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리는 멍한 머리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평소에 자던 시간보다 훨씬 더 늦게 누웠지만 가슴속에 가득 찬 심란함은 잠을 방해하기까지 이르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눈만 감은 채로 밤을 지새운 퍼블리는 눈꺼풀 위로 들어오는 햇빛에 한숨을 쉬었고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들에 결국 일어났다. 문을 여니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던 흑기사단들이 기운 좋게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몇몇은 이리저리 갑판을 밟아대는 발들 사이에서 여전히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뛰어다니던 자들은 난간 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저마다 무언가의 기대감이 눈에 가득 담겼다. 퍼블리가 그들을 바라보며 가까이 가서 뭘하는지 물어볼까 싶은 순간 요란하게 떠드는 말소리들 사이로 푸드득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다아아아!!”
어서와, 어서와!”

, ! 나 먼저 볼래!!”
작은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그들 머리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와 손들이 비둘기를 향했고 불쑥불쑥 올라오는 손들에 비둘기는 한동안 빙글빙글 돌고 있다가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난간으로 날아갔지만 그대로 우르르 따라오는 바람에 의미가 없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비둘기의 머리가 퍼블리를 향한 다음에 멈추고는 그대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에 퍼블리는 익숙하게 손을 뻗어 비둘기가 앉기 좋게 검지를 조금 위로 올렸고 비둘기는 사뿐히 퍼블리의 손가락을 그러쥐며 올라섰다. 비둘기 다리에는 회색 종이가 묶여있었다.

소식 비둘기?”
소식! 소식!”
오늘은 비둘기다 비둘기!”
우르르 퍼블리 쪽으로 몰려든 그들은 이번엔 섣불리 손을 뻗진 않았다. 어쩐지 제가 종이를 풀어야할 것 같은 상황에 조심스럽게 종이를 잡아당기자 스르륵 부드럽게 풀리자마자 비둘기가 다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떠나는 비둘기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던 그들은 다시 퍼블리의 손에 들린 회색 종이로 시선을 집중했다.

오늘은 비둘기야?”

언제 왔는지 흑기사가 걸어오며 회색 종이를 보고 말했다. 이 회색 종이는 소식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그 날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며 보게 된 큰일이나 다른 소소한 일들이 담겨있는 종이였다. 어딘가의 숲에 불이 붙었다던지 아니면 어떤 마녀나 마법사가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냈다는 게 가장 큰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다는 갈매기들이 주로 편지를 나르지만 가끔가다가 비둘기들도 오곤 하지. 덕분에 우리도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 거야.”

, 그럼 책도...”

이렇게 소식을 전달하는 비둘기가 있다면 물건을 전달하는 비둘기도 있었다. 브레이니는 물건을 전달하는 비둘기를 통해 제가 쓴 책의 사본을 비둘기에게 맡기고 마녀왕국에서 책으로 낼 수 있게 됐다. 어찌됐든 복사를 할 수 있으면 책들을 만들 수 있었으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여기 소식 받아라!”
계속 배에서만 생활하는 그들에겐 땅 위의 얘기들은 큰 즐거움이었다. 회색 종이가 펼쳐지자 비둘기들이 눈에 담은 풍경들이 두둥실 떠올라 그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함께 그 풍경들을 보고 있는 퍼블리를 보고 있던 흑기사가 물었다.

그보다 넌 어떻게 돌아갈 거야?”
“...?”
한 박자 늦게 반응한 퍼블리가 눈을 깜빡이며 흑기사를 바라본다.

이 배엔 따로 조각배가 없어.”
저번에 타고 땅 밟으려다가 망가졌지!”
걔네가 싹 다 부숴버렸어!”

우리야 데려다주고 싶긴 하지만 제대로 배를 댈 만한 데는 홀리 녀석이 세운 도시밖에 없는데 우리가 가까이만 가도 마법을 날려대니 원...”

사실 퍼블리는 다시 땅으로 가야한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퍼블리는 갑자기 닥쳐온 막막한 현실에 한숨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애초에 저가 타고 갈만한 작은 배가 있다 해도 애초에 배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도 몰랐다. 바다에 뛰어들어 어떻게든 헤엄쳐서 간다는 건 제 목숨으로 배운 바가 있으니 방법으로 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보라색의 물결이 흐리게 반짝이고 사라졌다. 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 퍼블리는 혹시나 바다에 빠졌을 때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저 넓은 바다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온전히 제 손에 잡히는 느낌에 안도했다.

