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저 아래로 쑥 빠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제가 있던 자리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고 텅 비어버렸다. 아직 확신할 순 없었지만 이미 마음은 확신을 내리고 있었다. 저게 이유라고, 더 이상 생각할 게 뭐가 있냐고, 그날 울면서 마법사의 손을 잡고 여기에 오게 된 것도 늘 놀러가던 마을도 못 가게 된 게 바로 저 약새풀 때문이라고.

“...분명 약새풀을 뒷마당에 밭으로 키우는 건 보통 일은 아니지?”
그걸 보통 일이 아니다는 말로 끝날 게 아니지.”
근데 왜 이렇게 허무할까?”
터질까 두려워 그냥 걸을 수도, 발끝을 세워 걸을 수도 없는 풍선으로 된 길이 한순간에 신기루마냥 사라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주변과 침묵은 아무것도 없던 길 위에서 아슬아슬 걷고 있던 모습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퍼블리 자신이 꺼낸 말대로였다. 허무했다.

일단 뭐 확실한 건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히 정황상 확실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굳이 뭐라 덧붙이진 않을게. 그보다는 의외네?”

뭐가?”
안심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말에 퍼블리가 눈을 느리게 두 번 깜빡였다. 만약 왕국 밖으로 떠나기 전이었다면 아니카의 말대로 퍼블리의 입에서 나올 건 허무하다는 말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거나 확신을 내리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불안함에 잠겨 있었을지도 몰랐다. 약간 멋쩍은 얼굴을 하며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를 제 반응들을 상상하던 퍼블리는 약간 편안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허무해.”

뭐 일단 허무한 건 저 뒤로 제껴놓고, 우리 근육이는 이제 다시 현실을 바라봐야지?”
현실이라니?”
학교 어떡할 거야?”
그 말에 퍼블리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선생님들은 이상하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네 얼굴 잘 아는 작년 반 친구들과 제작년 반 친구들과 그 중에서 같은 반 된 친구들이 나한테 꽃과 잎처럼 딱 붙어 다녔던 우리 근육이가 어디로 솟아나고 어디로 꺼졌는지 나한테 짧으면 하루 길면 일주일씩 물어왔단다~”
어투는 높고 밝았지만 그 말과 뜻은 반 친구들에게 둘러싸일 때 변명하는데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에 퍼블리가 울상을 지으며 애절하게 바라봤지만 돌아오는 건 들어주지 않겠다는 웃음소리였다.

뭐라 말해야 돼?!”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게다가 이 정돈 각오한 거잖아?”
학교를 이렇게 길게 빼먹는 것도 확실히 시선을 끌 정도인데 왕국 밖으로 나갔다는 말은 어떻게 하겠는가. 뒷사정을 모르는 둘은 선생들이 묻지 않은 건 확실히 의아한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돌아온 순간을 기다려서 물어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분명 떠나기 전에 각오했을 부분이지만 사실 각오만 했지 막상 닥칠 때는 그 각오도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일단 밖으로 나갔을 때 생각해놨던 건데 역시 꽤 오랫동안 아팠다는 게 제일 괜찮고 그럴듯하겠지?”
아픈 이유가 될 병은 뭔지 생각해뒀고?”
...감기 때문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우리 근육이는 감기를 한 달하고도 그 반을 넘게 앓아누울 정도로 심각하다고 여기고 있었구나~”

알고 있는 온갖 병들을 쥐어짜내고 있었지만 딱히 마땅한 게 없었다. 게다가 아팠다고 하면 아니카가 병문안을 갔을 법한데 그동안 모른다고 잡아뗐던 것도 이상했으니 말이 맞지 않았고 전염성 있는 병이라고 하자니 그랬다면 학교에서 혹시나 방학동안 퍼블리와 접촉한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가 내려왔을 텐데 그런 일도 없었으니 무리였다. 지병이 있었다고 하기엔 퍼블리가 너무나도 쌩쌩하다 못해 비행 마법 없이 날아다닐 정도로 체육적인 면에서 활약한 전적이 화려했다. 결국 아파서 못 나왔다는 이유는 댈 수 없었다.

그럼 방학동안 새로운 마법주문을 연습하다가 실수와 실패로 대머리가 되어버려서 원래대로 다시 돌아오느라 이렇게 늦어버렸다고 하자.”

아니 잠깐! 왜 하필 대머리야?!”

그렇다고 팔다리 날아갔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정신적으로도 충격 받았을 텐데 넌 지금 멀쩡하잖아.”

대머리가 된 것도 충분히 잔인하고 충격 받잖아!”

