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어 올린 노란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 언제나 사라지지 않고 늘 자리 잡은 웃는 얼굴. 속내를 알기 전에 막아버리다 못해 찔러 들어오는 검은 눈동자. 그 익숙함에 퍼블리는 한 발짝 물러나니 더 잘 보이는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분명 편지에는 여기 도착하자마자 나 보러오겠다고 마중부터 나오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니 마중부터 나오라고 하진 않았...”
다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퍼블리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어찌됐건 간에 얘기는 했어도 거의 통보하고 떠난 거나 다름없었으니 한동안 못 본다는 데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준비를 위한 배려도 없었고 퍼블리가 없는 동안 학교 측에서 퍼블리의 행방을 물어볼 자는 아니카 밖에 없었으니 그동안의 부담도 있었을 게 분명했다. 다만 아니카는 놀라긴 했지만 한동안 떠난다는 데에 크게 충격을 먹고 있지도 않았고 당연히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퍼블리는 그런 아니카의 속을 모르고 있었다. 의외로 학교 측에서 퍼블리의 행방을 묻지 않았는데 이는 위에서 손을 쓴 보라색 머리 마녀 덕분이었지만 둘은 당연하게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행 갔다 온 보람은 있었어?”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퍼블리의 모습에 아니카는 이쯤에서 장난을 접어두기로 했는지 물러났다. 그리고 나온 말에 퍼블리는 다른 의미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아 들키지 않은 표정이지만 뭐라 얘기해야할지 막막했다. 아난타가 추천해줘서 사고 갖고 간 책이 금서취급을 받고 있었고 감옥에 갇히고 탈옥한 후에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얘기를 목표에 대한 소득은 둘째 치고 어떻게 여행담처럼 얘기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들지 않는 퍼블리의 모습에 아니카가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퍼블리를 빤히 쳐다본다.

거짓말해도 너는 다 티가 나요 퍼블리 어린이~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니 잠깐! 그렇게만 말하면 내가 꼭 지기도 전에 집게벌레 불러오는 꽃봉오리 같잖아!!”
거의 그렇더만 뭘!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잔소리도 부족하다 요 집게벌레도 필요 없이 바다로 뛰어들 꽃봉오리 녀석아!!”
둘이 서로를 향해 왁왁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날아 나가던 비둘기들도 다시 돌아와 주변을 둘러싸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니카도 그 옆에서 비둘기들과 함께 둘이 뭐라 소리치는 걸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이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소리치다가 숨이 차 멈추고 있을 때 다가온 아니카는 언제나의 웃는 얼굴로 퍼블리의 얼굴을 붙잡아 마주했다.

그래서 갔는데 감옥에 갇히고~ 바다에서 죽을 뻔하고~ 정작 아난타 선생님은 거기 마법사 아니었고~?”
그제야 아니카가 얌전히 기다려 전말들을 다 토해낼 때까지 듣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퍼블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려 마주 오는 시선을 피했다. 그에 늘 웃던 아니카는 웃음을 거두고 한숨을 내쉬었고 그에 움찔 어깨를 떤 퍼블리가 힐끔 눈을 돌리며 눈치를 봤다.

안 혼내~ 애초에 어떻게 혼내야할지도 모르겠네. 혼낸다고 해서 네가 죽을 뻔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다시 돌아온 웃음엔 어딘가 한기가 서려있는 것만 같았다. 그에 퍼블리는 차라리 혼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저 호호 웃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할 게 뭐가 있니~ 다짜고짜 금서라고 외쳐대고는 감옥으로 끌고 간 거기 마법사들 잘못이지~ 아니 금서 추천한 마법사도 잘못이 있으려나?”

한 번 서리기 시작한 한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부드러운 어투 속에서도 느껴지는 날카로움에 소름이 돋은 퍼블리가 팔을 쓸어내렸다.

일단 가서 꽤나 깊고 찝찝한 걸 보고 느끼게 됐는데 사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뭐라도 하고 싶긴 한데 상대가 너무 큰 느낌이야.”

너무 큰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도 큰 것 같은데?”
그래서 너무 막연해. 그리고 어쩌면...”
뒷말을 흐리며 조금 위를 바라보자 품속에 브레이니가 건넸던 책과 작년의 축제가 겹치면서 흘러갔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잘라낸 퍼블리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툭툭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이렇게 온 거야?”

