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내린 폭우는 흥건한 땅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지붕을 남겨두고 구름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기를 며칠이 지났을까 폭우에 잠시 물러나있던 더위가 기회를 노리는 것처럼 들이닥쳤다. 급작스런 날씨 변화에 적응 못한 학생들은 교실의 더운 공기를 내보내려고 창문을 열어봤지만 들어오는 건 바깥의 더운 공기와 땅 밑에 숨어 있다가 고개를 내민 날벌레들이었다. 급하게 창문을 닫는 창가자리 학생들 뒤로는 책상에 냉기마법을 걸어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미숙한데다 준비되지 않은 마법이었으니 금방 풀려버리고 말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학생들이 날벌레와 더위에 절규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선생은 수업준비물들을 교탁에 올려놓은 후에 손수건을 꺼내고 땀을 닦아내며 하는 말이

수공을 피하니 열공이 기다리고 있었구나. 열공하라는 계시겠지?”
회심의 말장난이었는지 기대 섞인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봤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방금 풀려버린 18번째 냉기마법보다 더 싸늘했다. 그나마 다시 책상으로 눈을 돌린 학생들의 반응이 나은 편이었다. 그런 반응들에 헛기침을 한 선생은 여전히 차갑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학생 중 하나와 눈을 마주치고 지목하여 오늘 시작할 페이지를 말하라고 한 후 수업준비물들을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각각의 집들에서도 더위를 몰아내기 위해 옷장 깊숙이 넣어뒀던 얇은 옷들을 꺼내고 냉기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준비과정 사이에서 퍼블리네 집은 제일 완벽했다. 애초에 뒷마당에서 흘러나오는 냉기 덕분에 마법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고 급하게 얇은 옷들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다만 퍼블리네 집만 시원하고 밖은 전혀 아니니 퍼블리도 옷장을 열어 외출할 때 입을 얇은 옷들을 꺼내야했다. 아니카도 하교할 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퍼블리네 집으로 갔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가기 일쑤였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냉기를 쐬던 아니카가 문득 말했다.

나 여름 다 갈 때까지 너희 집에서 살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직 완전히 여름도 안 됐는데 이렇게 더운 걸 보면 이번 여름 더위는 장난 아닐 거라는 게 눈에 훤히 보이고 이렇게 여름나기 완벽한 데가 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니?”
어느 부분이?

말은 그렇게 해도 농담이라는 걸 아는 퍼블리는 마찬가지로 농담하는 어투로 집세 들고 오라고 했지만 퍼블리가 없는 동안의 집 관리비를 받아야겠다는 아니카의 농담을 끝으로 농담 대결이 끝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니카가 먼저 꺼냈던 농담이 진담으로 바뀌게 될 줄은 둘 다 몰랐다.

 

올해는 유독 더위가 빨리 오는구나. 이 더위가 계속 갈지 아니면 더 더워질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찬 것만 먹거나 냉기마법을 계속 써대다간 병날 테니 적당히 더위를 받아들이렴.”

그렇게 말하는 선생도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물론 안경에까지 냉기마법을 잔뜩 걸다 못해 쉬이 풀리지 않게 혹은 냉기가 날아가지 않게 다른 마법들까지 부가적으로 걸어놓은 게 굉장했는데 지나가는 마녀 붙잡고 저기 달린 마력이 어느 정도냐고 묻는다면 저러다 눈에 보일 지경이 아닐까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었다.

퍼블리.”
?”
나 진짜 여름동안 너희 집에서 살까 하는데.”

보기 드물게 웃음을 거둔 아니카는 그 표정만으로도 진심이라는 걸 전하고 있었다. 더위가 이 정도에서 유지되는 수준이라고 해도 좀 오래갈 뿐이지 작년이랑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버틸만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만약 더 더워진다면 정말 답이 없었다. 애초에 냉기마법 자체가 무한할 순 없었기에 마력 과부하로 인해 마법이 풀린다면 다시 마법을 제대로 준비할 때까지 재앙이나 다를 바 없는 더위를 지켜주던 냉기 없이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마녀들이 더 이상 더워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물론 퍼블리네 집은 이런 상황에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아니카 진정해, 더위 먹었어.”

