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카의 말에 퍼블리는 순간 숨을 멈췄다.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기도 하고 이렇게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귀를 통해 직접 듣는 것도 새삼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런 짓을 한 마녀들이 잘못한 거지 그 결과로 태어난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아니카는 여전히 달고 다니는 웃음을 내리지 않는 걸 보면 퍼블리와는 반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데에 확신을 가까이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퍼블리가 의아해 하며 물어보니

장미정원을 만들 때 왕국의 모든 마녀들이 장미를 모으는데 동참했거든. 그 때 우리 엄마도 당연히 참여했었고 장미 찾아다니느라 눈알 빠지고 허리 휘는 줄 알았다며 그 때 생각만 하면 아득해진다고 엄청 뭐라 그러시더라.”
요컨대 장미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면 반대와 비난은 꾸준히 받아도 밀어붙였을 거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장미를 모은다는 얘기도 나중으로 미뤄져서 지금의 장미정원이 없었을 거라고 덧붙이자 퍼블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장미는 이제 정원에서만 피어나니까 장미를 만들 이유는 더 이상 없기도 하지.”
그러니까 몸 편한 게 짱이라고?”
그렇지.”
이제 금방금방 이해하는 게 기특하다며 쓰다듬는 손길에 퍼블리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아니카를 바라봤지만 손은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퍼블리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그 때 종이에 써져있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자연발생하는 장미를 전부 모으는 건 어렵기 때문에 장미를 만들어 장미정원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일단 그런 종이가 있었던 걸 보면 연구는 진행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결국엔 자연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알아내고 대신해서 장미가 피어날 환경을 준비하기로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 지금의 장미정원이다.

그럼 왜 그 계획이 적힌 종이가 공주 즉 메르시의 책상 서랍 안에 있었던 걸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쓰다듬던 손으로 손가락을 딱딱 튕기는 아니카를 바라보던 퍼블리가 문득 말했다.

나 예전보다 생각을 엄청 많이 하게 됐어.”
그래.”
근데 이상하게 더 이상 안 나가는 경우가 많아.”
그건 아직 네가 몰라서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퍼블리는 조금 울고 싶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 모르는 걸 알고 싶어서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는 중인데 그것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한다니.

일단 네 머릿속에서 굉장한 음모론이 펼쳐지고 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일단 확실한 건...”
아니카는 이젠 좀 진짜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뭘 해도 비밀은 사라진 마법사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퍼블리의 출생의 비밀부터 약새풀까지. 무언가 감춰져있던 비밀이 터지면 모든 진실은 마법사가 감추고 있었고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바로 제 자식인 퍼블리한테까지. 자식의 친구이자 좀 멀게 따지자면 생판 남인 아니카까지도 이쯤 되면 궁금해 미칠 지경에 도달했다.

너희 아빠는 진짜 세상의 모든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근육이 진짜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네, 마음고생 많았어~ 근데 지금도 마음고생을 하고 앞으로도 고생길 훤한 걸 보면 내가 다 마음이 아파~”
그렇게 말하곤 아예 팔을 어깨에 두르며 끌어안을 듯 했던 아니카는 이내 덥다고 하며 바로 떨어졌다. 그런 아니카 덕분에 작게 웃음이 터진 퍼블리는 밀려드는 생각들을 덮어뒀다.

일단 학교를 졸업하면 아빠를 꼭 찾으러 나갈 거니까 이번 축제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 없이 너랑 즐길게. 요즘 너무 나 혼자 생각이랑 고민만 하고 있었으니까 많이 미안했어.”

나는 우리 근육이가 성장한 것 같아서 기뻤는데? 근데 우리 축제 생각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날 퍼블리와 아니카는 아니카의 어머니에게 강화마법을 부탁하러 갈까 아님 약새풀을 캐서 옷에 넣고 다닐까 해가 질 때까지 함께 고민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천천히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던 축제는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작년 축제 때 보존마법을 걸어놓은 빵은 우스갯소리로 내년 축제 때까지 남아있을 양이라고 말했었지만 이번 여름 때까지 한 바구니는 더 남아서 진짜가 되어버릴 뻔했다. 왕국 밖으로 나갈 때 조금 챙겨간 거 외엔 전부 다 그대로 두고 왔었던 데다 생각보다 오래 집을 비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마법사의 보존 마법이었다.

어쩐지 아깝네~ 진짜 1년 찍는 건가 궁금했는데.”
이번 여름에 같이 살게 된 아니카 덕분에 빵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빨라졌고 축제 첫째 날 3주 전에 바구니의 안쪽 끝을 보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천천히 먹어서 1년 채워볼 걸 그랬나?”