! 이동판이잖아?”
그거 막막 슝슝! 이동하는 그거!”
감옥에 있을 때 만난 왕궁 마녀가 주고 간 이동 마법 물품. 비록 탈출은 유리병의 몫이었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제 모습을 뽐내니 안도를 넘어서 매우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름 모르는 왕궁 마녀가 정말 고마웠다.

이건 바뀐 게 없네.”

우리 이거 써서 메르시네 놀러갔었지!”
빵파티도 하고 말이야!”

공주의 집이라면 왕궁 밖에 더 있겠는가. 왕궁으로 놀러가고 왕궁에서 빵파티도 했다는 말들에 퍼블리는 아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물론이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거도 왕궁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그걸 다 아셔요?”
이 판 자체가 이동 마법이 걸린 거고 도착할 장소는 그 위에 쓰는 거라서 다른 데 가고 싶으면 지우고 새로 쓰는 방식이야. 물론 이 판이 이동 가능한 목록에 있는 곳이어야 하지만.”
판 위에 적힌 그림처럼 보이는 글들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흑기사의 말에 신기한 눈으로 살펴보던 퍼블리가 물어본다.

그럼 여러분은 그 도착할 장소를 뭐라고 썼어요?”
.”

이동판을 쓸어보던 흑기사가 짧게 한 단어를 툭 내놓았다. 순간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집이라고 썼지.”
판 위를 쓸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짧게 그려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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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짧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에 아난타가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이다가 뒤에 나온 대답에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녀석이 꽤나 비싼 값에 당신 손을 빌렸나보군. 아니면...”

창문에 기대면서 컵을 툭툭 두드리던 마법사가 한마디 덧붙인다.

값진 것을 넘겨줬거나.”
마법사의 말이 끝난 뒤에도 아난타는 그저 미소만 머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한 모금 물을 넘기고는 다시 질문을 꺼낸다.

퍼블리가 당신에게 무엇을 물어봤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알고 계셨나요?”
그 애가 왕국을 나와서 신성지대로 갈만한 이유가 당신을 찾아가는 거 외엔 없으니까.”
마법사의 말들을 듣고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늘을 조금 머금은 구름 같은 학생이 떠오른다. 실수로 사고를 일으킬 뻔한 점심시간 때부터 보게 됐고 한 번 눈에 들어온 이후로도 굉장히 눈에 많이 들어오고 기억에 깊이 박힌 학생이었다. 굉장히 밝고 적극적인데다 상당한 호감을 주는 유형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는 게 주로 몸으로 많이 움직일 때인지 신체를 단련하는 과목을 담당하는 선생들마다 칭찬 일색이었다. 여기까지 봤을 땐 확실히 다른 학생들보다 눈에 많이 들어올 학생이구나라고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널리 있는 학생들에 비해 적을 뿐이지 반마다 한두 명씩 있는 유형이었기에 학교에 있을 때만 익숙하지 기억에 깊이 박힐 정도는 아니었다. 퍼블리가 아난타의 기억에 깊이 박히게 된 이유는 그런 모습들과는 별개로 자신에게 무언가에 대해 물어볼 때 굉장히 머뭇거리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 무언가는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에 관한 질문이었지만 그 마법사가 누군지 잘 알게 되었을 때 퍼블리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상반된 모습과 마법사에 관한 질문, 친구와 하던 대화를 듣고 도서번호를 건네주게 된 이후로 아난타는 퍼블리를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됐다. 퍼블리는 다른 학생들과 여느 반에 있는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지만 곁에 있는 건 아니카 뿐이었다. 다른 학생들과의 교류가 많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고립되는 거냐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순하게 누구를 더 친하게 여기고 누구에게 더 기대고 있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둘이 다른 학생들보다 서로가 더 친한 이유는 그저 둘만의 이야기니 거기까지만 알 수 있었고 그 이상으로 더 살펴볼 필요는 없었다. 다만 퍼블리가 물어봤던 마법사가 정화 때의 마법사였으니 아니카도 알아도 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퍼블리와 아니카가 떨어지는 때가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마주칠 때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고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마무리됐던 축제날...