퍼블리가 질색하며 펄쩍 뛰었지만 결국 그동안 학교를 안 나오는 데에 대한 대답은 대머리로 결정됐다. 가발을 쓰고 나오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 충격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말을 할 수 있었고 아니카도 영문을 모른 채 못 찾아간 이유가 되기엔 충분했다. 퍼블리가 연신 투덜거리며 멀쩡히 잘 있는 제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두건으로 머리를 말아 넣었을 때가 떠올라 더 기분이 묘해지고 가라앉은 덕에 퍼블리의 표정은 썩 좋진 않았다.
일단 이유는 이걸로 됐고 그럼 내일부터 학교로 다시 나올 거야?”
글쎄...”

다시 학교로 가야한다는 말에 퍼블리는 기분이 방금과는 다르게 묘해졌다. 왕국 밖으로 나갔을 때 마을과 마을을 들르며 신성지대로 갔을 때보다도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고 무언가 저 아래에 잠긴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그런데도 결국 끝은 나가기 전과 같이 학교로 가야했다. 마법사가 있을 곳의 단서를 찾기 위해 찾아 나온 여행인데 결과적으로 봤을 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마법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밖으로 나왔던 도중에 마법사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결국 아빠는 못 찾았네.”
손에 쥐고 있는 피리를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퍼블리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니카가 툭 물었다.

후회해?”

아니.”

피리를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이 단호하게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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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 왜 말이 없어?! 갑자기 하늘도 깨지고 얘는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말도 없고!”

불안함이 섞여있는 아니카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퍼블리는 퍼뜩 고개를 떨고는 새하얗게 자리 잡은 약새풀들을 다시 돌아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꽤나 시간이 지났는지 위를 바라보면 파랬던 하늘이 이미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아래를 바라보면 까만 그림자가 꽤나 길어져 있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면 늘 짓던 웃음도 거두고 팔짱을 낀 채 꽤나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니카가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낯설어 퍼블리는 나오다가 그대로 굳어버려 나오다가 어정쩡하게 서게 됐다.

“...대체 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말에 퍼블리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눈에 보이는 건 약새풀밭이고 너무 엄청난 광경에 반쯤 정신이 나가서 충동적으로 공주님 집을 이동마법 판에다가 적어놓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하늘은 깨져있고 제가 있는 곳은 장미정원인 데다가 거기서 집을 발견하고 공주님을 만나서 아빠의 엄청난 과거를 듣게 되고 어쩌다가 피리를 받게 됐는데 다시 정신 차리고 보니 약새풀밭으로 돌아오게 됐다는 걸 과연 어떻게 현실성 있게 얘기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제가 직접 겪어본 일인데도 이렇게 다시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기 뒷마당으로 들어가기 전 비둘기 우체부 둥지에서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엔 아니카가 화나 보인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물론 웃고 있었을 때도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으니 그 때부터 쌓여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웃음까지 내려놓는 경우는 없었다.

퍼블리.”

“...?”
얼른 말해.”
어차피 어떤 식으로 말할까 고민해도 결국엔 말해야한다는 건 바뀌지 않았다. 일단 계속 밖에 서있는 채로 말할 순 없었으니 집으로 들어오게 된 퍼블리는 아니카의 무언의 재촉에 다시 돌아온 데에 대한 감상을 느낄 새도 없이 방금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듣던 아니카는 얘기가 다 끝나고 난 후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 퍼블리는 뭐라도 더 얘기해야하나 싶었지만 더 이상 꺼낼 얘기는 없었다. 완전히 정리 되지 않고 두서없이 겪었던 일들을 꺼냈지만 결국엔 그게 다였고 다시 정리한다 해도 어쩐지 다시 꺼내면 더 꼬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포기했다. 다행인지 이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퍼블리.”

“...?”
이제 뭘 할 거야?”
뭘 할 거야라니...”
바로 대답하려던 퍼블리는 그대로 멈췄다. 당연히 나오려는 대답은 아빠를 찾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가 아빠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마냥 신기하기만 했어.”

신기하다고?”
저런 게 바로 애착이구나 싶었지. 근데

답답한 걸 내보내고 싶었는지 그대로 한숨 한 번 쉬더니 다시 말을 마저 붙이기 시작한다.

아무런 말도 안할뿐더러 소소한 말도 삼가는 상대 때문에 불안감에 휩싸이고 그 애착이 상대한텐 없을까봐, 그걸 넘어서서 너한테 있는 애착이 떼어져 훨훨 날아가 버릴까봐 꽉 붙들기 위해 확신을 찾으려고 해. 이게 지금까지 봐온 네 상태야.”

