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용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반응이 올라왔다. 이름을 먼저 꺼내며 반응한 자를 시작으로 모두 매우 반갑고 기쁜 얼굴로 용사라는 이름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엄청 재밌었던 마법사였지!”
“맞아! 우리랑 신나게 놀고 배도 신나게 돌리고!”
“신나는 용사였어!”
“맞아 신나는 용사!”
나오는 말들은 전부 호의적이었다. 주로 신나고 즐겁게 노는 마법사이자 친구였다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대해 집중해서 듣던 퍼블리가 곧이어 이어지는 말들에 눈을 크게 떴다.
“용사 옆에 늘 같이 있던 마법사도 있잖아!”
“맞아! 빨간 머리에 파란 눈! 엄청 딱딱하던 마법사!”
“술도 엄청 약했지!”
“술 마셨을 때가 신났던 마법사!”
빨간 머리에 파란 눈과 딱딱하다는 건 맞지만 그 뒤로 계속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다 술 마셨을 때를 얘기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술을 마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퍼블리는 잇달아 나오는 그들의 얘기를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술에 취한 마법사가 바다가 저를 부른다며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로 빠졌다는 대목에 상상하던 퍼블리가 웃음이 터지자 얘기하던 이들이 신나서 기억을 열심히 더듬기 시작했다. 흑기사는 아무 말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집중해서 얘기를 듣는 퍼블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브레이니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겨 그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별이 잔뜩 뜰 때까지 떠든 그들은 술기운에 잠겨 잠들 때까지 입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 달도 안 뜬 날이라서 별이 잔뜩 보이는구만. 이리와 봐! 별이 잔뜩 뜬 날의 바다는 정말 장관이거든!”
코를 골며 잠든 흑기사단들에 비해 아직 졸리지 않은 퍼블리가 책을 붙들고 흐름을 읽어보기 위해 눈에 힘을 준 채 마치 책을 뚫어버릴 듯이 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브레이니가 읽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어보였지만 망설이며 열 발짝 떨어져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을 지나가다가 보게 된 흑기사가 둘에게 그렇게 외치고는 갑판으로 갔다. 브레이니가 특유의 느린 말로 정말 예쁘다며 퍼블리가 같이 보러 가길 바라며 일어섰다. 그에 따라 일어선 퍼블리가 앞장서는 브레이니의 뒷모습을 보며 갑판으로 갔다.
“우와아!”
바다를 내려다보자 파도도 이 순간을 위해 잠들었는지 잔잔한 바다는 매우 커다란 거울이 되어 별이 잔뜩 떠있는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바로 아래에서부터 수평선까지 바다를 바라보던 퍼블리는 하늘과 바다의 구분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를 바로 앞에 둔 것만 같은 기분에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물론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는지 최대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 있었다.
“어때? 엄청 멋있고 아름답지? 메르시도 이렇게 별이 잔뜩 뜬 날은 우리 배에서 자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었어.”
그 말에 퍼블리가 바다를 보던 것도 멈추고 흑기사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공주님이랑 진짜 친하신가보네요.”
“친해 마땅하지! 메르시는 가족이니까!”
생각보다 그들의 인연은 책에 적힌 글과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말들에 비해 더 깊고 단단했으며 따뜻했다. 가족이라는 말에 가슴이 따끔해진 퍼블리는 애써 바다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술에 취해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마법사의 모습이 다시 상상돼서 웃음이 터지자 통증이 조금은 사라졌는지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그런 퍼블리를 보고 있던 흑기사가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용사에 대해서 물어본 거야?”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하지만 네가 물어보고 싶었던 건 패치였던 것 같은데.”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퍼블리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어..어떻게...?”
“모르고 싶어도 우리 애들이 빨간 머리 마법사 얘기 할 때마다 그렇게 표정이 밝아지는데 모를 수가 없지.”
그에 퍼블리가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혹시...잘 아는 사이세요?”
“잘 아는 사이라기 보단 어쩌다 만나면 반가워서 인사했던 사이지. 엄청 딱딱했던 양반이었는데 용사 챙기는 걸 보니 매정한 마법사는 아니란 걸 알았지. 그만큼 용사가 엄청났었기도 했고.”