아니 난 멀쩡하고 냉기마법도 멀쩡해, 그러니까 더위를 먹은 게 아니라 제정신이야. 진짜 이제 시작하고 많이 남은 여름이 진지하게 걱정돼.”
그렇게 말하며 평소 퍼블리를 부르던 나름대로의 애칭인 근육이도 안 꺼내고 진지하게 설득하는 모습으로 들어갔다. 아니카가 웃음을 거둔 모습은 그럴만한 상황이나 선생 앞에서 종종 있었지만 평소에는 너무나 어색했기 때문에 퍼블리는 그저 손을 모아 말이 전부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었다.

같이 지내면 따로 약속시간 안 잡아도 되고 언제든 같이 놀러나가거나 등교 할 수 있잖아?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지내니까 무슨 일인지 당연히 알게 되고 도움도 빨리 요청할 수 있고 아침에 등교할 때 서로 시간 엇갈릴 일도 없으니 곤란한 일도 적어지고.”
그건 좋긴 한데...그럼 너희 엄마는? 혼자 지내게 되잖아. 애초에 허락을 하실까? 친구네 집이라고 해도 하룻밤 자고 오는 게 아니라 여름내내 지내고 온다고 하는데.”

그 말에 아니카는 묘한 눈으로 퍼블리를 보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다시 납득한 눈으로 돌아왔다.

내년이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졸업하겠지?”

졸업과 동시에 학생이던 우리는 뭐가 될까?”

...성인?”

그럼 성인이 된 학생은 뭘 할까?”

갑자기 스무고개라도 하는 건지 하나씩 물어보는 아니카의 말에 성실히 대답한 퍼블리는 마지막 질문에 고민했다. 퍼블리 자신이라면 마법사를 찾으러 나갈 테지만 성인이 된 학생이라는 말을 봤을 때 그 얘기가 아닐뿐더러 퍼블리보단 질문을 꺼낸 아니카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굳이 나뿐만 아니라 아빠 찾으러 나갈 퍼블리 너 말고 그냥 일반적인 학생들을 생각해봐. 나는 엄마도 말했지만 선생님들이 주구장창 얘기하는 거 있잖아? 성인이 되면

독립할 수 있다는 거.

뒷말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둘 다 같은 말을 할 게 뻔했다. 많이 들어보긴 들어봤지만 퍼블리에게 있어선 독립이라는 말은 꽤나 낯선데다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을 터였다. 생각해보니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성인이었다.

물론 성인이라고 해서 다짜고짜 짐 싸들고 독립할 순 없는 노릇이고 아직 같이 지내고 싶어 하는 엄마나 자식들이 있을 테지만 우리 엄마는 웬만하면 빨리 독립하길 바라는 분이시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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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해도 결국엔 무작정 나갈 거지?”

머쓱함에 피하는 눈길에서 얼핏 보인 고집에 아니카는 꺼낸 말 뒤에 나오려던 한숨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대로 잠시 멈추면서 다시 삼켰다. 한숨을 쉰다고 해서 답답한 게 사라진다면 진즉에 몇 십번은 넘게 쉬었을 한숨이었다.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답답함이었다. 퍼블리는 내심 아니카가 무언가를 참고 있다고 느끼고는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당사자가 직접 꺼내지 않고 오히려 무의식적으로도 나오지 않게 눌러 담으니 섣불리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느껴지기만 할 뿐 그 안에 눌러져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뭘 말해야할지 모르는 상태라는 게 더 적절했다.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자리 잡은 침묵이 조금 식은 차를 홀짝이는 소리를 더 크게 키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나 지났을까 전부 비웠는지 가볍게 탁!하고 소리가 울렸다. 결국 먼저 내려놓는 건 아니카였다.

원래부터 빙빙 돌려가면서 말한 적 없으니 그냥 말할 게. 사실 난 퍼블리 네가 그렇게 열심히 뛰어나가는 게 이해가 안 돼.”
꽤나 꽉 찬 돌직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에게 닿진 못했다. 퍼블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아니카는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이 눈을 반쯤 내려감으며 입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뛰어나가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게 그러니까...일단 나도 처음에 엄마가 사라진다면 여기저기 전단을 돌리거나 수소문을 할 거야. 하지만 왕국 밖으로 나가야한다면...글쎄? 애초에 너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아직 성인이 아닌 나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나갈 수 있어도 실종자들을 전문적으로 찾는 마녀나 어떻게든 왕궁 마녀한테 찾아갈 것 같아. 물론 너희 아빠도 특수한 경우라 주위의 다른 마녀한테 섣불리 부탁할 수 없는 거 알아 하지만.”

숨을 고른 아니카는 웃는 얼굴을 완전히 내려놓고 말했다.