퍼블리는 직접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으니 조금 뜨끔한 마음이 들었지만 크게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멋쩍음에 웃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웃음으로 넘어가기엔 지금 분위기는 꽤나 가라앉아있어서 가만히 아니카의 뒷말을 기다린다.

그리고 네가 이렇게 아빠를 찾으러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도 참 신기한데...단순히 굉장하다고 감탄으로 그칠 수 없는 일들도 겪어왔잖아. 그리고 뭔가 이렇게 다 눈에 보일 정도로 터지고.”

눈에 다 보일 정도로 터졌다니?”

대답은 창문 너머 깨진 하늘을 가리키는 걸로 충분했다.

저건 나도 몰라!”
네가 때맞춰 왕궁 안으로 들어갔었으니 그거랑 어떤 식으로든 연관은 있을 거야. 물론 저것뿐만 아니라 넌 신성지대에서 감옥으로 끌려갔었고 탈옥도 화려하게 했었잖아.”

그 부분에 대해선 퍼블리도 억울한 게 많았지만 일단 일이 크게 벌어진 건 크게 벌어진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성 측도 퍼블리가 마법사로 보였었는지 왕국에 대해 묻진 않았었다.

물론 네가 일 크게 벌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란 건 알겠지만 너무 큰일들 중심에 네가 있어. 그래서 너무 걱정이야. 아무리 네가 아니라고 해도 사건을 파헤치는 손톱과 일들을 묻어놓으려는 손들은 어떻게든 너를 가리키고 끌어내려고 할 거야. 물론 그렇게 된다면 나도 이젠 가만히 옆에서 보고만 있진 않을 테지만.”
퍼블리가 쥐고 있는 피리를 힐끔 본 아니카는 눈을 꾹 감고 뜰 때 다시 웃음을 끌어올려 달았다.

, 내가 어떻게든 말해도 우리 근육이는 일 저지를 거 아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그보다 아까 뒷마당에 있는 게 약새풀이라고 했었지? 그것도 거의 밭 수준으로?”

재차 물어본 후 퍼블리의 긍정을 확인하듯이 기다린 아니카는 몸을 뒤로 물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냥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고 추측인데. 혹시 우리 마지막으로 GM할아버지네 마을에서 만났었던 날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 조금 가물가물해.”
그 때 우리 엄마랑 만났던 것도?”

, 그건 기억나! 하지만 어떤 모습이셨는지는 잘 기억 안 나.”

그 때 너 가고 나서 나한테 너에 대해 엄청 캐물었었어.”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대로 딱 말하려던 것도 멈춘 퍼블리의 모습에 아니카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일단 난 그냥 다른 데서 사는 친구라고만 얘기했었던 것 같아. 귀찮아서 대충 대답했었던 게 분명했거든. 그리고 내가 그 때 왕국 밖으로 나왔던 건 풀 뜯으러 나온 엄마 졸라서 나오게 된 거라고 얘기했었나? 아무튼 그 날을 잘 잊을 수 없었던 게 엄마가 엄청난 걸 뭉텅이로 뜯어오셨거든.”
뒷말을 듣지 않아도 집안까지 들어온 찬 기운이 답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피리를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 날 처음 보는 옷을 입어보고 마법사가 잡은 손을 따라 조금씩 주저하면서 따라갔던 작은 발. 그 뒤로는 시커멓고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따가운 연기가 작은 등을 때리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마법사가 야속해 울음을 터뜨렸던 아주 어렸던 아이.

바로 약새풀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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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퍼블리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지금도 정신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퍼블리의 속사정을 모르고 엄청난 진실을 꺼낸 메르시는 예전에 자기가 봤던 마법사에 대해 얘기하다가 멍한 얼굴로 굳어있는 퍼블리를 몇 번 부르다가 툭툭 쳐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이유를 모르는 메르시는 그저 의아할 뿐이었고 어찌해야할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퍼블리 언니?”
그렇게 열 번은 더 부르고 다섯 번을 툭툭 쳤을 때쯤에 다시 정신이 돌아온 건지 화들짝 놀라던 퍼블리는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메르시에 하하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퍼블리는 지금 본인 스스로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나쁜 건지 잘 모르는 상태였다. 쉽사리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가 꾹 다물렸다. 충격은 굉장히 크게 다가왔지만 막상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 생각보다 퍼블리의 감정은 차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가만히 물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아마 너무 놀랄만한 얘기를 갑작스럽게 들은 덕에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가 굉장한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하늘의 현자랑 같이 있던 마법사일 줄은 몰랐어.”
“...하늘의 현자?”
컨티뉴님을 그렇게 불러.”
메르시의 표정이 묘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마치 웃음을 터뜨리고는 싶은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표정 관리를 하기엔 누르기 힘들어서 꾹 참는 그런 표정이었다.