그러면 난 첫째 날을 안 즐겼을 거야...”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말하지만 퍼블리는 알고 있었다. 말 속에 아쉬움이 담겨있고 아쉬움 속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걸. 가늘게 뜬 퍼블리의 눈을 마주하는 아니카의 웃음은 매우 당당했다.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기는 자는 당당한 자였다.

축제 첫째 날은 언제나 그랬듯이 갓 구운 빵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마녀들 손에 잔뜩 들려있는 건 물론이고 빵으로 예술을 펼치는 자들도 걷다보면 계속 보일 정도였다.

저기 익숙한 비둘기네.”
마녀 하나는 거뜬히 태울 정도로 커다란 비둘기. 끝끝내 태우길 거부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퍼블리를 태우고 왕국으로 돌아왔던 전서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반가움에 손을 흔들며 전서구를 불렀지만 듣지 못했는지 빠르게 날아가는 모습에 머쓱해진 퍼블리는 손을 도로 내렸다.

작년에는 축제를 즐기더니 올해는 축제 때에도 바쁜가봐?”

그러게...”
손가락 하나로 가려질 만큼 멀리 날아간 전서구를 보던 퍼블리는 지나가던 마녀가 자신과 어깨를 부딪히는 걸 보고 길을 막고 있었구나 싶어 아니카와 함께 옆으로 비켜나려고 고개를 다시 돌리다가 길 건너편의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튀어나온 갈색 앞머리가 인상적인 어린 마녀.

메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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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카. 장미를 만든다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아니카는 이상한 걸 들었다는 얼굴로 퍼블리를 쳐다봤다.
어떻게 생각하고 뭐고를 떠나 그건 불가능한 거 아냐? 장미들은 자연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고 그나마 피어날 환경을 만든 게 바로 그 유명한 장미정원이잖아.”
그러니까 만약에 만들 수 있다면?”

퍼블 리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챘는지 아니카는 눈을 마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려는 건지 신중한 표정을 한 채 느릿하게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같은 반 학생들의 얘기소리가 한층 더 소란스러웠을 즈음에 입을 열었다.

, 너희들 성적표 다 받았지? 망한 애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울고불고 하지 말고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은 축제나 준비하고 있어라.”

공교롭게도 그 순간 저 말과 함께 들어온 선생에 의해 대답은 나오지도 못했다. 아니카는 다음에 얘기하자며 몸을 앞으로 돌렸고 다음 쉬는 시간에는 선생의 수업을 빙자한 축제 얘기 때문에 까먹었는지 나온 말은 축제의 식물부에 관한 얘기였다.

얘네는 어째 해가 갈수록 기술이 늘어?”
이쯤 되면 왕국 기관에서 기술 연구하는 마녀들이 학생으로 위장한 거 아닐까?”
작년에 꽤나 여러모로 큰 파급을 가져다 준 식물부였다. 물론 가져다 준 당사자들에게 있어선 직접 가서 말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학생들은 내심 식물부 애들이 빨리 홍보를 하러 왔으면 하는 마음에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새삼스러운 소리지만 식물부 정말 인기 많네.”

인기야 늘 많았지.”
축제는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매일 새로운 걸 맞이하는 듯 한결같이 떠들썩한 반응이었다. 벌써부터 땅따먹기 신경전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학년이 올라가며 선도부에서 나온 아니카는 이제 제가 정리할 일 아니라고 숲 너머 모래바람 구경하듯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보고 있던 퍼블리는 말려야할까 말아야할까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런 일들을 이미 예상했는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능숙하게 사태를 해결하는 선도부의 모습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올해 축제는 왠지 별로 기대가 안 돼.”
그 전부터도 넌 축제 자체는 별로 기대 안했었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들어올 때마다 성적 얘기를 하는 선생들을 몇 번 주목하고 나니 어느새 모든 수업이 끝나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학교를 나가기 전에 점심시간 때보다 햇빛이 더 환하게 내리쬐는 운동장을 보니 새삼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라고 생각한 퍼블리와 아니카는 그늘이 있는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운동장 끄트머리에 짙은 흙 위로 나무들이 일렬로 심어져 있었지만 그쪽으로 가면 운동장을 빙 돌아서 가야했다. 그렇게 운동장 한가운데와 나무그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하던 둘은 그냥 평소대로 한가운데를 쭉 가로지르기로 했다. 아무리 그늘이 있는 곳이라고 해도 빙 돌아가는 건 역시 귀찮은 일이었다.