퍼블리 학생이 무엇을 물어봤는지 말할 순 있지만...직접 듣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법사에 대해 물어보던 퍼블리와 퍼블리가 물어보던 걸 묻는 마법사. 이 문제에 대한 해결법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당사자인 둘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예전에 직접 만났을 때가 숲으로 들어가기 일주일 전쯤이었죠? 용사군은 우리를 보자마자 처음 보는 마법사들이라면서 달려왔었고 우리 어깨에 뭉친 힘을 좀 빼줬지요. 용사군을 데리러온 당신과도 몇 번 얼굴을 마주치긴 했었지만 바로 앞에 커다란 전쟁터를 두고 있었으니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죠. 그래서 이름도 몰랐었지요.”
머뭇거리면서도 패치라는 마법사를 아느냐고 물어봤던 굉장히 절박한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이름은 몰랐지만 얼굴은 모를 수가 없었던 마법사들이었다. 많은 마법사들이 있었지만 그들만큼 잊기 힘든 얼굴도 없을 터였다. 아난타는 미안함이 담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참에 제대로 통성명을 하죠. 전 아난타예요.”

패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여유는 가지는 게 좋아요.”
이미 당신을 알고 있고 당신도 나를 알고 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게다가 지금은 여유를 가질 상황은 아니니 말일세.”

그에 아난타는 창문에 기대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그 때 가지지 못했던 여유가 미래에서 엄청나게 꼬여올 줄은 몰랐지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아난타는 다시 창문에서 몸을 떼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에 대해 좀 더 알아둘 필요가 있어요. 제가 한 가지 부탁을 할 생각이거든요. 저에 대해 잘 아는 자만 할 수 있는 부탁이에요.”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아난타는 개의치 않고 손가락으로 창문을 여러 번 툭툭 두드리며 잔잔하게 부탁을 꺼낸다.

잠꾸러기들을 깨워달라는 부탁이에요.”
그에 마법사가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날카로운 웃음을 지었다.

나쁘지 않은 부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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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이지...누가 보호자를 넘어서 아빠 엄마 사이 아니랄까봐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점을 닮아버리면 어떡합니까.”
속으로도 많이 앓는 듯한 말과 그 뒤를 잇는 한숨이 땅을 꺼뜨릴 만큼 매우 무겁게 내려앉는다. 늘 짓던 웃음까지 내려놓으며 눈썹을 찌푸리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눈썹 바로 밑에서부터 얼굴을 쓸어내린다. 바로 방금 전 들어온 보고에 치트는 듣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모드양? 다시 말해주겠어요?”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니까...그 때 상황을 자세히...”
철퇴의 프라이드한테 짐을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상세한 설명치곤 지나치게 간결했지만 솔직히 이 말 외에는 딱히 나올 말도 없었기 때문에 모드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보고를 듣는 치트가 직접 봤어도,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봐도 기사단장에게 짐을 던지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퍼블리를 봤을 터였다. 퍼블리는 바다가 얼마나 깊고 위험한지 모르고 치트와 모드는 그걸 모를 테니 둘의 눈엔 그저 자살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상황이었고 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대로 바다에 맨 몸으로 뛰어들었는지 당사자에게 묻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문제였다. 사실 치트는 딱히 퍼블리를 건들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에 왕국에서 나가는 걸 보고 모드를 시켜 왕국으로 보낸 후 미성년자 보호 마법을 걸고 어느 정도 자신의 상황이 정리가 되고 여유가 생기는 때가 마침 퍼블리가 성인이 되는 때랑 맞게 됐으니 왕국에서 얌전히 살게 한 후 데려올 생각이었다. 처음에 감옥에 갇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도 당황했었고 상황을 듣고 과연 신성지대라며 넘길 수 있었지만 바다에 스스로 빠진 건 과연이라고 감탄하고 넘길만한 게 못 됐다. 무엇보다

“...우리 패치한테 뭐라 말해야 함까...”
마법사가 듣는다면 단순히 당황이나 어이없다는 반응에서 그칠 리가 없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더 심각해질 미래가 바로 코앞에 와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본인의 죽음까지 불사하며 난리를 피울 게 뻔했다. 한숨이 끊임없이 나올 기세라 입을 꾹 다문 치트는 모드에게 바다 주위를 계속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죽었다고 단정하고 싶진 않았으니 그저 퍼블리가 운 좋게 뭍으로 밀려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쪽의 깊은 바다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퍼블리는 지금 흑기사단의 배에 안전하게 있었지만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아아...지금 당장 보고 싶지만 지금 보게 되면 저는 표정관리도 못할 검다...당신은 분명히 퍼블리에 대해 물어볼 테고, 아니면 그 때 못 던졌던 의자 먼저 던질 수도 있겠네요.”