..늘의 현자라고 부르는 구나...”
“...그 때는 달랐어요?”
아니...그 때도 현자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마법사긴 했는데...하늘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었구나 싶어서.”
그렇게 완전히 웃음을 억누른 메르시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퍼블리의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다시 피식 웃음이 올라와 결국엔 한마디 꺼낸다.

“GM할아버지랑 제일 잘 맞았고 둘이 좀 닮은 부분이 많아.”
그 말에 바로 납득을 해버렸다. 고개를 끄덕인 퍼블리는 다시 눈앞으로 시선을 둘 수 있게 되자 걱정이 들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느냐가 문제였다.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메르시를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데다가 무엇보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퍼블리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같이 여기서 빠져나가자고 얘기하자 메르시는 옅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퍼블리가 계속 설득했지만 계속해서 거절했다.

“...정말 괜찮겠어?”
왕궁 마녀가 다시 들렀을 때 내가 없다면 곤란해질 거야.”
결국 포기한 건 퍼블리였다. 메르시는 나가지 않는 대신에 퍼블리를 통해 밖의 상황을 볼 수 있는 마법을 걸어도 되냐고 물었고 퍼블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금 민망해하는 얼굴로 나가는 길을 모르겠다며 털어놓았다.

여기서 나갈 때 왕궁의 문이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빙 돌면 내가 몰래 쓰던 길이 있어. 지금은...워낙 샛길이라서 풀 때문에 뒤덮여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쪽 방향이 제일 안 들키는 길이야.”
“...여긴 바로 장미정원 한가운데라서 장미정원 먼저 벗어나는 게 일이야.”

“...장미정원..?”

순식간에 굳은 표정으로 반문하는 메르시의 모습에 움찔 놀라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메르시는 표정을 풀 생각이 없어보였다.

장미정원이라니?”
...정화 때 이후로 세상의 모든 장미들을 모아서 장미정원을 만들고 장미들을 이 정원에서만 필 수 있게 만들었다고 배웠어.”
퍼블리는 여전히 표정은 굳어있었지만 입을 꾹 다물며 아무 말도 안하는 메르시를 조금 불안한 낯으로 살펴봤지만 여전히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 더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메르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메르시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대로 바로 문 밖으로 나가던 메르시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조금 휘청거렸지만 벽을 짚으면서 애써 밖으로 나갔고 퍼블리는 잽싸게 뒤따라 메르시를 부축하려 했지만 메르시는 살짝 밀어내는 걸로 거절했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한차례 쓸고 지나가면서 붉은 물결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진하고 강하게 몰려오는 향 때문에 둘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린다. 아직 꽃봉오리 상태의 장미들이 눈에 들어오자 메르시는 굳은 표정을 풀었지만 대신 자리 잡은 건 복잡한 감정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결국엔 만들었네.”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눈을 감는다. 아마 메르시도 깨져있는 하늘을 봤으리라.

“...언니 혹시 이동마법 쓸 줄 알아?”

아니.”
그걸 쓸 수 있다면 애초에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었다. 선생들도 못쓰거나 쓰기 힘든 마법인데 퍼블리가 과연 쓸 수 있을까? 답은 당연히 아니었다. 꽤나 단호한 대답과 함께 정색하는 얼굴이 제법 현실적이고 재밌게 다가왔는지 작게 웃음을 흘린 메르시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니가 어디서 왔는지 알겠다.”
“...?”
그래서 그 서랍도 열 수 있었던 거겠지. 혹시 그 판 아직도 갖고 있어?”

아니. 여기로 이동할 때 잃어버렸어.”
그 말에 다시 방으로 돌아간 메르시는 다른 서랍을 열고 달그락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꺼낸 건 다름 아닌

피리?”
오빠들이랑 같이 불었던 거야.”

꽤나 손때가 묻은 피리였다. 바로 건네자 얼떨결에 받아든 퍼블리는 의아한 눈으로 메르시를 바라봤다.

느끼고 잘 기억해둬 언니.”
그렇게만 말하고는 메르시가 떨어져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들이 퍼블리에게 쏟아졌다. 깜짝 놀란 퍼블 리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보호했을 때 물처럼 쏟아지던 기운들이 그대로 멈춰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조심스럽게 팔을 내리자 메르시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퍼블리가 서있는 곳이 바뀌었다. 지금 이곳은 메르시의 방이 아니었다. 새하얀 약새풀들이 처음 봤을 때처럼 잔뜩 널려있으면서 냉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저 밖에서 퍼블리를 열심히 불러대는 아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퍼블리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멍한 얼굴로 서있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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