“...날씨가 정말 재앙인데?”
문제는 아직 시작이라는 거.”
하하 정말 살기 싫어지는 걸?”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학생들 몇몇은 결국 그늘이 있는 데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벌써 더위를 먹었는지 점점 헛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학생 무리들 사이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중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햇빛 아래 더위에서 떠들다간 금세 지쳐버릴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도중 드디어 집이 눈에 들어오자 둘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집에 가까이 가자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냉기가 둘을 반겼다.

으아, ! 으아, 사랑!”

저 하늘의 유리벽이 여기 더위를 가두는 게 틀림없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둘은 몰아치는 시원함에 무릎을 꿇었다. 냉기마법을 건 옷들이 다 소용이 없었다. 지금 둘에겐 시원함 그 자체인 집이 최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날씨가 이렇게 더운 건 이상해...이건 왕국이 망할 징조야.”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니카였지만 어차피 들을 마녀는 옆에 있는 퍼블리 밖에 없으니 거침없었다. 평소라면 난감한 표정을 짓거나 말렸을 퍼블리는 듣는 둥 마는 둥 바닥에 드러누워 시원함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 이성을 빨리 되찾았는지 일어나서 방에 가방을 던져두던 아니카는 손을 씻은 후 부엌으로 가 익숙하게 얼음을 동동 띄운 물통을 꺼내 컵 두 개를 담갔다가 건져올렸다. 그리곤 아직까지 현관문 바로 앞바닥에 엎어져있는 퍼블리에게 컵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얼른 일어나서 손 씻어.”
그 전에 나 물 좀...”
씻은 다음에 줄 거야.”
그 말에 퍼블리는 냉큼 일어나 가방을 두고 손을 씻으러 갔다. 그 김에 세수도 했는지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얼굴과 머리카락을 넘기며 나오던 퍼블리는 아니카가 건네는 컵을 받아들었다.

강화마법 할 줄 알아?”
할 줄 알았으면 오는 중에 진작 했을 거야.”

그럼 너희 어머니한테 부탁하러 가야겠다.”

가는 도중이 많이 괴롭겠지.”
냉기마법 강화에 대해 말하던 둘은 순식간에 컵을 다 비우고 부엌으로 가서 다시 물을 떠서 마셨다. 이제 제법 많이 여유를 되찾은 둘은 의자를 당겨 끌은 후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았다. 얼음을 와드득 씹어 먹던 아니카는 새가 하늘을 날아간다는 걸 말하는 어투로 먼저 말을 꺼낸다.

그래서 넌 만들어진 장미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
어쩐지 확신이 담겨있는 표정과 유리병의 파란 장미꽃잎을 떠올린 아니카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네가 확신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입 안에 남은 얼음조각들을 마저 씹어 넘긴 아니카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퍼블리와 눈을 마주했다.

만들려고 하는 자는 물론이고 그런 걸 생각한 자들도 비난을 피할 순 없겠지. 만들기 위해선 멀쩡히 있는 장미를 파헤쳐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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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직 머리가 어지러운지 다시 누운 마법사는 고개만 돌려 아직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여기 있는 모든 걸 부수고 밖으로 나갈까 싶었지만 힘이 쭉 빠진 몸이 바로 붙잡는다. 이곳에 갇힌 이후론 이젠 있었나 싶을 충동이 잠들었다 깨어나는 새에 점점 더 올라와 마법사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중간에 정신이라도 잃었나 싶었지만 들어오는 햇빛은 아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왔나?”

저를 경계하긴 하지만 듣는 욕은 역시 괴롭죠.”

대답을 듣고 마법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부탁한 입장에서 할 말 치곤 이상하지만 괜찮으신가요?”
자네 말대로 이상한 말이군. 나쁘지 않은 부탁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나?”

가야할 곳이 괜찮지 않은 곳이니까요.”

다시 눈을 떠서 바라보니 굳어있는 순박한 얼굴이 바로 들어왔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어차피 다시 가봤어야 했던 곳이네.”
“...당신은 참...대단하네요.”
감탄과 걱정 등 여러 가지 감정이 가득 섞인 말을 들었을 때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진짜 대단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끝냈겠지.”

터무니없는 자책 아닌 자책에 아난타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 때문에 찾아온 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쓸 여유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겹치네요.”
그럼 하루 당기지. 그리고...”
마법사가 오른손을 쥔 채 내밀자 아난타는 두 손을 모아 폈다. 마법사가 손을 놓자 둥글고 매끄러운 감촉이 굴러다닌다.