넌 평생 너희 아빠를 찾으러 다닐 거야?”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퍼블리의 표정이 멍해졌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난 아마 처음 한 번 찾으러 나간 후엔 직접 나서는 건 포기할 거야. 다른 마녀에게 계속 찾아달라고 부탁은 하겠지만 내가 직접 저 넓은 밖을 돌아다니진 않겠지. 분명 슬프고 그립고 찾고 싶겠지만 그것들과 기약 없는 소식에 비례해서 갈수록 지칠 테니까. 더군다나 엄마가 나한테 차지하는 부분이 분명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렇다고 전부는 아니니까.”

거기까지 말한 아니카는 입을 다물었다. 얘기를 다 들은 퍼블리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끝이 시커먼 두려움이 끝도 없이 몰려와 제멋대로 속을 아프도록 채우고 휘저으며 그에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생각은 두려움에 휩쓸려 여기저기 아프게 부딪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숨을 멈추더니 그와 동시에 떨림이 멎었다. 눈을 감은 퍼블리는 고개를 푹 숙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동시에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여전히 두려움은 밖으로 쏟아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가득 차 있었지만 잔잔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곳에서 올라온 생각은 그 모든 걸 바로 발밑에 두고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 끝은 시커멓고 보이지 않았으며 발을 적시고 있었지만 다시 빠지진 않았다.

“...평생이라고 장담할 순 없겠지만 지치지 않는 이상, 아니 지쳐도 계속 찾아다닐 거야.”
?”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의문이었지만 정말로 궁금했는지 물리려는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니카는 잔잔함에 잠시 몸을 맡긴 퍼블리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몇 번 눈을 깜빡인 퍼블리가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제자리로 올라왔다.

내 전부건 많은 부분을 차지하건 간에 결국 슬프고 그립고 찾고 싶고 막연히 두려운 걸 끝내려면 직접 아빠를 찾아야하고 아빠한테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그렇게 대답한 퍼블리는 그 어느 때보다 편하고 단단하게 보였다.

대답을 들은 아니카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다시 웃음을 올렸다. 이해고 뭐고 간에 저 높은 장대 위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장대만 겨우 잡아 울상 짓는 것처럼 보이던 제 친구가 이제야 편해 보이는 모습에 저 또한 답답한 게 가셔 편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니카는 들고 왔던 축축한 우산을 들고 신발을 신으며 내일 학교에서 보자며 인사하고는 문을 열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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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마법사가 없는 집에서 시작되는 일상은 떠나기 전부터 그랬듯이 퍼블리에겐 싸늘했지만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시간이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둥글게 다듬어 그에 맞춰 익숙해지게 만든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퍼블리가 빨리 혼자인 상황에 적응된 데에는 학교에서 벌어졌던 일들 때문이었다. 퍼블리는 여러 번 생각해본 결과 역시 대머리는 아닌 것 같다고 학교 가기 전날 다시 한 번 극렬히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여러모로 쌓인 게 많아보이던 아니카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물론 아니카가 지나가는 학생들 마다 일일이 붙잡아서 얘기한 건 아니었다. 맨 처음 퍼블리에게 다가와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며 걱정 조금 호기심 대부분을 담아 물어보러온 애들에게 딱 한 번 말했을 뿐이다. 물론 한 번이든 여러 번이든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한 번 말하나 여러 번 말하나 그게 그거였을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 번만 말하니 당사자의 입에서 떠나 들은 자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내용은 눈 내린 언덕 끄트머리에서 굴려진 구슬처럼 원래보다 점점 더 한 내용으로 부풀려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황당했던 건 머리카락이 자아를 가지게 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머리로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이걸 들은 아니카는 그 날 학교에서는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헤어지고 난 후에도 계속 웃어댔다. 저 갈림길 골목 너머에서 계속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퍼블리는 기분이 굉장히 상했지만 그 웃음으로 깔끔하게 쌓인 것들을 비운 듯 한 아니카의 모습을 위안삼기로 했다. 그 쌓인 것들이 폭발한 아니카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되지 않을뿐더러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보통 재앙이 아닐 거라는 걸 깊게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위로 몸을 내려놓던 퍼블리는 그대로 잠이 들었고 소문이 사그라들 때까지 집에 오자마자 자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잠잠해질 때 쯤 여느 때처럼 침대 위로 바로 눕던 퍼블리는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나더니 유리병이나 피리를 꼭 쥐거나 어떤 때는 여전히 냉기를 뿜어대는 뒷마당으로 뛰어갔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한 후엔 다시 침대에 누워 잠들지도 않은 채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끝까지 덮기도 했다.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무언가 낌새를 느낀 건지 작년 가을처럼 자주 왔던 아니카가 아무 말 않고 기다리거나 돌아가며 조금씩 혼자 있을 시간을 늘려주고 있었다.