나도 몰랐지~ 난 늘 그랬듯이 편지 전하러 온 거야. 그런데 우리 큰비둘기씨는 엄청 바쁜지 매일매일 찾아가도 어쩌다 한 번 만날 수 있을 정도라서 열심히 여기 왔는데 어머나 오늘 이후로 더 이상 편지 보낼 일이 없어졌네?”
내가 엄청나게 고급 배달부라고! 아주 중요한 거 아닌 이상 직접 움직일 일이 없는데 너희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편지 배달부로 쓰고 있던 거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배달하는 중간에서야 깨닫고 아이고 이미 불길을 건넜구나 싶은 지경이다 요 무서운 녀석들아!”
이번에 가만히 있던 전서구가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소리쳤다. 물론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익숙한 상황과 빠르게 다가오는 체념에 전서구는 아주 그냥 작정하고 대를 잇는다면서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아니카에게 그동안의 일을 듣는 퍼블리를 보며 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거지만 퍼블리는 확실히 특이했다. 마녀인 아니카가 바로 옆에 있으니 더 세세하게 느낄 정도였다. 여느 마녀와 다르다는 건 아빠가 누구인지 보면 마법사를 잘 알고 있고 몰라도 대화를 나눠보면 누구나 그럴 만 하네라고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단순히 그런 식으로 단정 지을 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마녀인데 마법사같은 아이. 하지만 그렇다고 마녀처럼 느껴지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 점 또한 아빠가 마법사니 당연히 마법사 같은 행동이나 말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그랬다면 마녀라는 장미꽃 위에 호숫물이 묻어있다고 표현했겠지만 지금 보는 퍼블리를 뭐라 쉽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굳이 말하자면 퍼블리라는 틀에다가 마법사와 마녀를 모두 집어넣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전서구의 눈빛을 느꼈는지 퍼블리가 돌아봤고 아니카도 전서구를 바라봤다.

그렇게 열렬하게 안 봐도 금방 갈 거예요~”

아니 뭐...그런 의미로 본 건 아니지만...”

편지 보낼 일 있으면 보러 올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나 말고 저기 비둘기들 써!!”
호호 웃으며 전서구의 속을 뒤집어 논 아니카가 퍼블리의 손을 잡고 바로 뒤에 구경하기 위해 앉아있던 비둘기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딛으며 유유히 빠져나왔다. 손이 잡힌 채 뒤따라가던 퍼블리도 비둘기들에게서 빠져나오자 아니카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긴? 너희 집 뒷마당으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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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날개야...삭신이야...전서구야...죽어나가는구나...”

고생했다며 날개로 제 스스로를 토닥거리는 전서구 등에서 얌전히 내려온 퍼블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비둘기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열린 천장 밖으로 나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그만큼의 다른 비둘기들이 동시에 들어오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들어와서 날개를 고르던 비둘기들이 숨을 몰아쉬며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자신을 보듬는 전서구를 보고 구루룩 울기 시작했다. 그에 전서구가 아이고 이놈들이 와서 많이 힘들었냐며 위로의 말은 건네주지 못할망정 놀리고나 있냐고 하는 걸 보면 아마 퍼블리를 태우고 온 거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는 등에 누군가를 태우지 않겠다는 맹세를 태운 당사자들 말고도 비둘기들 앞에서 한 적이 있는지 비둘기들이 계속해서 구루룩 울어댔고 그럴 때마다 서러워서 못 살겠다며 벌러덩 드러누우며 날개를 퍼덕이는 전서구의 모습에 퍼블리는 그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옆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그보다 넌 이제 어쩔 거냐?”
? ?”
뭐긴? 누구 찾으러 거기 신성지대로 간 것 같은데 보아하니 만나지도 못하고 바다에서 자연 일체화 직전까지 갔다가 어쩌다가 걔네한테 구해진 것 같던데. 그럼 목적 달성은 못한 거잖아?”

물론 그렇다고 다시 신성지대로 간다고 하면 이번에야말로 저도 가만있지 않고 날 뛸 거라는 기세가 눈에서 눈으로 보일 정도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에 퍼블리는 다시 한 번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다른 데로 굴리기만 할 뿐 제대로 답하진 않았다.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전서구는 지금까지 열심히 토닥이던 날개를 늘어뜨리며 벌렁 드러누웠다.