퍼블리에게 전해주게.”
놓았던 손이 물러가니 무지개 구슬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다양한 일들을 겪고 생각이 넓어지거나 강해지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학교의 시험은 그저 공부가 답이었다. 아무리 퍼블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다양한 일들을 겪고 이겨내서 돌아와도 그건 학교 시험을 대비해 공부를 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나빴던 성적 위로 빠진 수업에다 심란했던 마음까지 더하니 역대 최악의 결과가 퍼블리 앞으로 도착했다.

그래 우리 근육이~ 지금 어떤 심정이니?”
“...지금 내 손의 성적표가 대신 나타내주고 있어.”
마녀의 심정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잖니?”
하지만 성적표는 가능하지.”
내용은 슬프지만 가볍게 얘기하니 조금은 무거움을 덜은 퍼블리는 울면서 자유와 축제를 외치는 같은 반 학생들을 구경했다.

이제 축제가 진짜 얼마 안 남았네...”
그러게.”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그러게.”
그렇게 말하니 겨울과 봄에 있었던 일들이 실은 다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시끄럽고 재잘대는 커다란 비둘기를 만난 것도, 신성지대 감옥에 갇혔었던 것도, 몸이 썩어가지만 유쾌했던 흑기사단을 만난 것도, 장미정원의 작은 집에서 잠들어있던 공주 메르시를 만난 것도 전부 다 꿈이 아니었을까. 1년도 안 지난 일들이 1년이 다 되어가는 일보다 더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익숙해지기 싫었는데 익숙해졌나봐.”
그럴 땐 성적표를 봐.”
확실히 성적표에 적혀있는 결과는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어쩐지 다른 이유로 슬퍼진 퍼블리는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이번엔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공주님은 어찌하실까~?”

어찌하다니? ?”
이번 축제 말야. 하늘 깨진 그 날에 네 얘기 들어보니 공주님은 계속 잠들어 있었고 나는 물론 여기 왕국 살던 마녀들 머리가 좀 이상했다는 것도 일단 나랑 너는 다 알게 됐어. 그러면 이거 그동안 공주님 자고 있었을 왕국 안쪽 상황이 너무 뻔하지 않니?”
그래도 메르...공주님 편이 있을...”

퍼블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니카는 박수를 쳐서 순서를 가로챘다.

공주님이 잠든 게 단순히 1, 2년이 지난 게 아니야.”
자신들은 물론 여기 젊은 선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잠들었을 공주. 굳이 꽁꽁 싸맨 안쪽상황을 파헤쳐보지 않아도 아직까지 땅을 밟지 못한 채 배 위에서 잠든 공주를 생각하는 흑기사단이 모든 걸 보여주고 있었다

솔직히 나같으면 깨어난 후에 적절한 순간 노려서 왕국 밖으로 뛰쳐나갔을 거야.”

금 갔던 하늘은 하루가 지날수록 지우개로 검은 선들을 조금씩 지우듯이 사라지고 결국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깨끗해졌다. 그걸 발견한 아니카와 퍼블리는 같은 반 학생들을 붙잡고 몇십 년 째 어른도 왕도 되지 않는 공주에 대해 물어봤지만 그들은 이상한 점을 눈치 못 채고 축제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역시 빨리 주변에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랬다면 왕궁 마녀들이 우리 얼굴 보러 왔겠지.”

결국 지금 알 수 있는 건 언제 하늘에 박혀있었는지 모를 투명한 결계랑 모순투성이 이야기와 잠들어 있던 공주가 관계되어있다는 거였고 결계가 다시 돌아간 걸 보면 최소한 공주는 깨어난 후에 왕국 밖을 떠나지 않았거나

공주님 너 가자마자 다시 잠들었을지도 몰라.”

“...나 무슨 숨겨진 힘 같은 거 있는 걸까?”
숨겨진 출생의 비밀은 확실히 있잖니?”
파란 장미 꽃잎. 거기에서 태어난 퍼블리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안아들어 키웠을 마법사. 결국엔 원점이었다.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마법사에 아니카도 조금 질린 기색을 느꼈다. 눈에 띌 건 다 갖추고 있는 자인데 정작 뿌린 건 끝이 안 보이는 비밀이다.

자신의 장미를 떠올리던 퍼블리는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깨어난 메르시와 대화하기 전에 서랍에서 꺼냈던 종이뭉치.

“...장미 개발 계획.”

뭉치고 엉킨 실타래를 통째로 쥔 느낌이 들었다.

Posted by 메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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