그런 아니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배려하면서도 왕국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묻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던 퍼블리였지만 직접 물어볼까 아니면 자신도 마찬가지로 물어보지 않아야할까 고민으로 놓인 줄다리가 묻지 않는다는 쪽으로 기울일 때까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새 햇빛이 녹빛 짙은 풀을 끌어당겨 올리고 땅을 조금씩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왜 벌써 더워지려고 하는 거야?”
작년보다 빠른 게 올해는 엄청 더우려나 본데?”

더위가 금방 다가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어제 오늘 연속으로 내리고 있는 폭우로 잠시 주춤하고 있었다. 창가에서 폭포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거센 빗줄기들을 보고 있던 퍼블리는 문득 저러다가 약새풀들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잽싸게 천들을 모아 끌어안고 뒷마당으로 뛰어갔지만 약새풀들은 거센 빗줄기에 조금 땅과 가깝게 눕혀진 거 외엔 꺾인 데도 하나 없이 멀쩡했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발자국 하나 없는 눈 밭 위로 비가 쏟아지는 광경처럼 보여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서있던 퍼블리는 몸이 으슬으슬 떨릴 쯤에 정신을 차리고 젖은 천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의외고 다행이라는 점은 비가 내리고 냉기까지 감돌고 있어 꽤나 추웠던 곳에서 쫄딱 젖은 채로 한참 있었는데도 감기는 물론 열도 나지 않았단 거고 피해갈 수 없었던 불행은 젖은 옷과 천들을 빨아야 했고 빨아도 비 때문에 말릴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조금 울상을 지으며 축축해지는 바닥을 보고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 의아해할 필요도 없이 퍼블리 혼자 있는 집에 찾아 올 자는 역시 아니카 뿐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어떻게 왔어?”

요령껏 왔지. 사실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온통 젖은 우산과 신발의 물기를 털어내다가 젖은 천들과 함께 한구석으로 밀어 넣고 부엌으로 향한 둘은 찻잎을 컵에 담으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더워질 줄 알았는데 비가 먼저 내리네.”

저거 하늘 깨진 거랑 관련 있는 거 아냐? 어딘가가 아예 구멍이 뻥 뚫려있을지 몰라.”

그에 설마 그럴 리가 있냐며 웃던 퍼블리는 부글부글 끓으며 하얀 김을 올리는 물을 컵에 부었다.

풀들은 멀쩡해?”
보러나간 거 어떻게 알았어?”
컵을 받아든 아니카는 말없이 제 우산과 신발 옆에 뭉쳐놓은 천들을 힐끗 쳐다봤다. 멋쩍게 웃던 퍼블리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어떡할지 생각해 봤어?”
?”
너 이제 올해면 학교도 완전 졸업이고 내년이면 어른이니 수업 다 끝난 겨울 때 아빠 찾을 때까지 무작정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지?”
그에 퍼블리는 시선을 피하고 침묵과 어색한 미소로 대신 답했다.

우리 근육이...밖에서 많은 걸 알아왔으면서 정작 배운 건 없구나~?”
호호 웃는 소리와 함께 나오는 독설에 퍼블리의 시선은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굉장히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더 이상 아는 게 없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이대로 계속 집에서 혼자 지낼 수도 없고 마냥 기다리거나 포기하고 싶지도 않으니 유일하면서도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물론 이걸 입 밖으로 꺼내봤자 날아오는 건 앞선 독설의 연장선일 테니 꺼내지 않았다.

이제 단서가 전혀 없다시피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무작정인데다가 막연하다고 생각되지 않니?”
하지만 이거 외엔 방법이 없는 걸?”

다시 공주님을 찾아가보는 건?”

이동마법판은 그 때 처음 쓴 이후로는 바로 사라졌어. 게다가 찾아간다 해도...공주님이 아빠가 어디로 사라졌을지 알 리가 없잖아.”
공주에 대해 얘기하자 퍼블리는 순간적으로 피리가 떠올랐지만 딱히 피리에 특별해보이는 건 없었고 불어봐도 그저 평범한 피리였다.

그래도 너 그렇게 무작정 나가는 건 진짜 아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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