흑기사는 용사와 함께 뛰어다니며 놀고 마녀왕국 축제에도 찾아가본 얘기도 꺼내기 시작했다. 메르시도 용사와 함께 노는 건 즐거웠고 용사는 만나는 마법사들은 물론 마녀들에게도 굉장히 사랑받던 마법사라는 걸 이야기를 통해 느낀 퍼블리는 용사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럼 혹시 용사가 어디 계신지 알고 계세요?”
“아니. 정화에 성공한 그 날 이후로 우린 이런 모습으로 깨어났고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어. 메르시 소식도 못 듣고 있지. 땅을 밟으려고 해도 홀리랑 프라이드가 우리가 땅 밟는 걸 질색하고 저기 죽치고 앉아있으니 말이야.”
퍼블리는 뭐라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이야기는 물론 모습도 한 번 본 적이 없어서 어떤 마녀일까 궁금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대부분의 마녀들이 공주라는 존재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알지 못해도 딱히 사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 탓일까,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주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던 퍼블리는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뭐, 일단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둘 모두를 찾는 것 같은데 왜 용사에 대해서만 물었을까 궁금했어. 아무리 봐도 네가 알고 싶은 마음이 더 기울어 있는 쪽은 패치니까 말이지.”
다시 돌아온 주제에 둘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퍼블리의 시선은 완전히 흑기사에게서 떨어져 바다로 향했지만 정작 보고 있는 건 바다가 아니었는지 시선이 흐렸다. 그렇게 바다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물소리가 세 번 정도 잔잔하게 흘러와 침묵을 채우고 있을 때 퍼블리가 입을 열었다.
“저희 학교에서 마법사 선생님이 왔었어요.”
동글동글한 인상의 순하고 어쩐지 대화하면 편해지는 마법사 선생님.
“저는 제 친구한테만 말한 비밀이 있었어요. 다른 마녀들한테 들키면 엄청 곤란해서 엄청 철저한 비밀이었고 저는 비밀이 제 곁에서 떠날까봐 두려웠는데 한편으론 너무 궁금했어요. 왜 그렇게 비밀로 하고 숨기는지,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퍼블리에게 있어선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는 비밀이었고 더 이상 물어보면 사라져버릴 비밀 같았다.
“마법사 선생님이라면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몰래 물어보러 갔어요. 이 책도 그 선생님이 알려준 책이에요. 그러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그 선생님도 비밀에 대해 알게 됐고 무언가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왔을 때 퍼블리는 혼자였다.
“사라졌어요. 계속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제가 제일 무서워했던 일이 벌어졌나 싶었어요. 제가 몰래 알아보려고 해서 저를 두고 가버린 건가 싶어서 너무 슬프고 무서워서...”
목이 메이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간에 올린 손에 힘을 준 퍼블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네 번 길게 오르락내리락 할 때 다시 말이 이어진다.
“마법사 선생님은 약속했던 기간이 끝나서 원래 자기가 있던 곳으로 갔고 저는 그 선생님을 찾으러 이렇게 나왔어요. 그런데 찾아가보니까 그런 마법사는 없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눈앞이 깜깜했고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어디로 가야하나 싶었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선생님이 아빠를 데려갔나.
“그러다가 무작정 모르는 마법사를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 선생님이 비밀과 함께 모습을 감춘 건가 싶었어요.”
퍼블리는 다시 흑기사를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했다.
“그래서 완전히 말할 순 없어요. 이렇게 대놓고 경계하고 자세히 말 안 하는 건 죄송해요.”
“그런 것치곤 굉장히 투명한데! 그리고 남들한테 말 못할 비밀은 누구나 마땅하게 있으니까 죄송하다고 할 필욘 없지! 그리고 말이야”
무언가 더 말하려던 흑기사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브레이니에 너무 멋지다고 바다에 뛰어들진 말라는 말을 남기며 브레이니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 둘이 들어가서 보이지 않게 됐을 때 퍼블리는 다시 바다를 내려다봤다. 사실 지금 퍼블리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난타가 아니었다. 꿈을 꾸는 동안 무의식 속에서 지금 아난타에 대해 많은 감정을 차지하는 충격과 슬픔 아래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눈치 챘고 물속의 공기방울처럼 단숨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를 제대로 마주하고 느낀 퍼블리는 다시 꿈을 떠올리며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선생님이 아빠를 데려간 거예요?”
그럼 아빠는 저를 버리고 떠난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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