어섰다. 그에 따라 일어선 퍼블리가 앞장서는 브레이니의 뒷모습을 보며 갑판으로 갔다.

우와아!”
바다를 내려다보자 파도도 이 순간을 위해 잠들었는지 잔잔한 바다는 매우 커다란 거울이 되어 별이 잔뜩 떠있는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바로 아래에서부터 수평선까지 바다를 바라보던 퍼블리는 하늘과 바다의 구분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를 바로 앞에 둔 것만 같은 기분에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물론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는지 최대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 있었다.

어때? 엄청 멋있고 아름답지? 메르시도 이렇게 별이 잔뜩 뜬 날은 우리 배에서 자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었어.”

그 말에 퍼블리가 바다를 보던 것도 멈추고 흑기사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공주님이랑 진짜 친하신가보네요.”

친해 마땅하지! 메르시는 가족이니까!”

생각보다 그들의 인연은 책에 적힌 글과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말들에 비해 더 깊고 단단했으며 따뜻했다. 가족이라는 말에 가슴이 따끔해진 퍼블리는 애써 바다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술에 취해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마법사의 모습이 다시 상상돼서 웃음이 터지자 통증이 조금은 사라졌는지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그런 퍼블리를 보고 있던 흑기사가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용사에 대해서 물어본 거야?”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하지만 네가 물어보고 싶었던 건 패치였던 것 같은데.”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퍼블리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어떻게...?”
모르고 싶어도 우리 애들이 빨간 머리 마법사 얘기 할 때마다 그렇게 표정이 밝아지는데 모를 수가 없지.”

그에 퍼블리가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혹시...잘 아는 사이세요?”
잘 아는 사이라기 보단 어쩌다 만나면 반가워서 인사했던 사이지. 엄청 딱딱했던 양반이었는데 용사 챙기는 걸 보니 매정한 마법사는 아니란 걸 알았지. 그만큼 용사가 엄청났었기도 했고.”

흑기사는 용사와 함께 뛰어다니며 놀고 마녀왕국 축제에도 찾아가본 얘기도 꺼내기 시작했다. 메르시도 용사와 함께 노는 건 즐거웠고 용사는 만나는 마법사들은 물론 마녀들에게도 굉장히 사랑받던 마법사라는 걸 이야기를 통해 느낀 퍼블리는 용사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럼 혹시 용사가 어디 계신지 알고 계세요?”
아니. 정화에 성공한 그 날 이후로 우린 이런 모습으로 깨어났고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어. 메르시 소식도 못 듣고 있지. 땅을 밟으려고 해도 홀리랑 프라이드가 우리가 땅 밟는 걸 질색하고 저기 죽치고 앉아있으니 말이야.”

퍼블리는 뭐라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이야기는 물론 모습도 한 번 본 적이 없어서 어떤 마녀일까 궁금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대부분의 마녀들이 공주라는 존재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알지 못해도 딱히 사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 탓일까,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주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던 퍼블리는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 일단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둘 모두를 찾는 것 같은데 왜 용사에 대해서만 물었을까 궁금했어. 아무리 봐도 네가 알고 싶은 마음이 더 기울어 있는 쪽은 패치니까 말이지.”
다시 돌아온 주제에 둘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퍼블리의 시선은 완전히 흑기사에게서 떨어져 바다로 향했지만 정작 보고 있는 건 바다가 아니었는지 시선이 흐렸다. 그렇게 바다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물소리가 세 번 정도 잔잔하게 흘러와 침묵을 채우고 있을 때 퍼블리가 입을 열었다.

저희 학교에서 마법사 선생님이 왔었어요.”
동글동글한 인상의 순하고 어쩐지 대화하면 편해지는 마법사 선생님.

저는 제 친구한테만 말한 비밀이 있었어요. 다른 마녀들한테 들키면 엄청 곤란해서 엄청 철저한 비밀이었고 저는 비밀이 제 곁에서 떠날까봐 두려웠는데 한편으론 너무 궁금했어요. 왜 그렇게 비밀로 하고 숨기는지,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퍼블리에게 있어선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는 비밀이었고 더 이상 물어보면 사라져버릴 비밀 같았다.

마법사 선생님이라면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몰래 물어보러 갔어요. 이 책도 그 선생님이 알려준 책이에요. 그러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그 선생님도 비밀에 대해 알게 됐고 무언가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왔을 때 퍼블리는 혼자였다.