일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피곤해서야 원...”
날개 주물러 줄까?”
됐다 임마!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말고!”
쉬이 넘어가지 않고 대답을 재촉하는 말에 퍼블리는 그대로 전서구 옆에 쭈그려 앉아 팔꿈치를 다른 손으로 받치며 턱을 괴고 구룩구룩 울면서 날아다니는 비둘기들 너머를 멍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사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따지자면 퍼블리는 처음과 다를 게 없었다. 아난타를 만나지도 못했고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빠의 행방을 알아낸 게 아니라 그저 있었으면 물어보고 싶었을 과거에 대한 이야기, 어떤 마법사였다는 다른 눈으로 본 모습이었다. 아빠가 어딨는지 아니면 어디로 갈만한 데가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한 채 왕국으로 돌아왔다. 왕국에서 퍼블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봄의 초반을 날려 보낸 학교를 다니면서 지나가버린, 축제가 끝난 후의 여름 끝 무렵과 가을, 새해가 오기 전의 겨울 때처럼 얌전히 집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마법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무언가 꽉 잡아 누르는 답답한 느낌이 목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만약 감옥에 갇혀있을 때 왕궁 마녀의 도움으로 탈출했었다면 이 답답함은 계속 됐을 터였다.

일단...모르겠어. 그냥 막막해 근데 뭐라고 해야하나...”

생각만큼 답답하진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답답함을 밀어내는 힘이 생긴 것 같았다. 다만 깨달았음에도 너무나 갑작스럽고 막연해서 현실감이 들지 않는 상태였다.

있지...내가 뭔가 할 수 있을까?”
잔잔한 호수 앞에서 돌멩이를 하나 들고 멈춰있는 어린아이. 이것만큼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잔잔한 호수는 멀리서 보면 그저 푸르면서 깨끗하고 조용할 뿐인데 직접 가까이서 보니 그 속은 까맣고 아득하며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한데도 거기에 물벼락을 맞았는데도 무엇일지 몰랐다. 그저 막연했다. 알고는 있는데 너무나 깊고 크고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런 호수 앞에서 돌멩이를 들고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어린아이. 던진 돌멩이가 그대로 저 호수 아래에서 가라앉을지 아니면 그 아래에서 얌전히 움직이고 있던 막연한 것들이 돌멩이를 맞고 호수 밖으로 뛰쳐나올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건 던져봐야 알 수 있는데 결과가 어떻든 아이는 받아들이기 힘들 게 뻔했다. 그저 가라앉을 뿐이라면 그나마 확실히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마저도 사라지게 되는 거였고 뛰쳐나온다면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제가 그것들이나 혹은 뛰쳐나올 때 튀는 물벼락에 전보다 더 세게 휩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이 마주하고 있을 뿐인 아이가 그런 결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넌 참 묘하다고 해야 하나...정말...뭐라 해야 하나? 마녀? 마법사? 이 둘을 통틀어서 말하는 단어는 왜 아직 없는 거야? 아무튼 지금 널 볼 때 넌 정말 마녀와 마법사 같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어.”

퍼블리는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마법사로 알아보는 왕국 밖의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덧붙여진 말을 보면 전서구의 의견은 다른 걸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뭐냐...어쨌든 둘 다 단순히 냉정하다 단순무식하다 이런 식으로 정의할 순 없고 복잡하잖냐? 알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단순하게 보는 게 편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게 누구나의 심리거든. 어쨌든 처음 봤을 때 너는...완전 뒷일 생각 안 하고 돌진하는? 그런 꼬맹인 줄 알았어.”
물론 실제로도 그러는 덕에 덕분에 전용 편지 배달 역할을 맡게 됐다는 불평도 꺼내며 툴툴거렸다.

따지자면...그래! 용사양반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패치 그 양반보다는 무턱대고 가는 부분이 용사양반을 닮았으니 자식이어도 용사양반 자식이 아닌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전혀 딴판이고 닮았다는 생각 자체가 날아가버렸어...그 양반은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말 자체도 안 꺼내고 그런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양반이었거든.”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아있을 것만 같은 마법사였다. 물론 마법사나 마녀나 한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순 없지만 가장 크게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용사는 변한다기 보단 옆에서 가르치면 그저 행동의 선택지가 늘어나는 느낌이었지 이미지 자체가 변하진 않았다. 물론 퍼블리도 이미지 자체가 변했다고 할 순 없었지만 용사를 닮았다라고 길게 뿌리 내린 걸 한순간에, 단숨에 뽑아낸 기분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마법사와 마녀는 당연하게도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없고 성격 자체도 매우 복잡했다. 하지만 어른이 됐을 때 그 다양한 것들까지 통틀어 하나로 굳어지기 마련이었다. 더 이상 자랄 게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전서구가 봐왔던 마법사와 마녀는 다양했지만 자세히 알기도 전에 제 일을 하러 갔었고 자세히 알게 된 자들은 이미 굳어있었다. 굳어진 면이 깨져서 의외로 몰랐던 부분이 튀어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건 다른 입을 통해 들은 거니 아, 그래? 수준으로 넘어갈 정도였다. 사실 그 자는 꽃보다 나무를 더 좋아한다 이런 수준의 변화였다. 전서구는 고개를 조금 들어 열심히 날아다니는 비둘기들을 바라봤다.