감시하는 영상구를 달고 싶었지만 지금 마법사를 가둬두고 있는 집은 함부로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그만큼 정교하게 만든 집이자 감옥이었고 다시는 할 게 못 될 거였다. 그 집 외엔 마법사를 가둘 수 있는 건 없고 마법사가 아니고선 누구도 그 집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치트가 그 집에 마법사를 두고선 오래 머물지 않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대신 자주 찾아가는 편이었지만 오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물론 그 집을 나오게 하는 즉시 모드가 곁에 없는 치트는 죽은 목숨이 될 게 눈에 훤했다.

왜 또 한숨을 찍찍 뱉냐?”
한숨을 찍찍 뱉는 건 또 뭡니까? 일은 제대로 하고 온 검까? 아니 선생님 일은 제대로 하고 왔겠죠. 퍼블리가 신성지대로 갔던 건 당신을 찾으러 간 게 확실할 테니까. 참 수업을 잘 가르쳤나 봄다?”
그에 아난타가 와락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본다.

거 시X 내가 기억 못하는 거 잡고 시비터냐? 애초에 네놈 새끼가 날 재우고 보낸 거잖냐? 그렇게 따질 거면 마침 왕국에서 살고 있던 네 충실한 부하새끼한테 선생질 시켰어야지. 난 처음부터 싫다고 했는데 다짜고짜 그 XX같던 안경 씌운 새끼가...”
이대로 앞에 뒀다간 계속해서 욕을 뱉을 게 뻔한 아난타를 밖으로 내쫓은 치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주가 괜히 저주가 아니라고 증명하는지 원래의 인격과는 전혀 딴판인 저 인격은 내놓는 말 전부 천박한 욕들뿐이니 대화를 나누는 게 손해였다. 하지만 일은 정말 손색없을 정도로 잘하는 편이니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은 치트는 원래의 아난타와 대화했던 때를 떠올렸다. 쨍하게 붉었던 머리카락이 검게 변하고 누구 하나 심심해서 물어뜯을 것 같던 눈이 상대를 깊이 꿰뚫고 배려하는 눈으로 변했을 땐 완전히 다른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눴을 때 성격은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 같아선 원래 모습으로 두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난타가 지닌 힘과 경험은 물론이고 통찰력의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그나마 저주인 쪽은 파악하고 파고들어 공격하려고 하지만 단순해서 알기 쉬웠다. 거래를 했을 때 고맙다고 하며 저를 꿰뚫어 보던 눈을 떠올리며 치트는 웃음을 머금은 채 턱을 괴고 수정구를 툭툭 치며 모드의 연락을 기다렸다.

 

X같은 새끼는 아주 나를 지 봉으로 알아!!”
다채롭게 쏟아지는 욕들에 지나가던 자들은 안 봐도 누군지 안다는 얼굴로 욕이 들려오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지금 곁에 얼쩡거렸다가 걸리면 욕을 집중적으로 받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걸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여하간 저 얼굴 미끈한 새끼는 영 마음에 안 들어!!!”

왜 그렇게 짜증이 났는지는 거의 대부분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하던 일이 꼬였을 때고 다른 하나는 수장인 치트를 봤을 때였다. 후자는 쌍방으로 싫어하는 상황이지만 치트는 금방 감정을 끊어내고 제 일에 집중했고 아난타는 계속 욕하면서 일을 하는 게 차이였다. 그렇게 제 주위를 피해 주변에 있는 자가 점점 없어졌을 때 쯤 아난타의 욕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쯤 그는 걷던 발걸음에 속도를 더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뛰기 시작했다. 꽤나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에 지나가던 마법사 중 하나가 붙잡아서 어디 그렇게 급하게 가냐고 물을 법도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마음껏 뛸 수 있었다. 그가 가고 있는 곳 자체가 숨겨진 데다보니 가는 길목에도 당연하게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아난타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연다.

미안합니다. 늦었죠?”
어느새 쨍했던 머리카락도 검게 변해 있었다. 도착한 이곳엔 늘 둘만 있었다. 창문 너머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주를 누르다니 대단하군.”
그동안은 잠들어 있었지만 저주로부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저는 저보다 어리고 경험도 적으니까요 그리고...”
말하면서 웃는 지금의 아난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했다.

저는 비싼 몸이니까요.”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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