사라졌어요. 계속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제가 제일 무서워했던 일이 벌어졌나 싶었어요. 제가 몰래 알아보려고 해서 저를 두고 가버린 건가 싶어서 너무 슬프고 무서워서...”

목이 메이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간에 올린 손에 힘을 준 퍼블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네 번 길게 오르락내리락 할 때 다시 말이 이어진다.

마법사 선생님은 약속했던 기간이 끝나서 원래 자기가 있던 곳으로 갔고 저는 그 선생님을 찾으러 이렇게 나왔어요. 그런데 찾아가보니까 그런 마법사는 없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눈앞이 깜깜했고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어디로 가야하나 싶었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선생님이 아빠를 데려갔나.

그러다가 무작정 모르는 마법사를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 선생님이 비밀과 함께 모습을 감춘 건가 싶었어요.”

퍼블리는 다시 흑기사를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했다.

그래서 완전히 말할 순 없어요. 이렇게 대놓고 경계하고 자세히 말 안 하는 건 죄송해요.”
그런 것치곤 굉장히 투명한데! 그리고 남들한테 말 못할 비밀은 누구나 마땅하게 있으니까 죄송하다고 할 필욘 없지! 그리고 말이야

무언가 더 말하려던 흑기사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브레이니에 너무 멋지다고 바다에 뛰어들진 말라는 말을 남기며 브레이니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 둘이 들어가서 보이지 않게 됐을 때 퍼블리는 다시 바다를 내려다봤다. 사실 지금 퍼블리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난타가 아니었다. 꿈을 꾸는 동안 무의식 속에서 지금 아난타에 대해 많은 감정을 차지하는 충격과 슬픔 아래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눈치 챘고 물속의 공기방울처럼 단숨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를 제대로 마주하고 느낀 퍼블리는 다시 꿈을 떠올리며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선생님이 아빠를 데려간 거예요?”

그럼 아빠는 저를 버리고 떠난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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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요, 퍼블리 학생.”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언제나 동글동글한 인상으로 인사를 건넨 아난타에게 마저 인사를 건넸지만 퍼블리의 표정이 영 좋진 않았는지 인사를 받은 아난타가 조금 난감한 웃음을 짓는다. 그에 마주보다가 고개를 푹 숙인다.

제가 신성지대 마법사가 아니라서 충격적인 건가요?”
.”

퍼블리 학생은 물론 다른 학생들도 속이고 학교랑 왕국도 속여서요?”
.”
익숙한 찻잎 통에서 찻잎을 꺼내고 뜨거운 물에 넣던 아난타는 무릎에 올린 손이 옷자락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리고 있자 쓴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정말로요?”
아무런 대답 없이 고요함이 계속 됐다. 손의 떨림을 멈추자 열린 입에서 이번엔 목소리가 불안정한 숨과 함께 떨리며 나온다.

선생님...전 저희 아빠에 대해서 말한 건 아니카를 제외하면 선생님밖에 없어요. 게다가 선생님은 아빠 이름은 모르지만 아빠 얼굴은 아는 것 같았어요. 축제 때...아빠가 축제에 나왔을 때 그 때 마주쳤잖아요...그리고 아빠는 축제 마지막 날에 사라졌고 선생님은 좀 더 계시다가 가셨지만..그래도..근데......”

끝으로 갈수록 말들이 뭉그러지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오지만 아난타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서있었다.

선생님...혹시 아빠랑 사라진 게 선생님이랑 상관있어요?”
고개를 든 퍼블리의 얼굴은 눈물에 잠겨있었고 동시에 알 수 없는 기대가 담겨있어 더욱 무너질 것만 같았다.

선생님이 아빠를 데려간 거예요?”

아난타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일어났다, 일어났어!”
형님! 일어났어요!”
눈을 뜬 퍼블리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요란스럽게 외쳐대는 소리에 묵직하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이봐 정신이 들었어?”