“...그래. 뭔지 알겠네! 정확히 말하자면 넌 지금 성장하고 있는 거야.”

성장?”
맨 처음 나를 만났을 때의 너를 떠올려봐. 내가 이렇게 똑같이 앞으로 어쩔 거냐고 묻는다면 무턱대고 신성지대 가자면서 날 올라타려고 했던 너는 무슨 말을 했을까?”
그 말에 퍼블리는 전서구를 처음 찾아가고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마 그 때의 자신이었다면

“...다시 올라타서 모든 곳을 둘러보고 오자고 하지 않았을까요?”
흐응~ 그래?”
포기할 수 없다면서 무턱대고 찾으러 다니자고 떼를 썼을지도 몰라요.”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대답하던 퍼블리는 옆에서 말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대로 멈추고는 전서구를 바라봤다. 전서구는 퍼블리를 보지 않고 퍼블리 옆을 보고 있었는데 퍼블리도 그에 따라 시선을 돌리니

그래서 우리 근육이는 여기 도착하자마자 나 보러 안 오고 여기서 키 재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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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하면 바다에 빠질 생각을 한 거야? 심지어 모래사장 있는 바닷가도 아니고 항구 역할 하는 덴데 장난 아니게 깊을 거 눈으로 봐도 알 거 아냐?!”
바로 앞에서 에워싸는 건 물론이고 철퇴를 들고 위협을 하는데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제대로 볼 새도 없었단 말야...”
그래서 바로 뒤에 바다로 뛰어들고? 아이고~ 아무리 책으로만 접했다고 하지만 바다가 을매나 위험한데 바로 뛰어들어!! 이제 바다 보러오는 마녀들 마다 다 뛰어들겠네!!”
그 뒤로 전서구는 장미부터 그러더니 왕국에 죄다 묶어놓으려는 집착이 무섭다며 풀어줘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바람과 잔소리에 고개를 깃털 사이로 묻어두던 퍼블리가 묶어놓으려는 집착이라는 말에 고개를 조금 들었다.

묶어놓으려는 집착이라니?”
아기들은 전부 장미에서 태어나자마자 성인이 되기 전까진 보호자의 동반이나 허락이 없으면 왕국 밖으로 못 나가는 마법을 받게 되니까! 그러고 보니 너 그 마법 어떻게 됐어?! 너 아직 성인 안 됐잖아!!”
난 그 마법도 오늘 처음 알았어! 일단 그건 아빠가 알고 있을 테니 아빠를 찾아서 물어보면 될 일이니까 왕국에서 묶어놓으려는 집착에 대해서 말해줘!”
전서구의 화려한 입담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흥미진진한 얘기처럼 화려하게 들려왔지만 내용은 화려하다기 보단 익살스러운 말투로 들어도 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실 마녀왕국은 지금처럼 굉장히 큰 영역을 차지하지도 않았고 도시들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었다는 건 예상범위였다. 뭐든 간에 시작부터 크게 자리 잡을 순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점점 시간과 그 안에서의 행동과 흐름이 크기를 불려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의 왕국은 꽤나 기묘한 형태였다.

물론 새로 들어오는 건 기존에 있던 것과 완전히 딴판이지만 그런 것들이 찰흙처럼 뭉치고 뭉쳐서 다양한 색으로 섞여야하는데 지금 왕국은 완전 따로따로 논다 이거지.”
따로따로 논다면...?”