검은 갑옷을 입고 철퇴를 들고 쫓아오던 기사단장 만큼 덩치가 큰 마법사였다. 얼떨떨한 눈으로 급하게 몸을 일으켜 앉은 퍼블리는 그의 뒤에 서있는 자들을 보고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지만 최대한 뒤에 따라 붙는 감정들을 눌렀다. 그들의 살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썩어있었다. 거멓고 퍼런 살점 사이로 하얀 뼈도 보일 정도였다.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들을 바라본 퍼블리는 감옥에 있었을 때 저를 감시하러 왔던 기사가 한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혹시 여러분이 흑기사단이세요?”
? 우리를 알고 있나본데?”
요기 브레이니가 썼던 책도 그 때 같이 건졌지요!”
다 젖어부렀네!!”
아마 기사단장이 철퇴로 짐들을 날려버렸을 때 우연히 퍼블리와 함께 바닷가로 빠졌는지 뒤에 있던 자들 중 팔이 한쪽이 없는 자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책을 들고 외친다. 다시 시선이 집중되자 머쓱한 얼굴로 손을 들던 퍼블리는 아직까지 제 손에 쥐어진 유리병을 깨달았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정신을 잃은 동안에도 놓치지 않고 쥐느라 손에 자국이 남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손이 뻐근해진 느낌에 퍼블리는 잽싸게 유리병을 제 주머니로 넣었다.

그보다 마녀가 저 책을 들고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에이 형님 맨 처음에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거 봤을 때 웬 마법사가 바다에 빠졌다고 했으면서!”
건졌을 때 겨우 마녀인 거 알았으면서!”
이놈들아 너희는 처음에 물건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고 했잖냐!”
소란스러우면서도 활기차게 소리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차가운 느낌에 부르르 떨던 퍼블리는 제 옷과 머리카락을 살펴봤는데 물기가 조금 남아있어서 그렇구나 생각하고 밑 부분이 살짝 축축해 목덜미에 달라붙는 머리카락들을 한데 모아 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 여러분을 찾으러 온 거예요!”
? 우리를 찾으러?”

그럼 일단 손님이지?”
일단은 무슨! 우리 배에 오른 순간부터 손님이다!”
퍼블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달려가 문을 열고는

손님이 일어났다! 파티 시간이다!”
그렇게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들 사이에 앉아있었다. 학교 식당보다 더 요란하게 생선을 먹고 술을 마시는 그들은 모두 저주 때문에 겉모습은 시체나 다름없었지만 오히려 신성 측의 기사들보다 더 편안하고 친근감이 느껴졌다. 애초에 신성 측은 친근감을 느끼기도 전에 감옥에 던져 넣었으니 이들의 자유롭게 대하는 반응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퍼블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툭툭 쳤다.

와아...”

......”
지금까지 봤던 마녀와 마법사들 중에서 눈앞의 마법사만큼 덩치가 큰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 압도적인 크기에 인사도 건넬 생각 않고 신기하게 올려다보는 퍼블리를 보던 그는 마르긴 말랐지만 물이 묻어 쭈글쭈글해진 책을 가리키며 입을 연다.

내가.........”
?”
우리.....이름..........”

바로 책을 쓴 장본인이었다. 그보다 책에 적혀있었던 게 이름이었다는 사실에 퍼블리는 조금 허탈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난타가 왜 그 책을 추천해줬는지 알게 됐지만 이번엔 그걸 어떻게 알아본 건지 궁금해졌다. 책을 다시 펼쳐본 퍼블리가 젖었던 부분을 넘기고 멀쩡한 부분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브레이니는 눈이 안 보여. 그래서 느낄 수 있는 마력의 흐름을 이용해서 이름을 적었는데 흐름이다보니까 그냥 읽으려고 하면 읽을 수 없어.”

어느새 다가와 그냥 읽을 수는 없다는 걸 알려주는 건 이곳의 대표이자 검은 갑옷을 입은 마법사였다. 본인이 소개하기로는 이름이 흑기사라서 이들의 단체 이름을 흑기사단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보다 아까 우리를 찾으러 왔다고 했지? 우리 모습을 보고 처음 빼고는 놀라지 않으려는 걸 보니 저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왕궁 마녀? 왕궁 마녀야?”
왕궁 마녀라면 안 왔지! 우리가 메르시에 대해 물어보는 걸 엄청 경계하니까 바다 근처는 얼씬도 안하잖아!”

메르시라면 마녀왕국 공주님의 이름이었다. 퍼블리는 이들이 왕국의 공주님과 교류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교류를 뛰어넘어 이름까지 서슴없이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 같은데 어째서 교류라는 말로 남았을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법사를 찾고 있어요.”
퍼블리가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한순간에 가라앉아 사라졌다. 흑기사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던 퍼블리가 숨을 크게 쉰 후 이름을 꺼낸다.

용사라는 분에 대해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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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유리보다 돌이 더 단단했고 유리와 돌이 부딪힌다면 깨지는 건 유리였다. 돌을 없애기 위한 수단이라면 유리병 안에 돌을 녹일 독이나 깨질 때의 충격을 이용해 터지는 액체를 넣어놓겠지만 순수한 유리로 돌을 부수긴 힘들었다. 강화 마법을 걸어놔도 돌이랑 부딪혔을 때 유리가 멀쩡한 수준으로 남으면 매우 수준이 높은 강화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마법을 걸어놓은 이 유리병은 달랐다. 퍼블리가 던지는 힘을 달고 굉장히 빠르게 날아간 유리병이 과 부딪히자 굉음과 함께 벽이었던 돌 파편들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단순히 돌 위에 떨어뜨렸는데도 멀쩡하다 못해 돌까지 깨놓은 유리병은 이번엔 돌과 그 외의 물질들로 만든 단단한 감옥 벽을 부쉈는데도 멀쩡했다. 그렇게 유리병을 다시 주워 골고루 던지기를 몇 번 반복하자 퍼블리가 엎드리고 웅크리면 들어갈 수 있을만한 구멍이 뚫렸다. 유리병을 다시 품속에 넣은 퍼블리는 잽싸게 구멍으로 들어가 감옥을 빠져나왔다. 동시에 퍼블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유리병으로 감옥 벽을 부순 게 어이가 없는데다가 유리병을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마법사한테 이런 얘기를 하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고 그와 동시에 다시 유리병 속의 장미꽃잎의 존재를 의식하게 됐다. 다시 저를 둘러싸는 분위기가 고요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받으며 넘실거리는 푸른색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은 퍼블리는 재빨리 지금의 목적지를 찾아 달렸다.

 

대체 어떻게 부순 거지?”
한편 퍼블리가 떠난 감옥엔 기사들을 이끌고 내려온 기사단장이 놀라움과 감탄을 섞어 부서진 벽을 살피고 있었다.

어리다고 방심한 게 실책이군! 짐에선 딱히 위협적인 물품이 없었는데 정작 본인이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당연히 엄청난 마법이 걸려있는 유리병의 존재를 모르는 그들은 퍼블리 혼자서 벽을 부술 정도의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진실을 안다고 해도 누가 유리병으로 감옥 벽을 부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들의 실책은 감옥 벽이 튼튼하다고 생각해 바로 밖으로 이어지는 위치에 감옥을 만들어 둔 것도 포함이었다.

당장 찾아서 끌고 와라! 그들의 첩자 답게 쉽지 않은 상대이니 어리다고 봐줄 생각하지 말고 있는 힘껏 상대해라! 그렇지 않으면 당하는 건 우리가 될 거다!”
!!”
기사단장은 들고 있던 철퇴를 휘둘러 벽을 더 크게 부수고 퍼블리가 도망친 흔적을 찾아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과 신성지대에서 나갈 길을 봉쇄하기 위해 흩어진 기사들을 그림자 속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녀는 주머니에서 통화용 수정구를 꺼냈다. 반짝 빛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 모드양? 제 말 들리심까?”
.”
저도 모드양 목소리 들리네요. 신성지대에 갔다는 것도 예상치 못했는데 거기다가 감옥까지 들어갔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먹고 있던 딸기마저 펄쩍 뛰어올랐지 뭡니까? 그쪽 동네가 큰데다가 여행객들도 받고 있는데 비해 타 지역 타 집단을 굉장히 경계하니 마법사도 심어놓기 힘들고 해서 어떻게 됐는지 정말 궁금했는데...이렇게 아까 연락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연락 오는 걸 보니 제가 원하는 소식이 준비되어있나 싶어 기대가 됩니다~”

수다스러운 말에 모드라고 불린 마녀는 딱 한마디 꺼냈다.

탈출했습니다.”

~ 역시나 모드양입니다! 성공적으로 마녀왕국으로 모셔다놨죠? 아무래도 밖에 있으면 살펴보기 힘들고 우리 패치도 불안해할 테니 당분간 왕국 안에 얌전히 있게 되면 좋으련만...일단 돌아갔으니 안심임다.”
그에 모드는 뒤에 한마디 덧붙였다.