제각각의 조각 케이크를 한데 나란히 모아놓는다고 생각해봐. 그게 지금 왕국의 모습이야. 일단 네가 실감 못하는 이유는...너 왕국 내의 다른 도시로 가본 적 없지?”
전서구의 말대로 퍼블리는 제가 살고 있던 데를 제외한 다른 도시로 가본 적이 없었다. 마법사는 다른 도시는 물론 제가 살고 있던 데에서도 돌아다니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다른 데로 가자고 했어도 퍼블리 본인 스스로가 거부했을 테였다. 왕국 내에서 살고 있던 곳에서 아니카를 다시 만난 이후로 퍼블리는 다른 도시를 방문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 양반 장난 아니게 빡빡하고 철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은둔생활 한 번 참 대단하네! 설마 마녀왕국에서 살고 있는 것도 모자라 다른 데 가볼 생각도 안 하다니! 어쨌든 말야...지금 왕국은 그렇게 제각각인 조각 케이크들을 모아놓고 학교와 왕궁 마녀를 통해 장미정원으로 가서 아이를 받거나 왕궁의 도움이 필요한 기타등등의 일로 실처럼 꿰어놓은 후에 마녀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천을 덮어놓은 상태야.”
마녀라고 해도 그들이 사는 방식은 꽤나 차이가 있었다. 비슷한 자들을 한 데 모아 도시라는 구역을 만들고 그 도시를 또 모아 기존의 왕국보다 훨씬 더 큰 왕국을 만들었다.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욕구 혹은 편리함을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누구보다 먼저 전부 차지한 후 꼭 쥔 채 왕궁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주면서 그들이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떠나지 못한 이들 위로 느끼지 못할 얇고 거대한 천을 씌웠다. 그 천의 이름은 전서구가 말했듯이 마녀왕국이다.

그게 먹이 있을 밭처럼 누르스름한 거나 녹색 나무 사이의 빨간 것들이나 비가 오나 안 오나 하늘이 시커멓게 회색인지 아니면 파란지에나 관심 있을 우리 비둘기들 눈에도 보일 정도면 꽤나 집요하고 심각하다 이거지.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마녀들은 모를 정도면 참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이 말 만큼 적당한 게 없어. 시대 흐름을 잘 타다 못해 제 집의 물주전자처럼 쓰고 있다 이거야.”

시대 흐름이라면...”
정화 때 말이야.”
정말이지 마법인데 더 마법 같은 단어다. 정치, 정화. 이 둘은 지금 뗄 레야 도저히 뗄 수가 없었다. 정화 이후부터 지금의 정치가 시작되었으니 당연하지만 아무리 커다란 사건이자 위대한 일이라 해도 그저 책에 적힌 글과 가르쳐주는 말로는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제대로 느낀다면 그건 바로 당사자들일 텐데 그들의 모든 삶을 일일이 적어놓을 순 없으니 그마저도 간결하게 줄여져 책과 목소리에 담겼다. 물론 그 중에 아, 그렇구나 싶은 정도로 받아들인 사람은 정화 이후로 지금의 정치로 인해 이루어진 상황 또한 아, 그렇구나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퍼블리는 아니었다. 아빠는 정화 때 참여한 마법사라는 과거를 가지고 있었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 아빠를 찾기 위해 신성지대를 방문한 퍼블리는 단순히 책으로 인해, 그 정치라는 것 때문에 다짜고짜 감옥에 갇히게 됐고 포위하는 마법사와 철퇴로 위협을 받았으며 처음 보는 바다에서 거의 죽을 뻔 하다가 겨우 목숨을 구하고 썩은 몸으로 땅도 밟지 못한 채 바다에 고립된 아빠처럼 마찬가지로 정화 때 참가했던 마법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받게 됐다. 그런데 이것들을, 갇히고 위협당하고 죽을 뻔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듣게 된 걸 어떻게 정치 그 한 단어로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건 절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왜 정치라는 말로 다 통하는 걸까?”
왜긴? 정치를 다루는 자들의 등을 받쳐주는 머릿수가 많으니까지. 그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저렇게 마녀들을 집착적으로 묶어놓고 있잖아? 정치 때문에 피해 받은 마녀나 마법사들은 그들을 무너뜨리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도움 때문에 피해 받은 자들 보다 더 많은 자들이 난리법석 피우면서 일어나는 거지.”

전서구의 말에 퍼블리는 다시 고개를 깃털로 파묻었다. 전서구가 꽤나 중요한 걸 가르쳐줬지만 거기에 담긴 현실이 워낙 더러우니 기분도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문득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이란 말은 마법은 늘 곁에 존재하고 현실에도 당연히 존재하니 현실보다 더 현실이란 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무엇보다 이 현실을 책상 뒤집는 것처럼 바꾸려면 마녀왕국에 사는 모든 마녀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그 위에서 정치를 다루는 왕궁 마녀를 설득하거나 바꾸는 게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일 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퍼블리가 조용히 눈을 떴다.

어후! 드디어 다 왔네!”
새해가 시작된 겨울에서 떠나고 한창 꽃잎이 날리는 봄에 돌아오게 된 곳.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넓은 땅. 고개를 든 퍼블리가 왕국을 한 눈에 담았고 처음으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왕국은 무척 낯설어보였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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