벽을 부수고 탈출했습니다.”

“...?”
제가 준 이동 마법 물품을 사용하지 않고 감옥 벽을 부숴서 탈출했습니다. 지금 이곳 기사들이 그 뒤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반문하던 목소리는 뒤에 이어진 상세한 설명에 완전히 침묵에 잠겼다.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던 모드는 연락이 끊어진 건가 살펴봤지만 아직까지 빛나고 있는 걸 보면 끊어진 건 아니었다. 다시 기다리자 이미 기사들이 지나간 감옥 벽이 푸스스 소리를 내며 조금씩 파편을 떨어뜨리고 있을 때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쫓아가세요. 그리고 잡히지 않게 도와주고 바로 이동마법을 써서 왕국으로 보내시고 모드양은 신성지대에서 잠시 대기하십쇼.”

 

마법사들 사이를 헤집으며 퍼블리를 찾아다니던 기사들은 지나가는 자들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혀를 차며 손을 놓고 다시 옆에서 지나가는 자를 붙잡는 걸 반복했다. 순찰 도중 죄수가 탈출했다는 연락을 받은 기사들은 도시 출입구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들어오거나 나가려던 여행객들은 이게 웬 봉변인가 싶어서 항의했지만 기사들이 하는 대답은 죄수가 탈출했으니 협조해 달라는 말 뿐이었다. 온 도시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퍼블리는 용케 잡히지 않고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머리에 쓴 천을 풀고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퍼블리는 여행객들 틈새에 몸을 숨기다가 지나가는 마법사들을 붙잡아 바다가 있는 곳의 위치를 물었다. 세 번째 같은 질문을 반복했을 때 이곳에 살던 마법사였는지 바다가 있는 방향을 가리킨 자에게 감사인사를 한 후 지나가는 자들 사이를 헤집는 기사들을 보고 골목길로 들어가 뛰어다니며 기사들을 따돌렸다. 그렇게 해가 거의 저물어 점점 어둠이 내려오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을 때 쯤 잔잔하면서도 커다란 소리가 퍼블리의 귓가에 날아와 발걸음을 붙잡아 이끌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린 곳에 도착한 퍼블리는 크게 눈을 뜨고 그대로 멈춰섰다.

“...이게..바다구나...”
물이 잔뜩 고여 있는 거라고 보던 게 마실 물이 솟아오르던 샘뿐이었고 들어본 건 호수였다. 바다에 대해 알려준 건 단순히 땅처럼 넓다는 책에 적힌 묘사 한 줄과 그림뿐이었다. 하지만 책에 적힌 대로 넓다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퍼블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봤다.

그들의 첩자가 갈 데는 그들이 있는 곳밖에 없지.”
묵직한 철퇴를 들고 오는 기사단장의 기세는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기세보다 퍼블리는 손에 들린 철퇴를 보고 질렸는데 저 하나 잡자고 저렇게 커다란 철퇴를 들고 오니 내심 기가 차기도 했다.

네놈이 강하다는 건 알겠지만 이번엔 절대 방심하지 않을 것이니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철퇴를 퍼블리에게 겨누고 당당하게 외치는 기사단장이었지만 애초에 퍼블리는 무기도 없었고 무기가 있다고 해서 상대가 된다고 할 순 없었다. 제 아무리 신체능력이 좋아도 상대는 정화 때의 마법사이자 이곳의 기사단장이고 퍼블리는 전투는커녕 정식적인 대련도 해본 적 없는 학생이었다. 물론 마법사한테서 공격용 마법을 배우긴 배웠지만 다른 마녀나 마법사들한테 써본 적도 없었다. 힐끗 바다를 보다가 다시 앞을 본 퍼블리는 기사단장 뒤에서 기사들이 일렬로 서있다가 점점 둥글게 자신을 에워싸려고 다가오는 걸 보고 있었다. 눈을 꽉 감고 있다가 무언가 결심한 건지 눈을 뜨고 기사단장을 보고 있던 퍼블리는 제 등에 있던 짐을 기사단장에게 던졌다. 제법 묵직하게 날아오는 짐들에 기사단장이 철퇴를 휘둘러 저 멀리 날려 보내는 데 신경을 빼앗기자 퍼블리는 그 틈을 타 뒤돌아 품속의 유리병을 꼭 쥐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퍼블리는 바다가 얼마나 깊었는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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